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낙도 우두머리도 돌볼 새 없이 갔단다" - 이용악「오랑캐꽃」
사투리를 줏대로 하여 황산벌 당시의 상황을 그려보겠다, 는 발상으로 만든 영화, 라는 문구가 《황산벌》의 주된 광고전략이었다. 하지만 실제에 있어서는 《황산벌》은 웃음을 주기 위한 오락영화에서 조금쯤 비켜서 있었다.
《황산벌》은 일단 무엇보다 '전쟁영화'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몇몇 '리얼'하다는 전쟁영화에서 쓰인 '들고 찍기hand held'의 방법이 여기에서도 쓰였는데, 그것은 꽤 희화화 되긴 했지만 그 가운데서도 참혹함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는 전쟁의 장면들을 자세히 그리고 있다.
희화화된 전쟁도 여전히 잔혹스러움을 드러내고 있으니, 그것은 온갖 성적인 코드들로 무장한 두 진영의 '욕' 싸움에서 그대로 드러난다. 어느 나라나 성적인 의미의 '욕'이 가장 많다는 것은 그것이 사람 스스로에 대한 가장 큰 수치가 된다는 데에 그 이유를 두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욕'은 '왜 사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근원적인 야유이며, '왜 죽는가'라는 질문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그래, 그렇다면, '왜 죽는가' 그러니까 '왜 싸우는가!' 영화 한가운데 김유신과 계백이 장기를 두는 장면에서 그것은 드러난다. 목적없이 죽어가는 '장기알'들이 보여주듯이 싸움 그 자체에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그것은 계백에게 좀더 절실하게 나타난다. 김유신이 대뜸 계백에게 "증치를 모리는 장수넌 군사더럴 개죽엄허게 만더는 기라"고 한 것은 그래서 정확한 지적이었다.
클라우제비츠 같은 사람은 "가능한 다른 정치 수단보다 전쟁이 더 이익이 될 때 전쟁은 일어난다"고 하여 전쟁의 목적을 정치적 측면에 못박았지만, 그것은 정치가들이 좋아할 만한 관점이지 장수들의 관점은 아니다. 계백에게 있어 전쟁의 목적은 '이기는 것'일 뿐이다.
그러나, 계백에게는 불행하게도, 어쩔 수 없이 '전쟁'은 정치에 종속된다. 아이끼리의 싸움은 유치하고 덜 성숙한 것으로 치부되는 것이, 단체끼리 혹은 나라끼리의 싸움은 숭고하고 거룩한 것으로 포장되는 것이 현실이다. 그것은 계백의 각시가 "똑바로" 말한 대로 "호랭이는 가죽땜시 죽고, 사람은 이름땜시 죽는" 현실이다. 거기서 '민족주의'가 나온다.
《황산벌》이 민족주의에 대해 가지는 태도는 두 방향의 것이다. 백제의 민족주의는 '나라를 지키자'는 종류의 대항민족주의로 그것은 민중의 삶과 직접 연계되어 나타난다. 가령 '거시기'가 "지금쯤 낱알이 여물 것인디 울 엄니 혼자 내내 고생하게 생겨부렀소"하는 부분에서는 민중을 지키기 위한 민족주의적인 면모를 보이고 있다. 다시 한 번 그의 대사를 들여다보면 전쟁에서 지더라도 자신들은 결국 평소 하던 "고생"을 계속 해야 한다는 뜻을 살필 수 있다.
