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담은 위즈덤하우스의 임프린트 출판사로, 예담판 『어린 왕자』는 디자인 문구류 회사인 아르데코7321이 '어린 왕자'의 상표권 계약을 체결한 후 국내 시장을 거의 독점하려는 의도로 위즈덤하우스와 함께 낸 책이다. (세계일보의 조정진 기자는 예담판이 곧 아르데코7321과 계약 하에 낸 것이라는 점을 모르고 스캔들마케팅이라는 딴소리를 하고 있다.)아르데코7321은 상표권을 취득한 후 각 출판사와 서점에 공문을 보내 서점에 깔린 『어린 왕자』 중 (자신들이 상표권 라이센스를 얻은) 특정 삽화 및 서체를 사용한 책을 모두 서점에서 철수시키라고 고지했고 각 출판사는 반발하고 있는 상태다. 여기에는 저작권 또는 상표권과 관련한 복잡한 문제가 있다.
예담판 『어린 왕자』는 불문학 박사이자 전문 번역가인 강주헌이 번역했다. 강주헌은 이미 2001년에 문예당에서 『어린 왕자』를 번역 출판한 적이 있지만, 이번에 옛 번역본을 상당 부분을 새롭게 손질하여 출간했다. 이 책은 겉표지에 "어린왕자 오리지널 삽화가 들어간 정식 한국어판"이라고 명시하고 있고, 표지 안쪽과 속표지면에 "이 책은 국내 최초로 생텍쥐페리의 원본 삽화 저작권을 갖고 있는 프랑스 Sogex사와의 계약을 통한 정식 한국어판입니다."라고 쓰고 있다. 하지만 이 부분은 논란의 여지가 많다.
전반적으로 예담-아르데코7321판은 기존 번역본과 큰 차이가 없어보이고, 부분적으로 기존 번역본의 오류를 개선한 부분이 있지만, 많은 면에서 기존 번역본에 못 미치는 점이 있다. 그 세목들을 삽화 및 텍스트의 정확성과 문체의 성실성, 그리고 번역의 적확성 면에서 살펴보자. 이를 위해서 원문인 프랑스 갈리마르Gallimard 출판사의 폴리오Folio 문고판과 전성자가 옮긴 문예출판사판, 김화영이 옮긴 문학동네판, 그리고 지금 문제가 되는 예담-아르데코7321판을 함께 살펴보자. 이해를 돕기 위해 영어판인 하코트-브레이스판도 종종 함께 인용할 것이다. (이 글에 인용된 모든 글은 생떽쥐뻬리의 『어린 왕자』 원텍스트와 그 번역본들이므로, 편의상 인용문의 저자 이름은 생략하고 발행년과 쪽수만 명기한다. 대신 인용문의 끝에 출판사의 이름을 밝힌다. 번역본을 지칭할 때에도 번역자의 이름보다는 출판사의 이름으로 부르기로 한다.)
개악된 삽화와 부정확한 텍스트#
『어린 왕자』의 삽화와 텍스트는 오래도록 어려움을 겪어왔다. 전쟁 중이었던 탓도 있고 해서, 저자인 생떽쥐뻬리가 제대로 살피지 못한 탓일 터다. 그래서 오래도록 잘못된 삽화와 잘못된 텍스트가 실려 있었다. 그것은 프랑스 갈리마르판 『어린 왕자Le Petit Prince』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갈리마르 출판사는 1999년 폴리오 문고판으로 이 책을 새로 내면서 삽화와 텍스트에 있었던 그간의 오류를 교정했다. 이러한 저간 사정이 폴리오 문고판 앞머리에 작자의 유족으로 보이는 프레데리끄 다게이Frédéric d'Agay가 쓴 "일러두기avertissement"에 나와 있다. 최근에 국내에서 출간된 『어린 왕자』는 대개 1999년 판본을 반영한 것으로 그런 오류가 대개 눈에 띄지 않지만, 아직까지 개정되지 않은 부분도 많다.
