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민 선생님의 『한시 미학 산책』을 읽었다. (『정민 선생님과 함께 읽는 한시 이야기』를 지하철에서 하도 많이 발견한 탓에 '정민 선생님'이 굳어버렸다. 그렇지 않으면, 대개 '선생' 정도로만 이를텐데. 하지만, 훌륭한 책을 쓴 사람은 '선생'보다는 '선생님'이 옳다. 고등학교 시절 은사님은 중국에서는 존경의 뜻으로 '子'를 붙이지만 우리 나라에서는 '선생님'을 붙인다고 하셨다.) 한자와 한문문법에 익숙지 않아 보다 깊은 독서를 하기는 힘들지만, 그런 나에게도 이 책은 재미있으면서 생각할 거리를 많이 주는 책이다. 일주일에 한 편씩 한자 공부를 겸해 한시 한 편을 보면 좋겠다. 잊지 않으면 말이다.

여담이지만, 『한시 미학 산책』에 모란과 고양이에 얽힌 설명이 나온다. 이야기의 시작은 당 태종이 선덕여왕에게 모란 그림과 꽃씨를 보냈는데, 선덕여왕이 그 그림에 나비가 없음을 보고 그 꽃에 향기가 없음을 미리 알아냈다는 『삼국유사』의 한 기사이다. 정민 선생님은 모란 그림이 나비가 없음은 나비 '접蝶'의 중국 발음은 '디에'로, 팔십늙은이 '질(늙을老 아래 이를至)'과 발음이 같아, 나비는 곧 팔십늙은이를 쌍관雙關하게 되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또 나비를 그리면 흔히 고양이를 같이 그리는데, 이는 고양이 '묘猫'자의 중국음인 '마오'는 칠십늙은이 '모(늙을老 아래 털毛)'와 같아 이를 쌍관하게 되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 말을 듣고 퍼뜩 생각난 것이 덩샤우핑鄧小平의 '흑묘백묘론黑猫白猫論'이었다. '묘猫'가 '마오'로 읽힌다면 '흑묘백묘론'은 얼마쯤 '마오'쩌둥毛澤東을 풍자한 것은 아닐까? 중국말을 모르니 알 수 없지만, 이만한 상상은 해롭지도 않고 재미있으니 그걸로 족하다. 물론, 중국말을 아는 이가 대답해주어도 좋겠다.


한시미학산책
정민 지음/솔출판사

Posted by 엔디

댓글을 달아 주세요

좋은 시집이 가져야만 하는 덕은 사색과 운율과 새로움이다. 그 중에서 시를 시답게 만드는 것은 무엇보다도 운율이다. 운율韻律은 그 말에서도 알 수 있듯이, 운韻과 율律이다. 운韻을 쓰지 않는 우리시에서는 율律로만 보더라도 그다지 틀리지 않을 것 같다.

김용택의 『그 여자네 집』은 좋은 시집이 가져야만 하는 사색과 운율과 새로움을 모두 방기放棄하고 있는 시집이다. 그 중에서도 운율을 깡그리 망각하고 있다. 그의 시가 이른바 산문시poème en prose라서 하는 말이 아니다. 산문시도 훌륭한 운율을 가질 수 있다. 하지만 『그 여자네 집』의 산문시는 그런 운율을 거의 찾아볼 수 없다. 나는 방금, "『그 여자네 집』의 산문시"라고 말했다. '김용택의 산문시'가 아닌 이유는 그가 이미 훌륭한 산문시를 우리에게 보여준 바가 있기 때문이다.

『그 여자네 집』에 실린 사진과 머리의 모양 및 길이와 입은 옷과 옷에 펜 꽂은 모습과 배경이 같고 표정까지 비슷하여, 한날 한곳에서 찍은 게 분명한 다른 사진이 실려있는, 그의 첫 시집 『섬진강』에는 이런 시가 있다.

강 건너 산밭에 하루 내내 스무 번도 더 거름을 져 나르셨단다. 어머님은 발바닥이 뜨겁다며 강물에 발을 담그시며 자꾸 발바닥이 뜨겁단다. 세상이야 이래도 몸만 성하면 농사 짓고 산느 것 이상 재미있고 속 편한 게 어디 있겠냐며 자꾸 갈라진 발바닥을 쓰다듬으시며 자꾸 발바닥이 뜨겁단다.
-「섬진강9」부분

마침표까지 턱턱 찍어가며 거침없이 쓰인 줄글이지만, "자꾸," "발바닥"과 같은 낱말들의 되풀이와 "-단다"로의 종결어미 통일로 운율감을 형성하고 있다. 물론 일종의 보격步格pied도 적극적으로 기능하고 있다. 보다 더 산문에 가까운 시에서도 마찬가지다.

