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움직이는 시간, 움직이지 않는 시간: Prado『섬』

프라도의 『섬』은 특이한 만화다. 대부분의 만화는 몰입없이 빨리 읽을 수 있도록 비교적 단순한 서사구조récit를 가지는 게 보통이다. 그래서 심지어 어떤 만화들은 형식적인 아름다움을 갖지 못하고 내용으로 환원되기도 한다. 그런 만화들의 경우에는, 한 편의 작품이 그 줄거리로 대체되어도 큰 문제가 없어보인다. 『섬』은 독자의 몰입을 요구한다. 독자는 이 작품에서 이야기하려는 바가 무엇인가, 이 작품이 왜 이렇게 구성되었는가를 생각하기 시작하고, 종국에는 작품에 깊이 몰입하게 된다. 퍽 짧은 이 책이 두번씩 세번씩 읽히는 이유도 그것이고, 시일이 지난 뒤에도 다시 꺼내읽게 되는 이유도 바로 그것이다. 스콧 매클루드는 그의 『만화의 이해』에서 '홈통'의 역할을 강조하며, 바로 그곳이 독자의 상상력이 개입할 ..

『쥐의 똥구멍을 꿰맨 여공』- 베르나르 베르베르

L'Encyclopedie du savoir relatif et absolu Bernard Werber, 이세욱 옮김, 열린책들. 2001년 6월 15일 초판 1쇄. 꿈의 부족 1970년대에 미국의 두 민족학자가 말레이시아의 깊은 숲 속에서 세노이라는 원시 부족을 발견하였다. 그 부족은 꿈을 삶의 중심에 놓고 살고 있었다. 그래서 이라는 별명도 얻었다. 매일 아침 불가에 둘러앉아 식사를 할 때 그들이 나누는 이야기는 오로지 간밤에 꾼 꿈에 관한 것뿐이었다. 만일 어떤 세노이가 누군가에게 해를 끼치는 꿈을 꾸었다면, 그는 꿈속에서 해를 입은 사람에게 반드시 어떤 선물을 주어야만 했다. 또, 꿈에서 남을 때린 사람은 맞은 사람에게 용서를 구해야 했고, 그러기 위해서 역시 선물을 주어야 했다. 세노이 부족은 ..

언어학 없는 언어학교: 강범모『영화마을 언어학교』

'영화보다 재미있는 언어학 강의'라는 부제를 달고 있지만, 언어학 강의라 하기에 깊이도 없을 뿐더러 재미도 없다. 아니, 본제부터가 잘못되었다. 이 책은 '영화마을'에 있지 않고 그 언저리에 있을 뿐이다. 거의 60편에 달하는 영화 속에서 언어학을 설명하려고 글쓴이는 애쓰고 있지만, 그것이 영화의 내용과 잘 융합되는 경우는 거의 없다. 대개는 영화의 제목이나 아주 사소한 것에 집착해서 그에 대한 이야기로 한두 페이지를 채우는 것에 불과하다. 물론, 그런대로 괜찮은 몇몇 사례들은 있다. 《쥬라기 공원3》에서 공룡들의 의사소통이 우리의 언어와 달리 무한성을 갖지는 않을 것이라고 말하는 부분은, 오로지 추측만을 가지고 한 말이라는 결점은 있더라도, 그런대로 봐줄 만한 언어학적 설명이라고 하겠다. 또, 《인랑人..

지하철 자살과 즉물적 인식

수능철이라 그런가. 다시 많은 사람들이 스스로 죽었다. 덕분에 TV와 신문은 참 오래간만에 한목소리로 "사실 그동안 우리나라 지하철은 너무 위험했다"고 입을 모으고 있다. TV와 신문의 특징은 항상 사고가 일어난 다음에 "사실 그동안 우리나라 …… 너무 ……했다"라고 하는 것이지만, 어쨌든 시민들은 돈내고 이용하는 지하철이 전혀 안전하지 않음을 이번에 몸으로 느끼고는, 그런 언론의 주장에 동조하는 모양이다.맞다. 맞는 말이긴 하다. 우리나라 지하철 타는곳은 너무 위험하다. (바다 바깥의 사정이 어떠한지 비교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땅이 좁아서, 또 지형적인 원인으로 해서 타는곳이 굽어있는 경우가 많은 것도 중요한 이유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또, 이용하는 사람들이 지나치게 많은 탓도 있을 것이다. 위..

거시기들의 힘: 이준익《황산벌》

"아낙도 우두머리도 돌볼 새 없이 갔단다" - 이용악「오랑캐꽃」 사투리를 줏대로 하여 황산벌 당시의 상황을 그려보겠다, 는 발상으로 만든 영화, 라는 문구가 《황산벌》의 주된 광고전략이었다. 하지만 실제에 있어서는 《황산벌》은 웃음을 주기 위한 오락영화에서 조금쯤 비켜서 있었다. 《황산벌》은 일단 무엇보다 '전쟁영화'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몇몇 '리얼'하다는 전쟁영화에서 쓰인 '들고 찍기hand held'의 방법이 여기에서도 쓰였는데, 그것은 꽤 희화화 되긴 했지만 그 가운데서도 참혹함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는 전쟁의 장면들을 자세히 그리고 있다. 희화화된 전쟁도 여전히 잔혹스러움을 드러내고 있으니, 그것은 온갖 성적인 코드들로 무장한 두 진영의 '욕' 싸움에서 그대로 드러난다. 어느 나라나 성적인 의..

