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어릿광대의견해

정조 콤플렉스: 박정희와 노무현

엔디 2007. 11. 26. 01:01
1. 조선의 임금들

"정조의 시대"라고 한다. 정조와 관련된 책이 쏟아져 나오고, TV 드라마도 정조 열풍이다. 조선조의 임금 가운데 현대인들의 지지와 존경을 한몸에 받는 인물은 많지 않다. 훈민정음을 창제한 세종대왕과 영조의 뒤를 이어 개혁을 펼친 정조, 둘 뿐인 것 같다. 경국대전을 만든 성종은 널리 알려져 있지 않고, 사대주의를 탈피하기 위해 노력했던 광해군에 대한 평가는 분분하다. 세조에 대한 심정적 거부와 이성적 칭찬은 이광수의 『단종애사』와 김동인의 『대수양』의 그늘에서 벗어나기 힘들다.

세종대왕의 업적은 훈민정음 창제가 가장 빛나는 성과로 이야기되고 있다. 한글의 우수성에 대해 말하자면, 사람들은 입에 거품을 물고 처음 듣는 서양의 언어학자들과 작가들의 이름을 대면서 "그들이 칭찬했다"고 입을 모은다. 그 자신이 당대에 가장 훌륭한 언어학자였던 세종대왕에 대한 칭찬은, 그 가운데 엄청난 자위적 민족주의가 개입되어 있다고 하더라도, 나 역시 유보할 필요 없이 인정하고자 한다. 15세기에 (중국의 성운학聲韻學을 뛰어넘을 만한) 그만큼의 언어학적 지식을 갖추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가 하는 것은 훈민정음 해례본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리고 백성들의 말글살이를 바꾸고자 했던 세종대왕은 진정한 하부구조의 개혁자였다.

정조는 어떠한가?


2. 정조 콤플렉스

사람들이 정조를 떠받드는 이유는 세 가지다: 그가 개혁자의 이미지를 갖고 있기 때문에, 식민지 근대화론에 대한 비판적 대안의 사례로 이용될 수 있기 때문에, 그리고 역설적이게도 그의 '개혁'이 실패했기 때문에. 이 세 가지 이유는 개혁적 정치 지도자들에게 일종의 콤플렉스가 되어 있는 것 같다. 그래서 개혁을 기치로 들고 나오는 대통령들은 알게모르게 정조의 이미지와 겹쳐진다. 개혁자라는 것은 기존의 것을 뒤집을 만한 카리스마와 능력을 말하는 것이고, 식민지 근대화론에 대한 비판적 대안이라는 것은 곧 민족주의 또는 국가주의를 말하는 것이다. 문제는 정조의 개혁이 중도에 그쳤다는 것이다. 여기서 정치가의 정조 콤플렉스는 절정에 이르는데, 그것은 실패한 혹은 미완의 개혁가들이 정조에 비견될 수 있는 길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개혁적 이미지를 만든 정치가들에 있어서 정조는 하나의 보험이 된다.


