웃음과망각의책

『경제성장이 안되면 우리는 풍요롭지 못할 것인가』- 더글러스 러미스

엔디 2004. 1. 20. 14:16
사용자 삽입 이미지
『經濟成長がなければ私たちは豊かになれないのだろうか』
『경제성장이 안되면 우리는 풍요롭지 못할 것인가』
C. Douglas Lummis, 최종철·이반 옮김, 녹색평론사.
2002년 12월 10일 초판, 2003년 2월 20일 2쇄.


<ㅉ=189>일본에 와보기 전에는 '영어회화(English Conversation)'라는 말을 그 어디서도 들은 적이 없었다. 물론 이 두 낱말이 어떻게 해서 복합명사화하게 되었는지, 그것을 이해하지 못할 바는 아니다. 그러나 일본인들이 쓰는 영어회화라는 표현은 그것이 영어로 대화를 나눈다는 것 이상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는 점에서 모종의 슬로건적 느낌을 풍긴다는 것 또한 사실이다. "영어로 말하는 법을 배우고 싶다"는 것이 아니라 "영어회화를 하는 법을 배우고 싶다"라는 우리가 종종 접하게 되는 문장은, 많은 영어선생들의 순진한 생각과는 달리 결코 중복적인 표현이 아니다. 영어회화라는 표현에는 단순히 언어훈련이라는 뜻만 아니라 어떤 세계관까지도 담겨져 있기 때문이다.

미국식 약국과 햄버거 이야기

일본에 있으면서 내가 처음으로 영어를 가르치는 일자리를 얻게 되었던 것은 1961년의 일이었다. 이때 나는 곧 이것이 매우 난감한 일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후에도 외국어학원, 회사, 대학 등지에서 간간이 영어회화라는 것을 가르치게 되었지만, 예나 지금이나 사정은 마찬가지이다. 영어회화를 가르친다는 교실<ㅉ=190>을 들어설 때마다 심란하고 어색한 느낌을 도저히 떨쳐버릴 수 없는 것이다.

한 3년 바깥엘 나갔다가 다시 일본으로 돌아온 작년 가을, 나는 도쿄에 있는 주요 외국어학원들의 회화반을 둘러보았다. 판에 박힌 듯한 강의가 조금도 다름없이 계속되고 있었다. 하얀 벽에는 예의 그 디즈니랜드 포스터가 붙어 있었고, 다섯명의 젊은 사무직 여성들이 얌전을 빼고 나란히 한줄로 앉아 있었다. 미국인 여자 선생이 맞은 편에 앉아 있었다. 그 여성들은 그 앞에서 다음과 같은 레슨을 합창하고 있었다.

A― Let's stop in this drugstore a minute.
B― OK. I'd like to go in and look around. We don't have drugsotres like this in Japan. We only sell medicine.
A― Well, you can get medicine here, too. See that counter over there? That's the pharmacy department. The man who wears the white coat is the pharmacist.
B― Look at all the other things here, candy, newspapers, magazines, stationery, cosmetics. In Japan we don't see such things at the drucstore.
……
A― Shall we go to the soda fountain?
B― What's the soda fountain?
A― Well, most drugstores have a soda fountain where you can get icecream, soft drinks, sandwiches, and so on.
B― OK. Let's go. I'm hungry. I'd like to get a hamburger and a milkshake.

나는 이 여섯명의 인간이 서로의 사이에 무슨 뚫을 수 없는<ㅉ=191>벽 같은 것을 두고 서로를 진지하게 응시하며 이런 문장들을 복창하는 것을 보면서, 마치 초현실주의 영화의 한 장면을 보는 듯한 착각 속으로 빠져들었다. 도대체 이 나라에서는 이러한 허구의 미국식 약국과 거의 전설적이라고도 할 수 있는 '진짜' 햄버거 이야기에 얼마나 많은 시간을 허비해왔던가? 정작 가치있는 이야깃거리가 이밖에도 얼마나 무궁무진할 텐데 이런 내용이 계속 반복되다니, 이것은 미국문화의 진면목을 소개하는 것이 아니라 미국문화의 빈곤성만을 과시하는 격이 아닌가?

그리고 만약 이 회화반 수강생들을 이같은 미국의 문화적 불모성에 대해 혐오감을 느끼게 하지 않고 영어회화학원으로 잡아 끄는 이유가 바로 이 끝없이 계속되는 약국, 슈퍼마켓, 드라이브인 영화관, 햄버거 판매점 이야기들 때문이라면, 이거야 참으로 낯간지러운 일이 아닌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처지를 문제시하는 미국인 선생들은 별로 없다. 이곳 외국인 사회에서 영어를 가르친다는 일이 무슨 보람이 있는 것으로 간주되지는 않지만, 그저 쉬운 돈벌이라는 생각에 그대로 넘어간다는 것이 사실이다. 맡은 바 일을 양심적으로 하려는 선생들도 소수 있다. 그러나 대개는 그럴 필요까지 있겠느냐는 투다. 그저 꼬박꼬박 강의실에 들어가 이런저런 이야기로 시간만 때우면 그만이라는 사고방식이다. 일주일에 한시간 미국인과 직접 접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수강생들이 돈을 내는 이유가 아니냐 하는 것이 이런 선생들의 암묵적 생각인 것이다.

