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의 조탁에 관심이 많았던 시문학 동인 시인 김영랑은 『영랑시집』에 실린 시 「누이의 마음아 나를 보아라」에서 가을이 깊어가는 시절에 대한 감탄이 담긴 누이의 한 마디를 고스란히 옮겨놓았다.

내용으로만 보면 이 작품은 전적으로 그 누이의 말이 계기가 되어 쓰여진 작품으로 보이는데, 첫 연의 시작과 두 연의 마지막에서 똑같이 반복되는 그 한 마디가 시의 발단과 절정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오-매 단풍들것네」
장광에 골불은 감닙 날러오아
누이는 놀란듯이 치어다보며
「오-매 단풍들것네」

추석이 내일모레 기둘니리
바람이 자지어서 걱졍이리
누이의 마음아 나를보아라
「오-매 단풍들것네」

- 김영랑, 「누이의 마음아 나를 보아라」전문

「누이의 마음아 나를 보아라」 시비FUJIFILM | FinePix F420 | Normal program | Pattern | 1/180sec | F/4.5 | 0.00 EV | 5.6mm | ISO-160 | Flash did not fire, auto mode | 2011:02:03 12:34:06

http://blog.daum.net/kdk99/17951751 CC-by-nc-nd 골든모티브

강희숙 조선대 교수의 전라도의 언어 11: “오메 단풍 들것네”에 따르면 호남 사투리에서 ‘오매’, ‘오메’ 또는 ‘워매’는 표준어의 ‘어머’ 또는 ‘어마’에 해당하는 감탄사이다. 그러나 ‘어머’와 ‘오-매’의 말맛語感은 완연히 다르다. ‘어머’가 다소 깍쟁이 같거나 여우 같은 느낌이라면 ‘오-매’는 그 길이와 억양까지 능청스럽고 천연덕스러운 느낌을 준다.

그러니까 영랑의 누이가 서울 사람이었다면 짧은 소리로 ‘어머 단풍 들겠네’ 했을 것이다. 하지만 ‘어머 단풍 들겠네’를 들었을 때의 심정이 ‘오-매 단풍 들것네’를 들었을 때의 심정과 같을 수는 없다.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뒤엣것이 그야말로 단풍에 대한 감탄처럼 느껴진다면 앞엣것은 단풍이 드니 어디 여행을 가야겠다거나, 사진을 찍어야겠다거나 아니면 집앞을 쓸어야겠다는 다짐—이를테면 ‘어머 비 오겠네’처럼—으로 느껴진다.

그러니까 영랑의 누이가 서울 사람이었다면 어쩌면 영랑은 누이의 말에서 아무런 시적 감흥을 느끼지 못했을 수도 있고, 우리는 영랑의 뛰어난 이 시를 갖지 못했을 수도 있다. 다시 말해, 한국 문학은 영랑 누이의 ‘오-매’에 많은 빚을 지고 있다.

전라도 사람들을 비하하는 말로 ‘오오미’가 쓰인다고 한다. 말이란 본래 누구나 쓰는 것이므로 오염되는 일이 많지만, 정지용과 더불어 가장 아름다운 언어로 한국어를 가꿨던 영랑의 주요 시어가 누군가를 낮잡아 일컫는 데 쓰인다는 사실이 씁쓸하다.

특히 그 쓴 맛이 더한 것은, 저 비하의 표현에 정치가 개입돼 있기 때문이다. 정치란 본래 말과 수사의 가장 치열한 한 극단이므로 그 말이 거칠 수밖에 없지만, ‘오오미’는 스스로 뜻signifié을 잃고 모양새signifiant만 남아 언어라는 기호의 상징성을 잃었기 때문이다.

정치로 떨어져버린 언어는 회생 가능성이 거의 없다. 그 말은 이제 붉은 점멸 신호등과 같다. 같은 지시만 반복할 뿐인 그 신호등을 운전자들은 아무런 주의도 기울이지 않고 지나친다.

Posted by 엔디

무분별한 한자어나 외래어의 사용은 분명히 언어의 양극화를 심화시켜 정보의 불균형을 낳는다. 정보가 민주적으로 배포되지 않는 곳에서 세계는 평평하지 않다. 때문에 한자어나 서양 외국어 독해에 어려움을 겪는 대중들에게 외래어를 한국어로 옮기는 운동은 소중한 의미를 갖는다.

이를테면, '국어순화' 운동의 가장 큰 성과로 생각되는 '갓길'이 그렇다. 숄더shoulder나 노견路肩이라고 하면 썩 잘 다가오지 않는 개념이 갓길이라고 하면 한눈에 무슨 뜻인지 알 것 같다. 게다가 갓길은 숄더나 노견보다 훨씬 더 아름다운 말이다. 정과리(1998, 38)는 "'노견'이라는 가금家禽 종자 같은 이름을 벗어던지고 새로 차려 입은 우리말이 상큼한 여성성을 연상케" 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국립국어원에서 운영하는 우리말 다듬기 사이트에서는 매주 외래어 하나씩을 골라 한국어 갈음말(대체어)을 내놓는다. 이렇게 만들어진 갈음말이 그대로 표준어로 인정되는 것은 아니다. 동아일보 기사에 따르면 이 말이 널리 쓰이면 표준어의 지위를 획득하여 사전에 실리게 되는데, 이 때 최초 제안자의 이름도 함께 넣는다고 한다.

그러나 일부 낱말들은 이미 상당한 정도로 쓰이고 있다. 예를 들어, 댓글reply이나 누리꾼netizen, 다시 보기vod 등은 일반은 물론 몇몇 언론에서도 쓰이고 있으며, 영화헤살꾼spoiler이나 참살이well-being, 늘찬배달quick service도 적지 않게 사용되고 있다.

아름다운 말과 알맹이가 없는 말

문제는 우리말 다듬기에서 다듬은 말 가운데 '갓길'처럼 아름다운 말은 찾아보기 힘들다는 것이다. 갓길이 아름답다는 것은 단지 그 말의 말맛語感이 좋다는 뜻만은 아니다. 갓길은 그 사이시옷의 매력을 한껏 돋우는 발음을 갖고 있으면서도, 한번 들으면 누가 굳이 설명하지 않더라도 무엇을 말하는지 알 만한 직관성을 갖고 있다. 그러면서도 설명적이지 않고, 길이도 짧다. 한국어의 아름다움을 자랑차게 뽐내는 낱말로 손색이 없다.

우리말 다듬기에서 '갓길'처럼 아름다운 말을 찾으라면 '댓글'이나 '다시 보기' 따위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댓글'은 직관적이고 짧으면서도 '댓거리'처럼 알려진 말과 조화가 맞는다. '다시 보기'는 VOD보다 긴 듯하지만, 음절 수는 같으며 video on demand로 풀지 않으면 의미를 알 수 없는 VOD에 비해 훨씬 직관적이다. 또 AOD를 '다시 듣기'로 표현할 수 있는 토대가 되는 등 활용도도 높다. 하지만 이런 낱말들은 기실 우리말 다듬기에서 순화하기 이전에도 널리 쓰였던 것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우리말 다듬기의 존재 의의는 상당히 축소된다.

어떤 말은 외양은 화려한데 알맹이가 없는 것도 있다. '행사빛냄이'가 그렇다. 한국인들이 격식을 차릴 때 주로 쓰는 '(자리를) 빛내다'라는 동사를 써서 꽤나 화려해보이는 말이지만, 사실 저 말은 '레이싱걸'을 순화한 말이다. 무엇보다 레이싱걸이 행사를 빛내는 사람인지는 나는 도저히 모르겠다.

뿐만 아니라 최근 들어 무분별하게 사용되고 있는 '-이' 접사를 국립국어원도 아무 생각 없이 사용하고 있으니 아쉬울 따름이다. 사전을 찾아보면 본래 '-이' 접사는 명사나 용언의 어간, 어근, 의성·의태어 뒤에 붙어 명사를 만드는 접미사다. 절름발이는 명사 뒤에 붙은 예이고, 높이는 형용사 어간 뒤에, 먹이는 동사 어간 뒤에, 홀쭉이는 의태어 뒤에, 딸랑이는 의성어 뒤에 '-이'가 붙은 예이다. 요즘 흔히 보이는 '지킴이'나 우리말 다듬기에서 선정한 '…빛냄이'처럼 용언의 명사형에 '-이'가 붙는 경우는 없다. 외래어를 우리말로 아름답게 다듬어야 하지만, 그 과정에서 알맹이가 사라지거나 규칙이 무분별하게 무시되어서는 안 된다.

규칙이 무시되는 것이 외래어의 유입보다 한국어에 더 나쁜 영향을 미칠지도 모른다. 외래어는 한국어 속으로 들어오면서 기존 언어의 규칙보다는 한국어의 규칙 속에 편입된다. 이 경우 외래어는 어휘 수준에서 한국어 속으로 편입되지만, 형태론적 차원이나 통사론적 차원에서는 한국어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가령 영어 동사인 lead가 이미 '이끌다'는 뜻을 가진 동사임에도 한국어 내에서는 '리드하다'는 식으로 '-하다'를 붙여서 나타난다. '픽업하다', '프린트아웃하다'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또, '내츄럴하게'에서 볼 수 있듯이 natural은 본래 영어에서의 부사접미사인 -ly를 포기하고 한국어의 문법을 따라 '-하게'라는 어미를 채용하게 된다. 때문에 외래어의 유입이 한국어의 문법을 바꾸는 경우는 거의 없다.

그런 점에서 all-in을 '다걸기'로 옮긴 것도 문제가 있다. 보통 '올인하다'라는 동사형으로 쓰이는 이 말을 '다걸기'라고 옮기면 '올인해'는 '다걸기해'가 된다는 말인가? '다 걸어'면 족할 일이다. 국어의 형태론적 특성을 고려하지 않은 무분별한 순화의 사례라고 하겠다.

깁더와 붙갈이소리

해방 이전에 주시경 선생의 제자로 외솔 선생과 쌍벽을 이루었던 김두봉은 아름다우면서도 정확한 말을 만드는 데 뛰어났다. 그는 자신이 지은 문법책 『조선말본』의 증보판增補版을 내면서 『깁더 조선말본』이라 이름붙였다. '깁더'는 '깁고 더한'을 줄인 말이다. 이 '깁더'라는 말은 2007년 김진우 선생이 『언어: 이론과 그 응용』의 새판을 『언어: 이론과 그 응용 깁더본』이라 이름하면서 후대에 이어지기도 했다.

김두봉이 지은 다른 말로는 붙갈이소리가 있다. 언어학의 음운론 용어인데, 파찰음破擦音을 토박이말로 바꾼 것이다. 붙었다가 터지면서 소리가 나지만, 완전히 터지지 않고 갈아서 나는 소리인 'ㅈ', 'ㅉ', 'ㅊ'을 일컫는 말이다. 파찰음보다 얼마나 더 쉽고 얼마나 더 아름다운지 보라.

푸른 바다의 은유와 샹글릴라의 이상향

우리말 다듬기가 다듬었다는 말 가운데 정말 실소를 금할 수 없는 것은 대안시장이라는 말이다. 대안시장은 연전에 널리 인기를 끌었던 블루오션을 다듬은 말이다. 블루오션 전략은 모두 알다시피 경쟁이 많은 피바다 레드오션이 아니라 경쟁이 없는 푸른 바다 블루오션을 찾자는 마케팅 전략이다. 블루오션 전략을 조금이라도 공부한 사람은 대안시장이 블루오션 전략을 어느 정도 설명할 수는 있지만, 전체를 갈음하기는 어렵다는 데에 동의할 것이다. 대안시장이란 마치 기존의 시장과는 전혀 다른 시장을 말하는 것 같기 때문이다. 물론 블루오션 전략은 '비고객을 고객으로 만들라'고 주문하는 등 '대안시장'과 전혀 관계없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블루오션 전략의 적지 않은 부분은 기존 고객의 많은 수가 별로 신경쓰지 않는데 원가만 많이 드는 고정관념 속의 재화나 용역을 버리고 고객의 진정한 필요를 찾아 거기에 투자하라는 데에 바쳐진다. 가령 태양의 서커스라는 시르크 뒤 솔레이유는 서커스에서 동물이 등장하는 부분을 버리고 이야기와 곡예를 강화하거나 창조하여 새로운 서커스를 만들어내어 세계적인 인기를 끈다는 식이다. 그러므로 블루오션이 전혀 다른 새로운 대안 시장을 만들어내는 것만은 아님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블루오션은 어떻게 한국어로 다듬으면 좋을까? 영어를 처음 배우는 초등학생에게 물어봐도 답은 금방 나온다. '푸른 바다'다. '블루오션 전략'은 '푸른 바다 전략'이라고 부르면 된다. 본래 '블루오션 전략'은 가치혁신value innovation이라는 이름으로 추진되었던 전략인데, 김위찬 교수와 르네 마보안 교수가 책을 내면서 은유적인 의미를 더해 '블루오션 전략'이라고 이름붙인 것이다. 이것을 다시 '대안시장'으로 다듬는다면 원뜻에서 한참 멀어지고 만다. '국어순화' 운동이 이런 간단한 은유조차 담지 못하는 것은 확실히 문제다. 원어에서 은유가 도입되었다면 갈음말에서도 은유를 쓰는 것이 당연하다.

