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서는 크게 보아 '구원의 역사'이다. 아담의 첫 범죄sin 이후 모세가 시내 산에서 십계명을 받는 때를 거쳐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 박힘으로 '구원'이 올 때까지의. '구원'이 있기까지는 '죄'가 있어야 하므로 성서는 또한 '죄'의 역사이다.
그러나 '죄'가 무엇인가, 하고 물으면 누구도 쉽사리 대답하지 못한다. 누구든 "신(神)이 부과한 명령을 어기는 것"이 죄라고
주장하려는 이는 '왜 카인이 십계명이 생기기도 전에 스스로를 괴롭게 해야 했는지'를 설명해야 할 것이다.
도스또예프스끼의 『까라마조프 씨네 형제들』은 그 '죄의 역사'를 소설적으로 재구성해내고 있다. 그리고 그럼으로써 죄의 개념을 보다 명확히 하고 있다. 대개 사람들에게는 죄가 선험성Apriotät을 지니고 나타난다면, 도스또예프스끼의 소설 속에서는 그것이 하나의 '구체Konkretum'를 지니고 나타난다. 여기서 '구체'가 왜 중요한가 하면, 법과 도덕이 항용 만나는 것이 바로 이 '구체'이기 때문이다. '구체'란 늘 법과 도덕의 '반증'으로서 그것들에 저항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럼으로써 그것들을 '시험'하여 보다 과학적이도록 만든다. 칼 포퍼의 말을 빌리자면, '구체'가 법과 도덕의 '반증가능성'이 되는 것이다. 또한 도스또예프스끼의 소설이 '구체'라는 것은 그것이 다만 개별적인 특수 체험임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이 소설이 가진 상징성에 기인하는 것으로, 풀어 말하면 이 소설이 법제도가 아니라 그 뿌리를 건드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소설이 법제도를 문제삼는 것이라고 한다면, 그 법제도를 대신하는 잣대로서는 종교가 가장 유력하다. 그것은 세 명의 까라마조프가 갈라지는 분수령이 바로 종교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런 관점에서 조시마 장로와 관련된 두 가지 에피소드를 검토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곧 이 소설의 종교관·윤리관과 직접적으로 닿아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장로는 임종하기 직전에 "어제 난 앞으로 그에게 닥칠 위대한 고난을 향해 절했던 것이란다"(504쪽)라고 알료샤에게 일러준다. 장로는 '위대한 고난'이라고 말했다. 드미뜨리가 존속살해의 누명을 쓰고 20년형을 받은 것은 물론 사실이다. 그러나 누명을 쓴 것은 '고난'은 될 수 있어도 '위대한 고난'이라고 할 수는 없다. 그리스도의 고난 정도는 되어야 그 말에 합당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것은 드미뜨리의 고난 속에 그리스도적인 무언가가 있다는 말이 된다.
사실 드미뜨리의 이미지는 소설 내내 그리스도의 이미지와 겹쳐진다. 이를테면 때때로 알료샤를 만나 선과 악에 대해서 이야기해주는 것이라든지, 누구와도 완전한 심정적 교류에 이르지 못하고 혼자서 표류하고 있다든지 하는 것은 그리스도 생애의 닮은꼴이다. 그렇지만, 아무래도 결과적으로는 드미뜨리의 누명이 소설의 뼈대되는 줄거리라는 점에서 가장 잘 드러난다.
드미뜨리의 누명이 단순한 누명이 아니라 '위대한 고난'이라면, 그것은 일종의 '희생'이라는 측면에서 그렇다. 차근차근 소설을 되짚어보면 도스또예프스끼는 이미 소설을 시작하기 전에 복음서를 인용하여 "정말 잘 들어 두어라.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알 그대로 남아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요한의 복음서 12장 24절"고 말하고 있다. 그리스도의 '희생'이 '만인의 구원'을 가져왔다면, 드미뜨리의 '희생'은 사람들에게 직관적 양심을 일깨워주었다. 그리고, 그것을 가장 두드러지게 받아들인 이는 알료샤다.
알료샤는 조시마 장로의 아끼는 제자였고, 그래서 소설이 시작할 때부터 이미 종교관이 정립되어 있었다. 이반에게 "반드시 논리 이전에라야만 의미를 깨닫게"(410쪽) 된다고 강조하고 조시마 장로의 연설도 꼼꼼하게 메모하는 알료샤의 모습은 종교적인 측면을 강하게 내보인다. 그는 논리 이전에 그 의미를 깨닫고 있었다.