그들의 평생소원은 영어회화 구사

1961년 여름 나는 이미 여러 달을 일본에서 보냈던 터였다. 그때 돈이 떨어진 나한테 어떤 친구가 쉬운 일자리가 하나 있다<ㅉ=192>는 것이었다. 영어를 가르치는 일이라 했다. 나는 자격이 없다며 사양했다. 경험이 전혀 없을 뿐만 아니라 이 방면의 전문훈련을 받은 적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일본어도 능숙하지 못한 처지였다. 그러자 친구는 내 순진함에 너털웃음을 터트리며 이렇게 말했다. "경험이나 훈련 같은 건 필요없네. 여기서는 이탈리아인, 독일인, 프랑스인들까지도 고등학교 때 배운 영어실력으로도 선생노릇을 하니까. 여기 사람들이 학원에 다니는 이유는 외국어를 배우기 위해서라기보다는 외국인을 만날 기회를 얻겠다는 거지. 아주 간단한 일일세. 그저 강의실에 들어가서 무슨 소리든 되는 대로 한시간 떠들면 그만이네."

당시로서는 그의 이야기가 틀림없는 사실이라는 느낌이었다. 일본말을 잘 몰랐기 때문에, 내가 아는 사람들은 영어를 할 줄 아는 사람들에 한정되어 있었다. 내가 일본어를 공부하고 있었던 대학에도 ESS(English Speaking Society ― 영어상용반)가 하나 있었는데, 그 대다수 반원들이 내게 보이는 추종적 태도에 나는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하지만, 그들의 '평생소원'이 영어회화를 능숙하게 구사하는 것이며 그들이 제일 가고 싶은 데가 로스앤젤러스이며 제일 좋아하는 소설가가 호손이며 제일 좋아하는 시인이 롱펠로라는 이야기 등을 들었을 때 나는 정말 그럴까 하는 의구심을 떨쳐버릴 수 없었다. 그러면서도 나는 ― 그리고 일본말을 모르는 대다수 외국인들은 ― 이런 태도가 일본문화를 대표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영어회화의 세계, 즉 ESS의 세계가 단지 하나의 하위문화로서 일본 대학생 전체의 특징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은 그로부터 훨씬 뒤의 일이었다.

나는 곧 ESS 반원들이 미국인과 유럽인에게 보이는 추종적<ㅉ=193>태도가 그저 외국 손님들에 대한 우애의 표시로 이해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누군가를 같은 인간으로 대하는 것이 아니라 별난 족속으로 대하는 태도를 결코 우애의 표시로 받아들일 수는 없기 때문이다. 또 하나 내가 곧 알게 된 중요한 사실은 그러한 태도가 일부 외국인들에게만 취해지고 있다는 것이었다. 1962년에 나는 교토로 이주하였다. 그리고 교토대학 ESS가 외국인 학생들을 위한 클럽을 후원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나는 그 모임에 한번 나가 보았는데, 거기에 있던 외국인―그 대부분은 동남아시아에서 온 학생들이었고, 그들은 격앙된 상태에 있었다. 얘기를 들으면, 일본인 반원들이 동나아시아 학생들은 안중에도 두지 않고 미국인 학생과 유럽인 학생들만을 강아지처럼 졸졸 따라다녔던 모양이다. 나는 그때 ESS대표가 동남아시아 학생들의 거센 항의를 들으면서 지었던 표정을 영원히 잊지 못할 것이다. ESS측은 이 외국인학생 클럽이 주로 아시아인들로 채워질 것으로 예상하지 못했던 것이다. 기대가 어긋났지만, '공평'의 원칙상 그들은 이 클럽을 계속 후원하지 않을 수 없었음이 분명했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분명 동남아시아 학생들이 자진해서 없어지기를 바라는 기색이 역력했다.

인종차별주의적 영어회화의 세계

그후 나는 또 귀중한 교훈 하나를 얻게 되었는데, 그것은 내가 나가는 영어학원의 한 일본인 선생에게서였다. 월급날의 일이었다. 이 노신사가 내게 오더니 점잖은 말투로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당신이 알고 있어야 할 사실이 있는 것 같소. 나는 여기서 15년 동안을 일해왔소. 당신의 경우는 3개월에 불과하지<ㅉ=194>요. 그러나 내 봉급이 당신보다 적소. 이런 소리를 했다고 해서 나쁘게는 생각 마시오. 당신도 알고 있어야 한다는 생각에서 알려주었을 뿐이니까." 그는 그 말만 남기고 자리를 훌쩍 떠나버리고 말았다. 나는 얼떨떨했다. 그리고 어지러운 마음을 가눌 수가 없었다. 그는 유능한 언어학자에다 풍부한 경험을 가진 교사였다. 반면 내 경우는 열차를 타고 학원으로 오면서 열차칸에서 생각해낸 농담조 이야기로 그날그날의 강의를 때웠던 것이다. 내가 그보다 돈을 많이 받아야 할 이유가 도대체 무엇일까? 그후 나느 이 질문을 여러 사람에게 던져보았다. 그때마다 되돌아오는 대답이 외국인(백인을 의미한다)의 경우 "생활비가 더 필요하다"는 식의 설명이었다. 그러나 이런 답변을 내가 어떻게 수긍할 수 있겠는가? 차별대우라는 생각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요컨대, 영어회화의 세계에서는 한마디로 인종차별주의가 당연시되고 있다. 물론 나로서는 선생이나 수강생 개개인을 비난할 생각이 추호도 없다. 이들 가운데서도 헌신적이고 진지한 사람들이 다수 있기 때문이다.내가 문제시하고 싶은 것은 다만 이 영어회화라는 하위문화가 갖고 있는 이데올로기의 구조이다. 그것은 고용방식과 광고방식 면에서 인종차별주의적이며, 교재와 강의실에서 나타나는 이데올로기 면에서 또한 인종차별주의적이다.

