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역사에 많은 관심을 갖는다. '과거는 현재의 거울'이라거나 '역사는 현재와 과거의 끊임없는 대화'라는 말에서 볼 수
있듯이, 우리가 역사에 갖는 관심은 그것이 어떤 형태로든 현재와 관련이 있고, 현재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게다가 생각해보면 역사는 참 재미있는 소재다. 때문에 우리 문학사에서 역사 소설이 차지하는 비중은 크다. 우리 나라 최초의 전업작가라는 이광수도 역사소설에 손을 대었고, 김동인도 그랬다. 벽초 홍명희는 『林巨正(임꺽정)』을 썼고 황석영은 『장길산』을 썼다. 특히 『임꺽정』과 『장길산』은 야담野談운동의 영향을 직·간접으로 받아 쓴 것이어서 역사를 소재로 한 문학에 대한 대중의 관심이 아주 높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근래에는 TV 드라마의 하나로 사극史劇 붐이 일고 있다. 『용龍의 눈물』, 『왕王과 비妃』, 『태조太祖 왕건』, 『허준』, 『여인천하女人天下』 등은 지금 가장 인기를 끌고 있는 TV프로그램의 하나다. 왜 이런 사극이 인기를 끌고 있을까? 왜 대중은 역사를 소재로 한 문학을 좋아할까?
1. 역사소설/사극? 역사소설/사극?
사실, 역사소설이나 사극을 잘 만들기는 쉽지 않다. 그것은 역사와 꼭 그대로여서는 재미가 없다. '양녕대군의 기행'이나, '세조의 왕위 찬탈' 같은 것들은 이미 우리가 들어서 알고 있는 내용이기 때문이다. 또, 역사소설/사극은 역사와 동떨어진 것이어서도 안 된다. 제대로 된 고증을 통해 당시를 제대로 구현해 내야한다. (이상섭의 『문학비평용어사전』(민음사)의 "역사소설歷史小說historical novel" 항목에 따르면 역사소설은 <시대배경과 사건은 실제 역사에서 따오되 중요 인물은 그 시대에 살았음직한 가상의 인물인 것>과 <역사상의 위인을 주인공으로 하여 한 역사적 시대와 사건을 역사적 기록에 되도록 부합되도록 재구성한 이른바 정사소설(正史小說)>로 나뉜다. 이 중, 정사소설의 경우에는 <역사상의 위인들이 주인공이 되는 만큼, 작가는 역사적 기록을 면밀히 검토하여 한 시대 한 인물을 재구성>해야 한다.)
이러한 역사소설/사극의 특성은 그것이 단지 역사일 뿐 아니라 하나의 '문학 작품'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기 때문에, 역사소설/사극은 그것들을 단지 '역사'의 하나로만 생각하는 역사가나 일반인의 생각과 맞지 않을 경우가 많다. 이들은 역사소설/사극이 '철저한' 고증으로 사실과 다른 것이 없어야 한다는 입장인 경우가 종종 눈에 띄지만, 역사 소설이나 사극은 실은 그렇지 않을뿐더러 그래서도 안 된다. 때문에 다음과 같은 지적은 별로 의미가 없다.
이에 대한 책임 프로듀서의 답변대로 <누가 동생이냐보다는 두 사람이 남매지간인 것이 중요하다.> 『여인천하』는 문학작품이기 때문에 모든 것은 작품 전체의 전개와 통일성에 따라서 파악되어야 한다. 백과사전 한 번 펼쳐보면 알 수 있는 것을 작가가 몰랐을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왜 윤원형이 동생이 아니라 오빠로 나왔는지에 대해서 생각해보는 것이 오히려 옳다. 그게 아니라 역사 그대로 몰아가야 한다면, 그것은 사극이 아니라 역사 다큐멘터리가 된다. 그건 "역사스페셜"이지 『여인천하』가 아니다.
최명희의 『혼불』에는 마을의 노인이 유자광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부분이 나온다. 그야말로 야담野談이다. 유자광이 물 위를 걸었다거나, 축지법으로 하루에 몇백리를 갈 수 있다거나 하는 얼토당토 않은 얘기를 하고 있다. 서출임에도 불구하고 당대를 움직였던 인물로서의 유자광이 평민이나 천민들에게 어떻게 비쳤을까를 생각하면 이해가 가는 부분이기는 하나, 역사로서는 그야말로 일고의 가치도 없는 '거짓말'일 것이다. 하지만, 문학에서는 어떤가. 작가는 본래 '거짓말'을 업으로 하는 사람이다. 유자광의 이야기는 매우 재미있는 민담이며, 형식적인 면을 고려하여 수정하면 좋은 소설이 될 수도 있다.