그러나 조시마 장로가 죽은 후, 그 시체에서 '썩는 냄새'가 난다고 비난하는 사람들의 목소리에 반응하는 순간부터 알료샤에게서 종교적인 의무감은 사라져버린다. 처음으로 알료샤는 '왜(어째서)'라는 말을 꺼냈다. 그러나 거기에 대답해줄 사람은 없었다. 결국은 알료샤 자신이 찾아나서야 했다. 그러나 그것이 결코 쉽지 않은 이유는, 알료샤 자신이 잘 알고 있듯이 논리가 아닌 직관을 통해서 찾아야 하기 때문이다.
짧게는 근대주의, 길게는 계몽주의까지 포괄하는 이성(理性)주의는 우리의 사고방식을 이성에 복속시키고 감성 등의 지표를 소홀히 하게 만들었다. 그래서 우리는 종국에 가서 '죄'의 문제까지를 이성 아래 위치시키고 말았다. 그러나 조시마 장로나 드미뜨리가 보기에 죄는 이성과 전혀 관계없는 것이다. 이성은 죄의 반대자이며, 죄의 은폐자이다. 이성의 입장에서 보면 죄라는 것은 오히려 쉽게 사라지고 말 것이다. 왜냐하면 이성은 스스로의 능력으로 죄를 충분히 숨길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흔히 논리를 두고 상대를 굴복시킬 수는 있어도 설득할 수는 없다고 하는 것과 같은 맥락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이성은 죄의식의 논리에 굴복당하지 않으려고 끊임없이 새로운 논리를 만들어낼 것이다.
우리는 이 이성주의의 최후를 소설 후반부에서 이반의 모습을 통해 볼 수 있다. 이반은 섬망증이라는 일종의 정신병을 앓게 되는 것이다. 여기서 이반에게 섬망증이 나타난 경위를 생각해보면, 무신론자의 이성주의가 얼마나 사상누각(砂上樓閣)인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섬망증은 두말할 것 없이 이반의 죄의식에서 오는 것이다. 이반이 실제로 아버지 표도르를 죽인 사실이 없다는 것은 여기서 문제가 되지 않는다. 이렇듯 직관이란 항상 논리보다 선행하기 때문에 가장 철저한 이성주의자였던 이반까지도 어쩔 수 없이 스스로의 직관에 종속적일 수밖에 없다.
오히려 죄는 이성보다도 마음으로 규정되는 것이다. 드미뜨리는 알료샤에게
여기서 아름다움은 '치욕'이나 '죄'와 지나치게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어서 이성의 눈으로 보이는 것이 아니라 마음의 눈에 아름다움으로 비치는 것이다. 그리고 더 나아가 "소돔" 속의 아름다움이라는 것은, 선악의 싸움터에서의 죄를 말하는 것인데, 그 싸움터란 "다름아닌 인간들의 마음"이라고 드미뜨리는 규정한다. 이 철학적인 내용은 드미뜨리가 논리적으로 파악한 것이 아니라 직관적으로 떠올린 것이다.
그런 직관은 결국 꿈과 같은 것이다. 실제로 드미뜨리는 판결 직전에 가서 '아귀(餓鬼)'와 관련된 꿈을 꾼다. 여기서 '아귀'의 꿈을 다른 사람이 아닌 드미뜨리가 꾸었다는 점은 상당히 중요한 기능을 한다. 가령 이반이나 알료샤가 '아귀'의 꿈을 꾸었다면, 소설의 전개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갔을 것임에 틀림없다.