《황산벌》이 지닌 또하나의 민족주의는 '외세(唐)'에 관한 것이다. 신라가 당나라를 끌어들여 통일을 했다는 것을 우리는 종종 부정적인 입장에서 바라보지만 그것은 역사성을 결여한 푸념이다. 그 당시 삼국이 '우리는 서로 같은 민족'이라는 생각을 가졌을 리는 만무하다. (영화의 설정과는 달리 언어도 달랐을 가능성도 있다.) 그러나 영화에서는 내내 소정방의 태도와 신라의 태도를 견주며 외세 유입에 대한 비판적인 각도를 유지한다. 그것은 계백에게는 "즌쟁은 알아도 증치를 모린다"고 하고 김법민에게는 "증치는 알아도 즌쟁은 모린다"고 하여 '유아독존唯我獨存'적으로 멋있게만 그려지는 김유신이 마지막에 소정방 앞에다 칼을 꽂으며 '화룡점정畵龍點睛'하는 장면에서 극에 달한다.
이런 미성숙한 민족주의를 가지고 전쟁의 참혹함을 다루려 하는 것은 어떤 면에서는 위험하지만 어떤 면에서는 아주 적절하다. 김유신이 "화랑들을 계속 보내라"며 "즌쟁은 미쳐야 하는 기야"라고 하는 부분에서 볼 수 있듯이 그 전쟁 자체가 '미성숙한 민족주의'의 관점에서 보아야 바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화랑의 세속오계 중의 '임전무퇴臨戰無退'는 바로 그러한 발상이다. 우리가 익히 배워왔던 유치진의 『원술랑』도 반공이데올로기 전파에 앞장섰던 그의 행적에 비추었을 때 그 함의의 일면을 알 수 있는 것도 마찬가지로 볼 수 있다.
그러나, 그렇다면, 답이 되었는가, '왜 죽는가'의 답이 되었는가. 답은 이미 나왔다. 계백의 각시가 '사람은 이름땜시 죽는다'고 했을 때의 그 정답은 추상적이긴 하지만 정확한 대답이다. 그러므로, '거시기'와 '거시기의 어머니'가 목가적인 논밭 한가운데서 서로 얼싸안고 기뻐하는 것은 인위적인 장면으로 영화 마지막에 초를 치는 장면이기도 하지만, 사실은 그 앞의 여러 장면들에서 이미 암시된 것이다. "저같은 것 이름 알아서 뭣에 쓴답니까요. 그냥 '거시기'로만 알아두쇼."
사투리를 줏대로 하여 황산벌 당시의 상황을 그려보겠다, 는 발상으로 만든 영화, 라는 문구가 《황산벌》의 주된 광고전략이었다. 하지만 실제에 있어서는 《황산벌》은 웃음을 주기 위한 오락영화에서 조금쯤 비켜서 있었다.
《황산벌》은 일단 무엇보다 '전쟁영화'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몇몇 '리얼'하다는 전쟁영화에서 쓰인 '들고 찍기hand held'의 방법이 여기에서도 쓰였는데, 그것은 꽤 희화화 되긴 했지만 그 가운데서도 참혹함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는 전쟁의 장면들을 자세히 그리고 있다.
희화화된 전쟁도 여전히 잔혹스러움을 드러내고 있으니, 그것은 온갖 성적인 코드들로 무장한 두 진영의 '욕' 싸움에서 그대로 드러난다. 어느 나라나 성적인 의미의 '욕'이 가장 많다는 것은 그것이 사람 스스로에 대한 가장 큰 수치가 된다는 데에 그 이유를 두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욕'은 '왜 사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근원적인 야유이며, '왜 죽는가'라는 질문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그래, 그렇다면, '왜 죽는가' 그러니까 '왜 싸우는가!' 영화 한가운데 김유신과 계백이 장기를 두는 장면에서 그것은 드러난다. 목적없이 죽어가는 '장기알'들이 보여주듯이 싸움 그 자체에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그것은 계백에게 좀더 절실하게 나타난다. 김유신이 대뜸 계백에게 "증치를 모리는 장수넌 군사더럴 개죽엄허게 만더는 기라"고 한 것은 그래서 정확한 지적이었다.
클라우제비츠 같은 사람은 "가능한 다른 정치 수단보다 전쟁이 더 이익이 될 때 전쟁은 일어난다"고 하여 전쟁의 목적을 정치적 측면에 못박았지만, 그것은 정치가들이 좋아할 만한 관점이지 장수들의 관점은 아니다. 계백에게 있어 전쟁의 목적은 '이기는 것'일 뿐이다.