예컨대 "본토인(native speaker)이다"라는 선전이 성행하고 있는데, 사실 이것은 협잡이나 다를 바 없다. 특히 영리를 목적으로 운영되는 외국어학원에서는 본토인이 출강한다는 사실을 대대적으로 내세운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본토인이란 결국 '백인'을 의미할 뿐이다.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일부 본토인들은 영어가 모국어가 아닌 유럽인들이다.

<ㅉ=195>반면 필리핀, 싱가포르, 인도 등에서는 영어가 공용어이다. 그러나 이곳 출신자들은 본토인 취급을 받지 못한다. 그들이 가끔 일자리를 얻게 되는 것은 자신의 뛰어난 영어실력을 인정받았을 경우일 뿐이다. 그러나 그들 대부분은 자신의 능력을 시험받을 기회도 얻지 못한 채 그대로 문전박대당하는 것이 보통이다. 회사에서 미국인들을 고용하는 경우에도 사정은 비슷하다. 백인들만을 고용하고자 하는 것이다. 물론 대다수 일본인들에게 '미국인'이란 말은 '백인'과 동의어이다. 그런데 일본에 오는 미국인들이 어디 백인뿐인가? 백인이 아닌 미국인들도 일본의 많은 외국어학원에서 일자리를 쉽게 구하지 못한다.

일본의 외국인사회에서는 백인이라면 아무런 자격이 없어도 적어도 두가지 일자리는 쉽게 구할 수 있다는 말이 통용되고 있다. 하나는 영어선생이고, 또 하나는 광고모델이다. 아니, 한가지가 더 있다. 여성일 경우 본인의 의사만 있다면 스트리퍼(stripper)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세가지 일이 공통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사실은 일본에서는 하얀 피부 자체가 돈벌이 재료라는 것이다. 스트립쇼 업소의 주인들은 춤을 못 추어도 '외국인' 스트리퍼가 있으면 손님들이 더 몰려든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백화점 주인들 역시 파란 눈의 블론드 마네킹들이 진열되어 있어야 여성들에게 서양옷을 잘 팔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이거야 원, 나치가 그리던 게르만 민족의 세계지배격이 아닌가? 텔레비전 광고주들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백인들이 자기 상품을 쓰는 모습을 소비자들에게 보여주어야 매출액이 늘어난다는 것이다. 사정이 이러한지라 외국어학원들에서도 본토인들을 선생으로 삼으려고 서로들 기를 쓰고 있다.

전문적 훈련을 받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또는 교사로서의<ㅉ=196>자질이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외국어학원에서 본토인들을 선호하는 까닭은 종종 발음 때문이라고 변명한다. 동남아시아인들은 미국의 흑인들과 마찬가지로 발음이 나쁘다는 것이다. '진짜' 미국식 영어를 하는 사람은 백인 미국인이라는 주장이다.

그러나 발음이란 상대적인 것이다. 영국이든 미국이든 간에 사투리도 많고 어형 변화도 제각각이다. 그리고 두 나라 모두에서 어느 것이 '표준어'인가는 권력에 의해 결정되는 문제이다. 표준어란 지배계급의 언어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필리핀에서 발달한 영어라 해서 그것을 '틀린' 영어라 매도할 수는 없다. 영국인들이 앵글로색슨어와 프랑스어로부터 새로운 언어를 창출할 수 있었다면, 또 미국인들이 북미에서 나름대로의 영어를 발전시킬 수 있었다면, 필리핀인들이라고 해서 그들 나름의 독특한 영어를 발전시켜서는 안된다는 법이 없기 때문이다. 어떤 발음으로 영어를 익히느냐 하는 문제는 언어학적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정치적으로 결정되는 문제다. 그것은 전적으로 배우는 사람이 앞으로 누구를 상대할 것인가에 따라 결정될 사항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어를 배워야 할 이유

분명히 밝히지만 나는 영어를 배워야 할 훌륭한 이유들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영어는 상당수 나라에서 모국어이다. 그리고 더 많은 나라에서 두번째로 중요한 공용어로 쓰이고 있다. 영어가 피의 역사를 갖고 있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것은 첫째로 대영제국의, 그리고 둘째로 아메리카제국의 유산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계의 거의 모든 나라의 사람들과 서로 의견을 나눌 수 있는 언어, 각국 수준에서 국제적 교호와 연대를 강화<ㅉ=197>시킬 수 있는 언어가 바로 영어라는 것 또한 사실이다.