피와 땀과 살을 섞었던 땅, 버림받고 무시당하면서도 나라에서 시키는 대로 다 했던 땅, 그래도 정 붙여 살았던 땅, 나이 서른다섯에 이사라니.
동 구 정자나무를 빠져나간 차는 새마을 신작로길을 잘도 달리며 불빛을 여기저기 쏘아댔다. 차 꽁무니의 빨간 불빛이 동구길을 아주 사라진 후에도 사람들은 회관 마당에 덩그렇게 남아 서로 얼굴들을 외면한 채 앉거나 서서 담뱃불을 빤닥이며 캄캄한 앞산을 바라보거나 땅을 내려다보며 그와 살 비벼 살아온 날들을 생각하며 헤성헤성한 마음들을 어찌하지 못하고 하나둘 헛기침을 하며 어둑어둑 헤어졌다.
-「섬진강16 -이사」부분

여기서는 "헤성헤성한 마음"이나 "어둑어둑 헤어졌다"에서 보듯이 모양을 흉내낸 말들과, "[……] 땅, [……] 땅, [……] 땅"에서 보이는 점점 세지는强化 말들의 사용으로 운율감을 얻어낸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여기서도 읽으면 어떤 보격이 느껴진다. 특히 "차는 […] 잘도 달리며"에 주목해보자.

사람들은 차를 타고 씽씽 잘들도 달린다. 그러나 나는 천천히 걸어간다. 아침에 올 때 강물에 둥둥 떠 있던 오리, 빨간 발을 허공에 내저으며 자맥질을 하던 오리 없다. 틀림없이 누군가 총질을 했을 것이다. 새들과 나무와 꽃과 물이 하늘과 바람과 물과 어울려 노는 꼴을 사람들은 보지 못한다. 들판은 텅 비어 있다.
-「나는 집으로 간다」부분

"잘도 달리며"와 "잘들도 달린다"의 운율상 차이는 명백하다. 앞엣것은 읽히며 뒤엣것은 읽히지 않는다. 여기서 읽히지 않는다는 것은 좀 문제를 갖고 있다. "잘들도 달린다"는 말이 "씽씽 […] 달[리]"지 않기 때문이다. 좀더 읽어보면 "나는 천천히 걸어간다"고 쓰여 있다. "천천히." 하지만 이 시를 소리내 읽어보면 결코 느리게 읽히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줄글이 뭉텅이씩 지나간다. 왜 그러냐 하면, 율律이 없기 때문이다. 율은 멈춤休止에서 생기고, 그 멈춤은 자연스러운 숨呼吸이다. 그것이 없으면 좋은 시가 될 수 없다. 그렇다고 이 글이 아주 산문으로 쓰였느냐 하면 그건 아니다. "자맥질을 하던 오리 없다"는 토씨가 없어서 (산문으로서는) 이상한, 시문장이다. 그러나 "틀림없이 누군가 총질을 했을 것이다. 새들과 나무와 꽃과 물이 하늘과 바람과 물과 어울려 노는 꼴을 사람들은 보지 못한다."에서 우리는 어떠한 운율도 발견할 수 없다. 그것은 어절로 잘게 쪼개지거나 문장으로만 있어 전혀 쪼개지지 않는다.

그건 이야기histoire가 있어서 그런 건 아니다. 책끝에 붙은 이문재 시인의 "시에서 이야기가 승하면 언어는 죽는다, 라고 나는 믿어왔"지만 이 시집을 보고 그게 아니란 걸 알았다, 는 고백은 과장이거나 좀 우스운 말이다. 지겹도록 들어온 세계 문학의 첫 페이지 호메로스에서부터 우리는 이야기가 승한 예를 보고 있지 않은가? 문제는 이야기가 승하느냐 죽느냐가 아니라, 이야기가 승하든 죽든 어떻게 그러하느냐다.

「사람들은 왜 모를까」는 이 시집에서 드물게 만날 수 있는 좋은 시 중 하나인데, 우리는 여기서 사색과 운율과 새로움이 함께 어울려 있음을 볼 수 있다. "이별은 손끝에 있고 / 서러움은 먼데서 온다"고 시인은 툭 잠언aphorisme을 던지고 왜 그런지를 물을 독자들에게 풀잎이나 햇살 따위를 보여준다. 어떤 독자는 풀잎이나 햇살이 나오자마자 답을 찾을 것이고, 어떤 독자는 "아픈 데서 피지 않는 꽃이 어디 있으랴"가 나오기까지 답을 유보한다. 다른 독자는 "그리운 것들은 다 산 뒤에 있다 / 사람들은 왜 모를까 봄이 되면 / 손에 닿지 않는 것들이 꽃이 된다는 것을"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불편했던 마음의 평안함을 느낀다. 이 시의 중요한 매력은 행갈이인데, 운율과 의미구조가 하나가 된 듯한 모습을 보인다. "강 언덕 풀잎들이 돋아나며 / 아침 햇살에 핏줄이 일어선다"는 구절은 특히 그렇다.