만약 이반이 '아귀'의 꿈을 꾸었다면 그는 오히려 그것을 바탕으로 신없음을 증명하려 들 것이다. 혹은 최소한 무관심한 신(해서 쓸모없는 신)을 상정하려고 할 것이다. 또 만약 알료샤가 '아귀'의 꿈을 꾸었다면 그는 여전히 의심과 고민에 빠져 있을 것이다. 조시마 장로의 임종 이후에 알료샤가 '왜'라는 질문을 처음으로 던졌음은 아까 지적한 바이지만, 그런 알료샤의 심경은 아직까지도 극복되지 못하고 '경험중'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드미뜨리는 직관과 행동이 사고보다 항상 앞서는 사람이다. 드미뜨리는 그 꿈 속에서 직관적으로 "지금부터는 어느 누구도 더 이상 눈물을 흘리지 않도록 무언가 돕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다"(890쪽)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생각은 드미뜨리가 그들보다 위에 군림함으로써가 아니라 그들과 함께 자신을 나눔으로써 가능했던 것이다. 일찍이 조시마 장로가 "인간의 모든 죄를 떠맡"(570쪽)으라는 설교를 한 적이 있는데, 그것이 드미뜨리에 이르러 몸으로 (꿈에서나마) 실천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드미뜨리는 '희생'했다. 드미뜨리의 희생은 누구보다 알료샤에게 특히 의미있는 것이었다. 신의 존재와 종교의 규율에 대한 알료샤의 풀리지 않던 호기심은 드미뜨리의 희생에 이르러 말끔히 씻겨진다. 알료샤에게 모든 것은 지금껏 선험적으로 존재해왔지만 여기서부터는 경험적으로 존재하기 시작한다.
예전의 알료샤는 "어쩌면 나는 하느님을 믿지 않는지도 모릅니다"(393쪽)라는 식의 불명확한 모습을 보였다. 선험적으로 주어져있던 진리는 스스로를 주장하지 못하므로 항상 '의심'에 약한 모습을 보인다. 데까르뜨의 회의(懷疑)도 '방법적 회의'라고는 하지만, 그의 전존재의 고민이었음에는 틀림이 없다. 그러나 데까르뜨의 경우는 그래도 신뢰할 '이성'이 있었지만 알료샤는 그보다 더 막막한 지경이었다.
그러나 드미뜨리의 '희생'은 알료샤에게 모든 것을 분명하게 만들어주었다. 왜냐하면 드미뜨리는 모두가 서로에 대해서 죄인이라는 조시마 장로의 설교를 몸으로 체현해냈기 때문이다. 드미뜨리적인 몸의 진리는 조시마적인 말의 진리보다 훨씬 명확할 수밖에 없다. 우리는 거기서 조시마 장로가 드미뜨리에게 무릎을 꿇고 경배해야 했던 이유를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성서의 역사를 '구원'의 역사라고 봤을 때, 죄와 더불어 꼭 필요한 개념은 사랑이다. 드미뜨리와 까쩨리나가 서로 '사랑한다'고 하는 대목이나 이 소설의 또 하나의 줄기였던 꼬마들이 일류샤를 잊지 않겠다고 하는 부분은 결국 '사랑'과 연관될 수밖에 없는 몸이다. 그러나 사랑은 논리로 환원되지도, 추상으로 떨어지지도 않는 구체적인 어떤 것이다. '사랑'은 어디까지나 직관적이면서 경험적인 것이다. 여기에 와서야 얄료샤는 드디어 "그래, 우린 틀림없이 부활할 거야. 그리고 다시 만나 기쁘고 즐거웠던 지난날을 이야기하게 될 거야!"(1354쪽)라고 확신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것은 카인이 인류 첫 살인을 저지르고 나서 스스로의 직관으로 그것이 죄임을 깨달았던 것과 유사한 것이다. '죄의 역사'로서의 성서의 역사가 『까라마조프 씨네 형제들』에서 보다 직관적이고 경험적인 역사로 바뀐 데서, 우리는 이 책이 지니는 윤리·도덕적 의의를 평가할 수 있는 것이다.