또, 아름다운 이름의 고유명사 샹그릴라를 굳이 '꿈의 낙원'이라는 설명적인 용어로 바꾼 것도 문제다. 샹그릴라는 무릉도원, 유토피아, 엘도라도, 그리고 율도국과 함께 사람들이 오래 생각한 이상향의 한 종류인데, 저 이상향들은 각기 다른 문화적 전통과 초점을 갖고 있는 것이다. 샹그릴라는 샹그릴라일 뿐이다.

맺음말: 민족주의와 심미주의

말이란 관념이나 이념으로 바꿀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사람이 가는 곳이 곧 길이 되듯, 모든 말무리言衆들이 쓰는 것이 곧 말이다. 외래어를 '순화'시켜야 한다고 하는 사람들은 언제든지 상허 이태준으로 되돌아가 보아야 한다(이태준 1988, 27):

그는 클락에서 캡을 찾아 들고 트라비아타를 휘파람으로 날리면서 호텔을 나섰다. 비 개인 가을 아침, 길에는 샘물같이 서늘한 바람이 풍긴다. 이제 식당에서 마신 짙은 커피 향기를 다시 한번 입술에 느끼며 그는 언제든지 혼자 걷는 남산 코스를 향해 전차길을 걷는다.

이 문장에서 클락, 캡, 트라비아타, 호텔, 커피, 코스 등의 외래어를 굳이 안 쓴다고 해보라. 이 외에 무슨 말로 '그'라는 현대인의 생활을 묘사해낼 것인가? […]

새 말을 만들고, 새 말을 쓰는 것은 유행이 아니라 유행 이상 엄숙하게, 생활에 필요하니까 나타나는 사실임을 이해해야 할 것이다. 커피를 먹는 생활부터가 생기고, 퍼머넨트 식으로 머리를 지지는 생활부터가 생기니까 거기에 적응한 말 즉 커피, 퍼머넨트가 생기는 것이다.

말은 말무리의 것인데, '국어순화'론자들은 말을 민족의 것으로 치환해버린다. 한국어가 한국어 말무리들의 것이 아니라 민족의 것이 되면, 한국어는 외래어나 한자어를 배격할 수밖에 없다. 거기에는 말을 아름답게 만들려는 심미적 욕구가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다. 민족주의는 너무나도 무겁고 심각하기 때문이다.

가령 김우창(1977, 385-386, 388-389)은 '얼'이나 '슬기'와 같은 민족주의적 고유어가 강요하는 외경감에 대해 말한다. '얼'이라는 말 한 마디에서 우리는 자랑스러운 한민족임을 느끼면서 자못 종교적인 열락에 빠지고 마는 것이다. 이런 민족주의 열락에 빠지게 되면 고유어는 하나의 가짜 '심미화'를 형성하게 된다. 발터 베냐민에게 '정치의 심미화'가 그랬던 것처럼(신형기 2003, 180), '얼'이라는 억압적인 말이 가짜 아우라를 갖게 되면서 우리는 그 억압적인 말과 화해하게 된다. 여기서 '얼'이 본래 '어리석어 빠지다'는 뜻의 '얼빠지다'를 잘못 분석해서 생긴 말이라는 사실은 중요하지 않다.

민족주의의 가짜 '심미화'에서 벗어나 진짜 한국어의 아름다운 맛을 느낄 수 있는 언어 운동이 생기기를 바란다. 뷔퐁이 "문체(스타일)는 곧 그 자신이다Le style est l'homme même."라고 말한 것은 그저 한 말이 아니다. 언어 심미주의야말로 언어 운동에서 가장 소중하게 고려해야 할 것이다.

참고문헌

김우창. 1977. "말과 現實: 國語醇化運動에 대한 몇 가지 생각". 수록처: 『궁핍한 시대의 詩人』. 김우창전집1. 서울:민음사. 378-390쪽.
신형기. 2003. "남북한 문학과 '정치의 심미화'". 수록처: 『민족 이야기를 넘어서』. 동시대인 총서12. 서울:삼인. 171-197쪽.
이태준. 1988. 『문장강화』. 창비교양문고10. 서울:창작과비평사.
정과리. 1998. "대한국인이 갓길을 침범할 때". 수록처: 『문명의 배꼽』. 문지스펙트럼4-009. 서울:문학과지성사. 38-41쪽.

이 글은 스프링노트에서 작성되었습니다.

Posted by 엔디

대통령직 인수위원회가 신경 쓰는 것은 한반도 대운하와 기업 투자, 그리고 영어 교육 뿐인 것 같다. 영어 몰입교육을 주창하다가 한 발 물러선 대통령직 인수위원회에서 다시 영어 이야기를 꺼냈다. 이경숙 위원장은 "처음 미국에 가서 (표기법 대로) '오렌지'를 달라고 했더니 못 알아들어서 'Orange'라고 말하니 알아듣더라"는 자신의 경험담을 소개하면서 영어 교육을 위해서 외래어 표기법을 바꾸자고 제안했고, 인수위 공식적으로는 "학교 교육만으로 영어를 해결하기 위해 5년간 4조원을 들이겠다"고 발표한 것이다.

이경숙 위원장은 적어도 한 대학의 교수로 오래 일했고 총장까지 지냈던 교육자다. 게다가 그런 사람이 국내에 TESOL(Teaching English to Speakers of Other Languages)을 처음 도입한 '영어 전도사'로 알려져 있고, 또 그가 차기 정부 정책의 가이드라인을 마련할 대통령직 인수위원회의 위원장이라면 우리는 그의 의견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 마땅하다. 하지만, 이경숙 위원장이 이야기한 것은 영어 교육의 문제점이 아니며, 국립국어원이 관장하는 외래어 표기법이다. 여기서 우리는 언어에 대한 이경숙 위원장의 철학에 대해서 검토해 볼 필요가 있다.

한편 중등(중고교) 과정까지의 공교육만으로 영어를 해결하도록 하겠다는 것은 이명박 정부의 핵심적인 정책으로 보이는데, 사실 당연히 그렇게 되었어야 하는 것이다. 나는 한국 사회가 앞으로 영어가 되었든 다른 무슨 언어가 되었든 공교육만으로 충분히 외국어 능력을 습득할 수 있는 사회가 되기를 바라고 있으며, 언제가 되었든 꼭 그렇게 될 것이라는 희망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공교육을 강화하겠다는 이명박 인수위의 정책을 총론 차원에서 인정하고 독려하여야 할 것이다. 하지만 역시 중요한 것은 각론인데, 먼저 거기에 5년간 4조원 이상을 들이는 것이 효율적인 일인가를 확인해 봐야 하며, 그렇게 들였을 때 과연 인수위가 주장하는 대로 중등 과정 졸업만으로 영어가 유창해질 수 있느냐를 봐야 한다. 마지막으로 과연 그것이 (이명박이 바라는 대로) 향후 5년 안에 가능하다고 믿고 추진하는 것이 바람직한 일인가를 생각해야 한다.

나는 이명박 차기 정부의 '실용주의'라는 이름의 철학이 그들이 내세우는 영어에 대한 이야기들 만으로도 어느 정도 파악이 가능할 것으로 생각한다; 한반도 대운하 정책은 사실 논의만 던져 주고 나머지는 사기업에 맡긴다고 하면 그만이고, 친기업적 정책 역시 전봇대만 좀 뽑아 주면 나머지는 사기업이 알아서 할 것이라고 생각하면 그만이지만, 영어 정책은 분명히 국가의 고유 업무 영역인 공교육의 차원에서 진행되는 일이며, 따라서 이명박 차기 정부가 가장 힘주어 처리할 부분이기 때문이다. 이를 인식한 듯, 대통령직 인수위는 "영어 공교육 강화는 제2의 청계천 사업"이라는 수사修辭까지 구사했다. 따라서 이 시점에서 인수위가 말하는 영어 공교육 정책을 살펴보는 것은 분명 상당한 의미가 있다.

하지만 여기서는 먼저 이경숙 위원장의 '오렌지 발언'을 단초로 하여 이 위원장의 발언의 문제점을 살펴보고, 위원회가 말하는 '실용주의'가 '언어 제국주의'와 어떻게 맞닿아 있는지를 밝히려고 한다.

 

1. 한글의 수난과 비전문가들의 오지랖

논의에 앞서 한글의 수난사를 잠깐 훑어보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지금 이경숙 위원장이 문제로 삼고 있는 것은 외래어표기법이며 그것은 외래어를 한글로 표기할 때의 규칙이기 때문이다.

한글의 수난사 하면 대개 1940년대 일제가 민족말살정책을 펴던 시절을 생각하게 마련이다. 하지만 한글이 받은 수난의 역사는 훨씬 더 길고 깊다: 세종대왕이 한글(훈민정음)을 만든 그 순간부터 한글의 수난은 시작되었고, 그렇게 시작된 한글의 수난은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최만리가 훈민정음을 만드는 것이 불가하다고 아뢰는 장면이 나온다:

1. 우리 조선은 조종 때부터 내려오면서 지성스럽게 대국(大國)을 섬기어 한결같이 중화(中華)의 제도를 준행(遵行)하였는데, 이제 글을 같이하고 법도를 같이하는 때를 당하여 언문을 창작하신 것은 보고 듣기에 놀라움이 있습니다. 설혹 말하기를, ‘언문은 모두 옛 글자를 본뜬 것이고 새로 된 글자가 아니라. ’ 하지만, 글자의 형상은 비록 옛날의 전문(篆文)을 모방하였을지라도 음을 쓰고 글자를 합하는 것은 모두 옛 것에 반대되니 실로 의거할 데가 없사옵니다. 만일 중국에라도 흘러 들어가서 혹시라도 비난하여 말하는 자가 있사오면, 어찌 대국을 섬기고 중화를 사모하는 데에 부끄러움이 없사오리까.

1. 옛부터 구주(九州)의 안에 풍토는 비록 다르오나 지방의 말에 따라 따로 문자를 만든 것이 없사옵고, 오직 몽고(蒙古)·서하(西夏)·여진(女眞)·일본(日本)과 서번(西蕃)의 종류가 각기 그 글자가 있으되, 이는 모두 이적(夷狄)의 일이므로 족히 말할 것이 없사옵니다. 옛글에 말하기를, ‘화하(華夏)를 써서 이적(夷狄)을 변화시킨다. ’ 하였고, 화하가 이적으로 변한다는 것은 듣지 못하였습니다. 역대로 중국에서 모두 우리 나라는 기자(箕子)의 남긴 풍속이 있다 하고, 문물과 예악을 중화에 견주어 말하기도 하는데, 이제 따로 언문을 만드는 것은 중국을 버리고 스스로 이적과 같아지려는 것으로서, 이른바 소합향(蘇合香)을 버리고 당랑환(螗螂丸)을 취함이오니, 어찌 문명의 큰 흠절이 아니오리까.

一, 我朝自祖宗以來, 至誠事大, 一遵華制, 今當同文同軌之時, 創作諺文, 有駭觀聽。 儻曰諺文皆本古字, 非新字也, 則字形雖倣古之篆文, 用音合字, 盡反於古, 實無所據。 若流中國, 或有非議之者, 豈不有愧於事大慕華?

一, 自古九州之內, 風土雖異, 未有因方言而別爲文字者, 唯蒙古、西夏、女眞、日本、西蕃之類, 各有其字, 是皆夷狄事耳, 無足道者。 《傳》曰: “用夏變夷, 未聞變於夷者也。” 歷代中國皆以我國有箕子遺風, 文物禮樂, 比擬中華。 今別作諺文, 捨中國而自同於夷狄, 是所謂棄蘇合之香, 而取螗螂之丸也, 豈非文明之大累哉?

요컨대 당시 집현전集賢殿 부제학副提學이었던 사대주의자 최만리의 입장에서는 '큰 나라大國'를 섬기고 '중심지의 화려함中華'를 따르는 것이 조선의 마땅히 행해야 할 바였던 것이다. 그의 걱정거리는 "만일 중국에라도 흘러들어가서 혹시라도 비난하여 말하는 자가 있사오면"에서 명확하게 드러난다. 자칫 중국이 우리를 오랑캐夷狄으로 여기면 큰일인 것이다. 하지만 그런 상소를 올리는 최만리의 무리들이 언어학에 대해서는 거의 몰랐던 것 같다. 그것은 세종이 이렇게 그들을 꾸짖는 부분에서 확실히 알 수 있다(강신항 2003. 209):

또 그대가 운서를 아느냐. 사성과 칠음을 알며, 자모가 몇인지 아느냐? 만일에 내가 저 운서를 바로잡지 않는다면, 그 누가 이를 바로잡겠느냐?

且汝知韻書乎? 四聲七音, 字母有幾乎? 若非予正其韻書, 則伊誰正之乎?

운서韻書란 언어학 가운데 음운론 내지 음성학을 일컫던 당시의 성운학聲韻學에 기초한 일종의 발음 사전이며, 사성四聲은 지금 중국어와 동남아시아 언어들에 있는 평성·거성·상성·입성의 성조이고, 칠음七音은 어금닛소리牙音·혓소리舌音·입술소리脣音·잇소리齒音·목구멍소리喉音·반혓소리半舌音·반잇소리半齒音로 닿소리의 분류이다. 세종대왕이 스스로 "만일에 내가 저 운서를 바로잡지 않는다면, 그 누가 이를 바로잡겠느냐?" 하는 데서 알 수 있듯이 세종은 임금이면서 당대에 가장 뛰어난 언어학자였다. 세종의 가장 급진적인 정책은 이렇게 비전문가인 사대주의자의 국익을 들먹이는 반대를 뚫고 시작되었다는 부분을 기억해두자.