나는 많은 일본인들이 영어를 공부하는 이유가 다른 아시아인, 아프리카인, 유럽인들과 대화를 나누려는 희망 때문이라는 점을 인정한다. 그런데 영어회화의 교재나 강의실의 현실을 보면 이 희망이 여지없이 무너져 버리고 만다.

물론 영국식 영어를 강조하는 곳들도 존재한다. 그러나 영어회화의 세계에서는 그 이상적인 상대자가 거의 늘 중산층 백인 미국인이다. 어떤 교재든 슬쩍 훑어만 보아도 이 점이 확연히 드러난다. 각 과의 첫머리에 나오는 대화자들을 보면 적어도 주인공 한 사람은 늘 이런 미국인이다. 장소 또한 늘 일본 아니면 미국이다. 돈의 단위는 늘 달러이며, 도량형 단위는 늘 야드, 피트, 인치이며, 약국에는 늘 간의식당이 있으며, 식료잡화류를 파는 데는 늘 슈퍼마켓이다. 외국어를 공부하는 재미 중의 하나가 일종의 대상(代償) 여행에 있다고 한다면, 가끔은 그 동기가 적어도 상상 속에서나마 자기 사회의 한계를 벗어나고픈 욕구 때문이라고 한다면, 영어회화의 교재들은 이 욕구를 미국으로만 집중시킨다.

나로서는 일본에서 영어회화와 미국이 얼마나 동일시되는지에 대해 무어라 단언을 내리기가 곤란하다. 그러나 국적이 어떻든 백인 한사람이 일본의 골목길을 가다가 거기서 노는 어린아이들과 마주쳤다고 하자. 그러면 아이들이 외쳐대는 첫마디가 "야, 외국인이다" 또는 "야, 미국인이다"라는 소리이다. 또 학교를 다닐 또래의 아이들이라면 아무 의미없이 "I have a book", "I have a pencil"을 외쳐댄다. 어디서나 거의 한결같이 이런 장면이 연출되곤 하는데, 우리는 바로 여기에서 영어회화가 원초적으로 갖고 있는 몇몇 기본적인 이데올로기적 요소들을 발견할<ㅉ=198>수 있다. 우선 첫째로 (유럽인, 캐나다인, 남미인, 호주인 등에게는 아주 기분이 나쁘게도) 이 아이들에게는 '외국인'이라는 말과 '미국인'이라는 말이 사실상 동의어나 다름없다는 것이다. '미국'이라는 것은 일본 바깥의 세계 전체를 가리키는 개념인 것이다. 즉 그것은 일본의 반대말이다. 더욱이 '미국인'들은 일본말을 못 알아들을 것이 뻔하기 때문에 바로 앞에 두고도 "야, 코가 크구나" 등 이런저런 소리를 마구 떠들어도 별일이 없다는 식의 태도를 보인다. 상대방이 조그마한 반응이라도 보일라치면 곧바로 "I have a book", "I have a pencil" 등 무의미한 영어회화가 등장한다. 책이나 연필이 있든 없든 그것은 상관없다. 건네는 말의 내용이 완전히 무관하다는 것, 이것이 바로 영어회화의 아이들 세계이다.

성인들의 영어회화 세계는 물론 이보다 훨씬 세련된 편이다. 그러나 그것은 그 이데올로기가 더욱 감추어져 있다는 사실을 의미할 뿐이다. 일본 바깥에 미국 외에도 많은 나라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성인들이 모를 리 없다. 그러나 그들은 그 나라들을 그저 주변적인 국가들로 생각한다. 그 나라들의 이름이 직접 언급될 때가 있다 할지라도, 그것은 종종 '공평'을 기하기 위해서이거나 자신의 이야기에 약간의 코스모폴리탄적인 양념을 치기 위해서일 뿐이다. 따라서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진짜' 나라는 일본과 미국뿐이라는 식의 태도이다. 비교의 대상이 늘 미국인 것이다. 다시 말해 영어회화의 세게에서는 오로지 일본과 미국만이 '범주'로서 존재한다. 그리고 다른 모든 국가들은 '우연'으로서만 존재한다. 외국이라는 것이 미국 이외에도 많이 있지만, 미국이야말로 양국의 모방, 대조, 결합 등에 의해 '일본성'이 규정될 수 있는 역사적 비교대상인 것이다.

