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령공주》의 우리나라 개봉일이었다. 연인과 함께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을 보았고, 어제는 《이웃집 토토로》를 보았다. 《센》이나 《토토로》에서는 조금 약화되거나 암시적으로만 있고, 《원령공주》나 《나우시카》에서는 좀 더 주제의식이 명확하다는 차이는 있지만, 전체적으로 미야자끼 하야오 감독은 '생태'를 그 가운데 두고 있다고 생각된다. "인간과 숲이 함께 살아갈 수는 없나요?"
인간의 추악하고 역겨움, 그건 인간이 자연의 일부가 되지 않을 때 이미 예견된 일이 아니었을까? 신들이나 자연이 인간을 역겨워 하거나 증오하는 것은 인간이 스스로를 자연보다 위에 놓고 있기 때문이다. 아마도 새것 콤플렉스와 성장발전의 패러다임을 가진 사람들은 '에보시'가 왜 단죄되는지 알 수 없을 것이다. 그는, 사람들이 이르는 대로, 여자들이 속편히 살 수 있는 곳을 만들어주고 나병환자들까지 수용한다. 그는 철저한 인본주의자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삶 자체가 늘 죄이듯 인본주의는 자연과의 대립을 낳기가 쉬울 것 같다. 아시타카나 산은 노한 자연과 인간의 가운데에 있는 이들이다. 시시 신의 분노는 얼마쯤 대홍수 모티프를 닮아있다. 홍수 모티프에는 늘 선한 사람이 등장하는데, 여기서는 아시타카와 산이다. 데우칼리온과 퓌라가 등 뒤로 돌을 던졌듯 아시타가와 산은 시시 신의 머리를 돌려준다. 그리고 대자연에 새로운 싹이 돋는다... 시종 영화에 끌려다니기만 했다. 그만큼 미야자끼 하야오의 애니메이션은 흡인력이 있다. 그래서 영화에 대해 어떤 말도 하지 못하게 한다.
'극장전' 카테고리의 다른 글
대사의 리듬: 임영웅《고도를 기다리며》 (2) | 2003.06.21 |
---|---|
아이가 아이였을 때: Wim Wenders《베를린 천사의 시》 (3) | 2003.06.17 |
건조한 울음의 낭비: 이원세《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0) | 2003.06.14 |
복잡함의 단순화: Kassovitz《제이콥의 거짓말》 (0) | 2003.04.19 |
진실과 거짓, 삶과 죽음: 『크루서블』 (2) | 2001.03.0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