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장전

착한 아마데우스의 엄마 찾아 삼만 리: K. Sheridan《어거스트 러시》

엔디 2007. 12. 12. 18:11
1. 천재 이야기

나는 천재 이야기를 신뢰하지 않는다. 매번 대선에 출마하는 누군가가 "IQ 430인 나의 공약은 보통의 머리로는 이해하지 못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천재가 만약에 있다고 해도 그의 이야기는 우리가 이해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즉, 천재는 우리 같은 범인凡人에게 '이해의 대상'이 아니라 '신앙의 대상'일 뿐이다. 가령 살리에리가 정말 모차르트보다 더 많은 노력을 했는지 어떤지에 대해서 우리는 알 수 없다. 아인슈타인이 도서관에서 얼마나 긴 시간을 보냈는지 우리는 알 수 없다. 그러나 동시에 범인들은 늘 천재 이야기에 열광하고 그 이야기를 가슴 깊이 믿는다. 그럼으로써 자기의 현재 상황에 대해 자신에게 면죄부를 주려고 하는 것일까.

어거스트 러시 포스터
사람들이 좋아하는 천재는 아인슈타인과 같은 이미지의 천재가 아니라, 모차르트나 랭보와 같은 이미지의 천재를 좋아한다: 즉 신동 말이다. 사람들은 그들의 외모에 대해서도 열광한다. 특히 미소년 랭보의 모습은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와 겹쳐져서인지 상당한 호감을 갖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광고계에서 3B라고 하면 미인Beauty, 아기Baby, 동물Beast이라고 하는데, 이런 미소년 신동들은 아름다운 아기beautiful baby라고 할 수 있을는지 모른다.

그러면서 그들이 보이는 기행奇行에 대해서는 은근히 반감을 갖기도 한다. 모차르트의 기행이나 랭보의 동성애는 두고두고 사람들에게 손가락질을 받기도 하는 것 같다. 그런 기행을 극단적으로 밀고 나간 상상적 인물caractère imaginaire은 영화 《향수》에서 후각의 천재였던 장-밥띠스뜨 그르누이다. 세례 요한이라는 그의 이름과 달리 그는 영화에서 후각에 대한 메시아였다. 그를 해치려는 자들은 다 죽었고, 형장에서 사람들을 열락悅樂의 구원으로 이끌고 갔다는 점에서 그렇다. 그가 얼마나 특이한 천재인가는 어떤 동정심도 어떤 인간적인 마음도 없었고, 오로지 냄새에 대한 열정만 갖고 있다는 점을 보면 알 수 있다. 사람들은 아마 그를 보고 섬짓했을 것이다.




2. 표백된 천재, 에반

에반 aka. 어거스트 러시
《어거스트 러시》의 에반은 미소년 천재의 계보를 잇는 극중 인물이다. 그는 미소년이고 천재이지만, 흔히 신동들이 갖고 있는 기이한 모습은 보여주지 않는다. 소리에 대한 엄청난 감각을 갖고 있지만, 그것을 가지고 모차르트처럼 출세나 돈벌이에 이용하는 것은 서툴다. 그는 오로지 동화적 감수성을 가지고, 자신이 내는 소리를 본 적도 없는 그 부모가 들을 수 있을 것이란 신앙만으로 살아간다. 어떤 기행도 벌이지 않는다. 게다가 정말 착해서, 자신을 시기하고 질투하는 아서를 구하기 위해 자기를 희생하기도 한다.

게다가 그는 천애고아다. 부모를 한 번도 본 적도 없으면서, 부모를 만날 수 있을 거라는 긍정적인 마음을 갖고 살아가는 고아원의 아이, 허름한 침대에서 잠들면서도 자신을 선택받은 사람이라고 여길 수 있는 아이다. 사람들이 애정어린 동정을 보낼 정도로 어려운 상황이면서, 사람들이 거부감이 들지 않도록 어두운 모습은 전혀 보여주지 않는다.