이후 한글은 조롱조로 언문 또는 암클이라 불리며 조선 왕조 시대를 살아냈다. 한글이 재발견된 것은 한창 민족주의를 받아들인 개화기 때였다. 나라를 앗긴 후 돌이켜보니 '우리글'이 있었던 것이다. 그때부터 고등 교육을 받은 사람은 누구나 한글에 대해서 한마디씩 거들게 된다. (여담이지만, 언어와 글자는 학문 연구의 대상이 되면서도 사실 그 사회의 누구나가 쓰는 도구이기 때문에 고등 교육 정도를 받은 사람은 누구나 언어나 글자에 대해 말을 꺼내는 데 두려움이 없게 되는 것 같다. 가령, 정치학 박사가 후두암의 진단 방식을 바꾸어야 한다고 말하는 경우는 없지만, 한글의 표기를 바꾸어야 한다고 말하는 경우는 더러 있는 것이다.) 근대 이후 정부가 인가한 첫 국어 정책이 종두법으로 유명한 의사였던 지석영의 「신정국문新訂國文」(1905)이었다는 사실은--지석영의 「신정국문」 자체에 대한 평가는 논외로 하고--한글이 얼마나 비전문가들에 의해 쉽게 좌지우지될 수 있는가를 보여 주는 단적인 예라고 할 것이다.

개화기에는 유학파 지식인들이 한글에 대해 너도나도 한마디씩 거들었다면, 오늘날에는 주로 경제 논리나 영어중심주의에서 또는 경제 논리와 영어중심주의에서 한글에 접근하는 경우가 많다. 이경숙 위원장의 '오렌지 발언'은 사실 전혀 새로울 것이 없는 이야기이다. 이런 주장은 수없이 많다. 쉽게 찾을 수 있는 것으로 경제학자인 김영봉 교수가 2년 전에 쓴 신문 칼럼 '한글의 외래어표기와 세계화'는 단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김 교수는 한글에 [f]를 표기할 수 있는 글자가 없어 불편하니 'ㅍ'에 모자를 씌우든 새 글자를 만들든 [f] 발음에 해당하는 글자를 만들자고 주장했다: '필'이 꽂히고, '팬시' 숍을 주로 찾는다기에 '약pill'에 취하고 '여성용품pansy' 가게에 잘 간다는 소린줄 알았다는 것이다.

한글은 일제 후기 민족말살정책에 의해서만 수난을 받은 것이 아니다: 한글은 창제 때부터 지금까지 계속 수난 중이다. 특히 15세기 최만리의 주장과 21세기 김영봉 교수·이경숙 위원장의 주장에는 공통점이 있는데, 모두 큰 나라의 논리를 따르자, 중심지의 화려함을 좇자고 주장한다는 점이다. 그 근거는 하나같이 모두 국익國益이다. 아마 이명박 차기 정부가 주장하는 '실용주의'란 이 지점에 있는 것 같다. 그들이 애써 평가절하하는 노무현 정부가 이라크 파병을 결정할 때 국익을 이야기했고, 한미 FTA를 추진할 때 국익을 이야기했다. 이명박 차기 정부 역시 국가 경쟁력을 들어 영어 정책을 추진하겠다고 이야기한다. 새로울 것도 실체도 없는 '실용주의'라는 말에 대해서는 아래에서 다시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비전문가라면 한글이나 한국어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말라고 하는 것이 아니다. 운서나 사성칠음, 자모는 고등학교 과정에서 대부분 다루는 것이고, 외래어표기법이 정착된 과정은 아주 길게 잡아도 하루나 이틀 정도만 시간을 내면 정립된 저간의 사정을 알 수 있게 된다. 나는 다만 이 정도도 공부하지 않고 한글이나 한국어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오지랖 혹은 오만이라고 생각하는 것뿐이다.


2. 외래어 표기법 개정, 그리고 언어학, 영어 교육과 한국어 교육
--Press Friedly와 Orange를 중심으로

(이 절에서 대괄호([])에 묶인 알파벳은 국제음성기호IPA:International Phonetic Alphabet입니다. 한국어 위키 낱말사전에 IPA 항목이 있지만 자료가 충분치 않고, 국제음성기호 항목에 한글의 IPA 표기 일람이 나와 있지만 일부 항목(가령 'ㅈ'의 IPA 표기)에 오류가 있어 추천하지 않습니다. 참고만 하세요. IPA가 보이지 않으신다면 여기에 가셔서 Charis SIL 글꼴을 내려받아 압축을 푸신 후 CharisSILR.ttf CharisSILB.ttf CharisSILI.ttf CharisSILBI.ttf 등 네 파일을 Windows\Fonts 폴더로 복사하세요.

한편, 옛한글이 안 보이시는 분은 여기에 가셔서 un-fonts-extra를 내려받으신 후 압축을 푸시면 나오는 ttf 파일들을 모두 Windows\Fonts 폴더로 복사하세요.)

이경숙 위원장은 Press Friendly를 모든 신문이 '프레스 프랜들리'로 적었다며 [p]와 [f]를 구분하지 않는 것에 대해 지적했다. 김영봉 교수도 [f]를 표기할 수 있도록 표기법을 바꾸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f]의 표기는 [r]의 표기만큼이나  길고도 지루하다.

사실 [f]를 표기할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다. 청량음료의 이름 FANTA를 '환타'로 표기하는 사례에서 남아 있듯이 과거에는 [f]를 '후'로 표기했다. 아직도 연세가 있으신 일부 어르신들은 free를 '후리'로, fax를 '훽스'로 발음하고 있고, 제일모직의 브랜드 FUBU는 아직도 '후부'라고 표기한다. 아마 [f]를 일본어 가따가나의 'フ'(히라가나로는 'ふ')로 표기하는 데서 유래한 것이 아닌가 싶다. (일본인들은 일본어 고유명사를 로마자 알파벳으로 표기할 때도 'ふ/フ'를 fu로 표기하고 있다. 가령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는 Fukuzawa Yukichi로 표기된다.)

한편으로는 입술가벼운소리脣輕音 'ㅍ'인 ''를 사용할 수 있다. 본래 입술가벼운소리는 두입술갈이소리兩脣摩擦音으로 두 입술이 완전히 붙었다 떨어지면서 내는 'ㅍ'이나 'ㅂ'과 달리 두 입술이 가까이 다가가기는 하되 완전히 붙지는 않은 상태에서 그 두 입술 사이에서 나는 마찰음이다. 예를 들어 '부부'라는 낱말을 발음할 때 첫번째 'ㅂ'과 두번째 'ㅂ'은 서로 다른 소리임을 알 수 있다. 첫번째 'ㅂ'은 두 입술이 완전히 붙었다 떨어지면서 소리가 나는 반면, 두번째 'ㅂ'은 완전히 붙지는 않는다. IPA로 표기하면 '부부'는 [buβu]가 된다. 한편 [f]나 [v]는 이입술소리脣齒音으로 윗니와 아랫입술 사이에서 나는 마찰음이다. 그러므로 본래 'ㅸ'[β]은 [v]와 다르고, 'ㆄ'[ɸ]은 [f]와 다르지만 15세기에 사용되었던 그 표기를 응용해서 쓸 수 있다. 실제로 약간 변형된 입술가벼운소리 표기가 1930년 경에는 널리 사용되었는데, 외솔 최현배 선생이 실제로 『우리말본』 등에서 'ᅋᅳᆧ랑스(랑스)'로 사용하기도 했고(최현배 1961, 217), 정지용의 데뷔 시詩인 「카ᅋᅦᆧ ᅋᅳᆧ란스(카 란스)」에도 사용되었다(정지용 1988, 15).

"외솔OLYMPUS OPTICAL CO.,LTD | C2Z,D520Z,C220Z | Normal program | Multi-Segment | 1/60sec | f2.8 | 0EV | 5mm | ISO-80 | No Flash | 0000:00:00 00:00:00

외솔 최현배, 『우리말본』

"정지용,OLYMPUS OPTICAL CO.,LTD | C2Z,D520Z,C220Z | Normal program | Multi-Segment | 1/80sec | f2.8 | 0EV | 5mm | ISO-80 | No Flash | 0000:00:00 00:00:00

정지용, 「카페 프란스」

방법을 찾는 것은 사실 어려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그보다 중요한 것은 과연 그것이 필요한가이다. 정말 [p]와 [f]를 구별하지 못해서 우리의 말글살이言語生活가 그토록 어려운가? 아마 아닐 것이다. 그런 주장으로는 50개의 음절만으로 세계 2위의 경제대국이 된 일본을 설명할 수 없고, '파울[paul]이야, 파울'이라고 발음해도 알아서 타자가 친 공이 파울foul 라인을 넘어간 것으로 알아듣는 말무리言衆들을 설명할 수 없다.

"Longman

Longman Dictionary of Contemporary English의 Orange 항목

언어학적으로 보자면, [f]에 해당하는 한글 표기를 만들자거나 ['ɒrɪndʒ], ['ɑ:rɪndʒ] 또는 ['ɔ:rɪndʒ]를 표기할 수 있는 표기를 만들자는 것은 전혀 의미가 없는 일이다. 드 소쉬르de Saussure(1990, 143)에 따르면, 언어는 서로간의 '차이'에 의해 구별되는 하나의 기호 체계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한국어의 말무리들이 거의 구별하지 못하고, 구별할 필요가 없는 [p]와 [f]의 차이와 [o]와 [ɒ], [ɑ], [a], [ɐ], [ɔ]의 차이를 표기법에 반영하는 것 자체가 난센스다.

"IPA

IPA 모음 사각도

순수하게 영어 교육의 측면에서만 봐도 마찬가지다. 영어를 잘 하기 위해서라면 한글의 표기를 바꿀 것이 아니라 로마자 알파벳을 사용한 영어 교육에 신경써야 한다. 실제로 지금의 유아 영어 교육은 알파벳 낱글자 또는 글자들의 조합의 소리를 익히는 '파닉스phonics'가 대세를 이루고 있다. 그런 점에서 영어 교육을 위해 외래어의 표기법을 바꾸자고 주장하는 것은 효과도 전혀 없는 시대착오적 주장이다. 그런 점에서 이경숙 위원장이나 이명박의 영어관은 '영어를 공용어로 하자'는 복거일(1998, 165-183)의 주장보다 순수하지 못하다. 차라리 복거일은 일관적인 자신의 논지와 논거를 댈 능력이 있다. 이경숙 위원장이나 이명박은 여전히 그렇다면 왜 이 나라에 한국어와 한글이 필요한가, 에 대한 해답을 찾지 못했다.

한국어의 측면에서 보면 이경숙 위원장의 발언은 심각하다. 한글로 님이 Orange를 오렌지로 표기하는 이유 - 이경숙 위원장님께에서 지적했듯이 오렌지는 표준국어대사전에 올라 있는 한국어(외래어) 낱말이다. 따라서 이 낱말은 한국어 낱말이다. 프랑스어 단어 buffet[byfe]가 영어에서는 ['bʊfeɪ] 또는 [bə'fei]로 발음되듯이 Orange가 영미권에서 어떻게 발음되는가에 관계 없이 한국어에서는 '오렌지'라고 적고 '오렌지'라고 발음하면 그만인 것이다.


3. 영어와 제국주의

영어가 실은 영미의 제국주의적 음모를 위한 도구라고 한다면 종북주의자의 딱지를 얻게 되거나 시대착오적이라는 이야기를 듣게 될까? 나는 종북주의와는 한 터럭도 관계 없고 항상 동시대적이고자 하는 사람이지만, 유감스럽게도 영어에 대한 저 명제에는 동의할 수밖에 없다: 영어는 사실 영미의 제국주의적 음모를 위한 도구다.

로버트 필립슨Robert Phillipson은 제국주의와 언어의 상관관계에 대한 여러 단서 가운데 하나를 소개하고 있다(三浦信孝·糟谷啓介 엮음 2005, 124): 흔히 콜럼버스라는 미국식 이름으로 알려진 끄리스또포로 꼴롬보Christoforo Colombo가 서인도 제도를 발견한 해로 제국주의의 상징이 된 1492년, 에스빠냐의 문법학자 네브리하Nebrija가 까스띠야 스페인어는 "해외 정복의 도구이자 교육받지 못한 무식한 말들을 국내에서 뿌리뽑는 무기다. …… 언어는 언제나 제국의 동반자였고 언제까지나 동료로 남을 것이다."라고 지극히 제국주의적 발상으로 말한 것이다.

문제는 제국주의 패권 시대가 거의 끝난 현단계에도 언어의 제국주의적 속성이 여전히 유효하다는 것이다. 필립슨에 따르면 탈식민지 시대에도 언어는 제국주의적 음모를 위한 도구로 활용되었다(三浦信孝·糟谷啓介 엮음 2005, 126):

1950년대에 작성된 영국 정부 보고서들 역시 탈식민지 시대에도 영국의 이익이 보호되고 유지되려면 학문적 사회기반시설에 투자해야 한다고 단언했다.(Phillipson, 1992, 6장) 영어의 보급은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기 위한 수단이자 경쟁 관계인 다른 제국주의 세력들을 제압하는 방법으로 여겨졌다. 이 사명은 『영국문화협회의 연례 보고서』(1960~1961)에서 다음과 같이 공식화되었다.

세계를 대상으로 영어를 가르치는 것은 미국이 영어를 자국의 이주민 집단들의 공통 민족어로 확립하는 과정에서 맞닥뜨린 과제를 확대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고 본다.

