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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과 그림자, 근대성의 형성: 김진송『서울에 딴스홀을 許하라』

엔디 2001. 3. 28. 03:44

"모던Modern." 근대로 혹은 현대로 일컬어지는 말이다. 그렇다면 언제부터가 "모던"일까? 언제부터가 "현대(혹은 근대)"라고 일컬어질 수 있는 시대일까? 현대성의 형성이라는 이 테마는 울분섞인 우리의 근·현대사에서 아주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고 볼 수 있다. 그것은 비단 우리의 근·현대사상 문제일뿐만 아니라 "양이洋夷"의 침범에 무릎꿇고 말았던 동아시아 전체의 문제라 할 수 있다.

얼마 전, 사이덴스티커Edward Seidensticker가 쓴 『도쿄이야기(原題:Low City, High City)』 가 출간되었다. 야마노테(동경 중심부)와 시타마치(동경 외곽의 서민 거주지)를 나누어, 메이지유신과 메이지 천황으로 상징되는 일본의 근대화를 작은 문화상文化象에서부터 그려내고 있었다. 당시 일인들이 개항을 받아들이는 태도에는 데카당스decadence한 것들이 묻어나 있기도 하였고, 전통에 대한 혐오로까지 전이된 근대화에로의 열망같은 것도 나타나 있었다. 예를 들어 도쿄에 대지진이 났을 때, 어느 작가는 이렇게 생각했다고도 하였다:

나는 그 대지진 때에, 자신이 살았다고 깨달은 찰나 요코하마에 있는 처자의 안부를 걱정했지만 거의 같은 순간에 '어이쿠, 이제는 도쿄가 좋아지겠구나!' 하는 환희가 솟는 것을 억누를 수 없었다. 샌프란시스코는 10년이 지나자 예전보다 훌륭한 도시가 되었다고 들었는데 도쿄도 10년 뒤에는 멋지게 부흥할 것이다. 그리고 그때야말로 상하이 빌딩이나 마루노우치 빌딩처럼 외연한 대건축물로 전부 채워지게 될 것이다.
한데, 이러한 현재의 시각에서 본다면 상당히 삐뚤어진 듯한 시각은 도쿄에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었다. 우리의 서울에도 똑같은 모습이 있었다. 그것을 "현대성(근대성)"이라고 부른다면 1910-1930년대가 바로 우리에게 있어서의 "현대성(근대성)의 형성기"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이광수의 『무정』에서 볼 수 있듯, 당시의 가장 근본적이고 중요한 문제는 바로 모더나이제이션이였다. "신新", "신흥新興", "모던" 등에서 보여지는 모습이 바로 그런 것을 반영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그 "근대화"라는 것이 제국주의를 통해 유입된 진보사관 때문인지 오로지 서구화만을 의미할 따름이었다. 당시의 개명한 사람들은 그래서 계몽적으로 그것들을 주입하기에 바빴고, 초조해하기까지 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저들을…… 저들이 아니라 우리들이외다. 저들을 구제할까요?"
하고 형식은 병욱을 본다. 영채와 선형은 형식과 병욱의 얼굴을 번갈아 본다. 병욱은 자신이 있는 듯이,
"힘을 주어야지요! 문명을 주어야지요!"
"그리하려면?"
"가르쳐야지요! 인도해야지요!"
"어떻게요?"
"교육으로, 실행으로."

이광수, 『무정』
영국에 『London』이 있는 셈으로 조선에 『서울』이 생긴 것을 나는 몹시 반가워하였다. 이 우연한 일이 아니오 뜻이 깊은 것이라 생각하였다. 이 무슨 이상한 좋은 징조가 아닌가 하였다.
< 서울>이여 <서울>이여. 네 부디 영국의 런던처럼 되어라. 너 <서울>로 말미암아 조선을 영국처럼 되게 하여라. 그를 문명과 자유와 평화로 뒤덮게 하여라. <서울>이여 <서울>이여 너는 하늘로 하강한 천사로다.

추호, 「서울잡감」, 『서울』1920년 4월호.
이러한 초조함의 원인은 무엇일까? 진화란, 진보란 어떤 종류이든 그 나아감evolution에 대한 근거를 갖게 마련인데, 그렇다면, 나아가는 대로 가만히 두면 될 것이 아닌가? 어째서 이렇게도 초조해하는가? 그것은 근대화가 제국주의 논리와 얽혀있었기 때문이다. 이 당시의 계몽운동이나 문명론은 "사회진화론이라는 사상을 간접적으로 수용한 측면"이 짙었다. 그런데, 이 "사회진화론"이라는 것이 사실 "제국주의에 침략의 논리를 제공했던 사상"이었다. 이에 따르면 "조선은 정복당해야 할 운명"이었다. 바로 이 때문에 개화 지식인들은 조선의 문명화, 근대화를 급박하고 초조하게 이루려고 했던 것이다.

