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의 조탁에 관심이 많았던 시문학 동인 시인 김영랑은 『영랑시집』에 실린 시 「누이의 마음아 나를 보아라」에서 가을이 깊어가는 시절에 대한 감탄이 담긴 누이의 한 마디를 고스란히 옮겨놓았다.

내용으로만 보면 이 작품은 전적으로 그 누이의 말이 계기가 되어 쓰여진 작품으로 보이는데, 첫 연의 시작과 두 연의 마지막에서 똑같이 반복되는 그 한 마디가 시의 발단과 절정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오-매 단풍들것네」
장광에 골불은 감닙 날러오아
누이는 놀란듯이 치어다보며
「오-매 단풍들것네」

추석이 내일모레 기둘니리
바람이 자지어서 걱졍이리
누이의 마음아 나를보아라
「오-매 단풍들것네」

- 김영랑, 「누이의 마음아 나를 보아라」전문

「누이의 마음아 나를 보아라」 시비FUJIFILM | FinePix F420 | Normal program | Pattern | 1/180sec | F/4.5 | 0.00 EV | 5.6mm | ISO-160 | Flash did not fire, auto mode | 2011:02:03 12:34:06

http://blog.daum.net/kdk99/17951751 CC-by-nc-nd 골든모티브

강희숙 조선대 교수의 전라도의 언어 11: “오메 단풍 들것네”에 따르면 호남 사투리에서 ‘오매’, ‘오메’ 또는 ‘워매’는 표준어의 ‘어머’ 또는 ‘어마’에 해당하는 감탄사이다. 그러나 ‘어머’와 ‘오-매’의 말맛語感은 완연히 다르다. ‘어머’가 다소 깍쟁이 같거나 여우 같은 느낌이라면 ‘오-매’는 그 길이와 억양까지 능청스럽고 천연덕스러운 느낌을 준다.

그러니까 영랑의 누이가 서울 사람이었다면 짧은 소리로 ‘어머 단풍 들겠네’ 했을 것이다. 하지만 ‘어머 단풍 들겠네’를 들었을 때의 심정이 ‘오-매 단풍 들것네’를 들었을 때의 심정과 같을 수는 없다.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뒤엣것이 그야말로 단풍에 대한 감탄처럼 느껴진다면 앞엣것은 단풍이 드니 어디 여행을 가야겠다거나, 사진을 찍어야겠다거나 아니면 집앞을 쓸어야겠다는 다짐—이를테면 ‘어머 비 오겠네’처럼—으로 느껴진다.

그러니까 영랑의 누이가 서울 사람이었다면 어쩌면 영랑은 누이의 말에서 아무런 시적 감흥을 느끼지 못했을 수도 있고, 우리는 영랑의 뛰어난 이 시를 갖지 못했을 수도 있다. 다시 말해, 한국 문학은 영랑 누이의 ‘오-매’에 많은 빚을 지고 있다.

전라도 사람들을 비하하는 말로 ‘오오미’가 쓰인다고 한다. 말이란 본래 누구나 쓰는 것이므로 오염되는 일이 많지만, 정지용과 더불어 가장 아름다운 언어로 한국어를 가꿨던 영랑의 주요 시어가 누군가를 낮잡아 일컫는 데 쓰인다는 사실이 씁쓸하다.

특히 그 쓴 맛이 더한 것은, 저 비하의 표현에 정치가 개입돼 있기 때문이다. 정치란 본래 말과 수사의 가장 치열한 한 극단이므로 그 말이 거칠 수밖에 없지만, ‘오오미’는 스스로 뜻signifié을 잃고 모양새signifiant만 남아 언어라는 기호의 상징성을 잃었기 때문이다.

정치로 떨어져버린 언어는 회생 가능성이 거의 없다. 그 말은 이제 붉은 점멸 신호등과 같다. 같은 지시만 반복할 뿐인 그 신호등을 운전자들은 아무런 주의도 기울이지 않고 지나친다.

Posted by 엔디

몇 년 전, 한국의 한 과학자는 "과학에는 국경이 없다. 하지만 과학자에게는 조국이 있다."는 묘한 말을 했다. 안 그래도 가득할 대로 가득한 한국인의 국가주의nationalisme를 자극했던 그 말은, 비록 빠스뙤르Pasteur가 먼저 비슷한 말을 했다고 하더라도, 결코 '과학적'인 언사라고는 할 수 없었다. 조국을 위한다는 명목 때문인지 몰라도, 실제로 그는 여성의 난자를 구입하는 비윤리적인 행태에서부터 1차 자료 조작이라는 과학의 가장 기본적인 원칙까지 저버리는 사건--사고가 아니라--까지 저질렀다.