예담-아르데코7321판도 이른바 '정식 계약판'답게 오류가 거의 없다. 하지만, 삽화에서 하나, 텍스트에서 하나의 문제가 눈에 띈다. 삽화의 경우 천문학자가 천체망원경으로 우주를 바라보는 그림에서 별이 빠져 있다는 문제가 있다(1999, 22; 2007a, 17; 2007b, 22: 2008, 23):
한편, 텍스트의 경우 '나'가 소행성의 이름을 짓는 방법을 설명하면서 예로 든 소행성의 이름이 잘못 기재되어 있다는 문제가 보인다(1999, 22; 2007a, 17; 2007b, 23; 2008, 22):
Il l'appelle par exemple : « l'astéroïde 325 ». (갈리마르)
이를테면, '소혹성 3251호'라는 식으로 부르는 것이다. (문예출판사)
가령, '소혹성 제325호'라는 식으로 부르는 것이다. (문학동네)
천문학자는 […] '소행성 3251호'라는 식으로 번호를 붙인다. (예담-아르데코7321)
갈리마르의 정본에서 분명히 '325호'라고 씌어 있는 것이 예담-아르데코7321판에서는 3251호로 바뀌어 있다. 단순히 별 이름의 사례를 든 것이므로 '325호'라고 하거나 '3251호'라고 하거나 별로 다르지 않다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 같다. 하지만, 그렇지가 않다. 이 '소행성 325호'는 별 뜻 없이 나온 말이 아니기 때문이다. 어린 왕자가 세 봉우리의 화산과 한 봉오리의 꽃을 남겨두고 자기 별을 떠나 처음 도착한 곳이 왕이 살고 있는 '소행성 325호'이기 때문이다. 『어린 왕자』에서 '소행성 325호'는 단지 이름의 사례이거나 혹은 어딘가 있기는 하지만 별로 중요하지 않은 곳이 아니라, 어린 왕자가 직접 다녀간 소설의 한 중요한 무대인 것이다. 참고로, 영어판 『어린 왕자The Little Prince』에서도 아래와 같이 정확하게 쓰고 있다(1971, 11).
He might call it, for example, "Asteroid 325."
개악된 문체#
예담-아르데코7321판은 비교적 유려한 문체를 사용하고 있다. 흔히 하는 말로 이 책은 '읽히'며, 특히 어린이들을 고려한 듯 비교적 쉬운 말을 사용해서 원문을 옮기려고 한 점이 돋보인다. 하지만 아주 중요한 문제가 있다: 어린 왕자가 사용하는 말이 반말tutoyer이거나 높임말vouvoyer이거나 무조건 높임말로 옮겼다는 점이다.
먼저 어린 왕자가 처음 등장하는 장면을 보자(Saint-Exupéry 1999, 15; 2007a, 10; 2007b, 13; 2008, 12):
« S'il vous plaît... dessine-moi un mouton !
-- Hein !
-- Dessine-moi un mouton... » (갈리마르)"양 한 마리를 그려 줘!"
"뭐라구?"
"양 한 마리를 그려 줘." (문예출판사)"저기…… 나 양 한 마리만 그려줘."
"응?"
"나, 양 한 마리만 그려줘." (문학동네)"미안하지만, 양 한 마리만 그려줘요!"
"뭐라고?"
