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 전체보기 177

『가르강튀아 팡타그뤼엘』 발표회 - 유석호 선생님

라틴 문학이 유럽 각 민족문학으로 분산되면서 그 문학의 수준이 현저하게 저하되었다. 이후 그 각 민족 문학의 발전과정에서, 보다 자세히는 프랑스 문학의 발전과정에서, 소설의 형성기에 그 발전에 영향을 끼친 작가가 누구일까 생각하다보니 거기에 라블레Rabelais가 있었다. 마르뜨 로베르는 그의 『기원의 소설, 소설의 기원』에서 『돈끼호떼』와 『로빈슨 크루소』를 소설의 기원으로 보고 있다. 『로빈슨 크루소』가 들어간 것은 근대의 예술로서의 소설이 부르주아의 예술이라고 볼 때 이 작품이 시민계급의 가치관을 반영하는 작품이라는 점에서이지만, 『돈끼호떼』는 보다 근본적인 이유를 갖고 있다. 『돈끼호떼』는 단순한 스토리텔링만이 아니라, '어떻게 쓸 것인가'의 질문이 그 안에 들어있는, '글쓰기의 모험'을 하고 있..

상황Situations 2004.12.03

책상은 책상이다: S. Coppola《사랑도 통역이 되나요》

《사랑도 통역이 되나요》라는 황당한 제목으로 개봉한 영화다. 원제는 《번역에서 잃어버리는 것들Lost in Translation》 정도가 맞겠다. 만나는 사람마다 이 영화가 좋다고 추천들이었다. 영화를 소개하는 인터넷 사이트들은 두 상처입은 영혼의 만남 어쩌고 하면서 떠들고 있었다. 내가 보기에 이 영화를 '영혼의 만남' 운운하며 극찬하는 것이야말로 번역 과정에서 많은 걸 잃어버린 주제 같다. 영화평론가들의 문제점은, 항상 현실을 보지 않고 이데아를 보려고만 한다는 점이다. 이 영화는 '번역에서 잃어버리는 것'이라는 거창한 제목을 달고 있긴 하지만, 그냥 '로맨스' 영화다. 밥Bob과 샤를롯Charlotte이 상처입은 영혼이라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건 그냥 그뿐이다. 그런 정도의 상처라면 우리 주변에 널..

극장전 2004.11.28

현대시와 우리: 노혜경『뜯어먹기 좋은 빵』

現代詩는 낭만을 배반합니다. 近代의 詩는 낭만을 긍정하기도 하고 부정하기도 하면서 이중적인 태도를 취해 왔지만, 현대시에서 그런 것은 통하지 않아요. 왜냐하면, 사람들은 이제 똑.똑.해졌기 때문이죠. 센티멘틀이 바로 낭만임을 알기는 어렵지 않습니다. 낭만, 즉 로망roman이란 말은, 사실 불어에서는 소설, 즉 이야기란 뜻이거든요. 낭만은 통속적 이야기, 전개가 뻔한 이야기, 그것입니다. 삶은, 삶은 그것과 어떤 관계일까요. 그것은 인환의 말대로 "(인생이란) 외롭지도 않고 거저 잡지의 표지처럼 통속"한 것일까요? 어떤 의미에서 나는, 이 대목에서 인환에게 박수치고 싶습니다. 그러나 인환은 그렇다면 이미 시인은 아닙니다. 詩는 새로운 삶을 만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혁.명.시.란 419, 518, 1789..

타오르는책/詩 2004.10.01

나르시시슴과 그 확장: 김혜순 시 다섯 편의 분석

김혜순의 시는 '몸의 시'이다. 인간이 육체와 욕망을 발견하게 된 것이 르네상스 이후라고 한다면 그때부터 생산되었을 수많은 시들에 몸의 묘사나 언급이 안 나올 리 없지만, 김혜순의 시를 '몸의 시'라고 하는 것은 그보다 더 나아간 의미에서이다. 대개의 경우, 시에서 나타나는 몸은 주체이거나 대상이다. 1인칭의 몸이 다른 대상을 욕망할 때, 그 '몸'은 주체의 몸이다. 또 1인칭이 3인칭의 몸을 욕망할 때, 그 '몸'은 대상의 몸이다. 그런데, 김혜순의 시에서 '몸'은 주체이자 곧 대상이다. 이 강렬한 나르시시슴narcissisme, 그것이 김혜순 시의 본질이다. 김혜순 시에서는 특징적으로 물의 이마쥬가 무척 강렬하게, 그리고 지속적으로 나오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거기서 물의 이마쥬는 자세히 살펴보..

타오르는책/詩 2004.09.04

신발의 문제

독일의 극작가 브레히트는 '서정시를 쓰기 힘든 시대'를 묘사하며 "신발보다도 자주 나라를 바꾸"었던 시대라는 표현을 썼다. 이 구절이 충격적으로 다가오는 것은 쉽게 닳아 바꾸어야 하는 신발의 속성 때문이다. 그리고 신발이 그런 속성을 지닌 것은, 신발이 지극히 일상적이고 평범한 것, 곧 범인凡人의 것이기 때문이다. 신발을 얻기 위해 달리는 소년의 모습이나, 새 직장을 구하기 위해 떨어진 신발 밑창을 감추는 실업자의 모습이 영화 속에 종종 등장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적어도 우리가 경제 생활에 종사해야 한다면, 다시 말해 '먹고 살아야' 한다면, 신발은 필수적인 것이다. 모세가 만난 신神은 그래서 모세에게 "이곳은 거룩한 곳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고 요구했던 것이다. 신神은 신발이 상징하는 '천박한'..

