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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수 가운데의 정수淨水: 김구용 옮김『삼국지연의』

"'삼국지'는 없다"고 누군가가 자신의 '삼국지' 번역본 서문에서 말했다. '삼국지'는 홍수처럼 많이 출간되지만 진짜 '삼국지'는 어디에도 없다는 것이다. 이문열, 김홍신을 대표로 하여 정비석, 박종화, 조성기는 물론이고 멀리는 박태원 가까이는 황석영까지 당대의 글쟁이와 문장가는 삼국지 번역을 한 번씩 해보려는 욕심이 있는 모양이다. 이문열이 그 서문에서 말한 의미로 "쓸모없는 노력의 중복"이 없었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그들 모두는 '역자 서문'에서 출간의 변辨을 한 마디씩 하고 있다. 그런데 그 출간의 변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번역본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김구용 선생의 삼국지이다. 이문열은 '평역 삼국지' 서문에서 김구용 선생의 삼국지를 "거의 대역이 가능할 정도로" 모본을 충실히 따..

상상력과 자의식의 만화: Ocelot《프린스 앤 프린세스》

《왕자와 공주》는 '꿈과 희망의 공장'인 디즈니가 절대 넘볼 수 없는 수준의 새로운 아니마시옹이었다. 디즈니 애니메이션은 전체적으로 하나의 우화적인 알레고리에 불과한 것이지만, 《왕자와 공주》는 상상력과 자의식이라는 부분을 겹쳐놓은 풍부한 두께를 가지고 있었다. 비록 그 안에 소속된 단편들은 유럽의 고전 동화들의 세계관에서 유달리 나아진 것이 없지만, 그런 상징들을 그들이 체현體現하는 과정은 전혀 새로운 방식이었던 것이다. '원하는 대로 이루어진다' 내지는 '믿음대로 되니라'라는 표현에 기초해볼 때 이 영화는 피그말리온의 '믿음'과도 관련될 것이지만 사실은 그보다 더 자신을 향해 있다. 다시 말해 그것은 피그말리온적인 나르시시즘이다. 자신이 극의 주인공이고 싶어하는 것은 사실 아이들이 흔히 가지는, 잘 ..

극장전 2003.06.27

고도를 기다리며 쏟아내는 장광설: Beckett『고도를 기다리며』

'고도Godot'는 죽음이다. 도대체 사람이 이생에서 죽음말고 무엇을 기다릴 수 있단 말인가. 이성복이 삶이란 '집으로 가는 길'이라고 했던 것처럼 고도기다리기 역시 '집으로 가는 길'이다. '집'에 도달하면 그들은 살게(즉, 죽게) 된다. 블라디미르 내일 목이나 매자. (사이) 고도가 안 오면 말야. 에스트라공 만일 온다면? 블라디미르 그럼 살게 되는 거지. -『고도를 기다리며』오증자 옮김, 민음사, 2000, 158쪽. 그러나 그들이 아무리 죽기를 바라고 목을 매달아도 그들은 죽을 수 없다. 에스트라공 그렇다면 당장에 목을 매자. 블라디미르 나뭇가지에? (둘은 나무 앞으로 다가가서 쳐다본다) 이 나무는 믿을 수가 없는걸. (24쪽) 그곳은 '죽지 못하는 곳'이다. 에스트라공이 "그런데 아무 일도 일어..

대사의 리듬: 임영웅《고도를 기다리며》

극단 산울림의 《고도…》가 세계적으로 호평을 받았다는 소리도 들은 바 있고 해서 기대를 상당히 했는데, 그 기대가 전혀 깨어지지 않았다. 처음부터 끝까지 조금의 흠도 없이 진행된 연극은, 거의 세 시간이나 되는 긴 연극이었는데 전혀 지루하지 않았다. 예상과는 무척 다른 연극이긴 했다. 그건 나의 고정관념 때문에 텍스트를 잘못 읽어서 생긴 문제였다. '실험극', '부조리극' 따위의 말 때문에 나는 이 연극이 으례 지루하고, 시종 비장감을 줄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실제로 베케트의 '고도…'는 비장한 극이라기보다는 일종의 희극이라고 보는 편이 옳을 것이라고 이 연극을 보고 동의하게 되었다. 그리고 여전히 이것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형식이다. 비극적인 희극 혹은 희극적인 비극. 연극은 거의 완전히 원작을..

극장전 2003.06.21

소비에트판 집없는 아이: 오스뜨로프스끼『강철은 어떻게 단련되었는가』

최인훈의 『회색인』에는 독고준이 『강철은 어떻게 단련되었는가』에 대해 나름대로 평가하는 부분이 나온다. 아마도 작가 자신의 생각을 많이 투영하고 있을 그 평가는 이렇다: 그가 요즈음 읽고 있는 책은 『강철은 어떻게 단련되었는가』였다. 유명한 소련 작가의 그 소설은 러시아 제정 끝무렵에서 시작하여 소비에트 혁명, 그 뒤를 이은 국내 전쟁을 통하여 한 소년이 어떤 모험과 결심, 교훈과 용기를 통해서 한 사람의 훌륭한 공산당원이 되었는가를 말한 일종의 성장소설(成長小說)이었다. 그러나 그가 공산당원이라든가 짜르 정부가 얼마나 혹독했는가는 아무래도 좋았다. 소설의 처음부터 독자의 마음을 사로잡는 주인공 소년의 익살스럽고 착한 성격이, 그리고 황폐해가는 농촌과 도시의 눈에 보이는 듯한 그림, 주인공의 바보같이 순..

