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어릿광대의견해

시린 에바디와 노벨평화상의 한계

엔디 2009. 8. 11. 01:07

'위대한 백인의 승리'란 영화를 주말 명화극장 시간에 본 기억이 납니다. 흑인 권투선수 챔피언을 백인들이 온갖 치사한 방법을 동원해서 아예 세상에서 매장시켜버리는 '치사한 백인의 승리'를 그린 영화였습니다.

지금 그런 치사한 백인의 승리가 만들어지고 있습니다. 오사마 빈 라덴이란 마흔살짜리 사나이를 잡기 위해 정의의 가치를 앞세워 미국은 아프가니스탄을 마구잡이로 폭격하고 있습니다.

얄궃게도 이런 때 유엔과 코피아난 사무총장님의 노벨평화상 수상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나는 순진해서 그런지 노벨평화상 받는 사람은 절대 전쟁을 안할 거라 생각했는데, 노벨평화상 수상자이신 우리 대통령 각하가 아프가니스탄 공격을 적극 지지하고 나섰습니다. 노벨평화상금이 어마어마하게 큰돈이라는데 주최측에서 그 상금을 돌려달라고 하지는 않을까요?

하기야 노벨상금이란 것 자체가 무시무시한 폭발물을 만들어 장사해서 번 돈이니 그다지 도덕적이지도 않고 평화적이지도 않습니다.

권정생(2008, 222) 선생은 '제발 그만 죽이십시오'란 글에서 노벨평화상 수상자인 김대중 전 대통령을 예로 들며 노벨평화상을 평가절하한다. 결국 노벨평화상도 백인들의 것이거나 혹은 힘있는 자의 것이라는 뜻이다.

김대중 전 대통령의 노벨상 평가절하는 잘못하면 '노벨상을 돈 주고 샀다'는 수구 세력의 목소리에 힘을 실을 수도 있는 발언이다. 실제로 노벨상 수상 소식이 들릴 즈음 '노벨상의 공신력이 떨어진 것 같다'는 말도 떠돌았다. 그러나 권정생 선생의 말에 동의할 수밖에 없는 것이 또 사실이다. 사르트르가 '부르주아의 상'이라는 이유로 노벨문학상을 거부한 것도 같은 맥락이겠기 때문이다.

가부장제는 혈우병?#

시린 에바디

cc-by-2.0 : Original photo by Shahram Sharif http://www.flickr.com/photos/sharif/64545526/in/photostream/

이슬람권 여성으로는 최초의 노벨평화상 수상자인 시린 에바디가 방한했다. 한국의 여성인권활동가들을 만나고 싶었던 그는 방한 일정을 쪼개 한국여성의전화를 방문해 강연을 했는데, 문제는 이 강연의 내용이다. 통역을 포함해 한 시간 남짓 되는 강연에서 그는 '가부장제'를 '혈우병'에 비유했던 것이다.

혈우병은 "혈액을 응고해 주는 인자가 부족하여 피가 잘 멈추지 않는 병"으로 성염색체 중 X염색체에 존재한다. 이 병은 대개 보균자인 어머니에게서 아들에게로 유전한다. 즉, 어머니의 경우는 그 염색체를 갖고만 있지만 아들에게 유전됐을 경우 그 아들은 혈우병이 발병하는 것이다.

결국 시린 에바디가 "가부장제는 혈우병"이라고 말했을 때, 그는 가부장제의 톱니바퀴에서 여성이 큰 축을 담당하고 있다고 진단한 셈이다. 이 이론에 그대로 기대자면 가부장제는 남성이 아니라 여성이 유지하는 것이라는 주장이 가능하다. 나아가 여성이 가부장제의 문제점을 지적하려 해도 "너희들이 애써 유지해온 것이 가부장제 아니냐"는 가부장주의자들의 반론까지 가능하다.

이에 대해 참석자 가운데서 반론이 나오자 시린 에바디는 "가부장적 문화를 타파하는 데 여성이 큰 역할을 할 수 있다는 뜻"이라고 해명했으나 근본적인 취지에 대해서는 번복하지 않았다. 어머니가 집안에서부터 아들과 딸을 다르게 대한다는 것이 문제라고 반복했을 뿐이다.