'세계' 곳곳에서 지속적으로 영어를 사용하는 것은 영국과 미국의 이익에 들어맞는다고 보았으며, 그 자체가 대외 원조의 가장 중요한 목적이었다.

레닌Lenin에 따르면 제국주의란 "독점자본주의의 논리적 발전"이며 "자본주의 발전의 최고의 단계"이므로(Sabine and Thorson 1997, 1187), 영미가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영어 보급에 힘쓰는 것은 영어의 독점자본주의로서 일종의 제국주의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이 독점이라는 것은 "자유경쟁의 직접적 대립물"이면서도 역사적으로 자유경쟁은 쉽게 "독점으로 전화"하는 모습을 보였던 것이 사실이다(Lenin 1986, 121). 이를 언어에 적용해 보면, 수많은 언어가 자유로이 '경쟁'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그런 '자유경쟁'으로 인해 한두 특정 거대 언어가 나머지 작은 언어들을 지배하게 되는 경향성이 뚜렷하게 되는 것이다.

가스야 게이스케糟谷啓介(三浦信孝·糟谷啓介 엮음 2005, 369-391)는 그람시헤게모니 이론을 빌어 이 '언어 제국주의'를 분석하면서 언어라는 것이 헤게모니를 과연 장악하는 사물인가를 논증하고 있지만, 사실 학술적인 논의를 위해서가 아니라면 언어 제국주의와 영어 헤게모니를 그렇게 힘들여 입증할 필요는 없다; 한국 사람이라면 누구나 영어가 지금 헤게모니를 장악했다는 것을 알 수 있고, 나아가 그것이 일종의 제국주의라는 것을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것은 한국의 역사 속에서 매우 낯익은 풍경 가운데 하나이다:

"얘, 너 그 노어 공부를 열심히 해라."
"왜요?"
아들은 갑자기 튀어나오는 아버지의 말에 의아를 느끼면서 반문했다.
"야 원식아, 별 수 없다. 왜정 때는 그래도 일본말이 출세를 하게 했고 이제는 노어가 또 판을 치지 않니. 고기가 물을 떠나서 살 수 없는 바에야 그 물 속에서 살 방도를 궁리해야지. 아무튼 그 노서아말 꾸준히 해라."

전광용(1994, 233)의 「꺼삐딴 리」는 일찍이 언어가 가진 헤게모니성를 간파한 한 의사의 이야기다. 이인국 박사는 일제 시대에는 일본어로, 해방 후 이북에서는 러시아어로, 그리고 월남해서는 다음과 같이 영어로 출셋길을 닦았다(전광용 1994, 246-247):

브라운 씨의 영어 반 한국말 반으로 섞어 하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이인국 박사는 흐뭇한 기분에 젖었다.
"닥터 리는 영어를 어디서 배웠습니까?"
"일제 시대에 일본말 식으로 배웠지요. 예를 들면 '잣도 이즈 아걋도' 식으루요."
"그런데 지금은 발음이 좋은데요. 문법이 아주 정확한 스탠다스 잉글리쉬입니다."
[…]
"얼마 전부터 개인 교수를 받고 있습니다."
"아, 그렇습니까."
이인국 박사는 자기의 어학적 재질에 은근히 자긍을 느꼈다.
[…]
그는 혈압 때문에 술을 조절해야 하는 자기 체질에 알맞게 스카치 잔을 핥듯이 조금씩 목을 축이면서 브라운 씨의 이야기를 기다렸다.
"그거, 국무성에서 통지 왔습니다."

영어를 왜 배워야 하는지를 물으면 누구나 미국이 세계의 정치적·경제적 패권을 쥐고 있는 현단계의 상황과 전체 대외무역 가운데 대미무역이 차지하는 비중 등을 말할 것이다. 어떤 이는 '세상이 다 영어 중심으로 돌아가기 때문'이라고 답할지도 모른다. 이것이 영어의 독점자본주의다. 실제로 '헤게모니'라는 개념이 여기서 대두되는데, 미우라 노부따까三浦信孝는 이를 이렇게 정리한다(三浦信孝·糟谷啓介 엮음 2005, 17-18):

그러한 의미에서, 심포지엄의 마지막 날에 가스야 게이스케(糟谷啓介)가, 그람시의 헤게모니론을 소개하면서, 행한 논리의 정리는 귀중했다. 그람시는, '정치적 강제가 없는데, 왜 특정한 언어의 사용이 확대되는가'라는 물음에서 출발하여, 화자의 자발적 동의에 의한 소언어에서 대언어에로의 이동 뒤편에 익명의 권력 작용이 매개한다는 것을 간파하고, 헤게모니를 '시민의 자발적 동의를 조직하는 권력'이라고 정의한 다음, 이것을 '독재'와 구별했다. 언어 제국주의가 정치적 강제를 유력한 수단으로 하여 정책적으로 실행했다고 한다면, 포스트식민지 시대의 '언어 헤게모니'는, 그 주체도 특정하지 못한 채, 눈에 보이지 않는 권력 쪽으로 사람들을 유인한다. 이 가시적인 강제를 동반하지 않는 '헤게모니' 개념이, 오늘의 언어 제국주의를 분석하는 데에 대단히 유효하다는 것은 설명이 필요하지 않다.

언어 제국주의의 무서운 점은 그것이 총칼로 무장한 권력과 달리 눈에 보이지 않는 권력 작용이라는 점이다. 가령 실제로 국제연합이 창설될 때 프랑스어에 국제적인 지위를 얻었던 것은 프랑스뿐 아니라 여러 프랑스의 과거 피식민 국가들도 마찬가지였다는 사실은 의미심장하다(三浦信孝·糟谷啓介 엮음 2005, 372). 버나드 스폴스키Bernard Spolsky(2001, 110)는 영어가 국제적 권력을 얻기까지 영미가 직접적으로 한 일은 거의 없었다고 지적한다:

영어가 20세기에 세계어로 발전하게 된 과정을 좀 더 자세하게 살펴보면 사실 수요가 공급을 항상 초과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영어 사용 국가들의 언어 확산 노력들은 영어를 배우고자 하는 세계적 열망을 이용하려는 시도인 경우가 많았다. 영어에 대한 관심을 부추길 필요는 거의 없었다. 영어는 현대 기술, 경제 성장, 국제화와 관련되어 있다는 점이 전세계 사람들이 영어를 배우도록 하였다. 이런 움직임이 성공을 거두면 거둘수록 다른 사람들도 영어를 알면 얻게 된다고 여겨지는 권력과 성공에 접근할 수 있는 길을 원하는 이유가 더 커지게 된다.

복거일(1998, 166-169)은 그러한 언어의 확장이 '망network 경제'라고 하는 현상 때문인 것으로 설명하고 있다. "'메트카프의 법칙Metcalfe's Law'에 따르면, 사용자에 대한 효용으로 정의되는 망의 가치는 대체로 사용자 수의 제곱에 비례해서 들어난다"는 것이다. 즉, 많이 사용되는 '표준'이 열등하고 새롭게 대두되는 무언가가 우등하다고 해서 쉽게 전이shift가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런 경제학적인 사정으로 인해 영어의 권력은 생각보다 더 공고하다는 것이 밝혀진다.

그런데, 이와 같은 권력 관계의 자각이 반드시 언어의 피식민 그룹에서만 일어나는 일은 아니라는 점은 흥미롭다. 오다 마사끼Masaki Oda는 "Linguicism in Action: Language and Power in Academic Institution"에서 영미권의 TESOL(Teaching of English to Speakers of Other Languages) 종사자들이 식민주의적이고 오리엔탈리즘적 관점을 가지고 일한다는 점을 보여 준다(三浦信孝·糟谷啓介 엮음 2005, 128; Phililipson 2000, 117-121). 오다는 아끼 마에다Aki Maeda라는 일본인 대학생이 영국의 ESL(English as a Second Language) 과정을 이수하면서 겪은 언어적 차별linguicism을 소개하면서 토베 스쿠트나브-캉가스Tove Skutnabb-Kangas가 말한 대로 언어가 지배와 통제의 도구로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는 이론을 확인한다. 오다에 따르면 특히 영어 교육의 현장에서 이루어지는 권력 관계는 두 가지 차원에서 이루어진다: 하나는 영어 원어민과 비원어민의 차원에서, 다른 하나는 강사와 학생 사이에서이다.

이를 좀더 넓게 확장시켜 보면, 한국이나 일본과 같은 나라들과 영국이나 미국과 같은 나라들 사이의 권력 관계가 어떤 양상인지 알 수 있게 된다: 영미는 영어의 네이티브인 동시에 한국이나 일본 같은 나라의 스승이 되는 것이다. 이 스승-제자 패러다임은 (굳이 한국과 일본이 범유교문화권이라는 점을 지적하지 않더라도) 이들 나라에서 자발적으로 영어를 배우려고 애쓰고, 영어 능력에 따라서 그 사회적 지위가 결정되는 까닭을 짐작할 수 있게 해 준다. 영어는 바로 그 지점을 파고들어 제국주의적 지배 계급으로 자신을 자리매김한다.


결론: '실용'주의와 영어 이데올로기

실용주의란 무엇인가. 동녘판 『철학소사전』의 '실용주의' 항목은 이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한국철학사상연구회 엮고 옮김 1990, 231):

우리의 표상, 개념, 명제 등은 객관적 실재에 대한 모상을 매개하는 것이 아니라, 실천적 행동을 위한 규칙이라고 하는 테제가 실용주의의 이론적 핵심이다. 그에 따르면 진리는 명제와 객관적 사태와의 일치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실제적 유용성, 즉 결과에 있다. 이러한 입장의 귀결은 어떤 성과를 내고 유용성을 가져오는 실천적 행위나 견해는 무엇이든 '확충된' 것이라고 정당화하는 철저한 상대주의이다. 이러한 입장에서 실용주의는 모든 도덕을 부정한다. 실용주의에서 볼 때 도덕은 편견의 체계이다. 이러한 견해에 따를 때 실제 생활에서 모든 인간들에 구속력이 있는 도덕적 규범이나 법칙은 존재하지 않는다.

한편 힐쉬베르거(1999, 760)는 "프라그마티즘에 있어서의 참된 것이란 <성과를 거둘 수 있는 것>"이라고 하면서 "이때 이 <성과를 거둘 수 있는 것>이라는 개념은 보통 애매하여 프라그마티즘은 사람들이 이 개념을 무엇이라고 이해하건 내버려둔다"고 소개한다.

즉, 실용주의란 철저한 주관주의이자 상대주의이다. 하지만, 힐쉬베르거가 지적했듯이 실용주의의 지향점은 모호하다. 실용주의 정부를 표방한 이명박 인수위가 영어 교육에 거품을 무는 것은 분명 경제적 실용주의 측면에서 영어 교육이 국부 창출에 유리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영어몰입교육을 비롯해서 그들이 주창하는 영어 교육의 방법론이 성과는 물론 그 부작용이 검증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따라서 그들의 영어 교육론은 특정한 하나의 이론이 아니라 단지 이데올로기에 불과하다. 실용주의란 '성과를 거둘 수 있는 것'을 지향한다는 점에서, 이명박 인수위의 현재 태도는 좀 의아한 데가 있다; 영어 교육이 낼 수 있을 만한 '성과' 자체가 모호한 상황에서 무조건 불도저로 밀어부치는 양태를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영어몰입교육을 주창했다가 한 발 물러선 것이 대표적인 사례다.

이명박 인수위는 제반 언어에 대해 특히 무지함을 드러내고 있으며, 철저하게 실용주의로 무장한 듯하지만 실제로는 무척 빈약한 근거만을 내세우고 있다. '중무장한 아마추어리즘'이라고 불릴 만한 이들 정책은 분명 재고의 필요성이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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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강신항. 2003. 『수정증보 훈민정음연구』. 7판. 서울:성균관대학교출판부.
복거일. 1998. 『국제어 시대의 민족어』. 서울:문학과지성사.
전광용. 1994. 『전광용 대표작품선집』. 서울:책세상.
정지용. 1988. 『정지용 전집』. 1 詩. 2판. 서울:민음사.
최현배. 1961. 『우리말본』. 네번째 고침. 서울:정음사.
한국철학사상연구회 엮고 옮김. 1990. 『철학소사전』. 서울:동녘.
三浦信孝·糟谷啓介 엮음. 2005. 『언어 제국주의란 무엇인가』. 이연숙·고영진·조태린 옮김. 파주:돌베개.
Hirschberger, Johannes. 1999. 『서양철학사』. 하권: 근세와 현대. 강성위 옮김. 6판. 대구:이문출판사.
Oda, Masaki. "Linguicism in Action: Language and Power in Academic Institution". in Phillipson, Robert eds. 2000. Right to Language: Equity, Power, and Education. Mahwah:Lawrence Erlbaum Association. pp. 117-121.
Lenin, Vladimir Ilich. 1986. 『제국주의론』. 남상일 옮김. 서울:백산서당.
Sabine, George H. and Thomas Landon Thorson. 1997. 『정치사상사』. 2권. 2판. 성유보·차남희 옮김. 서울:한길사.
de Saussure, Ferdinand. 1990. 『일반언어학강의』. 최승언 옮김. 서울:민음사.
Spolsky, Bernard. 2001. 『사회언어학』. 김재원·이재근·김성찬 옮김. 서울:도서출판박이정.

