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능철이라 그런가. 다시 많은 사람들이 스스로 죽었다. 덕분에 TV와 신문은 참 오래간만에 한목소리로 "사실 그동안 우리나라 지하철은 너무 위험했다"고 입을 모으고 있다. TV와 신문의 특징은 항상 사고가 일어난 다음에 "사실 그동안 우리나라 …… 너무 ……했다"라고 하는 것이지만, 어쨌든 시민들은 돈내고 이용하는 지하철이 전혀 안전하지 않음을 이번에 몸으로 느끼고는, 그런 언론의 주장에 동조하는 모양이다.맞다.
맞는 말이긴 하다. 우리나라 지하철 타는곳은 너무 위험하다. (바다 바깥의 사정이 어떠한지 비교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땅이 좁아서, 또 지형적인 원인으로 해서 타는곳이 굽어있는 경우가 많은 것도 중요한 이유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또, 이용하는 사람들이 지나치게 많은 탓도 있을 것이다. 위험하다.
그런데, 최근 일어난 지하철 사고와 관련한 이야기는 모두가 울타리fence나 보호문짝screen door에만 집중된 양상을 보인다. 지하철 타는곳의 사정이 워낙 좋지 않아 이런 주장까지 나오게 되었을 것이다. 아니면, 사당역에는 이미 울타리가, 신길 역에는 이미 보호문짝이 설치되어 있는 것으로 봐서, 이번 사건들을 계기로 그간 때때로 있어왔던 이와같은 보호시설에 대한 필요성의 자각이 넓게 퍼졌다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울타리와 보호문짝이 모든 지하철역에 설치된다면 지하철 사고는 줄어들 것이다. 하지만 이와 같은 생각은 지금의 지하철 타는곳보다도 더 위험하다. 치명적이다.
지하철 사고에는 앞서 이야기한 지하철 타는곳 자체가 가진 위험성 때문에 생긴 안전사고가 있고, 스스로 죽기 위해 지하철 선로로 뛰어들어 생기는 사고가 있다. 울타리와 보호문짝은 분명히 이와 같은 두 가지 사고를 모두 막아줄 것으로 기대된다. 지하철을 이용하는 시민들은 보다 안전하고 쾌적한 지하철을 이용할 수 있을 것이다. 심지어 우리의 생각으로는 보호시설만 구비되면 지하철 사고는 하나도 없을 것도 같다. 하지만 그것은 추측에 불과한 것으로, 실제로는 모든 사고는 여전히 미래형으로 있을 것이다.
안전사고의 경우 보호시설은 큰 역할을 할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보호시설에 초점을 맞춘 주장은 큰 약점을 갖고 있다. 우리가 이때껏 겪어왔던 사고들은 결코 보호시설이 갖춰지지 못했기 때문에 일어난 것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그 주장은 은폐하고 있다. 보호시설만이 문제라는 주장으로는, 가령 다음과 같은 통계자료를 설명할 수 없다.
우리나라 교통사고 추이 1995-2002 (필요한 부분만 발췌, 표현양식 변경)
http://www.kotsa.or.kr/data_room/content09_1_lnk2.htm 교통안전공단KOSTA
자료에서 보다시피 1999년 지하철 사고건수는 전년도 대비 63.6퍼센트나 늘어났다. 시기를 잘 생각해보면 이 표가 지시하는 바를 잘 알 수 있다. 1998년부터 우리나라는 소위 IMF 시대를 맞았고, 그때 수많은 기사들이 회사를 그만두어야 했던 것이다. 특히 승무원 두 명이 타게 되어있는 1~4호선 지하철에 지금은 한 명의 승무원만이 타게 되면서 문제가 생긴 것으로 파악된다. 그것은 근본적인 해결책없이 꾸준히 계속되었던 '1인승무원제'에 따라 1999년 이후 지하철사고건수가 더 줄지 않고 50-60건을 오르내리는 것에서 알 수 있다.