'조국' 운운한 발언의 여파는 컸다. 그에 대한 옹호는 지금도 정치적인 색채를 띤다: 난자를 매매한 것은 그저 '국가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이라고 간단히 면죄부가 부여된다; 가장 핵심적인 사안이라고 볼 수 있는 실험 결과와 1차 자료에 대해서도 '그의 주장은 모두 사실이며 이에 대한 모든 의문은 미국의 음모'라는 옹호가 쉽게 성립한다. 짙은 색깔의 정치가 덧칠되면, 보다 민감하고 여린 과학이나 윤리의 빛은 그저 뒤덮이는 꼴이다.

정부가 발표한 천안함 수사 결과가 최근 발표되면서 그 과학자의 일화가 떠오르는 것은 왜였을까.

그리섬, 과학에 대한 신앙#

범죄 현장을 조사하는 길 그리섬

미국의 TV드라마 CSI 시리즈는 20세기말~21세기초 판 '최첨단 권선징악'의 이야기다. 이 시리즈의 저류底流에는 '범죄자는 결국 법의 심판을 받게 된다'는 믿음이 흐르고 있다. 그것을 가능하게 해주는 것은 고전소설의 신이나 신선, 용왕, 선녀가 아니라 '증거evidence'다.

시리즈의 원형이라 할 만한 《CSI 라스 베이거스》에는 그런 신념 또는 신앙으로 똘똘 뭉친 인물이 주인공protagonist으로 나온다. 길 그리섬Gil Grissom은 대부분 범죄 현장에서 증거를 수집하는 모습이나, 그 증거를 해석하는 과정에서 실험하는 모습으로 등장한다. 과학수사대(과수대)가 경찰 조직 내부에 있는 한국과 달리 드라마 속의 그리섬은 경찰이 아니다. 그에게는 늘 '나는 과학자scientist'라는 자의식이 있다. "증거가 우리에게 말한다The evidence tells us…"는 영어 표현은 그리섬의 신념 또는 신앙을 적확하게 보여주는 말이다.

그래서, 당연한 말이지만, 그는 증거를 애지중지한다. DNA 검사와 지문 채취, 옷 등의 증거물 수집을 위해 피해자의 가족에게도 서슴없이 협조를 부탁한다. 가령 방금 딸을 잃은 어머니의 옷에 피가 묻어 있다고 해서 증거로 달라고 하는 것은 (인간적으로는) 쉬운 일이 아니다. 그 어머니가 화를 내건 안 내건 그리섬의 반응은 같다: "나는 증거를 수집하고 있습니다I'm collecting evidence." 아무리 용무가 급해도 범죄 현장 내부의 화장실 대신 맞은 편 건물을 화장실을 이용한다는 이야기는 소소할 정도다.

나는 첫머리에서 언급한 사람보다 그리섬이 더 위대한 과학자라고 생각하는데, 그것은 그리섬이 이처럼 '1차 자료'에 해당하는 증거에 매달리고, 증거를 소중하게 다루기 때문이다. 내가 기억하는 바로는 그가 선입관을 가지고 사건을 처리한 경우는 거의 없다; 자신이 작업해 확정한 증거라고 하더라도, 나중에 다른 내용이 보이면 다시 거기에 매달리는 모습까지 보여준다. CSI에 종종 등장하는 재판 장면을 통해 미국이라는 나라가 그들의 노력을 어떻게 인정하고 받아들이는지를 보면, 그들의 증거 수집 노력에 숙연함까지 느껴질 정도다. 『세포Cell』니 『자연Nature』이니 『과학Science』이니 하는 잡지에 그리섬의 논문이 실린 적이 있느냐 없느냐는, 그러니까 별로 중요한 게 아니다.

과학수사와 살인의 추억#

영화 《살인의 추억》의 박두만

과학수사 하니까 다른 한국영화도 하나 떠오른다. 봉준호 감독의 《살인의 추억》이다. 흔히 화성 연쇄 살인 사건을 모티프로 삼아 만든 것으로 일컬어지는 이 영화에는 다그치고 때리며 용의자를 범인으로 몰아세우는 '전통적'인 방법을 고수하는 박두만(송강호)·조용구(김뢰하) 형사와 '과학수사'를 주장하는 서태윤(김상경) 형사가 대비되는 모양새로 나온다.

서태윤이 "서류는 거짓말하지 않는다"며 사건 파일에 담긴 증거 위주의 수사를 주장할 때, 박두만은 동네 장애인인 백광호(박노식)에게 혐의를 뒤집어씌우려고 백광호의 신발로 범죄 현장에 발자국을 찍는 증거 조작을 일삼는다.

