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신病身'은 모자란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다. 장애인을 지칭하는 말로 예전에 주로 쓰였고, 욕으로도 쓰였다. (지금도 쓰인다.)
언젠가 병신이라는 말 대신 '장애인'이라는 말을 쓰자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병신은 그 病이라는 글자에서도 알 수 있듯이 가치중립적이지 않은 말이다. 욕으로도 쓰이는 현실을 보면 알 수 있다. 반면 장애인은 가치판단이 들어가있지 않은 (혹은 적은) 말이라는 요지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래서 나도 가령 장님, 귀머거리, 벙어리 등과 같은 말 대신 시각 장애인, 청각 장애인, 언어 장애인이라는 말을 의식적으로 써 왔다. (여담이지만 장님, 귀머거리, 벙어리 등이 순 우리말이고 시각 장애인, 청각 장애인, 언어 장애인 등이 모두 한자어라서 조금 껄끄럽기도 했다.) 최소한 나는 그 말을 씀으로써 장애인들을 우리와 다른 사람이 아니라 그저 불편이 있는 사람, 정도로 생각하게 된 것 같다. 나는 그 말에 빚이 있다.
'애인', '애자'는 요즘 초등학생에서 중고등학생, 어쩌면 대학생에까지 널리 쓰이는 신용어로 남을 조롱하는데 쓰이는 말이다. 그런데, 그 말이 …… 장애인, 장애자에서 '장' 자를 뗀 것이라는 말을 듣고는 극도로 기분이 상했다. 중고등학생이나 대학생은 때가 묻어서 그렇다고 치자. 초등학생들이 그런 말을 쓰는 것을 보았을 때 나는 '천사같은 어린이'라는 말은 아무래도 요즘 시기에는 다시 생각해야 한다는 생각마저 들기 시작했다. 그렇다면 애인, 애자 즉 장애인, 장애자는 병신이나 다름없는 의미를 가지게 된 것이다.
어느 신문에서 나는 장애인 대신 친근감을 줄 수 있는 '장애우'라는 말을 쓰자는 제안을 읽은 적이 있다. 그건 독자투고란이었는데 나는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장애우는 장애인과는 어감이 무척 다르다.
일단 그것은 가치중립적이지 않다. 장애우의 友는 친구를 뜻하는 말인데 모든 장애인들이 우리의 친구는 아니다. 그래도 좋은 말이니 좋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있을 수 있지만 현실과 지나치게 다른 말은 오히려 위화감을 조성할 수도 있다. 생면부지의 사람이 친구라고 부르는 것을 누가 좋아하겠는가. 게다가 그것은 장애인에 대한 차별을 오히려 부각시키는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 우리가 아무나 보고 친구라고 하지는 않는데 장애인들에게는 친구라고 부른다는 것은 그들은 우리가 친구가 되어주어야 할 사람이라는 생각을 갖게 할 수도 있다.
또한 장애인이라는 말은 그리 쉽게 바꿀 수 없는 매력이 있다. 장애우라는, 역사가 일천한 말이 감히 따라올 수도 없는 그 매력은 물론 그 한 글자, '人'이라는 말에 담겨져 있다. 말 하나에도 역사가 있다는 것이다. '人' 속에는 동서의 긴 전통이 담겨 있다. 人倫(Sittlichkeit)이라는 말이 그렇고 人道라는 말이 그렇고 人民이라는 말이 그렇다. 天卽人 人卽天, 天人合一, 人乃天이 그렇고 무엇보다 人權이라는 말이 그렇다. 세계인권선언문 전문이 글자 '人' 뒤에 숨에 있다. ('장애인권'이라는 말과 연관지어 보아서도 그렇다.)
요즘들어 사람들이 말, 어감에 집착하는 것이 보인다. 깊이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문득 드는 느낌에 집착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해서 예쁜 말만 갖다 붙이려는 식의 노력은 실패할 수밖에 없다. 이름에 걸맞는 내용, 이름에 맞는 대우가 있어야 그 말바꿈은 비로소 옳은 말바꿈이 되는 것이다. 극단적으로는 말은 변하지 않고 말이 가리키는 것의 두께가 바뀔 수도 있다. 흑인들을 비하하는 말로 주로 쓰던 nigger라는 말이 최근들어 오히려 흑인들이 주체적으로 쓰면서 그 말이 뜻하는 바, 그 말의 두께가 두터워진 예가 바로 그것이다.
장애인은 무척 소중한 말이다. 지각없는 사람들에게 어떻게 인식되든 간에 장애인이라는 말의, 본래 가치중립적이면서도 두터운 의미층을 가지고 있는 장점은 다른 말로 대체되기 힘들 것으로 생각된다. 장애인이라는 말의 장점 하나도 생각해보지 않으면서 장애우 등과 같은 신조어를 무리하게 만들어내는 것, 아직 신체 장애인들이 쉽게 다닐 수 있는 길조차 제대로 마련하지 않고서 그들을 '친구'라고 부르는 것보다는 기존의 말의 장점을 살리는 것이 필요하고, 그보다도 그 말에 걸맞는 대우를 하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한 일일 것이다.
