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인위적인 10진법의 수를 가지고 시대를 구분하는 일이란 항상 무리가 따르게 마련이다. 그러나 일년year과 십년decade과 백년century이라는 단위가 실제 사람들의 시간 인식에 보편적으로 영향을 끼치고 있으므로 10진법을 기준으로 한 시대 구분도 타당한 면을 지니고 있음은 부인할 수 없다.
버릇삼아 '여성의 시대'라 일컬어지는 21세기가 왔다. '21세기는 여성의 시대다.'라는 명제를 기준으로 20세기(와 그 이전 시대)를 바라보면 20세기(와 그 이전 시대)는 '남성의 시대'가 된다. 오랜 기간 동안 남성 우월주의(혹은 남성 중심주의)의 한 형태인 가부장제에 여성은 눌려 있었다. 그러던 것이 20세기에 들어오면서 페미니즘의 노력으로 가부장제라는 옳지 못한, 억압적인 상태에서 벗어나려는 움직임이 시도되었다.
한편, 20세기는 남성의 시대이면서 동시에 '국민 국가'의 시대였다. '제 2차 세계대전'으로 극명하게 나타나듯이 내셔널리즘이 활개를 치는 시대였던 것이다. 제국주의 열강(동맹국)과 연합국, 그리고 피해국 또는 식민지국가로 나뉘어지는 국민 국가의 시대에 내셔널리즘이라는 이데올로기는 국가와 개인의 방향을 한 길로 잡아버렸다.
그렇다면 기존의 억압적인 상태와 내셔널리즘의 관계를 알아보고 이것을 '젠더'와 연관시켜 살펴보는 시각이 생기는 것은 '여성학' 또는 '여성사'를 연구하는 이들에게 당연한 일일 것이다. 국민 국가의 성립과 그에 따른 '국민화 프로젝트'에서 보여지는 내셔널리즘과 '젠더'로 일컬어지는 페미니즘의 입장이 그간 어떻게 협력되는지 혹은 갈라졌는지. 그리고 그것은 어떤 의미를 가지고 어떤 문제점을 가지는지. 또 그것이 현재에 이르러 갖는 의미는 무엇이며 현재의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이런 문제들은 현재의 페미니즘 담론에서 중심에 위치하는 문제들일 것이다. 더욱이 2차 대전과 '젠더'를 이야기하는 데에 있어서 빼놓을 수 없는 문제인 일본군 '위안부' 문제와 관련지어 20세기의 페미니즘과 내셔널리즘을 고찰하는 것은 현 상황에서 필수적인 문제라고도 보여진다.
2.
우에노 찌즈꼬 『내셔널리즘과 젠더』는 이와 같은 입장 속에서 '젠더사'라고 불리는 '역사 재해석historical revision'에 성공하고 있다. 저자는 먼저 일본 페미니즘사를 고찰하였다. 일찍이 서양문물을 들여온 일본에서는 페미니즘의 역사도 길었다(우에노 찌즈꼬 1999, 4). 하지만 근대 일본의 페미니스트들의 입장을 정리해보고 고찰해본 결과 '유감'스러울 정도로 참담한 결론이 내려졌다. 그것은 "일본의 페미니즘은 역사상 국민 국가를 초월한 적이 없었다"라는 것이다(우에노 찌즈꼬 1999, vi). 아마도 그 사실은 근대 일본의 위치와 관련되어 있을 듯 싶다. 일본은 당시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을 이기고 "신세기를 구미 열강과 어깨를 겨룰 동양의 유일한 신흥국"으로서의 흥분과 열광에 싸여 있었다(백영서 1999, 8). 그러한 분위기가 일본과 일본인을 내셔널리즘에로 과도하게 기울게 하였고 페미니스트들도 결국 이를 벗어나지 못하게 된 것이다.
페미니스트들의 내셔널리즘이라는 것은 최근에 와서 '역사의 재심'이 이루어지면서 조망받게 된 것이다. 페미니스트들의 전쟁협력이 최근 '텍스트 다시 읽기'를 통해 속속 발견되고 있다. 이치카와 후사에, 히라츠카 라이쵸, 다카무레 이츠에 등 일본 페미니즘을 대표하는 페미니스트들이 '일본부인단체연맹'을 통해 전쟁에 협력하거나 '우생優生 사상'에 기초한 글이나 이나 '천황 찬미 문장'을 쓰면서 사상가로서 전쟁에 협력하였던 사실이 밝혀진 것이다.
