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글은 『한국의 정체성』(책세상)을 읽고 저자인 탁석산 氏에게 보낸 메일입니다.
메일을 보내고 한참동안 답이 없어 결국책세상문고 우리시대 홈페이지(폐쇄됨)"회원 게시판"에도 올렸으나 탁석산 氏는 "지쳤다"고 하시며 아직 답이 없으십니다. 탁석산 氏가 빨리 회복되시길 빌며, 오늘 갑자기 생각나서 올려봅니다.
제목: 탁석산 선생님, 『한국의 정체성』을 읽고 질문드립니다.
참 늦게 읽었습니다. 요즘들어 한국적인 것에 대한 책들이 많이 나와 한국인으로서 한국적인 것에 대한 궁금함이 없을 리 없기에 무엇 하나 집어들고 싶었던 차에 선생님 책이 나왔습니다. 진작 읽었어야 했는데, 이 책을 누군가가 저에게 선물하기로 약속했기 때문에, 본의 아니게 늦게 읽게 되었습니다. 정말 잘 읽었습니다. 다만, 한두 가지 제 생각과 맞지 않는 부분이나 질문이 필요하다 싶은 부분이 있어서 이렇게 글을 올립니다.
1. "세계적"의 의미
제가 보기에 『한국의 정체성』은 한국의 정체성을 찾는 데에 그 본질적인 목적을 가지고서, 현재 우리가 갖고 있는 잘못된 "한국의 정체성"을 비판하는 방법을 채택한 것으로 보입니다. 첫 부분에서 (물론 필요에 의한 것이겠지만) 정체성의 의미와 순환논리의 오류를 경계하는 데 많은 시간을 쏟고 나서 결국 보편성에의 공격으로 현재 "한국의 정체성"의 주류를 이루는 생각들을 비판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2장 말미에 가서는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인 것"이라는 말에서 "세계적"이라는 것은 사실은 "미국적"이라는 말의 위장명칭이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에 대해서 몇 가지 제 생각을 말씀드리고 싶은데요, 제 생각은 그 말의 "세계화"는 "미국화"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 말의 "세계화"는 그야말로 '실재하는 개별자의 묶음' 그 자체의 세계화라고 생각합니다. 실재론의 입장에서 그렇다는 것이 아니라, 우리 사회에서 자랑스러이 소위 "세계화"라고 말하는 성공사례들이 그렇다는 뜻입니다. 제가 말씀드리고자 하는 바의 뜻은 이렇습니다.
우리나라의 대중문화를 상업적으로 혹은 내셔널리즘적으로 지배해나가는 언론들과 광고자들이 말하는 "세계화"란 비단 미국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우리 나라 아닌 모든 세계를 의미한다는 뜻입니다. 예를 들어 말씀드리겠습니다.
먼저 『춘향뎐』을 예로 들 수 있겠군요. 임권택 감독의 영화 『춘향뎐』은 53회 깐느Canne 영화제 공식 경쟁부문에 한국 최초로 진출하였습니다. 그를 보고 한국의 언론은 『춘향뎐』을 극찬했습니다. 또, 최근 미국의 메이저 배급사가 이를 수입 배급하여 미국에서 상영되기도 하고 『LA타임스』는 극찬을 아끼지 않았지요. 중요한 것은 이 두가지에 한국이 다 열광한다는 겁니다.
-- 여기서 한 가지 말씀드릴 것이 있는데요, 책에서 『카게무샤』가 깐느(칸) 영화제에서 수상했다고 이를 "미국적인 것에 부합했다"(127-128쪽)고 말씀하신 부분이 있는데 이는 잘못이라고 봅니다. 이는 유럽적인 것에 부합했다고 보는 편이 옳습니다. 실제로 유럽은 미국적인 것에 지속적으로 반발하고 있는 모습을 보입니다. 경제적인 측면에서 시작되었다고는 하지만 EU도 그 중 하나일 것이고, 세계(?) 3대 영화제라고 하는 깐느, 베를린, 베니스 영화제 역시 유럽적인 것의 "보루"라고 보여집니다. 특히 프랑스는 자국어에 대한 거의 집착에 가까운 열심을 보여, 방송에서 영어를 쓰는 것조차도 규제(뚜봉Toubon 法)할 정도입니다. Franglais(프랑글레=Francais+Anglais=French+English)라는 조소섞인 풍자어도 생겼습니다. 실상 프랑스어는 과거 유럽공용어로 써도 될만큼의 지위를 확보하고 있기도 하였고 말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카게무샤』가 깐느에서 수상했다는 것은 미국적인 것에 부합했다고 보기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선생님께서도 아카데미에 외국어영화상 부문이 있다는 것을 근거로 미국적인 것을 비판하시면서 깐느와 베를린 영화제를 이와 대조시키심(129쪽)으로써 이를 어느 정도는 인지하고 계셨던 것으로 보입니다.
