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서 밀러 지음, 성기웅과 '연인' 각색, 김재엽 연출, '연극과 인생' 공연 『크루서블Crucible』
0.
성경the Bible을 꿰뚫는 하나의 주제가 있다면 그것은 '구원'이다. 한데, 구원은 '죄sin'를 전제로 한다. 죄가 없는 한
구원은 있을 수 없다. 누가복음Luke 5장 32절은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라고
말하고 있다. 토라Torah에 기록된 수많은 율법들은 죄를 규정하고 있다. 그 최소한의 축약본이라 할 수 있는 것이 십계명인데,
그 열 가지 계명 중에 가장 보편적으로 어겨지는 사항은 제 9계명일 것이다. "네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거하지
말지니라"(출애굽기Exodus20:16, 신명기Deuteronomy5:20
진실은 긍정적인 것이고 거짓은 부정적인
것이다. 또, 삶은 긍정적인 것이고 죽음은 부정적인 것이다. 문제는 진실과 삶이 공존하지 않는 경우가 있다는 데에 있다. 진실이
죽음을 부르는 경우가 있다. 기독교의 성경을 비롯한 많은 종교의 경전들은 진실과 삶을 그들의 저울로 달아 진실의 무게가 더
무거움을 보여주고 있다. 그렇다면 사람들은 그저 진실을 선택하고 삶을 버리면 될 것 같은데 그게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다. 삶에의
욕망은 무엇보다도 강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모순적인 구도는 갈등과 번민을 만든다.
어느 마을을 하나의 광기의 도가니crucible로 몰아넣은 한 사건이 있었다. 진실은 각 사람에게 다른 모습으로 찾아가 나타났다. 그리고 각 사람은 거기에 다르게 반응한다.
1. 애비게일 윌리엄스
정신적인 괴물에게는 다른 사람과 비교해서 눈에 띌 만한 다른 점이 하나도 없기 때문에 차별성을 느낀다는 것은 더욱 애매모호해질
것이다. 처음부터 양심을 갖고 태어나지 않은 사람에게는 번민에 시달리는 사람이 어리석어 보이게 마련이다. 괴물이란 일종의 변종에
지나지 않아서 괴물의 눈에는 정상적인 사람이 오히려 기형으로 보인다는 사실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 - 존 스타인벡John E. Steinbeck 『에덴의 동쪽East of Eden』
이
작품에는 모두 세 부류의 사람들이 등장한다: 거짓말하는 사람, 거짓말을 진실로 믿는 사람, 그리고 거짓말에 희생되는 사람.
애비게일은 첫 부류에 속하며 모든 사건의 시발점始發點이다. 그녀의 대부분의 말은 거짓이다. 그럼에도 그녀는 자신의 잘못을
거짓으로 고백하여 성녀聖女로 추앙 받고 다른 사람들을 죽음으로 몰아간다.
애비게일이 원하는 것은 존 프락터였다.
존과 간음을 해서 존의 아내인 엘리자베스에게 쫓겨난 애비게일은 존에 대한 사랑과 엘리자베스에 대한 증오에 눈이 멀었다. 패리스
목사와 헤일 목사, 댄포스 판사 등을 속여 그들의 권력을 등에 업고 거짓 증언으로 수많은 사람들을 죽이지만, 그녀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엘리자베스가 말하는 바와 같이 '존 프락터의 아내자리'였던 것이다. 그녀에 이어 프락터 집안의 새
가정부가 된 메어리 워렌이 엘리자베스를 보호하려 하는데도, 엘리자베스를 끝까지 모함하여 법정에 세운 것은 바로 그 이유였다.
그러나, 그녀의 계획은 실현되지 못한다. 존 프락터가 아내를 구하려고 법정에 나타났고, 그들 부부는 서로를 두둔하려다 위증을 하게
되어 둘 다 교수형을 언도받는다. 애비게일이 존의 처형 전날 그를 찾아가 함께 도망치자고 제안을 하지만 존은 "우리가 갈 곳은
지옥뿐"이라며 거절하고 만다.
