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승희 PD가 연출한 KBS의 예능 프로그램 '본분 금메달'과 안준영 책임프로듀서가 맡은 M.net의 오디션 프로그램 '프로듀스101'은 전혀 다른 구성을 하고 있지만 사실 본질은 같다. 이를테면 두 프로그램 사이의 간극은 딱 웃음과 눈물 사이의 간극과 같다. 요컨대 걸그룹은 웃음을 팔고 걸그룹 지망자들은 눈물을 파는 우리 시대를 그대로 반영한 프로그램들이다. 아니 방송사들이 자신의 프로그램을 통해 직접 웅변하는 대로 정확히 말하자면 이렇게 정정할 수 있겠다: "걸그룹은 웃음을 팔아야 하고, 걸그룹 지망자들은 눈물을 빼앗겨야 한다."

언론이 앞다퉈 보도한 내용이지만 굳이 반복하자면 '본분 금메달'은 "걸그룹은 항상 이미지 관리에 힘써야 한다"는 전제 아래 갑자기 바퀴벌레 모형을 내놓는다든지 해서 걸그룹을 놀래키고서는 그들의 놀란 모습을 재미있다는 듯 시청자들에게 전시한다. '프로듀스101'은 11인조 걸그룹을 만든다며 걸그룹 지망자들을 모았지만 출연료는 주지 않고 악의적인 편집에도 법적 대응을 할 수 없도록 계약을 맺은 사실이 보도로 밝혀졌다.

걸그룹이라면 응당 항상 이미지 관리에 힘써야 한다는 '본분 금메달'이 주장하는 걸그룹의 '본분'은 매소賣笑다. 어떤 일이 있어도 눈물을 보이거나 얼굴을 찡그리거나 분노해서는 안 되고 웃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들도 사람인지라 슬플 때는 웃고 놀랐을 때는 얼굴을 찡그리고 부당한 일을 당했을 때는 화가 나겠지만 그래도 그들은 그러면 안 된다. 웃음이 아닌, 걸그룹의 다른 모든 감정은 이 과정에서 반드시 감춰져야 한다. 그들의 '본분'은 웃음을 파는 것이기 때문이다.

반면 걸그룹 지망자들의 '본분'은 웃음이 아니다. 그들에게도 걸그룹처럼 분명 웃음이 있겠지만 아직 그들의 웃음은 자본주의의 상품이 되지 못한다. 그들에게서 얻을 수 있는, 유일한 상품가치 있는 것은 웃음이 아니라 눈물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그들이 눈물을 팔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들은 눈물을 빼앗긴다. 자본은 속삭인다: '네 눈물을 주렴, 그러면 너를 진짜 걸그룹으로 만들어줄게.' 진짜 걸그룹이 되는 사람은 이 프로그램에 출연한 101명 중 11명뿐이다.

이런 방송사들의 모습에서 사악한 연금술사, 이를테면 만화 스머프에 나오는 가가멜을 연상한다면 무리일까. 가가멜이 스머프를 붙잡아 황금을 만드는 재료로 삼으려 하듯이 방송사들은 걸그룹의 웃음을 사들이고 걸그룹 지망자들의 눈물 방울을 수탈해 그것들로 황금을 벌어들인다. 이를테면 저들의 웃음과 눈물은 현자의 돌을 만들기 위한 연금술의 필수 재료인 셈이다.

눈물을 팔던 걸그룹 지망자들 중 선택된 소수는 진짜 걸그룹이 될 기회를 얻겠지만 그래봐야 바뀌는 것은 별로 없다. 눈물을 빼앗기던 데서 웃음을 파는 데로 옮길 수 있을 따름이다. 세상에는 아직 눈물을 빼앗길 사람이 많고 웃음은 오래 팔 수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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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의 조탁에 관심이 많았던 시문학 동인 시인 김영랑은 『영랑시집』에 실린 시 「누이의 마음아 나를 보아라」에서 가을이 깊어가는 시절에 대한 감탄이 담긴 누이의 한 마디를 고스란히 옮겨놓았다.

내용으로만 보면 이 작품은 전적으로 그 누이의 말이 계기가 되어 쓰여진 작품으로 보이는데, 첫 연의 시작과 두 연의 마지막에서 똑같이 반복되는 그 한 마디가 시의 발단과 절정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오-매 단풍들것네」
장광에 골불은 감닙 날러오아
누이는 놀란듯이 치어다보며
「오-매 단풍들것네」

추석이 내일모레 기둘니리
바람이 자지어서 걱졍이리
누이의 마음아 나를보아라
「오-매 단풍들것네」

- 김영랑, 「누이의 마음아 나를 보아라」전문

「누이의 마음아 나를 보아라」 시비FUJIFILM | FinePix F420 | Normal program | Pattern | 1/180sec | F/4.5 | 0.00 EV | 5.6mm | ISO-160 | Flash did not fire, auto mode | 2011:02:03 12:34:06

http://blog.daum.net/kdk99/17951751 CC-by-nc-nd 골든모티브

강희숙 조선대 교수의 전라도의 언어 11: “오메 단풍 들것네”에 따르면 호남 사투리에서 ‘오매’, ‘오메’ 또는 ‘워매’는 표준어의 ‘어머’ 또는 ‘어마’에 해당하는 감탄사이다. 그러나 ‘어머’와 ‘오-매’의 말맛語感은 완연히 다르다. ‘어머’가 다소 깍쟁이 같거나 여우 같은 느낌이라면 ‘오-매’는 그 길이와 억양까지 능청스럽고 천연덕스러운 느낌을 준다.

그러니까 영랑의 누이가 서울 사람이었다면 짧은 소리로 ‘어머 단풍 들겠네’ 했을 것이다. 하지만 ‘어머 단풍 들겠네’를 들었을 때의 심정이 ‘오-매 단풍 들것네’를 들었을 때의 심정과 같을 수는 없다.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뒤엣것이 그야말로 단풍에 대한 감탄처럼 느껴진다면 앞엣것은 단풍이 드니 어디 여행을 가야겠다거나, 사진을 찍어야겠다거나 아니면 집앞을 쓸어야겠다는 다짐—이를테면 ‘어머 비 오겠네’처럼—으로 느껴진다.

그러니까 영랑의 누이가 서울 사람이었다면 어쩌면 영랑은 누이의 말에서 아무런 시적 감흥을 느끼지 못했을 수도 있고, 우리는 영랑의 뛰어난 이 시를 갖지 못했을 수도 있다. 다시 말해, 한국 문학은 영랑 누이의 ‘오-매’에 많은 빚을 지고 있다.

전라도 사람들을 비하하는 말로 ‘오오미’가 쓰인다고 한다. 말이란 본래 누구나 쓰는 것이므로 오염되는 일이 많지만, 정지용과 더불어 가장 아름다운 언어로 한국어를 가꿨던 영랑의 주요 시어가 누군가를 낮잡아 일컫는 데 쓰인다는 사실이 씁쓸하다.

특히 그 쓴 맛이 더한 것은, 저 비하의 표현에 정치가 개입돼 있기 때문이다. 정치란 본래 말과 수사의 가장 치열한 한 극단이므로 그 말이 거칠 수밖에 없지만, ‘오오미’는 스스로 뜻signifié을 잃고 모양새signifiant만 남아 언어라는 기호의 상징성을 잃었기 때문이다.

정치로 떨어져버린 언어는 회생 가능성이 거의 없다. 그 말은 이제 붉은 점멸 신호등과 같다. 같은 지시만 반복할 뿐인 그 신호등을 운전자들은 아무런 주의도 기울이지 않고 지나친다.

Posted by 엔디

경북 구미의 선산이 고향인 내 어머니는 아주 평범한 초등학교 선생님이었다. 다까기 마사오高木正雄와 동향인 탓에 비생산적인 오해를 사기도 했고, 실제로 아직도 그를 위인 중 하나로 꼽고 있지만, 글쎄 정치와는 별 무관한 삶을 살아왔다고 스스로 믿는 한 교사였을 뿐이다. 자식인 내가 이명박이 대통령 돼서는 안 된다고 안 된다고 길길이 뛰니까 대신 이회창을 찍은, 그런 TK 출신의 한 사람일 뿐이다.

어머니가 대구교대를 졸업하고 초등학교 선생님이 된 것은, 어쩌면 가난 때문이었다. 당시 교대는 2년제였고, 학비가 무료였다. 대신 졸업 후에는 반드시 몇 년 이상 교사로 근무해야 한다는 조건이 붙었다. 교사 인력이 부족했던 시절이라 그런 식으로 양성하려 했던 것 같다. 지금 같으면 상상도 못할 이야기다. 학비가 무료인 대신 취업을 보장해 준다니! 하지만 그때는 가난하면서 성적이 곧잘 나오는 사람들이 교대를 많이 갔다고 했다.

대구에서 자란 어머니는 그렇게 해서 영주나 청송, 안동 등지에서 교사 생활을 시작했다. 내가 자라면서 수도권이나 서울로 집을 옮겼고, 서울교대 출신이 아니면 서울시내 학교로 갈 수 없는 현실 때문에 어머니는 경기권 학교에서 오래 교사 생활을 했다.

그래, 오늘은 어머니 이야기를 좀 해보려고 한다. 곽노현 때문이다.

1

몇 년 전 어느 날이다. 퇴근을 하고 돌아오니 어머니가 내게 밥을 차려주시며 학교에서 있었던 일을 하나둘씩 이야기했다.

말벗이 필요하셨던 것일까. 그날 나는 같은 학년 선생님들 중 아무도 정신지체장애인 어린이를 맡으려 하지 않아 어머니가 결국 두 장애 어린이를 다 맡기로 했다는 이야기부터 교장과 교감이 쓸데없는 권위를 부린다는 이야기, 요즘 젊은 교사들은 책임감이 없다는 이야기, 5~6학년 학생들은 요즘 머리가 너무 커서 징그럽다는 이야기, 웬일인지 근래에는 하루종일 서서 수업을 하다보면 무릎이 자꾸 아프다는 이야기까지 오랜 시간 어머니의 이야기를 들었다.

귀가 번쩍 뜨인 건 급식비 이야기였다.

당시 어머니 반에는 급식비를 내지 않는 학생이 10명 가까이 됐다. 종례 때마다 알림장에 '급식비'라고 쓰라고 알려주고, 썼는지 확인하고, 부모님께 보여드리라고, 내일은 꼭 급식비를 가져와야 한다고 하면 학생들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학교 서무실에서는 매달 급식비를 내지 않은 학생들의 명단을 전달하며 얼른 독촉하라고 성화지만, 어머니로서는 달리 방법이 없었다.

아이가 깜박 잊어 급식비를 가져오지 않는 것인지 아니면 집에 돈이 없어서 급식비를 못 내는 것인지, 모질지 못한 어머니는 차마 묻지 못했다. 그렇다고 급식비를 내라고 학부모에게 전화를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결국 학생들에게 매번 차근차근 전달하는 수밖에 없었다. 학교에서는 급식비를 내지 않고 2~3달이 지나면 진짜 급식을 주지 않겠다고 으름장을 놓기도 했다. 그럴 때면 아주 가끔씩 한두 달치 급식비를 어머니가 대신 내기도 했다. 그러나 매번 그럴 수는 없었다.

급식 3일째
by Seokzzang Yun 저작자 표시비영리동일조건 변경허락

어느날은 굳게 마음을 먹고 오래 급식비를 내지 않은 아이 하나를 종례를 마치고 따로 불렀다.

"급식비를 오랫동안 안 가져왔는데, 너 잊어서 그런 거니, 아니면 집에 무슨 일이 있는 거니?"

아이는 엄마와 아빠가 돈 많이 벌어온다고 어디론가 떠났고, 지금 자신은 고모와 함께 살고 있다고, 그제서야 천진한 표정으로 말했다. 초등학교 2~3학년이 가난이라든가 급식비라든가 빚이라든가 그런 걸 얼마나 알겠는가. 그 아이는 엄마아빠가 보고 싶지만, 그래도 자신은 행복하다고 굳게 믿고 있었다.

교사가 이 학생은 급식비를 낼 수 없는 가난한 학생이라고 미리 신청하고, 소정의 절차를 밟으면 아이는 앞으로 급식비를 내지 않아도 된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제껏 내지 않은 급식비까지 모두 해결되는 건 아니다. 안 낸 급식비는 그대로 그 아이의 빚으로 남는 셈이다.

어머니는 이런 제도가 정말 잘못됐다고 생각했다. 콩나물 시루와 같은 교실에서 담임 선생님이 학생의 가정 형편까지 모두 알기란 불가능하고, 그렇다고 공개적으로 물어볼 수도 없다는 것이다. 공개적으로 묻는다고 학생들이 모두 자진해서 손을 드는 것도 아니다: 자기 집안의 형편에 대해 잘 모르는 학생들도 있고, 알더라도 답할 수 없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2

한때 교사였던 시인 나희덕은 첫 시집에 실린 시 「한 그릇의 밥」에서 "한 그릇의 밥을 푸면서 / 한 알도 흘리지 말아야 하는 것이 교사, / 러는 발밑에 떨어진 것도 주워담아 / 제 입에 넣고 맛있게 씹을 일이다"라고 썼다. 농부가 곡식의 낟알을 소중히 하듯 교사들은 학생을 아끼는 것이다.

이들 밥알 하나하나에게 '한 그릇의 밥'을 그저 주어야 한다는 게 곽노현과 같은 '진보' 교육감들의 주장이자 공약이었다. 나는 내 어머니가 교육감 선거에서 누구를 찍었는지 모른다. 곽노현을 찍었는지 다른 후보를 찍었는지 아니면 이원희를 찍었는지 모른다. 하지만 곽노현의 주장과 공약이 실천되면 평범한 교사였던 어머니가 바랐던 교육 현장이 실현되리라고 생각한다. 한 그릇의 더운 밥 같은 교육현장 말이다.

RS5P5317
RS5P5317 by kwaknohyun 저작자 표시변경 금지

내 어머니는 연전에 무릎이 아파 계단을 잘 오르내리지 못하고, 오래 서 있지 못하게 된 탓이 명예퇴직했다. 퇴직 후 오래 근무했다고 정부로부터 무슨 표창을 받았는데, 내가 싫어하는 대통령의 이름이 적힌 그 표창장을 어머니는 오래 거실에 내걸었다.

나는 지금 그런 어머니를 이해한다. 자식인 나는 내 어머니가 교사로 일한 30여년에 대한 칭찬과 표창을 자랑스러워할 자격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어머니가 못 이룬 교육의 꿈을 곽노현이, 그리고 제2, 제3의 곽노현이 이뤄가리라 믿는다.

중요한 것은 번역이다. 정부여당이 '무상급식'은 사회주의라고 색깔론으로 포장하면 내 어머니 같은 평범한 교사들은 때로 속아넘어갈 수도 있다. 우리반 아이들에게 그저('공짜로'나 '무상으로', '거저' 등의 말보다 '그저'가 더 교사들의 마음을 대변해준다고 생각한다) 더운 밥 한 그릇을 먹이는 것, 그게 '무상급식'이다.


Posted by 엔디

몇 년 전, 한국의 한 과학자는 "과학에는 국경이 없다. 하지만 과학자에게는 조국이 있다."는 묘한 말을 했다. 안 그래도 가득할 대로 가득한 한국인의 국가주의nationalisme를 자극했던 그 말은, 비록 빠스뙤르Pasteur가 먼저 비슷한 말을 했다고 하더라도, 결코 '과학적'인 언사라고는 할 수 없었다. 조국을 위한다는 명목 때문인지 몰라도, 실제로 그는 여성의 난자를 구입하는 비윤리적인 행태에서부터 1차 자료 조작이라는 과학의 가장 기본적인 원칙까지 저버리는 사건--사고가 아니라--까지 저질렀다.

'조국' 운운한 발언의 여파는 컸다. 그에 대한 옹호는 지금도 정치적인 색채를 띤다: 난자를 매매한 것은 그저 '국가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이라고 간단히 면죄부가 부여된다; 가장 핵심적인 사안이라고 볼 수 있는 실험 결과와 1차 자료에 대해서도 '그의 주장은 모두 사실이며 이에 대한 모든 의문은 미국의 음모'라는 옹호가 쉽게 성립한다. 짙은 색깔의 정치가 덧칠되면, 보다 민감하고 여린 과학이나 윤리의 빛은 그저 뒤덮이는 꼴이다.

정부가 발표한 천안함 수사 결과가 최근 발표되면서 그 과학자의 일화가 떠오르는 것은 왜였을까.

그리섬, 과학에 대한 신앙#

범죄 현장을 조사하는 길 그리섬

미국의 TV드라마 CSI 시리즈는 20세기말~21세기초 판 '최첨단 권선징악'의 이야기다. 이 시리즈의 저류底流에는 '범죄자는 결국 법의 심판을 받게 된다'는 믿음이 흐르고 있다. 그것을 가능하게 해주는 것은 고전소설의 신이나 신선, 용왕, 선녀가 아니라 '증거evidence'다.

