극장전

죄의식과 인류의 기원: 홍상수《밤과 낮》

엔디 2008. 3. 15. 21:56

홍상수의 영화는 '리얼'하다; 이창동의 영화가 현실의 비루함을 드러내면서도 일말의 희망을 간직한 것과는 달리 홍상수의 영화는 습기 가득찬 현실을 그대로 비춰줄 뿐이다. 그러므로 시작할 때부터 마지막 엔딩 크레딧이 다 올라갈 때까지 영화는 한 발자국도 더 나아가지 않는다. 이것은 그가 가진 한 중요한 장점이다. 우리는 현실에 단단히 뿌리를 박은 그의 영화를 보면서, 현재 습도를 정확하게 잴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짧은 글에서 우리는 최근작인 《밤과 낮》의 한 주제thème를 이루는 죄의식에 대해 살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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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인류의 기원L'origine du monde'이라는 그림이 있다. 19세기 사실주의 화가 귀스따브 꾸르베Gustave Courbet는 얼굴을 가린 한 여성의 하체를 그리고 '인류의 기원'이라는 제목을 붙여놓았다. 이 그림을 보고 《밤과 낮》에 등장하는 한 남자와 한 여자는 대략 이런 대화를 나눈다:

성남 "좀 이상하지 않아요?"
현주 "인류의 기원을 그린 그림인데 뭐가 이상해요?"
성남 "그건 그렇지만......"
현주 "예술인데 경건한 마음이 들어야 하는 거 아니에요?"
성남 "그렇긴 한데, 좀 이상하지 않아요?"

'인류의 기원'이라는 그림은 두 가지 면에서 성스럽다. 먼저는 인류를 잉태한 여성을 그리고 있기 때문이고, 다음으로는 그것이 하나의 예술 작품이라는 점에서 그렇다. 하지만, 그 그림을 대하는 사람은 알 수 없는 죄의식을 느끼게 마련이다. 그것은 아름답고 성스러운 것을 보고 죄의식을 느낄 수밖에 없는 인간의 현상황을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Gustave Coubet, L'origine du monde, 1866, Huile sur toile, 55cm x 46cm, Musée d'Orsay

굴을 먹으며 유정을 발을 보는 성남(꿈). 밤과 낮.
그런 상황은 다시 모든 모든 인간이 죄 속에서 태어났다는 점을 우리에게 상기시킨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에서 우리가 모두 아담 안에서 죄를 지었다는 것을 밝혀주지만, 홍상수는 그런 원죄 이외에도 우리 스스로가 죄에 약하고 민감한 존재라는 것을 그림 한 장으로 보여준다. 성스럽고 아름다운 대상을 두고 죄의식에 빠지고야 마는 존재가 인간이기 때문이다.

성남에게 꾸르베의 그림은 구체적인 죄악의 예고이기도 했다: 성남은 현주의 룸메이트인 유정의 발을 보고 참 예쁘다고 생각한다. 그의 발에 입을 맞추는 꿈을 꾸기도 한다. 화면으로만 보면 유정의 두 발을 잡는 카메라의 구도는 꾸르베의 그림과 닮아 있다. 이것은 성남이 느낄 죄의식의 표상이다. 이후 성남이 유정과 헤어지면서 유정이 임신 가능성을 언급하자, 성남은 '사랑한다'는 말 대신 '모두 내 탓이다'라고 말한다. 성남에게 유정과의 관계는 사랑의 관계가 아니라 죄악의 관계였다.

사실 영화 《밤과 낮》은 죄에 관해 무척 많이 말하고 있다. 먼저 성남이 한국에서 프랑스 빠리로 도피하게 된 것부터가 호기심에 단 한 번 손댔던 대마초 때문이었다. 겁이 많은 성남은 함께 있었던 누군가가 자백했다는 소리를 듣고 바로 빠리행 비행기에 몸을 실은 것이다. 이것이 영화의 시작이다.

옛 애인 민선을 우연히 만난 성남. 밤과 낮.
빠리에서 생활한 지 얼마 안 되어 옛 애인 민선을 만난 성남은 그가 결혼했으며 오늘 자기를 만나러 나온다고 프랑스인 남편에게 이야기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벌벌 떤다. 잠자리를 함께 하자는 민선의 유혹에 그는 짐짓 산상수훈의 일절을 인용하며 민선을 설득한다(마 5:29-30):

오른눈이 죄를 짓게 하거든 그 눈을 빼어 던져버려라. 몸의 한 부분을 잃는 것이 온몸이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낫다. 또 오른손이 죄를 짓게 하거든 그 손을 찍어 던져버려라. 몸의 한 부분을 잃는 것이 온몸이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낫다.

한편, 우연히 참석하게 된 파티에서 평양에서 왔다는 사람을 만난 성남은 깜짝 놀라 소리를 지르고 자리를 뜬다. 돌아오면서 그는 생각한다: '큰일났다. 북한 사람을 만났다. 자수해야 하나? 대사관에 신고해야 하나?'

영화에서 성남의 죄의식은 이를테면 겁쟁이의 죄의식이라고 볼 수 있다. 그는 죄악 그 자체를 미워한다기보다는 그 죄로 인해서 자기가 지게 될 멍에를 두려워한다; 경찰을 두려워하며, 옛 애인의 남편을 두려워하고, 또 북한 사람과 접촉해서 자신에게 닥칠지도 모를 불행을 두려워한다. 얼마 후, 민선의 죽음을 계기로 그는 자신이 바라는 것을 명확하게 인식하게 된다. 그는 민박집 주인을 붙잡고 "내가 죄인이에요."라며 오래 운다.

성당에 가서 기도하다 잠든 성남. 밤과 낮.
홍상수는 죄 가운데 있는 사람이 간절히 소망하는 것은 구원이라는 점을 명확히 한다. 비록 성남이 느끼는 죄의식이 초보적인 수준에 머물러 있다고 해도 그가 구원을 바란다는 점은 변함이 없다. 이것이 인류의 근본적인 속성이다. 종교사학자 엘리아데는 『성聖과 속俗Das Heilige und das Profane』에서 고대인들에 비해 비종교적인 것으로 보이는 현대인들도 여전히 성스럽고자 하는 무의식적 욕망과 의식ritual을 갖고 있다고 말한다. 현대인들도 여전히 구원을 바란다.

그러나 성남의 구원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영화에서는 엉뚱하게도 성남의 빠리 도피가 아내의 거짓말로 끝난다. 그는 집으로 돌아와 아내를 끌어안고 침실에 들지만, 빠리에는 어쩌면 아이를 가졌을지도 모르는 유정이 남아 있고, 꿈에서는 자신이 또다른 누군가와 재혼해 있다. 영화는 돌아옴이 진정한 구원이 아님을 말하고 있다. 그렇다면 성남의 진정한 구원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어디에서 올 수 있을까. 우리는 모두 그 답을 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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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토벤 교향곡 7번 2악장 알레그레토 (지휘: 빌헬름 푸르트뱅글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