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12 4

움직이는 시간, 움직이지 않는 시간: Prado『섬』

프라도의 『섬』은 특이한 만화다. 대부분의 만화는 몰입없이 빨리 읽을 수 있도록 비교적 단순한 서사구조récit를 가지는 게 보통이다. 그래서 심지어 어떤 만화들은 형식적인 아름다움을 갖지 못하고 내용으로 환원되기도 한다. 그런 만화들의 경우에는, 한 편의 작품이 그 줄거리로 대체되어도 큰 문제가 없어보인다. 『섬』은 독자의 몰입을 요구한다. 독자는 이 작품에서 이야기하려는 바가 무엇인가, 이 작품이 왜 이렇게 구성되었는가를 생각하기 시작하고, 종국에는 작품에 깊이 몰입하게 된다. 퍽 짧은 이 책이 두번씩 세번씩 읽히는 이유도 그것이고, 시일이 지난 뒤에도 다시 꺼내읽게 되는 이유도 바로 그것이다. 스콧 매클루드는 그의 『만화의 이해』에서 '홈통'의 역할을 강조하며, 바로 그곳이 독자의 상상력이 개입할 ..

『쥐의 똥구멍을 꿰맨 여공』- 베르나르 베르베르

L'Encyclopedie du savoir relatif et absolu Bernard Werber, 이세욱 옮김, 열린책들. 2001년 6월 15일 초판 1쇄. 꿈의 부족 1970년대에 미국의 두 민족학자가 말레이시아의 깊은 숲 속에서 세노이라는 원시 부족을 발견하였다. 그 부족은 꿈을 삶의 중심에 놓고 살고 있었다. 그래서 이라는 별명도 얻었다. 매일 아침 불가에 둘러앉아 식사를 할 때 그들이 나누는 이야기는 오로지 간밤에 꾼 꿈에 관한 것뿐이었다. 만일 어떤 세노이가 누군가에게 해를 끼치는 꿈을 꾸었다면, 그는 꿈속에서 해를 입은 사람에게 반드시 어떤 선물을 주어야만 했다. 또, 꿈에서 남을 때린 사람은 맞은 사람에게 용서를 구해야 했고, 그러기 위해서 역시 선물을 주어야 했다. 세노이 부족은 ..

언어학 없는 언어학교: 강범모『영화마을 언어학교』

'영화보다 재미있는 언어학 강의'라는 부제를 달고 있지만, 언어학 강의라 하기에 깊이도 없을 뿐더러 재미도 없다. 아니, 본제부터가 잘못되었다. 이 책은 '영화마을'에 있지 않고 그 언저리에 있을 뿐이다. 거의 60편에 달하는 영화 속에서 언어학을 설명하려고 글쓴이는 애쓰고 있지만, 그것이 영화의 내용과 잘 융합되는 경우는 거의 없다. 대개는 영화의 제목이나 아주 사소한 것에 집착해서 그에 대한 이야기로 한두 페이지를 채우는 것에 불과하다. 물론, 그런대로 괜찮은 몇몇 사례들은 있다. 《쥬라기 공원3》에서 공룡들의 의사소통이 우리의 언어와 달리 무한성을 갖지는 않을 것이라고 말하는 부분은, 오로지 추측만을 가지고 한 말이라는 결점은 있더라도, 그런대로 봐줄 만한 언어학적 설명이라고 하겠다. 또, 《인랑人..

지하철 자살과 즉물적 인식

수능철이라 그런가. 다시 많은 사람들이 스스로 죽었다. 덕분에 TV와 신문은 참 오래간만에 한목소리로 "사실 그동안 우리나라 지하철은 너무 위험했다"고 입을 모으고 있다. TV와 신문의 특징은 항상 사고가 일어난 다음에 "사실 그동안 우리나라 …… 너무 ……했다"라고 하는 것이지만, 어쨌든 시민들은 돈내고 이용하는 지하철이 전혀 안전하지 않음을 이번에 몸으로 느끼고는, 그런 언론의 주장에 동조하는 모양이다.맞다. 맞는 말이긴 하다. 우리나라 지하철 타는곳은 너무 위험하다. (바다 바깥의 사정이 어떠한지 비교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땅이 좁아서, 또 지형적인 원인으로 해서 타는곳이 굽어있는 경우가 많은 것도 중요한 이유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또, 이용하는 사람들이 지나치게 많은 탓도 있을 것이다. 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