표제시이기도 한 「그 여자네 집」은 행갈이가 엉망이다. 무슨 기준으로 행갈이를 했는지 알 수 없다. "샛노란 은행잎이 지고 나면 / 그 여자 / 아버지와 그 여자 / 큰오빠가 / 지붕에 올라가"와 같은 구절은 이 시와 어울리지 않게 1000미터 오래달리기를 하고 와서 헉헉거리며 읽는듯한 모습이고, "가만 가만히 그 여자를 부르고 싶은 집 / 그 / 여 / 자 / 네 집"에서 마지막 행 "네 집"은 '너의 집'이라는 의미로 오해될 여지가 있는데 그런 모호성ambiguïté은 이 시와 전혀 맞지 않는 모습이다. "언제나 그 어느 때나 내 마음이 먼저 / 가 / 있던 집 / 그 / 여자네 / 집 / 생각하면, 생각하면 생. 각. 을. 하. 면……"은 감정을 제멋대로 발산시키면서 고삐질을 제대로 못해서 감정이 어디로 가는지도 모를 모양이다. "생. 각. 을. 하. 면……"이 왜 어색한지를 우리는 생. 각. 해. 볼. 필. 요. 가. 있. 다. 그건 생경하고 쓸모없는, 아니 잘못된 과장일 뿐이다. 생각은, 여기서는 거닐면서 뒤를 자근자근 밟아가는 생각이지, 악몽같은 생각이나 충격적인 생각이 아닌 까닭이다.

아침밥 먹고
또 밥 먹는다
문 열고 마루에 나가
숟가락 들고 서서
눈 위에 눈이 오는 눈을 보다가
방에 들어와

밥 먹는다
-「눈 오는 집의 하루」전문全文

『섬진강』과 달리 이 시집에서는 오히려 짧은 시가 힘을 갖고 있는 모습이 이채롭다. 「눈 오는 집의 하루」는 짧은, 좋은 시다. 여기서는 사색이 보인다. "또 / 밥 먹는다"에서는 새롭지 않음의 새로움이 보인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이 시의 백미白眉는 "눈 위에 눈이 오는 눈을 보다가"이다. "눈"이 뒤에 오는 홀소리에 따라 각각 [누뉘], [누니], [누늘]로 바뀌는 모습이 입술을 즐겁게 해준다. 더구나 [눈]은 울림소리와 둥근입술홀소리圓脣母音가 합한 형태라 더욱 그렇다.

물론 같은 짧은 시라도 「춥지요」와 같은 시는 힘이 하나도 없다. 잠깐의 감상주의에 빠지고 말 시다. 이 시의 하나뿐인 메시아는 "당신 뺨에 / 따스한 온기"가 눈물을 의미할지도 모른다는 역설뿐이다.


그 여자네 집
김용택 지음/창비(창작과비평사)

Posted by 엔디

댓글을 달아 주세요

  1. 나그네 2010.05.16 16:3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씌어진'은 '쓰이(씌)'다에 피동, '어지'에 피동,
    이렇게 피동접사가 중복되었네요.
    말 고르기 어려우면 '거침없이 씌어진 줄글'이라는 둥 복잡한 문장 만들지 말고, '거침없이 쓴 줄글'이라 하세요.

    • Favicon of https://endy.pe.kr 엔디 2010.05.19 11:0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네, 쓰다가 딴생각을 했는지 어이없이 이중피동이 됐네요. 지적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쓴'이라고 안 쓰고 굳이 피동을 쓰려고 한 것은, '시인'보다는 '시'를 위주로 썼기 때문이에요. 문학작품이 작자의 것으로 100% 환원되는 것은 아니니까요. ^^

브레히트가 시에 대해 가진 생각은 아주 독특하다. 문학과 예술의 무용성無用性을 강조하는 일군의 예술가와는 달리 브레히트는 문학 역시 써먹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브레히트의 첫 시집인 『가정기도서』는 "이 가정기도서는 독자들이 사용할 수 있게 만들어졌다. 이 시집은 아무 의미없이 처먹혀서는 안된다"라는 사용지침서를 가지고 있다. 브레히트가 시의 사용가치를 중요시하는 것은 그의 서사극 이론의 핵심인 '낯설게하기효과Verfremdungseffekt'와 일맥상통하는 개념이다. 그러므로 사실 놀랄만한 일이 아니다.

이 책의 소중한 점 가운데 하나는, 모든 면에서 신비주의를 배격한 브레히트가 시인들에게 하는 충고이다. 책의 표제로도 쓰인 '시의 꽃잎을 뜯어내는 일'은 시를 하나하나 분석하는 일이다. 그는 꽃이 꽃 자체로도 아름답지만 꽃잎을 뜯어내도 하나하나가 다 아름다운 것처럼 시도 그렇다고 말한다. 이 책에 실린 그의 어떤 분석이 수준 미달인 것도 없는 것은 아니지만 시를 꼼꼼히 분석하려는 태도는 시인이 가져야할 중요한 태도라고 생각한다.

또 그는 시인이 논리를 가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옳다. 시에 논리가 없다면 온갖 비약이 시라는 이유만으로 허용되고 말 것이다. 그러면 어떤 시가 좋은 시고 어떤 시가 좋지 못한 시인지 구별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의 몇 가지 논거는, 당시의 사정은 어땠는지 몰라도 지금은 대체로 다 통용되는 것이다.


