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오르는책/詩

경계의 시: 김록『광기의 다이아몬드』

엔디 2005. 9. 22. 23:49
흼과 검음의 사이엔 무엇이 있을까. 물과 뭍의 사이엔 무엇이 있을까. 아니, 어제와 오늘의 사이엔, 말과 말없음의 사이엔, 있음과 없음의 사이엔, 처음과 끝의 사이엔, 아니아니, 삶과 죽음의 사이엔 무엇이 있을까.

대답할 수 없다, 그렇다면,

검음과 흼의 사이엔 무엇이 있을까. 뭍과 물의 사이엔 무엇이 있을까. 아니, 오늘과 어제의 사이엔, 말없음과 말의 사이엔, 없음과 있음의 사이엔, 끝과 처음의 사이엔, 아니아니, 죽음과 삶의, 사이엔 무엇이 있을까.

말장난. 옳다, 하지만 당신들은 삶의 상징인(,) 혀의 역동적인 움직임을 관찰해본 일이 있는가. 한 번도 시집을 거꾸로 읽은 경험이 없는 사람은 지금 자리에서 일어나 물구나무서기를 해도 좋다.

「99.999999999」(158)는 100이 아니다. 곧, 99.로 한없이 가다가 좀 쉬자는 말이다. 이곳은 말하자면 경계의 땅이다. 레떼의 한가운데라고 생각해도 좋다. 시인은 "무언가를 위해 / 여기에 홀로 남아 있는 사람"을 언급한다. 그 사람은 털을 하나씩 뽑고 있는데, 어쩌면 자신의 생장生長을 뽑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식목일엔 그의 털을 심다."(156) 그러니까 삶과 죽음의 한가운데에서. '나'는 거기서 그 사람과 자신의 거리를 지운다. 그러므로 경계이다.

거리를 지운다, 그것은 종종 사랑을 뜻한다.

그 마을 사람들은 누구나 집 안에서 살면서 집 밖에서 산답니다
모두들 너무나 사랑해서 그래요
그 마을 사람들 살을 보셨어요?
만지면 살짝 지워져요 만지는 사람을 받아들이느라고 그래요
그리곤 다시 생겨나요 다시 주기 위해서요

- 김정란, 「눈 내리는 마을」부분

그러므로 '당신'과 '나' 사이의 경계는 또한 '당신'과 '나'의 일부이기도 하다. 「졸음」(131)에서 시인은 사랑으로 경계를 이해한다. 경계선에 분명히 누군가 있었는데, 금세 사라진다. 아무래도 우리가 쉽게 이해할 수 없는 무슨 이상한 논리가 있는 것일까. 잠깐. 제목이 졸음이다. 데까르뜨 선생님, 우리가 존다면 졸고 '있는' 우리가 '있는' 것은 분명하다고 하겠지만, 우리는 살아 '있는' 것인가요 죽어 '있는' 것인가요. (데까르뜨: "놀-고 '있'네.") 어쨌든 졸음은 깸과 잠의 사이에 있고, 잠은 다시 삶과 죽음의 사이에 있다. 기이한 것은 여기에서도 '털'이 나타난다는 점이다. 숫거웃은 눈꺼풀처럼 얌전을 떨고 있다. '삶'인 성기를 둘러싼, 생장의 상징인 털이 얌전하게 '잠'을 자고 있는 것이다.

그러고보면 성교는 또한 삶과 죽음의 경계에 있는 것이 아니던가. "당신도 아다시피 교수형을 당하는 사람들은 숨이 끊어지는 순간 힘차게 발기해서 사정을 하지." 이것은 조르쥬 바따이유의 소설 『눈 이야기』에 나오는 대사다. 바따이유는 『에로티슴』에서도 '생식과 죽음의 친화성'이라는 장章을 따로 두어 이렇게 언급한다: "시체 앞에서의 공포감은 우리가 배설해 내는 배설물 앞에서의 느낌과 별로 다를 것이 없다. 우리는 외설스러운 성행위 앞에서도 이맛살을 찌푸리며 외면한다. 성기도 배설물을 배설한다. 우리는 그곳을 수치스러운 곳이라고 부르며, 항문도 거기에 포함시킨다. 성 어거스틴은 성기의 외설성과 생식의 기능에 대한 언급에서, '우리는 똥과 오줌 사이에서 태어난다'는 통렬한 말을 한 바 있다."