물론 뒤로 가면 박두만도--비록 '감'에 의존한 수사이긴 하지만--범인이 현장에 거웃 하나 남기지 않는다는 점에 착안해 근처 목욕탕을 뒤지는 '비교적' 증거에 기반한 수사를 펼친다; 서태윤은 서류를 통해 비오는 날 빨간 옷을 입은 여성이 범행 대상이라는 점과 범행이 있던 날 누군가가 라디오에 늘 유재하의 노래 '우울한 편지'를 신청했다는 사실을 알아낸다. 피해자 중 유일한 생존자로부터 범인이 '손이 고왔다'는 진술도 확보한다.

영화 《살인의 추억》의 서태윤

이 시점에서 서태윤은 '서류는 거짓말하지 않는다'는 평소의 신념 아래 용의자 박현규(박해일)가 범인이라고 확신한다. 그는 희생자의 옷에 남았던 정액 샘플과 박현규의 DNA의 일치 검사를 미국에 의뢰해둔 뒤, 어느 철길에서 박현규를 붙잡는다. 그런데, 그에게 총을 들이대는 그 순간 미국에서 검사 결과가 도착한다. "두 DNA가 일치하지 않아, 용의자를 범인으로 단정할 수 없음."

서태윤은 그 '서류'를 보고 그대로 무너진다. 그리고, 감독의 의도대로라면, 영화를 보는 관객들도 서태윤과 함께 무너진다.

서태윤의 잘못은 손이 곱고, 하필 범행이 있던 날만 골라 라디오에 '우울한 편지'를 신청했다는 정도의 증거만으로 범인을 확정지은 것이다. 사법체계가 잘 서 있는 나라라면, 이 정도의 증거로 수색영장이나 잘하면 받을 수 있을까 싶다. 누구나 박현규가 범인이라는 의심이 가게 마련이지만, '과학수사' 과정에서는 그런 선입견을 일단 버려야 맞는 것이다. 정액 샘플과 박현규의 DNA가 일치한다는 것을 확인하기까지 판단을 유보했어야 했다.

천안함 미스터리#

'과학수사'는 과학이 가진 엄밀함과 엄정함에 기대는 것인 만큼, 마지막까지 냉정함을 유지해야만 가능한 것이다. 어느 정도 증거가 들어맞는다고 해서 결론을 단정지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그것이 1차 자료인 증거를 중시하는 과학의 정신이다. 정부 나름으로는 과학적으로 조사했다는 천안함 조사 결과를 상당수 한국인들이 납득하지 못하는 이유도 그것이다.

알 수 없는 이유로 두동강 난 천안함의 침몰에 대해 국방부 민군합동조사단(합조단)은 '천안함 침몰사건 조사결과' 발표문을 통해 천안함은 북 잠수함에서 발사한 어뢰에 맞은 것이라고 공식 발표했다.

천안함과 동급인 포항급 신성 783PCC-772 천안함과 동급인 포항급 신성 783

합조단은 그 근거로, 천안함 침몰 현장에서 쌍끌이어선이 발견한 어뢰의 추진동력부를 들었다. 발견된 부분이 북이 해외 수출어뢰 소개자료의 설계도와 일치하며, 특히 그 부분에 아라비아 숫자와 한글로 '1번'이라고 적혀 있는 것으로 보아 북의 소행이 분명하다는 것이다. 좌현 견시병의 얼굴에 물이 튀었다거나 백령도 해안 초병이 100m 높이의 섬광 기둥을 관측했다는 것도 증거로 제시했다.

천안함 TOD

하지만 이것만으로 천안함 침몰이 북의 소행이라고 확신할 수 있는 것일까. 이에 대한 의문과 의혹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지만 국방부는 이에 답변하지 않거나, 별로 수긍이 가지 않는 답변만 해주고 있다. 가령 발견된 어뢰 추진동력부가 이번 천안함 사건과 관계가 있는 것인지부터가 명확하지 않다. 현장과 동일한 조건을 유지한 실험을 통해 부식 정도를 알아봐야 하는 게 아닐까? 또 '1번'이라고 쓴 푸른 글씨가 어떤 필기구로 쓴 것인지와 왜 지워지지 않은 것인지도 아직 납득되지 않는다. 성분을 분석해 국내외의 필기구와 대조하고, 역시 현장과 동일한 조건으로 글씨가 지워지는지 안 지워지는지를 실험해봐야 하지 않을까.

