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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복이 「다시 봄이 왔다」에서 "기다리던 것이 오지 않는다는 것은 누구나 안다 누가 누구를 사랑하고 누가 누구의 목을 껴안 듯이 비틀었는가 나도 안다 돼지 목따는 동네의 더디고 나른한 세월"이라고 울부짖었을 때도 나는 기다리고 있었다.


《버스 정류장》도 기다림에 대한 연극이다. 이 작품이 자주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와 비교되는 이유는, 이 기다림의 시간이 흡사하고, 기다려도 오지 않는 고도와 버스가 비슷한 역할을 수행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두 작품이 펼쳐지는 공간 또한 상당히 흡사하다.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이 고도를 기다리는 장소는 나무 한 그루가 서 있는 시골이고, 《버스 정류장》 역시 '버스 정류장車站' 팻말이 서 있는 시골길이다. 또, 두 작품의 공간은 연극 내내 바뀌지 않는다; 두 작품의 공통점은 여기까지다.


두 작품의 가장 분명한 차이점은,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의 기다림에는 목적이 없는 반면 《버스 정류장》의 등장 인물들은 저마다의 목적을 가지고 버스를 기다린다는 점이다.

이들은 자신들이 가진 목적만큼 불행하다. 다시 말하자: 그들은 모두 자신의 존재만큼 꼭같이 불행하다. 가령 요구르트를 마시러 가는 불량배의 초조함은 한 남자와의 첫 약속에 나가는 처녀나 챔피언과 장기를 두기로 약속을 했다고 주장하는 노인의 초조함보다 못하지 않다; 그는 누구보다 먼저 시내에 가기 위해 버스 정류장에서 새치기까지 일삼는다.

시간은 이들이 목적을 가진 만큼 중요하다. 가령 대입 시험을 준비하는 청년이 시계를 보고 놀라는 이유는 그가 시내에 가려는 목적이 시간과 무척 깊은 연관이 있기 때문이다. 이들의 목적을 좌절시키는 사건이 시작되면서 사람들은 고통스러워 몸부림친다. 어떤 이들은 돌아가려고까지 한다. 그들에게 시간은 붙잡아두어야만 할 것, 도대체 잡을 수가 없는 것이다. 시간 공포증chronos-phobia이다.

그들의 목적 자체가 시간이었다. 한 남자를 만나 사랑하는 일, 훌륭한 제자를 길러 자신의 손재주를 전하는 일, 남편과 자식을 주말마다 만나며 삶을 이어나가는 일, 차후의 시간을 지배할 대학 입학 시험을 준비하는 일 따위는 모두 그들이 '시내'에 가서 해야 할 일은 시간을 소모하는 일임을 보여준다. 그뿐이 아니다. 불량배가 먹으러 가는 요구르트는 우유에 시간을 들여 시큼하게 발효시킨 음식이다; 연극은 시간이야말로 우리 존재의 조건임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특히 주의를 끄는 것은 노인의 목적이다. 노인은 장기 챔피언이라는 사람과 장기를 두러 시내에 간다고 했다. 여기서 립 밴 윙클Rip Van Winkle 형의 선경설화仙境說話를 떠올리는 것이 무리일까. 장기가 바둑과 차이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평생을 장기만 두어온 노인의 장기 대국은 그 자체로 '도끼자루 썩는 줄 모를' 구경거리임이 틀림없다. 비가 오자 노인은 보이지 않는 장기알들에게 명령한다: "사 막고 궁 앞으로! 궁 막고 차 앞으로! 차 막고 마 앞으로! 장이야!" 그의 말대로 장기는 심심풀이가 아니라 정신을 다하여 두는 것이다. 그 안에 시간의 비밀이 숨어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시간은 그들을 구속하고 있다. 이를 극복할 방법은? 나로서는 작가가 사랑을 믿고 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시간의 흐름으로 생을 망쳐버린 청년과 사랑을 포기해야만 했던 처녀는 서로 사랑을 나눈다. 행복한 사람, 처녀는 말한다: "시계를 보지 말아요." 불량배는 시간을 허비하지 말라는 충고를 듣고 목수로부터 기술을 배우기로 한다. 잠깐만에 그들은 무척 돈독하게 사랑하는 하나의 공동체가 되어 버스 정류장에 선다. 삶이 어느 '시간'부터 잘못되어 꼬이기 시작했는지 모르겠지만, 그들은 자못 씩씩하게 신발끈을 조인다. 그들은 잠시 멈칫하지만, 결국 출발하고 말 것이다. 거기에서, 더이상 기다릴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버스 정류장車站》
작作 가오싱젠
연출 임경식
극단 반도
대학로 극장
Posted by 엔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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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린느
"솔직히 말해서 연인들이란 모두 돌았어요!"
- 몰리에르, 「따르뛰프 혹은 위선자」