3. 반복되는 우연과 이해할 수 없는 인물의 행동



서사를 즐기는 사람들이 할리우드 영화에서 받는 거부감은 역시 그 스토리의 비합리성에 있다. 《어거스트 러시》에서도 마찬가지다. 무엇보다 먼저 에반이 잉태되는 과정부터가 보름달이 비춰주는 옥상에서의 하룻밤으로 꽤 낭만적이지만 전적으로 우연의 산물이다. 라일라 노바첵Lyla Novacek은 이전에 결코 그런 식으로 행동하는 여자가 아니었다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하지만, 보름달이 수태를 상징하고, 앞서의 장면에서 록 공연과 첼로 솔로 연주의 오버랩이 이를 준비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여기서 이 장면에 면죄부를 주더라도 《어거스트 러시》의 스토리는 이해할 수 없는 비합리성 투성이다. (면죄부는 주더라도, 천재 영화에서는  대체로 이런 '출생의 비밀' 모티프가 등장한다는 점은 짚어 주어야 하겠다.)

가령, 라일라 노바첵은 뉴욕 필과의 협연을 제의받을 만큼 꽤 촉망받는 첼리스트인 듯한데, 루이스 코넬리Louis Connelly가 그를 찾아다닌다며 몇 년이 되도록 이를 인지하지 못한 것은 이해하기 힘들다. 더구나 노바첵이 누구인지 인터넷 뉴스를 통해 알아낸 후 거주하는 곳까지 찾아가는 열정을 보이면서, 정작 뉴욕에서는 온 시내를 뒤덮은 플래카드 속에서 그의 이름을 인지하지 못했다는 것도 이해할 수 없다. 이 경우는 영화 후반의 가족 상봉을 극적으로 그리기 위해 연출자가 의도적으로 합리성을 무시한 것이다.

에반을 찾아 뉴욕을 헤매는 제프리스에게 '마법사Wizard'가 미국 사회복지 행정에 대한 쓴소리를 하는 것처럼 어색한 장면이 또 있을까? '마법사' 역시 고아였기 쉽다는 점에서 이해하려 해도, '어거스트 러시'를 빼돌려 장사를 하고자 하는 그가 그토록 주목받을 행동을 하는 것은 역시 어색하다. 예상대로 곧바로 제프리스는 경찰력을 동원해 '마법사' 패거리의 은거처를 습격하고 '마법사'는 '어거스트 러시'와 헤어지고 만다.

에반이 어느 교회에 들어가서 희망Hope이란 이름을 가진 소녀에게 악보에 대해 20초간 배운 뒤, 온 벽을 악보로 채우는 부분도 실은 말도 안 된다. 리듬과 음정에 대한 감각은 타고날 수 있고, 다른 사람보다 소질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악보는 수천년 동안 전해내려오는 일종의 약속이다. 그건 선천적으로 재능이 있을 수 없으며, 독보법은 따로 배워야 한다. 우리야 높은음자리표나 낮은음자리표가 그려진 오선지에 익숙하므로 악보라곤 그것밖에 없는 줄로 알고 있으니, 그걸 순식간에 터득한 에반이 천재처럼 보일 수 있다. 하지만, 에반이 정간보의 수많은 약속들을 순식간에 터득하는 장면이 있다면 그만큼 자연스럽게 보일 수 있을까?

정간보井間譜

정간보井間譜, ⓒ국립국악원


마찬가지로 모두 같은 시기에 뉴욕을 향해 세 가족이 모인다는 설정도 지나치게 작위적이다. "아이가 들을 것 같다", "그녀가 들을 것 같다"는 라일라와 루이스의 이야기는 영화 전반에 흐르는 어떤 우주적 울림에 관한 신앙이고, 그런 신앙이야말로 영화를 지탱하는 유일한 힘이므로 문제삼을 것이 아니다. 하지만, 두 사람이 하필 같은 시기에 다시 음악을 시작하고 그때 마침 '어거스트 러시'가 된 에반의 곡이 뉴욕에 울려퍼지는 이 우연의 일치를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거슬러 올라가면, 성공한 비즈니스맨이 된 루이스가 마침 옛 밴드 동료의 택시에 올라타는 것도 우연이요, 때맞춰 라일라의 아버지가 죽고 라일라가 진실을 알게 되는 것도 우연이다.