이러한 페미니스트들의 궤적은 크게 '참가형integration'과 '분리형segregation'으로 나뉘어지는데, 그 둘 모두가 내셔널리즘과의 관계를 바탕으로 하여 설정된 것이기 때문에 결국 진정한 의미의 여성 해방과는 어느 정도의 거리를 갖게 되었다고 저자는 말한다. '분리형'은 동맹국들이 취했던 방식으로 '젠더'를 중심으로 총력전 체제하에서도 남녀의 역할분담을 무너뜨리지 않은 것이다. 이러한 방식은 남성과 여성으로 국민 국가에서의 젠더 경계를 명확하게 함으로써 여성을 국민 국가의 '2류 시민'으로 묶어두게 된다. 즉, "'국가를 위해 죽을 수 있는 명예를 가진 사람'과 '국가를 위해 죽을 수 있는 명예를 갖지 못한 사람'으로 나뉘어, 전자만이 '국민' 자격을 획득하게" 되는 것이다. 물론, 일본의 경우 여성 위생병이나 정신대를 통한 여성의 '봉사 기회'가 있었던 것은 사실이나 그것은 후방 지원 등의 보조 업무를 위한 것이었다. 페미니스트들 중에서도 '차이파'는 '차이 있는 평등 different but equal'이라는 수사에서 보여지는 바대로 '분리형'을 지지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참가형'은 연합국에서 적극적으로 채용했고 여성 또한 이에 응했다. '참가형'은 여성 징병이라는 특정한 제도를 그 근간으로 하고 있다. 이것은 여성이 전투에 참가함으로써 '국가를 위해 죽을 수 없는 2류 시민'에서 '국가를 위해 죽을 수 있는 명예를 가진 진정한 국민'으로 위치를 바꾸려는 시도였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전투에 참가하는 것으로 전시 중의 젠더 경계를 뛰어넘을 수 있다고 그들은 믿었다. 그러나, 조금만 더 생각해 보면 이것이 옳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참가형'의 한계는 분명하다. '남성과 동등하게'를 표방하는 '참가형' 입장에서는 기존의 남성 권력적인 억압형태에 편입되는 것으로 '1급 시민'이 될 것으로 기대했지만, 저자에 따르면, 그렇게 된다 해도 스스로의 '여성성'의 상실이라는 크나큰 손해를 입게 되므로 진정한 의미에서의 '여성해방'이라고 하기 어렵다는 문제점이 있다.
바로 여기서 '참가형'과 '분리형'의 어느 쪽도 선택할 수 없는 페미니즘의 딜레마가 생겨나게 되는 것이다. 이 딜레마가 생겨나게 되는 원인을 저자는 내셔널리즘으로 보고 있다. 국민 국가라는 틀 속에서의 여성해방이라는 개념은 필연적으로 '국가에 참가함' 통해 '국가에 통합'되어버린 일본 페미니즘 역사의 전철을 밟게 될 뿐이다.
저자는 "그러므로 페미니즘의 목적은 '국민 국가의 초월'"이라고 보고 있다. 그것은 "'근대·가부장제·국민국가'라는 틀 속에서는 '남녀 평등'이란 원리적으로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보다 궁극적인 목적은 '여성'의 해체라고 저자는 말하고 있는데, 그것은 '젠더' 경계를 허무는 것을 뜻하므로 '남성'의 해체와도 같은 뜻이 된다.
그러한 일본의 페미니즘 역사와 관련하여 가장 근본적인 물음을 던지는 것은 바로 일본군 '위안부' 문제이다. 기존에 '위안부'는 범죄로 인식되지 않았거나 '젠더' 개념을 빼고 '민족' 개념만을 적용한 범죄로 인식되었다. 그러한 인식이 나타나게 된 배경에는 '가부장제' 아래의 한일 내셔널리즘이 관계하고 있다. 또 그 외에도 여러 가지 패러다임들이 제시되어 '위안부' 문제를 왜곡시키거나 축소시켰다.
대표적으로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민족의 치욕'이라고 인식하는 '가부장제 패러다임'이 있다. 이 패러다임은 '여성'을 '남성'의 소유물로 인식하여 '위안부' 여성들을 일본의 '전리품' 정도로 여기는 경향이다. 이런 패러다임 하에서 한국 남성들은 '위안부' 문제를 '창피한 과거'로 인식하여 '위안부' 여성들이 과거의 사실을 말하는 것에 대해서 '민족적 자존심이 상처받는다'는 것을 이유로 들어 반대하는 경향조차 있다. 그러나 이런 경향은 '가부장제 패러다임'의 전형적인 모습이며 그 자체로 '위안부' 여성들에게 가해지는 또하나의 성폭력이라 할 수 있다. 또, 이 패러다임 하에서는 '위안부' 여성들의 개인보상조차도 불가능하게 된다. 일본 정부가 "1965년 한일 조약으로 보상이 모두 해결되었다."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성의 신체에 대한 자기 결정권이 스스로에게 속한다는 주체성이 인지됨에 따라 '가부장제 패러다임'의 모순이 드러나게 되었다.
이 밖에도 '위안부' 문제를 "우발적이고 비조직적인 '전시 강간'"으로 파악한 '전시 강간 패러다임', '강제 징용' 여부와 '위안부' 여성들의 '금전 수수'에만 초점을 두고 이를 '매매춘賣買春'으로 왜곡시킨 '매춘 패러다임', '매춘 패러다임'에 대항하려다 피해자의 '임의성'을 부인하는 딜레마에 빠진 '성 노예제 패러다임' 등이 있었다. 하지만, 어느 패러다임도 '위안부' 문제의 가장 중요한 부분을 집어내지는 못하였다. 심지어 어떤 경우에는 '위안부'가 일본군에 '봉사'하였다고 인식하기도 하였다.
저자는 "그렇다면 이 '위안부' 문제의 '진실'은 무엇인가"를 묻고 그에 답하기를
라고 말한다. 즉, '진실'이라고 여겼던 '위안부'를 보는 기존의 시각들에는 일정부분 모순이 있음이 여기서 밝혀졌다는 것이고, 이제 '위안부' 여성들의 증언에 따라 새롭게 씌어지는 '역사'가 등장할 차례라는 것이다. 이 부분이야말로 역사의 '재심'이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여성사에 대해 기술할 때에 가장 큰 역할을 하는 것이 '젠더'이다. 어떤 사람은 '여성사'가 지나치게 '편향적'이라는 지적을 하기도 하는데, 실제로 현재까지의 역사 기술은 모두 남성 중심적으로 '젠더화'된 시각이었던 것을 생각하면 "모든 역사는 '편향적'이고 '정치적'이다."라는 명제를 이끌어낼 수도 있다. 얼핏 보기에 '정사'란 '젠더 중립적'인 역사를 이르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남성 중심성이 있다. 그러나, 여성사의 패러다임 전환 이후 여성이 '역사의 주체'로 인식되면서 여성의 '가해 책임'이 문제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러한 '가해자 사관' 조차도 국민 국가를 초월하지 못하여 매저키즘으로 끝나버리게 될 수도 있다.
