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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도는 구호口號들과 단호한 시詩들

1 나는 아무래도 참을 수가 없다. 아프간 전戰에 이어 이라크 전戰이 터지면서 인터넷에는 시가 아니라 구호인 것들이 시인 척 하면서 돌아다니고 있었다. 나는 그들의 심정에 십분 공감하면서도 그들의 시에는 이상하게도 거부반응이 드는 것이었다. 그런 모습은 아래 임화의 시를 다시 보면서 더욱 증폭되었다. 노름꾼과 강도를 잡던 손이 위대한 혁명가의 소매를 쥐려는 욕된 하늘에 무슨 旗빨이 날리고 있느냐 同胞여! 일제히 旗빨을 내리자 가난한 동포의 주머니를 노리는 外國商館의 늙은 종들이 廣木과 통조림의 密賣를 의론하는 廢 王宮의 상표를 위하여 우리의 머리 우에 國旗를 날릴 필요가 없다 同胞여 일제히 旗빨을 내리자 殺人의 自由와 약탈의 神聖이 晝夜로 방송되는 南部朝鮮 더러운 하늘에 무슨 旗빨이 날리고 있느냐 同胞여..

우리 안의 백호白好주의: 우리 문학에 나타난 여성의 흰 살갗

제국주의 서구열강이 저질렀던 식민지 침탈이 2차 대전이 끝나면서 마감되고, 제도로서의 백호주의白濠主義가 호주에서 1970년대에 마지막을 고했다. 그러나 아직도 '평등'은 멀기만 하다. 우리가 바라는 평등은 제도에 있어서의 평등만은 아닌 까닭이다. 희고 늘씬한 '미녀'들이 TV와 거리를 동시에 오르내리고 있는 이 시대는, 서구를 좇아가려고 기를 쓰던 근대 초기의 우리 모습과 너무 닮아있기 때문이다. 이때 다룰 중요한 말머리[話頭]로는 흰 얼굴과 흰 살갗에 대한 편집광적인 집착을 들 수 있다. 사람의 살갗 빛깔을 가지고 백인종이니 흑인종이니 황인종이니 홍인종이니를 굳이 구별하는 것은 크게 의미있는 일인 것 같지는 않다. 하지만, 가치판단을 배제하고 보더라도 살갗 빛깔과 여러 특징들이 다른 것은 사실이다. 그..

포커스 대 중앙일보

메트로Metro의 한국판이 등장하자마자 비온 뒤 대나무순처럼 지하철 공짜신문이 생겨나고 있다. 여기에 포커스Focus와 문화일보에서 만든 에이엠세븐AM7, 그리고 일간스포츠에서 만든 굿모닝까지 현재 총 4종류의 공짜신문이 있다. 여기에 스포츠조선 쪽에서도 공짜신문 창간을 준비중이라 하니 지하철 신문에 대한 경쟁은 더 커질 전망이다. 메트로와 포커스의 경우는 논외로 하더라도, 문화일보 쪽이나 스포츠신문들은 왜 스스로의 시장을 위축시킬지도 모르는 공짜신문 경쟁을 하려는 것일까. 그러나 "제 살 깎아먹기"는 공짜 신문들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이른바 3대 일간지 중 하나라는 중앙일보는 얼마전 신문구독료를 대폭 인하했다. 다른 신문들이 '덤핑' 판매라며 비난하는 가운데서도 중앙일보 측은 "덤핑은 (신문 제작의) ..

『르 몽드』- 최연구

『르 몽드』 최연구, 살림. 2003년 12월 30일 초판. 르 몽드 광고 수입은 38% 르 몽드의 1년 매출액은 1999년 기준으로 2억3천5백만 유로(약 2,700억 원) 규모이다. 그런데 르 몽드 총매출액 중 신문 판매를 통한 수입은 2000년 기준으로 전체 수입 중 62%이다. 반면 광고 수입은 38%이다. 이 수치는 장-마리 콜롱바니 회장이 르 몽드를 이끌면서 재정난을 극복하기 위해 광고 비중을 대폭 늘린 이후의 수치이다. 199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르 몽드의 수입 구조는 구독료 수입(지대)과 광고가 각각 70%, 30% 정도였다. 어쨌거나 광고 수입보다 신문 판매 수익이 절대적으로 많다는 것은 이 신문이 광고주인 대기업의 영향력으로부터 벗어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일반적으로 자본주의의 언론은..