하드웨어에 모든 책임을 돌리는 것은 지나치게 즉물적卽物的이다. 잘 생각해보자. 울타리나 보호문짝이 설치된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제대로 관리된다는 보장이 있는가? 그것들을 잘 관리하기 위해서는 정기적인 점검이 철저하게 이루어져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지금보다 더 많은 인원이 투입되든가, 아니면 지금의 인원이 더 많은 일을 해야 한다. 그것을 우리가 기대할 수 있겠는가? 울타리나 보호문짝이 모든 지하철역 타는곳에 설치된다고 하더라도, 그 30-40년 뒤에 "지하철 스크린도어 낙후, 관리 소홀 심각. 어제 또 1명 사고로 사망" 류의 기사가 나오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있는가? 하드웨어를 돌리기 위해서는 결국 소프트웨어가 필요하다. 궁극적으로는 사람이 필요하다. 시민의 안전은 안중에도 없이 다만 경제적인 이유만을 가지고 1인승무원제를 무턱대고 도입하는 수준의 회사가, 과연 이를 잘 수행할 수 있을 것인가?
반면, 자살 사고의 경우는 더욱 심각하다. 보호시설이 지하철 자살사고를 줄여준다는 주장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맞다. 특히 보호문짝을 실치하면, 사진에서 보듯이, 지하철 선로로 뛰어들어 자살하는 끔찍한 상황은 더이상 시민들이 보지 않아도 될 것으로 예상된다. 그러나, 보이지 않으면 해결된 것일까? 자살과 지하철은 실상 아무 연관이 없다. 스스로 죽고자 하는 사람은 자살하기 위해서 지하철에 뛰어든 것이지 "지하철이 거기 있기 때문에 나는 뛰어든다"는 식으로 뛰어든 것이 아니다. 때문에 보호시설 설치 여부와 관계없이 자살은 계속될 것이다. 지하철 선로에서의 자살이 다른 곳에서의 자살로 바뀐 것 외에는 달라진 것이 없다. 아니, 오히려 문제는 더 심각해진다. 누군가 지하철에서 '끔찍한 자살사고'를 일으키면, 거기서 사람들은 우리 사회의 어딘가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분명히 느낄 수 있다. 사회의 병病을 알 수 있는 아픔이 있는 셈이다. 그러나 자살이 끔찍하게 표면적으로 드러나지 않게 되면 사람들은 병들었음에도 그것을 느낄 수 없는 일종의 불감증 상태에까지 가고 말 것이다. 이성복의 「그날」은 아픔을 느끼지 못하는 상태가 사실은 얼마나 고통스러운 상태인지를 매우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
이성복은, 다른 글에서, '아픔'에 대한 인식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아울러 말하고 있다. "아픔은 <살아 있음>의 징조이며, <살아야겠음>의 경보"라고 그는 말한다. 더구나, 아픔 곧 "자신이 병들어 있음을 아는 것"은 치유는 아니더라도 "치유의 첫 단계"일 수는 있다고 강조한다. 그러고 나서 최근의 지하철 사고를 20년 전에 미리 경고한 듯이, "우리가 아픔만을 강조하게 되면, 그 아픔을 가져오게 한 것들을 은폐하거나 신비화하게 될지도 모른다"라고 쓰고 있다. 비록 이성복의 글에서 '아픔'은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비교적 개인적이고 정신적인 것에 국한되어 있긴 하지만, 우리가 이를 사회적 차원으로 확대시키는 것이 불가능한 것은 아닐 것이다. 그것은 이성복이 그 사회의 문맥contexte을 받아들여 자신의 글과 시 속에 잘 체현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고, 지금에 이르러 사회는 사람과 마찬가지로 하나의 유기체, 거대한 유기체corps organique로 볼 수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렇게 본다면 이성복의 이 글과, 앞서 인용한 「그날」과 최근 일어난 일련의 지하철 자살사고가 겹쳐서 떠오를 수 있을 것이다.
주목할 점은, 예전에 있었던 '자살사이트 열풍'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과 이번 지하철 자살 사고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은 놀랍도록 닮은 데가 있다는 것이다. 오금택 씨는 당시의 사정을 짤막한 만화 한 쪽으로 그리고 있다. 그는 당시에 이미 씨니피앙signifiant이 아니라 씨니피에sinifié에 주의를 기울이는 희유한 인식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가 희유한 인식을 가진 것이 아니라 우리가 TV와 언론들이 미리 판단내린 것을 비판의식 없이 그저 받아들인 것이다.