"양 한 마리만 그려줘요." (예담-아르데코7321)
갈리마르판에서 보듯이 어린 왕자는 '나'에게 반말을 하고 있다. 여기서 dessine-moi라고 하면 분명히 너tu에 대한 명령문으로 반말이며, 높임말로 vous에 대한 명령문이 되기 위해서는 dessinez-moi라고 해야 한다. 문예출판사판이나 문학동네판은 이를 모두 반말로 옮기고 있지만, 예담판만은 이상하게도 높임말을 쓰고 있다. '나'가 아저씨뻘이므로 높임말을 쓸 것 같지만 실제로 어린 왕자는 '나'를 tu라고 부른다(1999, 18; 2007a, 13; 2007b, 15; 2008, 15):
« Tu vois bien... ce n'est pas un mouton, c'est un bélier. Il a des cornes... » (갈리마르)
"봐…… 이건 양이 아니라 염소잖아. 뿔이 있으니까……." (문예출판사)
"아이 참…… 그건 양이 아니라 염소잖아. 뿔이 달렸으니까……." (문학동네)
"아저씨…… 이건 양이 아니고 염소에요. 뿔이 있잖아요." (예담-아르데코7321)
'Tu vois bien'은 직역하면 '네가 보다시피' 정도에 해당하는 말이다. 그렇다면 어린 왕자는 버릇이 없어서 누구에게나 너tu라고 부르고, 누구에게나 반말tutoyer을 쓰는 것일까? 혹은 어린 왕자는 너무나 어려서 반말과 높임말을 잘 구분하지 못하고 있는 것일까? 누구나 어린 시절에는 부모님께도 동네 아저씨에게도 반말을 쓰던 경험이 있으니까 말이다. 소행성 B612에서 혼자 살던 어린 왕자에게는 누구도 그런 높임말을 가르쳐주지 않았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건 사실이 아니다. 어린 왕자는 무척이나 분명하게 너tu라고 부를 사람과 당신vous이라고 부를 사람을 구분하고 있다. 가령 어린 왕자는 소행성 325호에서 만난 왕을 분명히 당신vous이라고 부르고 높임말vouvoyer을 쓰고 있다(1999, 43; 2007a, 42; 2007b, 54; 2008, 56):
« Sire, lui dit-il... je vous demande pardon de vous interroger...
-- Je t'ordonne de m'interroger, se hâta de dire le roi.
-- Sire... sur quoi régnez-vous ?
-- Sur tout, répondit le roi, avec une grande simplicité
-- Sur tout ? » (갈리마르)"폐하, 한 가지 여쭈어 봐도 좋을까요……."
"네게 명하노니, 질문을 하라."
"폐하…… 폐하는 무엇을 다스리고 계신지요?"
"모든 것을 다스리노라."
퍽이나 간단히 왕이 대답했다.
"모든 것을요?" (문예출판사)"폐하…… 한 가지 여쭈어봐도 될는지요……"
"짐이 명하노니 질문을 하라." 왕이 서둘러 말했다.
"폐하…… 폐하께서는 무엇을 다스리고 계십니까?"
"모든 것을 다스리노라." 왕은 극히 간단하게 대답했다.
"모든 것을요?" (문학동네)"폐하, 한 가지 여쭤봐도 될까요?"
어린 왕자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왕이 대답했다.
"네게 명하노니, 질문을 허락하노라."
"폐하…… 폐하는 무엇을 다스리고 계시나요?"
왕은 아주 간단히 대답했다.
"모든 것!"
"모든 것을요?" (예담-아르데코7321)
첫 줄에서 어린 왕자는 왕을 당신vous이라고 부르고 있고, 셋째 줄에서 당신vous에 대한 명령문인 régnez-vous를 쓰고 있다. 어린 왕자는 왕에게 일관되게 높임말vouvoyer을 쓰고 있다. 어린 왕자는 왕 이외에도 허영쟁이와 지리학자에게는 높임말을 쓰고, 그 밖의 사람들에게는 반말을 쓴다. 특정 사람에게 높임말을 쓰는 것은 (떽스뜨 속에서는 나타나 있지 않지만) 그들의 나이를 고려한 것일 수도 있고, 그들의 지위를 따진 것일 수도 있으며, 어쩌면 상대방이 바라는 바를 환기시켜 주는 것일 수도 있다. 말하자면, 왕에게 높임말을 쓰는 것은 지극히 당연할 것이고, 허영쟁이에게는 높임말을 써 주면 좋아할 것이다. 지리학자도 권위의식이 있는 학자로서 높임말에 걸맞는다. 이유야 어쨌든 번역 과정에서 중요한 것은 왜 이들에게 높임말을 쓰는가보다는, 이들에게 높임말을 쓴다는 사실 그 자체일 것이다.