<ㅉ=199>미국이 곧 '세계'인가

대다수 미국인들은 일본인들의 이런 태도를 아주 당연시하는 듯한 태도이다. 왜냐하면 일본인들의 그런 태도가 자기 나라의 세계적 위치에 대한 그들 자신의 견해와도 아주 멋지게 들어맞기 때문이다. 아시아에 주둔해있는 미군들 사이에서는 미국이 '세계'라는 속어로 불리기도 한다. 고국에서 온 편지는 '세계에서 온 편지'이며, 고국으로 돌아가는 것을 '세계로 돌아가는 것'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표현은 미국의 이데올로기적 자기 이미지를 아주 정확하게 드러내주고 있다. 이 견해에 의하면 미국 바깥에 있는 세계는 미국처럼 진짜가 아니다. 미국 바깥에 있는 세계는 설사 존재한다 할지라도 미국보다 저위(低位)에 존재한다. 따라서 그곳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은 그다지 중시할 것이 못된다. 이런 태도는 특히 아시아에 있는 미국인들에게 강한데, 이곳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은 혼란스럽고 우발적이며 불안정하고 부수적이라는 것이 그들의 생각이다. 이 무의미한 혼란 속에 미국인들은 질서정연하고 합리적인 고국의 이미지를 그리면서 향수를 달랜다.

예컨대, 사고 싶은 물건들이 선반에 가지런히 놓여져 있는 약국 같은 것이 고국의 이미지인 것이다. 고국이야말로 정말로 이해할 수 있는 무언가가 있으며 정말로 감지할 수 있는 무언가가 있는 곳이다. 세계 자체가 바로 거기에 존재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미국인들은 자기 나라를 '보편적인' 나라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다른 모든 나라들(특히 아시아와 제3세계 국가들)에 대해서는 '특수한' 나라라고 생각한다. 일본인들의 생활은 일본적이며, 필리핀인들의 생활은 필리핀적이며, 베트남인들의 생활은 베트남적이다. 그러나 미국인들의 생활은 생활 자체라는<ㅉ=200>것이다. 그것은 구체적인 생활임과 동시에 생활의 이데아, 즉 보편적 이성의 제반 원칙에 가장 부합되는 생활의 이데아라는 식의 사고방식이다.

대다수 미국인들은 자기들의 생활방식이야말로 세계의 모든 사람들이 그 생활에 대해 제대로 알고, 또 선택의 자유가 있다면, 당연히 그것을 선택할 것이라는 뿌리깊은 믿음을 갖고 있다.

1950년대 냉전이 절정에 달했을 때, 미공군이 동유럽 상공으로 날아가 시어즈사의 카탈로그를 도시와 가로에 뿌려야 한다고 진지하게 주장하는 미국인들이 많았다. 동유럽 사람들이 카탈로그에 소개된 그 놀라운 물건들을 보기만 한다면 자기들이 소비에트 당국에 속아왔음을 깨닫고 반란을 일으키리라는 생각에서였던 것이다. 평화봉사단이라는 것도 부분적으로는 비슷한 발상에 기초했다. 즉, 인습에 찌든 마을에 미국인 젊은이가 나타나기만 하면 그 현지인들이 곧 옛 관습을 버리고 열심히 그를 모방할 것이라는 생각에서였던 것이다.

미국의 사회과학에서는 이 순진하고도 건방진 가정이 과학적 객관성이라는 망토를 걸치고 다시 나타난다. 이른바 '전시효과'라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이 미국인 학자들에 의하면 제3세계의 혼란은 식민주의와 제국주의에 의해 초래된 것이 아니라 이른바 '기대상승혁명'에 의해 초래되었다는 것이다. "대중통신매체들을 통해서 그리고 기계, 빌딩, 시설, 소비재, 쇼윈도, 루머, 행정적·의료적·군사적 관행 등의 전시를 통해서" 이 '기대상승혁명'이 현대생활의 제반 측면에 걸쳐 촉발되었다는 설명이다. 그리고 이 '현대생활'의 선구자가 바로 미국이라는 것이다.

미국인들의 이런 태도는 일본을 대할 때 더 강하다. 일본이 미국의 점령지였기 때문이다. 일본에 대해 전혀 공부한 바<ㅉ=201>가 없는 미국인들조차도 점령지에 대한 막연한 역사적 기억을 지니고 있다. 그리고 그 '기억'은 현대적 민주주의 국가를 운영할 줄 모르는 일본인들에게 미국이 그 시범을 보이기 위해 맥아더를 파견했다는 것이다.

언어교육 속에 담긴 교묘한 선전

사정이 이러한지라 미국인들은 미국과 일본의 관계를 선생과 학생의 관계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리고 이런 믿음은 의식적인 견해의 형태가 아닌 무의식적인 가정의 형태를 띠고 있다. 즉, 의식적으로는 이런 견해를 부정하는 사람들도, 그 행동을 보면 그런 가정에서 움직이고 있는 것이다. 미국인들은 내심 자기들은 매사가 질서정연한 사회의 출신이며, 따라서 일본 영토에서는 자기들이 보통 시민에서 선생으로 변하게 된다고 믿고 있다. 그래서 자기 나라에서는 도저히 선생 노릇을 할 수 없는 미국인들도 일본에서는 자기가 선생노릇을 하는 것이 지극히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언어학적 훈련 같은 것도 이곳에서는 아예 필요없다는 투다. 왜냐하면 그들의 실제 역할은 외국어를 가르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미국식 생활방식의 살아있는 예를 제시하는 데 있다는 생각 때문이다. 일본여행이 미국인들 사이에서 그렇게도 인기가 높은 이유들 가운데 하나는 지배계급의 일원으로 대접받으면서 급작스러운 지위상승을 즐길 수 있기 때문이다. 미국에서는 이런 대접을 받기가 불가능하다. 그래서 그들은 "서비스 만점인 일본을 나는 무척이나 사랑한다"고 자랑스럽게 이야기한다.