시리즈의 원형이라 할 만한 《CSI 라스 베이거스》에는 그런 신념 또는 신앙으로 똘똘 뭉친 인물이 주인공protagonist으로 나온다. 길 그리섬Gil Grissom은 대부분 범죄 현장에서 증거를 수집하는 모습이나, 그 증거를 해석하는 과정에서 실험하는 모습으로 등장한다. 과학수사대(과수대)가 경찰 조직 내부에 있는 한국과 달리 드라마 속의 그리섬은 경찰이 아니다. 그에게는 늘 '나는 과학자scientist'라는 자의식이 있다. "증거가 우리에게 말한다The evidence tells us…"는 영어 표현은 그리섬의 신념 또는 신앙을 적확하게 보여주는 말이다.

그래서, 당연한 말이지만, 그는 증거를 애지중지한다. DNA 검사와 지문 채취, 옷 등의 증거물 수집을 위해 피해자의 가족에게도 서슴없이 협조를 부탁한다. 가령 방금 딸을 잃은 어머니의 옷에 피가 묻어 있다고 해서 증거로 달라고 하는 것은 (인간적으로는) 쉬운 일이 아니다. 그 어머니가 화를 내건 안 내건 그리섬의 반응은 같다: "나는 증거를 수집하고 있습니다I'm collecting evidence." 아무리 용무가 급해도 범죄 현장 내부의 화장실 대신 맞은 편 건물을 화장실을 이용한다는 이야기는 소소할 정도다.

나는 첫머리에서 언급한 사람보다 그리섬이 더 위대한 과학자라고 생각하는데, 그것은 그리섬이 이처럼 '1차 자료'에 해당하는 증거에 매달리고, 증거를 소중하게 다루기 때문이다. 내가 기억하는 바로는 그가 선입관을 가지고 사건을 처리한 경우는 거의 없다; 자신이 작업해 확정한 증거라고 하더라도, 나중에 다른 내용이 보이면 다시 거기에 매달리는 모습까지 보여준다. CSI에 종종 등장하는 재판 장면을 통해 미국이라는 나라가 그들의 노력을 어떻게 인정하고 받아들이는지를 보면, 그들의 증거 수집 노력에 숙연함까지 느껴질 정도다. 『세포Cell』니 『자연Nature』이니 『과학Science』이니 하는 잡지에 그리섬의 논문이 실린 적이 있느냐 없느냐는, 그러니까 별로 중요한 게 아니다.

과학수사와 살인의 추억#

영화 《살인의 추억》의 박두만

과학수사 하니까 다른 한국영화도 하나 떠오른다. 봉준호 감독의 《살인의 추억》이다. 흔히 화성 연쇄 살인 사건을 모티프로 삼아 만든 것으로 일컬어지는 이 영화에는 다그치고 때리며 용의자를 범인으로 몰아세우는 '전통적'인 방법을 고수하는 박두만(송강호)·조용구(김뢰하) 형사와 '과학수사'를 주장하는 서태윤(김상경) 형사가 대비되는 모양새로 나온다.

서태윤이 "서류는 거짓말하지 않는다"며 사건 파일에 담긴 증거 위주의 수사를 주장할 때, 박두만은 동네 장애인인 백광호(박노식)에게 혐의를 뒤집어씌우려고 백광호의 신발로 범죄 현장에 발자국을 찍는 증거 조작을 일삼는다.

물론 뒤로 가면 박두만도--비록 '감'에 의존한 수사이긴 하지만--범인이 현장에 거웃 하나 남기지 않는다는 점에 착안해 근처 목욕탕을 뒤지는 '비교적' 증거에 기반한 수사를 펼친다; 서태윤은 서류를 통해 비오는 날 빨간 옷을 입은 여성이 범행 대상이라는 점과 범행이 있던 날 누군가가 라디오에 늘 유재하의 노래 '우울한 편지'를 신청했다는 사실을 알아낸다. 피해자 중 유일한 생존자로부터 범인이 '손이 고왔다'는 진술도 확보한다.

영화 《살인의 추억》의 서태윤

이 시점에서 서태윤은 '서류는 거짓말하지 않는다'는 평소의 신념 아래 용의자 박현규(박해일)가 범인이라고 확신한다. 그는 희생자의 옷에 남았던 정액 샘플과 박현규의 DNA의 일치 검사를 미국에 의뢰해둔 뒤, 어느 철길에서 박현규를 붙잡는다. 그런데, 그에게 총을 들이대는 그 순간 미국에서 검사 결과가 도착한다. "두 DNA가 일치하지 않아, 용의자를 범인으로 단정할 수 없음."

서태윤은 그 '서류'를 보고 그대로 무너진다. 그리고, 감독의 의도대로라면, 영화를 보는 관객들도 서태윤과 함께 무너진다.

서태윤의 잘못은 손이 곱고, 하필 범행이 있던 날만 골라 라디오에 '우울한 편지'를 신청했다는 정도의 증거만으로 범인을 확정지은 것이다. 사법체계가 잘 서 있는 나라라면, 이 정도의 증거로 수색영장이나 잘하면 받을 수 있을까 싶다. 누구나 박현규가 범인이라는 의심이 가게 마련이지만, '과학수사' 과정에서는 그런 선입견을 일단 버려야 맞는 것이다. 정액 샘플과 박현규의 DNA가 일치한다는 것을 확인하기까지 판단을 유보했어야 했다.

천안함 미스터리#

'과학수사'는 과학이 가진 엄밀함과 엄정함에 기대는 것인 만큼, 마지막까지 냉정함을 유지해야만 가능한 것이다. 어느 정도 증거가 들어맞는다고 해서 결론을 단정지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그것이 1차 자료인 증거를 중시하는 과학의 정신이다. 정부 나름으로는 과학적으로 조사했다는 천안함 조사 결과를 상당수 한국인들이 납득하지 못하는 이유도 그것이다.

알 수 없는 이유로 두동강 난 천안함의 침몰에 대해 국방부 민군합동조사단(합조단)은 '천안함 침몰사건 조사결과' 발표문을 통해 천안함은 북 잠수함에서 발사한 어뢰에 맞은 것이라고 공식 발표했다.

천안함과 동급인 포항급 신성 783PCC-772 천안함과 동급인 포항급 신성 783

합조단은 그 근거로, 천안함 침몰 현장에서 쌍끌이어선이 발견한 어뢰의 추진동력부를 들었다. 발견된 부분이 북이 해외 수출어뢰 소개자료의 설계도와 일치하며, 특히 그 부분에 아라비아 숫자와 한글로 '1번'이라고 적혀 있는 것으로 보아 북의 소행이 분명하다는 것이다. 좌현 견시병의 얼굴에 물이 튀었다거나 백령도 해안 초병이 100m 높이의 섬광 기둥을 관측했다는 것도 증거로 제시했다.

천안함 TOD

하지만 이것만으로 천안함 침몰이 북의 소행이라고 확신할 수 있는 것일까. 이에 대한 의문과 의혹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지만 국방부는 이에 답변하지 않거나, 별로 수긍이 가지 않는 답변만 해주고 있다. 가령 발견된 어뢰 추진동력부가 이번 천안함 사건과 관계가 있는 것인지부터가 명확하지 않다. 현장과 동일한 조건을 유지한 실험을 통해 부식 정도를 알아봐야 하는 게 아닐까? 또 '1번'이라고 쓴 푸른 글씨가 어떤 필기구로 쓴 것인지와 왜 지워지지 않은 것인지도 아직 납득되지 않는다. 성분을 분석해 국내외의 필기구와 대조하고, 역시 현장과 동일한 조건으로 글씨가 지워지는지 안 지워지는지를 실험해봐야 하지 않을까.

너무 까칠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단 1주일 동안만 CSI 시리즈를 시청해보자. 정부의 발표라고 덮어놓고 불신하겠다는 게 아니다. 적어도 정부 차원의 조사라면 제기되는 의혹은 풀어줘야 하지 않나 하는 것이다. 서태윤 형사 식의 수사는 이제 곤란하다는 것이다. 그리섬의 진지한 무표정이 그립다.

하이젠베르크와 정치윤리#

대학 시절 철학자 박이문 선생의 강의를 들을 때였다. 거의 학생의 발표로만 이뤄진 그 수업에서 어느 이공계 학생은 "지금 이 순간 세상의 모든 정보를 내가 알고 있다면, 나는 어떤 미래도 예측할 수 있고 어떤 과거도 추론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의 말은 '틀린' 말은 아닐 수 있다고 하더라도, 공허했다. '모든 정보'를 알 길이 없기 때문이다. 심지어 '한 입자의 모든 정보'도 알 길이 없다. 하이젠베르크불확정성원리에 따르면, 입자의 위치와 운동량을 동시에 아는 것은 불가능하다. 관측 행위 자체가 관측 대상에 영향을 주기 때문이다.

결국 우리는 미래와 과거를 100% 확실하게 알 방법이 없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과학은 엄밀함의 극단에 점근선으로 다가가야 하며 과학수사 역시 겸허한 자세로 그래야 한다. '과학'으로 포장한 정치논리는 결국 정치윤리를 저버림에 다름아니다.


Posted by 엔디

IMF 위기를 조금씩 극복해나가던 2001년 한 카드사의 신년 광고는 어느 여배우를 등장시켜 아주 단순한 메시지를 전하고 있었다: "여러분, 부자되세요. 꼭이요." 무차별 카드 발급의 여파로 신용불량자가 매해 증가하던 시절이었다. 광고는 대박을 쳤다. 카드사의 이미지도, 배우의 이미지도 덩달아 올라갔다. 카드사로서는 소비자들이 원하는 지점을 정확히 공략한 셈이었다.

소비자들은 모두 부자가 되기를 원했다. 적어도 그런 말이라도 듣기를 바랐다. "부자되세요."

그래서…… 그때부터였던 듯하다, 친한 사람들끼리 발랄하게 "새해 복 많이 받아" 대신 "새해 돈 많이 받아" 하고 인사를 주고 받았던 것은. 그 말은 묘하게도 위악爲惡스러운 매력이 있었고, 또 누구에게나 어느 정도는 그런 욕심이 있었으므로 '진실'한 말이기도 했다.

은밀한 내면의 욕구를 드러내는 데 점점 사람들은 망설이지 않았고, 또 그런 태도를 상찬하는 사람들도 늘어났다. 전 사회가 동참한 '조용한 혁명'이었다.

진실과 구라#

개그맨 김구라가 지상파에 등장하기 시작한 것이 언제부터였을까. 어쨌든 황봉알 등과 함께 인터넷 방송에서 '막말'을 일삼던 김구라는 본래 지상파에 어울리지 않던 인물이다. 지상파 방송사 공채 개그맨으로 데뷔했지만 별다른 두각을 나타내지 못했던 김구라는, 욕설과 비방 등 거의 무한정의 자유가 가능했던 인터넷 방송에서 물 만난 물고기처럼 인기를 끌었다.

그는 지상파에 나와서도 (표현의 수위는 다소 낮췄지만) 이 당시의 기조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모습을 보여줬다. 돈과 여자를 밝히고, 뭐든 마음에 들지 않으면 '버럭' 하고 화를 낸다. 상대방에게 면박을 주거나 인신공격 하기도 한다. 중요한 것은 사람들이 이를 그의 매력으로 보고 있다는 점이다.

김구라와 대비되는 인물로는 최진실이 떠오른다. 최진실은 1988년에 데뷔했고, 한 전자회사의 광고를 통해 폭발적인 대중의 인기를 얻는다. 그것은 "남자는 여자 하기 나름"이라는 부르주아 가정의 화목함을 강조한 카피 덕분이었다. 고종석(2009, 23)은 한국일보에 연재한 '여자들' 연작의 두번째 글 최진실-21세기의 제망매(祭亡妹)에서 그 모습을 이렇게 회상하고 있다:

최진실은, 다른 자살자들과 달리, 내 가족이었다. 내 안쓰러운 누이였다. 그녀는 '만인의 연인'이었다기보다 '만인의 누이'였다.

최진실의 첫 메인 모델 작품인 VTR 광고가 떠오른다. 남편이 퇴근해 돌아오자마자 아내에게 축구경기를 녹화해놓았느냐 묻자, 아내가 살짝 토라져 "나보다 축구가 더 좋다는 거죠?" 라고 항변한다. 남편은 쩔쩔매며 사과하고, 시청자를 향해 아내가 득의양양한 얼굴로 말한다. "남자는 여자하기 나름이에요!"

그 광고 속의 최진실은 단번에 대중을 사로잡았다. 파릇한 나이의 그녀가 행복에 겨워하며 상큼하고 야무진 새댁 역할을 하는 그 광고 덕분에, 그 전까지 거의 알려지지 않았던 최진실은 웬만한 TV드라마 주인공 못지않은 대중 스타가 됐다.

그러나 최진실은 생애의 마지막까지 그 '부르주아 가정의 화목함'이라는 잣대 때문에 심한 마음고생을 겪게 된다.

남편과의 불화와 폭력, 이혼 후 자녀의 성본(姓本)변경 등으로 이목을 끌었고 사망 후 최근까지도 생전에 광고 모델로 활동했던 한 건설회사의 손해배상 청구가 법원에 의해 받아들여져 2억원을 배상해야 할 처지에 놓였다. 화목한 가정 생활을 보여줘 아파트 광고에 적합한 이미지를 유지했어야 하는데, 거꾸로 가정 불화로 멍든 얼굴과 충돌현장을 공개해 품위 유지 약정을 위반했다는 것이 법원의 판단이었다.

그러므로 어쩌면 고종석(2009, 24)의 이어지는 이 말을 우리는 일정 부분 긍정하게 된다:

화장품회사 사장이든 전자제품회사 회장이든 아파트 건설업자이든, 최진실과 광고로 이어졌던 자본가들을 나는 좋아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녀를 상품미학의 한 톱니바퀴로 만든 이 자본주의체제를 나는 어쩔 수 없이 지지한다.

그것이 인간의 비천한 심성에 가장 들어맞는 체제이므로. 나는 최진실이 나온 드라마나 영화도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 그것들은 흔히 과장된 비장함이나 비윤리적 희극성, 비현실성에 감염돼 있었다. 그러나 그 영화들과 드라마들에 나온 최진실이라는 누이를 나는 은근히 좋아했다.

김구라가 '진실'을 폭로하는 방식으로 연예 활동을 하고, 최진실은 '구라' 곧 화목한 가정의 환상을 유포함으로써 인기를 유지했다는 것은 참 아이러니컬하다.

최진실은, 그러니까 '구라'와 환상은 이제 이 땅에 없다. 김구라의 '진실'은 여전히 살아남았고. 그러나 김구라의 '진실'은 과연 진실일까.

'솔까말'의 폭력성: '진실'은 진실인가#

'88만원 세대'의 저자인 박권일은 주간지 『시사인』에 실은 「끔찍하다, 그 솔직함」이라는 제목의 칼럼에서 누리꾼들의 은어인 '솔까말'을 소개한다.

그에 따르면 '솔까말'은 '솔직히 까놓고 말해서'의 준말로 거짓과 위선을 폭로하는 통쾌함을 주지만, 반대로 솔직함 속에서 돈과 권력을 욕망하는 사회를 그대로 반영하는 폭력성을 지녔다는 것이다. 그는 이 말이 속마음--그의 표현대로라면 혼네本音--을 그대로 드러낸다는 점에서 폭력적이라고 말했지만, 사실 '솔까말'의 폭력성은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예를 들어 우리가 과거 '병신'이라고 불렀던 사람들을 '장애인'으로 바꿔 부르는 것은, 그들이 진짜 '병신'인데 그걸 그대로 드러내면 예의 없는 표현이라 '장애인'이라는 대체 수단을 마련한 것이 아니다. 장애인은 '병신'이 아니라 단지 신체 어느 부분이 불편한 구석이 있을 따름이다. 하지만 여기에 '솔까말'을 대입하면 "솔까말 그게 '병신'이지"가 된다. 이런 것이 진짜 '솔까말'의 폭력성이다.

즉, '솔까말'은 상대방이 어떤 진실을 믿든지, 그것은 위선일 뿐이라고 지적할 수 있는 '전가의 보도'다. "솔까말 돈이 최고지, 솔까말 SKY대학이 최고지, 솔까말 삼성 없으면 대한민국 굶어죽지…." 이 같은 말들은 '솔직히 까놓고 말해서'라는 허울 속에, 사회의 잘못된 구조를 더욱 고착화시킨다. 돈이 최고가 아니라고 믿는 사람들도, SKY대학이 최고가 아니라고 믿는 사람들도, 삼성이 없어도 대한민국이 굶어죽지 않는다고 믿는 사람들은 이 말 앞에서 자신의 주장을 열심히 늘어놓아야 하지만 대체로 소용이 없다. '솔까말'은 어떤 근거를 들어 하는 언사가 아니고, 단지 자신의 '믿음'만을 드러내는 말이기 때문이다.

조금 더 나가보자면, 누군가 "솔까말 돈이 최고지"라고 말하면 '돈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고 생각하던 듣는이는 문득 자신이 스스로를 속이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보게 된다. 그런데 '솔까말'은 구체적인 근거가 없이 단지 세상에 횡행하는 '속설'을 기초로 한 말이기 때문에, 이 성찰은 겉돌게 된다. 이 과정에서 일부 순수한 사람들은 자신을 혐오하거나 세계를 비관하게 될 수도 있다. '솔까말'은 이렇게 세계를 긍정했던 사람들을 쓰러뜨린다.