동아일보 2001년 2월 28일 오금택
어떤이는 말할지 모른다. 지하철 선로에서의 끔찍한 자살사건을 시민들이 보지 않게 하는 것도 중요한 일이라고. 옳다. 그러나, 지하철 선로에서의 끔찍한 자살사건을 보기 싫은 사람뿐 아니라, 죽기 싫은, 그러면서도 삶이 그를 죽음으로 내몬, 그래서 지하철 선로에서 끔찍하게 죽을 수밖에 없었던 바로 그 사람도 시민이라는 사실을, 그는 간과하고 있다. '끔찍한 자살사건'을 보던 사람이 언제 또 '끔찍한 자살사건'을 스스로 연출하게 될지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러므로 언발에 오줌누기 식으로 자살을 은폐하는 것보다는 근본적인 해결책을 찾아야 할 것이다. (자살의 원인 규명은 수사를 위해서만 필요한 것이 아니다.)
시대는 점차 판단능력을 상실해가고 있다. TV의 시대, 인터넷의 시대에 비판력을 기대할 수 있겠는가? 사람들은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만을 보는데, TV와 인터넷이 오히려 그런 상황을 더욱 조장하고 있다. 우리는 이제 어디서 들은 것이든 비판적으로 받아들이기를 배워야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아는 일이다. 많이 알면 알수록 비판적 수용의 단계는 더욱 세련되게 된다. 가장 중요한 앎은 물론, 자기자신에 대한 앎과 자신이 몸담은 이 사회에 대한 앎이다. 지금은 즉물의 시대, 근본을 생각하는 마음이 아쉬운 시절이다.
맞는 말이긴 하다. 우리나라 지하철 타는곳은 너무 위험하다. (바다 바깥의 사정이 어떠한지 비교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땅이 좁아서, 또 지형적인 원인으로 해서 타는곳이 굽어있는 경우가 많은 것도 중요한 이유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또, 이용하는 사람들이 지나치게 많은 탓도 있을 것이다. 위험하다.
사당역에 설치된 울타리 (동아일보 2003년 11월 18일)
그런데, 최근 일어난 지하철 사고와 관련한 이야기는 모두가 울타리fence나 보호문짝screen door에만 집중된 양상을 보인다. 지하철 타는곳의 사정이 워낙 좋지 않아 이런 주장까지 나오게 되었을 것이다. 아니면, 사당역에는 이미 울타리가, 신길 역에는 이미 보호문짝이 설치되어 있는 것으로 봐서, 이번 사건들을 계기로 그간 때때로 있어왔던 이와같은 보호시설에 대한 필요성의 자각이 넓게 퍼졌다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울타리와 보호문짝이 모든 지하철역에 설치된다면 지하철 사고는 줄어들 것이다. 하지만 이와 같은 생각은 지금의 지하철 타는곳보다도 더 위험하다. 치명적이다.
지하철 사고에는 앞서 이야기한 지하철 타는곳 자체가 가진 위험성 때문에 생긴 안전사고가 있고, 스스로 죽기 위해 지하철 선로로 뛰어들어 생기는 사고가 있다. 울타리와 보호문짝은 분명히 이와 같은 두 가지 사고를 모두 막아줄 것으로 기대된다. 지하철을 이용하는 시민들은 보다 안전하고 쾌적한 지하철을 이용할 수 있을 것이다. 심지어 우리의 생각으로는 보호시설만 구비되면 지하철 사고는 하나도 없을 것도 같다. 하지만 그것은 추측에 불과한 것으로, 실제로는 모든 사고는 여전히 미래형으로 있을 것이다.
안전사고의 경우 보호시설은 큰 역할을 할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보호시설에 초점을 맞춘 주장은 큰 약점을 갖고 있다. 우리가 이때껏 겪어왔던 사고들은 결코 보호시설이 갖춰지지 못했기 때문에 일어난 것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그 주장은 은폐하고 있다. 보호시설만이 문제라는 주장으로는, 가령 다음과 같은 통계자료를 설명할 수 없다.