그런데 예담-아르데코7321판은 왕자가 하는 모든 대화를 높임말로 옮기고 있다. 어린이가 어른에게 높임말을 써야 한다는 당위 때문이었는지 혹은 다른 이유가 있었는지 나는 모르겠다. 강주헌이 옮긴 2001년판 『어린 왕자』에서는 반말/높임말의 층위가 정확하게 구분되어 있으니 이상한 노릇이다. 독자들로서는 어린 왕자가 하는 말의 층위를 잘 전달받을 권리를 잃은 것이다.
한편 예담-아르데코7321판의 또다른 문제점은 원문의 괄호를 모조리 풀어놓았다는 것이다. 종종 번역 과정에서 글의 흐름을 고려해서 괄호를 푸는 경우가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원문의 모든 괄호를 풀어놓았다는 것은 문제가 있으며, 독자들은 괄호를 통해 글에서 좀더 주된 부분과 부차적인 부분을 구분할 수 있으므로 이는 무척 위험한 결정이다. 예를 들어, 생떽쥐뻬리가 레옹 베르뜨에게 바치는 헌사에서도 그런 문제점이 나타난다(1999, 11; 2007a, 5; 2007b, 5; 2008, 5):
Tous les grandes personnes ont d'abord été des enfants. (Mais peu d'entre elles s'en souviennent.) (갈리마르)
어른들은 누구나 다 처음엔 어린아이였다. (그러나 그것을 기억하는 어른은 그다지 많지 않다.) (문예출판사)
어른들은 누구나 다 처음엔 어린아이였다. (그러나 그것을 기억하는 어른은 별로 없다.) (문학동네)
어른들도 처음에는 모두 어린아이였습니다. 하지만 그것을 기억하는 어른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예담-아르데코7321)
여기서 생떽쥐뻬리가 '어른도 다 어린이였다'는 것을 언급하는 이유는 그가 이 책을 레옹 베르뜨라는 어른에게 바치는 것에 대해서 어린이들에게 이해를 구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어른도 다 어린아이였다'라는 대전제를 언급함으로써 생떽쥐뻬리는 이 책을 레옹 베르뜨라는 사람의 어린 시절에 바칠 수 있는 면죄부를 받게 된 것이다. '그것을 기억하는 어른은 별로 없다'는 언급은 역시 부차적인 문제로, '어른도 다 어린아이였다'라는 대전제에 대한 반발을 최소화하기 위해 예상되는 반발을 미리 수용한 것이다. 그러므로 그 문장은 역시 괄호로 묶는 것이 바람직하다.
예담-아르데코7321은 이처럼 괄호를 빼버림으로써 주된 부분과 부차적인 부분을 구분할 수 없도록 하였는데, 그럼으로써 한편으로는 또한 원 문장의 매력과 맛조차도 잃어버린 경우가 많다.
예담-아르데코7321판에서 보이는 세 번째 문제점은 올바르지 않은 강조 부사를 사용했다는 것이다. 사실은 부정적인 의미를 갖고 있는 '너무'라는 말을 한국인들은 너무 많이 쓴다. '너무'는 불어로 trop, 영어로 too much의 뜻을 가진 부사로 일반적으로 부정적인 뜻으로 쓰이는 것이다. 최근에 연예인들을 포함한 한국인들이 '너무 감사합니다'처럼 어법에 맞지 않게 자주 쓰면서 퍼졌지만, 이는 분명 틀린 것으로 "정말 감사합니다"처럼 '정말', '매우', 또는 '무척' 등으로 바꾸어 쓰는 것이 맞다. 그런데 예담-아르데코7321판은 이 '너무'라는 부사를 그대로 노출하고 있다(2008, 17-18, 28, 44, 82):
나는 어린 왕자에게 내가 날아다닌다는 사실을 알려주면서 너무 자랑스러웠다.
"아! 너무 잘됐다!"
아! 정말이었다. 너무너무 예쁜 꽃이었다.
"할아버지의 별은 너무 아름다워요. 바다도 있나요?"