도스또예프스끼의 『까라마조프 씨네 형제들』은 그 '죄의 역사'를 소설적으로 재구성해내고 있다. 그리고 그럼으로써 죄의 개념을 보다 명확히 하고 있다. 대개 사람들에게는 죄가 선험성Apriotät을 지니고 나타난다면, 도스또예프스끼의 소설 속에서는 그것이 하나의 '구체Konkretum'를 지니고 나타난다. 여기서 '구체'가 왜 중요한가 하면, 법과 도덕이 항용 만나는 것이 바로 이 '구체'이기 때문이다. '구체'란 늘 법과 도덕의 '반증'으로서 그것들에 저항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럼으로써 그것들을 '시험'하여 보다 과학적이도록 만든다. 칼 포퍼의 말을 빌리자면, '구체'가 법과 도덕의 '반증가능성'이 되는 것이다. 또한 도스또예프스끼의 소설이 '구체'라는 것은 그것이 다만 개별적인 특수 체험임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이 소설이 가진 상징성에 기인하는 것으로, 풀어 말하면 이 소설이 법제도가 아니라 그 뿌리를 건드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소설이 법제도를 문제삼는 것이라고 한다면, 그 법제도를 대신하는 잣대로서는 종교가 가장 유력하다. 그것은 세 명의 까라마조프가 갈라지는 분수령이 바로 종교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런 관점에서 조시마 장로와 관련된 두 가지 에피소드를 검토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곧 이 소설의 종교관·윤리관과 직접적으로 닿아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추악한 지경에까지 이른 장면은 너무나 뜻밖의 상황으로 인해 중단되고 말았다. 장로가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났던 것이다. 장로 때문에, 그리고 다른 사람 때문에 공포에 사로잡혀 거의 정신을 잃을 지경이던 알료샤는 겨우 장로의 한 팔을 부축할 수 있었다. 장로는 드미뜨리 표도로비치를 향해 걸음을 옮겼고, 그에게 다가가자 그 앞에 무릎을 꿇었다. 알료샤는 장로가 기력이 쇠진하여 쓰러진 것이라고 생각했으나 그렇지는 않았다. 장로는 드미뜨리 표도로비치 앞에 무릎을 꿇더니 그의 발에 대고 이마가 땅에 닿도록 머리를 완전히 조아리며 분명히 의식적으로 절을 했다. 알료샤는 그가 일어날 때 부축하는 것조차 잊을 만큼 얼이 빠져 있었다. 그러나 장로의 입가에는 가냘픈 미소가 가늘게 빛나고 있었다.
「용서해 주십시오! 모든 것을 용서해 주세요!」 (140쪽)
장로는 임종하기 직전에 "어제 난 앞으로 그에게 닥칠 위대한 고난을 향해 절했던 것이란다"(504쪽)라고 알료샤에게 일러준다. 장로는 '위대한 고난'이라고 말했다. 드미뜨리가 존속살해의 누명을 쓰고 20년형을 받은 것은 물론 사실이다. 그러나 누명을 쓴 것은 '고난'은 될 수 있어도 '위대한 고난'이라고 할 수는 없다. 그리스도의 고난 정도는 되어야 그 말에 합당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것은 드미뜨리의 고난 속에 그리스도적인 무언가가 있다는 말이 된다.
사실 드미뜨리의 이미지는 소설 내내 그리스도의 이미지와 겹쳐진다. 이를테면 때때로 알료샤를 만나 선과 악에 대해서 이야기해주는 것이라든지, 누구와도 완전한 심정적 교류에 이르지 못하고 혼자서 표류하고 있다든지 하는 것은 그리스도 생애의 닮은꼴이다. 그렇지만, 아무래도 결과적으로는 드미뜨리의 누명이 소설의 뼈대되는 줄거리라는 점에서 가장 잘 드러난다.
드미뜨리의 누명이 단순한 누명이 아니라 '위대한 고난'이라면, 그것은 일종의 '희생'이라는 측면에서 그렇다. 차근차근 소설을 되짚어보면 도스또예프스끼는 이미 소설을 시작하기 전에 복음서를 인용하여 "정말 잘 들어 두어라.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알 그대로 남아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요한의 복음서 12장 24절"고 말하고 있다. 그리스도의 '희생'이 '만인의 구원'을 가져왔다면, 드미뜨리의 '희생'은 사람들에게 직관적 양심을 일깨워주었다. 그리고, 그것을 가장 두드러지게 받아들인 이는 알료샤다.
인간의 모든 죄를 떠맡고 그 책임자가 되십시오. 벗이여, 바로 그것이 옳은 길입니다. 왜냐하면 모든 죄에 대하여 만인에 대하여 진정으로 그 책임자로서 처신한다면 그때 여러분은 그것이 진정으로 사실이며, 당신이야말로 만인에 대해, 모든 죄에 대해 죄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570쪽)
기적 따위는 일어나지 않아도 좋고, 기적이 입증되지도 않고 기대했던 일이 당장 실현되지 않아도 좋다. 하지면 어째서 이런 불명예를, 이런 모욕을 받아야 하며, 어째서 못된 수도사들이 말하듯이 <자연의 법칙을 벗어난> 빠른 부패가 일어난 것일까? (602쪽)
알료샤는 조시마 장로의 아끼는 제자였고, 그래서 소설이 시작할 때부터 이미 종교관이 정립되어 있었다. 이반에게 "반드시 논리 이전에라야만 의미를 깨닫게"(410쪽) 된다고 강조하고 조시마 장로의 연설도 꼼꼼하게 메모하는 알료샤의 모습은 종교적인 측면을 강하게 내보인다. 그는 논리 이전에 그 의미를 깨닫고 있었다.