3. 개혁자 정조

대한민국 건국 이래로 개혁의 이미지를 가장 확실하게 심어 준 두 대통령은 박정희와 노무현인데, 공교롭게도 정조와 겹쳐지는 '영광'을 입은 대통령도 그렇게 둘이다. 정조가 10년 더 살았다면에  따르면 정조의 이야기를 전면에 내세운 첫 소설은 이인화(류철균)의 『영원한 제국』이라고 한다. 이인화는 그 소설에서 정조를 시해하고자 하는 노론과 정조를 지키고자 하는 남인의 대립을 다룬다. 그 소설의 결론은 이렇다: 정조가 좀더 살았다면 자주적인 개혁과 근대화를 이룰 수 있었다는 것이다. 즉, 자본주의와 민주주의가 이 땅에 뿌리박기 어려웠던 이유는 정조가 너무 일찍 '시해'되어 왕권 강화 정책이 미완에 그쳤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굳이 이인화의 다음 작품인 『인간의 길』을 떠올리지 않더라도 여기서 정조가 박정희와 오버랩된다는 점을 알아채기는 어렵지 않다. 거의 임금과 같은 지위를 누리던 박정희가 김재규에 의해 너무 일찍 시해되는 바람에 오히려 군부독재가 더 길어졌다는 논리와 그 줄기가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박정희 역시 처음부터 자신의 이미지를 개혁자로 만들었다. 그가 5·16 꾸데따를 '혁명'이라고 이름붙인 것부터가 이미지 메이킹의 일환이었다. 대통령 선거에 나올 때에는 팔다리를 걷고 농촌에 가서 '백성들'과 모도 함께 심었다. 그가 시해되었을 때 많은 '백성들'이 진심으로 울었다는 것은 그의 이미지 메이킹이 큰 성공을 거두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세월이 지나 노무현이 등장했다. 그에게서 소중한 가치는 역시 개혁이었다. 노무현은 취임 초기부터 백범 선생과의 비교를 굳이 거부하며, 자신의 벤치마킹 상대로 링컨을 꼽았다. 링컨의 정치 이력과 자신의 정치 이력이 실패 투성이였던 점이 닮았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그보다는 링컨이 가진 개혁자의 이미지를 빌어오려는 목적이 더 크지 않았을까. 정조가 10년 더 살았다면에 인용된, "<한성별곡>으로 노무현 대통령을 많이 좋아하게 됐으며, 내 연기를 통해 사람들이 그 아픈 부분을 이해하면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는 탤런트 안내상씨의 발언은 노무현이 현재 처한 상황에 사람들이 정조를 오버랩시키는 일이 얼마나 쉬운가를 여실히 보여 준다. 돼지저금통을 모아 대통령이 된 사람은 이전에 없었기 때문이다. 개혁적 임금인 정조는 노론의 반대에 부딪혀서, 개혁적 대통령인 노무현은 한나라당을 비롯한 수구적인 기존 정치인들에 부딪혀 실패를 맞는다는 스토리다.


4. 근대적 민족주의자 정조

또 정조가 각광을 받는 것은 근대적 민족주의의 모습을 취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정조는 자유로운 상업을 발달을 위해 금난전권과 육의전을 철폐하였고, 정약용이 만든 거중기를 이용해 화성을 축조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와 더불어서 자본주의 맹아론 등 자생적 근대화론의 많은 부분이 정조 치세의 업적으로 평가된다. 그 자신이 책읽기를 좋아해 서양에서 들어온 안경을 끼었다는 기록도 있다(조선왕조실록):

상이 이르기를,
"나의 시력이 점점 이전보다 못해져서 경전의 문자는 안경이 아니면 알아보기가 어렵지만 안경은 2백 년 이후 처음 있는 물건이므로 이것을 쓰고 조정에서 국사를 처결한다면 사람들이 이상하게 볼 것이다."
上曰: "予之眼視, 漸不如前, 經傳文字, 非眼鏡則難以辦認, 而眼鏡乃二百年來初有之物也, 帶此臨朝, 有駭觀瞻。"
- 정조 52권, 23년( 1799 기미 / 청 가경(嘉慶) 4년) 7월 10일 병인 1번째기사

안경이란, 사람들의 인식 속에서 근대적인 것이라는 이미지를 전유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정조를 통한 근대화론은 좀더 심정적으로 대중에 의해 지지받게 마련이다. 서구 문물의 하나인 안경을 조선의 개혁적 임금이 쓰고 있었다는 사실은, 쇄국정책으로 비판의 대상이 되는 흥선대원군과 친일파라는 원죄에서 벗어날 수 없는 김옥균을 동시에 뛰어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다.

나는 여기서 식민지 근대화론과 자생적 근대화론의 어느 한 편이 옳다는 것을 증명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럴 의도는 물론, 그럴 능력도 없다. 중요한 것은 지금의 대중은 둘 가운데 뒤엣것에 심정적으로 동조하고 있으며, 그것이 정조 신화 또는 정조 콤플렉스의 중요한 축이 된다는 것이다. 어쨌든 '정조-근대화'론은 대한민국의 대통령을 평가하는 하나의 시금석처럼 되어 있는 듯하다.

근대화론은 먼저 경제 성장을 가리킨다. 박정희를 그리워하는 사람들은 그의 새마을 운동의 활기를 떠올릴 것이고, 노무현에 동조하는 사람들은 그가 국익을 위해 추진한 또는 추진 중인 여러 FTA 협정을 생각할 것이다.

