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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비주의와 진실: Sontag『은유로서의 질병』

신비주의와의 싸움은 지금의 현실에서 소중하다. 이 시대에도 아직 신비주의가 횡행하고 있는 탓이다. 지금 우리가 가진 신비에는 어떤 것이 있을까. 이를테면 '죽음'이 있다. 어느 시인을 두고, 그의 죽음이 그의 시를 이루었다고 말하는 것이나 그가 스스로의 죽음을 시에서 예견했다고 말하는 것은 일종의 신비주의다. 그런 식의 신비주의는 문학을 정치하게 보려는 노력과는 정반대되는 것이다. 그러하므로 그것은 올바른 문학이론이나 문학비평이 될 수 없다. 그것은 현대비평이 혐오해마지 않는 실증주의와 인상주의의 단점만을 수용한 최악의 읽기다. 수잔 손택의 『은유로서의 질병』은 질병이 가지고 있는 신비주의를 하나하나 검토해본 책이다. 친인척들을 병으로 잃은, 그리고 스스로도 유방암을 비롯한 여러 병들을 겪은 저자는 '병..

『경제성장이 안되면 우리는 풍요롭지 못할 것인가』- 더글러스 러미스

『經濟成長がなければ私たちは豊かになれないのだろうか』 『경제성장이 안되면 우리는 풍요롭지 못할 것인가』 C. Douglas Lummis, 최종철·이반 옮김, 녹색평론사. 2002년 12월 10일 초판, 2003년 2월 20일 2쇄. 일본에 와보기 전에는 '영어회화(English Conversation)'라는 말을 그 어디서도 들은 적이 없었다. 물론 이 두 낱말이 어떻게 해서 복합명사화하게 되었는지, 그것을 이해하지 못할 바는 아니다. 그러나 일본인들이 쓰는 영어회화라는 표현은 그것이 영어로 대화를 나눈다는 것 이상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는 점에서 모종의 슬로건적 느낌을 풍긴다는 것 또한 사실이다. "영어로 말하는 법을 배우고 싶다"는 것이 아니라 "영어회화를 하는 법을 배우고 싶다"라는 우리가 종종 접하게..

율격의 방기放棄: 김용택『그 여자네 집』

좋은 시집이 가져야만 하는 덕은 사색과 운율과 새로움이다. 그 중에서 시를 시답게 만드는 것은 무엇보다도 운율이다. 운율韻律은 그 말에서도 알 수 있듯이, 운韻과 율律이다. 운韻을 쓰지 않는 우리시에서는 율律로만 보더라도 그다지 틀리지 않을 것 같다. 김용택의 『그 여자네 집』은 좋은 시집이 가져야만 하는 사색과 운율과 새로움을 모두 방기放棄하고 있는 시집이다. 그 중에서도 운율을 깡그리 망각하고 있다. 그의 시가 이른바 산문시poème en prose라서 하는 말이 아니다. 산문시도 훌륭한 운율을 가질 수 있다. 하지만 『그 여자네 집』의 산문시는 그런 운율을 거의 찾아볼 수 없다. 나는 방금, "『그 여자네 집』의 산문시"라고 말했다. '김용택의 산문시'가 아닌 이유는 그가 이미 훌륭한 산문시를 우리..

타오르는책/詩 2004.01.13

어린왕자와 경계부수기: J.-P. David『다시만난 어린왕자』

어린왕자가 지구로 다시 돌아왔다. 그의 별에 어쩌다 호랑이가 머물게 되었고, 호랑이 때문에 양과 장미가 위협을 받게 되었기 때문이다. 어린왕자는 호랑이 사냥꾼을 찾고 있다. 워낙 쌩떽쥐뻬리의 『어린왕자』는 동화로 씌어진 것이다. 동화가 소설보다 수준낮은 것이라는 생각은 큰 오산이리라. 쌩떽쥐뻬리는 심지어 『어린왕자』를 어른인 레옹 베르뜨에게 헌정하는 것을 어린이들에게 사과하고 있기까지 하다. 쌩떽쥐뻬리가, 혹은 그의 어린왕자가 경멸했던 것은 '버섯'같은 어른들의 사고방식이다. 『다시 만난 어린왕자』에서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어린왕자는 어른들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것은 그가 자신의 별(사실은 행성)을 떠나 지구로 오는 길에 만난 많은 사람들이 어떻게 그려지는지를 보면 금방 나타난다. 어린왕자는 차례로 환경..

순수주의의 위험: 박숙희『반드시 바꿔 써야 할 우리말 속 일본말』

말이 바뀌는 것은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대체로 '사회의 변화'가 그 원인이라고 보면 틀리지 않을 것 같다. 언어학자 울만Ullmann은 말의 의미변화 원인을 언어적, 역사적, 사회적, 심리적 원인, 그리고 외래어의 영향에 의한 원인 등 다섯 가지로 나누었지만 그 다섯 원인들이 무자르듯 정확하게 갈라지는 것은 아니다. 가령 우리네 근대화 과정을 생각하면 일본을 통해 서구문물을 받아들이면서 외래어 혹은 외국어의 영향은 피할 수 없는 것이었고, 그것은 또한 사회적 원인이기도 하다. 그 과정에서 음이 비슷한 것들은 의미혼동을 겪게도 된다. 역사적 원인이라는 것은 이런 사실들을 통시적으로 보았을 때의 변화라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비근한 예를 찾느라 우리네 근대화 과정을 예로 들었지만, 사실 그만큼 심각한..

