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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데스리거?

차두리가 '분데스리거'라고 했다. 가십성 기사를 써대는 작은 언론사의 일이 아니다. 포털 사이트에서 '분데스리거'로 뉴스 검색을 해보면 알겠지만, KBS와 MBC, 동아일보, 미디어오늘 등의 굵직굵직한 언론사가 이와 같은 용어를 썼다. 분데스리거라... 난 축구에 대해 잘 모르지만, 영국과 에스빠냐, 이딸리아, 독일의 축구 리그를 4대 리그라고 한다는 것은 들은 적이 있다. 각 리그는 당연히 제나라 말로 표기한다. 영국은 프리미어 리그Premier League, 에스빠냐는 프리메라 리가Primera Liga, 이딸리아는 세리에 아Serie A, 그리고 독일은 분데스리가Bundesliga인 것이다. (독일어는 복합명사를 무조건 붙여 쓴다.) 분데스리가는 연방, 연맹이라는 뜻의 분트Bund에 동맹, 단체라는..

단지 가설집: Morris『털없는 원숭이』

오래 이 책을 묵혀두면서 내가 기대했던 것은, 객관성이었다. 동물학자의 인간론이라면 마땅히 갖춰야 할 무언가를 기대했던 것이다. '털없는 원숭이'라는 제목은 내게 그런 기대를 품게 했다. 책을 다 읽고난 지금은 무척이나 실망스럽다. 처음 머리말을 읽을 때부터 심상치않았다. 초기의 인류학자들은 우리의 본성이 갖고 있는 기본적인 진리를 해명하기 위해 세계에서 가장 엉뚱한 곳만 찾아다녔다. 그들이 부지런히 달려간 곳들은, 이를테면 전형적인 것과는 거리가 멀 뿐만 아니라 성과가 나빠서 거의 소멸해 버린 문화적 오지들이었다. [……] 그러나 그것은 전형적인 털없는 원숭이의 전형적인 행동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말해 주지 않는다. 이것은 주요 문명권에 속해 있는 정상적이고 성공적인 개체들―즉, 절대 다수를 대표하는 표..

서바이벌 게임: 박일문『살아남은 자의 슬픔』

80년대에 대학을 다녔어야 했다고, 스스로에게 늘 확인시키곤 했다. 1990년대 말에서 2000년대 초에 걸쳐서, 혹은 20세기 말에서 21세기 초에 걸쳐서 후다닥 해치운 대학 생활에 대한 약간의 자괴 같은 것도 있었다. 대학 생활이 내게 준 것은 무척 많았지만, 살펴보면 대개 지나간 것이나 아직 오지 않은 것에 대한 아쉬움이 함께 끼어 있었다. 맑스도 레닌도 제대로 읽지 못했고, 노동자의 삶을 위해 시위도 한 번 한 일도 없다. 그렇다고 학문을 깊이 탐구한 것도 아니다. 나는 늘 주위만을 기웃거렸을 뿐이다. 맑스-레닌을 읽기에 나는 너무 늦게 대학엘 들어왔고, 학문 탐구를 위해서는 너무 일찍 대학에 들어온 셈이다. 콤플렉스 탓일까. 내 책장에는 책들이 쌓이어 갔고, 그 책들은 다시금 내게 부담 혹은 콤..

참된 기억을 위하여: 황석영『손님』

삶은 기억의 축적이다. 기억들은 오늘을 받치는 토양으로 삶의 기저에 차곡차곡 쌓여있다. 그 기억들을 나름의 순서로 재구성하는 것이 소설을 비롯한 글의 목적이다. 문제는 흔히 그 기억들은 현실의 힘에 밀리고 눌려 쉽사리 지각변동을 겪게 된다는 데에 있다. 다시 말하면, 본래 사람이 가진 기억이라는 것이 사실 온전하지 않아서 우리가 기댈 만한 것이 못 된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기억하는 행위 그 자체는 참으로 의미있는 일이지만 그 기억의 내용은 우리가 전적으로 신뢰할 수 없는 것이다. 만약 우리가 어떤 사건을 대할 때 기억에만 의존한다면 우리는 사실을 은폐하고 왜곡하는 결과만을 볼 수 있을 것이다. 황석영의 소설 『손님』에는 이러한, 기억이 갖는 문제점들이 엿보인다. 황해도 신천의 학살 사건을 소재로 삼고 있..

눈보라와 기다림, 그 가능성: 황동규의 초기시

자신을 '바람'이라고 부르던 兄이 있었다. 그는 발소리도 없이 나타났다가, 인기척도 없이 사라지곤 했다. 그는 어쩌면 자유로웠을지도 모르지만, 나는 이제 '바람'으로서의 그가 많이 외로웠으리라고 짐작한다. 겨울의 문턱 즈음에 태어난 그가 스스로를 '바람'이라고 부를 때, 산뜻한 봄바람이 연상되는 경우는 없었다. 나는 매년 가을 경에 요절한 시인의 시비詩碑에 앉아 시를 읽곤 했다. 그때마다, 그때마다, 바람이 불었다. 황동규에게 '바람'이 갖는 의미는 각별하다. 그의 시는 항상 바람 부는 곳에서 있고, 그 바람은 또한 항상 비바람 아니면 눈보라다. 때문에 그의 바람은 "산 위에서 부는" 시원한 바람도, 더운 여름날 여자들의 치마 끝자락을 살짝 들어올리는 가벼운 바람도 아니다. 그의 바람은 늘 습윤濕潤하고,..