그러나, 계백에게는 불행하게도, 어쩔 수 없이 '전쟁'은 정치에 종속된다. 아이끼리의 싸움은 유치하고 덜 성숙한 것으로 치부되는 것이, 단체끼리 혹은 나라끼리의 싸움은 숭고하고 거룩한 것으로 포장되는 것이 현실이다. 그것은 계백의 각시가 "똑바로" 말한 대로 "호랭이는 가죽땜시 죽고, 사람은 이름땜시 죽는" 현실이다. 거기서 '민족주의'가 나온다.
《황산벌》이 민족주의에 대해 가지는 태도는 두 방향의 것이다. 백제의 민족주의는 '나라를 지키자'는 종류의 대항민족주의로 그것은 민중의 삶과 직접 연계되어 나타난다. 가령 '거시기'가 "지금쯤 낱알이 여물 것인디 울 엄니 혼자 내내 고생하게 생겨부렀소"하는 부분에서는 민중을 지키기 위한 민족주의적인 면모를 보이고 있다. 다시 한 번 그의 대사를 들여다보면 전쟁에서 지더라도 자신들은 결국 평소 하던 "고생"을 계속 해야 한다는 뜻을 살필 수 있다.
《황산벌》이 지닌 또하나의 민족주의는 '외세(唐)'에 관한 것이다. 신라가 당나라를 끌어들여 통일을 했다는 것을 우리는 종종 부정적인 입장에서 바라보지만 그것은 역사성을 결여한 푸념이다. 그 당시 삼국이 '우리는 서로 같은 민족'이라는 생각을 가졌을 리는 만무하다. (영화의 설정과는 달리 언어도 달랐을 가능성도 있다.) 그러나 영화에서는 내내 소정방의 태도와 신라의 태도를 견주며 외세 유입에 대한 비판적인 각도를 유지한다. 그것은 계백에게는 "즌쟁은 알아도 증치를 모린다"고 하고 김법민에게는 "증치는 알아도 즌쟁은 모린다"고 하여 '유아독존唯我獨存'적으로 멋있게만 그려지는 김유신이 마지막에 소정방 앞에다 칼을 꽂으며 '화룡점정畵龍點睛'하는 장면에서 극에 달한다.
이런 미성숙한 민족주의를 가지고 전쟁의 참혹함을 다루려 하는 것은 어떤 면에서는 위험하지만 어떤 면에서는 아주 적절하다. 김유신이 "화랑들을 계속 보내라"며 "즌쟁은 미쳐야 하는 기야"라고 하는 부분에서 볼 수 있듯이 그 전쟁 자체가 '미성숙한 민족주의'의 관점에서 보아야 바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화랑의 세속오계 중의 '임전무퇴臨戰無退'는 바로 그러한 발상이다. 우리가 익히 배워왔던 유치진의 『원술랑』도 반공이데올로기 전파에 앞장섰던 그의 행적에 비추었을 때 그 함의의 일면을 알 수 있는 것도 마찬가지로 볼 수 있다.
그러나, 그렇다면, 답이 되었는가, '왜 죽는가'의 답이 되었는가. 답은 이미 나왔다. 계백의 각시가 '사람은 이름땜시 죽는다'고 했을 때의 그 정답은 추상적이긴 하지만 정확한 대답이다. 그러므로, '거시기'와 '거시기의 어머니'가 목가적인 논밭 한가운데서 서로 얼싸안고 기뻐하는 것은 인위적인 장면으로 영화 마지막에 초를 치는 장면이기도 하지만, 사실은 그 앞의 여러 장면들에서 이미 암시된 것이다. "저같은 것 이름 알아서 뭣에 쓴답니까요. 그냥 '거시기'로만 알아두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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