또, 라면과 소주의 경우가 있을 수 있습니다. 두 제품이 모두 일본이나 동남아 등지에서 큰 호평을 받고 잘 팔리고 있다고 합니다. 심지어 동남아에는 가짜 한국라면이 판을 치고 있다고하는 보도도 접했습니다. 라면의 경우는 러시아나 남미에서도 인기가 있다고 들었습니다. 저는 이를 프랑스 포도주와 마찬가지로 하나의 문화 상품으로 봅니다. 라면은 본래 일본이 개발한 것이고, 소주는 아랍권에서 고려시대 들어온 것으로 저는 알고 있습니다만, 선생님 말씀대로 시원(始原)을 따지지 않고 이를 우리가 받아들여 좋은 상품으로 발전시켰다고 저는 생각하고 있습니다. 라면은 매운 음식을 잘 먹는 우리의 입맛에 딱 맞도록 발전된 라면입니다. 라면의 대중성이 그것을 증명합니다. 제가 보기에는 연령층에 관계없이 그런 것 같습니다. 소주도 마찬가지입니다. 헌데, 이는 말씀드린 바와 같이 일본과 동남아 그리고 러시아와 남미에서 인기를 끌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언론과 광고자들은 이를 자랑스러워한다는 것입니다.
『춘향뎐』과 라면, 소주의 예에서 볼 수 있듯이 우리는 "세계적"을 말하면서 미국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우리 아닌 어느 나라에서 인정받더라도 그것을 자랑으로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상업적 목적을 위해 만든 "한국의 정체성"이라면 책에 쓰신 대로 미국적인 것에 대한 분석을 통해 우리 안에 있는, 미국적인 것과 부합하는 것을 찾아내는 것(75쪽)이 중요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선생님이 생각하신 "우리가 생각하는 '세계적'이라고 말의 솔직한 뜻은 '미국적'인 것이다"라는 말에 그 근거를 두고 그렇게 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미국의 시장 규모가 가장 크다고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제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흔히들 말하는 "세계적"이라는 말은 사실 "미국적"이 아니라고 하는 점이었습니다.
물론 세계화가 미국화를 의미하는 경우가 대부분인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분명히 그에 저항하는 문화도 있습니다. 한때, 사회를 휩쓸었던 드 소쉬르F. de Saussure나 레비-스트로스C. Lévi-Strauss의 구조주의나 현대 철학과 문학, 문화의 주류를 이루고 있는 포스트-구조주의는 모두 유럽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었습니까? 유럽은 그런 의미에서 미국과 같은 유로 묶을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봅니다. 물론, 미국의 영향력 그 자체는 충분히 인정할만 합니다. 실상 우리가 포스트-구조주의를 받아들인 것도 실상은 미국으로부터였다고 들었고, 심지어 제3(?)세계의 책들을 읽고자 하여도 영역된 것의 중역으로 읽는 것이 대부분이기 때문입니다. 미국은 흔히들 하는 말대로 "인종의 전시장"이며, 때문에 다양한 관심과 생각들이 얽혀 있는데다가 막대한 경제력을 갖고 있기 때문에 책의 경우만 해도 이런저런 것들이 죄다 출판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여 이 모든 것들을 미국적이라고 할 수는 없다고 봅니다. 왜냐하면 그것들을 누구도 미국적인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고, 미국인들 스스로도 그러하리라 짐작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시장(특히, 지식 시장)의 요구에 따라 그것들을 만들었을 뿐입니다.
2. 한국적인 것으로서의 '한恨'과 '정情' 그리고 '흥興', '해학諧謔'
선생님께서는 '한'(69-70쪽)과 '정'(115-116쪽)을 한국적인 것으로 보는 데 대해 부정적이신 것 같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저는 '한', '흥', '정', '해학'을 한국적인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선생님께서 '한'을 한국적으로 보지 않으신 것은 김홍도의 그림을 보시거나 서울올림픽 식전 식후 행사를 보시고 그렇게 생각하신 것 같습니다. 맞습니다. 제가 볼때도, 아니, 누가 보아도 거기엔 '한'이 없습니다. 김홍도의 그림은 '해학'을 가지고 있고, 서울 올림픽 식전식후 행사는 '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외의 경우는 어떨까요? 서편제를 보면 거기에는 분명히 '한'이 있지 않습니까? 소설가 이청준 씨는 이를 채택하여 『서편제』에서 구현하였고, 임권택 감독은 영화 『서편제』에서 이를 영상화하였습니다. 거기에는 분명히 한이 있지요. 또, 우리 민요의 가락이나 이를 차용한 소월의 시에는 분명히 '한'이 담겨 있습니다.
