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인의 사랑』의 마리아는 호메로스의 나우지카에서 사랑의 표본을 찾는다.
「옛날에는 달랐었던 것 같아요. 그렇지 않다면, 어떻게 호머가 나우지카 같은 사랑스럽고 건강하며 섬세한 여인을 만들어 낼 수 있었겠어요? […] 오늘날의 시인이라면 나우지카를 여자 베르테르로 만들어 버렸겠지요 […] 사람들은 오로지 취하게만 하는 묘약만 알 뿐, 생기를 주는 사랑의 샘물을 모르는 걸까요?」
-막스 뮐러『독일인의 사랑』신역판, 차경아 옮김, 문예출판사, 1987, 84-85쪽.
그런데 여기서 표현하려는 사랑은 인간과 자연간의 사랑이다. 인간이 인간끼리의 사랑만을 강조하고 자연과의 사이에 금을 긋기 시작하면서 문제는 시작되었다. 영화에서 가장 부정적으로 그려지는 이념이 휴머니즘이라는 것을 보면 그것은 확실하다. 그런 휴머니즘은 영화에 등장하는 세 마을이,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공유하고 있는 부분이다. '거신병'을 '테크노피아'의 알레고리로 파악하는 데서 토르메키아를 더 비난하고, '오무'의 유충을 미끼로 '오무'를 마을 파괴에 이용하는 페지테를 더 비난할 수는 있겠지만 바람계곡의 사람들도 실은 그런 비난을 완전히 벗어날 수는 없다.
영화 중반에 삽입된 회상 씬에서 나우시카는 아버지 지루에게 '오무'의 유충을 빼앗긴다.
(큰 나무를 등지고 필사적으로 외치는 나우시카. 그러나 그녀의 발 사이로 오무의 유충이 기어나온다)
나우시카 나오지 마!!
골 오무의 유충입니다.
질 역시 곤충에게 홀려있었구나… 이리 다오 나우시카!
나우시카 싫어! 아무런 나쁜 짓도 하지 않았어요!!
질 곤충과 인간은 같은 세계에서 살 수 없단다! (뺏어간다)
나우시카아앗--!! 제발!! 죽이지 말아요!! 제발…
인간과 곤충이 함께 살 수 없다는 인식을 그들이 공유하고 있는 이상, 불을 많이 사용하든 적게 사용하든 결국은 마찬가지다.
그
런데 여기서 중요하게 언급할 내용은, 불을 사용하는 이들은 모두 남자들이라는 것이다. 이에 반해, 나우시카 자신도 여자이고,
페지테의 비행선에서 탈출하려는 나우시카를 도와준 것은 아스벨을 제외하고는 모두 여자이고, 눈먼 예언자인 할머니도 여자이다.
결국은 거신병을 택하긴 하지만 계속해서 공격을 망설이고, 유보했던 크샤나도 여자이다.
나희덕 시인은 「생태적인 것과 여성적인 것, 그리고 시」라는 제목의 글에서 김혜순 시인의 「잘 익은 사과」를 인용하며
이
시에서처럼 존재를 태운 자전거 바퀴가 "둥글게 둥글게 길을 깎아내고" 있을 때마다 그녀는 그만큼 고향에 가까워지고 있는 것이다.
고향에서 "구멍가게 노망든 할머니가 평상에 앉아 / 그렇게 큰 사과를 숟가락으로 파내서 / 잇몸으로 오물오물 잘도 잡수시"는
모습은 대지의 어머니 가이아(Gaia)를 연상시킨다. 그런 점에서 이 시는 여성성에 대한 강한 자의식과 환유적 문체를 결합한
김혜순의 최근 시들이 생태적인 세계와 자연스럽게 만나는 한 지점을 보여준다.
- 나희덕「생태적인 것과 여성적인 것, 그리고 시」, 『창작과 비평』2000년 겨울호, 61쪽.
고
적고 있다. 여성성은 모성성을 빼고서는 이야기할 수 없기 때문에 여성이 남성보다 더 생명의 근원에 가까이 가 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더욱이 이 영화에서 나우시카를 페지테의 비행선에서 탈출시키는 일의 주동자가 죽은 라스텔의 '어머니'라는 점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나중의 작품인 《모노노케 히메》가 좀더 인간에 대한 혐오감을 직접적으로 드러내며 산의 입을 빌려
"인간은 싫어."라는 직설을 내뱉게 하는 데 반해 나우시카는 인간을 비롯한 무릇 생명을 모두 소중히하는 모습을 보인다. 아마
그런 차이는, 산은 인간이라고 말하기가 껄끄러운 이력을 갖고 있는 반면 나우시카는 두말 할 것 없이 인간이라는 근본적인 다름의
결과이겠지만, 또 어떤 측면에서 보자면 분노한 자연과 인간을 이어줄 다리는 결국 인간일 수밖에 없다는 감독의 인식이 표현된 것일
수도 있다.
흔히 "깨끗한 환경은 후손들에게서 빌려온 것"이라는 말로 자연보호와 환경보존의 당위성을 말하지만, 사실
그 말 역시 지극히 인본주의적인 것이다. 중요한 것은 나우시카처럼 자연에 직접 손을 내미는 것이다. 테토처럼 손가락을 조금
물다가 말수도 있고 '오무'처럼 '희생'을 요구할 수도 있지만, 인간 중심적으로 생각하지 않는다면 선택은 정해진 것이다. 중요한
것은 사랑이다.
덧) 《모노노케 히메》가 흔히 비판받는 대로 여기서도 일본색을 강조했다고 비판하려면
못할 것은 없다. 거신병을 원폭의 알레고리로 토르메키아를 미국의 알레고리로 볼 수 있으며, 페지테 역시 열강의 하나로 볼 수
있을 것이다. 더구나 바람을 특히 중요시하고 불을 싫어하는 부분은 카미카제神風와 연관지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빤한
알레고리를 이용한 해석의 시도는 훌륭한 작품을 정교하고 세련된 모습으로 망가뜨리는데 일조할 뿐이다.
덧2) 그림이 코난 류와 무척 비슷하다든가, 나우시카의 천진한 웃음소리가 어딘지 가식적으로 들린다든가, 페지테 비행선에서의 유파의 검술의 우스꽝스러움은 시대의 반영일까. 후후.
'극장전' 카테고리의 다른 글
디테일의 힘: 홍상수《강원도의 힘》 (0) | 2004.01.06 |
---|---|
거시기들의 힘: 이준익《황산벌》 (0) | 2003.10.19 |
상상력과 자의식의 만화: Ocelot《프린스 앤 프린세스》 (0) | 2003.06.27 |
대사의 리듬: 임영웅《고도를 기다리며》 (2) | 2003.06.21 |
아이가 아이였을 때: Wim Wenders《베를린 천사의 시》 (3) | 2003.06.1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