체계적인 독서방법 가르쳐야

해마다 이맘때쯤이면 방학이나 휴가철을 맞은 사람들이 꼭 책읽기 다짐을 둔다. 오래 벼르던 대하소설 읽기 계획을 세우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고전을 통해 스스로를 뒤돌아보려는 사람도 있고, 역사책이나 교양과학 책을 읽으며 견문을 넓히려는 사람들도 있다. 특히 어떤 대학생들은 긴 방학을 이용해서 사상서 원전 읽기를 통해 스스로의 지적 토대를 마련하려는 시도를 하기도 한다. 해서 이제 행복한 책읽기의 계절은 가을이 아니라 여름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하지만 이 다짐과 시도 속에서는 책읽기의 즐거움보다 책읽기의 괴로움, 부담이 먼저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있다. 하루라도 책을 읽지 않으면 입안에 가시가 돋친다는 위인의 말씀을 우리는 하루라도 빼놓지 않고 귀에 새길듯이 들어왔다. 그 금언의 무게는 아무래..

유쾌한 여담: 정민『한시 미학 산책』

정민 선생님의 『한시 미학 산책』을 읽었다. (『정민 선생님과 함께 읽는 한시 이야기』를 지하철에서 하도 많이 발견한 탓에 '정민 선생님'이 굳어버렸다. 그렇지 않으면, 대개 '선생' 정도로만 이를텐데. 하지만, 훌륭한 책을 쓴 사람은 '선생'보다는 '선생님'이 옳다. 고등학교 시절 은사님은 중국에서는 존경의 뜻으로 '子'를 붙이지만 우리 나라에서는 '선생님'을 붙인다고 하셨다.) 한자와 한문문법에 익숙지 않아 보다 깊은 독서를 하기는 힘들지만, 그런 나에게도 이 책은 재미있으면서 생각할 거리를 많이 주는 책이다. 일주일에 한 편씩 한자 공부를 겸해 한시 한 편을 보면 좋겠다. 잊지 않으면 말이다. 여담이지만, 『한시 미학 산책』에 모란과 고양이에 얽힌 설명이 나온다. 이야기의 시작은 당 태종이 선덕여왕..

타오르는책/詩 2004.08.04

비논리적 설득: M. Moore 《화씨 9/11》

마이클 무어Michael Moore의 «화씨 911»은 다 알다시피 깐느에서 처음으로 황금종려상la palme d'or을 받은 첫 기록documentaire 영화다. 드림웍스의 야심작 «슈렉»조차 빈 손으로 돌려보낸 '오만한' 깐느가 선택한 기록 영화의 수준은 어느 정도일까. 그 속에 엄청나게 극적인dramatique 폭로가 있어 조지 W. 부시 대통령이 재기하지 못하도록 만들 정도일까. 혹은 이라크 침공의 도덕적·절차적 문제를 조목조목 파고들어 부시 대통령이 직접 그 영화를 보더라도 승복할 수밖에 없게 만들었을까. 아니다. 이 영화에 가득찬 것은 반어와 풍자다. 여러 번 기사화된 무어 감독의 발언에서 짐작할 수 있는 그의 비판방식 그대로를 이 영화에 담은 것이다. 그리고, 그 비판방식은 사실 길고 긴 ..

극장전 2004.08.02

친일진상규명특별법과 과거사청산

'청산淸算'은 '맑게 계산하다'라는 뜻이다. 본래 금전 거래에 쓰일 이 낱말이 '과거사 청산'처럼 의미가 확장된 것은 역사적·정치적 문맥 속에서 피해자와 가해자의 관계가 꼭 채무자와 채권자의 관계에 방불하다는 데서 착안한 것일 것이다. 그러나 불행히도 금전 거래와 달리 과거사는 '청산'될 수 없는 것이다. 역사가 가진 명백함은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최근 논란이 되고 있는 '친일진상규명특별법'은 이런 난관을 도외시하고 있다. 50년 이상이 지난 뒤에 행해지는 20세기 초에 대한 실사가 거둘 성과도 의문이거니와, 설령 명백한 친일행위가 드러났다 한들 그것이 우리와 후손들에게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는지도 알 수 없다. 자칫 정치적으로 이용될 염려도 무척 큰 이 일을 국가가 나서서 해야 하는 이유에 대해서 ..

한국사회와 언론 - 손석희

1 저널리즘Journalisme은 말 그대로 하루하루jour의 일이라는 뜻이다. 이것은 시사 프로그램이나 뉴스 뿐만 아니라 오락 프로그램까지도 포괄하는 의미이다. 다시 말해, 오락 프로그램까지도 시대를 관통하는 흐름을 담고 있다. 그들은 항상 대립되는 이데올로기를 전파하는데, 지금은 '성장 대 분배', '개혁 대 보수'의 대립으로 나타난다. 언론을 흔히 개에 비유하여 감시견watch dog, 애완견lap dog, 경비견guard dog이라는 별명을 붙이기도 한다. 우리는 5공시절에 철저하게 애완견의 역할을 수행했던 언론을 보아왔다. '보도지침'이나 '땡전뉴스'는 이제 유명한 얘기가 되었다. 또 이를테면, 《누가 한강의 자갈을 보았는가》라는 프로그램을 예로 들 수 있을 것이다. 저 프로그램에 따르면 한강의..

상황Situations 2004.05.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