Dorine "À vous dire le vrai, les amants sont bien fous!"
- Molière, Le Tartuffe ou L'Imposteur


명언이다,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맞는 말이다.
가끔 이렇게 몰리에르 선생을 존경하게 된다. 하긴 말하고 나면 아무것도 아닌 것 같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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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도Godot'는 죽음이다. 도대체 사람이 이생에서 죽음말고 무엇을 기다릴 수 있단 말인가. 이성복이 삶이란 '집으로 가는 길'이라고 했던 것처럼 고도기다리기 역시 '집으로 가는 길'이다. '집'에 도달하면 그들은 살게(즉, 죽게) 된다.

블라디미르 내일 목이나 매자. (사이) 고도가 안 오면 말야.
에스트라공 만일 온다면?
블라디미르 그럼 살게 되는 거지.
-『고도를 기다리며』오증자 옮김, 민음사, 2000, 158쪽.


그러나 그들이 아무리 죽기를 바라고 목을 매달아도 그들은 죽을 수 없다.

에스트라공 그렇다면 당장에 목을 매자.
블라디미르 나뭇가지에? (둘은 나무 앞으로 다가가서 쳐다본다) 이 나무는 믿을 수가 없는걸. (24쪽)


그곳은 '죽지 못하는 곳'이다. 에스트라공이 "그런데 아무 일도 일어나지지 않는군."(61쪽), "그래 반가우니 이젠 무얼 한다?"(101쪽), "이젠 뭘 한다?"(127쪽)라며 매차례 푸념할 때, 그는 영원성에 대해서 푸념을 퍼붓는 것이다. 그는 아주 "제일 좋은 길은 날 죽여주는 거다."(104쪽)라고 말하기도 한다.

고도는 매일의 약속을 연기한다. 그는 저녁에 메신저(소년)을 보내 사람들에게 자신의 약속을 미룬다. 여기서 '미룬다'는 것은 오늘은 아니라는 뜻이겠지만, 좀더 구체적으로는 오늘이 아닌 날은 아니지 않다는 것이다. 고도는 자신의 약속을 미룸으로써 자신의 약속을 가장 효과적으로 상기시키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아마 잠을 말하는 것일까?) 이런 '미룸-상기'의 기술에 말려들어 그들은 고도에게 "꽁꽁 묶여 있는" 삶을 살게 되는 것이다. (27/30쪽)

포조와 럭키 역시 죽음과 무관하지 않다. 그들이 '귀머거리'가 되고 '벙어리'가 된 것이 다른 무엇도 아니고, 우연에 기초한 원인없는 결과라는 점은 죽음의 속성을 가장 잘 나타내 주는 것이다.