Posted by 엔디
한국어, 최초로 국제기구 공식언어 채택 쾌거 - 1등 인터넷뉴스 조선닷컴

모든 언어가 '도구'로서의 기능만 갖는 것은 아니지만, 일상에서 언어의 타동사적인 측면은 자동사적인 측면보다 훨씬 강조되어야 마땅할 것이다. 언어 예술이라고 불리는 문학이나 언어를 통해 내밀한 사유를 하는 철학이 아니라면, 언어는 분명한 목적 의식을 가지고 도구적으로 사용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어떤 언어가 다른 언어보다 뛰어나다거나 못하다는 말은 있을 수 없다. 어떤 언어가 국제적으로 통용되는 이유는 분명히 언어 외적인 것이다. 옛적의 중국어, 프랑스어가 그랬고, 지금의 영어가 그렇다.

대학 시절 한 선생님은 대학생들이 소위 '원서'라고 하는 깨알 같은 영미권 책을 읽어야 하는 이유는, 그 나라의 학문이 뛰어나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셨다. 가령, 심리학을 공부하기 위해서는 영어로 된 책을 많이 보아야 하는데 그것은 영어가 심리학에 더 적합하기 때문이 아니라 심리학이라는 학문이 영미권 특히 미국에서 발달된 학문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경영학이나 사회학, 정보산업이나 생명공학 등 분야 학문 등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다른 언어도 사정은 비슷해서 대륙법을 배우기 위해서는 독일어를 배워야 하며, 패션 관련 공부를 하기 위해서는 프랑스어나 이딸리아어를 배워야 한다. 선생님은 여기에 한 마디를 덧붙이셨다. 외국인들이 한국어를 배우는 경우가 있는데, 그건 철학 분야에서의 '퇴계학'과 언어학 분야에서 '훈민정음(한글)'이라는 것이다. 그 둘만이 한국이 학문적 우위를 점하고 있는 분야라는 것이다.


한국어가 특허 협력 조약PCT: Patent Cooperation Treaty의 국제 공개어로 채택되었다. 이제는 국제 특허를 출원할 때, 기존의 영어, 프랑스어, 독일어, 일본어, 러시아어, 스페인어, 중국어, 아랍어 등으로 특허 내용을 번역하지 않아도 된다는 뜻이라고 한다. 특허청 관계자는 한국이 "세계 4위의 특허 출원국이자 세계 5위의 PCT 출원국"이라는 점이 반영된 것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아마 그뿐 아니라 한국어를 모어로 하는 인구 수가 6700만으로 세계 16위(Ethnologue 2005 기준)에 달한다는 점도 반영되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몇몇 신문이 이를 계기로 한글의 뛰어남을 찬양하고 나섰다는 점이다. 대전일보는 해당 사실을 전하면서 사설을 통해 독일 언어학자 베르너 사세의 한글 찬사와 작가 펄 벅의 한글 찬사를 인용했고, 문화일보 역시 사설을 통해 한글에 대한 칭찬을 싣고 있다. 이러한 무분별한 찬양에는 두 가지 문제점이 있다: 하나는 PCT의 국제 공개어로 채택된 것은 '한글'이 아니라 '한국어'라는 점에서 두 신문은 '동문서답'을 하고 있는 셈이라는 점이며, 다른 하나는 한국어 또는 한글이 내재적인 우수성으로 인해 PCT에 채택된 것이 아니라 특허 출원 수나 모어 화자의 수가 기준이 되었을 것이라는 점이다.

정인지의 말처럼 훈민정음(한글)이 "비록 바람 소리, 학의 울음소리, 닭 우는 소리, 개 짖는 소리일지라도 모두 이 글자를 가지고 적을 수가 있다雖風聲鶴唳鷄鳴狗吠 皆可得而書矣."고 믿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한글의 우수성에 대해서 부정할 수는 없다. 하지만, 그것 때문에 한글이 PCT 국제 공개어로 채택된 것이 아니라면 그에 대한 말을 할 이유는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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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전히 아름다운 그녀들…’ - 조선닷컴:

도우미라는 아름다운 우리말을 '노래방 도우미'가 망쳐놓았다, 하는 이야기를 들었다. 가끔 말은 가능한 한 아름다워야 한다고 생각하는 나는 동의를 주저할 수밖에 없었다. 젊은 언어심미주의자가 망설일 분명한 이유가 있다: 도우미의 '출신성분'이 아름답지 못하기 때문이다.

내 기억으로 도우미가 가장 처음 쓰인 것은 1993년, 대전 국제박람회EXPO 때다. 박람회 안내요원을 20대 여성들로 뽑아, 그들을 '도우미'로 이름했던 것이다. 선진국들 사이에서는 올림픽만큼이나 중요하고 인기있는 행사라고 언론에서 난리를 치던 엑스포였기 때문에, 도우미라는 이름도 쉽게 대중들에게 각인되었던 모양이다. 하지만, 당시의 광고나 팸플릿을 조금만 관심있게 들여다 보았다면 '도우미'의 출신성분이 그리 순수하지 않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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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보다 '도우미'는 사람들이 흔히 짐작하는 대로 '도움-이' → '도우미'의 짜임이 아니다: '도우미'는 '도움을 주는 우아한 미인'의 줄임말이다. 사소한 것 같아 보이지만, 이것은 '도우미'가 그 말이 태어나는 순간부터 가지고 있을 수밖에 없는 결점을 보여준다.

나는 '도우미'가 남성을 지칭하는 경우를 본 적이 없다. 노래방 도우미도 마사지 도우미도 여성이고, '가정부'나 '파출부' 대신 쓰이는 '도우미 아줌마'도--'아줌마'에서 알 수 있듯이--여성이다. 맨 처음의 쓰임인 박람회 도우미도 여성이다. 그 비밀은 '도우미'가 본질적으로 '우아한 미인'이기 때문이다.

'미인美人'은 한자로만 보면 양성의 구분이 없지만, 국어사전을 뒤져보면 대개 여성을 지칭한다고 되어 있다. '우아優雅'하다는 가치도 대개 여성에게 요구되는 가치이다. 아름다움이나 우아함 자체가 대개 여성을 평가하는 기준이었다는 사실은 우리 사회가 얼마나 남성 중심적으로 이루어졌는가를 여실히 보여주는 것인데, 이 두 가치를 무비판적으로 수용한 낱말이 '도우미'인 것이다.

'도움을 주는' 이가 우아하고 아름다운 여성이라는 사실은, 반드시 그렇지는 않다고 하더라도 '도움을 받는' 이는 남성일 것이라는 점을 전제로 했다는 혐의를 품게 한다. 왜냐하면 '도우미'라는 말 속에는, 남성은 도우미가 되고 싶어도 될 수 없는 논리가 품어져 있기 때문이다. 물론, 현실에서 박람회 도우미에게 도움을 받은 여성들도 많을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성 역할 구별의 전통에 큰 영향을 미치는 것이 못된다.

도움을 받는 남성과 도움을 주는 여성이라는 사회적 이분법은, 옹호론자들이 '가장 오래된 직업'이라고 입을 모으는 매춘賣春 또는 유사 매춘의 연상을 가능케 한다. 사실 이는 단순한 연상 작용이 아니라 필연적인 귀결인데, '우아한 미인'이라는 가치가 남성으로부터 여성에게로 강제된 가부장적 이데올로기 하에서의 여성의 미덕이기 때문이다. 또 '우아한 미인'이라는 가치는 무엇보다 보여지는visible 물리적인physique 가치이며, 따라서 젊고 예쁜 노래방 도우미의 눈에 띄는visible 육체적physique 가치로 전환되기가 어렵지 않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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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우미'는 일부 국어순수주의자들이 주장하는 대로 순우리말이 아니다. '순純우리말' 자체도 순우리말이 아닌 현실 속에서, 순우리말이라는 것이 대체 무슨 가치를 갖는지 나는 알 수 없지만 어쨌든 사소한 오류는 바로잡을 필요가 있다.

토박이말이 보다 정겹고 아름답다는 말에 나는 광범위하게 동의하지만, 억지로 만든 순우리말에는 오히려 거부감이 먼저 든다. '올인'을 '다걸기'로 바꾼다거나, '웰빙'을 '참살이'로 바꾸는 것에 대체 누가 동의를 하겠는가. 더욱이 '다걸기'는 '올인'보다 아름답지 못하며, '참살이'는 '웰빙'의 뜻을--그 부정적인 뜻까지도--제대로 담아내지 못하니 도대체 쓸 일이 없는 낱말인 것이다.

국어순수주의자들이 성공사례로 자주 드는 것이 '도우미'이다. 하지만 '도움을 주는 우아한 미인'이라는 말을 들여다보면 '우아優雅'와 '미인美人'은 한자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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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 보 양보하여, '도우미'의 통시적 분석을 포기하고 공시적으로 '도움-이'라고만 분석하는 데 동의한다고 해도 문제는 남는다. 어째서 '도움이'가 아니라 '도우미'인가 하는 점이다.

사전을 찾아보면 '이'는 뒷가지接尾詞가 아니라 안옹근이름씨依存名詞다. 이 말은 '이'는 이름씨名詞의 뒤에 붙는 것이 아니라 매김씨冠形詞 뒤에 붙어야 한다는 것이다. 즉, '들음이'가 아니라 '들은 이/듣는 이/들을 이'가 맞고, '먹음이'가 아니라 '먹은 이/먹는 이/먹을 이'가 맞다. 이때 자주 쓰여 굳은 매김씨-이름씨의 결합은 하나의 낱말로 인정할 수 있다. 가령 '지은이'나 '엮은이', '펴낸이' 등이다. 이 세 낱말은 모두 『표준국어대사전』에 올림말로 등재된 것인데, 솜솜 뜯어보면 모두 '매김씨-이'의 형태로 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우리말에는 움직씨動詞의 줄기語幹에 '이'가 붙는 경우가 있는데 '더듬이', '앓이', '지짐이' 등이 그 예이다. 이 경우는 반드시 '~을 하는 사람'이라는 뜻을 가지는 것은 아님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무언가를 도와 주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순우리말을 원하는 사람은 '돕는이'나 '돕이'라는 말을 써야 마땅할 것이다.

('절름발이'나 '애꾸눈이'처럼 이름씨 뒤에 '이'가 붙은 것을 찾아볼 수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 경우는 움직씨 '돕다'가 변하여 '도움'이라는 이름씨가 된 경우와는 차이가 없지 않다. 이런 차이를 무시하고 '이름씨-이'의 형태를 인정한다고 하더라도 '도우미'가 아니라 '도움이'가 되어야 한다.)


도우미는 몇 번을 곱씹어봐도 아름답지 않은 말이다. 내 생각으로는 아주 없어져야 할 말이다. '노래방 도우미'는 '도우미라는 아름다운 낱말'의 오용誤用이 아니라 그 말이 본래 가진 어두운 면을 드러내는 말일 뿐이다.

위와 같은 긴 글보다 한 마디 말이 더 눈에 들어온다면: '도움이'가 아니라 '도우미'라고 굳이 표기한 이유를 생각해보면 된다. '미'가 '美'를 곧바로 환기시키지 않는가 말이다. (맨 위에 링크한 조선일보 기사 제목도 참조하자: 여전히 '아름다운' 그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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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두리가 '분데스리거'라고 했다. 가십성 기사를 써대는 작은 언론사의 일이 아니다. 포털 사이트에서 '분데스리거'로 뉴스 검색을 해보면 알겠지만, KBS와 MBC, 동아일보, 미디어오늘 등의 굵직굵직한 언론사가 이와 같은 용어를 썼다.

분데스리거라... 난 축구에 대해 잘 모르지만, 영국과 에스빠냐, 이딸리아, 독일의 축구 리그를 4대 리그라고 한다는 것은 들은 적이 있다. 각 리그는 당연히 제나라 말로 표기한다. 영국은 프리미어 리그Premier League, 에스빠냐는 프리메라 리가Primera Liga, 이딸리아는 세리에 아Serie A, 그리고 독일은 분데스리가Bundesliga인 것이다. (독일어는 복합명사를 무조건 붙여 쓴다.)

분데스리가는 연방, 연맹이라는 뜻의 분트Bund에 동맹, 단체라는 뜻의 리가Liga가 붙어서 만들어진 것이다. 물론 여기서 리가Liga는 영어의 리그league에 해당한다. 문제는 리거leaguer에 해당하는 독일어는 Liger가 아니라 리기스트Ligist라는 점이다. 그러므로 분데스리거가 아니라 분데스리기스트가 맞는 표현이다.

나는 분데스리거를 분데스리기스트로 바꾸어 표기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분데스리가 선수, 또는 분데스리가 소속 선수라고 하면 그만이다. 한국어도 아닐 뿐더러, 어법에 맞지도 않는 말을 무조건 영어식으로 끼워 맞추어 쓸 필요는 없는 것이다. 그것은 책임있는 언론의 자세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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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자 표기법을 둘러싼 논란과 2000년 발표된 새 로마자 표기법안을 살펴보고 나서 나는 다시 『훈민정음』을 생각했다. 정인지는 『훈민정음』에 붙인 서문에서 이렇게 말했다:

그러나, 사방의 풍토가 구별되고, 성기聲氣가 또한 따라서 달라진다. 대개 외국(중국 이외의 나라)의 말은, 그 소리는 있되 그 글자가 없어서, 중국의 글자를 빌어다 통용通用하니, 이는 마치 모난 막대기를 둥근 구멍에 끼운 것과 같도다. 어찌 능히 통달하여 거리낌이 없을 것인가.
然四方風土區別, 聲氣亦隨而異焉. 蓋外國之語, 有其聲而無其字. 假中國之字以通其用, 是猶枘鑿之鉏鋙也, 豈能達而無礙乎.