한편 자생적 근대화론은 필연적으로 민족주의 감정을 호출하는데, 박정희와 노무현은 그것을 매우 적극적으로 이용한 대통령들이다: 박정희는 먼저 그 자신이 관동군 출신이라는 점을 철저히 숨기며 사람들의 반일감정을 오히려 이용했다. 또 1972년에는 이후락을 이북에 보내 김일성을 만나게 함으로써, 7·4 공동선언이라는 성과를 이루어낸다. 노무현은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 설치 등에서 반일감정을 자극시켰고, 그간 고조되었던 반미감정 역시 적절하게 이용해서 민족주의를 강화하였다. 김대중 대통령에 이은 제 2차 남북정상회담을 성사시키기도 했다.

여기서 두 사람의 행보가 정조와 상당히 비슷하다는 것은 이채로운 일이 아니다; 사실 그들이 정조를 따라한 것이 아니라, 개혁적 임금으로 존경받는 정조가 그 두 사람을 위해 호출되었다는 혐의가 크기 때문이다.


5. 정조 개혁의 한계와 실제

사람들이 정조의 개혁의 어디까지를 바라고 있는 것일까. 분명한 시대적 한계와 계급적 한계를 가지고 있는 정조 개혁의 핵심은 (영조를 계승하여) 탕평책蕩平策으로 대표되는 왕권 강화다. 탕평책은 『서경書經』 「홍범조洪範條」의 '무편무당無偏無黨하면 왕도탕탕王道蕩蕩하며, 무당부편無黨無偏하면 왕도평평王道平平하며'라는 글에서 유래되었다고 하는데, 여기서 정조와 남인의 철학은 왕도정치를 위한 왕권강화라는 것이 분명해진다. 그런데, 여기에 이르러 정조의 개혁이 실패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분명해지는 것이다: 정조의 개혁이 실패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그의 개혁의 출발점이 왕권 강화에 있었기 때문이다.

정조는 모든 개혁의 출발점과 완성점을 자기 자신으로 잡았는데, 그것은 정조가 사라지는 순간 개혁의 이유와 지향점이 모두 사라져버린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정조가 시스템을 바꾸기보다 단순히 자기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는 것으로 개혁의 목표를 삼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의 개혁이라는 것은 노론 세력을 견제하기 위한 정치적 개혁에 불과한 경우가 많았고, 진정한 하부구조의 개혁이란 이루어지지 않았던 것이다. 가령 금난전권 철폐만 하더라도 자유로운 시장 경제를 위한 것이 아니라 단순히 노론 세력을 견제하기 위한 것이라는 혐의가 짙다. 한편 하부구조의 개혁이라 할 만한 연암 박지원의 패관문학에 대해서는, 정조의 호된 질책이 뒤따른다. 노론인 박지원의 개혁적 언어관에 대해 정조는 육경六經만이 진정한 언어라고 하며 순정고문醇正古文으로 글을 지어 바치라고 명령했던 것이다. 널리 알려진 문체반정文體反正이다.

문체반정에서 조선조의 다른 역사를 기억해보는 것이 무리일까. 조선조에서 바를 정正 자가 사용된 것은 대개 개혁이라기보다는 옛것을 지키려는 보수주의의 발현인 경우가 많았다. 사대주의를 극복하고 명나라와 후금 사이에서 뛰어난 외교 능력을 선보였던 광해군을 꾸데따로 몰아낸 이들은 자신들의 행위를 '반정'이라고 이름붙였다. 그들에게 있어 바를 정正이란 명에 대한 사대의식과 같은 구태의 것이었다. 한편, 조선 말의 위정척사도 새로운 것을 사邪로 몰아붙이고 옛것을 정正으로 이름붙인 것이다.

결국 사람들이 오해하고 있는 정조의 개혁은 결국 왕권의 강화였고, 그것은 왕권이 절정에 달했던 과거로의 회귀를 꿈꾸는 것이었던 것에 불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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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다시 정조 콤플렉스

정조와 남인 정약용이 아무리 훌륭하다고 해도, 그들은 결국 전제왕정이라는 사상의 한계를 뛰어넘을 수 없다. 그것은 그들의 잘못이 아니다. 하지만 그것을 무분별하게 받아들이는 것은 우리의 잘못이 될 것이다. 대중들 사이에 정조 콤플렉스가 강하면 강할수록 대통령은 임금의 위치로 수렴될 것이며, 민족주의의 유령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결론은 늘 쉽다: 정조를 극복해야 한다.




글을 올린 뒤, 꼭 같지는 않지만 비슷한 논지의 글이 나와서 링크를 걸어 둔다.
‘문체’만 부각시키는 게 문제다 : 문화일반 : 문화 : 뉴스 : 한겨레:
12월 4일 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