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장전

극예술과 성격: Jaoui《룩앳미》

엔디 2005. 1. 25. 23: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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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n ! Rien de rien.
Non ! Je ne regrette rien.
Car ma vie, car mes joies
aujourd'hui, ça commence avec toi!

아니요, 아무것도.
아니요, 난 아무것도 후회하지 않아요.
내 삶도, 내 기쁨도
오늘, 시작되었으니까요, 당신과 함께!

아녜스 쟈우이Agnès Jaoui 감독의 첫 작품인 《타인의 취향Le goût des autres》의 대단원을 이루는 노래, 에디뜨 삐아프의 '아니요, 난 아무 것도 후회하지 않아요'다. 그러나 그 영화 속에서 정작 중요하게 다루어진 것은, 다른 사람의 취향goût이 아니라 사랑 그 자체다. 《타인의 취향》은 아주 많은 걸 말하고 있지만 여전히 말하지 않은 부분을 남겨둔 영화였고, 그 말하지 않은 부분은 신비로 남을 것이었다. 물론 그 신비는 인간을 허무하게 만드는 신비가 아니라, 인간을 보다 진정한 행복으로 이끄는 신비가 된다. 그러므로 《타인의 취향》에서 취향보다 중요한 것은 삶과 기쁨, '당신'과 함께 시작된 삶과 기쁨이다. 어쩌면 취향은 거기에 얼마쯤 종속되는 것이기도 한 것이다. 그러므로 《타인의 취향》은 관계에 대한, 보수적인 영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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쟈우이 감독의 두 번째 영화 《환영처럼comme une image(번역 제목: 룩앳미)》은 《타인의 취향》의 연장선상에서 관계에 대해서 다시 고찰한다. 다만 첫 번째 영화가 취향을 문제삼았다면, 이번 영화는 성격caractère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극 예술이 성격에 초점을 두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오랜 시간동안 그래왔다. 그래서 우리는 극에 등장하는 인물을 성격caractère이라고 부르기까지 한다. 역사주의 비평과 자연주의naturalisme가 믿은 것은 다름이 아니라 시간temps과 종족race, 그리고 환경milieu에서 형성되는 사람의 성격과 그 성격들이 부딪히는 세계였다. 졸라의 루공-마까르 총서Rougon-Macquart는 바로 그 지점에 위치하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자연주의자들은 문학 작품을 쓰면서도 스스로 과학자라고 여기게 된 것이다.

그러나 아녜스 쟈우이는 말한다: 성격도 변한다. "에디뜨는 당신들이 변했다고 하던데요." 우리는 에띠엔 꺄사르Étienne Cassard의 글과 그의 정신esprit를 보고, 그의 성격의 형성을 짐작할 수 있다, 롤리따 꺄사르Lolita Cassard와 그 가족들을 보고 그의 성격의 형성을 짐작할 수 있다. 실비아와 삐에르 밀레 Sylvia et Pierre Millet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딱딱한 자연주의가 신비의 탈을 쓰게 되는 것은 이 시점이다. 그래서 세바스띠앙Sébastien이 등장한다. 우리는 꺄사르 씨의 위상이 어떻게 변화하는지를 실감할 것이다. (성격의 변화가 왜 중요한 이유는, 말 그대로, 한 사람의 성격이 바뀌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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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말. 시안화칼륨의 치사량은 0.15 그램이다.

덧말2. 영화의 자막은 중역되었다. 꺄사르Cassard가 카사드로 옮겨지다니, 서양인들이 나를 Quan Ning Dian으로 부른다면 나는 기분이 좋지 않을 텐데. 거기다가 영화 속에서 모든 도량형은 원래는 미터법으로 이야기하는데, 자막은 철저하게 인치와 피트를 사용하고 있었다. 나로서는 미국영화, 곧 원래 인치와 피트를 사용하는 영화도 자막에서는 가능하다면 미터법으로 바꾸는 것이 좋다고 생각하는데, 이건 오히려 거꾸로였다.

덧말3. 아네스 자우이는 이상한 표기다. Agnès Jaoui의 발음은 아마도 [aɲεs ʒawi] 일 것이므로 이 국제음성기호를 최대한 비슷하게 한글로 고치면 아냬(녜)스 쟈위가 된다. 외래어 표기법에 맞춰서 쓴다면 아녜스 자우이가 된다. 아네스 자우이는 원음에 최대한 가깝게 표시된 것도 아니고, 외래어 표기법에 맞춰서 쓴 것도 아니다. 여기서 문제되는 건 당연히 [ɲ] 소리인데, 아녜스를 아네스로 바꾸는 건 에스빠냐를 에스빠나로 바꾸는 것이나 마찬가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