2. 역사소설/사극의 교육적인 효과
또 일반적으로 나타나는 오해 중의 하나는 역사소설/사극의 목적이 '교육적인 효과'에 있다고 보는 것이다. 문학 작품에서 '교육'적 측면은 부차적인 것일 뿐이다. 없어도 관계없다. 역사소설/사극이 다른 장르에 비해 교육적 효과를 내기 쉬운 것은 사실이지만, 그게 중심은 아니라는 뜻이다.
일반인 시청자로부터 비평가, 교수에 이르기까지 사극의 '역사성'을 강조하며 그것이 '교육자'의 역할을 해주기를 바라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하지만, 사극을 만드는 목적은 그게 아니라 재미이다. 전체적으로 사극 하면 그것의 효용이나 교훈같은 생각들을 떠올리기보다는, '재미'를 위한 문학 작품으로 보아야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재미는 어디에서 오는것인가? '재미'라는 말을 '쾌감'으로 바꾸어보면 그 답은 금방 나타난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쾌감인데, 그 쾌감은 곧 카타르시스에서 비롯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詩學』의 6장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그런데, 카타르시스를 느끼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갈등conflict이 있어야 한다. 카타르시스는 갈등의 해결이나, 갈등이 파국으로 치닫는 부분에서 느낄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다음과 같은 지적은 그야말로 넌센스다.
본래 소설과 희곡은 플롯(plot, 얽어짜기)이 그 형성원리가 된다. 그런데 그 플롯은 갈등을 기본으로 하여 진행되는 것이다. 이상섭은 그의 『문학비평용어사전』 '플롯' 항목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3. 역사소설/사극에 나타나는 갈등의 양상
난세를 묘사하는 것은 문학에서의 기본이다. 왜 『삼국지』가 난세를 배경으로 하는가? 왜 『수호지』가 탐관오리가 들끓는 시대를 배경으로 하는가? 그것은 그 안에 갈등이 무궁무진하게 있기 때문이다.
소설이나 희곡 등 플롯을 그 형성원리로 하고 있는 것들은 대체로 다음과 같은 단계를 거치게 되어 있다.
① 갈등이 없는 안정된 단계
② 갈등이 나타나는 단계
③ 갈등이 심화되는 단계
④ 갈등의 극단
⑤ 갈등의 해결
⑥ 새로운 안정된 단계
이 때, ①과 ⑥은 서로 다르다. 예를 들어 호수에 물방울이 하나 떨어졌을 때, 그 물방울은 여기저기로 파문을 일으킨다. 곧 그 파문은 가라앉고 새로운 조용함이 나타난다. 하지만, 처음의 조용함과 나중의 조용함은 차이가 있는 것이다. 그 변화, 서사 문학과 극 문학은 바로 그 변화에 관심갖는 장르라 할 수 있다. 그런 변화에 가장 적합한 것 중에 하나가 역사, 그것도 난세의 역사이다. 난세는 변화가 빈번하게 일어나기 때문이다.
특히 TV 드라마는 소설보다 더 그 갈등을 내용의 원천으로 한다. TV사극의 시청률 추이를 봐도 갈등이 고조되는 시기에 시청률이 올라간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는 일이다.
소설과 극은 하나의 문학이다. 본질적으로 상상력의 소산인 이들 작품을 다른 잣대로 잰다고 하면, 역사소설과 사극은 아마 남아나지 못할 것이다. 본질적으로 문학 작품인 사극에서 갈등을 빼고 역사적 사실만을 넣으라고 한다면 남는 것은 사극이 아니라 '역사스페셜'일 뿐이다.
게다가 생각해보면 역사는 참 재미있는 소재다. 때문에 우리 문학사에서 역사 소설이 차지하는 비중은 크다. 우리 나라 최초의 전업작가라는 이광수도 역사소설에 손을 대었고, 김동인도 그랬다. 벽초 홍명희는 『林巨正(임꺽정)』을 썼고 황석영은 『장길산』을 썼다. 특히 『임꺽정』과 『장길산』은 야담野談운동의 영향을 직·간접으로 받아 쓴 것이어서 역사를 소재로 한 문학에 대한 대중의 관심이 아주 높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근래에는 TV 드라마의 하나로 사극史劇 붐이 일고 있다. 『용龍의 눈물』, 『왕王과 비妃』, 『태조太祖 왕건』, 『허준』, 『여인천하女人天下』 등은 지금 가장 인기를 끌고 있는 TV프로그램의 하나다. 왜 이런 사극이 인기를 끌고 있을까? 왜 대중은 역사를 소재로 한 문학을 좋아할까?