학교에서 내려오다 교내 어느 문학회에서 시화전을 여는 것을 보았다. 브레히트도 시와 그림을 따로 전시하는 기획을 한 일이 있다. 그러나 그는 시화와는 다르게 시 따로, 그림 따로 전시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것이 고유의 예술을 지키면서 두 예술을 함께 감상할 수 있다는 생각에서이다. 이것과 관련해 연인과 얘기를 나눴다. 가령, 블레이크의 경우에 대해서.

시의 꽃잎을 뜯어내다
시의 꽃잎을 뜯어내다
베르톨트 브레히트 지음, 이승진 옮김/한마당

Posted by 엔디

댓글을 달아 주세요

김구용 선생이 옮긴 『삼국지 연의』를 사러 헌책방에 갔다가 우연히 발견한 책이다. 인터넷 서점에서 검색해보니 나올 당시 신문에서 꽤 많이 떠들어댄 것 같은데, 왜 내 기억속엔 남아있지 않았을까.

아무것도 몰랐던 처음에는 그저 책꽂이에 꽂힌 걸 보고 제목이 좋았고, 꺼내서 겉을 살펴볼 때는 책의 디자인과 장정이 마음에 들었다. 문학동네나 민음사에서 나오는 하드커버 시집과는 달리 품격이 있어보였다. 표지에 다른 유치한 디자인 없이 시를 넣어, 그 시만으로 표지가 되게 하는 것도 좋았고, 그걸 제목 그대로 수직성있게 배열한 것도 마음에 들었다.

비는 수직으로 서서 죽는다
무턱대고 살 수는 없었다. 책장을 넘겨 몇 편의 시를 보았다. 느낌이라고 하면 너무 추상적이지만, '흉내내는' 시인은 아니라는 생각이 퍼뜩 들었다.

늦가을 투명한 바람 위에
탱잣빛 색종이 조각을
수없이 뿌리던

먼 들녘 논둑에
쓸쓸한 눈부심처럼 서 있는
한 그루 미루나무 밑을
수만 톤의 지하수가 흐르고 있다.

무너지기 직전의 눈사태 같은
위기의 눈은 그것을 본다.

그것을 본 시인이 죽었다.

-「한 시인의 데스 마스크」부분, 61쪽.

"그것을 본 시인이 죽었다." 그 시인이 박남수 시인일 것 같다는 추측을 한 것은 나중에 통독을 하면서 앞뒤의 두서너 시를 함께 읽으며 안 것이지만, 저 문장 하나만으로도 나락감을 느낄 수 있었다. 마침 책 상태도 거의 새책같은 상태라 헌책방 아저씨께 함께 넣어달라고 했다.

돌아오는 지하철에서부터 바로 통독을 시작했다. '포스트-잍'을 붙이려고 하다가 시집의 분위기를 망칠 것 같아서 그만두었다. '포스트-잍'의 색도 색이지만, 그렇게 붙이다간 책 전체를 붙여야만 할 것 같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시는 내 성벽을 공략하고 있었다. 조금씩 성벽은 허물어져갔다.

길은 산자락을 따라 시내처럼 흐르고 있었다. 벼랑은 잘린 언덕줄기의 속살이었다. 통곡의 벽을 바라보듯 나는 벼랑 앞에 섰다. 흑표범의 눈처럼 나를 노려보고 있는 지층. 바위는 조용히 기억하고 있었다. 쓰러지는 양치식물의 숲. 아우성치는 맘모스의 마지막 울음소리. 쌓인 시간의 무게 밑에서 목숨은 진한 원유로 일렁이고 있었다. 갑자기 나는 바위의 적의를 느꼈다. 바위는 기다리고 있다, 인류의 멸망을. 찢어진 바위틈에서 갈맷빛 물이 솟구쳐 바다가 되고 부스러진 스스로의 피부에서 다시 풀밭이 일어서서 눈부신 고함을 지르며 연둣빛 바람을 흔드는 부활의 순간을.

-「바위의 적의」全文, 14쪽.

시집의 두번째 시를 읽고서 나는 오래 지체하였다. 길다랗게 여백에 느낌표를 해두고 다시 읽었다. 또 다시 읽었다. "갑자기 나는 바위의 적의를 느꼈다." 이렇게 절묘하게 '갑자기'라는 부사가 들어간 문장을 나는 알지 못한다. '갑자기'는 본래 뜻이 그런지라 뜻밖의 순간에 급작스레 등장하는 게 보통이다. 그래서 '갑자기'의 앞과 그 뒤는 상당한 비약이 존재하는 경우도 흔하다.

그런데 이 시에서는 "갑자기"가 일련의 단계를 거쳐 제 자리에 올라앉아 있는 것이다. 처음에는 "…양치식물의 숲.", "…마지막 울음소리." 처럼 명사로 끝맺은 문장들이 "시내처럼 흐르"며 읽히는 데에 방해가 되기도 하고 고등학생 습작시인같은 느낌을 준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그 명사들은 파문처럼 "일렁이고 있었다." 일렁인다는 것은 분명 파동의 이미지를 주고, 파동은 어떤 '메시지'를 담고 있기가 쉽다. 즉, 화자가 느낀 "바위의 적의"는 그 파동에 동화되어가는 화자의 허를 찌르면서도 자연스러운 궤도에 편입되어 있다. 때문에 여기에서의 "갑자기"는 뜻밖의 등장이면서도 비약적이지 않을 수 있다.