'솔까말'은 솔직하게 진실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솔직하게 '속설'을 드러낼 뿐이다.

자본주의의 신, 자본주의의 탄생#

공영방송 KBS는 최근 「공부의 신」이라는 드라마에 이어 「부자의 탄생」을 방송하고 있다. 이들 드라마는 공영방송이 어떻게 '솔까말' 식의 '진실'을 전파하는 수단이 될 수 있는지 상세하게 보여줬다.

시청률 면에서 동시간대 최고를 기록했던 「공부의 신」은 세상을 움직이는 사람들은 '국립 천하대' 출신이며, 이런 세상을 고치려면 '천하대'에 가라고 외친다. 천하대는 한국인들에게 '최고 대학'이라고 받아들여지는 '국립 서울대'를 떠올리게 한다. 실제로 주연 배우인 김수로는 인터뷰에서 '서울대'라는 명칭을 방송에서 쓰지 못하는 데 대한 아쉬움을 드러내고 있기도 하다:

그는 "이번 작품에서 '서울대'라는 명칭을 그대로 못 쓰고 '천하대'라는 가상의 대학을 상정해서 제작한다"면서 "그러고 보니 시청자들에게 내용이 다가가는 데 어려움이 많고, 촬영 현장에서도 '서울대'라고 했다가 '천하대'로 고치는 등 NG도 많이 난다"고 아쉬워했다.

하지만, 천하대가 최고대학이라는 어떤 근거도 드라마에서는 찾을 수 없다. 그냥 모두가 그렇게 받아들이고 있을 뿐이다. 이들은 '천하대'에 가서 어느 선생님께 무엇을 배우고 싶다는 목표도 없다. 심지어 결말에서는 천하대에 합격하고도 다른 길을 찾아 나서는 등장인물도 나온다.

'부자의 탄생'도 마찬가지다. 이 드라마는 '역시 돈이 최고'라는 사회적 인식의 병폐, 곧 '속설'을 강화한다.

재벌과의 '원나이트스탠드'로 태어난 주인공이 성공해 재벌 아버지를 찾는다는 줄거리는, 일종의 '핏줄결정론'을 형성하며 한국 재벌가에 만연한 불법·편법 경영권승계를 정당화할 우려도 있다.

"KBS가 이상의 실현과 올바른 가치관의 확립이라는 건강한 사회관 대신 '천하대'와 '돈'이라는, 현물화된 욕망의 정점만을 추구하는 현대극을 기획하고 있다는데 큰 우려를 표하고 싶다"는 KBS 시청자위원회 보고서도 나올 정도다.

자본주의의 선악과#

글머리에 언급했던 카드사는 '빨간 사과'를 기업 이미지로 쓰고 있다. 이에 걸맞게도 그 카드사는 광고 한 편으로 한국 사회 전체가 자본주의의 선악과 열매를 따먹도록 한 셈이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눈이 밝아져' 선과 악, '진실'과 '구라'를 알게 됐다. 그러므로 이를테면 '부자되세요'는 자본주의적 원죄原罪다. 순수한 사람도 닳고닳은 사람도 이 원죄에서 자유로운 사람은 없다.

그러나, 우리는 이 극단적인 자본주의로부터 우리를 구원할 무엇을 찾을 수는 없을까. '눈이 밝아져' 이 원죄를 받아들이게 됐다면, 스스로 우리 눈을 어둡게 하면 어떨까.

그것은 어머니가 내게 사과를 사오라고 돈을 주셨을 때의 일이었다. 어머니는 1그로센짜리 은화를 주셨다. 그런데 사과 값은 6페니히밖에 되지 않았다. 가게 주인 여자한테 1그로센짜리 은화를 내주자, 여인은 내가 보기에 아주 우울한 표정으로 오늘은 하루 종일 아무것도 팔지 못했기 때문에 거스름돈이 한푼도 없노라 말했다. 그리고는 1그로센어치를 모두 사가길 원하는 것이었다. 그때 6페니히짜리 동전이 내 주머니에 있다는 생각이 언뜻 떠올랐다. 그것이면 지금의 곤란한 문제가 풀릴 거라는 생각에 기뻐하면서 그것을 부인에게 내주며 말했었다.

"이제 이걸로 나한테 6페니히를 거슬러 줄 수 있잖아요?"

하지만 그녀는 내 뜻을 영 알아채지 못하고는 1그로센짜리 은화를 내게 되돌려 주고 6페니히짜리 동전을 받아 넣었던 것이다.

막스 뮐러(1987, 34)가 언급한 이 대목은 내것과 남의 것을 구분하지 못하는 어린이가 얼마나 세상을 아름답게 할 수 있나 하는 가능성을 보여준다. 어린 시절의 뮐러에게는 '돈'보다 중요한 것이 아주 많았다. 무언가 곤란한 일이 자신의 도움으로 풀릴 수 있다면 자신의 돈을 기꺼이 내놓을 수 있다. 번역자인 차경아는 이 모습을 들어 그를 '귀여운 공산주의자'(143)라고 부르는데, 어린 뮐러가 커 가면서 '솔까말'이라는 자본주의 선악과를 따먹었는지 우리는 알 수 없다. 순수한 사랑 이야기를 담은 이 책에서 짐작할 수 있을 따름이다.

우리는 어쩌면 너무 눈이 밝은 것이 아닐까.

참고문헌#

고종석. 2009. 『고종석의 여자들』. 서울:개마고원.
Max Müller. 1987. 『독일인의 사랑』. 신역판. 차경아 옮김. 서울:문예출판사.


Posted by 엔디

'위대한 백인의 승리'란 영화를 주말 명화극장 시간에 본 기억이 납니다. 흑인 권투선수 챔피언을 백인들이 온갖 치사한 방법을 동원해서 아예 세상에서 매장시켜버리는 '치사한 백인의 승리'를 그린 영화였습니다.

지금 그런 치사한 백인의 승리가 만들어지고 있습니다. 오사마 빈 라덴이란 마흔살짜리 사나이를 잡기 위해 정의의 가치를 앞세워 미국은 아프가니스탄을 마구잡이로 폭격하고 있습니다.

얄궃게도 이런 때 유엔과 코피아난 사무총장님의 노벨평화상 수상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나는 순진해서 그런지 노벨평화상 받는 사람은 절대 전쟁을 안할 거라 생각했는데, 노벨평화상 수상자이신 우리 대통령 각하가 아프가니스탄 공격을 적극 지지하고 나섰습니다. 노벨평화상금이 어마어마하게 큰돈이라는데 주최측에서 그 상금을 돌려달라고 하지는 않을까요?

하기야 노벨상금이란 것 자체가 무시무시한 폭발물을 만들어 장사해서 번 돈이니 그다지 도덕적이지도 않고 평화적이지도 않습니다.

권정생(2008, 222) 선생은 '제발 그만 죽이십시오'란 글에서 노벨평화상 수상자인 김대중 전 대통령을 예로 들며 노벨평화상을 평가절하한다. 결국 노벨평화상도 백인들의 것이거나 혹은 힘있는 자의 것이라는 뜻이다.

김대중 전 대통령의 노벨상 평가절하는 잘못하면 '노벨상을 돈 주고 샀다'는 수구 세력의 목소리에 힘을 실을 수도 있는 발언이다. 실제로 노벨상 수상 소식이 들릴 즈음 '노벨상의 공신력이 떨어진 것 같다'는 말도 떠돌았다. 그러나 권정생 선생의 말에 동의할 수밖에 없는 것이 또 사실이다. 사르트르가 '부르주아의 상'이라는 이유로 노벨문학상을 거부한 것도 같은 맥락이겠기 때문이다.

가부장제는 혈우병?#

시린 에바디

cc-by-2.0 : Original photo by Shahram Sharif http://www.flickr.com/photos/sharif/64545526/in/photostream/

이슬람권 여성으로는 최초의 노벨평화상 수상자인 시린 에바디가 방한했다. 한국의 여성인권활동가들을 만나고 싶었던 그는 방한 일정을 쪼개 한국여성의전화를 방문해 강연을 했는데, 문제는 이 강연의 내용이다. 통역을 포함해 한 시간 남짓 되는 강연에서 그는 '가부장제'를 '혈우병'에 비유했던 것이다.

혈우병은 "혈액을 응고해 주는 인자가 부족하여 피가 잘 멈추지 않는 병"으로 성염색체 중 X염색체에 존재한다. 이 병은 대개 보균자인 어머니에게서 아들에게로 유전한다. 즉, 어머니의 경우는 그 염색체를 갖고만 있지만 아들에게 유전됐을 경우 그 아들은 혈우병이 발병하는 것이다.

결국 시린 에바디가 "가부장제는 혈우병"이라고 말했을 때, 그는 가부장제의 톱니바퀴에서 여성이 큰 축을 담당하고 있다고 진단한 셈이다. 이 이론에 그대로 기대자면 가부장제는 남성이 아니라 여성이 유지하는 것이라는 주장이 가능하다. 나아가 여성이 가부장제의 문제점을 지적하려 해도 "너희들이 애써 유지해온 것이 가부장제 아니냐"는 가부장주의자들의 반론까지 가능하다.

이에 대해 참석자 가운데서 반론이 나오자 시린 에바디는 "가부장적 문화를 타파하는 데 여성이 큰 역할을 할 수 있다는 뜻"이라고 해명했으나 근본적인 취지에 대해서는 번복하지 않았다. 어머니가 집안에서부터 아들과 딸을 다르게 대한다는 것이 문제라고 반복했을 뿐이다.



가부장제 재생산의 메커니즘#

시린 에바디의 관점이 문제인 이유는, 그의 생각과 달리 세상의 어머니들이 양성을 평등하게 대하기 때문이 아니다. 실제로 한국과 이란을 비롯한 많은 나라의 어머니들이 딸보다 아들을 우대하며, 더 자유롭게, 더 권리를 향유하도록 키운다. 그러나 그 때문에 어머니들을 비난할 수 있는가는 좀 생각해봐야 한다.

시린 에바디의 말은 이미 '여성(어머니)이 양육의 문제를 전적으로 책임져야 한다'는 전제가 은연 중에 깔려 있다는 점에서 주목에 값한다. 실제로 양육은 여성의 문제가 아니라 한 가정, 한 마을, 나아가 한 국가, 한 행성의 문제인데도 그의 주장만 들으면 양육은 어머니의 문제로 환원될 뿐이다.

플라톤처럼 부모가 누구인지도 모르게 자녀를 키워야 한다는 뜻은 아니지만, 양육의 문제를 한 가정에 그것도 어머니라는 한 사람의 몫으로 남겨두었을 때의 문제점에는 여성의 경제활동참가율이나 기타 사회활동참가율을 떨어뜨린다는 점 이외에도 가부장제 자체의 재생산이 더 심각해진다는 점도 있는 것이다.

여성의 대다수가 살림과 자녀양육만을 전담하는 문화적 상황에서는 어머니가 자녀에게 이에 걸맞은 사회적·문화적 관점에 따라 교육을 시킬 수밖에 없는데, 그것이 바로 가부장적 교육이다. 조선시대의 어머니가 딸에게 정절이니 열녀니 하는 교육을 시켰던 것이 어찌 조선시대 어머니들의 문제라 할 수 있을까. 그것은 그런 사고방식을 강요했던 시대와 문화의 문제라고 해야 한다.



이슬람과 여성인권#

한편 시린 에바디는 성차별은 이슬람 율법 때문이 아니라 가부장적 문화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슬람 율법은 평등한데, 이를 곡해하는 가부장주의자들이 문제라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그는 이슬람 문화권이 아닌 나라에서 여성이 받는 차별에 대해 한참을 언급했다. 그러나 이슬람 율법의 어떤 부분이 양성평등을 지향하는지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다. 이슬람율법과 문화에 대해 잘 모르는 한국적 상황을 염두에 둔 것인지도 모르지만, 오해를 부르지 않기 위해서는 소개를 해줬으면 더 좋았을 것이다.

일부다처를 허용하는 등 우리(또는 서구)의 시각에서는 이슬람율법이 양성을 평등하지 못하게 말하고 있다는 견해가 많기 때문이다. (물론 그의 신앙에 대해 딴지를 걸고 싶은 생각은 없다. 나는 꾸란을 잘 모른다. 그 나름의 경전 해석이 있을 것으로 짐작되기는 한다.)

노벨상과 기층문화#

시린 에바디의 강연을 통해 결국 드러난 것은 천하의 노벨평화상 수상자도 결국은 하나의 기층문화 아래 종속되는 인간일 뿐이라는 당연한 결과였다. 김대중 전 대통령이 민주화를 이끌었고,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함께 6.15 선언을 했더라도 결국 그는 신자유주의를 이 땅에 본격적으로 도입한 첫 대통령이다. 게다가 그는 권정생 선생이 지적한 대로 아프가니스탄 파병도 결정했다. 한반도에서 태어나 자란 그에게 미국이라는 나라는 여전히 없어서는 안 될 은인이었던 셈이다. 그게 뼛속까지 파고든 기층문화다. 미국을 싫어하는 젊은이들도 맥아더의 동상을 철거하자거나 주한미군이 전면 철수하도록 하라는 주장에 대해서는 거부 반응을 일으키는 것과 마찬가지다.

시린 에바디는 이슬람권 최초의 여성판사이며 뛰어난 인권변호사였지만, 또 그 덕분에 노벨평화상도 수상했지만, 결국은 한 명의 이란인에 불과했다. 이것은 그에 대한 비난이기도 하지만 어떤 면에서는 칭찬이기도 하다. 물론, 나는 약간은 그의 변화를 기대하고 있다.

참고문헌#

권정생. 2008. 『우리들의 하느님』. 개정증보판. 대구:녹색평론사.

우리들의 하느님 - 10점
권정생 지음/녹색평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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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엔디

연예인이 죽으면 악플, '묻지마 살인'은 사이코패스다. 일종의 공식이 된 듯하다. 일단 이해할 수 없는 무차별 살인이 일어나면, 당연하다는 듯이 사이코패스부터 의심한다. 문화일보가 인용한 전문가들의 말에 따르면, 사이코패스들은 치밀하며, 죄책감이 없고, 반사회적이지만, 평상시에 확인이 불가능하다고 한다. 그런데 여기서 의문점이 생긴다. 그럼 사이코패스는 왜 생기는 것이며 이들을 구별할 방법은 없을까? 사이코패스 범죄를 막으려면 어떻게 할 수 있을까?

사이코패스, 사회의 불수의근?#

영화 《검은 집》 포스터
언론이 인용한 전문가들의 말만 들으면, 사이코패스는 우리가 어떻게 할 수 없는 사회의 불수의근不隨意筋이다. '재수 없이' 이 사람들에게 걸리면, 우리는 그냥 죽는 길 밖에는 없다. 사이코패스에게 죽을 확률이 골프를 치다가 홀인원을 하고 나서 벼락에 맞을 확률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이 무차별 '묻지마 살인'이 순전히 개인적인 것이라면 저 확률을 그저 '재수'에 맡기고 삶을 감내하는 수밖에 없을 따름이다. 이런 일반적인 믿음은 대중문화를 통해 급속하게 퍼져 나간다. 영화 《검은 집》의 홍보 문구는 이 사이코패스라는 것은 선천적인 것이며, 이 사이코패스들은 인간이 아닐 수도 있다는 것처럼 말한다:

흔히 ‘싸이코’라고 알고 있지만, 그들은 전혀 다른 존재들이다
그들은 인간 유전자를 공유한 완전히 다른 생명체라는 주장도 있다
그리고… 정장을 입은 채 항상 우리 곁에 있다

사이코패스와 슈퍼테러리즘#

그러나 사이코패스는 단지 정신 질환의 일종일 뿐이다. 사이코-패스psycho-path를 한국어로 그대로 옮기면 정신-병일 따름이다. 위키피디아에 따르면 이 사이코패스들은 PCL-R 검사를 통해 밝혀내는데, 사실 평소에도 과대망상증, 자신과 타인에 대한 안전불감, 충동제어 문제, 무책임성, 지루함을 참지 못함, 병적인 자기애, 병적인 거짓말, 폭력적 경향, 반복적인 싸움, 알콜 및 마약 남용 등의 증상을 보인다고 한다. 이러한 증상은 분명 아주 일상적인 범주를 크게 벗어나지는 못하지만, 전혀 분간해낼 수 없는 수준 역시 아닐 것이다.

'묻지마 살인'은 사실 슈퍼테러리즘의 일종이라고 볼 수 있는데, 이 슈퍼테러리즘은 불특정 다수에 대한 테러이다. 이런 유의 테러가 생긴 것은, 사회가 그만큼 소외된 개인을 포용하지 못한 탓에, 그 개인이 사회 전체에 대한 적개심을 품게 되기 때문일 것이다. 때문에 이런 슈퍼테러리즘 문제는 개인의 문제라기보다는 사회의 문제라고 보아야 옳다. 가령 엄청난 희생자를 낳은 대구 지하철 화재사고 역시, 장애인을 포용하지 못하는 사회에서 일어난 비극이라는 견해도 있다.

