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 지하철 참사는 과장을 하나도 보태지 않고 '아비규환阿鼻叫喚'이라는 말을 직접 쓸 수 있을 정도의 큰 재난이었다. 시신은 뭉개져 몇
구인지도 알 수 없을 정도로 탔다. 뼈속까지 탄 시신은 유전자 감식을 통해서도 신원 확인이 어려울 수 있다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유족들의 반응도 슬픔이라는 말보다는 오열이라는 말이 어울릴 것이다.
내가 아는 친인척들, 친구들은 사고를 당한 사람이 없다. 그런 사람이 있다면 아마 이 글을 쓰지 못할 것이다. 그렇지만 나는 이 글을 써야 한다고, 꼭 써야한다고 느꼈다. 방화범을 어떻게 죽이면 딱 좋을까를 이야기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그랬다. 방화범은 나쁜 사람이라는 1차원적인 발상만이 떠돌고 있다.
신문을 보니 방화범이 신병(뇌졸중)을 앓기 전까지는 성실하고 착한 사람이었다고 한다. 병이 그를 그토록 충동적으로 만든 것일까? "방화범이 병을 앓기 전에 성실하고 착한 사람이었다"는 기사는 자칫 그를 '동정'하게 만들 수 있다는 점에서 위험한, 1차적 발상에 사로잡힌 기사다. 그런 기사는 사회적 차원에서 보아야만 하는 이 사건을 개인적 차원에 머물게 할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대체로 1차적인 발상은 "그는 나쁜 사람이다"나 "그도 불쌍한 사람이다"에서 머물고 있는 듯하다.
하지만 우리의 인식은 여기서 한 발짝 더 나가야 마땅하다. 모든 인식은 세계를 향해 뻗어야 하지만 그 종착지는 항상 인식하는 주체 스스로가 되어야 할 것이다. 그런 인식만이 "지하철 참사의 가해자는 나[我]다"라고 말할 수 있게 해 줄 것이다. 우리는 방화범이 장애인이었다는 점을 생각해야만 할 것이다.
매일 일어나는 살인사건에 우리의 감각이 무뎌져서인지 자주 간과되는 사실이지만, 사람이 사람을 죽인다는 것은 그리 만만한 마음가짐으로 되는 일이 아니다. 한 장애인이 사람들과 함께 죽기를 바랄 정도였다면 그에 대한 사회적인 억압이 얼마나 컸는지 짐작하기는 오히려 쉬운 일일 것인데도 그러한 고려는 전혀 되고 있지 않다. 여기서 그가 원래 (비장애인이던 시절에) '착한' 사람이었는지 아닌지는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그가 원래 범죄를 잦게 저질렀던 사람이라고 해서 장애인에 대한 우리의 억압이 면죄부를 받게 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2년 전, 9.11 테러가 일어났을 때를 상기해보자. 세계무역센터 빌딩이 무너졌을 때는 양적 규모면에서 지금보다 더 큰 인명피해가 일었다. 대구 참사는 130여명의 사망자를 낳았지만 9.11 테러 당시에는 3000여명이 죽었다. 그러나 당시 많은 사람들이 테러가 옳지 못하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그 테러를 부른 것은 테러범이 아니라 패권주의 미국이었다는 사실을 적절하게 인식해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남의 집안 일이었기 때문에 냉정해질 수 있었던 것일까?
장애인 인권운동이 활발하게 벌어지면서 우리 사회에서 법적, 제도적인 장애인권은 미약하나마 나아지는 모습을 보이고 있지만 장애인의 피부에 직접 닿는 사람들의 눈길과 편견은 나아지는 바가 거의 없다. 솔직히 나만 해도 친분이 없는 장애인과 함께 있으면 비장애인과 있는 것과 달리 불편하고, 심지어 무서운 심정까지 이는 정도다. 혼자만의 경험은 아닐 것이다.
아마 방화범은 장애인으로 살아오는 동안 나처럼 편견에 사로잡힌 눈길을 자주 느끼곤 했을 것이다. 우리 중에 누가 그 장애인을 탓할 수 있을까? 나는 확신을 가지고 말할 수 있다. 나는 그 장애인에게 빚이 있다고.
사람이 백 삼십 명이나 죽었는데 무슨 소리냐고 할 지 모른다. 문두에서 밝혔듯이 나도 내가 아는 사람이 그 사건을 당했다면 이런 글을 쓸 수 없었을 것이다. 만약에 그랬다면 나도 그 방화범을 화형하라고 오열했을지 모른다. 그렇지만 이런 글이 필요한 이유는 장애인에 대한 편견이 이 사건의 원인이며 그것이 사라지기 전에는 비슷한 류의 범죄 우려가 항상 있을 것이라는 것을 알아야 하기 때문이다.