'너무'의 노출은 매스컴을 통해 잘못 알려진 문법을 그대로 고착화시킨다는 점에서 큰 문제가 있다. 이런 문제점은 다른 번역본에서는 볼 수 없는 것으로 번역자뿐 아니라 편집자의 손길이 제대로 미치지 못한 책이라는 느낌을 준다. 편집자의 실력에 문제가 있거나, 아니면 상표권 분쟁과 관련한 특정 시기에 책을 내려는 의도로 무리한 일정을 추진했기 때문이 아닌가 추측해 본다.
개악된, 번역의 정확성#
예담-아르데코7321판은 분명히 몇몇 지점에서 기존 번역의 오류를 고치고 있다. 후발 주자인 덕도 있고, 강주헌이라는 옮긴이의 능력 덕도 있을 것이다. 가령 문학동네판에 이르기까지 고쳐지지 않은, 어린 왕자가 본 해넘이의 횟수는 예담-아르데코7321판에서는 정확하게 '개선'된다(1999, 31; 1971, 21; 2007a, 28; 2007b, 35; 2008, 36):
« Un jour, j'ai vu le soleil se coucher quarante-quatre fois! » (갈리마르)
"One day," you said to me, "I saw the sunset forty-four times!" (하코트 브레이스)
"어느 날 나는 해가 지는 걸 마흔세 번이나 보았어!" (문예출판사)
"어느 날은 해 지는 걸 마흔세 번이나 본 적도 있어." (문학동네)
"언젠간 하루에 해가 지는 걸 마흔네 번이나 보았어요!" (예담-아르데코7321)
어린 왕자에게 있어서 해넘이는 무척 중요한 것이고, 떽스뜨에서 어린 왕자가 갖는 감수성의 원천이라고도 볼 수 있는 만큼 이 부분은 상당한 중요성을 갖는다. 어린 왕자는 '나'에게 해지는 걸 보러 가자고 떼를 썼고, 소원을 말해보라는 왕에게는 해더러 지금 당장 지라고 명령해 달라고까지 한다. 가로등 켜는 사람의 별에서 떠나면서, 24시간 동안 1440번이나 해가 지는 축복받은 별를 끝내 잊지 못할 것이라고 의식하지 못하는 가운데 생각하기도 한다. 어린 왕자가 해지는 것을 마흔세 번이 아니라 마흔네 번 보았다는 것은 떽스뜨의 다른 곳에서도 나온다.
어쨌든 예담-아르데코판이 삽화나 확정 떽스뜨의 문제 그리고 문체의 문제에도 불구하고 이 부분을 정확하게 옮긴 공로는 실은 번역자 강주헌에게 돌려야 옳다. 강주헌의 옛 번역본, 2001년에 출간된 문예당판 『어린 왕자』에도 그 부분은 원문에 충실하게 실려 있기 때문이다(53):
"어느 날 나는 해가 지는 걸 마흔네 번이나 보았어!"
또, 일부 번역본에서 착오 탓인지 '낮'을 '밤'으로 잘못 옮긴 부분도 예담-아르데코7321판에서는 바르게 옮겨져 있다(1999, 20; 1971, 9; 2007a, 16; 2007b, 19; 2008, 19):
« Ce qui est bien, avec la caisse que tu m'as donnée, c'est que, la nuit, ça lui servira de maison.
-- Bien sûr. Et si tu es gentil, je te donnerai aussi une corde pour l'attacher pendant le jour. Et un piquet. » (갈리마르)"The thing that is so good about the box you have given me is that at night he can use it as his house."
"That is so. And if you are good I will give you a string, too, so that you can tie him during the day, and a post to tie him to." (하코트브레이스)"아저씨가 준 상자가 밤에는 집이 될 테니까 잘 됐어."
"그렇고말고. 그리고 네가 착하게만 하면, 밤에 양을 매 놓을 수 있는 굴레를 줄게. 말뚝도 주고." (문예출판사)"아저씨가 준 상자가 좋은 건 그게 밤에는 양의 집이 될 수 있다는 거야."