가부장제 재생산의 메커니즘#

시린 에바디의 관점이 문제인 이유는, 그의 생각과 달리 세상의 어머니들이 양성을 평등하게 대하기 때문이 아니다. 실제로 한국과 이란을 비롯한 많은 나라의 어머니들이 딸보다 아들을 우대하며, 더 자유롭게, 더 권리를 향유하도록 키운다. 그러나 그 때문에 어머니들을 비난할 수 있는가는 좀 생각해봐야 한다.

시린 에바디의 말은 이미 '여성(어머니)이 양육의 문제를 전적으로 책임져야 한다'는 전제가 은연 중에 깔려 있다는 점에서 주목에 값한다. 실제로 양육은 여성의 문제가 아니라 한 가정, 한 마을, 나아가 한 국가, 한 행성의 문제인데도 그의 주장만 들으면 양육은 어머니의 문제로 환원될 뿐이다.

플라톤처럼 부모가 누구인지도 모르게 자녀를 키워야 한다는 뜻은 아니지만, 양육의 문제를 한 가정에 그것도 어머니라는 한 사람의 몫으로 남겨두었을 때의 문제점에는 여성의 경제활동참가율이나 기타 사회활동참가율을 떨어뜨린다는 점 이외에도 가부장제 자체의 재생산이 더 심각해진다는 점도 있는 것이다.

여성의 대다수가 살림과 자녀양육만을 전담하는 문화적 상황에서는 어머니가 자녀에게 이에 걸맞은 사회적·문화적 관점에 따라 교육을 시킬 수밖에 없는데, 그것이 바로 가부장적 교육이다. 조선시대의 어머니가 딸에게 정절이니 열녀니 하는 교육을 시켰던 것이 어찌 조선시대 어머니들의 문제라 할 수 있을까. 그것은 그런 사고방식을 강요했던 시대와 문화의 문제라고 해야 한다.



이슬람과 여성인권#

한편 시린 에바디는 성차별은 이슬람 율법 때문이 아니라 가부장적 문화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슬람 율법은 평등한데, 이를 곡해하는 가부장주의자들이 문제라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그는 이슬람 문화권이 아닌 나라에서 여성이 받는 차별에 대해 한참을 언급했다. 그러나 이슬람 율법의 어떤 부분이 양성평등을 지향하는지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다. 이슬람율법과 문화에 대해 잘 모르는 한국적 상황을 염두에 둔 것인지도 모르지만, 오해를 부르지 않기 위해서는 소개를 해줬으면 더 좋았을 것이다.

일부다처를 허용하는 등 우리(또는 서구)의 시각에서는 이슬람율법이 양성을 평등하지 못하게 말하고 있다는 견해가 많기 때문이다. (물론 그의 신앙에 대해 딴지를 걸고 싶은 생각은 없다. 나는 꾸란을 잘 모른다. 그 나름의 경전 해석이 있을 것으로 짐작되기는 한다.)

노벨상과 기층문화#

시린 에바디의 강연을 통해 결국 드러난 것은 천하의 노벨평화상 수상자도 결국은 하나의 기층문화 아래 종속되는 인간일 뿐이라는 당연한 결과였다. 김대중 전 대통령이 민주화를 이끌었고,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함께 6.15 선언을 했더라도 결국 그는 신자유주의를 이 땅에 본격적으로 도입한 첫 대통령이다. 게다가 그는 권정생 선생이 지적한 대로 아프가니스탄 파병도 결정했다. 한반도에서 태어나 자란 그에게 미국이라는 나라는 여전히 없어서는 안 될 은인이었던 셈이다. 그게 뼛속까지 파고든 기층문화다. 미국을 싫어하는 젊은이들도 맥아더의 동상을 철거하자거나 주한미군이 전면 철수하도록 하라는 주장에 대해서는 거부 반응을 일으키는 것과 마찬가지다.

시린 에바디는 이슬람권 최초의 여성판사이며 뛰어난 인권변호사였지만, 또 그 덕분에 노벨평화상도 수상했지만, 결국은 한 명의 이란인에 불과했다. 이것은 그에 대한 비난이기도 하지만 어떤 면에서는 칭찬이기도 하다. 물론, 나는 약간은 그의 변화를 기대하고 있다.

참고문헌#

권정생. 2008. 『우리들의 하느님』. 개정증보판. 대구:녹색평론사.

우리들의 하느님 - 10점
권정생 지음/녹색평론사

이 글은 스프링노트에서 작성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