거짓과 속임수로 점철된 애비게일의 모습이지만, 극과 극은 통한다고 하던가. 애비게일은
어떤 의미에서 진실한 사람이다; 그녀는 자신의 마음이 원하는 것을 알고 있었고, 그 마음의 음성에 따른 것이다. 그가 그 마음을
드러내는 것은 존과 함께 있을 때 뿐이다. 그러나 존은 끝까지 애비게일에게 다시 마음을 열지 않는다. 그녀가 사라지면서 읽은
편지의 마지막 한 마디. 그것은 애비게일이 '어떤 의미에서' 가장 진실한 사람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당신의 마을은 겨울이에요. 나는…… 울고 있어요."
2. 패리스 목사
그것을 목격한 대부분의 사람은 그 불행한 목사의 가슴 위에 헤스터 프린이 달고 있었던 것과 똑같은 주홍 글씨가 살결에 문신으로 새겨져 있는 것을 확실히 보았다고 했다. - 나사니엘 호손Nathaniel Hawthorne『주홍 글씨The Scarlet Letter』
패리스 목사는 자신의 딸인 베티와 베티의 사촌인 애비게일, 그리고 자신의 하녀인 이교도 티튜바가 다른 소녀들까지 끌어들여 숲
속에서 '악마의 의식'을 벌였다는 소문 때문에 자신의 목사로서의 위신이 추락할까 두려워한다. 그는 숲 속에서 그들이 춤을 추는
것을 보았고 솥에 무엇을 끓이는 것을 보았고 한 소녀가 벌거벗은 것을 (불확실하게) 보았다.
권력 지향적이고 보수
성향이 강한 목사는 자신의 목사로서의 위치를 유지하고 싶어하였는데, 마침 애비게일과 베티와 메어리가 (거짓으로) 자신들의 죄를
고백하고 다른 이들을 고발한 것이 계기가 되어 자신의 지위를 유지할 방법을 찾게 된다. 물론, 결과적으로는 그도 희생자가 된
셈이지만, 그의 희생은 인과응보因果應報의 측면이 매우 강하다고 하겠다.
그의 입장은 몇 가지 측면에서 일관성이
없다: 첫째, 그는 처음에는 "이 마을에 초자연적인 힘은 없다."라고 하다가 결국은 악마의 역사役事를 인정하였고 둘째, 처음에
애비게일을 추궁할 때는 자신이 숲에 가서 애비게일 일행이 춤을 추는 것을 보았을 때 떨어져 있는 옷에 대해 추궁하다가 법정에서는
그에 대해 숨기려고 하였고 셋째, 레베카 너어스와 존과 자일즈 코레이를 거짓 신앙을 가진 자로 낙인찍어 죽이는데 동참하지만
레베카와 존이 죽기 전날에는 그들에게 마지막으로 기회를 주라고 간청하기도 한다. 그것은 그의 행동이 그의 양심에 대해 진실하지가
않다는 것을 보여준다.
3. 토마스 푸트남
그러자 검사는 배심원들에게로 돌아서며 말했다. "어머니가 사망한 다음 날 가장 수치스러운 정사에 골몰했던 바로 그 사람이 부질없는 이유로, 무어라고 말할 수 없는 풍기 사건의 결말을 지으려고 살인을 한 것입니다." - 알베르 까뮈Albert Camus『이방인L'Etranger』
토마스 푸트남의 진실은 간단치가 않다. 그는 시종 댄포스 판사를 추켜세우며 판사의 단호한 결정과 처분에 칭송을 보낸다. 그는
마을을 악마의 소행으로부터 구하는 일에 소명의식을 갖고 있는 것 같았다. 여름 내내 댄포스의 법정에 봉사했으며, 나서서 증인을
심문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가을이 되자 푸트남은 법정을 떠난다. "저희 같은 일반인들에게는 이 계절은 중요한 시기입니다."라고
하면서.