아이가 아이였을 때: Wim Wenders《베를린 천사의 시》

Als das Kind Kind war... 아이가 아이였을 때… 《베를린 천사의 시》의 원제는 '베를린의 하늘Der Himmel über Berlin'이다. 영어 제목은 '욕망의 날개Wings of desire'다. 아무데나 詩를 갖다붙이는 행태는 비난받을 것이지만, 이 영화의 번역과 이 당시의 영화제목의 번역은 상당히 성공적이었던 것 같다. 내용과도 잘 부합하고 있다. 적어도 《식스 센스》, 《나씽 투 루즈》, 《어댑테이션》따위보다는 훨씬 낫다. 역사가 생기기 전부터 있었던 천사는, 영화에서 색맹이다. 그들은 지하철, 도서관, 누군가의 집, 길거리…… 어디에나 있지만 사실은 아무 데도 없다. 가령 그들에겐 모든 역사가 TV이다, 환상이다. 감정도 얼마간 가질 수 있고 사람들의 생각도 마음대로 읽어내지..

극장전 2003.06.17

더 아름다운 천국: Hesse『페터 카멘친트』

『페터 카멘친트』는 헤세의 데뷔작이다. 나는 그래서 이 작품이 정돈되기 보다는 거칠은 어떤 것을 갖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소설을 읽는 내내 나는 그런 것을 아무것도 찾아낼 수 없었다. 작품은 깨끗했다. 데뷔작에서부터 우리가 흔히 '헤세적'이라고 말하는 것들이 잘 드러나고 있었다. 가령 자연 친화, 기독교적 신의 거부, 민중적 삶에 대한 애착 등이 여기서 페터 카멘친트라는 인물을 통해 제대로 드러나고 있었다. 아마 이것들은 이미 그의 유년기에 형성된 것이기가 쉽다. 인도 선교사였던 그의 아버지와 동양학자였던 외할아버지의 영향이 크지 않았을까 상상해 볼 수 있겠다. 카멘친트는 '촌뜨기'다. 그는 도회지에서 사교생활을 해보지만 결국 그는 촌뜨기로서 시골로 돌아간다. 줄거리만 가지고는 『수레바퀴 아..

건조한 울음의 낭비: 이원세《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전양자, 안성기, 김추련, 금보라, 전영선 등의 캐스트로 지금으로 봐서는 상당한 스타캐스팅인 것 같다. 그러나 내용은 원작에 훨씬 미치지 못하는 영화였다. Rendez-vous de Séoul의 '서울프랑스영화제'에 포함되어 상영된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을 보았다. 무엇보다도 조세희의 원작은 연작소설임에도 마치 장편소설처럼 일관된 무언가가 있어 그 짜임새를 잘 느낄 수 있게 하였는데, 이 영화는 장편영화임에도 장면과 장면들이 긴밀하게 연결되지 못하고 분산된 느낌을 주었다. 영수(안성기 分)를 중심으로 영화 줄거리가 이끌어지기는 하는데 그것이 아버지와 동생들, 명희 등의 에피소드들로 나뉘어 있는 것 같다는 것이다. 영화는 또, 비루함을 가지고 원작의 정신을 야금야금 갉아먹고 있었다. 난장이네 가족들..

극장전 2003.06.14

분석된 시: Brecht『시의 꽃잎을 뜯어내다』

브레히트가 시에 대해 가진 생각은 아주 독특하다. 문학과 예술의 무용성無用性을 강조하는 일군의 예술가와는 달리 브레히트는 문학 역시 써먹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브레히트의 첫 시집인 『가정기도서』는 "이 가정기도서는 독자들이 사용할 수 있게 만들어졌다. 이 시집은 아무 의미없이 처먹혀서는 안된다"라는 사용지침서를 가지고 있다. 브레히트가 시의 사용가치를 중요시하는 것은 그의 서사극 이론의 핵심인 '낯설게하기효과Verfremdungseffekt'와 일맥상통하는 개념이다. 그러므로 사실 놀랄만한 일이 아니다. 이 책의 소중한 점 가운데 하나는, 모든 면에서 신비주의를 배격한 브레히트가 시인들에게 하는 충고이다. 책의 표제로도 쓰인 '시의 꽃잎을 뜯어내는 일'은 시를 하나하나 분석하는 일이다. 그는 꽃이 꽃..

타오르는책/詩 2003.05.29

죽음의 시, 시의 죽음: 허만하『비는 수직으로 서서 죽는다』

김구용 선생이 옮긴 『삼국지 연의』를 사러 헌책방에 갔다가 우연히 발견한 책이다. 인터넷 서점에서 검색해보니 나올 당시 신문에서 꽤 많이 떠들어댄 것 같은데, 왜 내 기억속엔 남아있지 않았을까. 아무것도 몰랐던 처음에는 그저 책꽂이에 꽂힌 걸 보고 제목이 좋았고, 꺼내서 겉을 살펴볼 때는 책의 디자인과 장정이 마음에 들었다. 문학동네나 민음사에서 나오는 하드커버 시집과는 달리 품격이 있어보였다. 표지에 다른 유치한 디자인 없이 시를 넣어, 그 시만으로 표지가 되게 하는 것도 좋았고, 그걸 제목 그대로 수직성있게 배열한 것도 마음에 들었다. 무턱대고 살 수는 없었다. 책장을 넘겨 몇 편의 시를 보았다. 느낌이라고 하면 너무 추상적이지만, '흉내내는' 시인은 아니라는 생각이 퍼뜩 들었다. 늦가을 투명한 바람..

타오르는책/詩 2003.05.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