포조 어느 날 깨어보니 캄캄하더란 말이오. 마치 운명처럼. (사이) 그래서 지금도 나는 혹시 내가 잠을 자고 있는 게 아닌가 의심이 들 때가 있다오. (144-145쪽)

포조 묻지 마시오. 장님에겐 시간 관념이 없는 법이오. (사이) 그리고 시간과 관계되는 건 다 모른다오. (145쪽)

포조 (버럭 화를 내며) 그놈의 시간 얘기를 자꾸 꺼내서 사람을 괴롭히지 좀 말아요! 말끝마다 언제 언제 하고 물어대다니! 당신, 정신 나간 사람 아니야? 그냥 어느 날이라고만 하면 됐지. 여느 날과 같은 어느 날 저놈은 벙어리가 되고 난 장님이 된 거요. 그리고 어느 날엔가는 우리는 귀머거리가 될 테고. 어느 날 우리는 태어났고, 어느 날 우리는 죽을 거요. 어느 같은 날 같은 순간에 말이오. 그만하면 된 것 아니냔 말이오? (더욱 침울하게) 여자들은 무덤 위에 걸터앉아 아이를 낳는 거지. 해가 잠깐 비추다간 곧 다시 밤이 오는 거요. (149-150쪽)


이런 면에서 고도는 죽음이고 그들은 인류의 대표라고 할 수 있겠다. 아스트라공과 블라디미르는 '인류의 대표'이고 포조는 '인류 전체'다. 짐작컨대 럭키나 소년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블라디미르 […] 방금 들은 살려달라는 소리는 인류 전체에게 한 말일 거야. 하지만 지금 이 자리엔 우리 둘뿐이니 싫건 좋건 그 인간이 우리란 말이다. 그러니 너무 늦기 전에 그 기회를 이용해야 해. 불행히도 인간으로 태어난 바에야 이번 한 번만이라도 의젓하게 인간이란 종족의 대표가 돼보자는 거다. (133쪽)

에스트라공 다른 이름으로 불러보면 어떨까?
블라디미르 아주 뻗은 건 아닐까?
에스트라공 그럼 재미있을 거다.
블라디미르 뭐가 재미있어?
에스트라공 다른 이름으로 불러보는 게 재미있겠단 말이다. 아무 이름이나 차례차례로 말야. 그럼 시간이 잘 갈 거다. 그러노라면 진짜 이름이 나오겠지 뭐.
블라디미르 포조가 저자 이름이래도.
에스트라공 이제 두고보면 알 게 아냐? 자…… (생각한다) 아벨! 아벨!
포   조 이쪽이오!
에스트라공 그것 봐.
블라디미르 이런 짓거리에는 이제 넌더리가 난다.
에스트라공 또 한 놈의 이름은 카인일 거다. (부른다) 카인! 카인!
포   조 이쪽이오!
에스트라공 그러면 인류 전체다. (140쪽)


이렇게 장광설을 늘어놓았지만 사실은 모두 거짓이다. 고도가 빵이네 희망이네 통일이네 자유네 많은 소리가 있지만, 영어 God(신神)과 불어 Dieu(신神)의 합성이라는 주장도 있지만, 그걸 도대체 누가 알 수 있단 말인가? 베케트 자신이 "내가 그걸 알았으면 작품에다 썼을 것"이라는 말을 익살스러운 대답으로 받아들인다 하더라도 그가 그것을 알고 썼으리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오히려 기다리는 행위 그 자체다. 그것이 인생이다, 라고 나는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고도를 기다리며
사무엘 베케트 지음, 오증자 옮김/민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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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단 산울림의 《고도…》가 세계적으로 호평을 받았다는 소리도 들은 바 있고 해서 기대를 상당히 했는데, 그 기대가 전혀 깨어지지 않았다. 처음부터 끝까지 조금의 흠도 없이 진행된 연극은, 거의 세 시간이나 되는 긴 연극이었는데 전혀 지루하지 않았다.

