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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도의 심리전?

탈레반, 피랍여성 울먹이는 육성 공개 탈레반에 피랍된 임현주 씨의 육성을 공개한 것을 두고 언론에서는 '고도의 심리전'이라고 난리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 피랍자들의 육성을 들려주는 것은 저런 국제적으로 알려진 단체뿐 아니라 우발적으로 어린이를 유괴하는 유괴범들도 다 하는 기본적인 '협상' 방법이다. 상대를 잘 경계하고, 상대의 방법을 분석해야지 상대를 과장하는 것은 좋지 않다. 상대를 과장하는 과정에서 쓸데없이 감정이 들어갈 수 있고, 이 사안에는 또 민족주의가 개입할 가능성도 있다. 또 현재 사회에 만연한 개신교에 대한 반발심리도 커질 염려가 있기 때문이다. 한 사람이 고인이 되기는 했지만, 나머지 사람들이라도 건강하게 무사히 돌아오기를 빈다. 그리고, 개신교도의 한 사람으로서 한국 개신교가 제발 좀 ..

기독교와 사탄의 2분법: 이랜드 사태

이랜드 사태가 점점 심각한 상태로 빠져든다. 한국의 개신교인들은 오십년대 평양에서 '빨갱이'들을 악마라고 불렀고, 칠팔십년대에 학생운동하고 노동운동하던 사람들을 마귀라고 불렀고, 오늘날 노조 간부들을 사탄이라고 부르고 있다. 아우구스띠누스가 받아들인 플라톤주의의 쉬운 2분법이 기됵교에게 익숙할 수밖에 없지만, 저런 명칭은 지나치게 정치적이라서 더 부끄럽다: 일단 상대를 사탄이라고 부르는 순간 그 상대에 대한 모든 인식은 닫혀버리고 만다. 종교도 정치처럼 언어예술이자 립서비스로 변하는 순간이다. 이럴 때 개신교인임이 무척이나 부끄럽다, 슬프다.

올림픽과 국가주의

0 정수라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얻을 수 있"는 대한민국을 노래했을 때, 나는 대한민국의 일원임이 자랑스러웠다. 나는 동남아시아나 인도 따위에서 태어난 사람들이 불쌍하다고까지 생각했다. 그네들은 그런 나라에 살고 있지 않기 때문에. 대학 시절 나는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얻을 수 있"다는 그 명제가 틀렸다고 생각했다. 별다른 고생을 하지 않고 살아온 내 20년도 나름 꽤나 괴로운 시간이었고, 대한민국이라는 나라는 내가 원하는 것을 얻도록 해주지도 않고, 해줄 수도 없는 나라라는 생각이었다. 저 노랫말의 의미를 지금은 조금 깨달을 것 같다: 저 명제는 확실히 참이고, 다만 교묘하게 주체를 숨겼을 뿐이다. 대한민국은 어떤 사람에게는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얻을 수 있"는 나라인 것이다. 그리고 그 어떤 ..

시니피앙을 잃어버린 시

인터넷에서 수난받는 시작품들 별이 갈 길을 비추었던 서사시의 시대를 동경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 시대의 시는 '향유'된다기보다는 '소비'되고 있다는 데 생각이 미치면 나는 늘 절망한다. 나는 좋은 시는 끊임없이 재생산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여기서 재생산이란 하나의 시가 수많은 독자들의 마음 속에 다른 울림을 주는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재생산 과정에서 원래의 시가 가지고 있는 아우라는 사라지지 않고, 어떤 경우에는 그 시를 딛고 있는 다른 시를 낳기도 한다. 인터넷과 '미니홈피' 시대의 시의 '소비'는 좀 색다른 경향이 있어서, 시를 자신들의 입맛에 맞게 고치거나 다른 사람의 시에 자신의 시를 덧붙이거나, 시를 마음껏 자기 것으로 이용한다. 그렇게 '가공'된 시는 원작의 분위기를 잃고 대개 감동적인 ..

자동차와 군수기계의 나라, 미국의 토테미즘: Michael Bay《트랜스포머》

1 어린 시절, 누구나 내 주위의 모든 것이 살아있다고 믿는다. 내가 자고 있을 때 내 장난감들이나 인형이 살아 움직일 것이라는 상상력은 상당히 많은 동화나 만화의 기본적인 설정으로 되어 있다. 특히 철강과 거대 기계가 찬양받던 지난 세기에는 일단 무엇이든 로봇으로 변하는 독특한 생각이 만화영화의 기반 상상력이 되었다. 전투기나 탱크에서 라이터까지 로봇으로 변신했고, 초능력으로 불러내는 존재도 귀여운 여자친구나 다정한 말벗이기보다는 로봇이었다. 언젠가부터 만화 영화들은 거대 로봇 만들기를 그쳤다. (아마도 일본) 경제에서 '중후장대重厚長大' 시대가 가고 '경박단소輕薄短小'의 시대가 온 탓이다. 워크맨이라고 불리는 소형 카세트라디오가 그 신호탄이었다면 작고 가벼운 mp3 플레이어와 얇은 휴대전화는 나름대로..