너무 까칠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단 1주일 동안만 CSI 시리즈를 시청해보자. 정부의 발표라고 덮어놓고 불신하겠다는 게 아니다. 적어도 정부 차원의 조사라면 제기되는 의혹은 풀어줘야 하지 않나 하는 것이다. 서태윤 형사 식의 수사는 이제 곤란하다는 것이다. 그리섬의 진지한 무표정이 그립다.

하이젠베르크와 정치윤리#

대학 시절 철학자 박이문 선생의 강의를 들을 때였다. 거의 학생의 발표로만 이뤄진 그 수업에서 어느 이공계 학생은 "지금 이 순간 세상의 모든 정보를 내가 알고 있다면, 나는 어떤 미래도 예측할 수 있고 어떤 과거도 추론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의 말은 '틀린' 말은 아닐 수 있다고 하더라도, 공허했다. '모든 정보'를 알 길이 없기 때문이다. 심지어 '한 입자의 모든 정보'도 알 길이 없다. 하이젠베르크불확정성원리에 따르면, 입자의 위치와 운동량을 동시에 아는 것은 불가능하다. 관측 행위 자체가 관측 대상에 영향을 주기 때문이다.

결국 우리는 미래와 과거를 100% 확실하게 알 방법이 없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과학은 엄밀함의 극단에 점근선으로 다가가야 하며 과학수사 역시 겸허한 자세로 그래야 한다. '과학'으로 포장한 정치논리는 결국 정치윤리를 저버림에 다름아니다.


Posted by 엔디
“국어교과서, 정권정당화 수단으로 이용돼” : 책 : 문화 : 뉴스 : 한겨레

지금 초등학교 5학년 국어 교과서에는 예전 같으면 좀 이해하기 어려운 글이 두 편이나 실려 있다. 하나는 1학기 교과서에 실려 있는 '우리 집 우렁이 각시'라는 글이고, 다른 하나는 2학기 교과서에 실린 '엄마는 파업 중'이라는 글이다. '우리 집 우렁이 각시'는 평소 일상 속에서 권위적이었던 아버지가 실직한 이후 가족들 몰래 집안일을 한다는 내용이고, '엄마는 파업 중'은 집안 일이 엄마에게만 떠맡겨지자 엄마가 집 뒤뜰의 나무 위에 올라가 파업이라며 시위를 한다는 내용이다. 어른들 사이에서는 아직도 쉽게 깨기 어렵고, 이야기를 꺼내기도 어려운 성 역할에 대한 내용과 주부 파업에 대한 내용이 눈길을 끈다. 아마 김대중 정부(국민의 정부)와 노무현 정부(참여 정부)의 등장이 교과서 필진들에게 미친 영향도 있는 것 같다. 어쨌거나, 주부의 역할을 포함한 성 역할 고정이라는 문제점을 불식시키기 위한 노력이라고 생각한다.

국어 교과서는, 사회나 과학 교과서와는 달리 기의signifié보다는 기표signifiant가 더 강조될 수밖에 없다. 언어학적 이야기를 하자는 것이 아니다; 사회나 과학은 흔히 '암기 과목'이라고 불리는 만큼 외도 될 만한 사실fait만을 적어야 하므로 그 내용인 기의에 방점이 찍힌다. 그 기의가 사회나 과학 교과서의 학습 목표인 셈이다. 반면, 국어 교과서는 학습 목표에 따라 (이론적으로) 아무 글이나 실어 놓아도 학습이 가능하다. 가령 글을 발단-전개-절정-결말로 나누는 요령을 배우는 것이 학습 목표라고 했을 때, 해당 단원에는 이문열이나 이인화의 소설부터 황석영의 소설까지 실을 수 있고, 마광수, 장정일, 또는 사드나 마조흐의 소설이라고 실을 수 없는 것이 아니다. 그 어떤 소설로도 글을 단락을 나누는 방법은 배울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국어 교과서는 지문의 완성도보다는 지문의 가치나 교육성, 정치성을 소중히 여긴다. 그런데 여기서 정치성은 또 그렇다 하더라도, 가치나 교육성을 따지는 것에 상존하는 문제는 쉽게 간과된다. 이것들은 상대적인 것이라 보는 사람마다 다르기 때문이다. 기준이 없다는 것은 권력에 이용당하기가 그만큼 쉽다는 뜻이다. 위에서 언급한 '엄마는 파업 중'이라는 동화는 보기에 따라서는 '교육상 부적합'하다는 결론이 나올 수도 있는 것이다. 한편, 공산당에 저항하다 죽은 이야기는 어떤 사회에서는 이데올로기 문제와 폭력성 문제로 교육상 부적합하다고 생각될 수도 있지만, 또 (과거의 한국과 같은) 어떤 사회에서는 아주 교육적이고 훌륭한 이야기라고 생각될 수도 있는 것이다. 따라서 독재 정권이 교과서의 내용에 개입하려고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국어 교과서를 자신들의 입맛대로 바꿀 수 있는 것이다.