저자는 이런 의미에서 "내셔널리즘은 극복되어야만 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너무 쉽게 개인과 국민 국가를 동일시하는 함정에 빠지게 된다. 그것은 '순수한 감상'에서 비롯된 일이지만, 그보다는 '다른 회로'를 발견해야할 필요가 있다. 개인과 국가의 동일시란 내셔널리즘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 과정에서 나타나는 "우리"라는 개념은 하나의 억압 구조로 작용할 가능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또 지속해서 페미니즘의 국민 국가 초월을 주장해온 저자는 마지막으로 "페미니즘은 근대의 산물이 아니라 근대를 물어 찢고 나온 '근대의 이단아'이므로 '일국 페미니즘'을 지양하고 국가를 초월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사실, '자매 연대의 전지구화 Sisterhood is global'이라는 낙천적 보편주의는 비현실적인 것이지만 "내"가 집단과 대비해 갖고 있는 수많은 "차이"에 대한 생각을 통해 '여성'으로 환원되지 않는 것처럼 '국민'으로도 환원되지 않는 "나"를 인식하는 것이 스스로에 대한 제대로 된 인식이며 적어도 그런 인식이 보편화되어가는 것이 약자 또는 소수의 입장에 서는 페미니즘의 입장이라고 저자는 말하고 있다.
3.
'위안부' 문제를 중심으로 한 저자의 논의의 방식은 시의적절하고도 명쾌하다. 그러한 논의의 중심에는 '젠더' 개념과 '내셔널리즘'이 위치하고 있다. 그간 지속적으로 '젠더 중립성의 신화'를 깨기도 하고 '내셔널리즘'을 집요하게 비판해온 저자의 입장이 전체를 관통하고 있어 일관성을 유지하고 있다는 점도 돋보인다.
그러한 논의방식으로 저자는 일본군 '위안부'의 정당성을 주장하는 모든 패러다임을 다양한 논리로 비판하는가 하면, 그런 패러다임에 반대하여 나온 새로운 패러다임에서도 '가부장제'의 요소를 찾아 비판하고 있다. 그러한 비판 속에서 유독 눈에 띄는 것은 실천성이다. 저자가 "여성학은 이론 그 자체가 실천"이라는 말을 하고 있기도 하지만, 저자의 논조는 더더욱 실천적인 목소리를 내고 있다. 그것은 그가 "'위안부' 문제는 과거의 일이 아니라 현재의 일"이라고 하는 데서도 충분히 짐작해 낼 수 있는 내용이다. 역사학자가 아닌 사회학자로서의 저자의 모습이 잘 드러나는 대목이라고도 할 수 있다.
위와 같은 방법론상에서 보여지는 저자의 역사관은 "상대주의" 사관이라고 보여진다. 소위 '역사적 진실'이라는 것이 절대성을 가지지 않고 '역사의 재심'을 통해 상대화될 수 있다는 시각은 적어도 '위안부'와 관련하여 알려진 '진실'에 관해서는 적절한 대응이 될 수 있다. 게다가 '오럴 히스토리'가 '문헌 자료'보다 열등한 종류의 자료가 아니라는 것을 조목조목 반증함으로서 '위안부' 여성들의 '증언'에 무게를 실어준 점도 저자의 공헌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또, 내셔널리즘에 대한 비판에서도 저자의 뛰어난 인식은 잘 드러난다. 극단적으로는, 흔히 말하는 집단주의의 일종이라고도 볼 수 있는 내셔널리즘에 대한 고찰을 통해 저자는 내셔널리즘 그 자체야말로 여성을 포함한 약자나 소수집단의 인권을 침해할 공산이 크다는 것을 나타내고 있다. 흔히 '민족주의' 혹은 '국가주의'로 번역되는 내셔널리즘은 "나"보다는 "국가"와 "민족"을 우선 순위에 놓는 하나의 이데올로기이다. "국가"와 "민족"이라는 말은 "우리"라는 말과 일맥상통하는 면이 있으며 "우리"라는 말 속에는 필연적으로 다수집단 중심의 세계인식이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이런 거대담론 앞에서 "나"의 인권은 온전히 살아남지 못한다(정현백 2000, 100). 이러한 입장은 이미 사회주의 페미니즘에서의 "여성 문제가 계급 문제에 종속된다"는 주장에서 익히 경험했던 여성 문제에 대한 경시이다(한국여성연구소 1999, 41-44). 저자는 어떠한 종류의 억압도 인정할 수 없다는 입장을 취하고 있다. 여성학자이면서 끊임없이 마이너리티에 관심하는 저자의 방향성이 잘 나타나 있다고 볼 수 있다.
4.