영어회화의 이데올로기는 바로 이러한 미국인들과 일본인들로부터 태어났다. 강의나 교재에서 미국의 사소한 일생생활적 측<ㅉ=202>면들이 끊임없이 다루어질 수 있는 이유는 바로 이러한 이데올로기 덕분이다. 언어학습에도 이데올로기가 침투할 수 있다는 것을 받아들이기 어려운 독자들이라면, 전쟁 전에 사용되던 독본에 나오는 "전진하라, 전진하라, 병사여 전진하라"라는 유명한 문장을 상기해주기 바란다. 언어교육 속에 담겨져 있는 프로파간다는 특별한 미묘함을 지니고 있다. 주의가 온통 언어학습에만 집중되기 때문에 선전메시지의 진실 여부는 전혀 의문시되지 않는다. 영어교재에 미국식 '생활방식'을 소개하는 그 사소한 대화들을 계속 집어넣는 것 자체가 바로 미국을 선전하는 수단인 것이다. 내 주장을 부정할지도 모르는 독자들을 위해 '낱말바꾸기 연습'에 나오는 다음의 문장들을 예시해보겠다.

He is inteligent but he has no drive.
He is inteligent but he has no money.
He is handsome but he has no money.
He is handsome but he has no girlfriend.
He is young but he has no girlfriend.
He is young but he has no ambition.

학식, 추진력, 돈, 용모, 여자친구, 젊음, 야망, 이것은 바로 자본주의 미국에서 한 인간의 성공 조건들을 쭉 열거한 것이다. 결국 "소유하라, 소유하라, 비즈니스맨이여 소유하라"라는 것이 이 학습의 주제이다.

영어회화의 세계에서 묘사된 미국의 실체

오해를 피하기 위해 또 미국에 대한 내 생각부터 밝혀야겠다.<ㅉ=203>미국은 매우 흥미로운 나라, 공부할 가치가 충분하고도 남음이 있는 나라다. 미국은 실험의 나라였다. 미국이라는 나라 자체가 새로운 세계에 새로운 종류의 사회, 유럽에서 부정되었던 자유와 정의와 평등과 행복의 제반 조건들을 제공하는 새로운 종류의 사회를 건설하기 위한 진지한 시도였다. 이 실험의 기본 원칙들을 세운 건국의 아버지들은 학식이 높은 지성인들이었다. 그러나 미국이 이 약속들을 충족시키지 못했다는 것이 나의 솔직한 생각이다. 미국이 더욱더 진지하게 연구되어야 하는 까닭은 바로 이 때문이다.

그러나 영어회화의 세계에서는 이런 내용이 전혀 없다. 영어회화의 세계에서 묘사되는 '미국'이라는 나라는 실제로 존재하는 미국이 아니라 미국인 영어선생들이 희구하는 바의 미국, 그들이 향수 속에서 그려보는 그러한 미국인 것이다. 영어회화의 세계에서는 오늘날 이 나라에 왜 환멸감과 방향상실감이 그렇게도 만연해 있는지를 배울 수 없을 것이다. 왜 밤이 되면 도시의 거리들이 불안의 장소로 변하는지, 왜 사람들이 자기보호를 위해 무기를 지니고 다녀야 하는지, 왜 가장 급속도로 확대되는 정부관청이 경찰서인지, 왜 대다수 미국 노동자들이 그들의 직업을 무미건조한 것으로 느끼는지, 왜 가정주부들 사이에서 알코올중독과 마약복용이 늘어가고 있는지, 왜 많은 미국인들(주로 비백인들)이 희망도 없는 쓰라린 가난 속에서 살아가는지, 왜 빈민가의 많은 자식들이 문맹의 상태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게 되는지, 왜 미국인들의 인종차별적 심성 속에서 일본인들이 백인 쪽으로보다는 유색인 쪽으로 분류되는지, 영어회화의 세계에서는 이 이유들을 결코 알아낼 수 없을 것이다. 더더욱 문제가 되<ㅉ=204>는 것은 영어회화의 세계에서는 미국에 대한 이런 사실들이 그저 언급되지 않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미국의 이미지를 진실에서 더욱더 멀리 떨어지도록 만들기까지 한다는 것이다. 혼다 가츠이치(本多勝一)의 《아메리카 합중국》을 읽었던 여러 영어회화반 수강생들이 내게 한 말에 의하면, 그의 묘사는 그들이 배운 미국의 모습과는 너무나 거리가 멀어서 그가 틀림없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느낌이라는 것이다.

영어회화와 의사소통 문제

이제 남은 문제는 영어회화가 어떻게 커뮤니케이션을 방해하느냐에 대한 설명이다. 영어회화를 공부한 사람들은 물론 역으로 가는 길을 묻는다거나 물건 값이 얼마냐고 묻는다거나 하는 데는 아주 능숙하다. 그러나 이런 대화들은 여기서 내가 말하는 그런 종류의 커뮤니케이션이 아니다. 영어회화가 어떻게 의사소통을 방해하는가에 대해 딱부러지게 설명하기는 어려운 것 같다. 그러나 다음의 일화는 이 문제를 이해하는 데 크게 도움이 될 것이다.

