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 이문열'의 이름이 씌어진 소설을 사는 것은 내게는 부담스러운 일이었다. 옛적에 읽은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이나
「금시조」따위의 소설들의 화려한 내용들 사이에서도 상상력을 결한 그의 작품들은 내게 관념을 주입하기에는 이로웠을 지 모를 정도의
소설이었다. 실제로 「금시조」를 가지고 '미학입문'강의에서 B정도의 학점을 따낸 기말 보고서를 내기도 했다. (매 수업시간마다 잠을 자고 노트필기는 커녕 교재도 제대로 읽지 않은데다가 기말시험에 30분이나 늦었던 것을 헤아린다면 내 보고서가 강의자의 마음에 썩 비켜가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그 보고서는 하드디스크 오류로 사라져버렸다.)
실은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이 가진 허무함 때문에 오랫동안 이문열 독서를 기피해왔었다. 그것은 내게 어떤 빚으로 자리잡았던 것 같다. 이문열에 대한 가당찮은 칭찬이 나올 때에도 나는 그에 동의하지 못하면서도 반론을 내지 못했다. 이를테면 이런 일이 있었다. 시를 쓰는 한 학우와의 대화 중에 이문열에 대한 칭찬이 들릴때에 나는 평소 자주 논리성을 결한 채 발설되는 그의 말을 이래저래 반박한 적이 있었는데, 그 학위가 내세운 당위의 방패는 이런 것이었다. "읽고 말하라."
그래서 숨책에서 『젊은날의 초상』신판을 발견했을 때, 부랴부랴 사두었던 것이다. 그러고서도 건드리고 싶지 않아 두었다가 어느 날 역시 시를 쓰는, 내가 늘 아까의 학우와 닮았다고 느끼는 후배에게 심심풀이로, '무얼 읽을까'하고 물었던 것인데 대답이 이 책이었다.
그러나 학우의 당위의 방패를 넘으려는 부지중의 내 노력이 있었는지, 내 성에의 이문열의 위상은 그대로이다. 내가 보기에 『젊은날의 초상』은 작가가 자신의 관점에 대해 늘어놓는 장광설의 변辯에 지나지 않는다. "어떤 사람이 있어, 이러이러한 일과 이러이러한 일과 이러이러한 일을 겪고서 이러이러한 것을 겪었으니 당연히 그 사람은 이러이러한 눈으로 세상을 보지 않겠는가."를 길고 흥미롭게 늘여놓은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얘기다.
한데, 그것은 참 위험한 생각이다. 위험하다 함은, 작가가 그 작품 구성을 언제부터 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적어도 그 작품을 쓸 당시에는 자기 나름의 생각을 어느 정도 정립한 후이기 때문이다. 다들 알겠지만 자기 자신을 제대로 알기란 생각과는 달리 엄청나게 힘들다. 소소한 문제, 이를테면 미감味感취향에 있어서도 자신의 자기에 대한 생각은 그다지 옳지 않은 것이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자신에 대한 생각에 자신을 갖고만다. '나는 생선을 싫어해'라는 거듭된 자기 암시는 진실로 그를 생선혐오자로 만들어버린다. (이건 내 경우이다. 어릴 적부터 가자미와 갈치를 좋아했던 나는 어느 때부터인가 이유없이 저런 자기암시를 걸었고 지금의 나는 회를 제외한 생선은 거의 먹지 않는다.)
일종의 연작소설로 볼 수 있는 『젊은날의 초상』은 「그해 겨울」의 발표 연후에 「하구」→「우리 기쁜 젊은 날」의 순으로 발표된 것이다. 발표연대순으로 읽으면 현재 자신의 관점과 직접적으로 연관이 있는 경치를 먼저 보여 독자들의 끄덕임을 이끌어내면서 성급한 결론을 내리고, 그 성급함을 보완하려고 앞의 소설들을 발표한 것 같은 인상을 준다. 신세이야기를 즐기는 어떤 사람이 이러저러한 말을 내뱉고나서, 누군가의 어떤 지적에 "아, 맞다, 이걸 빼먹었다."하며 앞의 이야기를 그제사 던져주는 모습말이다. 실은 이것은 나처럼 말재주없는 사람의 전유물인데 이문열은 그걸 아주 훌륭하게 흉내내고 있다. 게다가 그걸 줄거리순으로 주욱 꿰었을 때에 주는 느낌은 더욱 강렬하다.
허망함. 이 주였다, 작품의 꼬리에 붙일 말이란.
