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어릿광대의견해

나도 도전과 자유는 좋아한다: 1492Miles

엔디 2001. 9. 29. 04:06
나도 도전과 자유는 좋아한다. 특히나 그것이 이룰 수 없는 것일 때에는 '누가 그걸 이룰 수 없다고 했나'하며 거기에 더 도전하는, 나도 역시 젊은인가보다. 역사는 많은 젊은이들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최소한 내가 어릴 적에 읽은 40권짜리 계몽사 세계위인전은 어린 내게 '젊음'이 무엇인지 알려주는 첫 번째 글이 되었었다. 그리고 이제 나는 <너와 나는 태양처럼 젊었다>를 부르고 <젊은 그대>를 응원가로 외치는 대학생이다.

계몽사 세계위인전에도 크리스토퍼 콜럼버스Cristoforo Colombo가 들어있었다. 그는 신대륙을 발견하려고하는 도전정신과 자유정신으로 꽉 차 있는 사람이었고, 성급하고 겁많으면서 무지하기까지한 사람들의 폭동을 무릅쓰고서 계속 서쪽으로 달려가 서인도제도를 발견한 영웅이었다. 생각해보았다. 나라면 그렇게 할 수 있었을까? 지구가 네모나다고 믿었던 그 당시에 말이다. 그 네모의 끝으로 가 영원한 지옥으로 떨어지면 어쩌지...? 이 사람은 진리를 위해 목숨을 바치는구나... 그런데도 사람들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라고 콜럼버스를 흉봤겠다? 멍청한 사람들. 계란도 제대로 못 세우는 주제에...

그러다 어떤 글을 보게 되었다. 콜럼버스 1000여년 전에 노르만 인들이 이미 '신대륙'을 발견했다는 것이었다. 그 말을 듣고서 나는 꽤 오랫동안 생각했는데, 그때는 이미 콜럼버스에 대한 존경심이 노르만인에게로 넘어가는 그런 생각은 아니었다. 여담이지만, 당시에 나는 창조론이라는 것에 대해 어떤 초보적인 관심이 있었고, 때에 마침 받은 고등학교 철학 교과서의 '신의 존재에 대한 우주론적 증명'¹이라는 것을 꽤나 열심히 생각하고 있었던 터라... 나는 당시 어떤 근원에 대해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어쩌면 노르만인 이전에 누군가가 '신대륙'을 발견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고, 또 그 이전에도 누가, 또 그이전에도 누가... 이런 생각의 끝은... 바로 거기 사는 사람들! 콜럼버스든 노르만인이든 또 누구든 그들이 발견하기 전에 거기 사는 사람이 분명히 있었던 것이 문득 생각났던 것이다.

그러고 나서 발견한 것이 콜럼버스를 비하하는 글이었다. 그 글에서는 콜럼버스가 빠른 두뇌회전과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는 목숨까지 거는 배포를 바탕으로한 출세욕을 가진 속물이라는 것이었다. 실제로 그는 스페인 왕실에 '신대륙'을 발견하는 조건으로 기사 작위와 'Don'이라는 귀족 호칭과 '대양제독'의 호칭, 그리고 '서인도 제도'의 총독과 발견한 땅의 제독자리를 줄 것을 요구했다. 게다가 향료와 황금의 1/10을 달라고까지. 그러나 콜럼버스가 발견한 '신대륙'에는 향료도 황금도 없었다. 그는 스페인왕실로 이런 서신을 보냈다. "이곳에는 성(聖) 삼위일체의 이름으로 팔 수 있는 노예가 있습니다. 폐하께서 명령만 내리신다면 원주민 모두를 아주 쉽게 노예로 보낼 수 있습니다. 이곳 사람들은 전혀 무기를 다룰 줄 모릅니다." 그래야 자신이 발견한 땅의 가치가 인정되는 거니까.


1492Miles라는 이름의 브랜드가 있다. 그 회사의 홍보 컨셉은 대략 이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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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92란 COLUMBUS가 AMERICA 대륙을 발견한 해로서 탐험가의 도전정신을 상징하며 거리단위인 'MILES'와 결합하여 진취적인 모습과 실용적이며 편안한 AMERICAN STYLE을 추구한다.

IMAGE AMERICA의 상징인 자유 속에서 젊음이 나타내는 편안하고 깨끗하고 심플한 이미지의 캐주얼을 추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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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럼버스의 도전정신? 거리단위는 어째서 Miles라야 할까? 편안한 아메리칸 스타일? 아메리카의 상징인 자유? '도전' '자유' '편안'은 나도 좋아하는 말들이다. 그런데도 왜 이리 거부감이 드는 것일까? 어머니 대지를 사고파는 서구출신 미국인들에게만 아메리카가 자유로운 곳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 곳에 원래 있던 '원주민'들은 지금 그 곳에서 자유를 누리지 못하고 있다. 그렇다면 그 자유는 가짜인 것이다. 도전? '원주민'들이 본래의 자기 자리를 찾으러 '도전'한다면? 그건 순식간에 '도전'이 아니라 '반란'이 되어버릴 것이다. 편안? 인디언 보호구역에서는 인디언들이 편할까?... 노암 촘스키Noam Chomsky는 1993년 『501년 정복은 계속된다 Year 501: The Conquest Continues라는 책을 썼다. 1993-501=1492이다.


얼마 전, 학교의 가을 정기전엘 응원하러 갔더니 동료들이 모두 1492Miles의 손수건(?)을 손에 감고, 두건으로 쓰고, 목에 휘감고 있었다. 웬일일까. 아마 홍보차 나눠줬겠지... 1492Miles의 물결 속에서 박두진의 「해야」를 부르는 그 모습은 안타깝다못해 처연해보였다.(이것은 어떤 포스트콜로니얼리즘적인 것에 바탕을 둔 생각은 아니다. 사이드Edward Said의 오리엔탈리즘을 집에 사두고도 아직 읽지 못한 나는 거기에 어떤 빚을 지고 있다고 느끼기는 하지만, 이건 순전히 내가 갖고 있는 생각일 뿐이다.)

이를테면 이런 생각을 해보았던 것이다, 나는. 일본에서 '1910里' 따위의 브랜드가 유행하고 있다는 소식을 우리가 듣는다면 어떻게 될까? 모르긴 해도, 아마 1492Miles에 그토록이나 열광했던 바로 그 사람들이 보다 더 대한민국의 열성신도가 되어 일본을 매도하고 일본열도가 가라앉기를 100일 기도하며, 일본의 수십개 화산이 동시 폭발하기를 바라 108배를 드릴 것이 틀림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