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이 갈 길을 비추었던 서사시의 시대를 동경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 시대의 시는 '향유'된다기보다는 '소비'되고 있다는 데 생각이 미치면 나는 늘 절망한다. 나는 좋은 시는 끊임없이 재생산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여기서 재생산이란 하나의 시가 수많은 독자들의 마음 속에 다른 울림을 주는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재생산 과정에서 원래의 시가 가지고 있는 아우라는 사라지지 않고, 어떤 경우에는 그 시를 딛고 있는 다른 시를 낳기도 한다.
인터넷과 '미니홈피' 시대의 시의 '소비'는 좀 색다른 경향이 있어서, 시를 자신들의 입맛에 맞게 고치거나 다른 사람의 시에 자신의 시를 덧붙이거나, 시를 마음껏 자기 것으로 이용한다. 그렇게 '가공'된 시는 원작의 분위기를 잃고 대개 감동적인 사랑이나 착한 도덕률의 삶을 설파하는 교과서가 되어버리고 만다. 그 순간 시가 잃어버리는 것은 시니피앙이다.
1
도종환 시인의 시는 「접시꽃 당신」 시절부터 수첩이나 다이어리에 적혀 회자되던 것이다. 그의 시는 서정윤이나 특정 시점 이후의 류시화의 시와 달리 삶에서 비어져나온 어떤 빛이 있는 시였다. 이를테면, 베개맡의 머리칼처럼 생명이 빠져나간다는 표현은 쓰기 쉬운 것이 아니다. 그 시는 삶과 죽음의 경계에 대한 탁월한 성찰에 관한 시였다. 씨앗과 열매는 거의 자연스럽게 그 앞의 혹은 그 뒤의 꽃을 연상시키고 벌레는 수정受精을 떠올리게 하는데, 시인 부부가 섬겼던 농사일은 거기서 거의 확실한 삶의 은유가 되어 있다.
나는 이런 아픈 사랑의 시를 좋아하는데, 널리 알려진 신경림 시인의 「가난한 사랑 노래」나 또 이정록 시인의 「보석달」 같은 시는 읽을 때마다 조금 숙연해진다.
보석달
식 올린지 이년
삼개월 만에 결혼 패물을 판다
내 반지와 아내의 알반지 하나는
돈이 되지 않아 남기기로 한다
다행이다 이놈들마저 순금으로 장만했다면
흔적은 간 데 없고 추억만으로 서글플 텐데
외출해도 이제 집걱정 덜 되겠다며 아내는
부재와 평온을 혼돈하는 척, 나를 위로한다
농협빚 내어 장만해준 패물들빨간 비단상자에서 꺼내어 마지막으로 쓰다듬고
양파껍질인 양 신문지에 둘둘 만다
버려야 할 쓰레기처럼 밀쳐놓고 화장을 한다
거울에 비친 허름한 저 사내는 누구인가
월급날이면 짜장면이 먹고 싶다던
그때처럼 화장시간이 길다
동창생을 만나러 나갈 때처럼
오늘의 화장은 서툴러 자꾸 지우곤 한다
김칫거리며 두루마리 화장지를
장식처럼 주렁주렁 매달고 돌아오는 길
자전거 꽁무니에 걸터앉아
산 위에서 부는 바람 시원한 바람
콧노래 부르며 노을이 이쁘단다
금 판 돈 떼어 섭섭해 새로 산
알반지 하나를 쓰다듬으며 아내는
괜히 샀다고 괜히 샀다고
젖은 눈망울을 별빛에 씻는다
오래 한 화장이 지워지면서
아내가 보석달로 떠오른다
하지만 이 시들이 소모품으로 전락하는 순간 이 시인들의 삶 역시 돈으로 살 수 있는 것FOR SALE이 되고 만다.
무서워라, 그렇다면 이 세계에서 시詩라는 것이 존재할 이유는 없다...
2
뿐만 아니라, 시가 멋대로 바뀌어 회자된다면 장기적으로 상당한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 먼저 웹의 어떤 텍스트도 확정된 텍스트로 믿을 수 없고, 어떤 작가도 자신의 글에 대해 책임질 수 없다...
시의 내용을 조금 바꾸는 것이 무슨 문제가 있느냐고 항변할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다. 확실히 세계에서 닳고 닳은 언어라는 질료는 다루기가 쉽지 않다. 다 빈치 작품 「모나리자」에 멋대로 덧칠을 해서 웹에 게시하면서 내가 무얼 잘못했느냐고 묻는다면 어떻게 대답해야 할까? (아니, 그렇다면 또 뒤샹의 「L.H.O.O.Q」에 대해 말할 사람이 있으려나. 모든 문학사와 미술사를 다시 써야 할 판이다.)
3
아니면 여기서 '저자의 죽음La mort de l'auteur'에 대해서 말해야 할까? 놀랍게도 텍스트가 마구 바뀌고 시의 형상이 훼손되는 그 가운데에서도 저자는 죽지 않았다. 저자의 이름은 훼손된 텍스트 앞에 큼지막하게 붙어 있다. (가끔 도종환을 도종완으로 잘못 쓰는 경우는 있다.) 그 말은 웹에 올려진 텍스트가 저자의 권위에 호소하는 것이 아직 건재하다는 것을 뜻한다. 다른 저자의 권위를 빌어 글을 쓰는 것이나 그 씌어진 글을 우리는 위작僞作이라고 부른다.
롤랑 바르트가 '저자의 죽음'을 말했을 때 그는 '작품에서 텍스트로de l'œuvre au texte'를 말했다. 글의 주인은 저자가 아니라 독자라고 말한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본다. 하지만 '소비'되는 글들은 여전히 텍스트가 아니라 작품으로 기능하고 있다. 바르트는 "저자는 합리적인 자본주의의 산물"이라고 말한 적이 있는데, 웹에서 떠돌아다니는 훼손된 텍스트들은 철저한 자본주의의 산물이라는 점에서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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