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라도의 『섬』은 특이한 만화다. 대부분의 만화는 몰입없이 빨리 읽을 수 있도록 비교적 단순한 서사구조récit를 가지는 게 보통이다. 그래서 심지어 어떤 만화들은 형식적인 아름다움을 갖지 못하고 내용으로 환원되기도 한다. 그런 만화들의 경우에는, 한 편의 작품이 그 줄거리로 대체되어도 큰 문제가 없어보인다.

『섬』은 독자의 몰입을 요구한다. 독자는 이 작품에서 이야기하려는 바가 무엇인가, 이 작품이 왜 이렇게 구성되었는가를 생각하기 시작하고, 종국에는 작품에 깊이 몰입하게 된다. 퍽 짧은 이 책이 두번씩 세번씩 읽히는 이유도 그것이고, 시일이 지난 뒤에도 다시 꺼내읽게 되는 이유도 바로 그것이다.

스콧 매클루드는 그의 『만화의 이해』에서 '홈통'의 역할을 강조하며, 바로 그곳이 독자의 상상력이 개입할 공간이라고 말했다. 그림의 칸과 칸이 홈통을 통해서 분리되면서 그 사이의 시간이나 사건이나, 혹은 무엇이든지 독자의 상상력으로 채워지는 것이다. 영상예술과 만화의 차이는 바로 거기서 가장 선명하게 드러난다. 프라도는 그 '홈통'의 영역을 서사구조의 영역으로까지 확장시켰다. 『섬』의 서두에는 의미심장한 보르헤스의 글이 인용되어 있다.

"그날 밤 나는 비오이 까사레스와 같이 식사를 하면서 화자話者가 사실을 생략하거나 왜곡시키는 바람에 결과적으로는 극소수의 독자만이 잔인하거나 혹은 평범한 현실을 발견하게 되는 모순에 빠지게 될 일인칭 소설을 어떻게 쓸 것인가를 놓고 밤늦게까지 오랫동안 논쟁했다."
-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뜰룅, 우크바르, 오르비스, 떼르띠우스」

시간이나 사건의 역전, 시점視點의 교묘한 이동과 충격적인 사건의 삽입을 통해서 독자에게 다가오는 이 만화가 갖는 여운은 바로 그런 점에서 계속해서 읽고 싶은 만화라고 하겠다. 좀더 자세한 분석을 위해서는 작품을 좀더 꼼꼼히 그리고 여러차례 읽어봐야 하겠지만, '분필선Trazo de tiza'이라는 원제가 작품의 의미를 좀더 밝혀줄 지도 모른다는 점은 지적할만한 사항이다. 그것은 기이한 섬의 모양을 지칭할 수도 있고, 흔히 선적으로 상상하는 시간을 지칭할 수도 있다.

서사라는 것이 본래 시간에 관심갖는 것이긴 하지만, 그때의 시간은 흔히 시간을 단선적으로 흐른다고 상상하는 한에서의 정의인 것이다. 이야기histoire를 어떻게 서사récit로 풀어내는가는 그런 상상력으로 파악할 수 없는 것이므로, 시간에 대한 우리의 인식을 바꿀 필요가 생겨나는 것이다. 3장과 7장章은 바로 그런 점에서 중요한 장이다. 선입견을 버리고 차근차근 읽는 독서 혹은 독화讀畵가 필요하다. '처음'이라는 단어나 '내년'이라는 단어가 뜻하는 바는 이 책 속에서는 희석되어 사라져버리고 만다.

다시 찬찬히 생각해보자. 독자는 이 책을 덮지 못하고, 첫부분으로 돌아가 다시금 읽게 된다. 책을 다시 읽는 행위가 여기서 강조되어야 한다. 시간이나 사건의 역전은 책을 다시 읽음으로써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프라도가 "나는 아예 처음부터 그들로 하여금 만화를 그냥 덮어버리지 못하게 하는 재능이 내게는 없는 게 아닐까 두려워하고 있었다"고 말하고 있긴 하지만, 실제로는 이 만화는 "그냥 덮어버"려서는 안 되는 만화다. 작가는 공공연하게 이 만화책을 다시 읽도록 만들었으며, 그것이 시간의 의미를 밝혀준다고 생각하고 있는 듯 하다. 만화가 짧은 것도 이유의 하나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책livre을 다시 읽는 것은 하나의 삶을 다시 사는vivre 것이다. 부활이 어떻게 가능한가를 묻는 사두개인들의 질문보다, 이것은 더욱 진실한, 실재하는 사실이다. 만화라는 형식을 다시 생각해보면 각각의 그림들이 움직이지 않는다는, 아주 사소한 진리를 우리는 다시 한 번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미겔란쏘 프라도 지음, 이재형 옮김/현실문화연구(현문서가)

Posted by 엔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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