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보는 신영복을 다시 사색하라 : 강준만의 세상읽기 : 칼럼 : 한겨레21:
민노총이나 전교조에 대한 기사를 볼 때마다 나는 '전략의 부재'가 안타깝다. 아니, 한국의 모든 정치세력을 볼 때마다, 과연 그들에게 전략이라는 것이 있는 것인지 의심스럽다. 그들은 대중에게 자신들이 어떻게 비칠지 전혀 생각지 않고 행동하는 듯하다. 대중 정치 사회에서는, 적어도 집권 세력이 아닌 정치 세력이 기댈 곳은 대중뿐인데도 말이다.
그들은 '언론'의 핑계를 댈 것이다: 아무리 해도 보수 언론들이 우리의 진의를 왜곡시킨다고 말이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한국의 상황에서 보수 언론들은 하나의 '주어진 상황'이다. 애초부터 그들의 행동은 예측하고 전략을 세워야 한다는 것이다. '구더기 무서워 장 못 담그는' 상황이 와서는 안 되겠지만, 치밀한 전략으로 그들을 이용하는 정치력이 아쉽다.
한국의 진보는 자신들만의 '옳음' 속에 갖혀 있다. '진보'라고 말하면서 그들의 '선전전'은 가장 보수적이다. 나는 상황논리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지금 상황이 과격한 행동은 힘들지 않느냐, 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가령 집회에서도 80년대식의 화염병 시위는 사라지고, 촛불집회 등 새로운 형식의 집회가 자리잡았다. 아무도 '과격한 시위'는 하지 않는다. (보수 언론들이 '과격'이라는 낱말을 사용하는 것은 여전하지만.) 그럼에도 상당수의 이슈는 '대중 속으로' 파고들지 않고 있다. 아무도 대중을 향한 홍보를 하고 있지 않는 것이 문제라는 말이다.
광화문이나 여의도를 지나면서, 집회 현장 바로 옆을 지나면서도 '도대체 무엇 때문에 저 집회를 하고 있으며, 무엇을 원하는 것인가'를 알아채기란 쉽지 않은 것이 지금의 현실이다. 이런 상황에서 대중들은 교통체증 때문에 짜증 나고, 군중 집회에 불안에 떠는 것이다.
궁극적으로 정부를 적으로 돌리고 정부와 싸우려고 해서는 되지 않는다. 민노총이든 전교조든 정부보다 힘이 약하다. 정부보다 힘이 센 집단은 대중뿐이다. 그러므로 진보단체들은 정부를 변화시키려고 애쓰기보다는 대중을 변화시키려고 애써야 한다는 것이다.
신영복 선생의 글은 쉽고 평이하다. 그래서 정치적 성향과는 관계없이 많은 사람들이 신영복 선생의 글을 즐겨 읽고 감동을 받는다. 좀 거칠게 말하자면, 『샘터』 같은 잡지나 정채봉 같은 작가의 글처럼 정치적 거부감을 주지 않으면서 정치적 생각을 바꾼다. (신영복 선생의 글이 『샘터』나 정채봉 수준이라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모든 사람이 신영복 선생처럼 글을 써야 한다는 말이 아니다. 다만, 그런 글쓰기를 인정하고, 그것을 하나의 방법론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박노자 오슬로 대학 교수는 한 강연에서 80년대에 남쪽에서 주체사상이 퍼지게 된 계기는 진보 진영에서의 '어른'이 없는 상황 때문이라고 지적한 바 있다. 어른이 없는 상황에서 김일성의 품성론이 결핍의 한 부분을 채워주었다는 것이다. 이를 바꾸어 이해하면 신영복 선생과 같은 '어른'이 있는 지금의 상황은 사뭇 다르다는 것일 수 있다. 신영복을 비판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각자 자신에게 맞는 더 좋은 방법론을 찾을 수 있는 수단으로서의 비판에 주력하자는 것이다.
민노총이나 전교조에 대한 기사를 볼 때마다 나는 '전략의 부재'가 안타깝다. 아니, 한국의 모든 정치세력을 볼 때마다, 과연 그들에게 전략이라는 것이 있는 것인지 의심스럽다. 그들은 대중에게 자신들이 어떻게 비칠지 전혀 생각지 않고 행동하는 듯하다. 대중 정치 사회에서는, 적어도 집권 세력이 아닌 정치 세력이 기댈 곳은 대중뿐인데도 말이다.
그들은 '언론'의 핑계를 댈 것이다: 아무리 해도 보수 언론들이 우리의 진의를 왜곡시킨다고 말이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한국의 상황에서 보수 언론들은 하나의 '주어진 상황'이다. 애초부터 그들의 행동은 예측하고 전략을 세워야 한다는 것이다. '구더기 무서워 장 못 담그는' 상황이 와서는 안 되겠지만, 치밀한 전략으로 그들을 이용하는 정치력이 아쉽다.
한국의 진보는 자신들만의 '옳음' 속에 갖혀 있다. '진보'라고 말하면서 그들의 '선전전'은 가장 보수적이다. 나는 상황논리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지금 상황이 과격한 행동은 힘들지 않느냐, 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가령 집회에서도 80년대식의 화염병 시위는 사라지고, 촛불집회 등 새로운 형식의 집회가 자리잡았다. 아무도 '과격한 시위'는 하지 않는다. (보수 언론들이 '과격'이라는 낱말을 사용하는 것은 여전하지만.) 그럼에도 상당수의 이슈는 '대중 속으로' 파고들지 않고 있다. 아무도 대중을 향한 홍보를 하고 있지 않는 것이 문제라는 말이다.
광화문이나 여의도를 지나면서, 집회 현장 바로 옆을 지나면서도 '도대체 무엇 때문에 저 집회를 하고 있으며, 무엇을 원하는 것인가'를 알아채기란 쉽지 않은 것이 지금의 현실이다. 이런 상황에서 대중들은 교통체증 때문에 짜증 나고, 군중 집회에 불안에 떠는 것이다.
궁극적으로 정부를 적으로 돌리고 정부와 싸우려고 해서는 되지 않는다. 민노총이든 전교조든 정부보다 힘이 약하다. 정부보다 힘이 센 집단은 대중뿐이다. 그러므로 진보단체들은 정부를 변화시키려고 애쓰기보다는 대중을 변화시키려고 애써야 한다는 것이다.
신영복 선생의 글은 쉽고 평이하다. 그래서 정치적 성향과는 관계없이 많은 사람들이 신영복 선생의 글을 즐겨 읽고 감동을 받는다. 좀 거칠게 말하자면, 『샘터』 같은 잡지나 정채봉 같은 작가의 글처럼 정치적 거부감을 주지 않으면서 정치적 생각을 바꾼다. (신영복 선생의 글이 『샘터』나 정채봉 수준이라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모든 사람이 신영복 선생처럼 글을 써야 한다는 말이 아니다. 다만, 그런 글쓰기를 인정하고, 그것을 하나의 방법론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박노자 오슬로 대학 교수는 한 강연에서 80년대에 남쪽에서 주체사상이 퍼지게 된 계기는 진보 진영에서의 '어른'이 없는 상황 때문이라고 지적한 바 있다. 어른이 없는 상황에서 김일성의 품성론이 결핍의 한 부분을 채워주었다는 것이다. 이를 바꾸어 이해하면 신영복 선생과 같은 '어른'이 있는 지금의 상황은 사뭇 다르다는 것일 수 있다. 신영복을 비판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각자 자신에게 맞는 더 좋은 방법론을 찾을 수 있는 수단으로서의 비판에 주력하자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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