예상과는 무척 다른 연극이긴 했다. 그건 나의 고정관념 때문에 텍스트를 잘못 읽어서 생긴 문제였다. '실험극', '부조리극' 따위의 말 때문에 나는 이 연극이 으례 지루하고, 시종 비장감을 줄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실제로 베케트의 '고도…'는 비장한 극이라기보다는 일종의 희극이라고 보는 편이 옳을 것이라고 이 연극을 보고 동의하게 되었다. 그리고 여전히 이것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형식이다. 비극적인 희극 혹은 희극적인 비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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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은 거의 완전히 원작을 실제로 구성해냈다. 내가 원작에서 특히 주목했던 부분은 대사들의 리듬이었다. 물론 원작에 특별히 meter라고 할 만한 것은 없다. 혹시 있다고 해도 번역과정에서 사라졌기가 쉬울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는 대사들이 '운율'이 없이도 한 권의 시집처럼 리듬감있게 진행되고 있었다. 번역의 뛰어남과 연출·연기의 뛰어남이 함께 있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에스트라공 그런데 우리가 그자한테 정확히 무슨 부탁을 했지?
블라디미르 너도 같이 있었잖아?
에스트라공 난 정신을 안 차렸거든.
블라디미르 저― 딱히 뚜렷한 건 없었지.
에스트라공 일종의 기도였지.
블라디미르 맞아.
에스트라공 막연한 탄원이었고.
블라디미르 그렇다고 할 수 있지.
에스트라공 그래 그잔 뭐라고 대답하데?
블라디미르 좀 두고 보자는 거야.
에스트라공 아무것도 약속은 못하겠다는 거군.
블라디미르 생각을 해봐야겠다는 거지.
에스트라공 맑은 정신으로.
블라디미르 가족들하고 의논도 하고.
에스트라공 친구들하고도.
블라디미르 지배인들하고도.
에스트라공 거래상들하고도.
블라디미르 자기 장부하고도.
에스트라공 은행 통장하고도.
블라디미르 그래야 결정을 내리겠다는 거지.
에스트라공 그건 당연하지.
블라디미르 하긴 안 그렇겠니?
에스트라공 그런 것 같군.
블라디미르 내 생각도 그렇다.

-『고도…』, 25-26쪽.

여기서의 대화의 리듬은 두 사람이 단어들을 주고받는 데서 확연히 드러난다. 이 장면에서 그들 두 사람이 말한다고 하는 것보다는 말이 '튀어나온다'고 하는 편이 좀더 정확한 설명이 될 것이다.

에스트라공 가자.
블라디미르 갈 순 없다…….
에스트라공 왜?
블라디미르 고도를 기다려야지.
에스트라공 참 그렇지. (81쪽)

이 대사는 연극 전편에 걸쳐 계속 나오고 있는데, 블라디미르가 오금을 굽혀앉으며 "고―도를 기다려야지―"라고 대답하면 에스트라공은 합장을 하며 "참! 그렇지!"한다. 번역자 오증자가 말한 것처럼 이 대화는 '교향곡의 모티브'처럼 계속되어 "기다림에 이유와 활기를 부여한다." 그러나 그런 "이유와 활기"는 그것이 단지 계속된다는 점에서 부여되는 것은 물론 아닐 것이다. 그런 면에서 임영웅의 연출은 베케트의 극에 대한 충실한 이해를 바탕으로 한 훌륭한 연출이다.

럭키의 그 유명한 장광설도 잘 읽어보면 그러니까 잘 들어보면 어떤 리듬이 거기에 숨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것은 어떤 구두점이 없음에도 대략 길이가 일정하게 설정된 어구의 길이에 기인하는 것이기도 하고, "인체체체", "아카카카데미", "설설설정"(이상 69쪽) 처럼 흐르는 리듬을 끊는 장치에 의거하기도 하는 것이다. 또 럭키의 장광설은 생각을 시작하게 되면 외부로부터의 치명적인 강압이 없이는 그가 말을 그만두려 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역시 그 리듬감과 리듬의 관성을 충분히 우리가 느낄 수 있는 것이다. 임영웅은 이를 치밀하게 계산하여 '생각' 이전에 일정한 휴지休止를 둠으로써 그 리듬감을 극대화시키고 있고, 더구나 굉장히 빠른 '생각'을 통해서도 리듬을 전혀 망치지 않고 훌륭하게 소화시키고 있는 것이다.