또 선생님께서는 '정'이라는 것이 우리의 정체성이 될 수 없다고 하시면서 그 근거로 "만약 알래스카인이 우리 못지 않게 정이 많은 민족이라면"이라는 가정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하지만, 그것은 이유가 될 수 없다고 봅니다. 정체성이라고 하는 것은 발견해 내기도 어렵고 말하기도 어려운 만큼 한 마디로 단정지을 수도 없습니다. "우리의 정체성은 '이것'이다." 라는 말은 파시스트가 아니면 누구도 할 수 없는 말입니다. 저는 "우리의 정체성은 이것과 저것과 그것과 … 즉, '이것들'이다" 라는 말이 정확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다시 말해서, 제가 생각하는 바로는 "우리의 정체성은 한과 정과 흥과 해학"입니다.
한과 정과 흥과 해학은 물론 우리만이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만큼 한을 가진 집단이 있고, 우리만큼 정이 두터운 집단이 있고, 우리만큼 흥있는 집단이 있고, 우리만큼 해학적인 집단이 또 있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어느 누구도 우리와 같은 한, 정, 흥, 해학은 갖지 못할 것입니다. 선생님께서 중국의 애니메이션을 수묵의 농담으로 표현한 중국적인 색채가 물씬 풍기는 것으로 인식하셨습니다. 그리고 긍정적인 태도를 보이신 것 같습니다. 하지만, 수묵의 농담은 중국적인 것이기도 하지만, 한국의 수묵화 또한 만만치 않습니다. 그럼에도 선생님께서 그것을 중국적인 것으로 보신 것은 그것이 수묵의 농담을 매개로 하여 표현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한국적인 것과 무언가 다르다고 느끼셨기 때문일 겁니다. 그러니까, 같은 수묵화도 중국의 수묵화와 한국의 수묵화는 다르다는 것이지요. 설령, 선생님께서 그것을 못느끼셨다고 하더라도 전문가가 보면 둘을 구별할 수 있을 것입니다.(91쪽) 그렇다면 한, 정, 흥, 해학은 한국적인 것으로 인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런데, 혹시 선생님께서 한이나 정을 우리의 정체성으로 인정하기 싫으신 이유는, 그것이 내용적인 것이라는 데서 비롯된 것인지요? 선생님께서 중국의 수묵화를 말씀하시면서 내용이 아니라 형식도 중요하다 하신데서(71-72쪽) 저는 선생님이 내용보다 형식이 중요하다고 말씀하시는 것같은 느낌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우리 문화에서 형식적인 것의 고찰도 적다고는 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예를 들어 『서편제』와 『아름다운 시절』등의 영화에서 흔히 보여지는 롱테이크 기법 등이 동중정動中靜에서 정靜에 해당하는 한국적인 형식을 도입한 것이라 생각됩니다. 헐리우드 영화를 동動에 비유할 수 있겠지요. 내용이란 늘 형식과 연계되는 것일 겁니다. 저도 중국의 한 애니매이션을 보았는데, 전체적으로 수묵채색화의 형식을 갖고 있었고 자연 친화적인 내용을 갖고 있었습니다(가령 목동이 피리로 새와 노래를 겨루었다든가 하는…). 생각해보면, 붓글씨로 로마자 알파벳을 쓰는 것은 어색하기만 합니다. 물론, 익숙해지면 괜찮아지겠지요. 컴퓨터 자판이나 펜글씨같은 것도 한글이나 한자를 위한 것은 아니었으니까요. 하지만, 그것은 수용자의 측면이고 우리가 우리의 내용을 추구한다면 필연적으로 형식도 이를 좇아가지 않을까 하는 것이 저의 개인적인 생각입니다.
3. 대중성과 정체성의 미래
선생님께서는 대중성을 강조하셨습니다. 아마도 다른 학자들과의 이견이 여기에서 벌어지지 않을까 하는 것이 제 생각인데요, 제가 보기에도 대중성이 중요한 것은 분명하지만 선생님께서 생각하시는 만큼 대중성이 그 기준이 되어야 한다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과거 복원이 중요하다는 것은 선생님께서도 인정하셨던 것으로 기억합니다(109-110쪽). 그런데, 선생님께서는 대중이 그것을 지지하지 않을 경우 그의 유지를 그리 중요하게 생각지 않으시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것은 잘못이라고 생각합니다.