우리가 한국 말을 로마자로 표기하려 애쓰거나 외국 말을 한글로 표기하려고 애쓰는 것은, 여러 사정으로 그것을 외면할 수 없기 때문이지 결코 그 편이 좋아서가 아니다. 만약 한국 말을 표기하는 데에 로마자가 한글보다 낫다면 나는 당연히 로마자를 한글 대신 쓰자고 주장할 것이다. 세종대왕이 얼마나 훌륭한 언어학자였는가나 한글이 얼마나 과학적인가는, 한글 사용에 대한 인과적·간접적인 근거는 충분히 될 수 있지만 직접적인 근거는 결코 아닌 것이다. 말인즉슨, 로마자로는 한국 말을 완벽하게 표현해 낼 수가 없다는 것이다. 로마자 표기법을 문제 삼을 때 이것은 굉장히 중요하다. 무턱대고 이러이러하니 이건 안 된다고 반대하는 것은 이 경우 결코 올바른 태도가 아니라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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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개 한국 말을 로마자로 표기할 때 논란이 되는 것은 닿소리에서 'ㄱ', 'ㄷ', 'ㅂ', 'ㅈ'과 그 된소리 및 거센소리 표기와 홀소리에서 'ㅓ', 'ㅔ', 'ㅡ' 들과 'ㅕ', 'ㅖ', 'ㅝ', … 와 같이 그 관련된 표기이다.

그러나 지금의 표기법에 반대하는 이들이 내어놓는 표기법들은 지나치게 자의적이거나 불편한 경우가 많아서 그것이 충분히 대안의 기능을 하지 못한다. 특히 모음에서 그렇다. 가령 'ㅓ'에 대해서 ŏ, e, u, eo, o’ 들이 상정되었을 때 이 가운데 eo를 뽑게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인 것이다. 일단 ŏ는 전산화가 불편하고, e나 u는 한국 뿐 아니라 거의 전 세계에서 대체로 'ㅔ'와 'ㅜ'로 쓰이고, o’는 말무리言衆들이 전혀 쓰지 않는 표기이면서 그 표현에 필연성이 없다. 하지만 eo는 전부터 일부에서 사용해왔으면서도 전산화가 어렵지 않고, a e i o u처럼 세계적으로 거의 고정된 소릿값을 해치지 않는다. 'ㅔ'를 ei로 써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나 'ㅡ'를 u로 써야 한다고 하는 사람들에게도 같은 반박을 할 수 있다.

다만 내가 지금의 로마자 표기법에 불만스러운 점은 'ㄱ', 'ㄷ', 'ㅂ', 'ㅈ' 등의 유성음/무성음 여부를 가리지 않고 표기하도록 한 점이다. 내가 생각하기에는 이들 닿소리는 유성음과 무성음을 갈라서, 'ㄱ'을 예로 들면, 각각 g와 k로 적고, 받침은 k로 적되 소리이음連音될 때는 g로 바꾸어 적으며, 된소리는 kk로, 거센소리는 kh로 적는 편이 좋다고 생각한다. 내가 생각하는 이유는 이것이다:

주로 외국인들에게 고유명사를 알리는 데 쓰는 로마자 표기는 유성음과 무성음을 확실히 인지하는 그들에게 일단 맞추어주는 것이 옳을 것이라는 생각이다. (그들이 한국 말에서도 유성음과 무성음을 구별하는 것은 외국인이 만든 로마자 표기법 체계인 매큔-라이샤워 체계에서 그것을 엄격히 구별했던 것에서 증명된다.) 생각해보면 일반 사람들이 로마자 표기법을 활용할 때는 자신의 이름을 적을 때와 자신의 주소를 적을 때 뿐이다. 그나마도 주소는 이미 다 정해져 있다. 그러므로 자신의 이름을 로마자로 적을 때만 표기법을 참고하면 그만이다. (인터넷에는 로마자 변환기를 제공하는 사이트도 있다. 국립국어원에서도 로마자 변환기를 제공하고 있다. 2008. 3. 12. 추가) 그리고 유성음과 무성음에 대한 내용은 중등교과 과정에서 배우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Kim이라는 표기 때문에 한국 말 말무리까지도 '미스타 킴' 하는 식으로 '킴'이라는 발음이 일반화되었다고 설명하는데 그건 근거가 약하다. '미스터 김'이라고 한 번 발음해보면 왜 사람들이 '미스타 킴'을 고집하는지 알게 될 것이다. '미스 김'을 '미스 킴'이라고 하는 경우는 그리 많지 않다는 점만 봐도 이 점은 분명해진다.)

kk와 kh는 글자를 겹쳐쓰는 것이 부담이 된다고 말할 지 모르지만, 나는 그 부담이 그렇게 큰 것인가 되묻고 싶다. kk와 같은 경우는 어느 정도 전자법轉字法적인 면모가 보이지만, 예사소리-된소리-거센소리의 구분은 이미 로마자로는 불가능하므로 다소 전자법을 수용할 수밖에 없고, 무성음이므로 k를 겹쳐쓰는 편이 옳다. 물론 'ㅉ'의 경우는 관행이 되기도 했고 편리하기도 한 jj로 표기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한편 kh의 경우는 본래 거센소리가 h 소릿값이 포함된 소리이므로 이렇게 쓰는 편이 합당하다. 한글에서의 한 글자가 로마자에서 여러 글자에 대응된다고 불평할 수도 있겠지만, 부수적인 기호를 쓰지 않고 표기하려면 어쩔 수 없는 것이다.

실제로 러시아 말을 로마자 표기할 때, 끼릴 문자 한 글자가 로마자로 여러 글자에 대응하는 경우는 흔하다. 러시아 말의 로마자 표기는 여러 방법이 있지만, 가장 흔히 쓰는 방법이 미국 의회 도서관에서 쓰는 방식이다. 이 경우 ж-zh, х-kh, ц-ts, ч-ch, ш-sh, щ-shch 등으로 한 글자가 여러 글자에 대응하는 경우는 흔하다. (홀소리의 경우도 ю-iu, я-ia 에서 보듯이 마찬가지다.) 그래서 Пушкин은 Pushkin이 된다. (받침이 있는 한국 말과 달리 러시아 말의 경우는 끼릴 문자 대 로마자의 변환에서 전자법과 표음법의 구분이 모호한 것 같다. 그러나 대체로 전자법에 가까운 것 같다. 가령 뻬쩨르부르그에 가깝게 읽힌다는 Петербург는 Petersburg로 표기된다.)

그러나 내 의견은 이 편이 좀더 낫지 않겠는가, 하는 덧말일 뿐이지 이 편이 반드시 좋다는 것은 아니다. 보다 중요한 것은 어느 한 쪽으로 통일해서 말무리들이 널리 쓰도록 하는 것이다. 오랜 관행은 모든 법칙에 앞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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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벽하지 않은 로마자 표기법을 우리는 어떻게 써야 할까. 나는 여기서 "나를 이렇게 불러주세요Call me …/Appelez-moi …." 하는 문화가 중요하다고 본다. 로마자뿐 아니라 서양 사람들끼리도 이름을 잘못 부르는 경우는 흔하다. 정신분석학의 창시자 S. Freud는 미국에서 프로이드라고 불리고, Albert Einstein은 알버트 아인슈타인으로 알려져 있다. 지금의 미국 대통령 George Bush는 프랑스에서 조르쥬 부쉬로 불리고, 영국의 옛 수상 M. Thatcher는 프랑스에서 따쭤로 불리며, 독일의 관념철학자 G. W. F. Hegel은 에겔로 불린다. 아르헨티나에서 나서 나중에 꾸바 국적을 갖게 된 Ché Guevara는 프랑스에서 쉐 게바ㅎ-라로 불린다.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면 "나를 이렇게 불러주세요"라고 하면 그만이다.

안정효는 『그리스인 조르바』로 유명한 N. Kazantzakis는 카잔차키스가 아니라 카잔차키라는 점을 지적했으며, 고종석은 마시뱅크스Majoribanks나 팬쇼Featherstonehaugh와 같은 이상한 이름들을 소개한다. 레이건Reagan 전 미국 대통령은 오랜 배우 시절 리건이라고 불렸고, 대통령이 되어서야 레이건으로 제대로 불리기 시작했다. 이들이 자신의 이름을 알리는 길은 "나를 이렇게 불러주세요"라고 부탁하는 수밖에 없다. 쁘띠로베르Le Petit Robert 인명사전에는 아날 학파 역사학자 뤼씨앙 페브르Lucien Febvre의 이름 옆에 "[fεvr]"라고 씌어 있다. 이렇게 읽어달라는 것이다. 거스 히딩크 전 한국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도 자신의 이름Guus가 [후스]나 [구스]가 아니라 [거스]로 발음된다며, '거스'로 표기해줄 것을 요구하기도 했다(조선일보: 기사에서는 Guss로 잘못 나와 있음). (지금 한국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인 J. Bonfrère는, 본래 말밑語原이 그렇거니와, 프랑스 말 봉 프레르로 잘못 읽힐 수 있을 것이지만, 지금 본프레레로 불린다.)

한국 말을 쓰는 말무리들도 마찬가지다. No Muhyeon을 외국인이 못 읽는다면 '노무현'이라고, Bak Geunhye를 못 읽는다면 '박근혜'라고 읽어주면 된다. 외국인이 발음을 잘 못한다면? 비슷하게만 해주면 된다. 입장을 바꿔놓고 생각해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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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다시 강조하듯이 오랜 관행은 모든 규칙에 앞서야 한다. 설사 그것이 개인적으로 행해왔던 관행이라 하더라도 말이다. 노무현의 노가 No, Ro, Roh, Nou, Nau 가운데 어떤 것이라도 그것은 외부인이 간섭할 문제가 아니다. 가령 최근 '류' 씨 성과 관계된 소동을 보면서 조선일보의 한 부장(대우) 기자는 엉뚱하게 로마자 표기 때문에 곤란을 겪었던 사례를 든다. (조선일보) 말인즉, 프랑스의 호텔로 전화를 했는데 상대방이 성姓을 어떤 철자로 쓰는지 몰라 힘들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내 생각에는, 외국의 호텔에 묵고 있는 사람과 통화를 하고 싶다면 그 정도는 미리 알아두었어야 한다. 자신 이름의 로마자 표기를 쓰고 싶은 대로 쓰는 것은 자유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로마자 표기를 만든 목적이 무엇이냐고? 그야 땅이름이나 주소처럼 사용이 개인적이지 않은 것들에 대한 표기를 위해서, 그리고 사람이름을 표기하는데도 어떤 표준을 마련하기 위해서라고 봐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3장 7항이 왜 있겠는가. 가령 회사 이름 같은 경우, 삼성은 어느 나라에서도 [삼성]이라고 읽어주지 않는 SAMSUNG을, 현대는 어느 나라에서도 [현대]라고 읽어주지 않는 HYUNDAI를 계속 쓸 것이다. 그 이름값이 엄청나기 때문이다. (이들은 심지어 외국에서의 자사 광고에서도 [삼성], [현대]라는 발음을 중시하지 않는다. 그렇게 불러달라고 하지도 않는다. 프랑스에서 현대의 텔레비전 광고의 마지막에는 [윤다이]라고 회사 이름을 각인시킨다.)

권재일은 회사 이름을 바꾸는 것이 아주 불가능하지는 않다며 '(럭키)금성'과 '선경'이 각각 'LG', 'SK'로 바꾼 사례를 들었는데 틀린 말은 아니지만 설득력이 없다. 금성과 선경이 LG와 SK로 이름을 바꾼 것은 '해외무대'로 나가기 전으로 파악할 수 있다. 가령 지금 삼성과 현대에게 표기를 바꾸라고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아니, 이제 널리 알려진 LG나 SK도 이제는 회사 이름을 바꿀 수 없게 되었다. (반면 Pekin이 Beijing으로, Bombay가 Mumbai로, 버마가 미얀마로 바뀐 사례에서 보듯 지명의 경우에는 어느 정도 가능하기도 하다. 그러나 역시 힘과 품이 드는 것은 마찬가지다.)


덧말

두 가지 무지無知를 지적해야겠다. 하나는 로마자 표기를 영문 표기로 오해하는 것이다. 흔히 공문서의 이름 적는 칸에도 "(국문) / (영문)"과 같이 씌어 있다는 것에서 볼 때, 이와 같은 무지는 뿌리깊은 것이다. 『창작과 비평』2000년 가을호에 실린 서반석의 「로마자 표기법의 식민성과 탈식민성」에 실린 대로, "'영'을 'young'이라고 쓰고 '선'을 'sun'이라고 쓰고 '순'을 'soon'이라고 쓰는 '폐단'을 하루 빨리 버려야 체계적인 표기체계를 구축할 수 있다."