「스포츠: 잘 잰 시간의 감옥」 - 고든 피터스

1968: Marching in the street Tariq Ali & Susan Watkins, 안찬수·강정석 옮김, 삼인. 2002년 12월 13일 초판 4쇄 발행. 스포츠: 잘 잰 시간의 감옥 멕시코 올림픽 사보타주 스포츠는 비정치적 활동이라는 관념만큼 비판을 받지 않은 격언은 없다. 내가 아는 한 모든 스포츠 행사가 전혀 바람직하지 않을 수 있다는 사실을 토론의 주제로 삼은 적은 결코 없다. 일반적으로 스포츠에 이의를 제기할 만한 이유로는 적어도 네 가지가 있다. 1. 스포츠는 '경쟁심'을 고취한다. 2. 오늘날 대회가 개최될 때 스포츠는 민족주의의 가장 원색적인 형태를 고취한다. 3. 육체적인 건강함을 강조하는 것은 본질적으로 군국주의적이다. 4. "건강한 정신은 건강한 육체에 깃든다"는 (아..

대통령 탄핵과 국익, 그리고 송두율

탄핵안이 의결되었다. 대통령의 몇몇 말과 행동이 탄핵 사유가 되느냐 안 되느냐는, 탄핵이 발의된 때에 이미 쓸모없게 된 질문이었다. 『한겨레』는 헌법학자들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 내용을 12일자 머릿기사로 실었지만, 의미가 없지는 않을지 몰라도 최선이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한겨레) 하지만, 탄핵소추안이 의결되고, 헌법재판소의 공판만이 남아있는 지금 상황에서는 이와 같은 의견들이 새로운 국면을 예고할 수 있다. 헌법재판소는 여론과 공론을 수렴하여 스스로 판단을 내릴 것이다. 그 판단은 그들에게 맡겨두자. 우리에게는 우리의 할 일이 있다. 대선 이전에는 서로 으르렁거리던 한나라당과 민주당이 대통령 탄핵소추안을 두고 서로 의기투합했다는 것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국회가 하나가 되어 반드시 통과시키는 것은 '..

닳은 메타포: 박흥용『구르믈 버서난 달처럼』

좋은 예술작품이 갖추고 있어야할 여러 조건 중에는 새로움도 포함된다. 탄탄한 줄거리나 재미있는 볼거리가 중요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그것들이 전부는 아니다. 박흥용의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이 좋은 예술작품이 되기 어려운 까닭은 여기에 있다. 작품의 전체적인 틀은 성장소설Bildungsroman의 원형을 갖고 있다. '견주堅柱' 혹은 '견자犬子'가 서자로서의 불만을 품고 있다가 어떻게 당대 최고의 칼잡이가 되고, 또 거기서 '깨달음'을 얻는 과정이 이 만화가 그리고 있는 내용이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수없이 많은 전통적 메타포들이 동원되었다. 메타포들이 이 작품에서 차지하고 있는 비중은 엄청나다. 메타포를 빼면 짧게 요약한 줄거리에 불과할 정도다. 이를테면 '방짜'의 메타포가 그렇다. 방짜 메..

『번역어성립사정』- 야나부 아끼라

『飜譯語成立事情』 『번역어성립사정』 柳父章, 서혜영 옮김, 일빛. 2003년 4월 1일 초판. 글머리에 이 책에서 다루는 '사회' '개인' '근대' 등의 번역어는 학문과 사상의 기본 용어이면서, 중학교와 고등학교 교과서나 신문지면 등에도 자주 나오는 말이다. 그런데도 가정의 거실에서 가족들끼리 또는 직장 동료들끼리 편하게 대화를 할 때에는, 이런 말은 보통 사용하지 않는다. 상당히 교육 정도가 높은 사람의 가정이라 하더라도 그럴 것이다. 만약 편안한 자리에서 누군가가 이러한 말을 입에 올린다면, 주위 사람들이 얼른 자세를 고쳐 앉거나 자리가 썰렁해질지도 모른다. 즉 이런 말은 사용되는 장소가 한정돼 있어서, 일상 생활의 장에서가 아니라, 학교나 활자 속의 세계 혹은 집안이라 해도 공부방에서만 사용된다. ..

번역어와 일상사유: 야나부 아끼라『번역어성립사정』

'언어는 존재의 집이다'라고 말한 것은 하이데거였다. 언어가 먼저인지 '존재'가 먼저인지가 '닭과 달걀의 변증법'과 같은 쓸모없는 싸움이라 일컫더라도, 우리 '근대'사 속에서 등장한 서구어의 번역어들을 보면 하이데거 쪽의 손을 은근히 들어줄 수밖에 없는 형편이다. '존재'나 '근대'가 바로 그 번역어들이다. '사회,' '개인,' '권리'와 같은 것들이 바로 그 번역어들이다. 이들 번역어들의 특징은 시쳇時體말로 '썰렁하다'는 것이다. 뜻과 맛은 다르지만 '지나치게 학구적이다'라고도 할 수 있다. 하지만 서구어에서 être, moderne, société, individu, droit같은 낱말들은 평소에 자주 쓰이는 말들이다. 대표적으로 '사회'같은 낱말은 우리 현실에서는 거의 글말文語에서만 쓰인다고도 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