"그렇고말고. 네가 착하게 굴기만 하면 낮에 양을 매어둘 고삐도 그려줄게. 그리고 말뚝도." (문학동네)"아저씨가 준 상자가 밤에는 양의 집으로 쓰일 테니 참 잘됐어요."
"물론이란다. 그리고 네가 착하게 있으면 낮에 양을 묶어놓을 수 있는 고삐도 만들어줄게. 말뚝도 주고." (예담-아르데코7321)
그러나 보다 많은 부분에서 예담-아르데코7321판본의 오류가 눈에 띈다. 먼저 낱말을 잘못 옮긴 것이 종종 있다. 먼저 시적詩的이라는 낱말을 웬일인지 '상징적'이라고 옮긴 부분이 있다(1999, 52; 1971, 46; 2007a, 54; 2007b, 69; 2008, 72):
C'est amusant, […] C'est assez poétique. (갈리마르)
"It is entertaining," […] "It is rather poetic. […]" (하코트브레이스)
그것 재미있는데. 아주 시적(詩的)이고. (문예출판사)
'재미있는데' […] '상당히 시적인걸. […]' (문학동네)
그거 재미있군. 그런데로 상징적이고 말이야. (예담-아르데코7321)
상징이 시를 구성하는 중요한 요소가 되기도 하지만, 시적이라는 것과 상징적이라는 것은 같은 것이라고 보기가 힘들다. 이 말은 어린 왕자가 실업가의 별을 방문했을 때 했던 생각인데, 그 실업가는 별을 '상징적'으로 소유한다기보다는 '실질적'으로 자신이 소유한다고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실질적인 '믿음'이 어린 왕자의 눈에는 우스꽝스러웠고, 낭만적이었기 때문에 시적으로 보였던 것 같다. 어쨌든 이상한 것은 강주헌의 이전 번역(2001, 74)에서는 "제법 시적이고."라고 정확히 옮겨져 있었다는 점이다. 편집자나 최종 결재자의 눈에 '시적'이라는 말이 뜬금없는 것으로 보였던 것일까?
다른 부분을 보자. 배움과 연습은 같은 것일까 다른 것일까? 어린 왕자의 원문에 분명히 '배운다'고 되어 있는 부분이 번역문에서는 '연습하다'로 뒤바뀐 부분이 많다(1999, 16; 1971, 4; 2007a, 10; 2007b, 13; 2008, 12):
je n'avais rien appris à dessiner (갈리마르)
I never learned to draw anything (하코트브레이스)
아무것도 그리는 연습을 하지 않았으니까 (문예출판사)
그림 그리는 것을 배워본 일이 없었으니 (문학동네)
그림 그리는 연습을 전혀 하지 않았으니까 (예담-아르데코7321)
불어의 apprendre나 영어의 learn에 '익히다'라는 뜻이 있기는 하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연습하다'라고 하려면 exercice/exercise나 practice를 쓰는 것이 보통이다. 게다가 여기에서 '연습하다'가 나오면 '나'가 일관되게 끌어온 그림과 관련된 정체성이 깨지게 된다. '나'는 그림 1호와 2호가 실패한 이후, 결국 비행기 조종하는 법을 "배웠appris"기 때문이다(1999, 14; 2008, 9). 여기서 '나'는 그림을 배우는 '대신' 비행기 조종하는 법을 배웠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 부분은 문학동네판을 따라 옮기는 것이 옳을 것이다.