그가 바라는 것은 과연 마을이 진실과 정의를 되찾는 것이었을까? 아니면 자일즈 코레이의 말처럼 땅을 노리고
사건에 뛰어든 것일까? 후자 쪽에 심증이 간다. 푸트남 스스로 말하고 있듯이 세일럼은 푸트남 가家가 일군 땅이다. 약 40년 전
푸트남의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이 땅을 일구었고 지금은 어느 정도 번화하였다. 푸트남은 마을과 역사를 함께 한 사람이다. 한데,
이제 그의 집안은 몰락해가고 있다. 그가 입버릇처럼 강조하는, 자식 일곱 명이 핏덩이인 채 죽어갔다는 것은 그의 가문에 닥친
불행을 상징하고 있다. 그에게 마지막으로 남은 희망은 막내 루스인데, 그 아이조차 숲 속에서의 사건 이후로 좋지 않은 상태에
있다. 아마도 그는 가문을 일으킬 마지막 희망으로 법정을 선택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추측일
뿐이다. 단정할 수 없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어느 쪽이든 그는 진실을 오해하거나 오도하고 있다는
것이다.
푸트남에게 있어서 그 사건은 진실인 것이 아니라 진실이어야 하는 것이었다. 그는 법정이 진실을 밝혀내는
곳이라 여기는 것이 아니라 밝혀진 진실을 확인하고 집행하는 곳이라 여기는 듯한 인상이다; 그러나 선입견은 진실의 가장 큰
적이라는 것을 그는 모르고 있었거나 모른 체 하고 말았다.
4. 댄포스 판사
낮에는 멋쟁이 돈비고 아저씨 그 이름 용감한 조로 밤에는 신출귀몰 정의의 투사 조로가 가는 곳엔 승리뿐이다 -『쾌걸 조로』주제가
"정의는 언제나 승리한다." 유아기적 상상력이다; 어른들은 아이들에게 이런 믿음-어쩌면 이데올로기를 수없이 많은 루트로 심어주고
있다. 그러나 사실에 있어서는 정의는 언제나 승리하지 못한다. 정의는 정의이기 때문에 옳은 방법만을 써야 하고 불의는 불의이기
때문에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아도 된다. 반칙을 일삼는 상대와 겨루면서 이기는 것은 실력이 월등하지 않고는 불가능하다. 때문에
통상 불의가 승리하는 경우가 더 많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세상의 많은 종교 중 어느 하나라도 참이라면, 이런 단순한 논리
연산은 쓸모 없는 것이 되고 말 수도 있다.
댄포스 판사는 이런 유아기적 상상력의 소유자이다. 그는 정의와 죽음,
불의와 삶의 공존을 믿지 않는다. 댄포스처럼 살 수 있다면 이 세상에는 진실을 말하지 않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정의가 항상
삶이고 불의가 항상 죽음이라면 사람들은 언제나 정의만을 택하면 되기 때문이다. 불의와 죽음은 모든 사람들이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것인데, 그렇다면 사람들이 갈등하고 번민할 필요가 무엇인가?
그는 모든 것을 권력의 힘으로 해결 지으려 한다. 존이
아흔 한 명이 서명한 '레베카 너어스와 엘리자베스 프락터는 죄가 없다'는 탄원서를 가지고 와서 제출했을 때 그는 아흔 한 명을
모두 소환하려고 한다. 마을이 공포로 떤다는 것을 무시하면서 말이다. 그는 말한다: "진실한 사람은 법정을 두려워하지 않는
법이오." 과연 그의 말은 옳다. 그러나 이 세상 천지에 어디 진실한 사람이 있는가.
결국 판사는 고립되고 만다.
종국에는 푸트남도 그를 떠나버린다. "당신마저 없으면 난 고립되고 맙니다." 그도 역시 결국엔 정의필승의 신념을 꺾고 만다.
패리스 목사가 레베카와 존이 자신들의 죄를 고백하도록 설득하자고 했을 때, 그도 서둘러 그들의 설득을 진행시켰다. 패리스 목사가
설득을 건의한 것은, 사람들의 존경을 받는 그들이 교수형을 당할 경우 폭동이 일어날 수 있다는 이유였다는 것을 염두에 둘 때
판사의 일관성도 이즈음에서는 무너져버리고 만다. 다른 의미에서 그는 행복한 사람일 수 있다; 하나의 이론으로 세상을 설명할 수
있다고 믿었고 그 이론의 결함이 아직 발견되지 않았던 시대에 살던 사람은 행복한 사람일 수 있으니까.