사이코패스 사건 예방#

사이코패스의 증상과 대구 지하철 화재사고를 비롯한 슈퍼테러리즘의 원인을 조합하면, '묻지마 살인'에 대한 예방은 사회의 보호에 있다는 결론이 도출된다. 사회가 소외된 개인을 충분히 보호하고 감싸 준다면, 아무리 충동 억제가 부족한 사람이라도 '묻지마 살인'을 일으킬 만큼 심각한 상황에 빠지지는 않을 것이다. 사이코패스는 "남을 배려하고 생명을 존중하는 의식이 희미해지는 경쟁사회의 부산물"이다.

아직도 언론은 슈퍼테러리즘 사건에 대해 서술하면서 "용의자가 사이코패스라는 주장이 있다"는 식으로 B급 호러영화의 정서로 접근한다. 사이코패스라는 딱지가 한번 앉으면, 그 다음부터는 더이상의 설명을 필요로 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번 고시원 방화 사건에서도 사이코패스 이야기가 파다했다. 용의자 정 씨가 사이코패스인지 아닌지는 아마 검사를 받아봐야 알겠지만, 적어도 그가 경찰 진술을 통해 스스로 핍박을 많이 받았다고 생각하는 것만은 확실한 것 같다. 요컨대 그는 사회로부터 소외받은 사람이었거나 스스로 그렇게 여겨온 사람이라는 점이 분명해진 것이다.

범인은 누구인가?#

『시지프의 신화』를 통해 자살에 대해 긴 변론을 내놓은 까뮈는 이렇게 말했다(17-18):

자살에는 수많은 이유들이 있는데 일반적으로 볼 때 가장 뻔한 이유가 반드시 가장 확실한 이유라고는 할 수 없다. 깊이 반성한 끝에 자살하는 일은(그렇다고 이 가설이 전연 배제되는 것은 아니지만) 드물다. 거의 언제나 이성적으로 통제할 수 없는 그 무엇이 위기의 발단이 된다. 흔히 '실연'이니 '불치의 병'을 운운한다. 이와 같은 설명은 그럴듯해 보인다. 그러나 바로 전날, 절망에 빠진 사람의 친구 하나가 그에게 무관심한 어조로 대꾸한 적은 없었는지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바로 그자가 죄인이다. 왜냐하면 그것 한 가지만으로도 유예 상태에 있었던 모든 원한과 모든 권태가 한꺼번에 밀어닥치기에 충분하기 때문이다.

'묻지마 살인'을 저지른 범인은 다른 사람이 아니라 바로 우리다. 소외 계층을 우리의 이웃으로 품지 못한 우리 사회 전체가 범인이다.

참고문헌

Camus, Albert. 2000. 『시지프 신화』. 김화영 옮김. 개정판. 알베르카뮈전집4. 서울:책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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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엔디

무분별한 한자어나 외래어의 사용은 분명히 언어의 양극화를 심화시켜 정보의 불균형을 낳는다. 정보가 민주적으로 배포되지 않는 곳에서 세계는 평평하지 않다. 때문에 한자어나 서양 외국어 독해에 어려움을 겪는 대중들에게 외래어를 한국어로 옮기는 운동은 소중한 의미를 갖는다.

이를테면, '국어순화' 운동의 가장 큰 성과로 생각되는 '갓길'이 그렇다. 숄더shoulder나 노견路肩이라고 하면 썩 잘 다가오지 않는 개념이 갓길이라고 하면 한눈에 무슨 뜻인지 알 것 같다. 게다가 갓길은 숄더나 노견보다 훨씬 더 아름다운 말이다. 정과리(1998, 38)는 "'노견'이라는 가금家禽 종자 같은 이름을 벗어던지고 새로 차려 입은 우리말이 상큼한 여성성을 연상케" 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국립국어원에서 운영하는 우리말 다듬기 사이트에서는 매주 외래어 하나씩을 골라 한국어 갈음말(대체어)을 내놓는다. 이렇게 만들어진 갈음말이 그대로 표준어로 인정되는 것은 아니다. 동아일보 기사에 따르면 이 말이 널리 쓰이면 표준어의 지위를 획득하여 사전에 실리게 되는데, 이 때 최초 제안자의 이름도 함께 넣는다고 한다.

그러나 일부 낱말들은 이미 상당한 정도로 쓰이고 있다. 예를 들어, 댓글reply이나 누리꾼netizen, 다시 보기vod 등은 일반은 물론 몇몇 언론에서도 쓰이고 있으며, 영화헤살꾼spoiler이나 참살이well-being, 늘찬배달quick service도 적지 않게 사용되고 있다.

아름다운 말과 알맹이가 없는 말

문제는 우리말 다듬기에서 다듬은 말 가운데 '갓길'처럼 아름다운 말은 찾아보기 힘들다는 것이다. 갓길이 아름답다는 것은 단지 그 말의 말맛語感이 좋다는 뜻만은 아니다. 갓길은 그 사이시옷의 매력을 한껏 돋우는 발음을 갖고 있으면서도, 한번 들으면 누가 굳이 설명하지 않더라도 무엇을 말하는지 알 만한 직관성을 갖고 있다. 그러면서도 설명적이지 않고, 길이도 짧다. 한국어의 아름다움을 자랑차게 뽐내는 낱말로 손색이 없다.

우리말 다듬기에서 '갓길'처럼 아름다운 말을 찾으라면 '댓글'이나 '다시 보기' 따위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댓글'은 직관적이고 짧으면서도 '댓거리'처럼 알려진 말과 조화가 맞는다. '다시 보기'는 VOD보다 긴 듯하지만, 음절 수는 같으며 video on demand로 풀지 않으면 의미를 알 수 없는 VOD에 비해 훨씬 직관적이다. 또 AOD를 '다시 듣기'로 표현할 수 있는 토대가 되는 등 활용도도 높다. 하지만 이런 낱말들은 기실 우리말 다듬기에서 순화하기 이전에도 널리 쓰였던 것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우리말 다듬기의 존재 의의는 상당히 축소된다.

어떤 말은 외양은 화려한데 알맹이가 없는 것도 있다. '행사빛냄이'가 그렇다. 한국인들이 격식을 차릴 때 주로 쓰는 '(자리를) 빛내다'라는 동사를 써서 꽤나 화려해보이는 말이지만, 사실 저 말은 '레이싱걸'을 순화한 말이다. 무엇보다 레이싱걸이 행사를 빛내는 사람인지는 나는 도저히 모르겠다.

뿐만 아니라 최근 들어 무분별하게 사용되고 있는 '-이' 접사를 국립국어원도 아무 생각 없이 사용하고 있으니 아쉬울 따름이다. 사전을 찾아보면 본래 '-이' 접사는 명사나 용언의 어간, 어근, 의성·의태어 뒤에 붙어 명사를 만드는 접미사다. 절름발이는 명사 뒤에 붙은 예이고, 높이는 형용사 어간 뒤에, 먹이는 동사 어간 뒤에, 홀쭉이는 의태어 뒤에, 딸랑이는 의성어 뒤에 '-이'가 붙은 예이다. 요즘 흔히 보이는 '지킴이'나 우리말 다듬기에서 선정한 '…빛냄이'처럼 용언의 명사형에 '-이'가 붙는 경우는 없다. 외래어를 우리말로 아름답게 다듬어야 하지만, 그 과정에서 알맹이가 사라지거나 규칙이 무분별하게 무시되어서는 안 된다.

규칙이 무시되는 것이 외래어의 유입보다 한국어에 더 나쁜 영향을 미칠지도 모른다. 외래어는 한국어 속으로 들어오면서 기존 언어의 규칙보다는 한국어의 규칙 속에 편입된다. 이 경우 외래어는 어휘 수준에서 한국어 속으로 편입되지만, 형태론적 차원이나 통사론적 차원에서는 한국어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가령 영어 동사인 lead가 이미 '이끌다'는 뜻을 가진 동사임에도 한국어 내에서는 '리드하다'는 식으로 '-하다'를 붙여서 나타난다. '픽업하다', '프린트아웃하다'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또, '내츄럴하게'에서 볼 수 있듯이 natural은 본래 영어에서의 부사접미사인 -ly를 포기하고 한국어의 문법을 따라 '-하게'라는 어미를 채용하게 된다. 때문에 외래어의 유입이 한국어의 문법을 바꾸는 경우는 거의 없다.

그런 점에서 all-in을 '다걸기'로 옮긴 것도 문제가 있다. 보통 '올인하다'라는 동사형으로 쓰이는 이 말을 '다걸기'라고 옮기면 '올인해'는 '다걸기해'가 된다는 말인가? '다 걸어'면 족할 일이다. 국어의 형태론적 특성을 고려하지 않은 무분별한 순화의 사례라고 하겠다.

깁더와 붙갈이소리

해방 이전에 주시경 선생의 제자로 외솔 선생과 쌍벽을 이루었던 김두봉은 아름다우면서도 정확한 말을 만드는 데 뛰어났다. 그는 자신이 지은 문법책 『조선말본』의 증보판增補版을 내면서 『깁더 조선말본』이라 이름붙였다. '깁더'는 '깁고 더한'을 줄인 말이다. 이 '깁더'라는 말은 2007년 김진우 선생이 『언어: 이론과 그 응용』의 새판을 『언어: 이론과 그 응용 깁더본』이라 이름하면서 후대에 이어지기도 했다.

김두봉이 지은 다른 말로는 붙갈이소리가 있다. 언어학의 음운론 용어인데, 파찰음破擦音을 토박이말로 바꾼 것이다. 붙었다가 터지면서 소리가 나지만, 완전히 터지지 않고 갈아서 나는 소리인 'ㅈ', 'ㅉ', 'ㅊ'을 일컫는 말이다. 파찰음보다 얼마나 더 쉽고 얼마나 더 아름다운지 보라.

푸른 바다의 은유와 샹글릴라의 이상향

우리말 다듬기가 다듬었다는 말 가운데 정말 실소를 금할 수 없는 것은 대안시장이라는 말이다. 대안시장은 연전에 널리 인기를 끌었던 블루오션을 다듬은 말이다. 블루오션 전략은 모두 알다시피 경쟁이 많은 피바다 레드오션이 아니라 경쟁이 없는 푸른 바다 블루오션을 찾자는 마케팅 전략이다. 블루오션 전략을 조금이라도 공부한 사람은 대안시장이 블루오션 전략을 어느 정도 설명할 수는 있지만, 전체를 갈음하기는 어렵다는 데에 동의할 것이다. 대안시장이란 마치 기존의 시장과는 전혀 다른 시장을 말하는 것 같기 때문이다. 물론 블루오션 전략은 '비고객을 고객으로 만들라'고 주문하는 등 '대안시장'과 전혀 관계없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블루오션 전략의 적지 않은 부분은 기존 고객의 많은 수가 별로 신경쓰지 않는데 원가만 많이 드는 고정관념 속의 재화나 용역을 버리고 고객의 진정한 필요를 찾아 거기에 투자하라는 데에 바쳐진다. 가령 태양의 서커스라는 시르크 뒤 솔레이유는 서커스에서 동물이 등장하는 부분을 버리고 이야기와 곡예를 강화하거나 창조하여 새로운 서커스를 만들어내어 세계적인 인기를 끈다는 식이다. 그러므로 블루오션이 전혀 다른 새로운 대안 시장을 만들어내는 것만은 아님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블루오션은 어떻게 한국어로 다듬으면 좋을까? 영어를 처음 배우는 초등학생에게 물어봐도 답은 금방 나온다. '푸른 바다'다. '블루오션 전략'은 '푸른 바다 전략'이라고 부르면 된다. 본래 '블루오션 전략'은 가치혁신value innovation이라는 이름으로 추진되었던 전략인데, 김위찬 교수와 르네 마보안 교수가 책을 내면서 은유적인 의미를 더해 '블루오션 전략'이라고 이름붙인 것이다. 이것을 다시 '대안시장'으로 다듬는다면 원뜻에서 한참 멀어지고 만다. '국어순화' 운동이 이런 간단한 은유조차 담지 못하는 것은 확실히 문제다. 원어에서 은유가 도입되었다면 갈음말에서도 은유를 쓰는 것이 당연하다.

또, 아름다운 이름의 고유명사 샹그릴라를 굳이 '꿈의 낙원'이라는 설명적인 용어로 바꾼 것도 문제다. 샹그릴라는 무릉도원, 유토피아, 엘도라도, 그리고 율도국과 함께 사람들이 오래 생각한 이상향의 한 종류인데, 저 이상향들은 각기 다른 문화적 전통과 초점을 갖고 있는 것이다. 샹그릴라는 샹그릴라일 뿐이다.

맺음말: 민족주의와 심미주의

말이란 관념이나 이념으로 바꿀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사람이 가는 곳이 곧 길이 되듯, 모든 말무리言衆들이 쓰는 것이 곧 말이다. 외래어를 '순화'시켜야 한다고 하는 사람들은 언제든지 상허 이태준으로 되돌아가 보아야 한다(이태준 1988, 27):

그는 클락에서 캡을 찾아 들고 트라비아타를 휘파람으로 날리면서 호텔을 나섰다. 비 개인 가을 아침, 길에는 샘물같이 서늘한 바람이 풍긴다. 이제 식당에서 마신 짙은 커피 향기를 다시 한번 입술에 느끼며 그는 언제든지 혼자 걷는 남산 코스를 향해 전차길을 걷는다.

이 문장에서 클락, 캡, 트라비아타, 호텔, 커피, 코스 등의 외래어를 굳이 안 쓴다고 해보라. 이 외에 무슨 말로 '그'라는 현대인의 생활을 묘사해낼 것인가? […]

새 말을 만들고, 새 말을 쓰는 것은 유행이 아니라 유행 이상 엄숙하게, 생활에 필요하니까 나타나는 사실임을 이해해야 할 것이다. 커피를 먹는 생활부터가 생기고, 퍼머넨트 식으로 머리를 지지는 생활부터가 생기니까 거기에 적응한 말 즉 커피, 퍼머넨트가 생기는 것이다.

말은 말무리의 것인데, '국어순화'론자들은 말을 민족의 것으로 치환해버린다. 한국어가 한국어 말무리들의 것이 아니라 민족의 것이 되면, 한국어는 외래어나 한자어를 배격할 수밖에 없다. 거기에는 말을 아름답게 만들려는 심미적 욕구가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다. 민족주의는 너무나도 무겁고 심각하기 때문이다.

가령 김우창(1977, 385-386, 388-389)은 '얼'이나 '슬기'와 같은 민족주의적 고유어가 강요하는 외경감에 대해 말한다. '얼'이라는 말 한 마디에서 우리는 자랑스러운 한민족임을 느끼면서 자못 종교적인 열락에 빠지고 마는 것이다. 이런 민족주의 열락에 빠지게 되면 고유어는 하나의 가짜 '심미화'를 형성하게 된다. 발터 베냐민에게 '정치의 심미화'가 그랬던 것처럼(신형기 2003, 180), '얼'이라는 억압적인 말이 가짜 아우라를 갖게 되면서 우리는 그 억압적인 말과 화해하게 된다. 여기서 '얼'이 본래 '어리석어 빠지다'는 뜻의 '얼빠지다'를 잘못 분석해서 생긴 말이라는 사실은 중요하지 않다.

민족주의의 가짜 '심미화'에서 벗어나 진짜 한국어의 아름다운 맛을 느낄 수 있는 언어 운동이 생기기를 바란다. 뷔퐁이 "문체(스타일)는 곧 그 자신이다Le style est l'homme même."라고 말한 것은 그저 한 말이 아니다. 언어 심미주의야말로 언어 운동에서 가장 소중하게 고려해야 할 것이다.

참고문헌

김우창. 1977. "말과 現實: 國語醇化運動에 대한 몇 가지 생각". 수록처: 『궁핍한 시대의 詩人』. 김우창전집1. 서울:민음사. 378-390쪽.
신형기. 2003. "남북한 문학과 '정치의 심미화'". 수록처: 『민족 이야기를 넘어서』. 동시대인 총서12. 서울:삼인. 171-197쪽.
이태준. 1988. 『문장강화』. 창비교양문고10. 서울:창작과비평사.
정과리. 1998. "대한국인이 갓길을 침범할 때". 수록처: 『문명의 배꼽』. 문지스펙트럼4-009. 서울:문학과지성사. 38-4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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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엔디

흔히 뉴라이트 역사교과서라고 불리는 교과서포럼『대안 교과서 한국 근·현대사』가 내세우는 것은 실증주의다. 그들은 기존의 역사 교과서가 '좌편향'되어 있다고 비판하면서 교과서포럼 창립선언문을 통해 이렇게 자신들의 지향점을 밝혔다:

<교과서포럼>은 대한민국의 과거를 미화하지도 않겠지만, 비하하지도 않을 것이다. 당연히 우편향도 아니고 좌편향도 아니다. 오로지 있는 그대로 우리가 치열하게 살아온 과거를 맑은 거울에 비추어보는 것처럼 진솔하게 보고자 한다. ‘실사구시(實事求是)’야말로 <교과서포럼>이 지향하고 있는 교과서철학이다.