민요를 예로 들어보면 이렇습니다. 민요는 조선시대 백성(대중)들이 즐겨 부르던 노래였습니다(107쪽). 그런데, 지금의 대중들은 민요를 즐겨 부르지도 않고 이를 배척하기까지 하는 형편입니다. 실상 민요 애호가들은 현재 소수에 지나지 않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이럴 경우 우리가 굳이 민요에 지속적으로 지원과 후원을 할 필요는 없다는 생각이신 것 같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것을 현재만을 생각했을 때의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한국의 정체성"에서는 현재가 우선되어야 하는 것은 분명하지만, 과거나 미래 또한 경시되어서는 안 될 것으로 생각합니다.
우리의 근현대사에서 가장 통탄할 부분이 있다면 바로 "전통과의 단절"일 것입니다. 이는 임화林和 등의 이식문화론을 비판한 이론으로 알고 있습니다. 조선의 근대화는 두 가지로 이루어졌는데, 그 하나는 일제에 의한, 일제를 위한 근대화였고, 다른 하나는 이를 이기기 위한 민족주의적 근대화였습니다. 이 둘은 모두 성급하게 이루어졌는데 전자는 조선의 사정을 고려하지 않은 막무가내였기 때문에 그랬을 것이고, 후자는 아마 일본을 이겨야 했기 때문에 급해서 그랬을 겁니다. 이 과정에서 "전통과의 단절"이 일어났습니다.
이 "전통과의 단절" 때문에 우리의 민요는 사라져버리고 그 자리는 일본풍의 엔까(트로트)와 구미의 팝이 자리했습니다. 본래는 「꼴망태 아리랑」, 「둥글둥글 삽시다」등의 신민요가 당시 유행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북의 경우에는 이들 신민요를 지속적으로 발전시켜 "오데로 가 오데로 가~" 하는 노랫말로 유명한「벌목부의 노래」와 남쪽에서도 전국적으로 유행한 「반갑습니다」 등의 노래를 낳았습니다. 북은 나름대로 "전통과의 단절"을 비교적 잘 극복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현재 우리 나라에서는 민요의 대중적 지위가 매우 낮습니다. 하지만, 누군가가 전통 부활을 외치고, 이를 대부분 사람들이 따르는 때가 오지 않으리라고는 볼 수 없습니다. 민요는 과거 우리 정체성의 총체를 이루던 것이라고 보여지는데, 격세유전하는 것으로 알려진 문화는 언젠가 민요를 또다시 필요로 하게 될 것입니다.
저는 민요부흥론을 외치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그것의 유지보존이 필수적으로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현재 우리의 정체성을 이루는 데에 민요의 구실이 극미하다는 것은 저도 인정합니다만, 우리 문화의 풍부함을 지키고, 후에 있을 지 모를 우리의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 또 과거의 우리의 정체성의 보존을 위해 민요나 판소리 등을 유지 보존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과거의 정체성이라는 것?오늘날의 정체성과 전혀 다르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시간이란 두부처럼 갈라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4. 마치며
선생님의 글 중에서 제가 이해할 수 없거나 제 생각과 맞지 않는 부분들에 대해서 말씀드렸습니다. 이에 대한 선생님의 생각을 제게 말씀해주셨으면 합니다. 질문이 거칠어 읽기 어려우실지 모르겠습니다. 답변 기다리겠습니다.
5. 질문 한 가지 더
한국의 정체성과는 직접적으로 관계없을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이건 잘 몰라서 하는 질문입니다. 한국의 유교, 불교, 도교, 기독교가 샤머나이즈되었다(100-103쪽)고 하신 것을 읽었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이것을 한국인 정서의 핵심이라고 보셨습니다. 그런데, 다른 나라는 어떤가 하는 게 제 질문입니다. 다른 나라는 샤머니즘화되지 않았는지요? 한국의 샤머니즘이 유별난 것인가 하는 것이 제 질문의 중점입니다. 만약 우리 말고도 여러 나라에서 샤머니즘화되었다고 한다면, 샤머니즘은 우리 정서의 핵심으로 볼 수만은 없기에 드리는 질문입니다. 제가 생각하기에는 기복祈福은 누구나가 바라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서입니다. 동서를 막론하고 대부분이 행복을 바라지 않습니까? 성서에서도 창세기에서 축복을 재산과 자식으로 일컫는 경우가 많은 것 같은데, 어떻습니까?