내가 아는 친인척들, 친구들은 사고를 당한 사람이 없다. 그런 사람이 있다면 아마 이 글을 쓰지 못할 것이다. 그렇지만 나는 이 글을 써야 한다고, 꼭 써야한다고 느꼈다. 방화범을 어떻게 죽이면 딱 좋을까를 이야기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그랬다. 방화범은 나쁜 사람이라는 1차원적인 발상만이 떠돌고 있다.
신문을 보니 방화범이 신병(뇌졸중)을 앓기 전까지는 성실하고 착한 사람이었다고 한다. 병이 그를 그토록 충동적으로 만든 것일까? "방화범이 병을 앓기 전에 성실하고 착한 사람이었다"는 기사는 자칫 그를 '동정'하게 만들 수 있다는 점에서 위험한, 1차적 발상에 사로잡힌 기사다. 그런 기사는 사회적 차원에서 보아야만 하는 이 사건을 개인적 차원에 머물게 할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대체로 1차적인 발상은 "그는 나쁜 사람이다"나 "그도 불쌍한 사람이다"에서 머물고 있는 듯하다.
하지만 우리의 인식은 여기서 한 발짝 더 나가야 마땅하다. 모든 인식은 세계를 향해 뻗어야 하지만 그 종착지는 항상 인식하는 주체 스스로가 되어야 할 것이다. 그런 인식만이 "지하철 참사의 가해자는 나[我]다"라고 말할 수 있게 해 줄 것이다. 우리는 방화범이 장애인이었다는 점을 생각해야만 할 것이다.
매일 일어나는 살인사건에 우리의 감각이 무뎌져서인지 자주 간과되는 사실이지만, 사람이 사람을 죽인다는 것은 그리 만만한 마음가짐으로 되는 일이 아니다. 한 장애인이 사람들과 함께 죽기를 바랄 정도였다면 그에 대한 사회적인 억압이 얼마나 컸는지 짐작하기는 오히려 쉬운 일일 것인데도 그러한 고려는 전혀 되고 있지 않다. 여기서 그가 원래 (비장애인이던 시절에) '착한' 사람이었는지 아닌지는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그가 원래 범죄를 잦게 저질렀던 사람이라고 해서 장애인에 대한 우리의 억압이 면죄부를 받게 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2년 전, 9.11 테러가 일어났을 때를 상기해보자. 세계무역센터 빌딩이 무너졌을 때는 양적 규모면에서 지금보다 더 큰 인명피해가 일었다. 대구 참사는 130여명의 사망자를 낳았지만 9.11 테러 당시에는 3000여명이 죽었다. 그러나 당시 많은 사람들이 테러가 옳지 못하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그 테러를 부른 것은 테러범이 아니라 패권주의 미국이었다는 사실을 적절하게 인식해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남의 집안 일이었기 때문에 냉정해질 수 있었던 것일까?
장애인 인권운동이 활발하게 벌어지면서 우리 사회에서 법적, 제도적인 장애인권은 미약하나마 나아지는 모습을 보이고 있지만 장애인의 피부에 직접 닿는 사람들의 눈길과 편견은 나아지는 바가 거의 없다. 솔직히 나만 해도 친분이 없는 장애인과 함께 있으면 비장애인과 있는 것과 달리 불편하고, 심지어 무서운 심정까지 이는 정도다. 혼자만의 경험은 아닐 것이다.
아마 방화범은 장애인으로 살아오는 동안 나처럼 편견에 사로잡힌 눈길을 자주 느끼곤 했을 것이다. 우리 중에 누가 그 장애인을 탓할 수 있을까? 나는 확신을 가지고 말할 수 있다. 나는 그 장애인에게 빚이 있다고.
사람이 백 삼십 명이나 죽었는데 무슨 소리냐고 할 지 모른다. 문두에서 밝혔듯이 나도 내가 아는 사람이 그 사건을 당했다면 이런 글을 쓸 수 없었을 것이다. 만약에 그랬다면 나도 그 방화범을 화형하라고 오열했을지 모른다. 그렇지만 이런 글이 필요한 이유는 장애인에 대한 편견이 이 사건의 원인이며 그것이 사라지기 전에는 비슷한 류의 범죄 우려가 항상 있을 것이라는 것을 알아야 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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