그러한 문명화, 근대화는 곧장 물질문명과 과학문명으로 나타났다. 중절모, 기차, 축음기, 자동차로부터 수풍댐으로 상징화되던 전기, 천리 밖의 소리를 들을 수 있다던 라디오 등은 물질-과학 문명의 총아로 생각되었다. 따라서 당시에는 마치 "우리의 살길은 과학"이라는 듯이 잡지에 하루가 멀다하고 과학 이론과 원리를 설명하는 글이 실렸다. 심지어 가장 최첨단이라 할 수 있는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원리(相對律公理)까지 실렸다. (당시는 아직 히로시마 원폭 이전이었다.) 1922년 6월 『신생활』에 실린 신태악의 「대화 신흥물리」에서는 정치인과 과학자를 대비시켜 과학자의 우월함을 내비치기도 하였다. 이러한 일련의 과학문물과 신문기사들은 과학을 받아들이고 대중화하는데 성공했지만, 그러나 그 근본적인 목표는 이루지 못했다. 그것은 "자생적인 물질의 생산과 과학에 대한 연구가 부진했던 식민지적 상황 속에서 현대가 주었던 가장 놀랍고 찬란한 빛은 항상 밖으로부터 비추어지기만 했"기 때문이다. 이 역시 서양에 경도되기만 할 꺼리일 뿐이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지식인들은 소위 데카당스에 빠져 허우적대기 일쑤였다. "식민지 지식인"이라는 명패가 주어진 그들은 "치자痴者, 약자弱子, 비겁한 자, 무능력한 자"라는 욕을 들으면서도 "이 세상에는 나 이상의 재자才子도 없고 강자强者도 업다"고는 "혼잣말"로밖에 중얼거릴 수 없는 상황에 직면하게 된다. 반면 대중은 이미 물질 문명에 중독되어 "활동사진 배우의 프로필"이 그들 대화의 중심이었으며 식민 지배자들은 이런 상황에 맞게 이데올로기 전파의 수단으로 활동사진을 활용했다. 서구 문화를 받아들이되 하위 문화에만 침윤되어 있는 이 모습들에서 서구에 대한 오도를 볼 수 있다. 그들에게 있어서의 서구란 「모던 심청전」에서 보여지듯 하나의 "색향色鄕"일 따름이었다.

여성의 경우에는 서양인 선교사들에 의해 교육을 받은 탓인지, 서구에 대한 위와 같은 오도는 적은 편이었던 것 같다. 그러나 그들도 페미니즘을 수용하고 받아들이게 되면서 그 근원지인 서양을 지나치게 동경하고 우러러본 탓으로 서양을 과대평가하는 모습이 나타난다. 나혜석은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구미여자는 대체에 있어서 동양여자에 비하여 색이 희고 키가 크고 코가 높고 눈이 깊으며 그 행동은 분명하고 진취성이 많으며 행동이 많고 상식이 풍부하며 매사에 총명하다... 동양남성은 딱딱하고 거칠은 반대로 서양남성은 부드럽고 친절하다. 동양여성은 의지가 박약한 반대로 서양여성은 의지가 강하다. 동양남성이나 여성은 몰상식한 반대로 서양남성이나 여성은 상식이 풍부하다.

나혜석, 「반도여성에게」, 『삼천리』1935년.

한국 여성 해방의 기수라 할 만한 나혜석의 이 글에서 강조된 부분을 보면 당시의 신여성들이 서양을 얼마나 환상적이고 유토피아적으로 인식했는지 금방 알 수 있다.

「서울에 딴스홀을 許하라」는 탄원서는 몇 가지 점에 있어서 당시의 사회상황을 잘 보여주는 것이다. 첫째, 기생과 다방마담 등을 포함한 새로운 인간군들이 지녔던 첨예한 현대적 의식과 행동. 둘째, 현대화를 위한 투쟁의 대상이 봉건왕족이나 보수적 권력이 아닌 식민통치자였다는 비참한 현실. 셋째, 현대화의 준거가 분명히 서구(혹은 일본)에 있었다는 점이다. 이 중, 첫째와 둘째는 해방 이후 어느 정도 벗어났다고 할 수 있지만 세 번째의 경우는 아직까지도 계속되는 점들이 보여진다.


20세기초의 우리 사회의 여러 상황들을 살펴보다 보면 놀라우리만치 현재와 닮아있다. 그러니까 20세기초의 근대와 오늘의 우리, 즉 현대는 보이지 않는 무수한 끈으로 연결되어 있는 것이 발견된다. 그것은 몇 가지 특징적인 것으로 요약가능한데 첫째로는 준거 집단reference group이 구미에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서양 나라의 도시들과 서울을 비교하는 것에서부터 서양의 남녀가 우리 남녀보다 우등하다고 느끼는 것에까지 퍼져있었던 사상이다. 그것은 오늘날까지도 없어지지 않고 소위 "선진국"이라는 이름으로 남아있는 것이 보여진다. 그것은 다음 인용한 기사에서도 드러나고 있다.
연세대의 경우 9월경 두뇌한국21사업단장 등 7명으로 인사평가위원회를 설치해 연구업적에 따른 보상제도를 실시키로 했다. 또 승진기준을 강화해 부교수의 경우 해외 학술지에 게재된 논문수를 현행 2편 이상에서 10편 이상으로, 정교수는 3편 이상에서 20편 이상으로 각각 높이기로 했다.