그 파동은 그렇게 나의 허도 찔렀다. 만물에 생명이 있음을 나는 한순간 깨달았다. 잊어버렸다. 또 깨달았다. 잊어버렸다. 시가 자꾸 내 감각의 끄트머리를 건드렸다.

비가 빛나기 위하여 포도가 있다. 미로처럼 이어지는 돌의 포도. 원수의 뒷모습처럼 빛나는 비. 나의 발자국도 비에 젖는다.

나의 쓸쓸함은 카를교 난간에 기대고 만다. 아득한 수면을 본다. 저무는 흐름 위에 몸을 던지는 비, 비는 수직으로 서서 죽는다. 물안개 같다. 카프카의 불안과 외로움이 잠들어 있는 유대인 묘지에는 가보지 않았다. 이마 밑에서 기이하게 빛나는 눈빛은 마이즈르 거리 그의 생가 벽면에서 보았다.

-「프라하 일기」부분, 27쪽.

카프카의, 금방이라도 비가 올 것 같은 흑백 사진이 떠올랐다. 비는 "저무는 흐름 위에 몸을 던"져 "수직으로 서서 죽는다." "흐름"은 무엇일까. 포도는 鋪道일 것이다. 미로迷路인 포도. 길은 유사有辭이래로 오랫동안 삶을 지칭하였다. 비올 것 같은 카프카와 그의 묘지, 그리고 비에 젖는 화자의 발자국이 지속적으로 가리키는 것은 죽음이다.

그런 죽음을 알리는 이미지는 시집에 줄기차게 제시되어 있다. 그는 죽음과 시적으로 동화된다. 박남수 시인의 죽음을 쓴 것으로 짐작되는 시가 「새」(55-56), 「하늘」(57-59), 「데스 마스크」(60), 「한 시인의 데스 마스크」(61-63), 「내면의 바다」(64), 「독」(65) 등 6편 이상이다. 시인의 죽음에 당면해 한두 편 정도의 시를 쓰는 것은 관례이기도 하고 그 심정도 이해가 된다. 이 여섯편의 시들은 그럼 어떻게 된 것일까. 그가 자신을 '죽음'과 직접적으로 관계시키고 있다는 추측이 가능하다. 둘은 죽음으로 서로 연결되어 있다.

「시의 등」(71)에서는 아예 "먼 섬나라에 사는 사람의 죽음이 나의 일부를 죽인다"고 선언하고 있기까지 하다. 그것은 정지용의 "아아 山을 돌아 / 멫 萬里 물을건너 / 南쪽 나라 빠나나가 / 이땅에 잇는사람들의 입에 씹히네"(「파충류동물爬蟲類動物」)와 비슷하지만, 내용상으로는 정반대를 다루고 있다.

그런 죽음에의 동화는 그의 시를 시로 만들었다. 그는 "언어의 그리움은 / 섬처럼 외롭다. / 언어는 침묵을 그리워한다."(「오베르의 들녘」, 83)라고 적고 있다. 사실 시란 가장 구차한 삶의 모습이다. 끊임없이 죽음을 시쓰려고 하지만 살아있지 않으면 시쓸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는 절대로 죽음을 그대로 설명할 수 없다. 시의 역할은 그게 아니다. 시가 설명한다면, 이미 시가 아니다.

안개 속에서 사람들은 형용사로 이야기한다. 요원들의 암호처럼 그것은 아름답다. 가령 A가 '쓸쓸한' 하면 B가 '부드러운'이라고 말한다. 이따금 섞이는 프랑스 말 비음같은 우아한 어법으로 메시지를 교환한다. 물론 알타이어와는 전혀 다른 새로운 언어 체계다. 목적을 위하여 혹사된 언어는 이제 피로하다. 반란하는 언어는 물푸레나무 향 같은, 들길 연둣빛 쑥내 같은, 의미와 은유를 떠난 새로운 시스템이다.

-「안개를 위한 에스키스」부분, 117쪽.

시의 언어는 의미로부터 도피하여 "메시지를 교환한다." 시의 언어는 의미와 조우遭遇해서도 안 된다. 의미가 시퍼렇게 살아있으면 시는 죽는다. "프랑스 말 비음"이라는 표현에서 알 수 있듯이 여기에서 언어는 의미보다도 음성에 더 바탕을 두고 있다. "쓸쓸한"이나 "부드러운"도 마찬가지다. 우리말로 두 단어는 각각의 의미를 가지고 있지만 순수하게 음성만을 따져보아도 어딘지 "쓸쓸한", 어딘지 "부드러운" 메시지가 전달되지 않는가? 그렇다면 이 시집을 통독해보라. 어딘지 "죽.음."이 전달되지 않는가?

잡목림 마른 풀섶을 헤치며 모습을 드러낸 늙은 엽사는 흰 눈가루를 털며 말했다.

―상처입은 사슴이 가장 높이 뛴다.