그러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는 한숨을 내쉬고 괴로워하며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즉시 사방에서 많은 산파들이 달려와서 밑을 만져보고, 나쁜 냄새가 나는 살덩어리를 발견하고는 그것이 아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가 앞에서 밝힌 바와 같이 내장요리를 너무 많이 먹은 탓으로 (여러분이 항문에 붙은 창자라고 부르는) 직장이 늘어나며 그녀에게서 빠져버린 항문이었다.

- 라블레, 『가르강뛰아/빵따그뤼엘』에서

우리는 똥과 오줌 사이에서 태어난다. (너무 걱정할 필요는 없다. 현대의 병원에서는 출산 전에 모두 관장을 시켜준다.)

그런데 시인은 그 죽음 속에서 말言語을 발견한 것 같다. 「졸음」에서 "너에게서 멀어질수록 빗소리에 민감해진다"고 말했던 시인은 보다 앞의 「상상력은 상상한다」(83)에서 "그대 있다 / 빗소리가 처음 시작된 곳에서"라고 노래했었다. 「상상력은 상상한다」에서 드러난 기이한 구강성교口腔性交의 묘사를 죽음을 노래하는 시로 보아도 될까. 이를테면 "성기가 내 혀를 빼앗는다(喝喝)"는 장면은 그런 관점에서 보자면 죽음의 침범 같은 것이 아닐까. 한두 연 앞으로 가보면 좀더 자세하다. "사타구니가 자라난다 / 어서 핥아라 어서 / 핥아 죽여라"(강조는 인용자).

혀langue는 그대로 말이다. "쓰라린 그 말 한마디 / 외치고 싶다"(98). 하지만 말할 수 없다. 그것이 중요하다, 말이란 일종의 금기이기 때문이다. 삶/죽음에 대해 말하는 것은 위험하다. "치명적인 독"(78)을 두려워한다면, 모두 입을 닫자. 이상하게도 시집 중간에 버티고 있는 「自序 : 말할 필요」(119-21)를 보자. "인간의 한계를 넘어서는 어떤 일을 알았다고 해도 그것은 기억할 수 없다. 우리는 그것을 말할 수 없다." 그러나 이 논의의 결론은 정해져 있다. 시인이 시집을 낸 이상, 시인은 이미 무언가를 말한 것이다. 제목부터 '말할 필요'다. "나는 저항한다. 나는 말한다. 참다운 모든 인연들에게 나는 나의 마왕을 빌려주리라."

시인은 아주 통속적으로 말하려 한다. 이를테면 "어린애가 앙앙 / 쥐가 끽끽 / 구두가 삐꺽삐꺽" 하는 소리 말이다. 이렇게도 말한다: "찌그러뜨린 말 / 일러바치는 광기 / 본뜬 익살"로도 말한다. 그것은 벌레같은 말이다. 이 시집에는 벌레와 관련된 시가 몇 있는데, 「벌레에 대한 변호」에는 '벌레'란 "벌레스크(burlesque)의 약어"라는 각주가 붙어 있다.

벌레스크는 원텍스트의 진지한 형식과 어조를 모방하면서 그 원텍스트와 부합하지 않는 하찮은 내용을 삽입하거나 이와는 반대로 원텍스트의 진지한 내용을 모방하면서 그에 걸맞지 않는 천박한 형식을 부여한다. 이로써, 기존의 문학이나 모든 문학장르 나아가 기존의 도덕적 관습까지도 익살스럽게 만들어버리는 대표적인 풍자양식이다.
-
정끝별, 『패러디 시학』

「위악」(118)이라는 시가 있다. 내용으로 보아 '위악僞惡'으로 읽어야 하겠다. "회문(回文)으로 만든 善"이라니, 이게 무슨 소린가. 회문이란 거꾸로 읽어도 같은 문장을 말한다. 시인은 여기서 선과 악의 사이를 '익살스럽게 만들어버린다.' 「행동하는 마음」(150)이나 「단속적인 절망들 간의 실험」(52)과 같은 시에서의 교묘한 바꿔치기를 볼 것이다. 해답은 「다른 계절」(48)에 있다. 그래서 나는 "지금이 어느 때인지 모르겠다 / 이곳에 누가 있는지 모르겠다 // […] 말이 왜 이렇게 말하는지 모르겠다"(11) (나는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할 시의 증명을 해낼 수 있으나, A4용지가 좁아 이 발제에서는 생략한다.)

생각해볼 문제: 왜 시집 제목이 『광기의 다이아몬드』일까에 대해서 생각해도 좋고 죽음에 대해서 생각해도 좋지만, 아무 것도 생각 안 해도 좋다.


광기의 다이아몬드
김록 지음/열림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