하지만 어떤 의미에서 『내셔널리즘과 젠더』는 아주 민감한 사안을 다루고 있다. '위안부' 문제가 관련된다면 어느 정도 예상이 가능하듯이 '역사의 재심'이 그 첫 번째 문제라 할 수 있다. 저자의 집요한 논증과 근거 제시에 "정사(正史)"가 상대화되었다. 그러면서 "어떠한 마이너리티도 역사를 재구성할 수 있다"는 유(類)의 말을 저자는 하고 있다. 상대주의란 소수의 입장을 존중한다는 의미에서 아주 필요한 것이고 인권적인 것이라 할 만하지만, 지나친 상대주의는 어떤 면에서 비인권적인 부분까지도 인정하는 오점을 남길 수 있다. 즉, 현재까지 정사(正史)라고 믿어져 왔던 것들이 상대화되었다고 하는 것은, 그 자리에 '새로운, 마이너리티를 위한 역사'가 자리잡을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하는 동시에 기존의 '정사(正史)'까지도 부정하지 못하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는 것이다. '역사적 진실'이 상대화될 수 있다는 명제 하나에만 지나치게 이끌려 '역사 재심' 그 자체에만 경도하지 않았는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또 다른 측면에서, 이 상대주의는 니힐리즘으로 빠질 수 있는 위험한 사상이기도 하다. '어떠한 역사도 옳을 수 있다'는 명제는 결국 '어떠한 역사도 옳지 못할 수 있다'는 명제로 환원되게 마련이기 때문이다. 물론, 저자는 「서문」에서 이에 대해 "니힐리즘이라기보다는 그렇기 때문에 소리 높이는 것을 단념해서는 안 된다고 하는 마이너리티의 권한을 위한 주장이었습니다."라고 나름의 변명을 내세우고는 있다. 하지만, 이 경우는 더 심각하다. '소리 높임'이라는 측면에서 본다면 결국 소수집단이나 약자보다는 다수집단이나 강자의 논리(소리)가 더 잘(크게) 받아들여질 수 있다는 점에서 오히려, 본의 아니게, 기존 체제의 유지를 돕는 역할을 하게 될 수도 있는 것이다.
또, 저자는 제국주의의 내셔널리즘은 물론, 피해국(한국)의 '대항 내셔널리즘'조차도 비판하고 있는데, 저자 나름대로는 "내셔널리즘이란 '이룰 수 없는 약속'으로 마이너리티를 동원하기 위한 상징"이므로 '대항 내셔널리즘' 내에서도 여성이란 마이너리티에 지나지 않는다는 저자의 인식에 따른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실제로 민족주의를 지나치게 강조하다 보면 당위적으로 그것보다 우위에 있어야 할 민주주의나 약소집단의 인권 등이 과소평가될 위험을 갖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또, 동아시아에 있어서는 '민족 문화'라는 이름으로 가부장제와 봉건적 유제를 포함한 지난한 과거의 인습들이 재현되거나 강화될 수도 있다(정현백 2000, 100-101). 하지만 "민족"이 가진 힘의 효과라는 것도 또한 엄청나다는 것이 20세기를 통하여 밝혀진 것도 무시 못할 사실이다. 그 가장 큰 예로 동서 독일의 통일을 들 수 있다. 그들이 통합의 즈음에 '우리는 하나의 민족이다 Wir sind ein Volk'라는 구호가 큰 역할을 했다는 것은 저자도 들고 있는 예이지만, 그만큼 민족이라는 개념이 할 수 있는 일은 엄청나다는 것이다. 또, 공통의 언어·문화·경험·상징·역사 등을 가지고 할 수 있는 사회적 의사소통 능력을 보더라도 저자의 탈민족주의는 민족주의의 폭발력을 과소평가하는 경향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강만길 외 2000, 53-57). 민족주의의 폭발력이 엄청나다면 민족의 그 폭발력의 방향을 바꾸어 여성 문제를 해결할 수도 있지 않았을까 하는 질문이 지나친 희망적 언설이라고는 생각지 않기 때문이다.
5.
마이너리티는 어느 집단에서고 있게 마련이다. 수천 수백 년간 역사의 마이너리티가 바로 '여성'임을 생각할 때 저자가 노력하고 있는 젠더사에 대한 의의는 분명하다. 성의 구별없이 전 정사(正史)를 '젠더화'하려는 노력이 결실을 맺어 그간의 역사란 모두 남성사였다는 것이 밝혀진 참이다. 역사적으로 보이는 '젠더 중립성의 신화'가 깨어진 것이다. 또, 20세기 근대 내셔널리즘 하에서의 마이너리티이기도 한 '여성'의 입장에서는 '내셔널리즘을 젠더화Engendering nationalism'하는 입장을 취하여 근대 국민 국가에서의 '젠더 중립성의 신화'를 격파하였다. 이런 면에서 이 책의 의의를 찾을 수 있다고 하겠다. 그 중에서도 역사의 끊임없는 현재성을 강조하였던 점은 무엇보다 현재를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 큰 도움이 되었다는 것을 부인하기 어렵다. 21세기를 살아갈 여성이 고민해야 할 가장 큰 부분이 바로 '내셔널리즘'과 '젠더'라는 것을 이해한다면 이 책의 의의는 새삼스럽게 다가올 것이다.
참고서적
우에노 찌즈꼬. 1999. 『내셔널리즘과 젠더』. 이선이 옮김. 박종철 출판사.
강만길 외. 2000. 「좌담: 통일시대를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창작과비평』 2000년 가을호.
백영서. 1999. 「20세기형 동아시아 문명과 국민국가를 넘어서 - 한민족 공동체의 선택」. 『창작과비평』 1999년 겨울호.
정현백. 2000. 「통일운동과 여성주의」. 『창작과비평』 2000년 가을호.
한국여성연구소. 1999. 『새 여성학 강의』. 동녘.