밤새 모국어의 가시에 상처입은 나는 흰 눈 위에 핏자국을 남긴 사슴의 최후의 점프를 생각하며 걸었다. 바다처럼 번득이는 언어의 슬픈 물빛을 찾아 지팡이를 짚고 걸었다. 아린 혼의 무게를 부드럽게 짚어주는 은빛 지팡이. 피는 붉은 것만은 아니다. 피는 울음처럼 맑을 수 있다. 흰 꽃잎이 눈송이처럼 무너지고 있는 눈부신 길을 걷는 나는 나의 상처다.

-「상처」全文, 129쪽.

그렇다면 그의 시는 죽음으로 가는 길목에서 쓴 '생채기'일 것이다. 붉은 피가 엉겨붙어 지저분한 상처가 아니라 맑디 맑은 사슴의 눈같은 상처. 그러고보면, 이 시집의 길 맨 처음에 만났던 바위의 메시지가 바로 상처이고 죽음이 아니었던가.



보유補遺

이 시집에는 각주가 없다. 요즘 시집을 읽으면 각주 표시 때문에 리듬과 흐름이 끊기는 경우가 적지 않다. '리듬과 흐름의 단절'을 의도했다면 모르지만 그렇지 않다면 각주는 자제해야 옳다. 이 시집에는 다른 시인들같으면 각주를 달았을 내용까지도 시 속에 포섭하고 있다. 가령,

『부란의 꽃』이란
성녀 리도비나에 대한 책이름이다.
사후에 육체가 젊었을 때와 같은
싱싱함과 미모에 돌아간 성자
열두 명이 이 책자에
열기되어 있다.
이 이야기를 듣고 나는
여섯 모의 무구한 결정체로 되돌아간
진흙을 생각했다.

-「진흙에 대하여2」부분, 103쪽.

와 같은 부분은 웬만한 시인 같으면 부제로 『부란의 꽃』을 달고 2-6행 부분을 각주로 돌리고서 "나는 여섯 모의 무구한 결정체로 되돌아간-"으로 시를 시작할 것이다. 이것은

바깥을 보겠다는 의지가
뇌신경 세포 단말을
눈으로 만들었다.

신경생물학자의
최신 리포트를 읽었다.
지난해 Nature다.

그러나
한 시인은 말했다.
보아야 할
사랑의 대상이 밖에 있기 때문에
눈이 생겨났다.

-「눈의 발생」부분, 132쪽.

같은 부분도 마찬가지다.



지용의「파충류동물」인용부분은 다른 사람의 시로 밝혀졌다.
고대高大 최동호 교수의 지적으로 밝혀져 신판 지용전집에서는 빼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Posted by 엔디

댓글을 달아 주세요

살아남은 자의 슬픔
김광규 시인이 옮긴『살아남은 자의 슬픔』(한마당)을 읽었다. 널리 알려진 그의 여러 시편들보다 오히려 내 마음을 끄는 것은 다른 것들이었다. 「울름의 재단사」는 몇 달 전에 읽고서 멋지다고 생각해오던 것이지만, 오늘은 새로운 좋은 시를 발견(!)했다. 시가 좋다는 것은, 함축성이 뛰어나 여러 가지로 읽힐 수 있다는 뜻이다. 그뿐 아니라, 그 수많은 읽힘이 모두 타당하도록 진실성이 있다는 뜻이다.

나의 어머니Meiner Mutter (1920)

그녀가 죽었을 때, 사람들은 그녀를 땅 속에 묻었다.
꽃이 자라고, 나비가 그 위로 날아간다……
체중이 가벼운 그녀는 땅을 거의 누르지도 않았다.
그녀가 이처럼 가볍게 되기까지, 얼마나 많은 고통을 겪었을까.

여기서 '가볍다'는 것은 물리적인 것만은 아닐 것이다. 그렇지만 나는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물리적인 것에 대해서 주목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 시는 물론 시인 자신의 어머니의 죽음에 임해서 쓴 시이겠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아버지가 아닌 어머니가 땅에 묻힌다는 것은 무언가의 상징으로 볼 수 있을 것 같다. 그리고 어머니는, 꽃과 나비를 키운다. 그럼으로써 그녀가 가벼워진다는 것이다. 그녀는 얼마나 많은 고통을 겪었을까? 내가 보기에는, '그녀'가 땅과 동일시되고 있는 듯하다...
Posted by 엔디

댓글을 달아 주세요

- 정소남은 난의 노근을 드러내어 亡宋의 한을 그렸고, 조맹부는 훼절하여 元에 출사했지만, 정소남의 난초만 홀로 향기롭고 조맹부의 송설체가 비천하다는 말은 듣지 못했습니다.

未堂徐廷柱西紀二千年十二月二十四日聖誕節前夜死去. 當時我年二十一也.

서정주는 흔히 '생명파'로 명명되는 시인이다. 과연 그의 시에서는 생명에 대한 집착과 열의가 지속적으로 나온다. 생명이라는 것에 대한 계속되는 탐구는 우리 삶의 의미를 밝혀줄 것도 같다. 그의 초기시에 보이는 여러 시어들은 젊은 날들의 타오르는 생명에서 점차로 나이먹어가는 생명의 모습을 보여준다.

