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오르는책/희곡&만화

닳은 메타포: 박흥용『구르믈 버서난 달처럼』

엔디 2004. 2. 19. 22:35
좋은 예술작품이 갖추고 있어야할 여러 조건 중에는 새로움도 포함된다. 탄탄한 줄거리나 재미있는 볼거리가 중요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그것들이 전부는 아니다. 박흥용의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이 좋은 예술작품이 되기 어려운 까닭은 여기에 있다.

작품의 전체적인 틀은 성장소설Bildungsroman의 원형을 갖고 있다. '견주堅柱' 혹은 '견자犬子'가 서자로서의 불만을 품고 있다가 어떻게 당대 최고의 칼잡이가 되고, 또 거기서 '깨달음'을 얻는 과정이 이 만화가 그리고 있는 내용이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수없이 많은 전통적 메타포들이 동원되었다. 메타포들이 이 작품에서 차지하고 있는 비중은 엄청나다. 메타포를 빼면 짧게 요약한 줄거리에 불과할 정도다. 이를테면 '방짜'의 메타포가 그렇다.

방짜 메타포는 견자가 스승 황정학과 함께 처음으로 간 곳에서부터 시작된다. 황정학은 견자에게 방짜의 메타포를 이해하라, 고 명령한다. 그리고 견자가 그것을 진실로 깨닫는 부분은 마지막 결투에서이다. 또는 '구르믈 버서난 달'의 메타포가 그렇다. 그것이 다시 '한계'의 메타포로 바뀌는 과정이 작품의 뼈대를 이룬다.

문제는 그런 메타포들이, 그리고 그 과정들이 지나치게 상투적이라는 데 있다. 눈 멀쩡히 뜬 사람을 '장님'이라고 하는 것이나, 어디어디에서 자신을 찾으라는 명령이나, 스승의 죽음의 방식이나 시기도 여느 무협지에나 다 있는 것을 만화로 끌어왔을 뿐이다.

어느 대학 만화학과 교수는 책 뒤에 라깡이나 알뛰쎄르를 인용하며 작품에 칭찬의 침을 바르고 있지만, 그가 인용한 대로의 라깡과 알뛰쎄르라면 이 작품 아니라 어느 곳에나 있는 라깡과 알뛰쎄르다. 더구나 이 작품에서 말하는 한계는 그가 지적한 대로 "승리는 눈물이며 더 커져버린 분노일 뿐"인 것은 아니다. 이 작품은 오히려 '나를 찾는 것'을 말하는 작품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계는 알고보면 자유'라는 식의 안이한 상상력도 이 작품의 큰 결점으로 그대로 남는다. 더구나 그 결론도 결국 메타포로 일구어낸 결론이기 때문에 정치精緻하지 않다. 그래서 이 작품의 큰 뼈대는 결국 신비주의로 남는다. 좀더 나아가자면, 일종의 '아는 체'고 '겉멋'이다.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은 아무 것도 꿰뚫지 못하면서 꿰뚫은 체하는 만화다. 삶의 계란을 품을 수 없다.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 1
박흥용 글 그림/바다출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