P.s. 질문이 너무 많지요? 죄송합니다. 여담입니다만, 『한국의 정체성』 표지 마음에 드시는지요? 탈춤이 나와서... 대중성을 강조하는 선생님과는 안 맞는 듯 합니다만... ^^;; 이만 줄입니다.
메일을 보내고 한참동안 답이 없어 결국
제목: 탁석산 선생님, 『한국의 정체성』을 읽고 질문드립니다.
참 늦게 읽었습니다. 요즘들어 한국적인 것에 대한 책들이 많이 나와 한국인으로서 한국적인 것에 대한 궁금함이 없을 리 없기에 무엇 하나 집어들고 싶었던 차에 선생님 책이 나왔습니다. 진작 읽었어야 했는데, 이 책을 누군가가 저에게 선물하기로 약속했기 때문에, 본의 아니게 늦게 읽게 되었습니다. 정말 잘 읽었습니다. 다만, 한두 가지 제 생각과 맞지 않는 부분이나 질문이 필요하다 싶은 부분이 있어서 이렇게 글을 올립니다.
1. "세계적"의 의미
제가 보기에 『한국의 정체성』은 한국의 정체성을 찾는 데에 그 본질적인 목적을 가지고서, 현재 우리가 갖고 있는 잘못된 "한국의 정체성"을 비판하는 방법을 채택한 것으로 보입니다. 첫 부분에서 (물론 필요에 의한 것이겠지만) 정체성의 의미와 순환논리의 오류를 경계하는 데 많은 시간을 쏟고 나서 결국 보편성에의 공격으로 현재 "한국의 정체성"의 주류를 이루는 생각들을 비판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2장 말미에 가서는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인 것"이라는 말에서 "세계적"이라는 것은 사실은 "미국적"이라는 말의 위장명칭이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에 대해서 몇 가지 제 생각을 말씀드리고 싶은데요, 제 생각은 그 말의 "세계화"는 "미국화"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 말의 "세계화"는 그야말로 '실재하는 개별자의 묶음' 그 자체의 세계화라고 생각합니다. 실재론의 입장에서 그렇다는 것이 아니라, 우리 사회에서 자랑스러이 소위 "세계화"라고 말하는 성공사례들이 그렇다는 뜻입니다. 제가 말씀드리고자 하는 바의 뜻은 이렇습니다.
우리나라의 대중문화를 상업적으로 혹은 내셔널리즘적으로 지배해나가는 언론들과 광고자들이 말하는 "세계화"란 비단 미국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우리 나라 아닌 모든 세계를 의미한다는 뜻입니다. 예를 들어 말씀드리겠습니다.
먼저 『춘향뎐』을 예로 들 수 있겠군요. 임권택 감독의 영화 『춘향뎐』은 53회 깐느Canne 영화제 공식 경쟁부문에 한국 최초로 진출하였습니다. 그를 보고 한국의 언론은 『춘향뎐』을 극찬했습니다. 또, 최근 미국의 메이저 배급사가 이를 수입 배급하여 미국에서 상영되기도 하고 『LA타임스』는 극찬을 아끼지 않았지요. 중요한 것은 이 두가지에 한국이 다 열광한다는 겁니다.
-- 여기서 한 가지 말씀드릴 것이 있는데요, 책에서 『카게무샤』가 깐느(칸) 영화제에서 수상했다고 이를 "미국적인 것에 부합했다"(127-128쪽)고 말씀하신 부분이 있는데 이는 잘못이라고 봅니다. 이는 유럽적인 것에 부합했다고 보는 편이 옳습니다. 실제로 유럽은 미국적인 것에 지속적으로 반발하고 있는 모습을 보입니다. 경제적인 측면에서 시작되었다고는 하지만 EU도 그 중 하나일 것이고, 세계(?) 3대 영화제라고 하는 깐느, 베를린, 베니스 영화제 역시 유럽적인 것의 "보루"라고 보여집니다. 특히 프랑스는 자국어에 대한 거의 집착에 가까운 열심을 보여, 방송에서 영어를 쓰는 것조차도 규제(뚜봉Toubon 法)할 정도입니다. Franglais(프랑글레=Francais+Anglais=French+English)라는 조소섞인 풍자어도 생겼습니다. 실상 프랑스어는 과거 유럽공용어로 써도 될만큼의 지위를 확보하고 있기도 하였고 말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카게무샤』가 깐느에서 수상했다는 것은 미국적인 것에 부합했다고 보기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선생님께서도 아카데미에 외국어영화상 부문이 있다는 것을 근거로 미국적인 것을 비판하시면서 깐느와 베를린 영화제를 이와 대조시키심(129쪽)으로써 이를 어느 정도는 인지하고 계셨던 것으로 보입니다.
