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 48

어린왕자와 경계부수기: J.-P. David『다시만난 어린왕자』

어린왕자가 지구로 다시 돌아왔다. 그의 별에 어쩌다 호랑이가 머물게 되었고, 호랑이 때문에 양과 장미가 위협을 받게 되었기 때문이다. 어린왕자는 호랑이 사냥꾼을 찾고 있다. 워낙 쌩떽쥐뻬리의 『어린왕자』는 동화로 씌어진 것이다. 동화가 소설보다 수준낮은 것이라는 생각은 큰 오산이리라. 쌩떽쥐뻬리는 심지어 『어린왕자』를 어른인 레옹 베르뜨에게 헌정하는 것을 어린이들에게 사과하고 있기까지 하다. 쌩떽쥐뻬리가, 혹은 그의 어린왕자가 경멸했던 것은 '버섯'같은 어른들의 사고방식이다. 『다시 만난 어린왕자』에서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어린왕자는 어른들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것은 그가 자신의 별(사실은 행성)을 떠나 지구로 오는 길에 만난 많은 사람들이 어떻게 그려지는지를 보면 금방 나타난다. 어린왕자는 차례로 환경..

순수주의의 위험: 박숙희『반드시 바꿔 써야 할 우리말 속 일본말』

말이 바뀌는 것은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대체로 '사회의 변화'가 그 원인이라고 보면 틀리지 않을 것 같다. 언어학자 울만Ullmann은 말의 의미변화 원인을 언어적, 역사적, 사회적, 심리적 원인, 그리고 외래어의 영향에 의한 원인 등 다섯 가지로 나누었지만 그 다섯 원인들이 무자르듯 정확하게 갈라지는 것은 아니다. 가령 우리네 근대화 과정을 생각하면 일본을 통해 서구문물을 받아들이면서 외래어 혹은 외국어의 영향은 피할 수 없는 것이었고, 그것은 또한 사회적 원인이기도 하다. 그 과정에서 음이 비슷한 것들은 의미혼동을 겪게도 된다. 역사적 원인이라는 것은 이런 사실들을 통시적으로 보았을 때의 변화라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비근한 예를 찾느라 우리네 근대화 과정을 예로 들었지만, 사실 그만큼 심각한..

구체具體 위에 핀 죄의 꽃: 도스또예프스끼『까라마조프 씨네 형제들』

성서는 크게 보아 '구원의 역사'이다. 아담의 첫 범죄sin 이후 모세가 시내 산에서 십계명을 받는 때를 거쳐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 박힘으로 '구원'이 올 때까지의. '구원'이 있기까지는 '죄'가 있어야 하므로 성서는 또한 '죄'의 역사이다. 그러나 '죄'가 무엇인가, 하고 물으면 누구도 쉽사리 대답하지 못한다. 누구든 "신(神)이 부과한 명령을 어기는 것"이 죄라고 주장하려는 이는 '왜 카인이 십계명이 생기기도 전에 스스로를 괴롭게 해야 했는지'를 설명해야 할 것이다. 도스또예프스끼의 『까라마조프 씨네 형제들』은 그 '죄의 역사'를 소설적으로 재구성해내고 있다. 그리고 그럼으로써 죄의 개념을 보다 명확히 하고 있다. 대개 사람들에게는 죄가 선험성Apriotät을 지니고 나타난다면, 도스또예프스끼의 소..

중립성의 신화와 페미니즘의 목적: 『내셔널리즘과 젠더』

근대 이후의 사회도 근대 이전의 사회만큼이나 소수자가 억압된 사회이다. 여기서 근대가 시대를 가르는 기준이 되는 것은, 그 시기가 스스로를 '이성理性의 시기'로 규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근대는 이성에 윗점을 찍으면서 그것이 중심이 되면 '인권'과 같은 문제는 저절로 해결된다고 믿는다. 꽁뜨 이후의 이성중심주의 혹은 과학주의는 '사실fait'을 중요시하게 되고, 필연적으로 '실증성'을 강조하게 된다. 그것은 역사관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로, 실증주의자들은 "역사가들이 도달한 결론은 자연과학자들이 도달한 결론과 마찬가지의 객관성을 지녀야 한다고 믿고 있"어 일종의 '과학적 역사관'의 입장을 견지하고 있는 것이다(차하순, 62). 물론 학자가 사료를 접했을 때에는 '사료검증'을 먼저 해야 하는 것이 상식에 속하는..

베스트셀러와 오역: 리동혁『삼국지가 울고 있네』

이문열 평역 삼국지의 잘못옮긴 부분을 지적하고, 삼국지와 관련된 속설들을 소개하는 책이다. 책 자체의 목적이 앞의것에 있었고 서문이나 책겉의 광고글도 모조리 앞엣것에 대한 것이지만, 뒤엣것도 사실 상당한 분량을 차지한다. 특히 『유세명언喩世明言』이라는 소설집에 실렸다는, 사마모가 한나라 건국시의 영웅들을 삼국시대에 등장시켰다는 이야기는 상당히 흥미있는 이야기거리다. 이를테면, 한 고조를 도와 한나라의 건국공신이 되었던 한신이 억울한 죽음을 당했으니 후한 말에 조조로 다시 태어나게 하고, 한 고조 유방은 헌제로 다시 태어나게 한다고 사마모가 염라대왕을 대신하여 판결한다는 식이다. 책의 앞부분은 역시 이문열 삼국지의 틀린 부분을 지적하는데 많은 힘을 쏟는다. 이문열이 터무니없게 옮긴 부분은 생각보다 많았다...