언젠가 병신이라는 말 대신 '장애인'이라는 말을 쓰자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병신은 그 病이라는 글자에서도 알 수 있듯이 가치중립적이지 않은 말이다. 욕으로도 쓰이는 현실을 보면 알 수 있다. 반면 장애인은 가치판단이 들어가있지 않은 (혹은 적은) 말이라는 요지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래서 나도 가령 장님, 귀머거리, 벙어리 등과 같은 말 대신 시각 장애인, 청각 장애인, 언어 장애인이라는 말을 의식적으로 써 왔다. (여담이지만 장님, 귀머거리, 벙어리 등이 순 우리말이고 시각 장애인, 청각 장애인, 언어 장애인 등이 모두 한자어라서 조금 껄끄럽기도 했다.) 최소한 나는 그 말을 씀으로써 장애인들을 우리와 다른 사람이 아니라 그저 불편이 있는 사람, 정도로 생각하게 된 것 같다. 나는 그 말에 빚이 있다.
'애인', '애자'는 요즘 초등학생에서 중고등학생, 어쩌면 대학생에까지 널리 쓰이는 신용어로 남을 조롱하는데 쓰이는 말이다. 그런데, 그 말이 …… 장애인, 장애자에서 '장' 자를 뗀 것이라는 말을 듣고는 극도로 기분이 상했다. 중고등학생이나 대학생은 때가 묻어서 그렇다고 치자. 초등학생들이 그런 말을 쓰는 것을 보았을 때 나는 '천사같은 어린이'라는 말은 아무래도 요즘 시기에는 다시 생각해야 한다는 생각마저 들기 시작했다. 그렇다면 애인, 애자 즉 장애인, 장애자는 병신이나 다름없는 의미를 가지게 된 것이다.
어느 신문에서 나는 장애인 대신 친근감을 줄 수 있는 '장애우'라는 말을 쓰자는 제안을 읽은 적이 있다. 그건 독자투고란이었는데 나는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장애우는 장애인과는 어감이 무척 다르다.
일단 그것은 가치중립적이지 않다. 장애우의 友는 친구를 뜻하는 말인데 모든 장애인들이 우리의 친구는 아니다. 그래도 좋은 말이니 좋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있을 수 있지만 현실과 지나치게 다른 말은 오히려 위화감을 조성할 수도 있다. 생면부지의 사람이 친구라고 부르는 것을 누가 좋아하겠는가. 게다가 그것은 장애인에 대한 차별을 오히려 부각시키는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 우리가 아무나 보고 친구라고 하지는 않는데 장애인들에게는 친구라고 부른다는 것은 그들은 우리가 친구가 되어주어야 할 사람이라는 생각을 갖게 할 수도 있다.
또한 장애인이라는 말은 그리 쉽게 바꿀 수 없는 매력이 있다. 장애우라는, 역사가 일천한 말이 감히 따라올 수도 없는 그 매력은 물론 그 한 글자, '人'이라는 말에 담겨져 있다. 말 하나에도 역사가 있다는 것이다. '人' 속에는 동서의 긴 전통이 담겨 있다. 人倫(Sittlichkeit)이라는 말이 그렇고 人道라는 말이 그렇고 人民이라는 말이 그렇다. 天卽人 人卽天, 天人合一, 人乃天이 그렇고 무엇보다 人權이라는 말이 그렇다. 세계인권선언문 전문이 글자 '人' 뒤에 숨에 있다. ('장애인권'이라는 말과 연관지어 보아서도 그렇다.)
요즘들어 사람들이 말, 어감에 집착하는 것이 보인다. 깊이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문득 드는 느낌에 집착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해서 예쁜 말만 갖다 붙이려는 식의 노력은 실패할 수밖에 없다. 이름에 걸맞는 내용, 이름에 맞는 대우가 있어야 그 말바꿈은 비로소 옳은 말바꿈이 되는 것이다. 극단적으로는 말은 변하지 않고 말이 가리키는 것의 두께가 바뀔 수도 있다. 흑인들을 비하하는 말로 주로 쓰던 nigger라는 말이 최근들어 오히려 흑인들이 주체적으로 쓰면서 그 말이 뜻하는 바, 그 말의 두께가 두터워진 예가 바로 그것이다.
장애인은 무척 소중한 말이다. 지각없는 사람들에게 어떻게 인식되든 간에 장애인이라는 말의, 본래 가치중립적이면서도 두터운 의미층을 가지고 있는 장점은 다른 말로 대체되기 힘들 것으로 생각된다. 장애인이라는 말의 장점 하나도 생각해보지 않으면서 장애우 등과 같은 신조어를 무리하게 만들어내는 것, 아직 신체 장애인들이 쉽게 다닐 수 있는 길조차 제대로 마련하지 않고서 그들을 '친구'라고 부르는 것보다는 기존의 말의 장점을 살리는 것이 필요하고, 그보다도 그 말에 걸맞는 대우를 하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한 일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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