인위적인 10진법의 수를 가지고 시대를 구분하는 일이란 항상 무리가 따르게 마련이다. 그러나 일년year과 십년decade과 백년century이라는 단위가 실제 사람들의 시간 인식에 보편적으로 영향을 끼치고 있으므로 10진법을 기준으로 한 시대 구분도 타당한 면을 지니고 있음은 부인할 수 없다.
버릇삼아 '여성의 시대'라 일컬어지는 21세기가 왔다. '21세기는 여성의 시대다.'라는 명제를 기준으로 20세기(와 그 이전 시대)를 바라보면 20세기(와 그 이전 시대)는 '남성의 시대'가 된다. 오랜 기간 동안 남성 우월주의(혹은 남성 중심주의)의 한 형태인 가부장제에 여성은 눌려 있었다. 그러던 것이 20세기에 들어오면서 페미니즘의 노력으로 가부장제라는 옳지 못한, 억압적인 상태에서 벗어나려는 움직임이 시도되었다.
한편, 20세기는 남성의 시대이면서 동시에 '국민 국가'의 시대였다. '제 2차 세계대전'으로 극명하게 나타나듯이 내셔널리즘이 활개를 치는 시대였던 것이다. 제국주의 열강(동맹국)과 연합국, 그리고 피해국 또는 식민지국가로 나뉘어지는 국민 국가의 시대에 내셔널리즘이라는 이데올로기는 국가와 개인의 방향을 한 길로 잡아버렸다.
그렇다면 기존의 억압적인 상태와 내셔널리즘의 관계를 알아보고 이것을 '젠더'와 연관시켜 살펴보는 시각이 생기는 것은 '여성학' 또는 '여성사'를 연구하는 이들에게 당연한 일일 것이다. 국민 국가의 성립과 그에 따른 '국민화 프로젝트'에서 보여지는 내셔널리즘과 '젠더'로 일컬어지는 페미니즘의 입장이 그간 어떻게 협력되는지 혹은 갈라졌는지. 그리고 그것은 어떤 의미를 가지고 어떤 문제점을 가지는지. 또 그것이 현재에 이르러 갖는 의미는 무엇이며 현재의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이런 문제들은 현재의 페미니즘 담론에서 중심에 위치하는 문제들일 것이다. 더욱이 2차 대전과 '젠더'를 이야기하는 데에 있어서 빼놓을 수 없는 문제인 일본군 '위안부' 문제와 관련지어 20세기의 페미니즘과 내셔널리즘을 고찰하는 것은 현 상황에서 필수적인 문제라고도 보여진다.
2.
우에노 찌즈꼬 『내셔널리즘과 젠더』는 이와 같은 입장 속에서 '젠더사'라고 불리는 '역사 재해석historical revision'에 성공하고 있다. 저자는 먼저 일본 페미니즘사를 고찰하였다. 일찍이 서양문물을 들여온 일본에서는 페미니즘의 역사도 길었다(우에노 찌즈꼬 1999, 4). 하지만 근대 일본의 페미니스트들의 입장을 정리해보고 고찰해본 결과 '유감'스러울 정도로 참담한 결론이 내려졌다. 그것은 "일본의 페미니즘은 역사상 국민 국가를 초월한 적이 없었다"라는 것이다(우에노 찌즈꼬 1999, vi). 아마도 그 사실은 근대 일본의 위치와 관련되어 있을 듯 싶다. 일본은 당시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을 이기고 "신세기를 구미 열강과 어깨를 겨룰 동양의 유일한 신흥국"으로서의 흥분과 열광에 싸여 있었다(백영서 1999, 8). 그러한 분위기가 일본과 일본인을 내셔널리즘에로 과도하게 기울게 하였고 페미니스트들도 결국 이를 벗어나지 못하게 된 것이다.
페미니스트들의 내셔널리즘이라는 것은 최근에 와서 '역사의 재심'이 이루어지면서 조망받게 된 것이다. 페미니스트들의 전쟁협력이 최근 '텍스트 다시 읽기'를 통해 속속 발견되고 있다. 이치카와 후사에, 히라츠카 라이쵸, 다카무레 이츠에 등 일본 페미니즘을 대표하는 페미니스트들이 '일본부인단체연맹'을 통해 전쟁에 협력하거나 '우생優生 사상'에 기초한 글이나 이나 '천황 찬미 문장'을 쓰면서 사상가로서 전쟁에 협력하였던 사실이 밝혀진 것이다.
이러한 페미니스트들의 궤적은 크게 '참가형integration'과 '분리형segregation'으로 나뉘어지는데, 그 둘 모두가 내셔널리즘과의 관계를 바탕으로 하여 설정된 것이기 때문에 결국 진정한 의미의 여성 해방과는 어느 정도의 거리를 갖게 되었다고 저자는 말한다. '분리형'은 동맹국들이 취했던 방식으로 '젠더'를 중심으로 총력전 체제하에서도 남녀의 역할분담을 무너뜨리지 않은 것이다. 이러한 방식은 남성과 여성으로 국민 국가에서의 젠더 경계를 명확하게 함으로써 여성을 국민 국가의 '2류 시민'으로 묶어두게 된다. 즉, "'국가를 위해 죽을 수 있는 명예를 가진 사람'과 '국가를 위해 죽을 수 있는 명예를 갖지 못한 사람'으로 나뉘어, 전자만이 '국민' 자격을 획득하게" 되는 것이다. 물론, 일본의 경우 여성 위생병이나 정신대를 통한 여성의 '봉사 기회'가 있었던 것은 사실이나 그것은 후방 지원 등의 보조 업무를 위한 것이었다. 페미니스트들 중에서도 '차이파'는 '차이 있는 평등 different but equal'이라는 수사에서 보여지는 바대로 '분리형'을 지지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참가형'은 연합국에서 적극적으로 채용했고 여성 또한 이에 응했다. '참가형'은 여성 징병이라는 특정한 제도를 그 근간으로 하고 있다. 이것은 여성이 전투에 참가함으로써 '국가를 위해 죽을 수 없는 2류 시민'에서 '국가를 위해 죽을 수 있는 명예를 가진 진정한 국민'으로 위치를 바꾸려는 시도였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전투에 참가하는 것으로 전시 중의 젠더 경계를 뛰어넘을 수 있다고 그들은 믿었다. 그러나, 조금만 더 생각해 보면 이것이 옳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참가형'의 한계는 분명하다. '남성과 동등하게'를 표방하는 '참가형' 입장에서는 기존의 남성 권력적인 억압형태에 편입되는 것으로 '1급 시민'이 될 것으로 기대했지만, 저자에 따르면, 그렇게 된다 해도 스스로의 '여성성'의 상실이라는 크나큰 손해를 입게 되므로 진정한 의미에서의 '여성해방'이라고 하기 어렵다는 문제점이 있다.
