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오르는책/詩

근대시와 그 고향: 보들레르와 이성복

엔디 2005. 1. 3. 22:36
―보들레르에 관한 몇 가지 모티프와 그 이성복 초기시를 향한 영향관계 소고小考


1921년 안서의 번역시집 『오뇌懊惱의 무도舞蹈』를 통해 처음으로 소개되고, 1941년 미당의 『화사집花史集』에 실린 「수대동시水帶洞詩」에서 "샤알·보오드레―르처럼 설ㅅ고 괴로운 서울女子를 / 아조 아조 인제는 잊어버려"라고 노래된 보들레르는 프랑스 상징주의의 시조始祖로서 여러 가지 층위로 한국시에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시적 영향이라는 것은 마치 복류伏流하는 물과도 같아서 시집으로 묶여 출간된 '땅위'의 결실만으로는 알아보기가 쉽지 않다. 그럼에도 우리는 그 결실을 비교함으로써 그 사이의 근친관계parenté를 알아볼 수 있으리라 믿는다. 그 중에서도 이성복의 경우는 보들레르와의 관계가 표면적으로 상당부분 드러난 경우에 속한다. 그것은 '이성복적 풍경' 속에서 보들레르가, 이성복 시의 가구家具로서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모습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결론을 대신하여

한 도시가 다른 도시의 과거로 완전히 함몰될 수 없듯이, 한 시인도 다른 시인의 과거로 환원될 수는 없다. 이성복을 이루는 요소는 보들레르 이외에도 많다. 가령 이성복의 또다른 스승은 카프카였다. 둘 사이의 유사성을 고찰해 보는 것은, 필연적으로 둘 사이의 차이점을 밝히는 일에 골몰하게 만든다. 그러나 보들레르가 이성복 시의 기본적 토양을 마련해주었다는 점은 분명한 것 같다. 둘 사이의 차이점이 있다면 '가족'의 문제를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이성복은 스스로의 시적 여정을 또한 '아버지―어머니―당신'의 세계로 압축시킨 일도 있는 반면에, 보들레르는 가족을 부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최근의 이성복은 보들레르에게 이렇게 잔소리한다:

수레바퀴가 돌아도 중심은 돌지 않는다. 테두리가 돌면 중심 축은 나아간다. 중요한 건 이뿐, 테두리가 중심 축 폼을 잡아서는 안 된다. 테두리가 돌기에 중심 축이 나아가는 게 아니라, 중심 축이 나아가기에 테두리는 도는 것. 우리는 모른다, 누가 이 수레를 어디로, 언제까지 끌고 가는지. 영원한 수레는 나아가고 헛되이 바퀴는 돌고 도는 것. 아 미치겠다 보들레르야, 보채지 좀 마라. 네 헛소리가 자갈밭 구르는 수레바퀴 소리보다 크구나. 어째 넌 그리 말귀를 못 알아듣냐.

- 이성복, 「보채지 좀 마라」 전문全文

그 잔소리의 근거는 보들레르의 「독자에게」의 두 줄이다: "우리 숨쉴 때마다, 안 보이는 강물처럼 죽음은 / 희미한 탄식 소리 지르며 허파 속으로 내려간다" 이성복이 얻은 세계관이 보들레르보다 더욱 현세지향적이라는 것은 바로 이곳에서 알 수 있다. 그것이 가족주의와 '음양'의 힘이다.

그러나 도시의 삶을 통해 근대성을 추구하고, 그것을 아름다운 시로 형상화하는 모습은 두 사람이 같다는 것은 기억해두어야 한다. 새로운 시는 아마도 거기서 올 것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