다만, 책의 뒷편에 더부살이하는 중편「들소」는--물론 몇 가지 한계를 접어준다는 전제하에서--아주 흥미로웠다. 앞의 세 작품에서 느끼지 못했던 상상력이 거기에는 보였다. 실상을 말하면 「금시조」도 여기 뭉뚱그려 비판받을 그런 작품은 아니다. 훌륭하다.
실은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이 가진 허무함 때문에 오랫동안 이문열 독서를 기피해왔었다. 그것은 내게 어떤 빚으로 자리잡았던 것 같다. 이문열에 대한 가당찮은 칭찬이 나올 때에도 나는 그에 동의하지 못하면서도 반론을 내지 못했다. 이를테면 이런 일이 있었다. 시를 쓰는 한 학우와의 대화 중에 이문열에 대한 칭찬이 들릴때에 나는 평소 자주 논리성을 결한 채 발설되는 그의 말을 이래저래 반박한 적이 있었는데, 그 학위가 내세운 당위의 방패는 이런 것이었다. "읽고 말하라."
그래서 숨책에서 『젊은날의 초상』신판을 발견했을 때, 부랴부랴 사두었던 것이다. 그러고서도 건드리고 싶지 않아 두었다가 어느 날 역시 시를 쓰는, 내가 늘 아까의 학우와 닮았다고 느끼는 후배에게 심심풀이로, '무얼 읽을까'하고 물었던 것인데 대답이 이 책이었다.
그러나 학우의 당위의 방패를 넘으려는 부지중의 내 노력이 있었는지, 내 성에의 이문열의 위상은 그대로이다. 내가 보기에 『젊은날의 초상』은 작가가 자신의 관점에 대해 늘어놓는 장광설의 변辯에 지나지 않는다. "어떤 사람이 있어, 이러이러한 일과 이러이러한 일과 이러이러한 일을 겪고서 이러이러한 것을 겪었으니 당연히 그 사람은 이러이러한 눈으로 세상을 보지 않겠는가."를 길고 흥미롭게 늘여놓은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얘기다.
한데, 그것은 참 위험한 생각이다. 위험하다 함은, 작가가 그 작품 구성을 언제부터 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적어도 그 작품을 쓸 당시에는 자기 나름의 생각을 어느 정도 정립한 후이기 때문이다. 다들 알겠지만 자기 자신을 제대로 알기란 생각과는 달리 엄청나게 힘들다. 소소한 문제, 이를테면 미감味感취향에 있어서도 자신의 자기에 대한 생각은 그다지 옳지 않은 것이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자신에 대한 생각에 자신을 갖고만다. '나는 생선을 싫어해'라는 거듭된 자기 암시는 진실로 그를 생선혐오자로 만들어버린다. (이건 내 경우이다. 어릴 적부터 가자미와 갈치를 좋아했던 나는 어느 때부터인가 이유없이 저런 자기암시를 걸었고 지금의 나는 회를 제외한 생선은 거의 먹지 않는다.)
일종의 연작소설로 볼 수 있는 『젊은날의 초상』은 「그해 겨울」의 발표 연후에 「하구」→「우리 기쁜 젊은 날」의 순으로 발표된 것이다. 발표연대순으로 읽으면 현재 자신의 관점과 직접적으로 연관이 있는 경치를 먼저 보여 독자들의 끄덕임을 이끌어내면서 성급한 결론을 내리고, 그 성급함을 보완하려고 앞의 소설들을 발표한 것 같은 인상을 준다. 신세이야기를 즐기는 어떤 사람이 이러저러한 말을 내뱉고나서, 누군가의 어떤 지적에 "아, 맞다, 이걸 빼먹었다."하며 앞의 이야기를 그제사 던져주는 모습말이다. 실은 이것은 나처럼 말재주없는 사람의 전유물인데 이문열은 그걸 아주 훌륭하게 흉내내고 있다. 게다가 그걸 줄거리순으로 주욱 꿰었을 때에 주는 느낌은 더욱 강렬하다.
허망함. 이 주였다, 작품의 꼬리에 붙일 말이란.
다만, 책의 뒷편에 더부살이하는 중편「들소」는--물론 몇 가지 한계를 접어준다는 전제하에서--아주 흥미로웠다. 앞의 세 작품에서 느끼지 못했던 상상력이 거기에는 보였다. 실상을 말하면 「금시조」도 여기 뭉뚱그려 비판받을 그런 작품은 아니다. 훌륭하다.
젊은
날의 초상 이문열 지음/민음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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