김인환은 "한 권의 시집이야말로 한 편의 연극에 매우 유사한 구조를 밑에 깔고 있다"고 말한 적이 있는데, 내가 보기에도 훌륭한 연극은 그 음악성 때문에 궁극적으로 시가 되고 만다.

블라디미르 그럼 갈까?
에스트라공 가자.

둘은 그러나 움직이지 않는다. (15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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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브레히트의 '서사극 이론'이라는 전작 저술이 있는줄로 알았다. 전에 한두페이지 읽다가 치우고 읽다가 치운 책을 이틀에 걸쳐 읽었다. 글이 씌어질 당시의 정황이나 다른 희곡 작품들에 대한 지식이 필요한 글들도 조금 있어서 수월치는 않았다.

전체적으로는 지루했다. 전작 저술이 아닌 까닭에, 같은 내용이 여러 편의 논문이나 강연록에 자주 비슷한 형태로 노출되었다. 지속적으로 그가 강조하는 것은 '감정이입'에 대한 비판과 '낯설게 하기 효과Verfremdungseffekt'이다. 어떤 의미에서 그는 연기를 잘하는 배우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것 같다.

감정이입에 대해서 그가 가진 불만은 이렇다. 배우가 연기를 잘하면 잘 할수록 관객들은 그 역할에 감정이입되어 자기가 '그'인 것으로 느끼기 때문에 여러 부작용이 나타난다는 것이다. "관객은 자기가 같이 느낀느 주인공이 보는 만큼만 볼 수 있을 것이다."(59) "관객이 주인공의 감정에 이입이 되도록 그는 가능한 한 개인적인 특성을 갖지 않는 유형적인 인물이어야 했네. […] 감정 이입을 위해 준비된 인물(주인공)은 관객의 감정 이입을 위해 사실적으로 묘사하는 데 있어 상당한 손상을 입게 되네."(168) "자네들이 자네 관객들을 이미 파블로프의 개처럼 병들게 해놓았단 말이네."(177)

브레히트는 감정 이입을 일종의 최면이나 마약으로 취급한다. 그의 주장에 공감이 가는 것은―당시 연극도 연극이지만―요즘의 영화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사람들은 조금이라도 생각을 하게 하는 영화는 점점 싫어하고 아무 생각없이 듣기만 할 수 있는 것을 더 좋아한다. 생활이 하도 각박하고 힘들어서 극장에서조차 '박터지게' 생각하는 것은 너무 잔혹하다는 사람도 만나보았다. 그들은 정말 파블로프의 개가 된 것이 아닌가. 한차례 울어주고(Katharsis!), 나와서는 다시 일상으로 돌아간다... 답답하다.

브레히트는 감정이입의 대안으로 낯설게 하기 효과(생소화生疎化효과)를 든다. "새로운 기법의 원칙은 감정이입 대신에 관객에게 생소감(Verfremdung)을 불러 일으키는 데 있다."(61) 그것은 관객에게 생각할 기회를 주려는 의도이다. 낯설게 하기 효과가 잘 발휘될 때, 관객은 왜 주인공은 '이렇게 행동하지 않고 저렇게 행동할까'를 고민하게 된다. 때문에 '새로운 기법'은 관객을 직접적으로 염두에 두게 된다. 기존의 연극은 '제 4의 벽vierte Wand'이라 하여 무대의 뚫린 면, 즉 무대와 관객 사이의 공간에 벽이 있어서 나머지 세 막힌 면처럼 교류가 없다고 전제해왔다는 것이다. 그런데, 브레히트는 이 '제 4의 벽'을 없애자고 주장하고 있다. 그가 낯설게 하기 효과를 위해 제안한 새로운 연기기법은 이렇다. "1. 3인칭 화법의 도입, 2. 과거 화법의 도입, 3. 지문과 주석도 함께 읽기"(72)

배우는 관객에게 직접 말해야지 과거처럼 능청스럽게 '독백'을 해서는 안 되고, 그 자신이 맡은 역할에 몰아沒我하게 되면 안 된다. 그는 자신이 맡은 역할에 대해 "반대 의견을 표하는 자세"를 취해야 하고, 그럼으로써 그는 "그가 하지 않는 행동이 그가 하고 있는 행동 속에 포함되"(71)도록 해야한다.