바로 여기서 '참가형'과 '분리형'의 어느 쪽도 선택할 수 없는 페미니즘의 딜레마가 생겨나게 되는 것이다. 이 딜레마가 생겨나게 되는 원인을 저자는 내셔널리즘으로 보고 있다. 국민 국가라는 틀 속에서의 여성해방이라는 개념은 필연적으로 '국가에 참가함' 통해 '국가에 통합'되어버린 일본 페미니즘 역사의 전철을 밟게 될 뿐이다.
저자는 "그러므로 페미니즘의 목적은 '국민 국가의 초월'"이라고 보고 있다. 그것은 "'근대·가부장제·국민국가'라는 틀 속에서는 '남녀 평등'이란 원리적으로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보다 궁극적인 목적은 '여성'의 해체라고 저자는 말하고 있는데, 그것은 '젠더' 경계를 허무는 것을 뜻하므로 '남성'의 해체와도 같은 뜻이 된다.
그러한 일본의 페미니즘 역사와 관련하여 가장 근본적인 물음을 던지는 것은 바로 일본군 '위안부' 문제이다. 기존에 '위안부'는 범죄로 인식되지 않았거나 '젠더' 개념을 빼고 '민족' 개념만을 적용한 범죄로 인식되었다. 그러한 인식이 나타나게 된 배경에는 '가부장제' 아래의 한일 내셔널리즘이 관계하고 있다. 또 그 외에도 여러 가지 패러다임들이 제시되어 '위안부' 문제를 왜곡시키거나 축소시켰다.
대표적으로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민족의 치욕'이라고 인식하는 '가부장제 패러다임'이 있다. 이 패러다임은 '여성'을 '남성'의 소유물로 인식하여 '위안부' 여성들을 일본의 '전리품' 정도로 여기는 경향이다. 이런 패러다임 하에서 한국 남성들은 '위안부' 문제를 '창피한 과거'로 인식하여 '위안부' 여성들이 과거의 사실을 말하는 것에 대해서 '민족적 자존심이 상처받는다'는 것을 이유로 들어 반대하는 경향조차 있다. 그러나 이런 경향은 '가부장제 패러다임'의 전형적인 모습이며 그 자체로 '위안부' 여성들에게 가해지는 또하나의 성폭력이라 할 수 있다. 또, 이 패러다임 하에서는 '위안부' 여성들의 개인보상조차도 불가능하게 된다. 일본 정부가 "1965년 한일 조약으로 보상이 모두 해결되었다."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성의 신체에 대한 자기 결정권이 스스로에게 속한다는 주체성이 인지됨에 따라 '가부장제 패러다임'의 모순이 드러나게 되었다.
이 밖에도 '위안부' 문제를 "우발적이고 비조직적인 '전시 강간'"으로 파악한 '전시 강간 패러다임', '강제 징용' 여부와 '위안부' 여성들의 '금전 수수'에만 초점을 두고 이를 '매매춘賣買春'으로 왜곡시킨 '매춘 패러다임', '매춘 패러다임'에 대항하려다 피해자의 '임의성'을 부인하는 딜레마에 빠진 '성 노예제 패러다임' 등이 있었다. 하지만, 어느 패러다임도 '위안부' 문제의 가장 중요한 부분을 집어내지는 못하였다. 심지어 어떤 경우에는 '위안부'가 일본군에 '봉사'하였다고 인식하기도 하였다.
저자는 "그렇다면 이 '위안부' 문제의 '진실'은 무엇인가"를 묻고 그에 답하기를
단지 하나의 '정사(正史)'라는 생각은 버려야 한다. 역사 속의 소수자, 약자, 억압당한 자, 버림받은 자들……. 그것이 단 한 사람일지라도 '또 하나의 역사'는 씌어질 수 있다.
라고 말한다. 즉, '진실'이라고 여겼던 '위안부'를 보는 기존의 시각들에는 일정부분 모순이 있음이 여기서 밝혀졌다는 것이고, 이제 '위안부' 여성들의 증언에 따라 새롭게 씌어지는 '역사'가 등장할 차례라는 것이다. 이 부분이야말로 역사의 '재심'이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여성사에 대해 기술할 때에 가장 큰 역할을 하는 것이 '젠더'이다. 어떤 사람은 '여성사'가 지나치게 '편향적'이라는 지적을 하기도 하는데, 실제로 현재까지의 역사 기술은 모두 남성 중심적으로 '젠더화'된 시각이었던 것을 생각하면 "모든 역사는 '편향적'이고 '정치적'이다."라는 명제를 이끌어낼 수도 있다. 얼핏 보기에 '정사'란 '젠더 중립적'인 역사를 이르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남성 중심성이 있다. 그러나, 여성사의 패러다임 전환 이후 여성이 '역사의 주체'로 인식되면서 여성의 '가해 책임'이 문제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러한 '가해자 사관' 조차도 국민 국가를 초월하지 못하여 매저키즘으로 끝나버리게 될 수도 있다.
