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08 4

나침반없는 좌우와 오락가락하는 정부와 언론

1 얼마전 한총련 학생들의 미군 장갑차 점거 사태가 있었다. 뉴스를 보면서 좌우를 막론하고 우리의 가슴은 수천년래 그래왔던 대로 철렁하고 다시 내려앉았다. 정부는 '한총련 합법화 논의'의 백지화를 검토했고, 다음날 부랴부랴 '합법화'는 변함없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강금실 법무장관은 여전히 '신중론'을 폈다. 그것은 안보의 두려움을 반드시 느꼈을 보수·우파들과 전략적으로나 인정人情적으로 안타까움을 느꼈을 진보·좌파들이 함께 슬퍼할 만한 사건이었다. 하지만, 다만 추측일 뿐이지만, 어떤 면에서 접근해보면 이것은 한총련이 지휘체계의 일관성을 잃었을 것이라는 생각을 가능케 하기도 한다. 미군 장갑차 점거하는 수준의 행동은 그들에게 실제적으로나 상징적으로 아무 의미가 없는 행동들이다. (과거 '삼민투'의 미문화원..

두 권의 문장론 책: 이태준『문장강화』, 김기림『문장론신강』

상허 선생의『문장강화』는 '文章强化'가 아니라 '文章講話'다. 초판(1940)으로 치면 63년, 증정판增訂版(1947)으로 쳐도 50년은 족히 넘게 오래된 이 책을 다시 읽은 이유는 여러 미디어에서 꽤나 칭찬을 해댔기 때문이다. 그리고 일기에라도 남겨두는 이유는 충분히 그 칭찬에 값하는 것 같이 여겨지기 때문이다. 사실 이 책에 대한 칭찬은 해제를 쓴 임형택 교수가 다 한 셈이니, 무엇보다 이 책은 설명하는 글이 아니라 보여주는 글인 것이다. 부록의 예문 색인만 네 쪽이 되니 그것은 수치로도 증명되지만 어느 쪽이고 책을 펼쳐봐도 예문이 없는 장면은 볼 수 없다시피 하다. 어느 곳은 아주 예문이 왼쪽-오른쪽 두 쪽을 꽉 채우고 있기도 하다. 임 교수는 "예문의 풍부함은 신문학 20년이 도달한 우수한 성과를..

사랑의 확장: 미야자끼 하야오《바람 계곡의 나우시카》

『독일인의 사랑』의 마리아는 호메로스의 나우지카에서 사랑의 표본을 찾는다. 「옛날에는 달랐었던 것 같아요. 그렇지 않다면, 어떻게 호머가 나우지카 같은 사랑스럽고 건강하며 섬세한 여인을 만들어 낼 수 있었겠어요? […] 오늘날의 시인이라면 나우지카를 여자 베르테르로 만들어 버렸겠지요 […] 사람들은 오로지 취하게만 하는 묘약만 알 뿐, 생기를 주는 사랑의 샘물을 모르는 걸까요?」 -막스 뮐러『독일인의 사랑』신역판, 차경아 옮김, 문예출판사, 1987, 84-85쪽. 맥락은 다르지만 미야자끼의 애니메이션에서도 그 본질적인 것은 다르지 않다. 결국은 '사랑없음'이 모든 문제의 발단이고 '사랑'이 모든 문제의 해결책이다. 사랑이 진부한가? 아니다. 사랑이 진부하다면 성교性交도 식사食事도 수면睡眠도 모두 진부하..

극장전 2003.08.06

알레고리 없이 '워터십 다운' 읽기: R. Adams『워터십 다운의 열한 마리 토끼』

다른 많은 판타지 소설이 그렇듯이, 리처드 애덤스의 『워터십 다운의 열한 마리 토끼』도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려달라는 아이들의 요구에서 시작된다. 애덤스의 아이들은 "'지금까지 누구도 하지 않은' 길고 재미있는 이야기"를 원했다. 아이 때는 누구나 이야기를 원한다. 삶의 언어, 언어로 표현된 삶이 인간에게 본래적인 즐거움을 가져다준다는 증거이다. 허구虛構를 뜻하는 '소설fiction'이라는 말에 환상幻想을 뜻하는 '판타지fantasy'라는 말이 덧붙여졌을 때, 그 말의 파괴력은 절정에 달한다. 그것은 그야말로 '거짓'의 극한極限이다. 그런데, 놀라워라, 판타지 소설의 독자는 그 '거짓'을 '거짓' 그대로 믿게 된다. 이름에서 보자면 허구의 끝으로 달려가는 것이 판타지소설인데도 판타지소설의 독자는 그것을 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