타오르는책/詩 2005.09.26

비평의 뿌리되는 문제로서의 장르의 이론: Frye『비평의 해부』

프랑스말 '쟝르genre'는 본래 다만 '종류'를 뜻하는 말이다. 이를테면 "J'aime ce genre de fille."라고 하면 "나는 이런 유의 여자를 좋아합니다."라는 뜻이다. 프랑스말 '쟝르'가 현재의 "문예 작품의 형태상의 분류"라는 뜻을 가진 국제어, 장르로 더 많이 인식되면서 말의 쓰임은 상당한 정도로 변한 셈이다. 그러나 프라이의 지적대로라면 "장르의 비평이론에 손을 댈 때 우리는 아리스토텔레스가 남기고 간 그 이론에서 한 발자국도 더 나아가지 못하고 머물러 있음을 발견한다."(64쪽) 우리가 이 지금 '장르의 이론'을 보아야 하는 이유는, 세미나 꺼리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장르의 이론이 프라이의 비평이론의 씨눈이기 때문이다. 또한 앞서의 문장에서 홀로 이름씨固有名詞를 지우고 그 문장..

경계의 시: 김록『광기의 다이아몬드』

흼과 검음의 사이엔 무엇이 있을까. 물과 뭍의 사이엔 무엇이 있을까. 아니, 어제와 오늘의 사이엔, 말과 말없음의 사이엔, 있음과 없음의 사이엔, 처음과 끝의 사이엔, 아니아니, 삶과 죽음의 사이엔 무엇이 있을까. 대답할 수 없다, 그렇다면, 검음과 흼의 사이엔 무엇이 있을까. 뭍과 물의 사이엔 무엇이 있을까. 아니, 오늘과 어제의 사이엔, 말없음과 말의 사이엔, 없음과 있음의 사이엔, 끝과 처음의 사이엔, 아니아니, 죽음과 삶의, 사이엔 무엇이 있을까. 말장난. 옳다, 하지만 당신들은 삶의 상징인(,) 혀의 역동적인 움직임을 관찰해본 일이 있는가. 한 번도 시집을 거꾸로 읽은 경험이 없는 사람은 지금 자리에서 일어나 물구나무서기를 해도 좋다. 「99.999999999」(158)는 100이 아니다. 곧,..

타오르는책/詩 2005.09.22

한국적 '시추에이션'과 차별-'역차별'의 역학관계

[박은주의 '발칙 칼럼'] '여자'라서 유리하다고? '역차별'은 차별의 반댓말이 아니다. '역차별'이라는 말이 제 구실을 하기 위해서는, 앞의 '역'이라는 접두어가 자취를 감출 수 있어야 한다. '역차별'론은 대개 가해자의 입장이기 때문이다. 29일자 조선일보에는 박은주 기자의 '역차별'론이 실렸다. 그는 "슬프게도 ... 자주 있었"기에 너무나도 쉽게 예측할 수 있는 '시추에이션'을 이야기했다. 그가 이야기한 이 '시추에이션'은 하나의 에피소드가 아니라, 우리 사회의 어떤 전형type이다. 적어도 '역차별'이라는 낱말은 그 전형을 딛고서야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다. 여성에 대한 차별이나 흑인에 대한 차별은 스스로를 드러내기도 하고 감추기도 한다. 그 말은 백인·남성은 그 사회에서 알게 그리고 모르게 혜택..

과학적 사고와 열등감

열등감이니 콤플렉스니 하는 말이 화제다. 그 말만큼 폭력적인 말이 없다. 김현 선생은 '오이디푸스 콤플렉스'가 지금의 독서 대중에게 폭력이 되고 있다는 것을 지적한 적이 있다. 어쨌든 한 번 '열등감'이나 '콤플렉스'로 낙인찍히면 자기 의사와 관계없이 그게 평생 아니면 영원히 간다. 정신분석 전문가도 아니고, 주치의도 아닌데, 본인도 모르는 콤플렉스를 사람들은 어떻게 그렇게 잘 집어내는 것일까. 이 열등감론이나 콤플렉스론의 무서운 점은, 상대가 반발하면 반발할수록 꼭 신빙성 있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필승의 법칙이다. 그러나 그 논지는 대개의 경우 과학적이지 못하다. 상당한 사람들이 당나라 황제가 선덕(여)왕¹에게 모란꽃 그림과 꽃씨를 보냈다고 알고 있다. 선덕왕은 대뜸 그 꽃에 향기가 없을 것이라 ..

사회적 약자와 국가주의

국민국가는 항상 '보통인'을 지향하지만, 사회적 약자를 이용한다. 중증 뇌성마비 장애인인 박세호 씨가 "전 군대에 가고 싶어도 갈 수가 없었습니다. 국방의 의무를 다할 수 있는 여러분은 축복받은 것입니다. 국방의 의무는 곧 축복입니다."라고 말한 건 그런 의미에서 국민국가의 농간이다. 과거 일본이 '대일본제국'을 칭할 때, 일본부인회가 여성 참전을 놓고 둘로 갈라져 싸운 일이 있다. 군대를 갈 수 없는, 따라서 국가를 지킬 수 없는 여성들은 항상 남성보다 못한 2등 국민으로 머물러야 했던 사정이 그들을 그렇게 만든 것이다. 아니, 거기까지 갈 일도 없다. 군가산점제의 위헌성을 알린 여성들을 남성들이 '이화 5적'이라는 이름으로 매도하고, 자신들이 군대에서 겪은 고난을 가지고 유세하는 장면은 아직 현재진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