5. 헤일 목사
무슨 꽃으로 문지르는 가슴이기에 나는 이리도 살고싶은가. - 서정주
진실과 거짓을 분별하기는 어려운 일이다. 거짓은 스스로를 진실인 것처럼 여기게 하기 때문이다. 거짓은 스스로를 진실로 보이게 하기
위해 또다른 거짓을 만든다. 거짓이 못할 일은 없다. 수많은 두꺼운 옷을 둘러 입은 거짓은 쉽사리 맨몸을 내보이지 않는다. 반면
진실은 언제나 맨몸 그 자체이기 때문에 오히려 거짓처럼 보이기 쉽다. 그러므로 진실과 거짓을 분별하는 일을 맡은이는 신중해야
한다.
중세나 크롬웰의 청교도 혁명기, 그리고 초창기 청교도 의식意識의 미국에서의 '이단 분별자'를 우리는 흔히 부정적인 견해로 보는 경향이 있다. 움베르또 에꼬Umberto Eco의 『장미의 이름Il Nome della Rosa』
에서도 '베르나르 기'라는 권위주의적 이단 심문자가 나온다. 그러나 헤일 목사는 신중함을 지닌 사람이었다. 그는 '이단
분별자'로서 사람들의 증언에 귀를 기울인다. 그는 말한다: "진실을 아는 이는 악마와 악마에게 영혼을 판 자 뿐입니다. 그러나
악마가 진실을 말하리라곤 상상할 수 없으므로 우리는 악마에게 영혼을 판 자에게 그 말을 들어야 합니다."
그러나
헤일 목사의 그런 의지는 법정에 반영되지 못한다. 모든 권한은 댄포스에게 있었기 때문이다. 목사는 결국 이웃 마을로 떠난다. 그
마을에서는 아무도 희생자를 내지 않고 사건이 해결된 듯 하다. 푸트남은 이를 두고 그 마을은 용기가 없었다고 하고 헤일 목사는
그 마을은 용기가 있다고 하고 있다. 여기서 두 사람이 엇갈리는 것은 진실과 삶의 저울질이다. 푸트남은 어떤 희생을 치러서라도
진실을 밝히는 것이 우선이라고 말하고 헤일 목사는 삶은 하나님이 주신 고귀한 것이므로 그것을 지키는 것이 우선이라고 말한다.
성경에는 수많은 순교자가 나온다. 육체적으로만 본다면 그리스도Christ도 순교자라 할 수 있고, 스데반Stephen 집사, 사도
바울Saint Paul도 순교자이다. 요한복음John 5장 13절은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나니"라고 전하고 있다. 목숨을 버리는 것이 이토록이나 추앙 받을 일이라면 그것은 역설적으로 목숨이 매우 귀중하고
중요한 것이라는 뜻이 될 것이다.
헤일 목사는 아마도 그런 생각을 가졌던 것 같다. 하지만 헤일 목사의 관점은
여지없이 무너지고 만다. 그것은 이 법정에서는 진실과 거짓이 뒤바뀌어 있고 삶과 죽음이 엇갈려 있다는 것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
처사라 할 것이다. 그것은 레베카 너어스의 모습을 보면 알 수 있다.
6. 레베카 너어스
"나는 해질 무렵을 좋아해. 해지는 걸 보러 가……" "기다려야지……" "뭘 기다리지?" "해가 지길 기다려야지." -쎙떽쥐뻬리Antoine de Saint-Exupery『어린왕자Le Petit Prince』
레베카 너어스를 한 마디로 정의할 수 있다면 "인내" 외에는 없을 것이다. 그녀는 기다린다; 인간은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뜻을 가르쳐 주실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그녀는 목숨 같은 것에는 연연하지 않는 사람이다.
그럴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그녀는 진실과 목숨을 저울질해보지도 않았던 것 같다.
그녀는 불가지론不可知論에
가까운 입장에 서고 있는데, 세상에 진실은 오로지 하나님 한 분만이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녀가 헤일 목사와 다른 판단을
하는 이유는 그 때문이다. 헤일 목사는, 앞에서 밝혔듯이, 진실을 알고 있는 이를 악마와 악마에게 영혼을 판 자들에게서 찾고
있다. 그러나 조금 더 생각해보자. 악마와 악마에게 영혼을 판 자들이 과연 진실을 알고 있을까? 거짓은 타인을 속일 뿐 아니라
그 자신도 속이고 만다. 그러므로 악마에게 영혼을 판 자에게서 진실을 기대하는 것은 어불성설語不成說이다. 진실을 알고 있는 이는
이 땅위에 없다.