1. 역사소설/사극? 역사소설/사극?
사실, 역사소설이나 사극을 잘 만들기는 쉽지 않다. 그것은 역사와 꼭 그대로여서는 재미가 없다. '양녕대군의 기행'이나, '세조의 왕위 찬탈' 같은 것들은 이미 우리가 들어서 알고 있는 내용이기 때문이다. 또, 역사소설/사극은 역사와 동떨어진 것이어서도 안 된다. 제대로 된 고증을 통해 당시를 제대로 구현해 내야한다. (이상섭의 『문학비평용어사전』(민음사)의 "역사소설歷史小說historical novel" 항목에 따르면 역사소설은 <시대배경과 사건은 실제 역사에서 따오되 중요 인물은 그 시대에 살았음직한 가상의 인물인 것>과 <역사상의 위인을 주인공으로 하여 한 역사적 시대와 사건을 역사적 기록에 되도록 부합되도록 재구성한 이른바 정사소설(正史小說)>로 나뉜다. 이 중, 정사소설의 경우에는 <역사상의 위인들이 주인공이 되는 만큼, 작가는 역사적 기록을 면밀히 검토하여 한 시대 한 인물을 재구성>해야 한다.)
이러한 역사소설/사극의 특성은 그것이 단지 역사일 뿐 아니라 하나의 '문학 작품'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기 때문에, 역사소설/사극은 그것들을 단지 '역사'의 하나로만 생각하는 역사가나 일반인의 생각과 맞지 않을 경우가 많다. 이들은 역사소설/사극이 '철저한' 고증으로 사실과 다른 것이 없어야 한다는 입장인 경우가 종종 눈에 띄지만, 역사 소설이나 사극은 실은 그렇지 않을뿐더러 그래서도 안 된다. 때문에 다음과 같은 지적은 별로 의미가 없다.
의견:극중 윤원형(이덕화)이 문정왕후(전인화)의 오빠로 나오던데 역사에는 동생으로 적혀 있다.다음은 한 백과사전의 일부다.
‘윤원형:조선 전기의 문신.본관은 파평.판돈녕부사 윤지임의 아들이며,중종의 계비(繼妃)인 문정왕후의 동생이다’
(jennyjo,SBS홈페이지).
국민일보 2001년 4월 19일자.
이에 대한 책임 프로듀서의 답변대로 <누가 동생이냐보다는 두 사람이 남매지간인 것이 중요하다.> 『여인천하』는 문학작품이기 때문에 모든 것은 작품 전체의 전개와 통일성에 따라서 파악되어야 한다. 백과사전 한 번 펼쳐보면 알 수 있는 것을 작가가 몰랐을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왜 윤원형이 동생이 아니라 오빠로 나왔는지에 대해서 생각해보는 것이 오히려 옳다. 그게 아니라 역사 그대로 몰아가야 한다면, 그것은 사극이 아니라 역사 다큐멘터리가 된다. 그건 "역사스페셜"이지 『여인천하』가 아니다.
최명희의 『혼불』에는 마을의 노인이 유자광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부분이 나온다. 그야말로 야담野談이다. 유자광이 물 위를 걸었다거나, 축지법으로 하루에 몇백리를 갈 수 있다거나 하는 얼토당토 않은 얘기를 하고 있다. 서출임에도 불구하고 당대를 움직였던 인물로서의 유자광이 평민이나 천민들에게 어떻게 비쳤을까를 생각하면 이해가 가는 부분이기는 하나, 역사로서는 그야말로 일고의 가치도 없는 '거짓말'일 것이다. 하지만, 문학에서는 어떤가. 작가는 본래 '거짓말'을 업으로 하는 사람이다. 유자광의 이야기는 매우 재미있는 민담이며, 형식적인 면을 고려하여 수정하면 좋은 소설이 될 수도 있다.
2. 역사소설/사극의 교육적인 효과
또 일반적으로 나타나는 오해 중의 하나는 역사소설/사극의 목적이 '교육적인 효과'에 있다고 보는 것이다. 문학 작품에서 '교육'적 측면은 부차적인 것일 뿐이다. 없어도 관계없다. 역사소설/사극이 다른 장르에 비해 교육적 효과를 내기 쉬운 것은 사실이지만, 그게 중심은 아니라는 뜻이다.