브레히트가 주장하는 것은 어쩌면 작가나 배우 스스로가 작품에 대해 코멘트하는 것과 관계있지 않을까 싶다. 가령, 그의 교육극「예외와 관습」의 마지막 코러스는 "여행 이야기는 / 그렇게 끝납니다. / 당신들은 듣고 보았지요. / 일상적인 일, 늘상 일어나는 일을 당신들은 보았지요. / 우리는 그러나 당신에게 요청합니다. / 생소하지 않은 일을 의아하게 생각하시오! / 평범한 일을 설명할 수 없는 것으로 생각하시오! / 일상적인 일이 당신들에게 놀라움을 자아내야 하오. / 관습으로 알려진 일이 악습임을 깨달으시고 / 그리하여 악습을 깨달은 곳에서는 / 구제책을 강구하시오!"이다. 일상적이고 관습적인 일을 모사한 이 극은 그것을 낯설게 만든 것이었다. 그리고 작가는 거기에 대해서 '이게 이런데 어떻게 생각하세요?'라고 묻는 것이다.

그렇지만 그게 과연 좋은 효과만을 낼까? 극이나 영화가 소설보다 대중적인 것은 사실이지만, 이런 효과들은 소설에서도 적용되지 않으리라는 법은 없다. 그렇다면, 소설에서도 이런 코멘트들을 적용해야할까? 그것은 예술성의 희생이 아닐까? 브레히트가 실제 연극에 적용한 것들을 다시 한 번 찬찬히 살펴볼 일이다. 그것이 예술성의 상실로 이어지지 않았다면 다른 부분에서도 가능성이 있는 것이고...


서사극 이론
마리안네 케스팅 외 지음, 김기선 옮김/한마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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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서 밀러 지음, 성기웅과 '연인' 각색, 김재엽 연출, '연극과 인생' 공연 『크루서블Crucib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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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the Bible을 꿰뚫는 하나의 주제가 있다면 그것은 '구원'이다. 한데, 구원은 '죄sin'를 전제로 한다. 죄가 없는 한 구원은 있을 수 없다. 누가복음Luke 5장 32절은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라고 말하고 있다. 토라Torah에 기록된 수많은 율법들은 죄를 규정하고 있다. 그 최소한의 축약본이라 할 수 있는 것이 십계명인데, 그 열 가지 계명 중에 가장 보편적으로 어겨지는 사항은 제 9계명일 것이다. "네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거하지 말지니라"(출애굽기Exodus20:16, 신명기Deuteronomy5:20

진실은 긍정적인 것이고 거짓은 부정적인 것이다. 또, 삶은 긍정적인 것이고 죽음은 부정적인 것이다. 문제는 진실과 삶이 공존하지 않는 경우가 있다는 데에 있다. 진실이 죽음을 부르는 경우가 있다. 기독교의 성경을 비롯한 많은 종교의 경전들은 진실과 삶을 그들의 저울로 달아 진실의 무게가 더 무거움을 보여주고 있다. 그렇다면 사람들은 그저 진실을 선택하고 삶을 버리면 될 것 같은데 그게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다. 삶에의 욕망은 무엇보다도 강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모순적인 구도는 갈등과 번민을 만든다.

어느 마을을 하나의 광기의 도가니crucible로 몰아넣은 한 사건이 있었다. 진실은 각 사람에게 다른 모습으로 찾아가 나타났다. 그리고 각 사람은 거기에 다르게 반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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