또, 라면과 소주의 경우가 있을 수 있습니다. 두 제품이 모두 일본이나 동남아 등지에서 큰 호평을 받고 잘 팔리고 있다고 합니다. 심지어 동남아에는 가짜 한국라면이 판을 치고 있다고하는 보도도 접했습니다. 라면의 경우는 러시아나 남미에서도 인기가 있다고 들었습니다. 저는 이를 프랑스 포도주와 마찬가지로 하나의 문화 상품으로 봅니다. 라면은 본래 일본이 개발한 것이고, 소주는 아랍권에서 고려시대 들어온 것으로 저는 알고 있습니다만, 선생님 말씀대로 시원(始原)을 따지지 않고 이를 우리가 받아들여 좋은 상품으로 발전시켰다고 저는 생각하고 있습니다. 라면은 매운 음식을 잘 먹는 우리의 입맛에 딱 맞도록 발전된 라면입니다. 라면의 대중성이 그것을 증명합니다. 제가 보기에는 연령층에 관계없이 그런 것 같습니다. 소주도 마찬가지입니다. 헌데, 이는 말씀드린 바와 같이 일본과 동남아 그리고 러시아와 남미에서 인기를 끌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언론과 광고자들은 이를 자랑스러워한다는 것입니다.
『춘향뎐』과 라면, 소주의 예에서 볼 수 있듯이 우리는 "세계적"을 말하면서 미국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우리 아닌 어느 나라에서 인정받더라도 그것을 자랑으로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상업적 목적을 위해 만든 "한국의 정체성"이라면 책에 쓰신 대로 미국적인 것에 대한 분석을 통해 우리 안에 있는, 미국적인 것과 부합하는 것을 찾아내는 것(75쪽)이 중요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선생님이 생각하신 "우리가 생각하는 '세계적'이라고 말의 솔직한 뜻은 '미국적'인 것이다"라는 말에 그 근거를 두고 그렇게 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미국의 시장 규모가 가장 크다고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제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흔히들 말하는 "세계적"이라는 말은 사실 "미국적"이 아니라고 하는 점이었습니다.
물론 세계화가 미국화를 의미하는 경우가 대부분인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분명히 그에 저항하는 문화도 있습니다. 한때, 사회를 휩쓸었던 드 소쉬르F. de Saussure나 레비-스트로스C. Lévi-Strauss의 구조주의나 현대 철학과 문학, 문화의 주류를 이루고 있는 포스트-구조주의는 모두 유럽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었습니까? 유럽은 그런 의미에서 미국과 같은 유로 묶을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봅니다. 물론, 미국의 영향력 그 자체는 충분히 인정할만 합니다. 실상 우리가 포스트-구조주의를 받아들인 것도 실상은 미국으로부터였다고 들었고, 심지어 제3(?)세계의 책들을 읽고자 하여도 영역된 것의 중역으로 읽는 것이 대부분이기 때문입니다. 미국은 흔히들 하는 말대로 "인종의 전시장"이며, 때문에 다양한 관심과 생각들이 얽혀 있는데다가 막대한 경제력을 갖고 있기 때문에 책의 경우만 해도 이런저런 것들이 죄다 출판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여 이 모든 것들을 미국적이라고 할 수는 없다고 봅니다. 왜냐하면 그것들을 누구도 미국적인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고, 미국인들 스스로도 그러하리라 짐작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시장(특히, 지식 시장)의 요구에 따라 그것들을 만들었을 뿐입니다.
2. 한국적인 것으로서의 '한恨'과 '정情' 그리고 '흥興', '해학諧謔'
선생님께서는 '한'(69-70쪽)과 '정'(115-116쪽)을 한국적인 것으로 보는 데 대해 부정적이신 것 같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저는 '한', '흥', '정', '해학'을 한국적인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선생님께서 '한'을 한국적으로 보지 않으신 것은 김홍도의 그림을 보시거나 서울올림픽 식전 식후 행사를 보시고 그렇게 생각하신 것 같습니다. 맞습니다. 제가 볼때도, 아니, 누가 보아도 거기엔 '한'이 없습니다. 김홍도의 그림은 '해학'을 가지고 있고, 서울 올림픽 식전식후 행사는 '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외의 경우는 어떨까요? 서편제를 보면 거기에는 분명히 '한'이 있지 않습니까? 소설가 이청준 씨는 이를 채택하여 『서편제』에서 구현하였고, 임권택 감독은 영화 『서편제』에서 이를 영상화하였습니다. 거기에는 분명히 한이 있지요. 또, 우리 민요의 가락이나 이를 차용한 소월의 시에는 분명히 '한'이 담겨 있습니다.