사극에 있어서는, 어떤 그... 결국은 뭐 정의는 이긴다 뭐 이런 결말을 담고 있어서 우리 모두가 공통으로 갖고 있는 어떤 그 갈증을 충족시키는 그런 측면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무엇보다도 어떤 그 사극의 매력은 역사를 바라보는 어떤 그... 행간의 맛에 있다고 생각을 합니다.
여운연 SBS시청자위원(한국소비자연맹 사무총장)
SBS TV 4월 21일 《열린TV 시청자세상》
그렇습니다. 과거의 역사를 소재로 하고 있는 게 사극입니다. 하지만 단순히 '옛날에 이런 일이 있었다' 이것을 알려주려고 하는 게 아니라 과거의 현대적 해석을 통해서 우리 삶의 올바른 지혜를 얻고자 하는 것, 이것이 바로 사극을 만드는 목적입니다.
하재봉(문화비평가)
같은 프로그램
여자를 정말 주인공으로 해서 여인천하를 그리는 게 요즘의 여권신장하고 관련이 있는 거 같고 얼핏 보면 근사해보이지만, 실제로는 들여다보면 그렇지가 않단 말이에요. 어떻게 보면 여성의 역할을 그 순기능보다는 역기능, 난정이도 보면은 상당히 그 아주, 역사에서는 평가가 좋지 않은데, 그런 경우를 너무 부각시켜서 그 머리 두뇌회전 빠르고 임기응변 빠르고 원한을 그 갖기 위해서 그 움직이는 그런 사람으로 묘사하고 있는게 흥미는 유발할지 모르지만 교육적인 측면에서 그렇게 바람직하다고 생각은 하지 않네요.
정옥자(서울대 국사학과 교수)
같은 프로그램
일반인 시청자로부터 비평가, 교수에 이르기까지 사극의 '역사성'을 강조하며 그것이 '교육자'의 역할을 해주기를 바라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하지만, 사극을 만드는 목적은 그게 아니라 재미이다. 전체적으로 사극 하면 그것의 효용이나 교훈같은 생각들을 떠올리기보다는, '재미'를 위한 문학 작품으로 보아야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재미는 어디에서 오는것인가? '재미'라는 말을 '쾌감'으로 바꾸어보면 그 답은 금방 나타난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쾌감인데, 그 쾌감은 곧 카타르시스에서 비롯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詩學』의 6장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연민과 공포를 환기시키는 사건에 의하여 바로 이러한 감정의 카타르시스를 행한다.
아리스토텔레스,『시학』, 천병희 옮김, 문예출판사, 47쪽.
그런데, 카타르시스를 느끼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갈등conflict이 있어야 한다. 카타르시스는 갈등의 해결이나, 갈등이 파국으로 치닫는 부분에서 느낄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다음과 같은 지적은 그야말로 넌센스다.
그러나 역시 가장 큰 문제는, 『여인천하』 뿐만 아니라 사극의 전반적인 문제라고 볼 수가 있는데요, 소재 자체를 궁중의 암투나 모략이 난무하는 난세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특히 『여인천하』의 경우 드라마에 등장하는 여인들을 통해서 그러한 권력다툼을 더욱 부각시켜 보이는데요. 흥미를 유발할 수는 있겠지만 이를 지켜보는 시청자 입장에서는 역사 속 여성들에 대한 편협된 시각들을 갖게 될 수도 있습니다.
하재봉(문화비평가)
같은 프로그램
제일 문제가, 평화의 시대를 못그려내요, 사극이. 전부 전쟁의 시대나 투쟁의 그런 관계·암투 그런 것만 잘 그려내지, 정말 그 평화로운 세상에 인간들이 어떻게 상호보완을 하고, 서로 협조하고, 서로 어떻게 행복하게 사는가, 그런 거는 거의 사극이 다루지를 못하고 있어요, 지금.
자극적이고 오락적이고 이래야만 사람들이 보고, 시청률을 높일 수 있다는 그런 선입견. 근데 사실은 그건 선입견이고, 어떻게 보면 관습이고, 오래된 그런 어떤 구투인데, 사실 그럴 필요 없다고 봅니다. 오히려 사극이 정말 인간들이 어떻게 사는게 정말 인간답고, 정말 잘 사는가 그런거 얼마든지 보여줄 수 있는데...