또 하나는 로마자 표기법에 전문가만 관여해야 한다는 생각이다. 『새국어생활』2000년 겨울호에 실린 유만근의 글 「종전 로마자 표기법의 이론과 실용상 문제점」은 그런 점에서 무척 오만하다. 로마자 표기법을 언어학자/음성학자가 주축이 되어 만들어야 하는 것은 옳지만 말무리들을 '제도'하려 하는 것은 옳지 않다. 그런 전문가적 식견으로 그는 무척 '관대'하게도 "요컨대 비전문가 작품으로서 언어학적/음운학적 미숙한 점을 많이 드러내고 있지만 그런 대로 그것은 지금까지 한국어 음성정보를 전달하는데 어지간히 기여해 왔다"고 논평하고 "이렇게 열두 가지 발음 중 어느 것 하나도 뒤쪽 모음 'ㅓ'와 비슷하지 않은데 'ㅓ'에 eo를 채택한 까닭은 무엇일까? 아마도 '서울' 영어철자 Se-oul에서 음절 경계를 잘 못 넘겨짚어 Seo-ul로 착각한 나머지 'eo'를 'ㅓ'로 여긴 것이다. Seoul이라는 철자 유래, 즉 그것이 원래 불어식으로 된 것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들이 저지른 어이없는 잘못이다. 어쨌든 'eo'를 한국인 이외에는 아무도 'ㅓ'는커녕 그 비슷하게도 발음하지 않는다."고 일갈一喝한다.

그러나 (그에게는) 불행하게도 내게 '영'을 yeong로 쓰는 편이 낫다고 알려준 사람은 프랑스 사람이었다. 한편 내가 처음에 '영'을 young로 썼더니 그는 전혀 딴판으로 발음했다. 이 하나의 사례는 위의 두 무지를 뒤엎는 사례로 내게는 소중한 것이다.
Posted by 엔디

지하철에서 무료로 배포되는 《메트로》 4월 28일자에는 한국인의 '콩글리시'에 대한 비웃음이 실렸다. 론 샤프릭이라는 성균관 대학교 영어강사의 글이었는데 그의 글을 읽고서 나는 부아가 났다.

론 샤프릭의 글 보기


그 글을 읽으며 내가 느낀 것은 그의 오만이었다. 그의 말대로 우리나라가 영어 제국주의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은 사실이다. 그리고 부끄럽게도 이북 사람들과 말이 잘 통하지 않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그렇다하더라도 그의 '충고'와 '고견'에는 완전히 동의할 수 없다. 우리가 쓰는 영어는 이미 완전히 이땅의 영어, 한국식 영어이기 때문이다.

그는 간판이나 자막, CD케이스 등에 잘못된 영어가 많으니 사용할 때는 반드시 원어민에게 물어보고 사용하라고 충고한다. 영어는 (안타깝지만) 이미 국제적으로 가장 널리 쓰이는 말이다. 영어는 각 지방에서 토착어와 융합되기도 하고 적절히 변형되기도 한다. 때문에 그 나라에서만 쓰이는 영어가 따로 있는 것이고, 그것은 별로 부끄러운 일은 아닌 듯 싶다. 물론 올바른 영어를 쓰는 것이 중요하긴 하지만 영어가 이미 국제어라면 각각의 영어가 다 대접을 받는 것이 옳지 않을까 생각한다.

생각해보자. 우리는 흔히 "영국식 영어", "미국식 영어"라고 하면서 영어를 구분한다. 예를 들면 영국에서 colour라고 새기는 단어를 미국에서는 color라고 새긴다. 영국인들이 미국인들에게 철자가 틀렸다고 무어라 할 수 있겠는가? 미국에서는 지하철을 subway라고 하고 지하도를 underground라고 한다. 영국에서는 지하철을 underground라고 한고 지하도를 subway라고 한다. 틀린 단어를 쓴다고 미국인과 영국인이 맞서겠는가? 영어는 각 지방별로 조금씩 다를 수 있는 것이다. 영어를 모국어로 쓰는 나라끼리도 이렇게 다른데 영어의 일부를 외래어로 받아들인 나라나 외국어로 쓰는 나라에서는 당연히 다를 수 있는 것 아니겠는가?

샤프릭은 "Food Bank"라는 곳은 캐나다나 미국에서 노숙자들을 위한 공짜 식당이라고 하면서 그 이름을 쓴 우리나라 분식점을 비웃는다. 그것은 북아메리카 영어권의 특수한 경우일 뿐이다. Food Bank는 Food와 Bank의 합성어일 뿐이다. Bank라는 단어 자체에 '공짜'라는 의미가 들어있지 않은 이상 그것은 다른 문화권에서 충분히 다르게 쓸 수 있는 것이다. 만약 영국에서 Food Bank라는 식당이 생겼어도 그가 비웃었을까?

"hooter's"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영어사전에서 hooter를 찾으면 "① 야유하는 사람 ② 올빼미 ③ 기적, 경적, 사이렌 ④《영俗》코" 정도로 나온다. hooter's가 미국에서 스트립쇼를 하는 곳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은 미국 내에 있는 상호일 뿐이다. 그런 논리라면 미국에서 'Reader'라는 이름의 도서대여점이 있다면 한국에서도 'Reader'는 도서대여점의 상호로만 쓰여야만 할 것이고, 미국에서 PLAYBOY가 누드잡지이므로 한국에서도 PLAYBOY는 누드잡지여야만 할 것이다. 그는 자신이 익숙하지 않은 것에 대해서 용인하지 못하는 듯 하다. 샤프릭은 아무런 필연적 연관이 없는 것을 필연적인 것으로 오인하고 있는 것이다.

작가이자 번역가인 안정효 선생도 OK Corral이나 "-Barn"같은 식당을 보면서 영어도 모르고 만들었다고 비웃은 적이 있다. 가축우리corral에서 밥을 먹는다느니 헛간barn에서 밥을 먹는다느니하면서 말이다. 그러나 그것은 안정효 선생의 무지無知에서 비롯된 것이다. OK Corral은 정작 미국계 레스토랑 체인점이고, 미국에도 Angus Barn같은 식당이 있었던 것이다. 또, 3대 피자 체인의 하나인 피자헛의 'hut'역시 '오두막'이나 '군용 임시 막사'라는 뜻에서 '교도소의 독방'이라는 뜻까지 가지고 있는데, 3억의 미국인들은 교도소 독방에서 피자를 먹는 셈이 되고 말 것인가?

'우리 은행'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Woori와 Worry는 충분히 다른 것인데도 "Woori More Card는 더욱 걱정스러운 카드"라고 엉터리 번역까지 해가며 비웃는 데에까지 이르면 우리는 거의 그의 교양 수준까지 의심하게 된다. 하긴, 샤프릭 같은 교양수준의 사람들이 미국에 많을 것이므로 이를 염려하여 그의 '고견'대로 'Our Bank'로 표기하는 것이 좀더 나았을 것 같기는 하다. 일찍이 '쌍용'이 'Double Dragon'을 포기하고 'SSANGYONG'으로 표기하고 '쿨피스'가 'Cool Piss'를 포기했듯이 말이다.

다 알다시피 말은 '언중言衆'들의 것이다. 영어가 한국으로 왔다면 한국의 언중들에 의해 일정부분 변화를 거치는 것이 당연한 일일 것이다. 영국의 영어가 미국로 가면서 변화를 겪었듯이 말이다. 비록 본래의 문법에 맞지 않는 부분이 있더라도 특정 지역 내에서만 사용된다면 전혀 문제가 없는 것이다. 언어에 대한 기본적인 인식조차 갖지 않은 수준의 사람이 이땅에서 대학 영어 강사를 하고 있는 것은 영어 제국주의 시대의 슬픈 현실이다. 영어를 가르친다면 적어도 영미 문학이나 언어학에 대한 기초적인 소양정도는 있어야 할텐데 말이다. 더구나 그런 이가 우리를 오만하게 비웃기까지 한다면, 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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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서론

새삼스러운 일은 아니지만, 국제 사회에서 영어의 중요성이 점차로 강조되고 있다. 이미 여러 나라에서 영어를 공용어로 지정했으며, 공용어로 지정하지 않은 나라에서도 제 1외국어로 영어를 배우는 비율이 매우 높다(복거일 1998, 170-171). 이 때문에 최근 우리 나라도 '영어공용화론'이라는 논쟁이 있었고, 잠재적으로는 지금도 상반된 주장들이 존재하고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국제적으로는 영어를 배우는 인구가 점차로 늘고 있지만, 영어를 경계하는 목소리도 높다. 그것은 아마 미국에 대한 견제의 일부일 것이라 생각되는데, 모든 것을 경제의 논리로 환원시키는 신자유주의 논리가 거기에 스며있다. 그러나, 김종명이 인용한 독일 총리 게르하르트 슈뢰더의 "문화를 단순히 경제적 요인으로 격하시켜서는 안 됩니다."라는 발언(원윤수 2000, 149)에서 보듯이, 문화를 경제의 논리로만 판단하는 것은 옳은 태도가 아니다. 어떤 문화를 가장 잘 대변할 수 있는 것은 다름이 아니라 언어이다. 프랑스에서 최근 시행한 조사에서는 질문 대상의 69%가 프랑스어가 가장 중요한 문화재라고 답하였다고 한다(김춘미 1997, 88). 이 언어가 경제의 논리에 지배되려는 경향으로 기울어진 것이 눈에 띄기도 한다. 우리 나라에서 '영어공용화론'을 최초로 공론화시킨 복거일도 경제의 논리를 주로 그 논거로 펴고 있다.

약소국인 우리 나라의 경우에는, 막강한 경제력과 이를 위한 효율성을 무기로 한 영어에 대한 의존도가 상대적으로 높을 수밖에 없다. 이에 영어의 영향력은 점차 커지고 있다. 이 현상이 과연 바람직한 것인지, 아니면 새로운 길을 찾아야하는지를 자세히 알아보는 작업이 필요할 것 같다. 이런 작업에서 프랑스처럼 자기 언어에 깊은 관심을 기울이고 그 관심을 구체적으로 정책에 반영하고 있는 나라에 대한 참고는 필수적일 것이며, 또한 그런 나라를 곧이 따라해서도 안 될 것이다.


II. 프랑스의 경우

프랑스의 경우에도 영어는 하나의 문제거리였다. 일터에서 쓰이는 영어가 점차로 많아지게 된 것이다(김종명 2000, 148). 에띠앙블Etiemble 교수같은 사람은 프랑스인들의 무절제한 영어사용을 개탄하여 조롱조로 프랑글레franglais라는 표현을 만들어 쓰기도 했을 정도다(주경복 1996, 46).

프랑스의 경우, 프랑스어가 차지하는 비율은 적지 않다. 그들은 독일이나 우리 나라처럼 민족이라는 개념이 없으므로, '프랑스어를 쓰는가'가 문화와 나라의 중요한 기준이 된다. 단적인 예로, 문학을 들어보면 이렇다. "프랑스 문학"이라고 하는 것은 "프랑스 사람이 쓴 문학"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프랑스어로 씌어진 문학"을 가리키는 것이다(송면 1996, 10; 송면 1973, 14-15).¹ 이렇게 중요한 프랑스어가 'DDD(Donald Duck Dialect)'에 의해 '오염'되고 있으니 프랑스의 정책이 이를 막는데 기우는 것은 당연한 것으로 보여진다.

1994년, 프랑스의 문화부 장관이었던 자끄 뚜봉Jacques Toubon은 프랑스어 보호를 위해 이른바 '뚜봉 법Loi de Toubon'을 제시하였다. 그것은 영어의 영향력을 막기 위한 것이 그 주목적이었다. 이 '뚜봉 법'에 대한 입장은 크게는 두 가지, 조금 더 세분하면 세 가지가 있을 수 있다. 찬성, 제한적 찬성, 반대가 그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찬성하는 사람과 반대하는 사람의 근거가 하나로 같다는 것이다. 둘 다 '언어의 획일화에 대한 반대'라는 주장을 하고 있다. '뚜봉 법'을 반대하는 사람들의 입장은 당연히 "프랑스 내에서 불어만 쓰라는 것은 언어의 획일화"이며, "언론 자유를 침해하는 것"이라는 것이다(이원복 1996, 196-197). 또, 찬성하는 사람은 찬성하는 사람대로 '뚜봉 법'의 취지는 "영어를 통해 진행되고 있는 획일화 및 미국 중심의 패권주의에 대한 경계"라며, 이는 언어의 획일화가 아니라 언어의 다양화를 위한 필수적인 선택이라고 주장하고 있다고 안근종은 전하고 있다(원윤수 2000, 59). (그런데 이 '뚜봉 법'은 3,500개의 영어 단어 사용을 금하고 이를 프랑스어로 대체했는데, 사용과정에 억지가 많이 눈에 띄기도 한다. 이를테면 청바지Jean를 님Nîmes 산産 천 바지pantalon en toile de Nîmes라고 하는 것과 같은 억지이다(이원복 1996. 202-203).)

사실 프랑스는 특유의 똘레랑스tolérence 정신으로 상대적 소수자들을 용인해주고, 소수문화에 대한 보호정책을 펴고 있다. 당연히 다양한 인류 문화의 소중한 재산이며, 서로 다른 세계관의 거울(Humboldt)이라는 언어에 대한 다양화 정책은 당위성을 가진다고까지 할 수 있다. 그런데, 왜 영어에는 이렇듯 과민반응을 보이는 것일까? 그것은 아마도 영어가 경제의 논리를 가지고 들어오기 때문일 것이다.


III. 우리 나라의 경우

우리 나라에서는 복거일과 민족주의자들이 영어공용화에 대해 치고받는 소모적인 논쟁을 하긴 했으나 실제적으로 논의된 것은 없었다. 그것은 지극히 비생산적인 논쟁이었다.