 애비는 종이었다. 밤이기퍼도 오지않었다.
 파뿌리같이 늙은할머니와 대추꽃이 한주 서 있을뿐이었다.
 어매는 달을두고 풋살구가 꼭하나만 먹고 싶다하였으나…… 흙으로 바람벽한 호롱불밑에
 손톱이 깜한 에미의 아들.
 甲午年이라든가 바다에 나가서는 도라오지 않는다하는 外할아버지의 숯많은 머리털과
 그 크다란눈이 나는 닮었다한다.
 스믈세햇동안 나를 키운건 八割이 바람이다.
 세상은 가도가도 부끄럽기만하드라.
 어떤이는 내눈에서 罪人을 읽고가고
 어떤이는 내입에서 天痴를 읽고가나
 나는 아무것도 뉘우치진 않을란다.

 찰란히 티워오는 어느아침에도
 이마우에 언친 詩의 이슬에는
 멫방울의 피가 언제나 서꺼있어
 볓이거나 그늘이거나 혓바닥 느러트린
 병든 숫개만양 헐덕어리며 나는 왔다.

              - 「自畵像」 全文

서정주의 첫 시집인 『花蛇集』은 그 강렬한 이미지와 시어들 때문에 인상적이다. 강렬한 이미지는 주로 시각적 이미지, 그 중에서도 붉은 색의 이미지들이다. 그 이미지를 대표하는 개별어들은 [피, 석류, 능금, 입술(입설), 도화桃花(복사꽃), 오디, 볽은 댕기, 볽은 꽃밭, 볽으스럼한 얼굴, 닭벼슬, 붉고 붉은 눈물, 붉은 우름, 진달래꽃, 산호珊瑚]들이다. 이에 대비되는 흰 색의 이미지나 푸른 색의 이미지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전체적으로 붉은 색의 광기어린 지배에서 이 시집이 벗어나는 것 같지는 않다. 이런 붉은 색은 대체로 젊은 시절의 강한 성욕의 지배를 내보이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한 성욕의 표현들은 「花蛇」에서 "石油 먹은 듯…… 石油 먹은 듯…… 가쁜 숨결이야"로, 「桃花桃花」에서 "푸른 나무그늘의 네거름길우에서 / 내가 볽으스럼한 얼굴을하고 / 앞을볼때는 앞을볼때는 // 내 裸體의 에레메야書 / 毘盧峰上의 强姦事件들."로, 「雄鷄(下)」에서 "어찌하야 나는 사랑하는자의 피가 먹고싶습니까" 등으로 나타난다. 이런 강렬한 성욕은 대체로 죄책감을 불러일으키기에 마련이다. 그것도 "사랑하는 자의 피가 먹고 싶"을 만큼 강렬하다면 그 죄책감은 더하리라. 「문둥이」에서는

 해와 하늘 빛이
 문둥이는 서러워

 보리밭에 달 뜨면
 애기 하나 먹고

 꽃처럼 붉은 우름을 밤새 우렀다.

        - 「문둥이」 全文

로 표상되어 있다. 하지만, 그 죄책감에도 불구하고 문둥이는 애기를 먹는다. 그것은 살아야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와는 반대편에서 그의 강렬한 붉음을 조절하는 장치가 여기저기서 드러난다. 「桃花桃花」에서의 "나의微熱을 가리우는 구름이있어 / 새파라니 새파라니 흘러가다가"나 「水帶洞詩」에서의 "흰 무명옷 가라입고 난 마음 / 싸늘한 돌담에 기대어 서면 / 사뭇 숫스러워지는 생각, 高句麗에 사는듯 / 아스럼 눈감었든 내넋의 시골 / 별 생겨나듯 도라오는 사투리."이 대표적이다(강조 인용자). 무섭고 강렬한 붉은 작용에 푸르고 흰 반작용이 있었기에 서정주는 페시미즘에 침윤되지 않고 앞으로 나갈 수 있었던 것 같다. 그의 붉은 강렬함은 두 번째 시집 『歸蜀途』에 가면서 "하눌ㅅ가에 머무른 꽃봉오리ㄹ 보아라", "뺨 부비며 열려있는 꽃봉오리ㄹ 보아라", "가슴같이 따뜻한 삼월의 하눌ㅅ가에 / 인제 바로 숨쉬는 꽃봉오리ㄹ 보아라"로 마무리된다.

두 번째 시집 『歸蜀途』에서 서정주는 한恨의 정서로 빠져들고 있다. 아마도 그의 강렬함이 충족되지 않아서, 아니 충족될 수 없는 것임을 깨달은 것이리라. 그는 "우리들의 사랑을 위하여서는 / 이별이, 이별이 있어야 하네"(「牽牛의 노래」)라는 한스러운 말을 내뱉고 있다. 표제시인 「歸蜀途」나 「푸르른 날」 역시 별리의 정한을 노래한 절창이다.

 눈이 부시게 푸르른 날은
 그리운 사람을 그리워 하자

 저기 저기 저, 가을 꽃 자리
 초록이 지처 단풍 드는데

 눈이 나리면 어이 하리야
 봄이 또오면 어이 하리야

 내가 죽고서 네가 산다면!
 네가 죽고서 내가 산다면?

