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장전

기다림의 목적: 가오싱젠《버스 정류장》

엔디 2006. 11. 9. 0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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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복이 「다시 봄이 왔다」에서 "기다리던 것이 오지 않는다는 것은 누구나 안다 누가 누구를 사랑하고 누가 누구의 목을 껴안 듯이 비틀었는가 나도 안다 돼지 목따는 동네의 더디고 나른한 세월"이라고 울부짖었을 때도 나는 기다리고 있었다.


《버스 정류장》도 기다림에 대한 연극이다. 이 작품이 자주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와 비교되는 이유는, 이 기다림의 시간이 흡사하고, 기다려도 오지 않는 고도와 버스가 비슷한 역할을 수행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두 작품이 펼쳐지는 공간 또한 상당히 흡사하다.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이 고도를 기다리는 장소는 나무 한 그루가 서 있는 시골이고, 《버스 정류장》 역시 '버스 정류장車站' 팻말이 서 있는 시골길이다. 또, 두 작품의 공간은 연극 내내 바뀌지 않는다; 두 작품의 공통점은 여기까지다.


두 작품의 가장 분명한 차이점은,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의 기다림에는 목적이 없는 반면 《버스 정류장》의 등장 인물들은 저마다의 목적을 가지고 버스를 기다린다는 점이다.

이들은 자신들이 가진 목적만큼 불행하다. 다시 말하자: 그들은 모두 자신의 존재만큼 꼭같이 불행하다. 가령 요구르트를 마시러 가는 불량배의 초조함은 한 남자와의 첫 약속에 나가는 처녀나 챔피언과 장기를 두기로 약속을 했다고 주장하는 노인의 초조함보다 못하지 않다; 그는 누구보다 먼저 시내에 가기 위해 버스 정류장에서 새치기까지 일삼는다.

시간은 이들이 목적을 가진 만큼 중요하다. 가령 대입 시험을 준비하는 청년이 시계를 보고 놀라는 이유는 그가 시내에 가려는 목적이 시간과 무척 깊은 연관이 있기 때문이다. 이들의 목적을 좌절시키는 사건이 시작되면서 사람들은 고통스러워 몸부림친다. 어떤 이들은 돌아가려고까지 한다. 그들에게 시간은 붙잡아두어야만 할 것, 도대체 잡을 수가 없는 것이다. 시간 공포증chronos-phobia이다.

그들의 목적 자체가 시간이었다. 한 남자를 만나 사랑하는 일, 훌륭한 제자를 길러 자신의 손재주를 전하는 일, 남편과 자식을 주말마다 만나며 삶을 이어나가는 일, 차후의 시간을 지배할 대학 입학 시험을 준비하는 일 따위는 모두 그들이 '시내'에 가서 해야 할 일은 시간을 소모하는 일임을 보여준다. 그뿐이 아니다. 불량배가 먹으러 가는 요구르트는 우유에 시간을 들여 시큼하게 발효시킨 음식이다; 연극은 시간이야말로 우리 존재의 조건임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특히 주의를 끄는 것은 노인의 목적이다. 노인은 장기 챔피언이라는 사람과 장기를 두러 시내에 간다고 했다. 여기서 립 밴 윙클Rip Van Winkle 형의 선경설화仙境說話를 떠올리는 것이 무리일까. 장기가 바둑과 차이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평생을 장기만 두어온 노인의 장기 대국은 그 자체로 '도끼자루 썩는 줄 모를' 구경거리임이 틀림없다. 비가 오자 노인은 보이지 않는 장기알들에게 명령한다: "사 막고 궁 앞으로! 궁 막고 차 앞으로! 차 막고 마 앞으로! 장이야!" 그의 말대로 장기는 심심풀이가 아니라 정신을 다하여 두는 것이다. 그 안에 시간의 비밀이 숨어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시간은 그들을 구속하고 있다. 이를 극복할 방법은? 나로서는 작가가 사랑을 믿고 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시간의 흐름으로 생을 망쳐버린 청년과 사랑을 포기해야만 했던 처녀는 서로 사랑을 나눈다. 행복한 사람, 처녀는 말한다: "시계를 보지 말아요." 불량배는 시간을 허비하지 말라는 충고를 듣고 목수로부터 기술을 배우기로 한다. 잠깐만에 그들은 무척 돈독하게 사랑하는 하나의 공동체가 되어 버스 정류장에 선다. 삶이 어느 '시간'부터 잘못되어 꼬이기 시작했는지 모르겠지만, 그들은 자못 씩씩하게 신발끈을 조인다. 그들은 잠시 멈칫하지만, 결국 출발하고 말 것이다. 거기에서, 더이상 기다릴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버스 정류장車站》
작作 가오싱젠
연출 임경식
극단 반도
대학로 극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