극장전 2007.07.07

젖은 머리칼: Gronenborn《알래스카》OST

젖은 머리칼이 매력적으로 느껴진 것은 언제부터였을까. 고교 시절, 여자애들은 매일 아침 머리를 감고 묶으면 하교할 때까지 머리가 마르지 않기도 한다는 걸 알게 되고 나서 적이 놀랐었는데. 그러고보면 나 스스로가 머리를 감고 나서 수건으로 대충 문지르고는 제대로 말리지 않고 나오기도 한다. 어쩌면 는개 같은 가는 비는 그냥 맞는 것도 그 때문일지도 모른다... 《알래스카》는, 씨네큐브에서 韓과 《스파이더 릴리》를 봤을 때였거나 아니면 혼자 《스틸 라이프》를 봤을 때--혹은 둘 다일지도--예고편을 접했던 것 같다. 고교 시절 이후 설어버린 독일어가 나오는 영화라는 것과 함께, 주인공은 젖은--혹은 젖은 듯한--머리칼이 인상적이었다. 응, 나는 이마 앞으로 흩뜨려진 그런 머리칼을 좋아한다. 인생에는 긴 게임과..

극장전 2007.07.07

새 술은 새 부대에: 미터법과 도량형

“미터법, 국제적 추세지만 안쓰면 벌 주겠다는 건 곤란” 1 전통과 문화의 중심부/주변부 - 평坪이라는 단위는 흔히 생각하는 것과 달리 한국의 전통적인 넓이 단위가 아니다. 평은 일본에서 들여온 것인데, 현재는 일본에서도 평 대신 제곱미터를 쓰고 있다. (본래 이런 것은 문화의 중심부에서보다 문화의 변두리에서 더 소중히 여겨지는 것이다.) 2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 - 평이 인간의 키를 감안한 휴먼 척도라고? 그런 인식은 곧장 180센티미터가 안 되거나, 그보다 더 큰 사람들을 싸그리 무시한 인식이 되고 만다. 또한 그런 인식대로라면 사람의 키를 잴 때도 센티미터보다는 척尺을 써야 옳다는 결론이 나온다... 3 미국 따라하기 - 옷 치수나 여자들의 신체 치수는 주로 인치를 쓴다. 왜인지 모르겠지만, 아마..

말한 것과 말하지 않은 것: 신까이 마꼬또《초속 5센티미터》

대학 시절, 습작을 쓸 때마다 나는 늘 무슨 말을 더할까를 생각했다. 내 몸 속에 왜 이다지도 말이 없을까 안달했다. 부족한 나의 시--그 중 나은 시들은, 그러나, 말의 뺄셈에서 나왔다는 것이 내 솔직한 고백이다, 지금. …가령, 이것저것들을 주워섬겨 아날로지analogie를 형성하면서도 정작 복판은 치지 않는 것이다. 나는 생각했다: 나를 잘 알고 있거나, 나의 시를 잘 이해하는 사람이라면 내가 치지 않은 복판의 울림을 들을 것이라고. 신까이 마꼬또新海誠 감독의 단편 연작 애니메이션 《초속 5센티미터》를 보면서, 내가 계속 생각한 것도 말의 뺄셈이었다. 확실히 이 작품은 말을 아끼는 작품이고, 말하지 않은 것으로 말하는 작품이다. 이 말은 나오는 인물들의 대사가 적다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이 애니메..

극장전 2007.07.06

천지인-어쨌든 우리는 살아가니까

고교 시절 은사님이 녹음해서 주셨던 천지인의 테이프를 처음 더블 데크에 걸었을 때 나온 노래가 "어쨌든 우리는 살아가니까"였다. 테이프가 늘어질까봐 아껴아껴 듣다가 최근에야 복각판 CD를 구매했는데... 어쨌든 대학에 들어가 기형도를 찬찬히 읽으면서 이 곡이 본래 그의 시에서 비롯된 것임을 깨달았다. (CD 어디에도 그런 이야기는 없는데...) 수백개의 명함을 읽으며 일일이 얼굴들을 기억할 순 없지 우리에겐 그만큼의 시간적 여유가 있는 것이 아니니까 한두시간 차이로 무엇이 옳고 그른가를 생각할 정도로 우리에겐 그만큼의 시간적 여유가 있는 것이 아니니까 굳게 뚜껑이 닫힌 만년필처럼 서로에게 필요한 말만 던지고 10년이 지난 드라마처럼 어쨌든 우리는 살아가니까 풀어진 와이셔츠 단추 한개에 날선 칼라가 늘어져..

"女교사"

초등교사 임용시험 부산 합격자 100명 중 97명이 여선생님 [중앙일보] 1 도대체 '여성적인 것'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가끔 종잡을 수가 없다. 어떤 사람들은 남자들은 논리에 강하고 여자들은 창의적이어서 21세기는 여성에게 유리하다고 한다; 어떤 사람들은 남자들은 창조적인 일을 잘하고, 여자들은 꼼꼼해서 암기하는 데 능하다고 한다. 과연 '여성적인 것'이라는 것은 있는 것일까? 21세기는 여성의 시대니, 앞으로는 여성적인 것이 중요해지는 시대가 온다느니 하는 이야기는 사실 믿을 만한 것이 못 된다. 그들이 말하는 여성에게 유리한 상황이 생물학적으로 규명되기 전까지는 말이다. 임용고시에서 여성 합격자가 많은 이유가, 시험이 여성에게 유리하기 때문이라는 말은 따라서 아무 근거가 없는 말이다. 그런 주장을 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