4. 미약한 캐릭터

이 영화에는 사실 루이스, 라일라, 에반 외에 다른 등장인물은 없다고 봐도 좋다. 사회복지과의 리처드 제프리스Richard Jeffries는 사실 라일라를 거의 도와주지 못하며, '마법사'Maxwell "Wizard" Wallace는 단지 에반에게 '어거스트 러시'라는 이름을 지어주기 위해서만 등장하는 것 같다.

제프리스가 에반의 파일을 찾았을 때 라일라는 이미 게시판에서 에반의 얼굴만 보고 자신의 아들인 줄 알았으며, 제프리스가 '어거스트 러시'가 에반인 줄 알고 뛰어갔을 때 라일라는 이미 자기 아들의 공연을 보고 있었다. '마법사'는 에반에게 음악에 대해 모든 것을 가르쳐주겠다고 했지만, 그런 장면은 나와 있지 않다. 사실 에반의 모든 기타 연주 가운데 교회에서의 앰프와 코러스 계열 이펙터만 가지고 연주한 태핑 연주만큼 감동적인 것은 없었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즉, 극중에서 에반은 '마법사'에게 배우기 전에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는 것이다.

free music


기타를 치며 기뻐하는 에반 에반의 태핑 기타 연주

오히려 '마법사'가 기억에 남는 것은 마지막의 짧은 하모니카 연주 때문인데, 그것조차 편집된 것인지 원래 그런 것인지 의미있을 만큼 길지 않다.


5. 엄마 찾아 삼만 리

재미있는 것은 역시 이번에도 에반이 남자라는 점이다. 에반 정도의 신동이 여자라면 영화가 좀더 재미있었을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제작진은 남자 아이를 택했다. 그 편이 여러 모로 편리하기 때문일 것이다: 먼저 남자 아이가 갖고 있는 부모에 대한 결핍을 그려내기가 쉽다. 엄마와 아들의 대표적인 이미지가 역시 성모 마리아와 예수라면, 신동의 대표적인 이미지도 실은 성서의 예수다(표준새번역, 눅 2:41-50):

예수의 부모는 해마다 유월절에는 예루살렘에 갔다. 예수가 열두 살이 되는 해에도 그들은 절기관습을 따라 유월절을 지키러 올라갔다. 그런데 그들이 절기를 마치고 돌아올 때에, 소년 예수는 예루살렘에 그대로 머물러 있었는데, 그의 부모는 이것을 모르고, 일행 가운데 있으려니 생각하고 하룻길을 간 다음에, 비로소 그들의 친척들과 친지들 가운데서 그를 찾다가 찾지 못하였으므로, 그들은 그를 찾으려고 예루살렘으로 되돌아갔다.

사흘 뒤에야 그들은 성전에서 예수를 찾았는데, 그는 선생들 가운데 앉아서, 그들의 말을 듣기도 하고, 그들에게 묻기도 하고 있었다. 그의 말을 듣고 있는 사람들은, 모두 그의 슬기와 대답에 경탄하였다.

그의 부모는 예수를 보고 놀랐다. 어머니가 예수에게 "얘야, 이게 무슨 일이냐? 네 아버지와 내가 너를 찾느라고 얼마나 애를 태웠는지 모른다" 하고 말하였다. 예수가 부모에게 말하기를 "어찌하여 나를 찾으셨습니까? 내가 내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할 줄을 알지 못하셨습니까?" 하였다. 그러나 부모는 예수가 자기들에게 한 그 말이 무슨 뜻인지를 깨닫지 못하였다.