대안 교과서 한국 근·현대사
'좌편향'과 '우편향'을 벗어나겠다는 주장은 오래도록 우파의 논리였던 '탈정치'와 다를 바가 없고, '실사구시'라고 하는 것도 우파들이 말하는 '실용주의'의 정체가 밝혀진 지금에 와서는 전혀 새로울 것이 없다. 오히려 문제는 여기서 "있는 그대로", "맑은 거울에 비추어보는 것처럼 진솔하게"와 같은 말이다. 요컨대 교과포럼의 주장은 '사실事實이란 사실史實이어야 하며 특히 사료적 진실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역사적 기록에 남아 있지 않은 것은 믿지 않겠다는 말이다. 『대안교과서 한국 근·현대사』 출간을 알리면서, 교과서포럼은 그들의 주장을 한 단어로 요약해서 소개했다. 바로 '실증주의'라는 방법론이다:

4. 이상과 같은 문제의식과 새로운 시각에서 저의 교과서포럼은 《대안교과서》의 서론에서 밝힌 대로 다음과 같은 방법론을 채택하였다.

1) 첫째는 철저한 실증주의이다. 현행 교과서는 물론, 종래의 한국 근ㆍ현대사 서술은 너무나 많은 역사적 사실을 왜곡하거나 숨겨왔다. 민족의 자존심을 건드릴 수 있는 예민한 문제들이 의도적으로 회피되어 왔습니다. 그렇지만 우리의 《대안교과서》는 역사 서술에 어떠한 터부를 두지 않고, 모든 역사를 있었던 그대로 충실하게 기술하고자 노력하였다. 역사에 대한 궁극적인 판단은 역사가가 아니라 일반 독자의 몫이다. 역사가는 역사를 충실히 묘사할 뿐이며, 그 기본 책무에 소홀해서는 안 된다.

2) 종래 지나치게 강조되어 온 민족주의사관을 누그러뜨리려고 노력하였다. […]

실증주의는 일곱 가지 방법론들 가운데 가장 먼저 등장하고 있으며, 그 앞에 '철저한'이라는 꾸밈말까지 붙어 있다. 이 책에서 실증주의라는 가치가 차지하는 위상이 얼마나 높은지를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게다가 그 바로 아래에는 '민족주의사관'에 대한 비판적 접근을 시사함으로써 실증주의와 민족주의의 대립 양상을 극명하게 드러냈다.

실증주의와 사료#

실증實證이란 실제로 증거를 댈 수 있는 것을 이른다. 증거를 댈 수 없는 것은, 곧 허구이거나 거짓말 또는 상상에 불과하다는 것이 실증을 신봉하는 사람들의 주장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실증은 객관적 인식이자 과학정신이다. 그런데 오귀스뜨 꽁뜨가 실증주의positivisme를 들고 나왔을 때 그가 했던 말은 이상하게도 '진보'였다(김영한 1990, 63):

꽁트에 의하면 인간 정신의 진보는 3단계 법칙에 따르고 있다. 이 법칙은 ① 신학적神學的 또는 가상적假想的 단계, ② 형이상학적形而上學的 또는 추상적抽象的 단계, ③ 과학적科學的 또는 실증적實證的 단계로 되어 있으며 이것은 바로 필연적 역사 법칙의 불가피한 결과들을 반영해 주는 것이다.

실증주의는 결국 옛 정신으로부터의 진보를 이름이었다. 이 '진보'의 이름으로 실증주의가 학문의 발전에 미친 영향은 작지 않다. 실제로 오랫동안 인간들은 잘못된 신학이나 잘못된 형이상학의 영향 아래에 있었기 때문이다. 이 잘못된 학문들의 하위 학문이었던 의학의 예를 보면 이를 명확하게 알 수 있다. 무엇이 사실인지, 그것을 어떻게 증명하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던 시절이었으니 생명이 어떻게 탄생하는지 병이 나면 어떻게 치료해야 하는지도 중요하지 않았다. 바슐라르(1977, 63)는 생명이 잉태될 때 어떻게 성별이 정해지는가를 '설명'한, 전혀 과학적이지 않은 17세기의 글을 소개하고 있고, 플로베르(1997, 47)는 황열병을 치료한답시고 피를 너무 많이 뽑아 환자를 죽게 한 일화를 쓰고 있다:

삐에르 쟝 파브르 의사는 1636년에 남성과 여성의 탄생에 관한 이론을 개진한다. "하나이며 모든 부분이 똑같으며, 동일한 기질을 갖고 있는 씨가 자궁 속에서 분리되어 하나는 오른편으로 다른 하나는 왼편으로 빠진다면, 그 씨의 분리 자체에서 형태나 모양에 있어서 뿐만이 아니라 성性에 있어서까지도 하나는 남성, 하나는 여성이라는 식으로 대단한 차이가 야기된다. 씨의 힘과 기력과 열기를 유지할 보다 따뜻하고 보다 힘있는 육체의 부분이므로, 오른편으로 빠진 씨의 부분에서 남성이 생겨날 것이고, 인체의 보다 차디찬 부분인 왼편으로 빠진 다른 부분은 씨의 힘을 훨씬 감소시키고 약화시킬 찬 특질을 받아들이게 되어, 거기에서 여성이 생겨날 것인데, 그것도 원천에서는 남성적이다." (원주=파브르, 《화학비밀개요》)

더 나아가기 전에, 객관적 경험과는 최소한도의 관련도 맺고 있지 않는, 그 단언의 완전히 근거없음을 강조해야만 하겠다.

그로부터 오랜 시간이 지난 후, 그녀는 빅토르가 탔던 배의 선장으로부터 직접 조카가 어떻게 죽었는지 듣게 되었다. 황열병黃熱病을 치료한다고 병원에서 너무 피를 많이 뽑았다는 것이었다. 네 명의 의사가 동시에 그에게 매달렸지만, 그는 곧 사망했고, 주임 의사는 이렇게 말했다고 했다. "제기랄! 또 하나가 갔네!"

그래도 더 객관적일 것으로 기대되는 자연과학, 그 가운데서도 인간의 삶과 직결되는 의학이 이럴진대 다른 학문이 겪고 있던 비논리성은 말할 것도 없었을 것이다. 적어도 실증주의의 등장 이후로 이와 같은 난센스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실험을 통해 증명된 것만 믿고, 검증을 통해 확정된 것만 신뢰하는 과학적 태도는 이제 당연한 것이 되었다.

'그러므로 역사에 대한 서술도 있는 사실을 그냥 그대로 적어내기만 하면 된다.'라고는 그러나, 말할 수가 없다. 김영한은 실증주의 역사학이란 그런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김영한 1990, 60-61):

우리나라 역사학계에서 많이 쓰이는 '실증적'이라는 말과 '실증주의적'이라는 말은 엄격히 구분되어야 할 것이다. 일반적으로 우리나라에서 '실증적'이라는 말은 사료史料의 객관적 취급, 이른바 랑케가 말하는 "사실을 과거에 있었던 그대로 재생하는 것"(wie es eigentlich gewesen)을 뜻하는 것으로 통용되고 있는 것 같다. 이와 같은 과거 사실의 충실한 확인과 복원은 일면에서는 실증주의의 정신과 부합되는 것도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이것이 곧 실증주의 그 자체를 가리키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사실의 정확성과 정밀성은 실증주의가 추구하는 첫 단계의 과정에 불과하며 실증주의의 최종적 목표는 어디까지나 경험에 입각한 법칙성과 예측성을 찾는 데 있기 때문이다. […]

[…] 자료의 객관적 취급이나 사실의 정확성을 추구하는 것은 따지고보면 실증주의자들에게만 고유한 특성은 아닐 것이다. 관념론자나 상대주의론자를 막론하고 모든 역사가가 사실을 정확히 확인하는 것은 그들의 제1차적 의무이며 필요조건인 것이다. 다만 문제의 발단과 견해의 차이는 이와 같은 사실의 확정에 있는 것이 아니라 확정된 사실에 대한 해석과 설명 방식으로부터 야기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우리나라에서 흔히 '실증사학'이라고 말할 때의 '실증'의 개념이 사료와 문헌에 대한 철저한 고증이라는 단순한 의미에서 크게 벗어나고 있는 것이 아닌 한, 이것은 역사 연구의 특정한 태도를 가리키는 것이라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최소한 우리나라에서 쓰이는 실증사학實證史學과 서양에서의 실증주의實證主義 사학史學과는 엄격히 구분되어야 하며

좀 긴 인용문이지만, 요약하면 실증주의란 법칙을 세우기 위한 방법론이지, 결코 사실을 그냥 있는 그대로 서술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따라서 "모든 역사를 있었던 그대로 충실하게 기술하고자 노력하였다. 역사에 대한 궁극적인 판단은 역사가가 아니라 일반 독자의 몫이다. 역사가는 역사를 충실히 묘사할 뿐이며, 그 기본 책무에 소홀해서는 안 된다."고 천명한 교과서포럼의 역사 교과서는, 실증이라는 단어에만 집착했지 실증주의의 기본적인 개념에 대해서도 잘 몰랐기 때문에 법칙을 세우는 실증주의의 '기본 책무에 소홀했다'고 말할 수 있다.

『가즈오의 나라』와 민족주의 사관#

가즈오의 나라
대중적 민족주의자라 할 만한 김진명이 주로 관심 갖는 것은 한국의 고대사와 근·현대사다. 그로서는 찬란한 한국의 고대사가 일제의 침략을 받은 근·현대 시기에 말소되었다는 것을 지속적으로 강조함으로써 한국인들의 자존심을 세워주는 글쓰기를 실천하고 있다. (그의 글에서 중세사는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곧 그는 주로 일본과의 관계 속에서 한국이라는 나라 혹은 민족의 정체성을 자리매김하는 것이다. 그에게 있어서 실증주의는 식민사관에서 나온 자학사관인 것처럼 보인다. 그는 두 번째 소설에서 실증주의에 대한 "싫증"을 토로하고 있다(김진명 1995, 268-269):

"왜 단군 신화를 역사로 보지 않는 겁니까? 왜 이야기 정도로 치부하는 겁니까? 일본인들은 자기네 역사를 올리지 못해 안달인데 왜 우리는 깎아내리지 못해 안달입니까?"

상훈에게는 참으로 가슴에 와닿는 얘기였다. 에이지의 사건을 추적하면서 뼈저리게 느끼던 부분이었다.

"실증이 안 되고 있잖아요."

"밤낮 그놈의 실증 실증 하지 마십시오. 정말 싫증납니다. […] 이 나라 학생들은 제 나라 시조를 유치원에서 이야기 정도로나 배우라는 겁니까?"

"학문이란 그런 것이 아니오. 교과서에는 고증된 것만을 실어야지."

"일본이 수천 권의 역사서를 불태우고 말살해버린 한국의 고대사는 시시한 사서에 한 줄만 있는 사실도 애지중지하며 키워내야 합니다. 그런데 삼국사기 같은 정사에 있는 기록도 못 믿겠다고 교과서에서 빼버리면 우리나라 역사를 어디로 끌고 가겠다는 겁니까? 왜 과거 일제시대에 일본인들이 하던 주장을 그대로 되풀이하는 겁니까?"

학자들은 눈에 띄게 조선사편수회 시절부터 내려오던 뿌리 깊은 식민사관을 극복해내고 있었다.

소설에서 민족주의자들은 실증주의의 옷을 입은 식민주의자들을 비판하고 있다. 그들의 논리는 일본이 사료 자체를 말살한 마당이니 실증주의라는 것도 허구가 아니냐는 것이다. 실증주의는 그 사료중심성 때문에 일제에 의해 조작된 사료에 휘둘려 식민주의가 되고 만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문영 님의 일제는 20만 권의 사서를 태웠나에서 볼 수 있듯이 일제가 태운 역사 관련 책은 51종에 불과하다:

서희건 저 <잃어버린 역사> 1권 11쪽에는 <제헌국회사>와 <군국일본조선강점 36년>이라는 책을 인용해 일제가 핀매금지하고 수거한 책은 총 51종 20여만 권이라고 밝히고 있다. <군국일본조선강점36년>을 쓴 사람은 일제시대 군수를 지낸 골수 친일파 문정창이라는 재야사가인데, 이 재야사가는 이외에도 황당무계한 이야기를 많이 지어낸 인물이다. 바로 이런 사람이 주장한 내용이 일제가 20여만 권의 사서를 불태웠다고 주장한 것이다.

한국인들은 오래도록 반일 감정을 교육받았기 때문에 사실을 적확하게 지적하지 않기로 마음먹으면 한국인들을 도발하기는 무척 쉽다. 어쨌든 사료 말살설을 애지중지 키우면 "한국의 고대사는 시시한 사서에 한 줄만 있는 사실도 애지중지하며 키워내야" 한다는 주장으로 바뀐다. 실증주의에 대한 근본적인 도전이라 할 수는 없지만, '실증'의 정신은 찾아볼 수 없다. ('시시한 사서에 한 줄만 있는 사실'을 자꾸 키워내려다 보니 '고대 삼국은 한반도가 아닌 중국에 있었다'는 허무맹랑한 주장을 하게 된다. 대체로 출전이 없는 주장이지만, 간혹 출전이 있더라도 문외한이 보더라도 무리한 적용이 많다. 실제로 이런 주장에 대해서는 상세하고 논리적인 비판이 나와 있다.)

재미있는 것은 주인공격인 상훈은 때로 일본의 제국주의 역사학자들의 논리를 깨기 위해 실증주의를 주창하기도 한다는 것이다. 상훈은 제국주의자들의 역사관을 "황국사관"이라고 부르며, "학계의 양심"에 호소한다(김진명 1995, 222-223):

말은 삼국 학계라 하고 있었지만 결론은 일본을 제외한 중국과 한국의 역사기술을 옳지 못하다고 나무라는 것에 다름 아니었다. […] 올바른 토론이라기 보다는 한국과 중국의 역사학계에 대한 성토장이 되고 있었다. 누군가 상훈의 의견을 물어오자 상훈은 호흡을 가다듬었다. 어쨌거나 그들은 일본 학계의 대표들이기 때문이었다.

"본인은 동양 삼국의 역사를 올바로 기술하기 위하여 삼국의 사서를 대조하고 공통적으로 확인되는 사실을 위주로 하여 이제까지처럼 자국중심의 역사기술 태도를 버리고 철저히 사료에 입각하여 역사를 재구성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고대사 중에서 한일간에 쟁점이 되어 있는 임나일본부에 대한 일본의 역사기술은 여전히 황국사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으므로 이 점에 있어서 학계의 양심을 촉구하는 바입니다."

앞으로는 "자국중심의 역사기술 태도를 버리고 철저히 사료에 입각하여 역사를 재구성"하라는 것이다. 곧 실증 정신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후 상훈은 주로 광개토대왕비에 대한 해석, 그 중에서도 『일본서기』의 임나일본부설을 비판하는 내용으로 일본 역사학자들을 압도한다. 사실과 전설을 구분해야 하며, 광개토대왕비에서도 과장된 부분은 인정해야 하며, 『일본서기』의 사료적 가치를 다시 생각해 봐야 한다는 내용이다. 그런데 토론 과정에서 또다서 등장하는 것이 역시 '분서焚書'론이다. 한국의 국수주의자들은 일제가 고대사 사료들을 말살했다고 주장하고, 일본의 황국사관에 빠진 사람들은 한국이 '임나일본부설'은 부끄러운 역사라 관련 사료를 다 없애버렸다고 주장한다(김진명 1995, 233):

"결국 한 점의 자료도 찾지 못하자 한반도의 사람들이 치욕적인 사실이라 기록을 모두 없애버렸다고 주장하기도 했지요. […] 세계 역사상 그런 일은 한 번도 없었습니다. 4·5세기 경이면 양국간에 사신 한번 왔다 간 것도 모두 사료에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2세기에 걸쳐 일본이 한반도를 지배한 것이 겨우 일본서기의 기록 한 줄로 압축될 수 있습니까? […]"

한 소설에 실린 두 분서론은 자국중심주의적 역사관이 얼마나 쉽게 허구가 될 수 있는지를 극명하게 보여 준다. 이 소설에서 볼 수 있듯이 일본의 주장을 깨뜨릴 때에는 '실증주의'를 종용하고, 한국의 역사를 기술할 때에는 "시시한 사서에 한 줄만 있는 사실"을 키워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한국 민족주의의 두 얼굴이다.