정옥자(서울대 국사학과 교수)
같은 프로그램
본래 소설과 희곡은 플롯(plot, 얽어짜기)이 그 형성원리가 된다. 그런데 그 플롯은 갈등을 기본으로 하여 진행되는 것이다. 이상섭은 그의 『문학비평용어사전』 '플롯' 항목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문학에서 특별히 얽어짜고자 하는 사람의 행위는 비상한 행위, 특별한 정신적 및 육체적 체험, 모험 등이다. 이러한 행위는 갈드으이 요소를 내포한다. 부모의 반대를 무릅쓰고 (이것이 갈등이다)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하는 이야기, 원수와 대적하다가 (역시 갈등) 예견하지 못한 불운으로 말미암아 실패하는 이야기, 이것을 택할까 저것을 택할까 번민하다가 (마음의 갈등) 하나를 택하는 이야기 등등은 모두 비상한 행위에 관한 것이고, 사람들은 그러한 행위를 통하여 사람다운 가치를 실현한다. 그러한 갈등이 없으면 얽어짤 것이 못된다.(강조 인용자)
이상섭,『문학비평용어사전』, 민음사, 283쪽.
이야기의 첫 문장에서부터, 우리는 극적 상황이 펼쳐지는 것을 본다: 어떤 사람이 어떠한 갈등에 엮이게 되는 것이다. 무엇보다, 이 인물은 먹여 살릴 아이들이 있는 가난한 사람으로, 세계와의 갈등에 처해 있다; 곧, 우리는 그가 신과 악마와의 갈등에 함께 빠지는 것을 본다. 소설에서 극적 상황은 의지와 욕망과 권력의 어떠한 충돌 속에서도 발생한다--그것이 인물과 인물 간의 갈등이든, 인물과 사회 간의 갈등이든, 인물과 어떤 자연적 힘 사이의 갈등이든, 또는 "대부 죽음Godfather Death"에서처럼 인물과 어떤 초자연적인 존재와의 갈등이든 말이다.
From the opening sentence of the tale, we watch the unfolding of a dramatic situation: a person is involved in some conflict. First, this character is a poor man with children to feed, in conflict with the world; very soon, we find him in conflict with God and with the Devil besides. Drama in fiction occurs in any clash of wills, desires, or powers―whether it be a conflict of character against character, character against society, character against some natural force, or, as in "Godfather Death," character against some supernatural entity.
X. J. Kennedy and Dana Gioia eds., Literature: An Introduction to Fiction, Poetry, and Drama, 7th ed. (NY:Addison Wesley Longman), p.9. (강조는 원문)
3. 역사소설/사극에 나타나는 갈등의 양상
난세를 묘사하는 것은 문학에서의 기본이다. 왜 『삼국지』가 난세를 배경으로 하는가? 왜 『수호지』가 탐관오리가 들끓는 시대를 배경으로 하는가? 그것은 그 안에 갈등이 무궁무진하게 있기 때문이다.
소설이나 희곡 등 플롯을 그 형성원리로 하고 있는 것들은 대체로 다음과 같은 단계를 거치게 되어 있다.
① 갈등이 없는 안정된 단계
② 갈등이 나타나는 단계
③ 갈등이 심화되는 단계
④ 갈등의 극단
⑤ 갈등의 해결
⑥ 새로운 안정된 단계
이 때, ①과 ⑥은 서로 다르다. 예를 들어 호수에 물방울이 하나 떨어졌을 때, 그 물방울은 여기저기로 파문을 일으킨다. 곧 그 파문은 가라앉고 새로운 조용함이 나타난다. 하지만, 처음의 조용함과 나중의 조용함은 차이가 있는 것이다. 그 변화, 서사 문학과 극 문학은 바로 그 변화에 관심갖는 장르라 할 수 있다. 그런 변화에 가장 적합한 것 중에 하나가 역사, 그것도 난세의 역사이다. 난세는 변화가 빈번하게 일어나기 때문이다.
특히 TV 드라마는 소설보다 더 그 갈등을 내용의 원천으로 한다. TV사극의 시청률 추이를 봐도 갈등이 고조되는 시기에 시청률이 올라간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는 일이다.
소설과 극은 하나의 문학이다. 본질적으로 상상력의 소산인 이들 작품을 다른 잣대로 잰다고 하면, 역사소설과 사극은 아마 남아나지 못할 것이다. 본질적으로 문학 작품인 사극에서 갈등을 빼고 역사적 사실만을 넣으라고 한다면 남는 것은 사극이 아니라 '역사스페셜'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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