헐리우드 vs. 지금-여기: 안정효『헐리우드 키드의 생애』

과감하게 중편이나, 장편이라도 좀더 짧게 압축시킬 수 있는 작품이다. 수많은 옛날 헐리우드 영화가 우리 눈을 어지럽히고, 그 배우들의 이름에 휘둘리기 십상이다. 하지만 이 작품에서 그 많은 영화제목을 빼고 나면, 이 작품은 그저 옛날엔 참 좋았지 류의 과거를 아름답게 재구성하는 회고소설에 불과해질 것이다. 회고소설? 하긴 어떤 이는 이 소설을 회고소설이라고 부를 것이고 어떤 이는 이 소설을 표절에 대한 소설이라고 부를 것이지만, 이 소설은 기실 그 아무 것과도 관련이 없다. 영화가 삶의 한 부분이었던 그 당시를 애정어린 손길로 재구성해내고 있으면서도, 항상 '지금-여기maintenant-ici'를 잊지 않고있는 작가의 펜은 헐리우드 키드가 느꼈던 '고스트幽靈 현상'과는 정반대되는 방향을 가지는 것이다. ..

움직이는 시간, 움직이지 않는 시간: Prado『섬』

프라도의 『섬』은 특이한 만화다. 대부분의 만화는 몰입없이 빨리 읽을 수 있도록 비교적 단순한 서사구조récit를 가지는 게 보통이다. 그래서 심지어 어떤 만화들은 형식적인 아름다움을 갖지 못하고 내용으로 환원되기도 한다. 그런 만화들의 경우에는, 한 편의 작품이 그 줄거리로 대체되어도 큰 문제가 없어보인다. 『섬』은 독자의 몰입을 요구한다. 독자는 이 작품에서 이야기하려는 바가 무엇인가, 이 작품이 왜 이렇게 구성되었는가를 생각하기 시작하고, 종국에는 작품에 깊이 몰입하게 된다. 퍽 짧은 이 책이 두번씩 세번씩 읽히는 이유도 그것이고, 시일이 지난 뒤에도 다시 꺼내읽게 되는 이유도 바로 그것이다. 스콧 매클루드는 그의 『만화의 이해』에서 '홈통'의 역할을 강조하며, 바로 그곳이 독자의 상상력이 개입할 ..

언어학 없는 언어학교: 강범모『영화마을 언어학교』

'영화보다 재미있는 언어학 강의'라는 부제를 달고 있지만, 언어학 강의라 하기에 깊이도 없을 뿐더러 재미도 없다. 아니, 본제부터가 잘못되었다. 이 책은 '영화마을'에 있지 않고 그 언저리에 있을 뿐이다. 거의 60편에 달하는 영화 속에서 언어학을 설명하려고 글쓴이는 애쓰고 있지만, 그것이 영화의 내용과 잘 융합되는 경우는 거의 없다. 대개는 영화의 제목이나 아주 사소한 것에 집착해서 그에 대한 이야기로 한두 페이지를 채우는 것에 불과하다. 물론, 그런대로 괜찮은 몇몇 사례들은 있다. 《쥬라기 공원3》에서 공룡들의 의사소통이 우리의 언어와 달리 무한성을 갖지는 않을 것이라고 말하는 부분은, 오로지 추측만을 가지고 한 말이라는 결점은 있더라도, 그런대로 봐줄 만한 언어학적 설명이라고 하겠다. 또, 《인랑人..

두 권의 문장론 책: 이태준『문장강화』, 김기림『문장론신강』

상허 선생의『문장강화』는 '文章强化'가 아니라 '文章講話'다. 초판(1940)으로 치면 63년, 증정판增訂版(1947)으로 쳐도 50년은 족히 넘게 오래된 이 책을 다시 읽은 이유는 여러 미디어에서 꽤나 칭찬을 해댔기 때문이다. 그리고 일기에라도 남겨두는 이유는 충분히 그 칭찬에 값하는 것 같이 여겨지기 때문이다. 사실 이 책에 대한 칭찬은 해제를 쓴 임형택 교수가 다 한 셈이니, 무엇보다 이 책은 설명하는 글이 아니라 보여주는 글인 것이다. 부록의 예문 색인만 네 쪽이 되니 그것은 수치로도 증명되지만 어느 쪽이고 책을 펼쳐봐도 예문이 없는 장면은 볼 수 없다시피 하다. 어느 곳은 아주 예문이 왼쪽-오른쪽 두 쪽을 꽉 채우고 있기도 하다. 임 교수는 "예문의 풍부함은 신문학 20년이 도달한 우수한 성과를..

알레고리 없이 '워터십 다운' 읽기: R. Adams『워터십 다운의 열한 마리 토끼』

다른 많은 판타지 소설이 그렇듯이, 리처드 애덤스의 『워터십 다운의 열한 마리 토끼』도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려달라는 아이들의 요구에서 시작된다. 애덤스의 아이들은 "'지금까지 누구도 하지 않은' 길고 재미있는 이야기"를 원했다. 아이 때는 누구나 이야기를 원한다. 삶의 언어, 언어로 표현된 삶이 인간에게 본래적인 즐거움을 가져다준다는 증거이다. 허구虛構를 뜻하는 '소설fiction'이라는 말에 환상幻想을 뜻하는 '판타지fantasy'라는 말이 덧붙여졌을 때, 그 말의 파괴력은 절정에 달한다. 그것은 그야말로 '거짓'의 극한極限이다. 그런데, 놀라워라, 판타지 소설의 독자는 그 '거짓'을 '거짓' 그대로 믿게 된다. 이름에서 보자면 허구의 끝으로 달려가는 것이 판타지소설인데도 판타지소설의 독자는 그것을 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