또 선생님께서는 '정'이라는 것이 우리의 정체성이 될 수 없다고 하시면서 그 근거로 "만약 알래스카인이 우리 못지 않게 정이 많은 민족이라면"이라는 가정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하지만, 그것은 이유가 될 수 없다고 봅니다. 정체성이라고 하는 것은 발견해 내기도 어렵고 말하기도 어려운 만큼 한 마디로 단정지을 수도 없습니다. "우리의 정체성은 '이것'이다." 라는 말은 파시스트가 아니면 누구도 할 수 없는 말입니다. 저는 "우리의 정체성은 이것과 저것과 그것과 … 즉, '이것들'이다" 라는 말이 정확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다시 말해서, 제가 생각하는 바로는 "우리의 정체성은 한과 정과 흥과 해학"입니다.
한과 정과 흥과 해학은 물론 우리만이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만큼 한을 가진 집단이 있고, 우리만큼 정이 두터운 집단이 있고, 우리만큼 흥있는 집단이 있고, 우리만큼 해학적인 집단이 또 있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어느 누구도 우리와 같은 한, 정, 흥, 해학은 갖지 못할 것입니다. 선생님께서 중국의 애니메이션을 수묵의 농담으로 표현한 중국적인 색채가 물씬 풍기는 것으로 인식하셨습니다. 그리고 긍정적인 태도를 보이신 것 같습니다. 하지만, 수묵의 농담은 중국적인 것이기도 하지만, 한국의 수묵화 또한 만만치 않습니다. 그럼에도 선생님께서 그것을 중국적인 것으로 보신 것은 그것이 수묵의 농담을 매개로 하여 표현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한국적인 것과 무언가 다르다고 느끼셨기 때문일 겁니다. 그러니까, 같은 수묵화도 중국의 수묵화와 한국의 수묵화는 다르다는 것이지요. 설령, 선생님께서 그것을 못느끼셨다고 하더라도 전문가가 보면 둘을 구별할 수 있을 것입니다.(91쪽) 그렇다면 한, 정, 흥, 해학은 한국적인 것으로 인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런데, 혹시 선생님께서 한이나 정을 우리의 정체성으로 인정하기 싫으신 이유는, 그것이 내용적인 것이라는 데서 비롯된 것인지요? 선생님께서 중국의 수묵화를 말씀하시면서 내용이 아니라 형식도 중요하다 하신데서(71-72쪽) 저는 선생님이 내용보다 형식이 중요하다고 말씀하시는 것같은 느낌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우리 문화에서 형식적인 것의 고찰도 적다고는 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예를 들어 『서편제』와 『아름다운 시절』등의 영화에서 흔히 보여지는 롱테이크 기법 등이 동중정動中靜에서 정靜에 해당하는 한국적인 형식을 도입한 것이라 생각됩니다. 헐리우드 영화를 동動에 비유할 수 있겠지요. 내용이란 늘 형식과 연계되는 것일 겁니다. 저도 중국의 한 애니매이션을 보았는데, 전체적으로 수묵채색화의 형식을 갖고 있었고 자연 친화적인 내용을 갖고 있었습니다(가령 목동이 피리로 새와 노래를 겨루었다든가 하는…). 생각해보면, 붓글씨로 로마자 알파벳을 쓰는 것은 어색하기만 합니다. 물론, 익숙해지면 괜찮아지겠지요. 컴퓨터 자판이나 펜글씨같은 것도 한글이나 한자를 위한 것은 아니었으니까요. 하지만, 그것은 수용자의 측면이고 우리가 우리의 내용을 추구한다면 필연적으로 형식도 이를 좇아가지 않을까 하는 것이 저의 개인적인 생각입니다.
3. 대중성과 정체성의 미래
선생님께서는 대중성을 강조하셨습니다. 아마도 다른 학자들과의 이견이 여기에서 벌어지지 않을까 하는 것이 제 생각인데요, 제가 보기에도 대중성이 중요한 것은 분명하지만 선생님께서 생각하시는 만큼 대중성이 그 기준이 되어야 한다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과거 복원이 중요하다는 것은 선생님께서도 인정하셨던 것으로 기억합니다(109-110쪽). 그런데, 선생님께서는 대중이 그것을 지지하지 않을 경우 그의 유지를 그리 중요하게 생각지 않으시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것은 잘못이라고 생각합니다.