저자는 이런 의미에서 "내셔널리즘은 극복되어야만 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너무 쉽게 개인과 국민 국가를 동일시하는 함정에 빠지게 된다. 그것은 '순수한 감상'에서 비롯된 일이지만, 그보다는 '다른 회로'를 발견해야할 필요가 있다. 개인과 국가의 동일시란 내셔널리즘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 과정에서 나타나는 "우리"라는 개념은 하나의 억압 구조로 작용할 가능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또 지속해서 페미니즘의 국민 국가 초월을 주장해온 저자는 마지막으로 "페미니즘은 근대의 산물이 아니라 근대를 물어 찢고 나온 '근대의 이단아'이므로 '일국 페미니즘'을 지양하고 국가를 초월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사실, '자매 연대의 전지구화 Sisterhood is global'이라는 낙천적 보편주의는 비현실적인 것이지만 "내"가 집단과 대비해 갖고 있는 수많은 "차이"에 대한 생각을 통해 '여성'으로 환원되지 않는 것처럼 '국민'으로도 환원되지 않는 "나"를 인식하는 것이 스스로에 대한 제대로 된 인식이며 적어도 그런 인식이 보편화되어가는 것이 약자 또는 소수의 입장에 서는 페미니즘의 입장이라고 저자는 말하고 있다.
3.
'위안부' 문제를 중심으로 한 저자의 논의의 방식은 시의적절하고도 명쾌하다. 그러한 논의의 중심에는 '젠더' 개념과 '내셔널리즘'이 위치하고 있다. 그간 지속적으로 '젠더 중립성의 신화'를 깨기도 하고 '내셔널리즘'을 집요하게 비판해온 저자의 입장이 전체를 관통하고 있어 일관성을 유지하고 있다는 점도 돋보인다.
그러한 논의방식으로 저자는 일본군 '위안부'의 정당성을 주장하는 모든 패러다임을 다양한 논리로 비판하는가 하면, 그런 패러다임에 반대하여 나온 새로운 패러다임에서도 '가부장제'의 요소를 찾아 비판하고 있다. 그러한 비판 속에서 유독 눈에 띄는 것은 실천성이다. 저자가 "여성학은 이론 그 자체가 실천"이라는 말을 하고 있기도 하지만, 저자의 논조는 더더욱 실천적인 목소리를 내고 있다. 그것은 그가 "'위안부' 문제는 과거의 일이 아니라 현재의 일"이라고 하는 데서도 충분히 짐작해 낼 수 있는 내용이다. 역사학자가 아닌 사회학자로서의 저자의 모습이 잘 드러나는 대목이라고도 할 수 있다.
위와 같은 방법론상에서 보여지는 저자의 역사관은 "상대주의" 사관이라고 보여진다. 소위 '역사적 진실'이라는 것이 절대성을 가지지 않고 '역사의 재심'을 통해 상대화될 수 있다는 시각은 적어도 '위안부'와 관련하여 알려진 '진실'에 관해서는 적절한 대응이 될 수 있다. 게다가 '오럴 히스토리'가 '문헌 자료'보다 열등한 종류의 자료가 아니라는 것을 조목조목 반증함으로서 '위안부' 여성들의 '증언'에 무게를 실어준 점도 저자의 공헌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또, 내셔널리즘에 대한 비판에서도 저자의 뛰어난 인식은 잘 드러난다. 극단적으로는, 흔히 말하는 집단주의의 일종이라고도 볼 수 있는 내셔널리즘에 대한 고찰을 통해 저자는 내셔널리즘 그 자체야말로 여성을 포함한 약자나 소수집단의 인권을 침해할 공산이 크다는 것을 나타내고 있다. 흔히 '민족주의' 혹은 '국가주의'로 번역되는 내셔널리즘은 "나"보다는 "국가"와 "민족"을 우선 순위에 놓는 하나의 이데올로기이다. "국가"와 "민족"이라는 말은 "우리"라는 말과 일맥상통하는 면이 있으며 "우리"라는 말 속에는 필연적으로 다수집단 중심의 세계인식이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이런 거대담론 앞에서 "나"의 인권은 온전히 살아남지 못한다(정현백 2000, 100). 이러한 입장은 이미 사회주의 페미니즘에서의 "여성 문제가 계급 문제에 종속된다"는 주장에서 익히 경험했던 여성 문제에 대한 경시이다(한국여성연구소 1999, 41-44). 저자는 어떠한 종류의 억압도 인정할 수 없다는 입장을 취하고 있다. 여성학자이면서 끊임없이 마이너리티에 관심하는 저자의 방향성이 잘 나타나 있다고 볼 수 있다.
4.