엘리자베스는 거짓말을 못하는 사람이다. "울지 못하는 사람이 있고 노래를 못 부르는 사람이 있듯이 내 아내는 거짓말을 못하는
사람입니다."라고 존은 말한다. 부인은 마치 결벽증에 걸린 사람처럼 옳지 않은 일은 하지도 않는다. 마치 레베카 너어스와도
같이. 그러나 그녀에게는 레베카와 다른 두 가지가 있었다. 하나는 존 프락터에 대한 사랑이고 또 하나는 차가움이다.
그녀는 존을 사랑한다; 그래서 거짓말을 한다. 존이 이미 판사에게 자신과 애비게일 사이에서 있었던 간음을 고백한 이후인데도 엘리자베스는 그 사실을 모르고 존을 감싸기 위해 힘겹게 거짓말을 하고 만다.
마지막 순간에 그녀는 존에게 용서를 구한다. 집안을 차갑게 만들었던 것은 존이 아니라 바로 자신이라고. 그녀의 결벽증은 어떠한
죄도 용서하지 못했던 것이다. 물론, 본질적으로는 "당신을 용서할 사람은 내가 아니라 당신이에요, 존."이라는 말이 옳다. 죄를
지을 때, 그 죄에 상처를 입는 쪽은 상대방이 아니라 오히려 자기 자신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존의 입장은 그렇지가 못하다.
존은 엘리자베스가 자신을 용서하지 않는 한 자기 스스로를 용서할 수 없다.
그러나, 그의 결벽증은 또 몰라도, 그의
사랑은 진실의 장애물이 되는 것은 아니었다. 그는 존을 사랑하기에 존의 선택에 전적으로 따른다고 말했고, 그는 존을 사랑하기에
존이 생사의 고비에서 무엇을 행하든 간섭하지 않았다. 그저 보고 있을 뿐이었다. 결국 모든 열쇠는 존에게로 돌아간다.
8. 존 프락터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지으시고 아담이 어떻게 이름을 짓나 보시려고 그것들을 그에게로 이끌어
이르시니 아담이 각 생물을 일컫는 바가 곧 그 이름이라 아담이 모든 육축과 공중의 새와 들의 모든 짐승에게 이름을 주니라 - 창세기Genesis 2:19-20
창세기에는 첫 사람인 아담Adam이 모든 생물에게 이름을 지어주는 모습이 나온다. 아담이 각 생물을 일컫는 바가 곧 그 이름이
되었다. 근대에 와서 소쉬르Ferdinand de Saussure의 구조주의 언어관에 의해 이름이 가지는 필연성은 언어학적으로
인정받지 못하게 되었다. 그러나 여전히 이름은 이름의 주인을 가장 잘 나타내 줄 수 있는 것이다. 때로 이름은 그와 동일시된다.
우리는 『향연Symposion』이나 『국가Politeia』를 읽는다고도 말하지만, '플라톤'을 읽는다고도 말한다. 심지어 별반 교육을 받지 못한 사람들도 "인간 공수철" 이라고 하며 자신의 이름과 자기 스스로를 함께 쓰고 있다.
엘리자베스는 판사의 심문에 대답할 때, 시종 "존 프락터는 진실한 사람이에요."라는 말로 시작한다. 존에게는 어쩌면 그 말이
"'존 프락터'는 진실한 사람이에요."라는 말로 들렸을 지도 모르겠다. 존은 스스로를 잘 알고 있었다.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누구보다도 뼈져리게 느끼고 있었다. 그것은 아마도 애비게일과의 간음 때문일 것이다. 그는 자신을 그렇게 '좋은 놈'으로 보지
말라고 하면서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계속 죄책감에 휩싸여 산다. 그러나 그렇게 죄책감에 휩싸여 사는 것은 좋은 일은 아니다.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을 인식하라고 강조하는 기독교에서도 그것은 진실함의 표현과 구속자에 대한 감사를 느끼기 위한 것에 불과하다.