민요를 예로 들어보면 이렇습니다. 민요는 조선시대 백성(대중)들이 즐겨 부르던 노래였습니다(107쪽). 그런데, 지금의 대중들은 민요를 즐겨 부르지도 않고 이를 배척하기까지 하는 형편입니다. 실상 민요 애호가들은 현재 소수에 지나지 않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이럴 경우 우리가 굳이 민요에 지속적으로 지원과 후원을 할 필요는 없다는 생각이신 것 같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것을 현재만을 생각했을 때의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한국의 정체성"에서는 현재가 우선되어야 하는 것은 분명하지만, 과거나 미래 또한 경시되어서는 안 될 것으로 생각합니다.
우리의 근현대사에서 가장 통탄할 부분이 있다면 바로 "전통과의 단절"일 것입니다. 이는 임화林和 등의 이식문화론을 비판한 이론으로 알고 있습니다. 조선의 근대화는 두 가지로 이루어졌는데, 그 하나는 일제에 의한, 일제를 위한 근대화였고, 다른 하나는 이를 이기기 위한 민족주의적 근대화였습니다. 이 둘은 모두 성급하게 이루어졌는데 전자는 조선의 사정을 고려하지 않은 막무가내였기 때문에 그랬을 것이고, 후자는 아마 일본을 이겨야 했기 때문에 급해서 그랬을 겁니다. 이 과정에서 "전통과의 단절"이 일어났습니다.
이 "전통과의 단절" 때문에 우리의 민요는 사라져버리고 그 자리는 일본풍의 엔까(트로트)와 구미의 팝이 자리했습니다. 본래는 「꼴망태 아리랑」, 「둥글둥글 삽시다」등의 신민요가 당시 유행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북의 경우에는 이들 신민요를 지속적으로 발전시켜 "오데로 가 오데로 가~" 하는 노랫말로 유명한「벌목부의 노래」와 남쪽에서도 전국적으로 유행한 「반갑습니다」 등의 노래를 낳았습니다. 북은 나름대로 "전통과의 단절"을 비교적 잘 극복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현재 우리 나라에서는 민요의 대중적 지위가 매우 낮습니다. 하지만, 누군가가 전통 부활을 외치고, 이를 대부분 사람들이 따르는 때가 오지 않으리라고는 볼 수 없습니다. 민요는 과거 우리 정체성의 총체를 이루던 것이라고 보여지는데, 격세유전하는 것으로 알려진 문화는 언젠가 민요를 또다시 필요로 하게 될 것입니다.
저는 민요부흥론을 외치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그것의 유지보존이 필수적으로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현재 우리의 정체성을 이루는 데에 민요의 구실이 극미하다는 것은 저도 인정합니다만, 우리 문화의 풍부함을 지키고, 후에 있을 지 모를 우리의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 또 과거의 우리의 정체성의 보존을 위해 민요나 판소리 등을 유지 보존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과거의 정체성이라는 것?오늘날의 정체성과 전혀 다르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시간이란 두부처럼 갈라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4. 마치며
선생님의 글 중에서 제가 이해할 수 없거나 제 생각과 맞지 않는 부분들에 대해서 말씀드렸습니다. 이에 대한 선생님의 생각을 제게 말씀해주셨으면 합니다. 질문이 거칠어 읽기 어려우실지 모르겠습니다. 답변 기다리겠습니다.
5. 질문 한 가지 더
한국의 정체성과는 직접적으로 관계없을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이건 잘 몰라서 하는 질문입니다. 한국의 유교, 불교, 도교, 기독교가 샤머나이즈되었다(100-103쪽)고 하신 것을 읽었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이것을 한국인 정서의 핵심이라고 보셨습니다. 그런데, 다른 나라는 어떤가 하는 게 제 질문입니다. 다른 나라는 샤머니즘화되지 않았는지요? 한국의 샤머니즘이 유별난 것인가 하는 것이 제 질문의 중점입니다. 만약 우리 말고도 여러 나라에서 샤머니즘화되었다고 한다면, 샤머니즘은 우리 정서의 핵심으로 볼 수만은 없기에 드리는 질문입니다. 제가 생각하기에는 기복祈福은 누구나가 바라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서입니다. 동서를 막론하고 대부분이 행복을 바라지 않습니까? 성서에서도 창세기에서 축복을 재산과 자식으로 일컫는 경우가 많은 것 같은데, 어떻습니까?
P.s. 질문이 너무 많지요? 죄송합니다. 여담입니다만, 『한국의 정체성』 표지 마음에 드시는지요? 탈춤이 나와서... 대중성을 강조하는 선생님과는 안 맞는 듯 합니다만... ^^;; 이만 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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