지금부터 약 5년 전 12월말의 밤에 나는 카나자와(金澤)의 한 사찰에서 자정을 맞춰 울려퍼지기 시작한 커다란 종소리를 듣고 있었다. 이미 수시간 전부터 눈이 내리고 있었다. 그 겨울의 첫눈이었다. 새해가 새하얀 눈빛 세계의 모습을 하고 새롭게 다가왔던 것이다. 나는 눈빛 세계에 울려퍼지는 거대한 종소리를 들으면서 나름대로의 감회에 젖어 있었다. 이때였다. 누군가 다가와 이런 소리를 하는 것이었다. "실례합니다. 영어로 말씀을 나눌 수 있겠습니까?" 느닷없는 불청객에게 왈칵 짜증을 느꼈지만 "물론이죠"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자 그는 그 판에<ㅉ=205>박은 질문공세를 퍼붓기 시작했다.

Where are you from?
How long have you been in Japan?
Are you sightseeing in Kanazawa?
Can you eat Japanese food?
Do you understand what this ceremony is about?

그가 쏘아대는 이런 쓸데없는 질문들 때문에, 나는 은은한 종소리아 차가운 밤공기 내음으로부터 밀려나와 그 뚫을 수 없는 쇄국의 벽 저편으로 내동댕이쳐졌다. 그의 이런 질문은 "I have a book"이라는 무의미한 소리와 마찬가지로 이 상황에 전혀 걸맞지 않은 것이었다. 그의 질문은 사실상 건성이랄 수밖에 없었고, 또 나의 대답에 정말로 관심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말하자면 그는 나라는 개인을 상대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마음속에 그려져 있는 외국인의 표상에 질문을 던지고 있을 뿐이었다. 또 내게 말을 하고 있는 사람도 실제로는 그 일본인 개인이 아니었다. 그가 암기해서 던지고 있는 질문들은 판에 박은 표준적 형태를 취했으며, 따라서 그 문장들과 그 사람 자신의 성격, 생각, 느낌 사이에 어떤 의미있는 관계가 존재한다고 믿기가 어려웠다. 그것은 구체적인 두 인간 사이의 대화라기보다는 오히려 두대의 녹음기가 말을 주고 받는 그러한 것에 가까웠다.

마침내 그가 내 곁을 뜨자, 내 불편한 모습을 짐짓 즐기면서 지켜보고 있던 한 사나이가 내게로 다가왔다. 그리고 일본말로 점잖게 이렇게 말했다. "저런 식으로 영어를 하는 일본인들은 사실 일본을 제대로 모르는 사람들입니다. 그리 신경쓰실 필요가 없습니다." 나는 그의 이 지적에 마음이 개운해졌다. 그리고<ㅉ=206>웃음기를 되찾기 시작했다. 쇄국의 벽이 다시 사라져버렸던 것이다.

영어회화의 전형적 특징은 추종적 태도와 판에 박은 어투, 지독히 무미건조하고 지루한 단조로움, 그리고 화자(話者)의 정체나 개성이 전혀 드러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언어심리학 분야에서 많은 연구를 한 나카오 하지메의 이야기에 의하면, 적어도 극단적인 경우에는 영어회화가 강박성까지 띠게 되는데, 이 강박성은 말하는 사람에게서 자신의 경험을 제대로 살리지 못하게 하는 실어증과도 유사하다는 것이다. 나카오(中尾)는 이런 이야기 끝에 내게 다음과 같은 폴 굿맨(Paul Goodman)의 한 글귀를 소개해주었다.

…고통스러울 정도로 정확히, 표준적 어투를 자신의 구체적 상황이나 목적에 따라 변화시키지 못한 채 앵무새처럼 그대로 암송하는 강박당한 인간 역시 실어증 환자이다. 그는 언어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물건을 다루듯 언어를 다룬다. 그가 말하는 모든 문장은 사전과 문법책에서 따온 판에 박은 문구들이다. 따라서 만약 상대방의 대답이 그의 예상과는 달리 살아있는 표현으로 다가오거나 또는 그의 충동적 욕구가 너무나 강렬해서 그 딱딱한 언어사용에 질식감을 느낀다면, 그는 스스로 무너져내릴 수밖에 없다.

재미있는 사실은 이 설명에 아주 딱 들어맞는 사람들이 보통 가장 부지런한 영어회화반 수강생들이라는 점이다.

