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도 통역이 되나요》라는 황당한 제목으로 개봉한 영화다. 원제는 《번역에서 잃어버리는 것들Lost in Translation》 정도가 맞겠다. 만나는 사람마다 이 영화가 좋다고 추천들이었다. 영화를 소개하는 인터넷 사이트들은 두 상처입은 영혼의 만남 어쩌고 하면서 떠들고 있었다.
내가 보기에 이 영화를 '영혼의 만남' 운운하며 극찬하는 것이야말로 번역 과정에서 많은 걸 잃어버린 주제 같다. 영화평론가들의 문제점은, 항상 현실을 보지 않고 이데아를 보려고만 한다는 점이다. 이 영화는 '번역에서 잃어버리는 것'이라는 거창한 제목을 달고 있긴 하지만, 그냥 '로맨스' 영화다. 밥Bob과 샤를롯Charlotte이 상처입은 영혼이라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건 그냥 그뿐이다. 그런 정도의 상처라면 우리 주변에 널려 있다. 말하자면 그것은 지극히 일상적인 상처이며, 그 정도의 상처를 우리는 그냥 우리 속에서 짓누르고 사는 것이다.
그 상처가 극대화 혹은 가시화되는 것은 단지 그곳이 뉴욕이라 LA가 아니라, 도꾜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곳이 집이 아니라 호텔이기 때문이다. 알다시피 호텔은 임시로 쓰는 방이고, 그런 만큼 거기서는 청소도 식사준비도 할 필요가 없다. 할 일이라고는 음악을 듣거나, 창밖을 바라보거나, 자기 몸을 씻고 화장하는 일 뿐이다. 끝없이 나르시스트가 될 수 있는 곳이 호텔이다. 호텔에서는, 바에 내려가 누군가에게 술을 한 잔 선물할 수도 있고, 문틈 아래로 쪽지를 전달할 수도 있는 것이다. 끝없이 리버럴할 수 있는 곳이 호텔이다. 모든 만남은 더 우연적인 것이 된다.
그러므로 그 공간은 로맨스의 공간이다. 그뿐이다. 상처의 치료라고? 그렇지 않다. 두 영혼의 상처는 영원히 남을 것이고, 그들은 잠시 상처를 잊었을 뿐이다. 물론, 그것이 의미있기는 하다. 상처라는 건 가끔씩 잠시만 잊어주어야 버틸 수 있는 것이니까.
이 영화를 구원해주는 것이 있다면 밥이 샤를롯에게 속삭이는 마지막 장면이다. (음모론적으로 말한다면 2편을 위한 포석일 수 있겠지만, 그건 아닌 것 같다.) 속삭인 내용은 중요하지 않다. 속삭이고 나서 서로 제 갈 길을 간다는 것이 중요하고, 그러면서 서로를 끊임없이 돌아본다는 것이 중요하다. 상처라는 것은, 그렇게 무디어져 가는 것이니까.
도중에 멈추지 않고 끝까지 영화를 보게 만든 스칼렛 요한슨의 아름다움에 졸문을 바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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