그러나 존의 끝없는 자기비하는 결국 옳지 못한 쪽으로까지 치닫게 된다.
"나는 이미 더렵혀진 영혼이니까 거짓말 한
번쯤 더한다고 해서 크게 달라질 건 없겠지."라면서 거짓 고백을 하고 살아남으려고 했던 것이다. 물론, 아내와 자식들을
위해서다. 그는 거짓 고백을 하였고, 진술서에 서명까지 했다. 그러나 그 진술서를 달라는 판사의 말에 존은 괴로워하면서 말한다.
"내가 고백을 하지 않았소? 그걸로 됐잖소! 내가 여기에 내 이름을 써 넣었소! 그럼 그것으로 되지 않았소!"
그에게는 그의 이름이 그 자신과 같은 것이었던 것이다. "내 평생에 다른 이름을 가진 적이 없고 가질 수도 없소!" 그는 결국 자신이
서명한 (거짓)진술서를 찢어버린다. 그를 다시 설득해 달라는 댄포스 판사와 패리스 목사에게 엘리자베스는 말한다: "그가 이제
자신의 이름을 찾았는데 제가 어쩔 수 있겠어요." 존이 그의 이름을 잃어버린 것은 거짓 고백을 할 때, 거짓 진술서에 서명을 할
때가 아니다. 그가 애비게일과 간음을 했을 때, 그리고 그 죄악으로 스스로가 상처를 입었을 때였다. 그 자신을 더럽혀진
영혼이라고 생각하고, 그 자신이 신념을 지키는 것을 '위선'이라고 표현하던 그 때였다. 확실히 '존 프락터'는 진실한 사람이다.
그는 한동안 그 '존 프락터'라는 이름을 잊어버리고 '더럽혀진 영혼'으로 있다가 그 진술서를 찢어버림으로써 다시금 자신의 이름을
되찾았던 것이다.
존의 이런 행위는 앞서 말한 모든 사람의 진실관眞實觀에 대답하고 있다:
그는 엘리자베스에게 대답한다: 이것으로 나는 나를 용서했소, 나는 이제 그대의 용서를 구하오. 나는 나의 이름에 진실하오.
그는 레베카 너어스에게 대답한다: 자매님, 기다리는 진실도 값진 것이지만 스스로와의 싸움을 통해 얻은 진실은 그보다 더합니다. 한 번도 흔들린 적이 없는 자매님, 당신을 존경하지만 이제는 나도 자매님과 같은 진실을 가졌습니다.
그는 헤일 목사에게 대답한다: 헤일 목사님, 목숨은 하나님이 주신 가장 고귀한 선물이지만 하나님은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내 이름을 기록해주셨습니다. 내 이름은 '존 프락터'라고요.
그는 댄포스 판사에게 대답한다: 댄포스 씨, 진실은 항상 이기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진실은 결국엔 승리합니다. 그리스도가 죽었을
때, 악마들이 기뻐했지만 삼일 뒤에는 모든 게 다시 바뀌었습니다. 법이 말하는 진실이란 그런 것입니다.
그는 토마스
푸트남에게 대답한다: 푸트남 씨, 당신이 말하는 용기 때문에 당신은 자신의 이름을 부끄럽게 여기게 될 것이오. 당신의 용기는
진실을 말하는 용기가 아니라 진실을 가리는, 동시에 겁怯도 가리는 거짓 용기요; 그래서 당신은 떠날 수밖에 없었던 거요.
그는 패리스 목사에게 대답한다: 패리스 목사, 진실은 움직이지 않는 것이오. 진실은 언제나 옳은 것을 진실이라고 부르는 것이오. 패리스 목사, 그대가 말하는 진실은 거짓이오.
그는 마지막으로 애비게일에게 대답한다: 애비게일, 너는 네 마음에는 진실했지만 다른 모든 이들에게 거짓을 행하고 말았구나. 나의
마을은 겨울이지. 그것이 진실이므로 나는 그것을 부인하지는 않겠다. 그러나, 애비게일, 진실은 그 자체로 진실이어야 해. 진실을
위한 거짓은 거짓을 위한 거짓보다 더 진실을 모독하는 행위가 될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