지금의 교과서도 쉽게 안심할 수 없다. 언제 어느 부분에 애국주의나 민족주의, 전체주의가 자리잡아 있을지 알 수 없는 것이다. 인터넷을 뜨겁게 달구었던 '민족'과 관련된 몇 가지 상황을 생각해 보면 분명히 한국인의 성장의 어느 한가운데에 '민족'에 대한 비정상적인 강조의 코드가 분명 어디 숨어 있는 것이다. 그래서 역설적으로 국어 교과서야말로 가장 긴장하며 읽어야 하는 책이 되고 말는 것이다.
Posted by 엔디
창비주간논평


언젠가 나는, 마이클 무어의 《화씨911》을 보면서, 공화당이 불만이면 민주당, 민주당이 불만이면 공화당으로 갈 수밖에 없는 미국인들이 불쌍하다고 생각한 적이 있다. 내가 보기에 그들은 두 정당으로부터 '표밭'으로만 인식되지 '국민'이나 '시민'으로 인식되는 것 같지 않았다. 영화 속에서 공화당에게 실망한 미국인들이 민주당으로 몰려드는 모습은 마치 레밍쥐들의 이동 같았다.

하지만 한국의 실정은 또 어떤가. 내 보기에 한국의 정당 정치에는 전통이라는 게 없다. 김수영은 "전통傳統은 아무리 더러운 傳統이라도 좋다"고 했는데, 한국의 정당 정치에는 그 전통이라는 것이 도무지 없다. 말장난을 하자면, 전통이 없다는 것이 전통일 정도다.

여당은 야당을 끌어모아 합당하거나 표지갈이만 한 신당을 창당하고, 대통령은 어느 사이 그 신당에 참여하지만 임기 말이 되면 어김없이 탈당이라는 절차를 거친다. 그 모든 과정의 목적은 단 하나: 책임회피다.

가령 지금의 한나라당이 민정당-민자당-신한국당에서 이어지는 독재정권의 계보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하지만, 지금의 한나라당에게 12.12의 책임을 물을 수는 없는 것이 현실이다. 그렇다고 지금의 한나라당이 12.12의 책임을 져야 마땅하다는 뜻은 아니다. 그것은 좀더 정교한 정치적·역사적 분석을 필요로 할 것이다. 다만, 앞으로 이와 같은 방식으로 면피하려는 정치 세력에 대해서는, 우리가 시민으로서 대처해야 마땅하다는 것뿐이다.

열린우리당은 워낙 기움투성이의 정당이라 정권 재창출에 실패하면 쪼개질 것이라는 예상이 컸고, 한나라당 역시 이념적 스펙트럼이 너무 넓어 당내 불화도 상당한 만큼 어떤 계기를 만나면 이합집산할 공산이 크다. 이와 같은 상황 속에서 우리가 마땅히 해야 할 기대는 역시 확실한 정책을 가진 이념 정당이다.

이념 정당은 확실한 색깔이 있는 만큼 그 특성상 당의 간판을 바꾸더라도 책임을 회피하기가 쉽지 않다. 또한 이념 정당은 자신의 이념이 최선이라는 것을 알리기 위해 끊임없이 연구·개발에 매진하게 되어 있다. 이념이라는 '원칙'이 있기 때문에 쉽사리 포퓰리즘에 빠질 염려도 없다.

무엇보다도 이념이란 단순한 '정권 창출'보다는 호흡이 길어 전통의 요소를 가지고 있다. 정당의 목적은 단순한 '정권 창출'이 아니다. 정당의 목적이 '정권 창출'이라면 왜 모든 정당을 다 하나로 합당하지 않을까? 그것은 정당의 목적은 자신의 정체성을 유지하면서 정권을 창출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민당과의 연정을 통해 상당히 오랜 기간 정권 창출의 신화를 이룬 독일 녹색당이 창립된 지 얼마 되지 않았음에도 자신의 전통을 가꿀 수 있는 것은 확실한 정체성 때문이다.

미국은 공화당과 민주당 단 두 정당밖에 없지만, 두 정당이 확실한 이념적 정체성을 가지고 스펙트럼을 나누어 점유하고 있다. 어쩌면 미국인들을 그토록 단순하게 평가한 내가 레밍쥐처럼 사고했는지도 모르겠다. 미국인들은 한 정당이 싫어지만 다른 정당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두 이념 중에서 취사선택하여 장점을 뽑으려고 긴 세월동안 노력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Posted by 엔디
TAG 미국, 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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