실제로 식민주의와 민족주의는 같은 논리를 가진다는 점을 기억해야 하겠다. 차하순(1990, 188-196)은 식민주의 사관을 세 가지로 구분하여 ① 인종적 식민주의 사관 ② 진화론적 식민주의 사관 ③ 문화적 식민주의 사관 등이 있을 수 있다고 설명한다. 식민주의자들이 타국을 침략할 때 "우리가 우월하기 때문에 정당하다"고 말하는 것이 인종적 식민주의 사관이고, 그와 거의 구별할 수 없지만 굳이 가르자면 "우리가 더 진화되었으니 너희는 도태되어도 되므로 정당하다"고 말하는 것은 진화론적 식민주의 사관이다. 또, "우리 문명이 더 위대하니 우리가 너희에게 문명을 주겠다"고 말하는 것은 문화적 식민주의 사관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 세 가지 식민주의 사관은 그대로 한국 민족주의에도 적용된다. 한국인들은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민족이라는 주장이나 한국의 찬란한 고대사만을 강조하는 주장이 문제가 있는 것은 그 때문이다.

구술사와 '기억'의 정치학#

교과서포럼이 '실증'적 태도를 견지하기 위해 취했던 것은 전적으로 사료에만 의존하는 방식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들의 관점에 전연 동의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실제로 국수주의적 민족주의자들의 황당무계한 주장을 그들로서는 받아들이기가 어려웠을지도 모른다. 실제로 '관찬 사서'라고 할 만한 중·고등학교 국사 책에조차 부족한 근거로 한국과 한민족을 치켜세우는 표현이나, 과장된 표현들이 적지 않게 나온다. 때문에 교과서포럼 역시 일정 부분 역할을 하고 있다고 생각해볼 수는 있다.

그러나 그들이 철저하게 사료--그 가운데에서도 특히 공문서--에만 의존하면서 간과한 부분도 적지 않다. 가령 동학농민운동은 "남겨진 실증적인 사료에 관한 한" 농민들이 먹고 살기 힘들어 일으킨 보수적 농민 봉기로 평가된다. 이 교과서는 일제의 토지 수탈을 위한 토지조사에 대해서도 농민이 근거를 제출하면 땅을 돌려주었다는 식으로 기록하고 있고, 일본군 '위안부' 역시 '속아서 제발로 돈 벌러 갔다'는 취지로 쓰기도 했다. 이와 같은 '묘사'는 아마 그들이 택한 사료가 일본의 입장을 대변하는 사료였기 때문일 것이다. 공문서 중심의 태도는 필연적으로 개개인의 발언을 무시한다. 피해자들이 아무리 내가 피해자라고 증언해도 그 증언은 받아들여지지 않고, 가해자의 양심선언도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속아서 제발로 돈 벌러 갔다'는 주장은 그런 태도에서 비롯된 것이다.

내셔널리즘과 젠더
우에노 찌즈꼬(1999, 149-154)는 1996년 12월에 발족한 '새로운 역사 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의 주장을 네 가지로 요약했다: ① '위안부' 강제 연행을 뒷받침할 실증 자료가 없다. ② 실증 사학의 입장에서는 피해자의 증언이 신뢰성을 의심받는다(구두 증언은 신뢰성이 없다). ③ 성性의 어두운 면을 중학생들에게 가르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④ 국민적 자존심을 회복해야 한다.

우에노는 넷째가 그들의 가장 핵심적인 주장이라고 했지만, '기억'을 말하는 역사의 입장에서는 아무래도 첫번째와 두번째 주장에 눈길이 갈 수밖에 없다. 우에노는 그들의 주장에 약간 흥분한 듯하지만, 사실은 매우 차분하게 반박한다. 먼저 첫번째 주장에 대한 반박을 보자:

언뜻 보기에 이 주장은 문서 사료 지상주의인 실증 사학 입장을 취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네오 나찌의 논리와 다를 바 없다. 네오 나찌는 유태인 말살을 지시했던 히틀러가 사명한 문서 자료가 없다는 논거로 유태인 학살은 없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 문제에 대해 문서 사료 지상주의가 안고 있는 위험은 누가 보아도 명백하다. 패전국이 전후 처리에 앞서서 자신들에게 불리한 자료를 폐기 처분했다는 사실은 분명하기 때문이다.

'새로운 역사 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이나 교과서포럼이 택하고 있는 '실증주의'라는 것의 맹점이 나타나는 부분이다. 이들은 사료가 없다면 어느 무엇도 확정할 수 없다는 태도를 취하고 있고, 그 사료라는 것은 일반적으로 문서 사료에 한정된다. 문서 사료가 당대에 거쳐야 할 필연적인 숙명인 '검열'을 고려하지 않은 연구 태도라고 볼 수 있다. 우에노는 이어서 "실증 사학이라는, 언뜻 보기에 '과학적'인 방법론을 채용하는 것이 어떤 함정에 빠질 수 있는가를 고찰해 볼 필요가 있다."고 말함으로써 이들이 '과학화'를 부르짖음으면서도 결국 궁극적으로는 '비과학화'로 나아가고 있다는 주장을 편다.

실증 사학에서는 문서 사료, 고고학적(물적) 사료, 그리고 구두 사료를 사료로 인정하는데, 이 가운데 구두 사료보다는 나머지 둘의 사료 가치가 더 높다. 또 문서 사료 가운데에서도 공문서가 사문서보다 가치가 높다. 그런데 문제는 "'공'문서란 '관官'에서 사태를 어떻게 '관리'했는가를 나타내는 자료"라는 점이다. 따라서 공문서는 언제든지 관의 판단에 따라서 수정되거나 삭제될 수 있는 문서라고 봐야 한다. 그런데도 공문서만을 신봉하는 태도는 일견 불편부당不偏不黨한 태도로 보이지만, 사실은 당시 권력을 점하고 있던 쪽에 편향된 판단을 내리게 될 수 있는 위험을 안고 있는 것이다.

두번째 주장에 대한 반박을 보자:

'위안부' 문제의 특질은 지금까지 누구나 그 존재를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피해자가 침묵함으로써 피해자가 없는 범죄가 되어 왔다는 것이다. […] '위안부' 문제는 '위안부'를 경험했던 여성들을 침묵하게 하는 일에 성공했다. 그 피해자들이 간신히 무거운 입을 열고 자신들의 체험을 증언하는데, 구두 증언은 역사 자료로서 신뢰성이 없다는 이유로 피해 자체를 부인하려 한다.

무분별하게 '실증'을 신봉하는 태도는 '말'을 신뢰하지 못하도록 만들었다. 이런 고민은 사실 '위안부' 문제뿐 아니라 여성사 일반에 적용된다. "여성사는 '씌어진 역사'가 거의 없는 상태에서 출발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이를 극복할 수 있는 방안은 역시 구술사oral history뿐이다(우에노 찌즈꼬 1999, 169-175).



MBC TV에서 3월 29일 방영한 뉴스후는 위안부 할머니들의 구술사를 강조했다

구술사는 분명 몇 가지 문제가 있다: ① 망각이나 잘못된 기억 ② 비일관성 ③ 기억의 선택성 ④ 회상이라는 시점이 그것들이다. 곧 신뢰성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기억이란 얼마든지 잘못될 수 있고, 이야기의 앞뒤 줄거리가 종종 맞지 않는다. 또, 기억은 항상 선택적인 것이어서 기억되는 것이 있고 잊혀지는 것이 있게 마련이다. 게다가 편년체적으로 당대의 사건을 기록하는 것이 아니라 후일 인터뷰를 통해 사건에 대해 말하는 것이므로 현재의 처지가 과거의 기억을 윤색시킨다는 것이다.

그러나 '씌어진 역사'인 '정사'에서도 구술사의 문제점은 다 나타난다: ① '정사'에서도 씌어지지 않은 기록이나 지워진 기록, 잘못된 기억이 있다. ② 정사 역시 앞뒤가 맞지 않는 경우가 많다. 또한 '앞뒤가 맞는 역사'는 오히려 더 위험한 역사이다. 딱 맞아떨어지는 역사는 목적론적으로 '편집된 역사'일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③ '정사' 역시 권력자의 시각에서 취사선택된 것만 기록한다. ④ 역사는 본래 당대에 어떤 기록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의 끊임없는 '재심'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역사는 '회상'이다.

'씌어진 역사'만을 신봉하는 태도는 오히려 우리를 사실事實로부터 멀어지게 함은 물론, 그럼으로써 진실에 다가가는 것을 방해하는 주요한 요인 중 하나이다. 공식 문서뿐 아니라 작은 화장실의 낙서와 피해자 한 사람 한 사람의 증언이 중요한 것은 그 때문이다. 나는 실증적인 태도 그 자체를 비판하는 것이 아니다. '실증주의'는 현대 학문science의 가장 기본적인 태도에 불과하다. 중요한 것은 어떤 정보가 사실인지 아닌지를 판단하는 판단력 그 자체이다. '씌어진 역사'만을 신봉하는 '실증주의'는 반쪽 실증주의일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프레베르가 썼듯이 당대의 '위대한 사람'이란 후손을 위해 제 몸의 치수를 재게 마련이기 때문이다(Prévert 1986, 120):

위대한 사람
Le grand homme

석공의 집에서
난 그를 만났지
그는 제 몸의 칫수를 재고 있었어
후손을 위해서.

결론#

역사학자가 나라와 민족을 사랑할 수는 있다. 그러나 그 사랑과는 별개로 학문의 연구는 객관적이어야 한다. 그것이 실증주의다. 실증주의라는 방법론은 당연히 항상 유효하다. 중요한 것은 '실증'의 근거를 무엇으로 잡는가이다. 공문서 중심의 담박한 서술이 역사 교과서의 임무라고 믿는다면, 역사학자라는 사람이 있을 필요가 없다. (그래서 교과서포럼의 대안교과서 집필진에 역사학자가 없는지도 모르겠다.) 역사적 사실은 항상 미스테리일 수밖에 없으며, 다만 우리는 진실에 점근선으로 다가갈 수 있을 따름이다. 가령 식민지 근대화론이 완전히 허구인지 어느 정도의 진실성이 있는지 나는 잘 모른다. 중요한 것은 어느 쪽이든 적확한 근거를 바탕으로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들의 증언도 마찬가지다. 이들 증언은 하나하나가 소중한 구술사이다. 물론 우리가 그들의 주장을 덮어놓고 100% 신뢰할 수는 없다. 그러나 적어도 그들의 주장이 상당한 진실성을 담보하고 있다고 판단된다면 거기에 대한 연구도 게을리해서는 안 된다. 이와 같은 성실한 태도가 뒷받침되지 않는다면 교과서포럼의 '담박한 서술'은 실제로는 철저히 편향된 시각에 불과하게 될 뿐이다.

참고문헌#

김영한. 1990. "實證主義史觀". 실린곳: 차하순 엮음. 『史觀이란 무엇인가』. 청람논단1. 증보7쇄. 서울:청람. 57-76쪽.
김진명. 1995. 『가즈오의 나라』. 2권. 서울:프리미엄북스.
차하순. 1990. "植民主義史觀". 실린곳: 차하순 엮음. 『史觀이란 무엇인가』. 청람논단1. 증보7쇄. 서울:청람. 181-197쪽.
우에노 찌즈꼬. 1999. 『내셔널리즘과 젠더』. 이선이 옮김. 비판총서3. 서울:박종철출판사.
Bachelard. 1977. 『불의 精神分析』. 김현 옮김. 삼중당신서11. 서울:삼중당.
Flaubert, Gustave. 1997. "순박한 마음". 실린곳: 『세 개의 짧은 이야기』. 김연권 옮김. 문지스펙트럼2-008. 서울:문학과지성사. 13-76쪽.
Prévert, Jacques. 1986. 『붉은 말』. 함정숙 옮김. 세계문제시인선집3. 서울:청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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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엔디
아침에 오마이뉴스 박성호 기자의 공정택지지문자 거부할 수 없었다는 기사를 보고 놀랐다. 교육감 선거본부의 선거 운동이 '스팸 문자'와 유사한 방식으로 진행되고 있었다는 점 때문이었다. 제목에서도 볼 수 있듯이 박성호 기자는 그 문자를 거부할 수 없었다는 데에 초점을 맞추어 기사를 썼다. 그리고 선본의 사무실에 전화를 걸어 홍보과 번호를 알아냈지만 그쪽 전화도 아무도 받지 않았다고 썼다.

내가 같은 곳으로부터 문자를 받은 것은 오늘 낮 12시가 좀 넘어서였다. 문자 내용은 이랬다:

[선거정보]전교조
는안됩니다 공정
택 현교육감에게
표를몰아주세요!
 거부0802855000

먼저 박 기자처럼 수신 거부 번호(080-285-5000)로 전화를 걸어봤지만 헛수고였다. 신호가 가는 듯 '따르릉' 하더니 이내 '뚜- 뚜- 뚜-' 통화중 신호가 흘러나왔다. 몇 번을 걸어봐도 마찬가지였다. 일단 한번 '따르릉' 하고 곧이어 '뚜- 뚜- 뚜-'다.

하릴없이 발신 주소인 02-2269-8025로 전화를 걸어 봤다. 박 기자의 때와 마찬가지로 수신은 안 되는 전화라고 했다.

그런데 나는 정작 수신거부는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수신거부가 안 돼도 문자가 오면 그냥 지우면 되고, 전화가 오면 그냥 끊으면 된다. 오히려 문제는 이 전화번호를 선거본부에서 어떻게 알게 되었느냐 하는 점이었다. '명색이 교육을 책임지는 교육감 선거인데…….'라는 생각에 나는 약간 흥분한 상태가 되어 공정택 후보 홈페이지에 나오는 전화번호(02-2237-3300)로 전화를 걸었다. 전화 받으시는 분께서 해당 부분은 홍보실에서 담당한다고 하시며 최아무개 홍보실장이라는 분의 전화번호(02-2269-8016)를 알려주셨다.

공정택 후보 선거본부 홍보실장과의 통화#

박성호 기자의 기사도 있고 해서 혹시 안 받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으나, 몇 번의 신호음이 울리고 홍보실장이 전화를 받았다. 홍보실장은 휴대전화 문자메시지를 이용한 선거홍보가 선거법상 문제가 없다고 말했다. 어떻게 수집했는지를 물었더니 지인들의 추천을 통해 모집했다고도 하고, 동창회 같은 곳에서 받았다고도 했다. 그래서 나의 정보를 어디에서 입수했는지 조회할 수 있는지 물었더니, 그 추천인 정보는 거의 다 폐기해서 알 수 없다고 했다:

¶ 사람들이 제 번호를 선본에다 보내드렸다는 말씀이네요?
홍보실장 : 선거법상 가능한 선거운동 방법이고요.

¶ 제 동의 없이 제 번호가 갈 수 있다는 말이네요?
홍보실장 : 부모님이나 친구분들이…… '보내도 괜찮다'고 확인은 안 받았지만…….

¶ 제가 직접적으로 아는 사람이어야 되는 거란 말씀인가요?
홍보실장 : 아니요. 직접적으로 알지 않고, 동문회 명단 같은 것을 사용해도 선거법상 지장은 없습니다.

¶ 그럼 (제 정보가) 어떻게 들어갔는지 알 수 있을까요?
홍보실장 : 서울시 유권자가 지금 800만 명이잖아요? 저희가 선거운동 기간 13일 동안 데이터를 다 정리할 수가 없어요. 저희가 핸드폰 번호만 입력하고 나머지는 다 파기를 하기 때문에 대부분 추천인을 찾을 수는 없어요.

¶ 수신거부 전화로 전화를 해도 계속 통화중이던데요.
홍보실장 : 전화가 많이 와서 그렇습니다.

¶ 수신거부하시는 분들이 정말 많은가 보네요?
홍보실장 : 다들 그렇죠, 저희뿐이 아니고요. 주경복나 이인규 후보쪽도 똑같은 상황입니다. 스팸메일 보낸다고 항의가 엄청 많이 가거든요. 저희가 데이터를 생성을 해서 보내는 것은 아니거든요.

¶ 그러면 제 번호가 어떻게 들어갔는지는 알 수 없으시단 말씀이시죠?
홍보실장 : 일단 찾아는 보겠습니다. 저희가 데이터를 찾아봐서 추천인이 적혀 있으면 저희가 말씀을 해 드리겠습니다. 없는 것을 거짓말로 말씀드릴 수는 없잖아요? 일단 성함과 연락처를 알려주시면 저희가 삭제해서 문자 발송 안 되도록 하겠습니다.

문자메시지를 이용한 선거운동과 개인정보#

이상해서 서울시 선거관리위원회(지도과 02-762-3939)에 전화를 걸었다. 지도과 담당자는 선거법상 문자 메시지 발송 등의 선거 운동은 할 수 있다고 규정되어 있지만, 그 정보를 수집하는 것에 대한 규정은 선거법에 없다고 답변했다. 그렇다면 현재 선관위에 같은 질문을 해온 경우가 있는지 묻자, 근래 유사 질문이 있었다고 대답했다. 그리고 현재 선관위는 이 부분--개인 정보 수집--에 대한 지침을 가지고 있지 않으니 만약 이 부분이 문제가 된다면 경찰청에 문의를 해야 한다고 말했다.

궁금해서 법제처 홈페이지를 뒤졌다. 공직선거법 109조 ①항은 "누구든지 선거기간중 선거권자에게 서신·전보·모사전송 기타 전기통신의 방법을 이용하여 선거운동을 할 수 없다. 다만, 인터넷[광고의 경우에는 제82조의7(인터넷광고)의 규정에 따른 광고에 한한다]·전화(컴퓨터를 이용한 자동송신장치를 설치한 전화의 경우를 제외한다)에 의하는 경우에는 그러하지 아니하다."고 규정하고 있다. 즉, 우편이나 전기통신을 이용한 선거운동은 금지하되, 인터넷과 전화의 경우는 허용한다는 뜻이다. 따라서 문자메시지를 통한 선거운동은 합법이다.