그러나 조시마 장로가 죽은 후, 그 시체에서 '썩는 냄새'가 난다고 비난하는 사람들의 목소리에 반응하는 순간부터 알료샤에게서 종교적인 의무감은 사라져버린다. 처음으로 알료샤는 '왜(어째서)'라는 말을 꺼냈다. 그러나 거기에 대답해줄 사람은 없었다. 결국은 알료샤 자신이 찾아나서야 했다. 그러나 그것이 결코 쉽지 않은 이유는, 알료샤 자신이 잘 알고 있듯이 논리가 아닌 직관을 통해서 찾아야 하기 때문이다.
짧게는 근대주의, 길게는 계몽주의까지 포괄하는 이성(理性)주의는 우리의 사고방식을 이성에 복속시키고 감성 등의 지표를 소홀히 하게 만들었다. 그래서 우리는 종국에 가서 '죄'의 문제까지를 이성 아래 위치시키고 말았다. 그러나 조시마 장로나 드미뜨리가 보기에 죄는 이성과 전혀 관계없는 것이다. 이성은 죄의 반대자이며, 죄의 은폐자이다. 이성의 입장에서 보면 죄라는 것은 오히려 쉽게 사라지고 말 것이다. 왜냐하면 이성은 스스로의 능력으로 죄를 충분히 숨길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흔히 논리를 두고 상대를 굴복시킬 수는 있어도 설득할 수는 없다고 하는 것과 같은 맥락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이성은 죄의식의 논리에 굴복당하지 않으려고 끊임없이 새로운 논리를 만들어낼 것이다.
우리는 이 이성주의의 최후를 소설 후반부에서 이반의 모습을 통해 볼 수 있다. 이반은 섬망증이라는 일종의 정신병을 앓게 되는 것이다. 여기서 이반에게 섬망증이 나타난 경위를 생각해보면, 무신론자의 이성주의가 얼마나 사상누각(砂上樓閣)인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섬망증은 두말할 것 없이 이반의 죄의식에서 오는 것이다. 이반이 실제로 아버지 표도르를 죽인 사실이 없다는 것은 여기서 문제가 되지 않는다. 이렇듯 직관이란 항상 논리보다 선행하기 때문에 가장 철저한 이성주의자였던 이반까지도 어쩔 수 없이 스스로의 직관에 종속적일 수밖에 없다.
오히려 죄는 이성보다도 마음으로 규정되는 것이다. 드미뜨리는 알료샤에게
이성의 눈에는 치욕으로 보이는 것도 마음의 눈에는 끊임없이 아름다움으로 보이니까. 그러니 아름다움은 소돔 속에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겠니? 대부분의 사람들에게서 아름다움은 소돔 속에 자리잡고 있는데, 넌 그 비밀을 알고 있니? 아름다움이란 무시무시한 것일 뿐 아니라 비밀스러운 것이란 사실은 정말 끔찍스러워. 거기에서는 악마가 신과 싸움을 벌이고 있고 그 싸움터는 다름아닌 인간들의 마음이지. (198쪽)
여기서 아름다움은 '치욕'이나 '죄'와 지나치게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어서 이성의 눈으로 보이는 것이 아니라 마음의 눈에 아름다움으로 비치는 것이다. 그리고 더 나아가 "소돔" 속의 아름다움이라는 것은, 선악의 싸움터에서의 죄를 말하는 것인데, 그 싸움터란 "다름아닌 인간들의 마음"이라고 드미뜨리는 규정한다. 이 철학적인 내용은 드미뜨리가 논리적으로 파악한 것이 아니라 직관적으로 떠올린 것이다.
그런 직관은 결국 꿈과 같은 것이다. 실제로 드미뜨리는 판결 직전에 가서 '아귀(餓鬼)'와 관련된 꿈을 꾼다. 여기서 '아귀'의 꿈을 다른 사람이 아닌 드미뜨리가 꾸었다는 점은 상당히 중요한 기능을 한다. 가령 이반이나 알료샤가 '아귀'의 꿈을 꾸었다면, 소설의 전개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갔을 것임에 틀림없다.