극장전 2003.10.19

나침반없는 좌우와 오락가락하는 정부와 언론

1 얼마전 한총련 학생들의 미군 장갑차 점거 사태가 있었다. 뉴스를 보면서 좌우를 막론하고 우리의 가슴은 수천년래 그래왔던 대로 철렁하고 다시 내려앉았다. 정부는 '한총련 합법화 논의'의 백지화를 검토했고, 다음날 부랴부랴 '합법화'는 변함없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강금실 법무장관은 여전히 '신중론'을 폈다. 그것은 안보의 두려움을 반드시 느꼈을 보수·우파들과 전략적으로나 인정人情적으로 안타까움을 느꼈을 진보·좌파들이 함께 슬퍼할 만한 사건이었다. 하지만, 다만 추측일 뿐이지만, 어떤 면에서 접근해보면 이것은 한총련이 지휘체계의 일관성을 잃었을 것이라는 생각을 가능케 하기도 한다. 미군 장갑차 점거하는 수준의 행동은 그들에게 실제적으로나 상징적으로 아무 의미가 없는 행동들이다. (과거 '삼민투'의 미문화원..

두 권의 문장론 책: 이태준『문장강화』, 김기림『문장론신강』

상허 선생의『문장강화』는 '文章强化'가 아니라 '文章講話'다. 초판(1940)으로 치면 63년, 증정판增訂版(1947)으로 쳐도 50년은 족히 넘게 오래된 이 책을 다시 읽은 이유는 여러 미디어에서 꽤나 칭찬을 해댔기 때문이다. 그리고 일기에라도 남겨두는 이유는 충분히 그 칭찬에 값하는 것 같이 여겨지기 때문이다. 사실 이 책에 대한 칭찬은 해제를 쓴 임형택 교수가 다 한 셈이니, 무엇보다 이 책은 설명하는 글이 아니라 보여주는 글인 것이다. 부록의 예문 색인만 네 쪽이 되니 그것은 수치로도 증명되지만 어느 쪽이고 책을 펼쳐봐도 예문이 없는 장면은 볼 수 없다시피 하다. 어느 곳은 아주 예문이 왼쪽-오른쪽 두 쪽을 꽉 채우고 있기도 하다. 임 교수는 "예문의 풍부함은 신문학 20년이 도달한 우수한 성과를..

사랑의 확장: 미야자끼 하야오《바람 계곡의 나우시카》

『독일인의 사랑』의 마리아는 호메로스의 나우지카에서 사랑의 표본을 찾는다. 「옛날에는 달랐었던 것 같아요. 그렇지 않다면, 어떻게 호머가 나우지카 같은 사랑스럽고 건강하며 섬세한 여인을 만들어 낼 수 있었겠어요? […] 오늘날의 시인이라면 나우지카를 여자 베르테르로 만들어 버렸겠지요 […] 사람들은 오로지 취하게만 하는 묘약만 알 뿐, 생기를 주는 사랑의 샘물을 모르는 걸까요?」 -막스 뮐러『독일인의 사랑』신역판, 차경아 옮김, 문예출판사, 1987, 84-85쪽. 맥락은 다르지만 미야자끼의 애니메이션에서도 그 본질적인 것은 다르지 않다. 결국은 '사랑없음'이 모든 문제의 발단이고 '사랑'이 모든 문제의 해결책이다. 사랑이 진부한가? 아니다. 사랑이 진부하다면 성교性交도 식사食事도 수면睡眠도 모두 진부하..

극장전 2003.08.06

알레고리 없이 '워터십 다운' 읽기: R. Adams『워터십 다운의 열한 마리 토끼』

다른 많은 판타지 소설이 그렇듯이, 리처드 애덤스의 『워터십 다운의 열한 마리 토끼』도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려달라는 아이들의 요구에서 시작된다. 애덤스의 아이들은 "'지금까지 누구도 하지 않은' 길고 재미있는 이야기"를 원했다. 아이 때는 누구나 이야기를 원한다. 삶의 언어, 언어로 표현된 삶이 인간에게 본래적인 즐거움을 가져다준다는 증거이다. 허구虛構를 뜻하는 '소설fiction'이라는 말에 환상幻想을 뜻하는 '판타지fantasy'라는 말이 덧붙여졌을 때, 그 말의 파괴력은 절정에 달한다. 그것은 그야말로 '거짓'의 극한極限이다. 그런데, 놀라워라, 판타지 소설의 독자는 그 '거짓'을 '거짓' 그대로 믿게 된다. 이름에서 보자면 허구의 끝으로 달려가는 것이 판타지소설인데도 판타지소설의 독자는 그것을 진..

삼국지의 홍수 속에서: 황석영 옮김 『삼국지』

출판도 유행을 따르는 것 같다. 아니, 내가 헤아려 보건대 출판이야말로 유행에 가장 민감한 분야 중 하나다. 멀리 볼 것도 없이 셜록홈즈 전집이나 뤼팽 전집이 시일에 큰 차이를 두지 않고 두세 출판사에서 중복 출판된 것이 하나의 예가 될 것이며, 또 얼마 전의 '쥘 베른'의 중복 출판도 사례로 들 수 있을 것이다. 이번 유행은 '삼국지'다. 소설가 황석영이 『삼국지』를 준비하고 있다는 것이 알려질 때 즈음하여 다른 출판사들은 공격적인 마케팅에 나섰다. 『삼국지』로 가장 많은 상업적 성공을 본 민음사나 정역正譯의 자부심이 넘치는 솔출판사의 온-오프라인 서점 마케팅은 꽤나 살벌했다. 그 와중에 나는 글 한편 '이링공 뎌링공' 만들어 '당첨'이 되기도 했다. 그러나 기분은 그렇게 깔끔하고 깨끗하지 않다. '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