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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이 말하는 '똘레랑스'

민주주의 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것을 꼽으라면 홍세화가 소개한 '똘레랑스tolérance'가 빠지지 않을 것이다. 홍세화가 인용한 바에 따르면 똘레랑스는 '다른 사람이 생각하고 행동하는 방식의 자유 및 다른 사람의 정치적·종교적 의견의 자유에 대한 존중'¹이다. 민주주의는 한 사람이 아니라 많은(모든) 사람이 주인이라는 것이므로, 똘레랑스는 민주주의에서 가장 중요한 토대중 하나라 할 것이다. *¹ 홍세화, 《나는 빠리의 택시 운전사》, 창작과비평사(1995), 289쪽. 노무현 대통령은 한총련의 5.18.묘역 시위로 행사 입장이 20분 가량 늦어진 사태를 접하고 많은 곤욕을 치른 것 같다. 그는 "자기 주장에 맞지 않는다고 사람을 모욕하고 타도대상으로 삼는 것은 법대로 처벌해야 한다"며 "난동자에 대해 법..

출판과 나의 삶: 민음사 박맹호 대표 강연 요약

강연의 시작은 박맹호 대표의 유년시절의 추억이나 전란 당시의 상황, 그리고 대학 졸업 후의 '낭인浪人'생활 같은 개인적인 문제로 시작했지만 마땅히 이어갈 말이 없었던지 곧장 본론으로 들어갔다. 박맹호 대표는 연대기에 따른 출판에 대해 조금씩 이야기했다. 그가 출판업을 시작하기 전에는 대부분의 책은 일본어 중역본이었다고 했다. 내용뿐 아니라 장정·디자인도 일본 책에서 그대로 베껴 글씨만 한글로 바꾸었다고 했다. 그는 거기서 '창피함'을 느꼈던 것 같다. 1950년대의 우리나라 출판은 '구루마くるま' 즉 수레에 끌고 다니며 출판사를 경영하는 수준이라고 했다. 책이 거의 일어판 중역이라는 점은 말할 것도 없다. 이런 때부터 시작한 출판사로 계몽사나 삼성출판사, 금성출판사 등을 예로 들었다. 그렇지만 50년대 ..

상황Situations 2003.05.21

토속어의 유화油畵: 이문구『내 몸은 너무 오래 서 있거나 걸어왔다』

낮이고 밤이고 혼자였던 시절, 외로움이든 무엇이든 밀려오면 소설을 읽었었다. 으례 소설은 읽히는 것으로 여겼었고, 그 예외라면 스토리 위주가 아닌 『낯선 시간 속으로』정도를 들었다. 이문구의 『내 몸은 너무 오래 서 있거나 걸어왔다』는 스토리 위주라고는 할 수 없지만 그래도 스토리가 상당히 살아있는 단편집인데도 나를 오래도록 붙들고 놓아주질 않았다. 책 뒷표지를 보았다. "여기에서 말은 이미 말 이상이다." 말이 말보다 윗길에 있다면 그의 소설이 시詩라는 말이 된다. 이문구는 시를 썼던가. 책을 다 읽고 나서의 자답自答은 '그렇다'였다. 그가 충청지방의 토속어로 소설을 썼다, 고 대체로 말하겠지만 사실은 그가 충청지방의 토속어를 썼더니 그것이 소설이 되었다고 하는 게 더 옳을지도 모를 정도로 그의 소설은..

연애소설 아닌 척 하는 연애소설: 쓰지 히토나리『냉정과 열정사이 Blu』

쯔지 히또나리의 『냉정과 열정사이』도 결국 얼마간 연애소설을 벗어난 체하는 트랜디 연애소설일 뿐인 것 같다. 쥰세이의 직업이 독특해서 몇몇 전문적인 단어들이 등장하고 그것이 소설의 상당부분을 차지하고 있지만 그것이 소설의 축이 되지는 못하고 있다. 하나의 지엽으로 그칠 뿐이다. 작기는 때로 神에 비견된다. 소설은 사실 작가의 상상력의 산물이고 소설의 등장인물 역시 실제로는 없는 사람이다. 하지만 작가는 신이어서는 안 된다. 상상력은 망상과는 다르기 때문이다. 그것은 이를테면 '신의 거짓말'처럼 본래부터 모순되는 개념이다. 소설은 삶을 담아야 한다. 그러나 짧게는 하루에서 길게는 몇 달, 몇 년, …, 몇십 년까지 다루는 소설에서 삶의 세목들을 모두 다룰 수는 없다. 작가는 무엇을 더할 것인가보다 무엇을 ..

어느 원어민 영어 강사의 오만

지하철에서 무료로 배포되는 《메트로》 4월 28일자에는 한국인의 '콩글리시'에 대한 비웃음이 실렸다. 론 샤프릭이라는 성균관 대학교 영어강사의 글이었는데 그의 글을 읽고서 나는 부아가 났다. "한국엔 눈에 거슬리는 콩글리시 너무 많아요" 론 샤프릭 성균관대 성균어학원 강사 kimhyuck@chollian.net 영어를 배우는 일이 한국인에게, 특히 대학생들에게는 아주 중요하고 절실한 일인 것 같다. 취업을 위해서든, TOEIC 고득점을 위해서든 영어를 공부하는 사람들이 많다 못해 차고 넘친다. 그러나 공부하는 것에 비해 영어 구사능력은 별로인 것 같다. 한국인들은 평소 대화중에 외국어, 특히 영어를 많이 섞어 말을 한다. 같은 민족인 북한사람들과 의사소통이 잘 안된다는 말이 있을 정도라니. 채팅, 커뮤니..