복거일은 21세기가 되면 영어가 '지구 제국'의 명실상부한 공용어가 될 것이고, 그 때가 되어 정보의 한 가운데 있기 위해선 인터넷 등에서 가장 많이 보는 말인 영어를 잘 해야 우리가 '지구 제국'의 중심부에 위치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는 번역 등에 들이는 수고를 다른 쪽, 즉 생산적인 쪽으로 돌리면 훨씬 더 효율적일 것이라는 주장이다(복거일 1998, 179; 189-190).

반면 민족주의자들은 언어야말로 우리 민족을 나타내주는 가장 확실한 표식이라고 주장하면서, 복거일을 제지하고 나섰다. 「민족의 생명」(정소성, 『중앙일보』1999년 11월 29일), 「민족의 얼이 담겨있는 그릇」(현택수, 『조선일보』1999년 8월 31일), 「한국어에는 한국 민족의 역사와 전통과 정서가 담겨 있다」(박강문, 『새국어 생활』2000년 봄호), 「노예로서 편하게 사느냐, 경제적으로 어렵더라도 주인 노릇을 하면서 제멋대로 사느냐」(한영우, 『조선일보』1998년 7월 10일), 「어머니가 문둥이일지라도 클레오파트라와 바꾸지는 않을 것」(이윤기, 『조선일보』1998년 7월 13일) 등 제목만 보아도 민족주의의 열정이 풍기는 글들이다.


IV. 해결책은?

하지만 이쯤에서 다시 한 번 짚어야 할 것은, '문제'는 '양쪽 중에 어느 쪽이 옳은가'가 아니라는 점이다. 우리의 목적은 최선의 방법과 최선의 해결책을 찾는 것이다. 양쪽에서 좋은 점을 뽑아 보다 나은 해결책을 찾아가는 것이 우리의 할 일이다.

여기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언어와 사회와의 관계를 다시 생각하는 것이다. 언어가 그 언어를 사용하는 나라의 국민 정신과 국민성을 반영한다는 것은 훔볼트Humboldt의 언어관이고, 언어가 인간의 경험을 단지 반영만 하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경험들을 규정짓는 역할을 한다는 것은 사피어Sapir의 가설이지만, 주변 환경(사회)과 언어가 "관련이 있다"고 하는데 대해서는 이견異見이 없어보인다. 노암 촘스키Noam Chomsky도 "언어는 인간을 규정하는 핵심요소"라고 하여 이를 뒷받침해주고 있다(한학성 2000, 58). 에스키모의 말에 '눈[雪]'을 지칭하는 각기 다른 단어가 많이 눈에 띄고, 우리말에 rice에 해당하는 말―벼, 쌀, 밥 등이 많이 보이는 것은 이를 뒷받침해주는 논거로 흔히 사용되는 것 중 하나이다. 이와 관련하여 사회와 언어 어느 하나가 우위를 점하고 다른 하나에 일방적인 영향을 끼친다고 생각하여 논란의 대상이 되었으나, 사실은 안근종이 지적하는 바와 같이 사회와 언어는 서로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고 서로를 변화시키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원윤수 2000, 52-56). 즉, 사회가 변하면 이에 따라 언어도 변하게 되고, 반면 언어가 변하면 사회도 변하게 된다는 것이다.

언어는 변한다. 사회는 늘 변하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특히 언어는 외부와의 접촉에서 가장 많이 변하는데, 그것은 두 문화의 접점에서는 상대 문화와 자기 문화의 서로 상이한 부분을 많이 목격하기 때문일 것이다. 컴퓨터와 같은 "새로운 문물"들이 그 예이다. 이런 "새로운 문물"들이 들어오면서 이를 표현하는 말도 같이 들어오게 된다. 여기서 또다시 주의해야할 것이 있는데, 언어가 변하는 것은 언어의 "타락"과는 관계가 없다는 것이다. 남기심들(1997, 4)이 말했듯 "옛말이 타락해서 오늘날의 말이 되는 것이 아니고 변화해서 달라지는 것일 뿐이다." 이것은 다른 문화와의 접촉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설령 우리가 접촉하는 대상이 소위 '굉장히 발달되지 못한' 문화를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 때문에 우리의 문화의 질이 위협받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본질적으로 문화는 어느 한 쪽이 다른 쪽보다 낫다고 하는 판단이 어렵기 때문이다. 실제로 레비-스트로스는 지질학의 비유를 들어, 아주 오래된 암반층이 최근에 형성된 암반층과 함께 있을 때 고대의 암반이 현대의 암반에 비해 열등하지 않은 것처럼, 흔히 '원시적'이라 일컬어지는 문화·관습이 열등한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Leach 1998, 37). 또, 남기심들도 "미개사회(未開社會)의 언어는 미개하고, 문명사회의 언어는 더 발달되고 복잡한 구조를 가졌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이것도 잘못된 생각이다. 문화의 발전도(發展度)와 언어구조의 추상성이나 복잡성의 정도와는 아무 관계가 없다."고 말한다(남기심 외 1997, 3). 그리고 그 각기 대등한 문화 중에서 가장 확실하게 구분되며 가장 총체적인 문화는 바로 언어이다. 다시 말해, 언어는 "문화는 우열을 가릴 수 없다"는 주장의 가장 핵심적인 예가 되는 것이다.

언어가 가지고 있는 이런 변별성은 언어의 특징에 그 기반을 두고 있다. 모든 각 언어는 서로 다르게 구조적으로 분절되어 있다. 그런 분절은 언어마다 다르다. 예를 들면 눈[雪]에 대한 어휘가 이례적으로 많은 에스키모 족의 언어와 영어를 비교할 때, 에스키모 족이 눈에 대한 어휘수가 많으므로 영어보다 우등하지 않은 것과 같다. 또, 프랑스어의 fleuve(강)와 rivière(하천)라는 단어에 대응하는 영어의 단어는 각각 river과 stream이지만, 양 언어 내에서 두 단어를 분절하는 양식이 다르다. river와 stream은 순전히 강의 크기에만 관련된 것이지만, fleuve와 riviere는 바다로 흘러가는 강fleuve과 바다로 직접 흘러들지 않는 강rivière이라는 식으로 다르게 분절하고 있다. 때문에 불어의 fleuve와 영어의 river는 비슷한 말이긴 하지만 꼭 같지는 않다(Culler 1998, 37-38). 어느 쪽이 더 나은 언어인가? 양쪽의 언어가 모두 필요하다.

한 언어 내에서도 마찬가지다. 우리의 언어 습관에서 주로 쓰이는 '사라'라는 표현을 '접시'로 바꾸자는 주장이 오래 있어왔지만 사실은 '사라'와 '접시'는 그 쓰임이 다르다. '사라'는 큰 접시를 의미한다(복거일 1998, 131-132). 말이 이미 들어와 이런 지위를 획득하고 있는데 이를 언어의 '순수성'을 위해 없애버리는 것은 옳지 않다. 게다가 이런 행위는 통시적인 것을 공시적인 것에 적용하는 사례가 되기도 한다. 드 소쉬르(1990, 99)에 따르면 "언어는 그 구성요소의 순간 상태 이외에는 그 어떤 것에 의해서도 규정될 수 없는 순수한 가치 체계"이기 때문이다. 앞에서 말했듯이, 언어는 본질적으로 우열을 가릴 수가 없는 것이기 때문에, '순수한' 언어도 다른 언어나 문화와의 접촉을 통해 몸바꾼 언어보다 열등한 언어가 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언어는 사회를 반영할 줄 알아야 하는데 '순수한' 언어는 그런 역할을 할 능력이 부족하기 때문에 사회와 서로 충돌하게 되고, 급기야는 그 사회와 서로 맞지 않게 되어 버려지게 될 뿐이다. 그것은 하나의 '문화지체cultural lag'―급속히 발전하는 물질문화와 비교적 완만하게 변하는 비물질문화간에 변동속도의 차이에서 생겨나는 사회적 부조화―이다.


이 시점에서 밀려들어오는 영어를 막으려는 사람들의 노력은 그 빛이 바랜다. 그들은 '문화지체'를 일부러 조장하려는 사람들이 되어버리고 만다. 그들의 행동근거인 "언어의 다원화"도 마찬가지다. 언어의 다원화를 위해 다른 언어를 규제한다는 것은 그야말로 어불성설語不成說이다. (이를테면, 파시즘을 규제하는 전체주의가 옳은가?) 하지만, 실제로 영어가 가지고 있는 모습은 기존의 '문화접변', '문화변동'의 양상과는 다른 모습으로 다가왔기 때문에 영어의 '침입'에 반대하여 이를 규제하는 것도 어느 정도의 설득력을 가지고 있다.

지금 영어가 들어오는 출입구는 문화가 아니다. 영어는 경제의 문을 통해서 들어오고 있다. 다시 말해서, 문화의 하나로써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가장 효율적인 '도구'로 들어오는 것이다. 이것은 어떤 의미에서 언어의 강제이다.

우리의 경우, 일제 시대에 소위 '민족말살정책'이라는 것을 겪었다. '창씨개명'과 '조선어 탄압'을 주로하여 민족의 얼과 혼이 담긴 우리말을 없애려 했던 것이다. 여기서 '얼'과 '혼'은 문화이다. 우리 민족의 문화와 사상과 생각이 담긴 것이 우리말인데, 이를 뿌리채 뽑으려 하는 것은 언어에 대한 강제의 모습이다. 이것은 '문화접변'에 의한 것이 아니라 '정치적 강제'라 할 수 있다. 이것이야말로 언어(또는 문화)의 다양성을 방해하는 가장 대표적인 예라 하겠다.

영어의 경우에는 좀더 위험한 모습으로 오고 있다. 이에 대해 안근종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원윤수 2000, 59-60).

―또 한가지 주목할 점은 오늘날 영어의 침탈 현상에는 이전의 언어 침탈 현상처럼 정치적 이유가 직접적으로 드러나 있지 않다는 점이다. 일반인들이 보기에는 세계화와 표준화의 영향으로 영어에 대한 수요가 자연스럽고 당연하게 증대되는 것으로 비칠 수 있다. 이러한 사실은, 침탈을 받고 있는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이 침탈 현상이 지닌 위험을 간과하도록 만들기 때문에, 이에 대응하는 방안 또한 종래와는 다른 성격을 띨 수밖에 없다.

음모론적인 사고가 글을 지배하고 있는 듯한 모습이지만, 결코 간과할 수 없는 부분을 지적했다. 영어의 유입('침탈')에는 강제성이 보인다는 것이다. 이것은 영어가 문화의 다양성을 무시하고 있다는 것과 같은 소리이다. 분명히 프랑스말과 영어와 우리말은 각기 다른데, 어느 하나가 "경제적으로" 더 편리하다는 이유에서 다른 말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언어는 단순한 도구가 아니라, '생각과 사상을 담는 틀'이기 때문이다.

문화의 하나이며 언어와 가장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문학을 예로 들어보자. 가령 서정주의 「자화상」의 경우에 이를 영역하였을 때, 과연 한 편의 시로써 손색이 없을 것인가? 문학평론가 유종호는 「자화상」과 이의 영역본과 일역본을 대조하여 영역본과 일역본이 잃고있는 시적 함의들을 밝히고 있다(유종호·최동호 1995, 131-135).

"파뿌리같이 늙은 할머니" "풋살구" "흙으로 바람벽한 호롱불" "손톱이 깜한 에미" "甲午年" "外할아버지" "八割이 바람" "병든 수캐"와 같은 심상은 우리의 전통적인 삶과 그 터전에 밀착되어 있는 이를테면 기층적(基層的) 심상의 말들이다.

이런 말들이 가령 영역본에 있는 대로 "withered and pale as leek root(파뿌리같이 늙은 할머니)", "green apricots(풋살구)", …, "the year of reforms(甲午年)", "it is wind that has raised the better part of me(八割이 바람)" 등으로 완전히 치환된다고 볼 수 있는가? 그것은 불가능하다. 영어는 영어를 모국어로 하는 사회와 문화에서 매우 훌륭한 언어이지만 그것이 한국의 상황과 문화와는 맞지 않는 것이다. 프랑스에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물론, 영어 스스로도 아마 이런 한계에 부딪혀 세계 유일의 언어가 되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정책은 혼란을 미연에 방지할 의무를 가지고 있다. 때문에 정책적으로 영어를 일뷰 규제하는 것은 옳은 일이라 할 수 있겠다.


V. 결론

영어는 결국 어느 나라의 말도 완전히 잠식하지 못한다. 하나의 언어가 다른 모든 언어를 대신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하지만, 사람들이 그것을 실제로 깨닫는 것은 지금보다 훨씬 뒤일 것이며 그 때에는 혼란만 더 생기게 된다. 때문에 정책적으로 영어를 일부 규제하여 문화적 다양성을 유지하며, 영어도 또한 그 다양성 정책의 일환으로 보호받아야 한다.

중요한 것은 지금부터 해야할 일이다. 영어에 대한 규제가 어느 정도가 적당한지에 대한 구체적인 규제안 마련은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다. 지금부터는 에너지를 그쪽으로 쓰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인터넷은 문제가 없어 보이지만, 청바지를 도포바지라고 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코너 킥'을 '구석차기'라고 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태권도에서 '겨루기'는 어느 나라에 가도 '겨루기'이다. 또 똘레랑스tolérance를 '용인'으로 옮기는 사람도 있지만 이것이 과연 본의를 제대로 표현하고 있는지를 생각해 봐야 할 것이다. 이런 문화적인 접촉으로 생긴 용어들까지 규제하는 것은 옳지 않고 단순히 경제성이나 효율성만을 따진 용어는 규제하는 것, 이것이 영어 규제의 한 기준이 되어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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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엔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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