또한, 같은 법 82조의 5 ②항은 "[...] 선거운동 목적의 정보(이하 "선거운동정보"라 한다)를 전자우편으로 전송하거나 전화를 이용하여 전송(송·수화자간 직접 통화하는 경우를 제외한다. 이하 이 조에서 같다)하는 자는 다음 각호의 사항을 선거운동정보에 명시하여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여기서 "다음 각호의 사항"이란, 선거운동이라는 사실과 수신거부의 방법이다. 따라서 이 부분도 문제가 없다.

개인정보 수집과 아주 약간 관련이 있는 규정이 있는데, 82조의 5 ⑥항은 "누구든지 숫자·부호 또는 문자를 조합하여 전화번호·전자우편주소 등 수신자의 연락처를 자동으로 생성하는 프로그램 그 밖의 기술적 장치를 이용하여 선거운동정보를 전송하여서는 아니된다."라고 규정하고 있다. 따라서 번호 조합 등의 프로그램을 통해 문자메시지를 무차별 발송하는 행위는 위법이다. 이 규정이 있기 때문에 선본에서는 추천인 등을 통해 전화번호를 확보하여 메시지를 보냈을 것이다.

(다만 문제가 되는 것은 앞서 살펴본 109조 ①항에서 전화를 이용한 선거운동을 허용하면서도 "컴퓨터를 이용한 자동송신장치를 설치한 전화의 경우를 제외"하였다는 점이다. 여기서 "자동송신장치"가 컴퓨터가 임의의 번호를 조합하여 보내는 것을 말하는 것인지 아니면 데이터베이스에 있는 번호 모두에 선거운동 정보를 보내는 프로그램을 말하는 것인지 나는 잘 모르겠다. 만약 뒤엣것이 맞다면 어느 선본이든지 문자메시지를 직접 보내지 않고, 엑셀이나 액세스 등 기타 데이터베이스를 이용하여 발송한 선본인 선거법 위반이 된다.)

개인정보보호 규정의 구멍#

공직선거법에는 개인정보 수집과 관련한 규정이 없었다. 개인정보수집과 관련하여 공공기관의 개인정보보호에 관한 법률이 있지만, 이는 개인정보와 관련한 공공기관의 권한과 의무를 규정한 것으로 교육감 선거본부와는 관계가 없다. 또, 정보통신망 이용촉진 및 정보보호 등에 관한 법률이 있지만, 여기서 개인정보의 수집과 관련한 규정은 모두 '정보통신서비스 제공자'에 관련한 내용뿐이다. 이 법의 2조 ①항 3호에서 규정하는 바에 따르면 '정보통신서비스 제공자'는 "「전기통신사업법」 제2조제1항제1호에 따른 전기통신사업자와 영리를 목적으로 전기통신사업자의 전기통신역무를 이용하여 정보를 제공하거나 정보의 제공을 매개하는 자"이므로 영리 목적이 아닌 교육감 선거본부와는 관계가 없다.

비영리 단체가 개인정보를 수집하는 행위에 대해서는 법 규정이 없는 것으로 보인다. 혹시 내가 과문하여 못 찾는 것일 수도 있지만, 혹시 있더라도, 유명무실한 법일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이들이 마음만 먹으면 거의 제한 없이 개인정보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들은 포털로부터 개인정보를 사들이거나 웹사이트 해킹을 통해 개인정보를 탈취할 수는 없다. 이와 같은 행위는 정보통신망법에 저촉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동창회나 동호회, 종교 단체 등 기타 비영리단체로부터 개인정보를 제공받을 수는 있고, 이를 바탕으로 선거운동 문자를 보내는 데는 별 문제가 없다.

더 큰 문제는 이들이 이 개인정보를 어떻게 관리해야 하며, 어떻게 파기해야 하는지에 대한 법률도 없다는 것이다. 선거가 끝난 뒤에도 파기되지 않고 파일이나 문서의 형태로 개인정보가 남아 있다면, 언제나 이들 정보가 유출될 위험에 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통화한 공정택 후보의 홍보실장은, 전화번호와 같은 개인정보는 '추천자'를 통해 받았지만 '추천자'가 누구인지는 대부분 파기해버려 확인하기 어렵다는 취지로 답변했다. 선거운동을 위한 개인정보의 관리가 법에 의하지 않고 선본의 임의 판단에 의해 이루어지고 있다는 증거이다.

개인정보보호 관련 법률의 보완#

현재까지 나에게 선거운동 문자메시지를 보낸 선본이 공정택 후보 선본밖에 없었기 때문에 공 후보 선본과 접촉한 내용이 주가 되었지만, 사실 다른 후보들의 경우도 이 개인정보와 관련한 내용은 대동소이할 것으로 추측된다. 이런 사태가 야기할 수 있는, 개인정보 대란을 막기 위해서 국회는 법률을 수정·보완하여야 한다. 먼저 선거법을 개정하여 공직 선거에서 사용되는 개인정보의 수집·관리 및 파기의 과정을 투명하고 엄격하게 해야 한다. 다음으로는, 온라인상의 개인정보뿐 아니라 오프라인상의 개인정보의 수집 및 거래에 대한 일반적인 법률도 반드시 필요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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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엔디

"'광고 탄압' 때문에 운영을 할 수 없다"고 우는 소리를 하는 《동아일보》가 택해야 할 길은 정해져 있다.

'광고 탄압'이라고 하니까 70년대의 《동아일보》 백지광고 사태를 떠올리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다. 사실 그 때의 《동아일보》는 대단했다. 1974년 10월 24일 《동아일보》 기자들은 '자유언론실천선언'을 박수로 채택하였다. 이것이 정부의 심기를 건드렸기 때문에 박 정권은 그 해 12월 16일부터 광고주들을 압박하여 《동아일보》에 광고를 주지 못하도록 했다. 《동아일보》는 75년 3월 결국 사주가 정부에 굴복할 때까지 한동안 백지광고 또는 격려 광고로만 채워졌다(강준만 2000, 486-490). 《동아일보》 스스로도 당시 광고 탄압 받은 것을 자랑스럽게 여기는지 '東亞日報 민족과 더불어 80년'이라는 글에서 상당 부분을 할애하여 이 광고 탄압 사건을 다루고 있다.

Daum 아고라 글 블라인드 공지
어쨌든 지금 우는 소리를 하는 《동아일보》에게 문제는 국가 권력에 의한 광고 탄압이 아니라 시민 결의의 '광고 탄압'이다. 지금 《동아일보》는 꽤나 급한 모양이다. 《동아일보》는 불과 며칠 전 사설을 통해 자못 비장한 목소리로 "본보는 민주주의와 언론자유의 본질을 짓밟는 어떤 세력에도 굴하지 않고 당당하게 언론자유를 수호할 것임을 다짐한다."라고 말했다. 안타까운 것은 그들이 그 '언론자유를 수호'하기 위해 선택한 방법이라는 것이 다음 아고라의 글을 블라인드 처리 하는 등 언로를 막는 방법이었다는 사실이다. 《동아일보》가 진정 언론자유를 원한다면, 다른 방법을 택해야 마땅했다.

1. 조중동이 택해야 할 길

늘 언론자유를 주장했던 《조선일보》, 《중앙일보》, 《동아일보》가 택해야 할 길은 명백하다: 신문 값을 올리는 것이다.

한국의 신문 값은 너무 싸다. 한국신문협회국내 신문 구독료 변화 연혁 자료에 따르면 2002년부터 500원 하던 것이 최근에 그나마 올라서 이제 600원이다. 알다시피 《경향신문》과 《한겨레》의 구독자 수가 많이 늘어서 "자칫 유동성 위기 등 경영상의 문제로 이어질 수도 있(다)"는 예견도 있을 정도다. 신문 값이 너무 싸서 구독자가 많을수록 손해를 본다는 얘기다. 신문이 신문 값을 받을수록 손하라면, 신문은 무얼로 먹고 사는가: 바로 광고다. 한국의 이야기다.

사실 나는 이 글에서 약간 이상주의적인 말을 하려고 한다. (이 실용주의의 시대에!) 하지만 언론이 제대로 자리매김하기 위해서는 약간의 이상주의가 꼭 필요하다. 아니, 사실은 내가 하려는 말이 이상이 아니라 현실이다. 아닌 게 아니라 신문 값이 너무 싸다는 이야기는 바로 《중앙일보》 사주인 홍석현이 자주 했던 말인 것이다. 그러던 2004년 《중앙일보》가 구독료를 인하하면서 '덤핑' 논란이 일자 《중앙일보》 측은 이렇게 말했다: "《중앙일보》 한 부당 제작비 중 인건비를 제외한 신문 용지대와 잉크값 등 순수 재료비는 5500원인데 이를 어떻게 덤핑이라고 할 수 있느냐." 그리고 그에 대해 다른 신문들이 《중앙일보》를 맹비난하면서 인용했던 것이 홍석현의 말이었고, 이에 덧붙인 말이 '자본으로부터의 독립성'이다. 내 말이 그 말이다. 나는 언론이 자본으로부터 독립하기 위해서는 신문 값을 올려야 한다고 생각한다.

한국의 언론이 정치 권력을 두려워하지 않게 된 것은 꽤 오래된 일이다. 노무현만큼 언론에게 두들겨 맞은 대통령이 또 있을까. 반면 경제 권력 앞에서는 맥을 못 춘다. 역시 꽤 오래된 이야기다: 손석춘은 《세계일보》의 '삼성의료원 부실 기사'와 서울신문의 '한솔 뇌물사건 연쇄연루' 기사 등을 비롯하여 경제 권력에 무릎 꿇은 신문의 이야기를 길게 전한다(손석춘 1997, 111-121). 그들이 경제 권력에 약한 이유는 그들이 광고에 지나치게 의존하고 있는 수익 구조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2. 신문 값과 광고 수입 비율

손석춘(1997, 117)은 기자협회에서 1995년에 조사한 '신문수입 중 광고수입 비중'을 싣고 있다. 이 표에 따르면 지방지와 경제지를 제외하고는 《조선일보》가 가장 높은 광고의존도를 보여주고 있다.

신문 광고비율(%) 신문 광고비율(%)
서울신문 74.5 경인일보 72.7
세계일보 73.2 부산매일 85.8
조선일보 84.9 부산경제신문 95.3
한겨레신문 72.4 경남신문 79.7
서울경제신문 90.4 대전일보 75.4
강원일보 76.2 인천일보 79.4
광주매일 84.3 전남일보 73.5
국제신문 87.8 제주신문 72.1
[표1] 신문수입 중 광고수입 비중 (기자협회, 1995)

이런 상황은 현재도 마찬가지여서 미디어경영연구소가 2004년 발표한 '신문 광고·판매 매출 비교'를 보면 전국지의 광고수익 대 판매수익의 비율은 82.5% 대 17.5%로 나타난 것을 볼 수 있다. 또 신문발전위원회가 공개한 2005회계년도 일간신문의 구독수입광고수입 자료(pdf)를 보아도 전체 수입 가운데 구독 수입이 차지하는 비중이 대개 30%를 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건 대체로 한국에만 해당하는 이야기다. 바로 이웃 일본만 해도 한국과는 다르다. 미디어오늘이 인용한 일본신문협회의 자료는 일본 신문들이 구독료를 인상한 결과 1992년 이후 판매수입이 광고수입을 앞지른 사실을 잘 보여주고 있다. 일본신문협회의 『일본신문 2003 DATA BOOK』에는 일본 신문의 판매 및 광고수입의 비중이 잘 나타나있다(신인섭 2004, 18).

연도 판매수입(%) 광고수입(%)
1995 60.2 39.8
1996 58.9 41.1
1997 58.6 41.4
1998 60.1 39.9
1999 60.4 39.6
2000 58.7 41.2
2001 59.7 40.3
2002 62.2 37.8
[표2] 일본 신문의 판매, 광고수입 (일본신문협회, 2003)

이제 눈을 유럽으로 돌려보자. 유럽 신문들은 대체로 광고수입 비중이 낮다. 대표적인 유럽 신문의 하나인 프랑스의 《세계Le Monde》지의 경우 광고수입 비율이 38%에 불과하다. 이것은 최근 증가한 숫자로 199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광고수입 비중은 30% 정도로 유지되었다(최연구 2003. 69). 그밖에도 일반적으로 서구 신문의 광고 수입 비중은 무척 낮다. 캐나다나 미국 등 북미권 언론사를 제외하고는 대체로 광고수입 비율이 60% 내외이거나 50% 미만이 된다(신인섭 2004, 16).

  판매수입(%) 광고수입(%)
이딸리아 46 54
영국 40 60
프랑스 53 47
독일 57 43
노르웨이 37 63
캐나다 21 79
[표3] 서구 수개국의 판매와 광고 비율 (세계신문협회WAN, 2003)

3. 미국의 광고수입 비율과 지방지의 특성

미국의 경우는 광고수입이 상당히 높은 편으로, 한국 신문보다도 그 비율이 높다고 볼 수도 있다.

  판매수입(%) 광고수입(%)
1980 73.0 37.0
1985 76.7 23.3
1990 78.7 21.3
1995 78.8 21.2
2000 82.2 17.8
[표4] 미국 신문의 광고, 판매수입 (미국 신문협회)

그러나 미국의 경우, 전국지라고 할 만한 것이 《미합중국 오늘USA Today》 외에는 없다시피 하다는 점을 고려해야 할 것이다. 미국의 수많은 지방지들에는 지방의 작은 회사 광고도 많이 실릴 뿐만 아니라, 일반인의 부고 광고 같은 것도 30달러 정도면 낼 수 있다고 한다(출처: 원문한국어). 그래서인지 미국 신문에서 전국 광고의 비중은 15~16%밖에 되지 않는다. 반면 소매광고가 36~40%를 차지하고, 안내 광고가 44~48% 정도를 이룬다(신인섭 2004, 17).

또, 미국은 광고 단가 자체가 훨씬 싸다. 임동욱(1998, 10)에 의하면 미국의 광고 단가는 한국의 1/4 수준밖에 되지 않는다. 상황이 이렇다면 미국에서는 작은 중소기업이라도 신문에 광고하기가 훨씬 쉬울 것이다. 손석희도 여러 강연에서 "MBC도 수신료를 받아야 한다"는 주장을 했는데, 그 여러 이유 가운데 하나가 그렇게 함으로써 "중소기업도 공중파에 광고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될 수 있기 때문이고 하였다.

국가(신문) 단가
한국(조선·중앙·동아·한국) 7750만원
한국(기타) 4150만원
미국(월스트리트 저널) 1880만원
일본(요미우리) 3300만원
[표5] 한국, 미국, 일본 신문의 전면광고비 비교 (임동욱, 1998)

그러므로 미국의 경우는, 광고의 비중이나 광고 단가 등의 요인으로 보아, 신문이 자본(권력)의 영향을 받을 수 있을 가능성이 한국보다 적을 수 있다. (실제로 영향력을 비교해서 적다는 뜻은 아니고, 적어도 그럴 개연성만은 있다는 말이다.)

4. 무가지와 조중동

무가지는 공짜 신문이란 뜻으로, 독자들에게 무료로 신문을 나누어 주는 대신 광고로 경영을 해 나가는 신문을 말한다. 《메트로》나 《포커스》, 《AM7》 등 많은 무가지 때문에 스포츠신문은 물론이고 일간지들도 몸살이다. 한국만 그런 것은 아니다. 프랑스에서도 《메트로》나 《20분20 minutes》과 같은 무가지 때문에 기존 일간지들이 어려움을 겪고 있다. 《피가로Le Figaro》지와 《해방La Libération》지가 1.2유로(약 1900원), 《세계Le Monde》지가 1.3유로(약 2100원)이므로, 프랑스의 신문값은 비싼 편이기 때문에 어려움은 클 것이다.

무가지는 무료이기 때문에 광고 수익만으로 경영을 해야 한다. 그래서 무가지의 경우 광고 지면이 뉴스 지면과 비슷하거나 더 많다. 2003년 최경진 교수팀이 3개 일간지를 3일간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메트로》, 《포커스》, 《AM7》의 광고 지면은 평균 48%에 이르렀다. 또 2004년 《미디어 오늘》이 1월 1일부터 16일까지 조사한 결과도 전체 지면의 44~52%가 광고임을 보여준다.

신문 광고 비율(%)
메트로 53
포커스 50
AM7 41
평균 48
[표6] 무가지 광고비율 (최경진, 2003)
신문 광고 비율(%)
메트로 46.7
포커스 51.6
AM7 44.1
[표7] 무가지 광고비율 (미디어오늘, 2004)

그런데 놀라운 것은 무가지를 수준낮은 신문이라고 폄하했던 일부 일간지들의 광고 비율이 무가지와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김춘식 교수는 조중동의 2002년 전체 지면 중 광고 비율이 45.5%에 달한다는 것을 밝혔다. 이처럼 광고 비율이 높은 것은 한국의 특이한 현상이다. 민주언론시민연합은 2003년 2주간 국내외 신문의 광고 비중을 조사하여, 한국 신문의 광고 비율을 외국과 비교하였다.