『동아일보』, 1999년 7월 26일.
인용문의 요지는 "해외 학술지"에 논문을 게재하는 것으로 교수를 평가하겠다는 것이다. 즉 "선진국"의 학자들이 보는 잡지에 논문을 많이 게재하면 우수한 교수이고 그렇지 않으면 우수하지 못하다는 것으로 볼 수 있다. 하지만, 논문의 "게재수"로 교수를 평가하겠다는 것은 얼치기 서양 흉내내기에 지나지 않는다. 실제로 "우리나라의 학자들이 지난 5년간 발표한 논문 가운데 70퍼센트는 발표 후 한번도 인용되지 않았다."(연세춘추 2000년 11월 20일)

둘째로는, 지식인들의 계몽주의이다. 이광수의 『무정』이후로 "몽매"를 깨우기 위한 지식인들의 지난한 노력은 문맹률이 3%라는 지금에까지 이르고 있다. 학자들은 외국의 이론을 배워와서 이론의 "선교사" 노릇을 하고 각계 각층의 사람들이 자기가 아는 것을 가르치기 위해 책을 낸다. 학교에서는 여전히 관념적 개조론을 부르짖던 1900년대 초반처럼 학생들의 "정신을 개조"하려고 시도하고 있기도 하다.

셋째로는, 대중들의 하위 문화에의 깊은 침윤이다. 당시 지식인들의 안타까움 속에서도 대중들이 대중문화에 열광하는 것은 여전히 변하지 않고 있다. 당시의 여학생들처럼 지금의 여학생들도 영화배우·가수 등의 "꿈의 직업"을 장래 희망으로 쓰고 있다.
영화가 보다 대중적인 장르로 확산되자 '조선의 나이어린 여성들은 하등의 민족적으로나 계급적 의식이 없이 공상적 푸치뿌르(쁘디 부르주아) 심리에서 스크린에 나타나는 미모와 고흔 목소리에 유혹되여' 영화배우로 나서려 했다.

김진송, 『서울에 딴스홀을 許하라』, 현실문화연구, 1999, 164쪽.
MBC 청소년 라디오프로그램 「별이 빛나는 밤에」가 최근 서울 중고교생 5백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한 결과 학생들 47%가 『연예인이 되고 싶다』고 생각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유는 △개성 발휘 62% △화려해서 27% △짧은 시간에 큰 돈을 벌어서 9% 순.

『동아일보』1997년 12월 8일.
이러한 키치Kitsch에 대한 집착은 상당부분 첫째의 서구문화에 대한 경도에 연관되어 있기도 하다. 그것도 당시와 현재의 공통점이며 둘을 잇는 끈이다. 이에 관련하여 지식인들은 그때도 지금도 키치 비판을 해오고 있는 것이다.


『서울에 딴스홀을 許하라』를 통하여 살펴본 것은 흔히 "근대"라고 불리는 1900년대 초반의 모습과 "현대"로 구분짓기도 하는 현재의 모습이 실상은 놀랄만큼 똑같다는 것이다. 하지만 기존에 우리가 가졌던 근대의 이미지는 '척화비', '불평등조약', '개항', '시민의식의 성장', '자본주의 문물의 수입'이라는 문구와 말로 대표되는 매우 추상적인 모습이었다. 현대와 구별되고 그렇다고 봉건시대인 중세나 근세와도 같지 않은 정체불명의 시대였다. 현재까지의 근대화, 현대화에 대한 연구는 이런 현상들과 담론들을 그대로 담아내지 못하였다.

최근 '신문화사the new cultural history'라는 이름으로 새로운 역사 연구의 바람이 불고 있다. 실제로 우리 역사의 근대는 어떤 관점에서는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의 비분강개한 흐느낌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황성신문』에 줄기차게 반복된 비로드와 중절모의 광고라는 또다른 코드로 주목되는 것이 마땅하게 느껴진다. 기존에 다루어졌던 근대화의 코드는 매우 논리적이지만, 또 관념적이기도 하기 때문에(관념과 논리 또한 근대화의 한 양상이다) 실제적인 사회학적 시각에 도움이 되지 못한다. 그보다는 오히려 "되도록 일상적이며, 구체적인 현상들에 대한, 시답지 않게 보이거나 시시껄렁한 것으로 취급되는 … 글자료"가 "근대성"을 더 잘 말해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한 "근대성"은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현대성"과 이음동의어로 취급될 수 있으므로 그들 "글자료"들은 어떤 의미에서는 현재를 바라보는 코드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실제로 피터 버거도 역사학과 사회학의 구별은 매우 어렵다고 말하고 있기도 한데, 그것은 아마도 과거와 현재의 보이지 않는 끈을 염두에 두고 한 말일 것이다.


서울에 딴스홀을 허하라
김진송 지음/현실문화연구(현문서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