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오르는책/비평&인문

언어학 없는 언어학교: 강범모『영화마을 언어학교』

엔디 2003. 12. 27. 22:01
'영화보다 재미있는 언어학 강의'라는 부제를 달고 있지만, 언어학 강의라 하기에 깊이도 없을 뿐더러 재미도 없다. 아니, 본제부터가 잘못되었다. 이 책은 '영화마을'에 있지 않고 그 언저리에 있을 뿐이다.

거의 60편에 달하는 영화 속에서 언어학을 설명하려고 글쓴이는 애쓰고 있지만, 그것이 영화의 내용과 잘 융합되는 경우는 거의 없다. 대개는 영화의 제목이나 아주 사소한 것에 집착해서 그에 대한 이야기로 한두 페이지를 채우는 것에 불과하다.

물론, 그런대로 괜찮은 몇몇 사례들은 있다. 《쥬라기 공원3》에서 공룡들의 의사소통이 우리의 언어와 달리 무한성을 갖지는 않을 것이라고 말하는 부분은, 오로지 추측만을 가지고 한 말이라는 결점은 있더라도, 그런대로 봐줄 만한 언어학적 설명이라고 하겠다. 또, 《인랑人狼》, 즉 '인간늑대'와 '늑대인간'의 차이를 말하면서 어느 언어에서나 합성명사에서는 뒤의 것이 본질적인 것임을 일러주는 대목도, 지엽적이기는 마찬가지지만, 그런대로 유용한 부분이다. 그리고, 《수색자The searchers》 항목에서 북미 인디언의 언어가 고립어도 첨가어(교착어)도 굴절어도 아닌 '포합어抱合語'라는 것을 알려주는 부분도, 《수색자》라는 영화에 인디언들이 '나온다'는 점 외에는 내용상의 연관점을 찾을 수 없다는 단점이 있지만, 나름대로 도움되는 내용이다. (참고로 저자는 포합어를 예를 들어 설명하고 있는데, 그 예는 다음과 같다. 북미 인디언 언어 가운데 하나인 누트카어에서 <inikw-ihl>은 <fire in the house>이고 <inikwihl'minih'isit>는 <several small fires were burning in the house>라고 한다.)

그렇지만, 《반지의 제왕》을 말하면서 '반지'와 '가락지'의 차이를 말한다든가, 스탠리 큐브릭 감독의 《메탈 자켓Full Metal Jacket》 에서 "Sir, yes, sir."라는 말에서 "서, 예, 서"는 경상도 사람이 들으면 "서라, 여기에 서라"로 들을 것이라며, 사투리에 대해서 설명한다든가, 《시월애時越愛》에서 일 마레Il Mare를 보고 '바다'가 모든 언어에서 남성인지를 조사한다든가, 김성수 감독의 《무사》에서 원나라 장수들이 '몽고어'를 쓰지 않는다고, 자기는 중국어도 '몽고어'도 잘 모르므로 확실치는 않지만 '몽고어'를 만약에 썼다면, 그것은 잘못된 것이라고 질책하는 장면이라든가, 《천국의 아이들》에서 글을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쓴다는 것만을 지적한다든가, 《해리포터와 마법사의 돌》에서 엉뚱하게도 영국식 영어와 미국식 영어의 차이만을 보고, 미국에 '해리 포터'가 가면 '해리 파러'가 될 것이라고 쓴다든가, 같은 영화에서 'wand'를 '지팡이'라고 옮긴 그 번역어를 문제삼는다든가, 《번지 점프를 하다》에서 이미 인터넷을 통해 화제가 된 숟가락과 젓가락의 맞춤법에 대해 말한다든가, 버나드 쇼의 희곡을 바탕으로 한 《마이 페어 레이디》에서 상류 사회의 언어(RP:received pronunciation)와 하층어(Cockney)의 차이가 사회언어학적 설명이 되지 못하고, 단순한 차이―가령, lady의 a가 RP에서는 [ei]로, 코크니에서는 [ai]로 발음된다는 정도의 사례중심의 설명―에만 국한되고 있다든가 하는 점은, 도대체 이 책의 어디에 '언어학'이 숨어있는지 알 수 없게 만든다.

"이 책은 영화소개와 감상, 언어학적 지식이 종횡무진 섞여있지만 전통 언어학의 영역인 음성학·음운론·형태론·통사론·의미론·화용론뿐 아니라 기계번역·통신언어·음성합성·인공지능 등의 문제, 언어의 본질과 사회성을 이해할 수 있도록 배려했다."는 것은 경향신문 기사였다. 이 책을 다 읽은 다음에 이 기사에 동의할 사람이 얼마나 될까. 심히 의심스럽다.

내가 보기에 이 책에 '언어학'은 거의 없고, 그 대신 영어학원의 수업시간이나 국정 국어맞춤법 시간에나 어울릴 한담들로 채워져 있는 것 같다.


영화마을 언어학교
강범모 지음/동아시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