 눈이 부시게 푸르른 날은
 그리운 사람을 그리워 하자

       - 「푸르른 날」 全文

하지만, 이러한 한 속에서도 그의 생명력만은 고스란히 간직되고 있다. "이 세상 밖이라면 어디에라도"라고 외치는 페시미스트들과는 사뭇 달리, 또 "죽지 못해 산다"는 한 섞인 체념과도 다르게 서정주는 여직껏 끊임없이 삶에의 욕구를 달려 왔던 것이다. 이런 삶의 욕구는 과연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한과 이별과 슬픔이 미치도록 자신을 지배했음에도 서정주는 어디에서 살아야할 이유와 목적과 당위를 찾았던 것일까? 「무슨 꽃으로 문지르는 가슴이기에 나는 이리도 살고 싶은가」라는 긴, 시의 제목에서도 서정주는 자문自問하고 있다. 그가 살고 싶어하는 이유는 "꽃으로 문지르는 행위" 때문이다.

 눈물로 적시고 또 적시어도
 속절없이 식어가는 네 흰 가슴이
 저 꽃으로 문지르면 더워 오리야

 아홉밤 아홉낮을 빌고 빌어도
 덧없이 스러지는 푸른 숨ㅅ결이
 저꽃으로 문지르면 도라 오리야

       - 「門열어라 鄭道令아」 부분

꽃으로 문지르는 행위, 그것은 한과 이별과 슬픔의 해소를 뜻하는 바, 치유를 말하고 있다. 『花蛇集』에서 보여졌던 흰색의 이미지와 푸른색의 이미지가 여기에서 또다시 나타나는 것을 볼 수 있는데, 그것은 이 시가 서정주 시의 근원적인 무언가를 가지고 있음을 말해준다. 그가 아픔을 안고서도 살아가려 애쓰는 이유는 그 아픔이 계속 치유되기 때문이며 그 자신도 치유에의 희망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계속되는 절망은 결국은 페시미즘으로 몰고갈 수도 있지만, 인간은 죽기 전까지는 배수진背水陣을 치는 경우가 없기 때문에 결국은 죽기까지 희망을 간직한 채 사는 셈이 된다. 이장희를 비롯한 페시미스트들이 아픔을 견디지 못하고 마지막 절망인 죽음을 택하는 것과는 다른 선택이라 할 수 있다. 서정주는 이런 자신의 삶에의 욕망을 확인하고서 다음 시집으로 넘어가게 되는데, 그제서야 그에게는 일말의 평화랄 것이 찾아오고 안정을 찾는다. 그의 생명지향은 드디어 나이먹기 시작한 것이다.

『徐廷 柱 詩選』에서 볼 수 있는 모습은 안정감이다. 그는 이제 「菊花 옆에서」나 「無等을 보며」 같은 작품을 내어놓는다. 마음에 안정과 깊은 사색이 없으면 쓰지 못할 내용들이라 생각한다. 그는 이제 자신을 비우는 법을 알게 되었던 것 같다. "시방 제 속은 꼭 많은 꽃과 향기들이 담겼다가 븨여진 항아리와 같습니다."(「祈禱 壹」) 자신을 비우면 세상 모든 것이 조화롭게 보인다. 그는 드디어 자연의 아름다움을 새로 알게 되고, 그런 의미에서 새로운 사랑을 시작한다. 그 사랑은 자연과 별과 세상에 대한 사랑이요 조화에 대한 경탄이요 감화다. 그는 슬픔을 알고 있지만 슬픔을 가르치지는 말아야 한다고 말한다(「上里果園」). 그가 얻은 결과가 너무 상투적이고 예사롭다고 해서 실망할 필요는 없다. 중요한 것은 그것이 그가 치열한 자신과의 싸움을 통해서 얻은 결과일테니까.

 신령님…….

 처음 내 마음은
 수천만마리
 노고지리 우는 날의 아지랑이 같었읍니다

 번쩍이는 비눌을 단 고기들이 헤엄치는
 초록의 강 물결
 어우러저 날르는 애기 구름 같었읍니다

 신령님…….

 그러나 그의 모습으로 어느날 당신이 내게 오셨을때
 나는 미친 회오리 바람이 되였읍니다
 쏟아져 네리는 벼랑의 폭포
 쏟아져 네리는 쏘내기비가 되었읍니다

 그러나 신령님…….

 바닷물이 적은 여울을 마시듯이
 당신은 다시 그를 데려가고
 그 훠―ㄴ한 내 마음에
 마지막 타는 저녁 노을을 두셨읍니다.
 그러고는 또 기인 밤을 두셨읍니다

 신령님……

 그리하여 또 한번 내위에 밝는 날
 이제
 산ㅅ골에 피어나는 도라지 꽃같은
 내 마음의 빛깔은 당신의 사랑입니다

          -「다시 밝은 날에」全文

미당 시전집 1
서정주 지음/민음사

Posted by 엔디

댓글을 달아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