해[年] |
지하철사고건수 |
증감률 |
전체사고건수 |
증감률 |
1995 |
28 |
- |
250,946 |
- |
1996 |
32 |
▲14.3 |
266,798 |
▲ 6.3 |
1997 |
27 |
▽15.6 |
248,260 |
▽ 6.9 |
1998 |
33 |
▲22.2 |
241,438 |
▽ 2.7 |
1999 |
54 |
▲63.6 |
277,551 |
▲15.0 |
2000 |
60 |
▲11.1 |
291,758 |
▲ 5.1 |
2001 |
59 |
▽ 2.7 |
261,765 |
▽10.3 |
2002 |
56 |
▽ 5.1 |
232,114 |
▽11.3 |
http://www.kotsa.or.kr/data_room/content09_1_lnk2.htm 교통안전공단KOSTA
자료에서 보다시피 1999년 지하철 사고건수는 전년도 대비 63.6퍼센트나 늘어났다. 시기를 잘 생각해보면 이 표가 지시하는 바를 잘 알 수 있다. 1998년부터 우리나라는 소위 IMF 시대를 맞았고, 그때 수많은 기사들이 회사를 그만두어야 했던 것이다. 특히 승무원 두 명이 타게 되어있는 1~4호선 지하철에 지금은 한 명의 승무원만이 타게 되면서 문제가 생긴 것으로 파악된다. 그것은 근본적인 해결책없이 꾸준히 계속되었던 '1인승무원제'에 따라 1999년 이후 지하철사고건수가 더 줄지 않고 50-60건을 오르내리는 것에서 알 수 있다.
하드웨어에 모든 책임을 돌리는 것은 지나치게 즉물적卽物的이다. 잘 생각해보자. 울타리나 보호문짝이 설치된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제대로 관리된다는 보장이 있는가? 그것들을 잘 관리하기 위해서는 정기적인 점검이 철저하게 이루어져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지금보다 더 많은 인원이 투입되든가, 아니면 지금의 인원이 더 많은 일을 해야 한다. 그것을 우리가 기대할 수 있겠는가? 울타리나 보호문짝이 모든 지하철역 타는곳에 설치된다고 하더라도, 그 30-40년 뒤에 "지하철 스크린도어 낙후, 관리 소홀 심각. 어제 또 1명 사고로 사망" 류의 기사가 나오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있는가? 하드웨어를 돌리기 위해서는 결국 소프트웨어가 필요하다. 궁극적으로는 사람이 필요하다. 시민의 안전은 안중에도 없이 다만 경제적인 이유만을 가지고 1인승무원제를 무턱대고 도입하는 수준의 회사가, 과연 이를 잘 수행할 수 있을 것인가?
반면, 자살 사고의 경우는 더욱 심각하다. 보호시설이 지하철 자살사고를 줄여준다는 주장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맞다. 특히 보호문짝을 실치하면, 사진에서 보듯이, 지하철 선로로 뛰어들어 자살하는 끔찍한 상황은 더이상 시민들이 보지 않아도 될 것으로 예상된다. 그러나, 보이지 않으면 해결된 것일까? 자살과 지하철은 실상 아무 연관이 없다. 스스로 죽고자 하는 사람은 자살하기 위해서 지하철에 뛰어든 것이지 "지하철이 거기 있기 때문에 나는 뛰어든다"는 식으로 뛰어든 것이 아니다. 때문에 보호시설 설치 여부와 관계없이 자살은 계속될 것이다. 지하철 선로에서의 자살이 다른 곳에서의 자살로 바뀐 것 외에는 달라진 것이 없다. 아니, 오히려 문제는 더 심각해진다. 누군가 지하철에서 '끔찍한 자살사고'를 일으키면, 거기서 사람들은 우리 사회의 어딘가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분명히 느낄 수 있다. 사회의 병病을 알 수 있는 아픔이 있는 셈이다. 그러나 자살이 끔찍하게 표면적으로 드러나지 않게 되면 사람들은 병들었음에도 그것을 느낄 수 없는 일종의 불감증 상태에까지 가고 말 것이다. 이성복의 「그날」은 아픔을 느끼지 못하는 상태가 사실은 얼마나 고통스러운 상태인지를 매우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
그날 아버지는 일곱시 기차를 타고 금촌으로 떠났고
여동생은 아홉시에 학교로 갔다 그날 어머니의 낡은
다리는 퉁퉁 부어올랐고 나는 신문사로 가서 하루 종일
노닥거렸다 前方은 무사했고 세상은 완벽했다 없는 것이
없었다 그날 驛前에는 대낮부터 창녀들이 서성거렸고
몇 년 후에 창녀가 될 애들은 집일을 도우거나 어린
동생을 돌보았다 그날 아버지는 未收金 회수 관계로
사장과 다투었고 여동생은 愛人과 함께 음악회에 갔다