매체 조선 중앙 동아 한겨레 경향 한국 NYT The Times Le Monde 아사히
광고 면 58.72% 59.39% 58.02% 42.22% 35.47% 46.96% 39.35% 42.27% 13.96% 46.97%
광고 없는 면 0.52% 1.30% 5.47% 10.58% 25.42% 5.11% 43.18% 8% 34.17% 3.29%
[표8] 한국과 외국 신문의 광고 비율 비교 (민언련, 2003)

민언련의 조사 결과를 보면 조중동은 광고 지면 자체만 가장 많은 것이 아니라 아예 광고가 없는 면이 거의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돌이켜보면 과거 박 정권이  《동아일보》에 대한 압박 카드로 광고 탄압을 택하게 된 것도 이런 사정과 무관하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만약 조중동이 스스로에 대한 시민들의 심판을 '광고 탄압'을 여긴다면, 그런 탄압을 받지 않기 위해 광고 비율을 스스로 줄이고, 판매 수익으로 성장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해야 마땅하다. 그러면 (정말 본인들의 논지가 옳다고 믿는다면) 시민들의 '광고 탄압'에도 아랑곳 않고 스스로의 논리를 지켜나갈 수 있을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또한 정연구 한림대 교수의 '신문 무료화 현상과 저널리즘'을 참고해볼 수 있다. 정 교수는 그 글에서 신문의 정가(1달 구독가)가 2만원이 되더라도 "넉넉한 내용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덧) 광고와 소비자 주권

동아일보는 시민들의 불매운동을 두고 사설에서 "언론자유 유린이자 기업경영 방해"라고 규정했다. 하지만 김기창 고려대 법대 교수가 지적했듯이 소비자는 스스로의 소비를 스스로 통제할 권리가 있고,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자신의 의사를 알리고 동참할 것을 설득할 권리도 있다.

김광수 고려대 언론학 교수가 2005년 발표한 '광고와 언론'(pdf)이라는 글을 보면, CBS가 에미 상을 받은 드라마를 재방송하면서 광고주인 P&G의 요구에 따라 일부 에피소드를 취소한 사례가 나온다. P&G는 총기 통제, 낙태, 컬트 등의 기사 근처에 광고를 싣지 않기 때문이다. P&G는 또, 2000년 파라마운트 텔레비전의 토크쇼 진행자가 동성애를 생물학적인 일탈이자 성서에 배치되는 행위로 간주하는 발언을 한 적이 있다는 이유로 광고를 취소하기도 하였다.

Notable Sinclair advertisers

sinclairaction.org에 올라왔던 광고주 목록.

김광수 교수가 든 사례 가운데에는 좀더 정치적인 사례도 있다: 싱클레어 계열의 방송사에서 부시를 공개적으로 지지하고 케리를 공격하면서, 진보적 시각은 제외하고 보수적 논평만 방송하자 스테이플즈 사는 이 방송사에 대한 광고를 철회했다. 이 철회는 시민단체가 스테이플즈 쪽에 철회 압력을 가했고 회사는 이에 동참하여 벌어진 일이었다. 시민들은 sinclairaction.com이라는 사이트를 만들어 광고주를 압박했다. 이 과정에서 스테이플즈가 이 운동에 동참하여 광고를 뺐다는 워싱턴포스트 기사도 등장했지만, 이는 오보로 밝혀졌다. 중요한 것은, 광고주를 압력하는 류의 시민행동이 용인될 수 없는 사안은 아니었고, 오보까지 날 정도로 효과적일 수 있다는 개연성을 갖추고 있다는 것이다. (2008. 6. 26. 12:18 추가)  물론, 이 과정에서 미국의 수사기관이 시민단체를 구속 수사했다거나 그럴 방침을 세웠다는 이야기는 없다.

시민들은 자기가 원하는 방식대로 소비할 권리가 있으며, 광고주 역시 자신의 소비자인 시민들의 뜻을 따르는 것이 자연스럽다. 이를 두고 '자본주의의 근간을 흔드는 행위'라는 식으로 이야기하는 것은 억지다. 오히려 공권력으로 정당한 소비자 운동을 막는 것이야말로 '자본주의의 근간을 흔드는 행위'라고 하겠다.

한 가지 더 덧붙인다. 시민들이 국가를 상대로 들고 일어난 '쇠고기 정국'의 촛불문화제 역시 정당한 소비자 주권이 아니겠는가?

참고문헌

강준만. 2000. 『권력변환 한국 언론 117년사: 1883-2000』. 서울: 인물과사상사.
김광수. 2005. "광고주의 언론에 대한 영향력 고찰--미국 사례를 중심으로". 실린곳: 『관훈저널』.
신인섭. 2004. "우리 나라 신문광고요금". 실린곳: 『KAA저널』. 2004년 7~8월. 서울:한국광고주협회. 14-24쪽.
임동묵. 1998. "세미나 중계". 실린곳: 『KAA저널』. 1998년 10월. 서울:한국광고주협회. 10-13쪽.
최연구. 2003. 『르 몽드』. 살림지식총서048. 서울:살림.

Posted by 엔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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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그네됨'의 비밀을 깨닫지 못하고, '이웃'에 대해 깊이 생각해보지 않은 기독교는 위험하다. 그리스도가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라고 언급했던 것은 두 사랑의 계명, 곧 여호와에 대한 사랑과 이웃에 대한 사랑이다. 이와 같은 입장에서 사도 요한은 한 편지에서 다소 충격적인 발언을 한다(요일 4:20):

눈에 보이는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자가 어떻게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사랑할 수 있겠습니까?

그리스도인은 흔히 이웃 사랑에서 자주 인용되는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배울 필요가 있다. 도움이 필요한 소외된 자를 돕는 선한 사마리아인이야말로 그리스도인의 모범이기 때문이다. 사마리아인이 자신의 주머니를 털어 다른 사람을 도울 수 있었던 것은, 그가 그 돈을 스스로의 것으로 여기지 않고 여호와의 것 혹은 최소한 공동체의 것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정치가 한정된 재화를 어떻게 나누는가를 정하는 과정이라고 정의할 때, 기독교의 정치는 그 재화가 본래 여호와로부터 온 것이라는 철저한 인식 속에서 출발해야 하는 것이다.


1. 기독교와 사유재산

쟝 깔뱅은 그리스도인의 사유재산을 포함한 여러 가지 자유를 인정했다. 모든 신자가 수도원의 탁발승처럼 살 필요는 없고, 각자 자신이 있는 곳에서 여호와의 영광을 위하여 자신의 일을 열심히 하는 것이 소중한 소명이며, 그로써 정당하게 번 재산은 신의 선물이라는 것이다(Calvin 1994, 332):

분명히 상아나 금이나 재물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선한 것이며, 인간의 유익을 위하여 하나님의 섭리에 의해서 허용되고 지정받기까지 한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웃거나 배부르거나, 옛 조상의 재산에 새 것을 더하거나, 혹은 아름다운 가락을 즐기거나 포도주를 마시는 것들을 결코 금지당한 적이 없다.

이에 따라 막스 베버가 '독특한 부르조아 경제윤리'라고 부른 기독교 경제 윤리가 탄생한다(Weber 1987, 242-243):

그리하여 하나의 독특한 부르조아 경제윤리가 출현한 것이다. 부르조아 기업가는 신의 충만한 은혜 가운데 서서 그의 축복을 받고 있다고 느끼며, 그가 형식적인 올바름의 틀을 지키는 한, 그리고 그의 도덕생활이 깨끗하며 그의 재산이 온전하게 사용되는 한 금전적 이익을 추구할 수 있고 또 그래야만 하며, 또한 그가 그렇게 해야 할 의무를 수행하고 있다고 자부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본질적인 기독교의 측면에서 보면 그 사유재산이라는 것 역시 '나의 것'이 아니라 '신의 것'을 맡아두고 있다는 의식이 중요하다. 이런 의식의 발전된 형태로 사도행전이 보고하는 위대한 기독교 공산주의 혁명을 들 수 있을 것이다(행 2:44-45; 4:32):

믿는 사람은 모두 함께 지내며 그들의 모든 것을 공동 소유로 내어놓고 재산과 물건을 팔아서 모든 사람에게 필요한 만큼 나누어주었다.

그 많은 신도들이 다 한마음 한 뜻이 되어 아무도 자기 소유를 자기 것이라고 하지 않고 모든 것을 공동으로 사용하였다.

사도행전 1장은 다락에 모인 그리스도인들의 수가 120명이라고 기록하고 있고, 2장에서 성령이 임한 오순절 사건 이후 41절은 3000명의 제자가 늘었다고 보고 하고 있으며, 4장에서 말씀을 들은 자 가운데 5000명의 남자가 새로 믿게 되었다고 하였다. 이 당시에는 성인 남자만 세는 것이 일반적이었으므로 그리스도인 공동체가 보수적으로 잡아도 족히 2만 명은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2만 명의 공동체가 사유재산 없이 서로 필요에 따라 물건을 통용했던 것이다. 모름지기 그리스도인의 정치라면 이 정도의 이상은 꿈꾸어야 마땅할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이 자본주의의 시대를 접고, 기독교 공산주의의 시대로 나아가자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적어도 한국의 깔뱅주의 프로테스탄트라면 재산과 관련해서 세속 법이 규정하는 것 이상으로 엄격해야 한다는 것을 주장하는 것이다. 가령 깔뱅 역시 사유재산은 인정했지만 무차별적인 재산권 행사의 자유는 그르다고 보았으며, 이자利子는 인정했지만 무차별적인 취리는 옳지 못하다고 보았다(손봉호, 칼빈의 사회 사상).

그러나 이명박 대통령은 물론이고, 첫 내각의 상당수가 재산과 관련하여 엄청난 비리가 있음이 드러난 것이다. 대학 등록금도 없던 이명박 대통령의 가계는 현대건설을 거치면서 믿을 수 없을 만큼 탄탄해졌다. 개발독재 시대의 건설사에 몸담고 있으면서 땅값의 시세차익으로 얻어진 부다. 그는 이 부를 사회에 환원하겠다고 대통령 후보시절 선언했지만, 낙타가 바늘귀를 통과하면 지키려는지 아직까지 그 약속은 지켜지지 않고 있다.

한 장관 내정자는 땅 투기 의혹에 "땅을 사랑했을 뿐 투기는 아니다"라는 군색한 변명을 내밀었고, 다른 장관도 투기 의혹이 불거지자 한겨울에 트렉터를 끌고 밭을 가는 쇼를 했다. 굳이 헌법에 명시된 '밭 가는 자가 밭을 소유한다耕者有田'는 원칙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그리스도인들은 앞서 희년과 나그네됨: 이명박과 예레미야서 ①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이런 약자를 보호하기 위한 율법 규정을 지키는 것이 마땅하다.

그러나 수많은 노동자가 다치고 죽어가는 상황에서 이명박 대통령은 명시적으로 부자를 위한 정치, 기업가를 위한 정치를 시작하려 하고 있다. 당선자 시절 가장 먼저 찾아간 곳이 전경련이라는 점이나, 최근 기업가들을 위한 직통 핫라인을 개설한 점 등만 봐도 누구나 알 수 있는 점이다. 이 땅의 나그네들을 소외시키고, 재산을 여호와의 것이 아니라 기업가의 것 혹은 자신의 것으로 고착화시키려는 시도이다.

요컨대, 이명박이 펴려는 정치는 단순히 가진 자의 정치나 우파의 정치는 될 수 있어도 그리스도인의 정치라고는 결코 부를 수 없다는 것이다. 오히려 기대에 훨씬 못미쳤을 망정 김대중 전 대통령이나 노무현 전 대통령의 정치가 (그들 자신의 종교와는 관계 없이) 그나마 더 여호와의 뜻에 합당한 정치였다.


2. 이명박과 예레미야서

많은 교회가 '기독교인이 대통령이 되어야 한다'는 이유로 선거 과정에서 알게 혹은 모르게 이명박을 지지했고, 이명박이 대통령으로 당선되자 감사 기도를 드린 곳도 많았다. 이명박 대통령이 적籍을 두고 있는 소망교회에서는 주일 낮 예배에 "이명박 장로를 대통령에 당선시켜주셔서 감사하다"는 기도를 올리고, 매주 수요일에 이명박 대통령의 성공을 기원하는 기도회가 열린다(『한겨레21』 제699호).

그러나 그 과정에서 생략된 것은 이명박이 과연 올바른 그리스도인이냐 하는 평가와 과연 항상 그리스도인이 대통령이 되는 것만이 여호와의 뜻인가 하는 판단이다. 이명박이 올바른 그리스도인인가 혹은 그의 정부가 올바른 그리스도인의 정부인가 하는 문제의 해답은 앞서의 절을 통해서 어느 정도 밝혀졌다고 보고, 과연 항상 그리스도인이 대통령이 되는 것만이 여호와의 뜻인가 하는 판단에 대해서 살펴보자.

선지자 예레미야는 분열왕국 남유다가 망하는 것을 지켜본 예언자이다. 슬픔 가득한 '눈물의 선지자' 예레미야가 예언한 것은 다름이 아니라 남유다가 망할 것이며 다윗의 왕위가 폐하여질 것이고, 여호와의 도성인 예루살렘이 무너지리라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예레미야가 남유다의 백성들에게 권고한 것은 여호와의 도성을 지키고 끝까지 싸워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바빌로니아에 항복하는 것이 여호와의 뜻이라는 것이다(렘 27:8-10).

그러니 바빌론 왕이 씌워주는 멍에를 메어라. 그 왕 느부갓네살을 섬겨라. 그러지 않는 민족과 나라가 있으면, 나는 그 민족을 전쟁과 기근과 염병으로 벌하여서라도 느부갓네살의 손에 넘겨주고 말 것이다. 이는 내 말이라, 어김이 없다.

너희의 예언자들과 박수들과 해몽가들과 점쟁이들과 마술사들이, 우리가 바빌론 왕을 섬기게 될 리 없다고 하더라도 곧이듣지 마라. 그자들이 하는 예언은 거짓이다. 그 말을 듣다가는 고향을 멀리 떠나게 되며, 나에게 쫓겨나 망하고 말 것이다.

남유다의 백성들은 예레미야의 말을 듣지 않았고, 다윗의 왕위가 공고하리라는 거짓 예언만을 믿었다. 그러나 패역하고 여호와의 뜻에서 돌아선 남유다의 왕좌는 유지되지 못하였고, 바빌로니아에 결국 멸망하고 만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남유다가 죄를 지었기 때문에 여호와가 그들을 버린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구약의 세계관에서 바빌로니아는 하나의 도구에 불과한 것이다. 여호와는 바빌로니아의 왕을 종從이라고 부르며, 유다가 영원히 망할 것이 아니라 70년 후에 귀향할 것임을 예언하고 있기도 하다(렘 25:9, 12):

나는 내 종 바빌론 왕 느부갓네살을 시켜 북녘의 모든 족속들을 거느리고 쳐들어와 이 땅에 사는 사람들과 주위에 있는 모든 민족을 전멸시키고 이 땅을 영원히 쑥밭으로 만들게 하리라. 사람마다 그 끔찍한 모습을 보고 빈정거리리라. 이는 내 말이라, 어김이 없다. […] 그 칠십 년이란 시한이 차면 나는 바빌론 왕과 그 민족의 죄를 벌하여 바빌론 땅을 영원히 쑥밭으로 만들리라. 이는 내 말이라, 어김이 없다.

적어도 당시 남유다에게 있어서는 다윗의 자손이 왕위에 있는 것이 여호와의 뜻이 아니었고, 죄악의 상징 바빌로니아가 그들을 지배하는 것이 여호와의 뜻이었던 것이다. 그것은 어느 대통령 후보가 기독교인이라고 해서, 혹은 장로라고 해서 앞뒤 재지 않고 그에게 표를 주는 몰지각한 시민의식이 여호와의 관점에서도 옳지 않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리스도인의 올바른 태도는 솔로몬처럼 선과 악을 분별할 지혜를 구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장로가 대통령이 되기를 바라서는 안 되고, 여호와의 뜻에 합당한 사람이 대통령이 되기를 바라야 할 것이다. 이 부분을 혼동하면 예레미야 시절의 남유다 백성으로부터 한 발자국도 전진하지 못하게 되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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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박 장로는 결국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절차와 의혹이야 어떻든 기독교 세계관에서는 이것 역시 여호와의 뜻이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로 하여금 체념하고 현실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지혜가 필요한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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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손봉호. '칼빈의 사회 사상'. 실린 곳: http://lloydjones.org.
Calvin, Jean. 1994. 『기독교 강요(초판)』. 12판. 세계기독교고전14. 양낙흥 옮김. 서울:크리스챤다이제스트.
Weber, Max. 1987.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 학술총서1. 박종선 옮김. 서울:두리.

Posted by 엔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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