새로운 창조 신화: 미야자끼 하야오《모노노케 히메》

《원령공주》의 우리나라 개봉일이었다. 연인과 함께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을 보았고, 어제는 《이웃집 토토로》를 보았다. 《센》이나 《토토로》에서는 조금 약화되거나 암시적으로만 있고, 《원령공주》나 《나우시카》에서는 좀 더 주제의식이 명확하다는 차이는 있지만, 전체적으로 미야자끼 하야오 감독은 '생태'를 그 가운데 두고 있다고 생각된다. "인간과 숲이 함께 살아갈 수는 없나요?" 인간의 추악하고 역겨움, 그건 인간이 자연의 일부가 되지 않을 때 이미 예견된 일이 아니었을까? 신들이나 자연이 인간을 역겨워 하거나 증오하는 것은 인간이 스스로를 자연보다 위에 놓고 있기 때문이다. 아마도 새것 콤플렉스와 성장발전의 패러다임을 가진 사람들은 '에보시'가 왜 단죄되는지 알 수 없을 것이다. 그는, 사람들이 이르..

극장전 2003.04.25

소통의 서사극: Brecht『서사극 이론』

나는 브레히트의 '서사극 이론'이라는 전작 저술이 있는줄로 알았다. 전에 한두페이지 읽다가 치우고 읽다가 치운 책을 이틀에 걸쳐 읽었다. 글이 씌어질 당시의 정황이나 다른 희곡 작품들에 대한 지식이 필요한 글들도 조금 있어서 수월치는 않았다. 전체적으로는 지루했다. 전작 저술이 아닌 까닭에, 같은 내용이 여러 편의 논문이나 강연록에 자주 비슷한 형태로 노출되었다. 지속적으로 그가 강조하는 것은 '감정이입'에 대한 비판과 '낯설게 하기 효과Verfremdungseffekt'이다. 어떤 의미에서 그는 연기를 잘하는 배우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것 같다. 감정이입에 대해서 그가 가진 불만은 이렇다. 배우가 연기를 잘하면 잘 할수록 관객들은 그 역할에 감정이입되어 자기가 '그'인 것으로 느끼기 때문에 여러 부작..

복잡함의 단순화: Kassovitz《제이콥의 거짓말》

영화 《제이콥의 거짓말Jacob the Liar》는 유렉 베커Jurek Becker의 소설『거짓말쟁이 야콥Jakob der Lügner』를 영화화한 것이다. 로빈 윌리암스가 아니면 못할 제이콥 역이 훌륭하게 소화되는 것을 오늘 보았다. 적어도 선/악이 그렇게 단순한 구도는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는 멋진 영화같다. 단순화함으로 복잡함을 드러내는 것은 이 영화의 장점이다. 그런 점에서 이 영화는 베커의 소설을 잘 영상에 옮겨놓았다. IMDB 링크

극장전 2003.04.19

『살아남은 자의 슬픔』- Brecht (나의 어머니)

김광규 시인이 옮긴『살아남은 자의 슬픔』(한마당)을 읽었다. 널리 알려진 그의 여러 시편들보다 오히려 내 마음을 끄는 것은 다른 것들이었다. 「울름의 재단사」는 몇 달 전에 읽고서 멋지다고 생각해오던 것이지만, 오늘은 새로운 좋은 시를 발견(!)했다. 시가 좋다는 것은, 함축성이 뛰어나 여러 가지로 읽힐 수 있다는 뜻이다. 그뿐 아니라, 그 수많은 읽힘이 모두 타당하도록 진실성이 있다는 뜻이다. 나의 어머니Meiner Mutter (1920) 그녀가 죽었을 때, 사람들은 그녀를 땅 속에 묻었다. 꽃이 자라고, 나비가 그 위로 날아간다…… 체중이 가벼운 그녀는 땅을 거의 누르지도 않았다. 그녀가 이처럼 가볍게 되기까지, 얼마나 많은 고통을 겪었을까. 여기서 '가볍다'는 것은 물리적인 것만은 아닐 것이다. ..

타오르는책/詩 2003.04.19

새로울 것 없는 독서의 기술: Adler『독서의 기술』

애들러의 『독서의 기술How To Read a Book』은 기술적인 독서법에 관한 책이다. 저자는 여기서 독서를 초급 독서, 점검 독서(골라 읽기 혹은 예비독서), 분석 독서, 신토피칼 독서로 나누고, 신토피칼Syn-topical 독서의 유용성을 말하고 있다. 능동적인 면을 갖고 있지만 대개 수동적이기 쉬운 독서활동이 신토피칼 독서에 이르면 거의 능동적인 태도로 바뀐다고 한다. 그의 독서론이 그다지 새로울 것은 없다. 가령, 논문이나 에세이를 하나 쓴다고 할 때, 누구나 그가 말하는 신토피칼 독서를 하고 있지 않은가? 그런 독서는 대개가 그 분야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있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것이다. 저자도 그것을 '신토피칼 독서의 패러독스'라고 하며 인정하고 있다. 신토피칼 독서의 패러독스(역설)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