그날 퇴근길에 나는 부츠 신은 멋진 여자를 보았고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면 죽일 수도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날 태연한 나무들 위로 날아 오르는 것은 다 새가
아니었다 나는 보았다 잔디밭 잡초 뽑는 여인들이 자기
삶까지 솎아내는 것을, 집 허무는 사내들이 자기 하늘까지
무너뜨리는 것을 나는 보았다 새占 치는 노인과 便桶의
다정함을 그날 몇 건의 교통사고로 몇 사람이
죽었고 그날 市內 술집과 여관은 여전히 붐볐지만
아무도 그날의 신음 소리를 듣지 못했다
모두 병들었는데 아무도 아프지 않았다
- 이성복, 「그날」全文
신길역에 설치된 보호문짝 (동아일보 2003년 6월 28일)
이성복은, 다른 글에서, '아픔'에 대한 인식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아울러 말하고 있다. "아픔은 <살아 있음>의 징조이며, <살아야겠음>의 경보"라고 그는 말한다. 더구나, 아픔 곧 "자신이 병들어 있음을 아는 것"은 치유는 아니더라도 "치유의 첫 단계"일 수는 있다고 강조한다. 그러고 나서 최근의 지하철 사고를 20년 전에 미리 경고한 듯이, "우리가 아픔만을 강조하게 되면, 그 아픔을 가져오게 한 것들을 은폐하거나 신비화하게 될지도 모른다"라고 쓰고 있다. 비록 이성복의 글에서 '아픔'은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비교적 개인적이고 정신적인 것에 국한되어 있긴 하지만, 우리가 이를 사회적 차원으로 확대시키는 것이 불가능한 것은 아닐 것이다. 그것은 이성복이 그 사회의 문맥contexte을 받아들여 자신의 글과 시 속에 잘 체현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고, 지금에 이르러 사회는 사람과 마찬가지로 하나의 유기체, 거대한 유기체corps organique로 볼 수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렇게 본다면 이성복의 이 글과, 앞서 인용한 「그날」과 최근 일어난 일련의 지하철 자살사고가 겹쳐서 떠오를 수 있을 것이다.
주목할 점은, 예전에 있었던 '자살사이트 열풍'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과 이번 지하철 자살 사고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은 놀랍도록 닮은 데가 있다는 것이다. 오금택 씨는 당시의 사정을 짤막한 만화 한 쪽으로 그리고 있다. 그는 당시에 이미 씨니피앙signifiant이 아니라 씨니피에sinifié에 주의를 기울이는 희유한 인식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가 희유한 인식을 가진 것이 아니라 우리가 TV와 언론들이 미리 판단내린 것을 비판의식 없이 그저 받아들인 것이다.
동아일보 2001년 2월 28일 오금택
어떤이는 말할지 모른다. 지하철 선로에서의 끔찍한 자살사건을 시민들이 보지 않게 하는 것도 중요한 일이라고. 옳다. 그러나, 지하철 선로에서의 끔찍한 자살사건을 보기 싫은 사람뿐 아니라, 죽기 싫은, 그러면서도 삶이 그를 죽음으로 내몬, 그래서 지하철 선로에서 끔찍하게 죽을 수밖에 없었던 바로 그 사람도 시민이라는 사실을, 그는 간과하고 있다. '끔찍한 자살사건'을 보던 사람이 언제 또 '끔찍한 자살사건'을 스스로 연출하게 될지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러므로 언발에 오줌누기 식으로 자살을 은폐하는 것보다는 근본적인 해결책을 찾아야 할 것이다. (자살의 원인 규명은 수사를 위해서만 필요한 것이 아니다.)
시대는 점차 판단능력을 상실해가고 있다. TV의 시대, 인터넷의 시대에 비판력을 기대할 수 있겠는가? 사람들은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만을 보는데, TV와 인터넷이 오히려 그런 상황을 더욱 조장하고 있다. 우리는 이제 어디서 들은 것이든 비판적으로 받아들이기를 배워야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아는 일이다. 많이 알면 알수록 비판적 수용의 단계는 더욱 세련되게 된다. 가장 중요한 앎은 물론, 자기자신에 대한 앎과 자신이 몸담은 이 사회에 대한 앎이다. 지금은 즉물의 시대, 근본을 생각하는 마음이 아쉬운 시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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