구체具體 위에 핀 죄의 꽃: 도스또예프스끼『까라마조프 씨네 형제들』

성서는 크게 보아 '구원의 역사'이다. 아담의 첫 범죄sin 이후 모세가 시내 산에서 십계명을 받는 때를 거쳐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 박힘으로 '구원'이 올 때까지의. '구원'이 있기까지는 '죄'가 있어야 하므로 성서는 또한 '죄'의 역사이다. 그러나 '죄'가 무엇인가, 하고 물으면 누구도 쉽사리 대답하지 못한다. 누구든 "신(神)이 부과한 명령을 어기는 것"이 죄라고 주장하려는 이는 '왜 카인이 십계명이 생기기도 전에 스스로를 괴롭게 해야 했는지'를 설명해야 할 것이다. 도스또예프스끼의 『까라마조프 씨네 형제들』은 그 '죄의 역사'를 소설적으로 재구성해내고 있다. 그리고 그럼으로써 죄의 개념을 보다 명확히 하고 있다. 대개 사람들에게는 죄가 선험성Apriotät을 지니고 나타난다면, 도스또예프스끼의 소..

중립성의 신화와 페미니즘의 목적: 『내셔널리즘과 젠더』

근대 이후의 사회도 근대 이전의 사회만큼이나 소수자가 억압된 사회이다. 여기서 근대가 시대를 가르는 기준이 되는 것은, 그 시기가 스스로를 '이성理性의 시기'로 규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근대는 이성에 윗점을 찍으면서 그것이 중심이 되면 '인권'과 같은 문제는 저절로 해결된다고 믿는다. 꽁뜨 이후의 이성중심주의 혹은 과학주의는 '사실fait'을 중요시하게 되고, 필연적으로 '실증성'을 강조하게 된다. 그것은 역사관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로, 실증주의자들은 "역사가들이 도달한 결론은 자연과학자들이 도달한 결론과 마찬가지의 객관성을 지녀야 한다고 믿고 있"어 일종의 '과학적 역사관'의 입장을 견지하고 있는 것이다(차하순, 62). 물론 학자가 사료를 접했을 때에는 '사료검증'을 먼저 해야 하는 것이 상식에 속하는..

베스트셀러와 오역: 리동혁『삼국지가 울고 있네』

이문열 평역 삼국지의 잘못옮긴 부분을 지적하고, 삼국지와 관련된 속설들을 소개하는 책이다. 책 자체의 목적이 앞의것에 있었고 서문이나 책겉의 광고글도 모조리 앞엣것에 대한 것이지만, 뒤엣것도 사실 상당한 분량을 차지한다. 특히 『유세명언喩世明言』이라는 소설집에 실렸다는, 사마모가 한나라 건국시의 영웅들을 삼국시대에 등장시켰다는 이야기는 상당히 흥미있는 이야기거리다. 이를테면, 한 고조를 도와 한나라의 건국공신이 되었던 한신이 억울한 죽음을 당했으니 후한 말에 조조로 다시 태어나게 하고, 한 고조 유방은 헌제로 다시 태어나게 한다고 사마모가 염라대왕을 대신하여 판결한다는 식이다. 책의 앞부분은 역시 이문열 삼국지의 틀린 부분을 지적하는데 많은 힘을 쏟는다. 이문열이 터무니없게 옮긴 부분은 생각보다 많았다...

헐리우드 vs. 지금-여기: 안정효『헐리우드 키드의 생애』

과감하게 중편이나, 장편이라도 좀더 짧게 압축시킬 수 있는 작품이다. 수많은 옛날 헐리우드 영화가 우리 눈을 어지럽히고, 그 배우들의 이름에 휘둘리기 십상이다. 하지만 이 작품에서 그 많은 영화제목을 빼고 나면, 이 작품은 그저 옛날엔 참 좋았지 류의 과거를 아름답게 재구성하는 회고소설에 불과해질 것이다. 회고소설? 하긴 어떤 이는 이 소설을 회고소설이라고 부를 것이고 어떤 이는 이 소설을 표절에 대한 소설이라고 부를 것이지만, 이 소설은 기실 그 아무 것과도 관련이 없다. 영화가 삶의 한 부분이었던 그 당시를 애정어린 손길로 재구성해내고 있으면서도, 항상 '지금-여기maintenant-ici'를 잊지 않고있는 작가의 펜은 헐리우드 키드가 느꼈던 '고스트幽靈 현상'과는 정반대되는 방향을 가지는 것이다. ..

디테일의 힘: 홍상수《강원도의 힘》

홍상수의 영화는 건조하다. 영화가 줄거리삼은 것들이 결코 건조하지 않고 오히려 '질펀'하거나 축축한데도 건조하게 느껴지는 것은 '홍상수 어법'이라고 불릴 수 있는, 이야기를 푸는 방식탓이다. 식당에서 날아드는 파리를 쫓는 모습이나 금붕어에게 가만가만 먹이를 주는 모습같이 아무렇지 않은 행동들 하나하나가 한 편의 영화를 지탱하는 힘이 되는 것 같다. 실제로 세밀한 언행, 혹은 그 기억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오! 수정》은 이어서 보다 자세히 보여주고 있기도 하다. 하지만 그것은 이미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에서부터 이미 홍상수 감독의 중요한 관심거리였음이 분명하다. 《강원도의 힘》에서 보다 적극적으로 서사를 이끌어가는 것은 공간이다. 직소퍼즐의 상상력을 동원해서 우리는 그 영화를 짜맞추어야 한다. 하지..

극장전 2004.01.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