하지만 어떤 의미에서 『내셔널리즘과 젠더』는 아주 민감한 사안을 다루고 있다. '위안부' 문제가 관련된다면 어느 정도 예상이 가능하듯이 '역사의 재심'이 그 첫 번째 문제라 할 수 있다. 저자의 집요한 논증과 근거 제시에 "정사(正史)"가 상대화되었다. 그러면서 "어떠한 마이너리티도 역사를 재구성할 수 있다"는 유(類)의 말을 저자는 하고 있다. 상대주의란 소수의 입장을 존중한다는 의미에서 아주 필요한 것이고 인권적인 것이라 할 만하지만, 지나친 상대주의는 어떤 면에서 비인권적인 부분까지도 인정하는 오점을 남길 수 있다. 즉, 현재까지 정사(正史)라고 믿어져 왔던 것들이 상대화되었다고 하는 것은, 그 자리에 '새로운, 마이너리티를 위한 역사'가 자리잡을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하는 동시에 기존의 '정사(正史)'까지도 부정하지 못하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는 것이다. '역사적 진실'이 상대화될 수 있다는 명제 하나에만 지나치게 이끌려 '역사 재심' 그 자체에만 경도하지 않았는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또 다른 측면에서, 이 상대주의는 니힐리즘으로 빠질 수 있는 위험한 사상이기도 하다. '어떠한 역사도 옳을 수 있다'는 명제는 결국 '어떠한 역사도 옳지 못할 수 있다'는 명제로 환원되게 마련이기 때문이다. 물론, 저자는 「서문」에서 이에 대해 "니힐리즘이라기보다는 그렇기 때문에 소리 높이는 것을 단념해서는 안 된다고 하는 마이너리티의 권한을 위한 주장이었습니다."라고 나름의 변명을 내세우고는 있다. 하지만, 이 경우는 더 심각하다. '소리 높임'이라는 측면에서 본다면 결국 소수집단이나 약자보다는 다수집단이나 강자의 논리(소리)가 더 잘(크게) 받아들여질 수 있다는 점에서 오히려, 본의 아니게, 기존 체제의 유지를 돕는 역할을 하게 될 수도 있는 것이다.
또, 저자는 제국주의의 내셔널리즘은 물론, 피해국(한국)의 '대항 내셔널리즘'조차도 비판하고 있는데, 저자 나름대로는 "내셔널리즘이란 '이룰 수 없는 약속'으로 마이너리티를 동원하기 위한 상징"이므로 '대항 내셔널리즘' 내에서도 여성이란 마이너리티에 지나지 않는다는 저자의 인식에 따른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실제로 민족주의를 지나치게 강조하다 보면 당위적으로 그것보다 우위에 있어야 할 민주주의나 약소집단의 인권 등이 과소평가될 위험을 갖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또, 동아시아에 있어서는 '민족 문화'라는 이름으로 가부장제와 봉건적 유제를 포함한 지난한 과거의 인습들이 재현되거나 강화될 수도 있다(정현백 2000, 100-101). 하지만 "민족"이 가진 힘의 효과라는 것도 또한 엄청나다는 것이 20세기를 통하여 밝혀진 것도 무시 못할 사실이다. 그 가장 큰 예로 동서 독일의 통일을 들 수 있다. 그들이 통합의 즈음에 '우리는 하나의 민족이다 Wir sind ein Volk'라는 구호가 큰 역할을 했다는 것은 저자도 들고 있는 예이지만, 그만큼 민족이라는 개념이 할 수 있는 일은 엄청나다는 것이다. 또, 공통의 언어·문화·경험·상징·역사 등을 가지고 할 수 있는 사회적 의사소통 능력을 보더라도 저자의 탈민족주의는 민족주의의 폭발력을 과소평가하는 경향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강만길 외 2000, 53-57). 민족주의의 폭발력이 엄청나다면 민족의 그 폭발력의 방향을 바꾸어 여성 문제를 해결할 수도 있지 않았을까 하는 질문이 지나친 희망적 언설이라고는 생각지 않기 때문이다.
5.
마이너리티는 어느 집단에서고 있게 마련이다. 수천 수백 년간 역사의 마이너리티가 바로 '여성'임을 생각할 때 저자가 노력하고 있는 젠더사에 대한 의의는 분명하다. 성의 구별없이 전 정사(正史)를 '젠더화'하려는 노력이 결실을 맺어 그간의 역사란 모두 남성사였다는 것이 밝혀진 참이다. 역사적으로 보이는 '젠더 중립성의 신화'가 깨어진 것이다. 또, 20세기 근대 내셔널리즘 하에서의 마이너리티이기도 한 '여성'의 입장에서는 '내셔널리즘을 젠더화Engendering nationalism'하는 입장을 취하여 근대 국민 국가에서의 '젠더 중립성의 신화'를 격파하였다. 이런 면에서 이 책의 의의를 찾을 수 있다고 하겠다. 그 중에서도 역사의 끊임없는 현재성을 강조하였던 점은 무엇보다 현재를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 큰 도움이 되었다는 것을 부인하기 어렵다. 21세기를 살아갈 여성이 고민해야 할 가장 큰 부분이 바로 '내셔널리즘'과 '젠더'라는 것을 이해한다면 이 책의 의의는 새삼스럽게 다가올 것이다.
참고서적
우에노 찌즈꼬. 1999. 『내셔널리즘과 젠더』. 이선이 옮김. 박종철 출판사.
강만길 외. 2000. 「좌담: 통일시대를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창작과비평』 2000년 가을호.
백영서. 1999. 「20세기형 동아시아 문명과 국민국가를 넘어서 - 한민족 공동체의 선택」. 『창작과비평』 1999년 겨울호.
정현백. 2000. 「통일운동과 여성주의」. 『창작과비평』 2000년 가을호.
한국여성연구소. 1999. 『새 여성학 강의』. 동녘.
내셔널리즘과
젠더 우에노 치즈코 지음 | 이선이 옮김/박종철출판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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