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 전체보기 177

내재적 접근론과 과거사법

객관적이라는 것은 기준이 변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잣대가 하나라면 분란이 일어날 염려가 없다. 그것이 법치주의의 근간을 이룬다. 법치주의의 한계는 이미 선진先秦 시대에 유가 철학자들과 도가 철학자들이 누누이 강조했던 것이지만, 비할 수 없이 커진 현대 사회는 반드시 체계système에 의해 돌아가야만 하는 것이다. '경계인'이라 불리는 송두율 교수를 생각한다. 송두율 교수가 귀국 후 잡혀 있었던 이유는 그가 이북에서 노동당에 가입했던 전력 때문이다. 보수 언론들은 큼지막한 활자로 그 글씨를 써 놓고 가판대에서 손길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한두 장을 넘기면 송두율 교수가 썼던 책에서 '내재적 접근론'이 문제라면서 짐짓 독자들의 판단에 훈수를 두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송두율 교수의 '내재적 접근론'은 사..

극예술과 성격: Jaoui《룩앳미》

Non ! Rien de rien. Non ! Je ne regrette rien. Car ma vie, car mes joies aujourd'hui, ça commence avec toi! 아니요, 아무것도. 아니요, 난 아무것도 후회하지 않아요. 내 삶도, 내 기쁨도 오늘, 시작되었으니까요, 당신과 함께! 아녜스 쟈우이Agnès Jaoui 감독의 첫 작품인 《타인의 취향Le goût des autres》의 대단원을 이루는 노래, 에디뜨 삐아프의 '아니요, 난 아무 것도 후회하지 않아요'다. 그러나 그 영화 속에서 정작 중요하게 다루어진 것은, 다른 사람의 취향goût이 아니라 사랑 그 자체다. 《타인의 취향》은 아주 많은 걸 말하고 있지만 여전히 말하지 않은 부분을 남겨둔 영화였고, 그 말하지 않은..

극장전 2005.01.25

입자의 크로놀로지: 이윤학『먼지의 집』

책장에서 오랫동안 잠자던 시집을 한 권 꺼내본 적이 있는가. 종이가 바스러질까 조심스럽게 꺼내서, 어딘지 색이 바랜 것 같은 모습에 눈을 껌뻑거린다. 그리고는 촛불 끄는 시늉을 하듯 조용히 입김을 불어본다. 더께앉은 먼지가 날아오르면서 눈을 따갑게 한다. 그렇게 한참을 눈을 비비고 나면, 별 무늬도 없는 장정인데도 제 색을 찾은 시집은, 미켈란젤로의 천정화처럼, 선명하게 윤기가 흐른다. 그러나 그 윤기를 다시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 안에 선연하게 물이 흐른 흔적이 있다. 1 제비가 떠난 다음날 시누대나무 빗자루를 들고 제비집을 헐었다. 흙가루와 함께 알 수 없는 제비가 품다 간 만큼의 먼지와 비듬, 보드랍게 가슴털이 떨어진다. 제비는 어쩌면 떠나기 전에 집을 확인할지 모른다. 마음이 약한 제비는 생각하겠지..

타오르는책/詩 2005.01.16

추측과 진실 사이

이기준-김우식, 40년간 '바늘과 실' 《살인의 추억》이라는 영화가 있다. 내가 생각하기에 그 영화는 단지 진실에 대한 영화다. 진실과 거짓이라는 테마는 서태윤 형사(김상경 扮)가 계속해서 "서류는 거짓말하지 않는다"라는, 결말에서의 반전을 암시하는 명제를 내세움에서 확인된다. 이 영화를 하나의 메타포로 간주한다면, 진실을 찾는 것은 일종의 미궁 속의 수사와도 같다는 것이다. 이 영화를 보고 나서, 함께 본 연인에게 내가 한 말은 "박현규(박해일 扮)가 범인이네."였다. 연인은 별 말을 하지 않았지만 내 말에 의구심을 갖는 눈치였다. 그 '눈치'를 눈치챈 내가 다시 곰곰이 생각해보지 않았다면 나는 여전히 영화를 보고난 직후의 그 상태, 서태윤 형사의 수사선搜査線을 뒤따라가다가 뒤통수를 얻어맞은 그 상태에..

한국 말의 로마자 표기법

1 로마자 표기법을 둘러싼 논란과 2000년 발표된 새 로마자 표기법안을 살펴보고 나서 나는 다시 『훈민정음』을 생각했다. 정인지는 『훈민정음』에 붙인 서문에서 이렇게 말했다: 그러나, 사방의 풍토가 구별되고, 성기聲氣가 또한 따라서 달라진다. 대개 외국(중국 이외의 나라)의 말은, 그 소리는 있되 그 글자가 없어서, 중국의 글자를 빌어다 통용通用하니, 이는 마치 모난 막대기를 둥근 구멍에 끼운 것과 같도다. 어찌 능히 통달하여 거리낌이 없을 것인가. 然四方風土區別, 聲氣亦隨而異焉. 蓋外國之語, 有其聲而無其字. 假中國之字以通其用, 是猶枘鑿之鉏鋙也, 豈能達而無礙乎. 우리가 한국 말을 로마자로 표기하려 애쓰거나 외국 말을 한글로 표기하려고 애쓰는 것은, 여러 사정으로 그것을 외면할 수 없기 때문이지 결코 그..