이렇게 에반은 예수의 이미지를 쉽게 전유專有하는데, 그 전유의 끝은 가족의 상봉이다. 음악이라는 거창한 우주적 메시지를 말하던 영화는 어느 사이 한 가족의 가정사로 축소되어 구원의 의미를 축소하고, 마지막 오케스트라를 통해 세계에 평화와 구원이 왔음을 천명한다.

어쨌거나 순진하고 순수한 남자 아이의 이미지는 여자 아이의 이미지보다 가족의 상봉이라는 구원사에 보다 접근하기 쉬운데, 그것은 아들을 향한 어머니의 마음이 보다 더 뜨겁기 때문이다. 실제로 영화에서 루이스는 (아들의 존재를 몰라서 그렇겠지만) 아들보다는 라일라를 찾고 있고, 라일라는 왜인지 모르지만 루이스는 안중에 없고 잃은 아들을 찾고자 하는 열정에 가득차 있다. 실제로 구글 검색 결과에서도 알 수 있듯이 어거스트 러쉬를 본 많은 블로거들은 이를 「엄마 찾아 삼만 리」와 연관시키고 있다. 즉, 관객들의 심리 속에서는, 여기서 아버지란 존재는 지워지고 없다. (오히려 아버지의 역할은 불완전하고도 불합리하게 '마법사'가 차지하고 있다.) 왜냐하면 엄마의 포근하고 따뜻한 이미지야말로 이 영화가 기대고 있는 음악의 우주적 울림이 갖는 포근함의 비밀이기 때문이다.


6. 영화와 음악

영화 내용은 그저 그래도 음악만은 좋다는 평이 많았을 때, 한 팝 칼럼니스트가 <어거스트 러쉬> 그렇다고 음악은 훌륭해?라는 포스팅을 통해 음악도 실은 형편없다는 견해를 밝혀 블로거들 사이에서 논란이 일었다. 사실 그가 지적한 대로 영화를 전반적으로 밀고 나가는 음악이 없다시피하고, 음악의 편성이 지나치게 단순 반복적이었다는 것은 맞다. 사실 나는 위 포스팅의 의견에 거의 전적으로 동의한다.

그러나 앞서 불합리한 장면의 하나로 지적했던 악보해독 장면과 달리, 교회에서의 에반의 기타 연주는 놀라운 데가 있었다. 일단 기타는 각 현이 대체로 5도 정도로 떨어져 있고, 각 플랫은 반음 간격이므로 처음 기타를 접하는 음악 천재가 다루기 힘든 악기는 아니다. 더구나 굉장한 연습이 필요한 속주 연주가 아니면서, 기타를 장난감 다루듯이 현을 때리며 우연인 듯 아닌 듯 나오는 태핑 멜로디는 꽤나 아름다우면서도 음악적 합리성을 취득한 장면인 것이다. 기타 하나로 리듬, 멜로디, 화음이 모두 이루어지는 이 장면이야말로 이 영화에서 유일하게 볼 만한 장면이라고 생각한다. 훈련받지 않은 음악 천재가 선보일 수 있는 개연성을 가진 , 수준 높은 기타 연주라는 점에서 말이다. 그러므로 《어거스트 러시》가 '음악 영화'라는 태그를 받기에 불완전하다 해도 최소한 음악이 중요한 소재로 등장하는 영화라는 점은 맞다.

그러나 영화인들이 자랑스럽게 영화를 종합 예술이라고 부를 때는, 어떤 영화든 어느 특정 요소로만 떨어져버린다면 실패한 영화라는 점을 자인한 셈이다. 음악은 좋다, 는 말은 영활르 보느니 OST를 사겠다, 는 말과 바꿔 쓸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개인적으로는, OST를 들어도 기억에 남는 곡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