한편으로는 문장 내지는 구가 몽땅 틀린 경우도 있다. 이 부분은 낱말의 선택이 문제가 아니라 문장 구조를 잘못 파악하거나 문법을 잘 몰라서 잘못 번역하는 경우로, 명백한 잘못이다. 가령 "그림 그리는 것을 배워본 일이 없"는 '나'가 어린 왕자의 초상화를 두고 '최고로 멋진 초상화'라고 지칭하는 이상한 번역을 보자(1999, 16; 1971, 4; 2007a, 10; 2007b, 13; 2008, 12):
Voilà le meilleur portrait que, plus tard, j'ai réussi à faire de lui. (갈리마르)
Here you may see the best portrait that, later, I was able to make of him. (하코트브레이스)
훗날 내가 그를 그린 그림 중에서 가장 잘 된 것이 여기 있다. (문예출판사)
여기 있는 그림은 훗날 내가 그의 모습을 그린 그림들 중에서 가장 잘된 것이다. (문학동네)
훗날 나는 그 아이를 모델로 하여 최고로 멋진 초상화를 그렸다. (예담-아르데코7321)
여기서 '가장 잘 된le meilleur portrait/the best portrait'은 que/that절 이하의 수식어의 영향을 받는다. 그러므로 해당 부분은 '최고로 멋진 초상화'가 아니라 내가 그린 것 중에서 제일 나은 것이란 뜻이 맞다. 특히 '나'는 스스로 그림을 잘 못 그린다고 떽스뜨 전체를 통하여 고백하고 있기 때문에 '최고로 멋진 초상화'라는 것이 올바른 번역이 아니라는 것은 누구나 알 수 있을 것이다. 게다가 떽스뜨 전체를 고려하지 않더라도 지금 해당 본문만을 솜솜 뜯어보면 '그를 그린 것 중에'라기보다는 '그를 그리는 데 성공한 것 중에' 내지는 '그를 그릴 수 있었던 것 중에' 정도로 해석하게 되는데, 이것은 '나'의 능력상 그를 그리는 것이 무척이나 힘든 일이거나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음을 시사한다. 한편 "Voilà"나 "Here you may see"는 모두 상대에게 눈앞의 어떤 그림을 가리키며 하는 말인데, 유독 예담-아르데코7321판에서만 이 부분에서 지칭의 동사들을 제대로 살려내지 못했다. 그런데 역시 여기서도 이상한 부분이 있는데, 강주헌의 옛 번역본에서는 "훗날 내가 그르르 그린 것 중 가장 잘 된 그림이 여기 있다."로 정확하게 옮겨져 있다는 점이다(2001, 38).
마찬가지로 문장 자체를 잘못 옮긴 경우로 어린 왕자의 별 B612에 대한 문장이 있다(1999, 24; 1971, 13-14; 2007a, 19; 2007b, 25; 2008, 25):
Mais si vous leur dites : « La planète d'où il venait est l'astéroïde B 612 », alors elles seront convaincues, et elles vous laisseront tranquille avec leurs questions. (갈리마르)
But if you said to them: "The planet he came from is Asteroid B-612," then they would be convinced, and leave you in peace from their questions. (하코트 브레이스)
그러나 "그가 떠나온 별은 소혹성 B612호입니다"라고 말하면 수긍을 하고 더 이상 질문을 해대며 귀찮게 굴지도 않을 것이다. (문예출판사)
그러나 "어린 왕자가 떠나온 별이 B612호 소혹성입니다"라고 하면 어른들은 수긍이 간다는 듯 더이상 질문을 해대며 귀찮게 굴지 않을 것이다. (문학동네)
그러나 "그는 소행성 B612호에서 왔습니다"라고 말하면 어른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다른 질문으로 조용히 넘어갈 것이다. (예담-아르데코7321)
B612는 어린 왕자가 살던 별의 이름이지만, '나'에 따르면 그 이름은 별로 중요한 것이 못된다. 적어도 어린이들에게는 그렇다. 하지만 어른들에게는 B612라는 그 숫자가 바로 본질적인 부분으로 인식되는 것이다. 여기서 laisser는 '내버려 두다'라는 뜻이고 tranquille은 '조용한'이라는 뜻이므로 이 부분 역시 '질문을 하면서 성가시게 하지 않을 것이다'라는 의미로 받아들여야 맞다. 특히 여기서 어른들은 숫자가 본질이라고 믿기 때문에 B612호라는 이름을 듣는 순간 더 이상의 질문을 할 필요가 없어지게 된다는 점도 유의해야 한다. 강주헌의 문예당판은 이 부분을 아래와 같이 바르게 옮겼다(2001, 46):
그러나 "그가 떠나온 별은 소혹성 B612호입니다."라고 말하면 이해를 하고 더 이상 질문을 하면 귀찮게 굴지도 않을 것이다.