미국식 개성을 끊임없이 강요

영어회화를 하면서 이처럼 극단적으로 소외된 언어사용방식에<ㅉ=207>빠지는 사람들의 수는 극소수에 불과하다. 그러나 대다수의 사람들도 극도의 개성 변화 ― 아마 개성의 상실이라는 표현이 더욱 적합할지도 모른다 ― 를 강요받게 된다. 의기(意氣), 기지(機智), 노여움, 존경, 애정을 나타내는 일본적 표현양식이라든가 일본적 형식 같은 것 역시 영어로는 쉽게 전달할 수 없을 것이다. 게다가 영어회화 교재들은 수강생들에게 체질에도 맞지 않는 '미국식' 개성을 끊임없이 강요한다. 그런 어색한 상태에서 서로 대화를 나누라는 것이다. 더욱이 이 교재에 등장하는 주인공들은 인간적 개성을 별로 느낄 수 없는 그러한 모습들이다. 그들의 모습은 중산층 백인 미국인들의 캐리커쳐일 뿐이다. 막연하고 딱딱한 인상만 풍기는 이 주인공들은 가족이나 친지에게 마땅히 내보여야 할 친절함도 나타내지 않으며타인들에게 마땅히 내보여야 할 존중심도 나타내지 않는다. 이런 공허한 개성의 소유자들이 영어회화 교재에서 주인공들로 등장하기 때문에, 그속에서는 인간적 교호관계가 차단될 수밖에 없다. 이 점이 바로 영어공부를 가로막는 중요한 장애요인들 가운데 하나이며, 이래서 많은 사람들이 자존심 때문에 영어회화를 기피하게 된다. 이런 문제점은 엄격한 언어훈련을 한다고 할지라도 쉽사리 극복될 수 없다.

그리고, 이 문제는 일본이 외국인들을 대하는 데 익숙치 못한 섬나라이기 때문에 생겨난 것이 결코 아니라, 내가 앞에서 계속 거론해온 영어회화의 이데올로기 때문에 빚어진 것이라 할 수 있다. 영어회화라는 하위문화 바깥에서 영어를 배운 사람들 ― 예컨대, 전전(戰前)에 영어를 공부한 사람들이라든가 미국으로 이민해서 생활하는 사람이라든가, 미군기지 같은 데서 일 때문에 영어를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조금씩 익히게 된 노동계급 사<ㅉ=208>람들 ― 이 쓰는 영어는 그 성격이 아주 판이하다. 더욱이, 영어회화 속에 감추어져 있는 이데올로기를 자각하고 그것을 의식적으로 거부하면서 영어를 공부한 사람들의 경우는 훨씬더 자연스럽고 원활한 형태의 영어를 사용한다. 영어회화의 세계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일수록 문화적 장벽이라는 것을 더욱더 찾아보기 힘들다. 예컨대, 내가 외국인들과의 접촉이 별로 없는 시골에 가보았을 때, 나는 그곳 사람들이 영어회화의 세계에 있는 사람들보다 훨씬더 자연스럽고 개방적이고 당당한 태도로 대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거기에서는 늘 내가 그들과 똑같은 사람으로 대해졌다. 예컨대, 내가 일본음식을 잘 먹는다든가 일본말을 술술 한다든가 해도, 그들은 아무런 놀라움도 나타내지 않는다. 나 역시 같은 사람이라는 사실을 당연시하기 때문이었다. 노동계급의 사람들 역시 그 대다수가 마찬가지다.

다시 한번 분명히 밝히지만 나는 영어회화의 세계가 유용하게 작동할 수 있다는 사실을 부정하는 사람이 아니다. 동시에 나는 서구의 거친 공격으로부터 자국문화의 보다 섬세한 면들을 보호하기 위해 일본인들이 본능적으로 방어자세를 강화시킬 수 있다는 사실도 아주 잘 이해하는 사람이다. 그러나 문제는, 일본을 방문하는 영어상용권의 많은 방문객들의 경우는 사정이 나와 다르다는 것이다. 그들은 거의 전적으로 영어를 쓰는 하위문화 속에서 지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그것이 하위문화라는 사실도 모르며, 그들이 일본적이라고 생각하는 문화와 개성적 특징과 태도가 기실은 영어회화의 이데올로기적 결과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게 된다. 이 점이 바로 숙제이다.

<ㅉ=209>아시아와 제3세계의 연대를 위한 언어로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여기서 서구의 방문자들과 의사소통을 더욱 원활하게 하기 위해 일본인들이 노력해야 한다고 주장할 생각은 없다. 서구인들을 어떻게 대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중요한 것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영어회화의 이데올로기를 척결하면서 영어를 문화지배의 언어로서가 아니라 아시아와 제3세계의 연대를 위한 언어로 변화시키기 시작해야 한다는 것이다. 본인들이 느끼는 그 모든 영어에 대한 '특별한 어려움들'이 정말이지 마치 안개가 걷히듯 사라지게 될 것이다. 백인 선생들만을 고용하는 외국어학원들에 대해서는 보이콧운동이 전개되어야 한다. 영어를 공부하고자 하는 일본인들은 서로들 앞장서서 동남아시아인들과 스터디그룹을 조직하여 아시아의 문화와 역사와 정치 그리고 아시아적 표현을 반영하는 새로운 아시아판 영어를 창출해야 한다. 그리하여 만약 아시아를 방문하는 미국인들이 새로운 아시아판 영어를 제대로 못 알아듣겠다고 투덜거리게 된다면, 그때는 외국어학원에 나가야 할 사람은 바로 그들이 될 것이다. (천희상 옮김)

* 출전 ― Y. Kurokawa, ed., Essays on Language, Tokyo: Kirihara Shoten (197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