만약 이반이 '아귀'의 꿈을 꾸었다면 그는 오히려 그것을 바탕으로 신없음을 증명하려 들 것이다. 혹은 최소한 무관심한 신(해서 쓸모없는 신)을 상정하려고 할 것이다. 또 만약 알료샤가 '아귀'의 꿈을 꾸었다면 그는 여전히 의심과 고민에 빠져 있을 것이다. 조시마 장로의 임종 이후에 알료샤가 '왜'라는 질문을 처음으로 던졌음은 아까 지적한 바이지만, 그런 알료샤의 심경은 아직까지도 극복되지 못하고 '경험중'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드미뜨리는 직관과 행동이 사고보다 항상 앞서는 사람이다. 드미뜨리는 그 꿈 속에서 직관적으로 "지금부터는 어느 누구도 더 이상 눈물을 흘리지 않도록 무언가 돕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다"(890쪽)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생각은 드미뜨리가 그들보다 위에 군림함으로써가 아니라 그들과 함께 자신을 나눔으로써 가능했던 것이다. 일찍이 조시마 장로가 "인간의 모든 죄를 떠맡"(570쪽)으라는 설교를 한 적이 있는데, 그것이 드미뜨리에 이르러 몸으로 (꿈에서나마) 실천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드미뜨리는 '희생'했다. 드미뜨리의 희생은 누구보다 알료샤에게 특히 의미있는 것이었다. 신의 존재와 종교의 규율에 대한 알료샤의 풀리지 않던 호기심은 드미뜨리의 희생에 이르러 말끔히 씻겨진다. 알료샤에게 모든 것은 지금껏 선험적으로 존재해왔지만 여기서부터는 경험적으로 존재하기 시작한다.
예전의 알료샤는 "어쩌면 나는 하느님을 믿지 않는지도 모릅니다"(393쪽)라는 식의 불명확한 모습을 보였다. 선험적으로 주어져있던 진리는 스스로를 주장하지 못하므로 항상 '의심'에 약한 모습을 보인다. 데까르뜨의 회의(懷疑)도 '방법적 회의'라고는 하지만, 그의 전존재의 고민이었음에는 틀림이 없다. 그러나 데까르뜨의 경우는 그래도 신뢰할 '이성'이 있었지만 알료샤는 그보다 더 막막한 지경이었다.
그러나 드미뜨리의 '희생'은 알료샤에게 모든 것을 분명하게 만들어주었다. 왜냐하면 드미뜨리는 모두가 서로에 대해서 죄인이라는 조시마 장로의 설교를 몸으로 체현해냈기 때문이다. 드미뜨리적인 몸의 진리는 조시마적인 말의 진리보다 훨씬 명확할 수밖에 없다. 우리는 거기서 조시마 장로가 드미뜨리에게 무릎을 꿇고 경배해야 했던 이유를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성서의 역사를 '구원'의 역사라고 봤을 때, 죄와 더불어 꼭 필요한 개념은 사랑이다. 드미뜨리와 까쩨리나가 서로 '사랑한다'고 하는 대목이나 이 소설의 또 하나의 줄기였던 꼬마들이 일류샤를 잊지 않겠다고 하는 부분은 결국 '사랑'과 연관될 수밖에 없는 몸이다. 그러나 사랑은 논리로 환원되지도, 추상으로 떨어지지도 않는 구체적인 어떤 것이다. '사랑'은 어디까지나 직관적이면서 경험적인 것이다. 여기에 와서야 얄료샤는 드디어 "그래, 우린 틀림없이 부활할 거야. 그리고 다시 만나 기쁘고 즐거웠던 지난날을 이야기하게 될 거야!"(1354쪽)라고 확신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것은 카인이 인류 첫 살인을 저지르고 나서 스스로의 직관으로 그것이 죄임을 깨달았던 것과 유사한 것이다. '죄의 역사'로서의 성서의 역사가 『까라마조프 씨네 형제들』에서 보다 직관적이고 경험적인 역사로 바뀐 데서, 우리는 이 책이 지니는 윤리·도덕적 의의를 평가할 수 있는 것이다.
까라마조프
씨네 형제들 - 상 도스또예프스끼 지음, 이대우 옮김/열린책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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