또, 불어 특유의 접속법을 잘못 해석하여 완전히 반대의 문장이 된 경우도 있다(1999, 37; 1971, 29; 2007a, 36; 2007b, 46; 2008, 47):
Cette histoire de griffes, qui m'avait tellement agacé, eût dû m'attendrir... (갈리마르)
This tale of claws, which disturbed me so much, should only have filled my heart with tenderness and pity. (하코트브레이스)
그 발톱 이야기에 눈살을 찌푸렸지만 실은 가엾게 여겼어야 옳았던 거야……. (문예출판사)
그 발톱 이야기에 너무 약이 올랐었거든. 사실은 가엾게 여겼어야 했는데 말이야……. (문학동네)
그 가시 이야기가 짜증스럽기는 했지만 내게는 측은한 마음을 들게 했던 거예요……. (예담-아르데코7321)
프랑스어 원문의 eût dû의 주어는 3인칭인 '그 발톱 이야기cette histoire de griffes'다. 영어에서 must에 해당하는 devoir 동사의 3인칭 접속법 대과거형이 바로 eût dû이다. 접속법 대과거는 과거 사실에 대한 소원을 말하는 것이다. 이 문장을 직역하면 "그 발톱 이야기는 […] 나를 측은해지게 했어야 하는데." 정도가 되는 것이다. 즉, 어린 왕자는 그 때 장미꽃의 '발톱 이야기'를 듣고 그다지 측은해하지 않았고, 지금 그것을 후회한다는 말이다. 그러나 예담-아르데코7321판은 거꾸로 측은한 마음을 들게 했다고 말한다. 완전히 반대의 번역인 셈이다. 역시 강주헌의 문예당판은 이 부분을 아래와 같이 비교적 정확하게 옮기고 있다(2001, 59):
그 가시 이야기에 눈살을 찌푸렸으나 오히려 그것 때문에 그를 더 가엾게 생각해야 했어…….
결론을 대신하여#
완벽하고 꼼꼼하지는 않지만 국내 세 출판사의 번역본을 비교함으로써 예담-아르데코7321판이 일부 개선되었음에도 실상은 개악판이라는 점을 알 수 있었다. 법적 논란이 분분한 상표권을 '무기' 삼아 서점에서 경쟁 제품을 뺀 다음, 자사의 책으로 서점가에 진출하는 행태는 도덕적으로도 바람직하지 않고, 생떽쥐뻬리와 어린 왕자의 정신에도 맞지 않는다. 게다가 독점 시장의 지위를 누릴 때의 특수를 노려서 억지로 일정을 맞추어 책을 내는 행위는 생떽쥐뻬리의 이름값에 먹칠을 하는 행위다. 이를 통해 얻은 수익금으로 어린 왕자 박물관을 낸다 한들, 저작자의 글 하나 제대로 못 내는 출판사-문구점의 입장에서 그것이 홍보효과 이외에 또 무엇이겠나 하고 생각해 보면 씁쓸하기만 하다.
어린 왕자 - 생 텍쥐페리 지음, 강주헌 옮김/예담 |
참고문헌#
Saint-Exupéry, Antoine de. 1943, 1971. The Little Prince. Orlando:Harcourt Brace & Company
---. 1999. Le Petit Prince. Paris:Gallimard.
---. 2001. 『어린 왕자』. 강주헌 옮김. 서울:문예당.
---. 2007a. 『어린 왕자』. 전성자 옮김. 에버그린북스01. 서울:문예출판사.
---. 2007b. 『어린 왕자』. 김화영 옮김. 파주:문학동네.
---. 2008. 『어린 왕자』. 강주헌 옮김. 서울:예담(위즈덤하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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