권태와 시적 동력: 보들레르와 이성복의 초기시를 중심으로

시인이란 본래 패배자들이다. 글을 쓴다는 것은 그러므로 외부 세계에서 인정받지 못하거나 좌절된 자신의 욕망을 글을 통해서 배설하는 것일 따름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글 속에서 항상 욕망의 몸짓을 찾을 수 있다. 작가 이청준은 일종의 시원적 글쓰기로 일기와 편지를 상정하고 있다. 그는 「지배와 해방」이라는 단편에서 이정훈이라는 소설가의 입을 빌어 이렇게 말한다(이청준 2000, 111-112): 이 일기 쓰기와 편지 쓰기의 행위에는 우리가 지금 찾아가고 있는 문제의 해답―다시 말해 작가가 왜 글을 쓰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중요한 해답의 단서가 내포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미 짐작을 하신 분들도 계시겠습니다마는 일기를 적거나 편지를 쓰거나 그런 것에 자주 매달리는 사람들은 대개가 바깥 세계에서 자기 욕망의 실현..

타오르는책/詩 2005.01.03

근대시와 그 고향: 보들레르와 이성복

―보들레르에 관한 몇 가지 모티프와 그 이성복 초기시를 향한 영향관계 소고小考 1921년 안서의 번역시집 『오뇌懊惱의 무도舞蹈』를 통해 처음으로 소개되고, 1941년 미당의 『화사집花史集』에 실린 「수대동시水帶洞詩」에서 "샤알·보오드레―르처럼 설ㅅ고 괴로운 서울女子를 / 아조 아조 인제는 잊어버려"라고 노래된 보들레르는 프랑스 상징주의의 시조始祖로서 여러 가지 층위로 한국시에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시적 영향이라는 것은 마치 복류伏流하는 물과도 같아서 시집으로 묶여 출간된 '땅위'의 결실만으로는 알아보기가 쉽지 않다. 그럼에도 우리는 그 결실을 비교함으로써 그 사이의 근친관계parenté를 알아볼 수 있으리라 믿는다. 그 중에서도 이성복의 경우는 보들레르와의 관계가 표면적으로 상당부분 드러난 경우에 속한..

타오르는책/詩 2005.01.03

화전민의 새것 콤플렉스: 유종호『비순수의 선언』

1 청년 유종호가 보기에 한국 문학의 가장 큰 문제는 전통이 없다는 것이었다. 그 결여의 인식은 단절의 인식에서 온다: "초서로부터 딜런 토머스까지의 앤솔로지에는 「청산별곡」에서 「청록집」까지의 앤솔로지에서 발견할 수 있는, 적어도 근본적인 의미의 단절은 없다."(20쪽) 외적인 단절이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적어도 「청록집」의 시인들이 「청산별곡」을 전통으로 보지 않고 있는 것이 중요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그는 화전민이 하듯이 전통이라는 새로운 밭을 일구어 나간다. 유종호가 일구려는 화전火田은, 의욕적인 그의 데뷔작에서부터 드러난다. 주로 저쪽의 문학자들을 대상으로 그들의 "언어에 대한 자의식의 유곡幽谷"(157쪽)을 살펴본 뒤 그는 그 유곡이 "전통의 문제까지도"(158쪽) 포괄하는 근본적인 문제라고..

국민국가와 출산의 의무

우에노 찌즈꼬는 국민국가의 틀 안에서는 진정한 의미의 젠더 중립성은 불가능하다고 했다. 그것은 국민국가가 국민 혹은 민족이라는 '상상의 공동체'를 위해 개인의 희생을 요구하고, 그 요구는 '국방의 의무'로 대표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구상의 어떤 나라도 남성과 여성에게 똑같이 병역의 의무를 지우는 경우는 없다. 흔히 양성공동병역의무제의 사례로 이야기되는 이스라엘에서조차 여성의 복무기간이 남성의 복무기간에 비해 훨씬 짧다. 이같은 상황 때문에 군으로 위문오는 선교단체들은 항상 젊은 여자를 앞세워 "여러분들 덕분에 저희가 안전하게 사는 거죠?"하고 묻는 것이다. 그래서 일부에서 "남성이 여성을 보호해야 한다"는 인식이 생기는 것이다. 이 인식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옳다. 남성은 여성을 보호하기 위해 존재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