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스또예프스끼는 병에 걸린 상태에서 꾸는 꿈은 무척이나 선명하고 강렬해서 뿌쉬낀이나 똘스또이 같은 작가들이라도 평상시에는 상상하지 못할 정도라고 말했다(Dostoevskii 2002a, 85; 2002b, 1116). 이를 뒷받침하듯 프로이트는 일관되게 꿈은 소원성취라고 말했다(Freud 2003, 162). 그에 따르면 꿈의 유일한 목적은 소원성취이며, 그것도 순전히 이기적인 소원성취라는 것이다(Freud 2003, 384). 그렇다면 병에 걸린 사람처럼 현실에 불만이 많고, 고통을 많이 겪는 사람일수록 꿈도 강렬하고 생생할 것이다. 꿈은 현실을 뛰어넘고자 하는 ‘나’의 소원이나 욕망에서 비롯된다.

글쓰기 또한 이런 소원에서부터 시작된다. 이청준은 언어사회학서설 연작의 「지배와 해방」에서 작중 인물의 입을 통해 글쓰기의 시작이 ‘복수’라고 언급하고 있다(이청준 2000, 107-118). 복수라는 것은 글을 쓰는 사람이 현실에서 대개 패배자라는 것이고, 그렇다면 작가가 글을 쓰는 이유 역시 프로이트가 앞서 꿈에 대해 언급한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결국 글쓰기--넓게 보아 작품 활동--의 목적은 소원성취다.

꿈과 현실을 구분하지 못하는 소년, 스떼판#

불행한 현실의 세계를 벗어나 충족적인 꿈의 세계로 다가가면 다가갈수록 ‘나’의 삶은 행복에 이르게 될 것이다. 여기 여섯 살 때부터 꿈과 현실을 구분하지 못하는 스떼판이라는 소년이 있다. 그의 삶은 가령 이런 식이다:

어머니 “스떼판, 오늘 왜 일하러 회사에 가지 않았니?”
스떼판 “일 했는걸요.”
어머니 “뿌셰씨가 전화를 했단다.”
스떼판 “일 했다니까요. 하루종일 일을 했어요……. 꿈 속에서요dans mon rêve.”

수면의 과학Not defined | Unknown | 0sec | f0 | 0EV | 0mm | ISO-0 | Unknown Flash:65529

꿈과 현실의 삼투. 영화 《수면의 과학》은 이 특이한 스떼판의 일상을 따라가면서 소망 내지 욕망으로서의 사랑에 대해 이야기한다.

사실 우리가 기쁨의 순간에 흔히 내뱉는 탄성은 이미 프로이트의 주장이 사실임을 인식하고 있다. 우리는 “이게 꿈이냐 생시냐”라고 묻고 자신의 팔뚝이나 허벅지를 꼬집는다. 이 “꿈이냐 생시냐”라는 말에서 우리는 꿈과 현실을 구분하기가 쉽지 않고, 그것의 삼투 현상이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는 것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약간의 착란 증세만 있다면 스떼판처럼 그 둘을 전혀 구분하지 못하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다.

한데, 이렇게 꿈과 현실의 경계를 지워나가는 이야기는, 프로이트의 명제를 뒤따라가 보면, 결국 현실 속에서 소원을 성취하고자 하는 바람에서 이루어진 것일 가능성이 높다. 꿈과 현실이 삼투되면서 현실에다가 꿈에서 성취된 소원을 하나씩 끼워넣는 것이다. 이 기묘한 나르시즘은 영화의 수용자로 하여금 스떼판이라는 이를 결코 미워할 수 없게 만든다. 왜냐하면 스떼판은 결국 자신이라는 사실을--그것을 인지하든 인지하지 못하든 간에--깨닫게 되기 때문이다.

스떼판은 멕시코인 아버지가 죽자 어머니가 살고 있는 프랑스로 돌아온다. 어머니는 뿌셰 씨에게 부탁하여 달력 만드는 회사에 그를 취직시킨다. 그러나 자신이 무척 창의적이고 예술적인 일을 하는 줄로 알았던 스떼판은 실망하고 만다. 벌거벗은 여인의 사진이 붙은 ‘바보같은’ 달력에 들어갈 글자를 풀칠하는 것이 그가 하는 일의 전부였기 때문이다. 그는 ‘재앙력Disastrology’이라는 황당한 달력 그림을 사장에게 가지고 가지만, 사장은 이를 출판하기를 거절한다. “스떼판 씨, 농담이시죠?” 그 때 회사 동료는 스떼판을 위로하는 척하면서 “좋은 면도기를 쓰느냐”고 묻는다.

스떼판의 손#

스떼판은 하루종일 손으로 단순 노동을 하는 일에 무척 지치고 실망한다. 그는 거대한 손으로 동료들과 사장에게 복수하는 꿈을 꾼다. 스떼판의 면도기는 거미처럼 기어가서 사장에게 지저분한 수염을 넝마주이의 그것처럼 덥수룩하게 달아놓는다. 사장을 쫓아낸 후, 그는 사장실에 자신의 거대한 작품 ‘재양력’을 걸어둔다. 그리고 복사기 위에서 마르띤과 섹스를 한 다음, 물 속인지 공중인지 잘 구분되지 않는 빠리 시내를 날아다닌다.

꿈은 과장과 합리화의 소산이다. 스떼판의 거대한 손은 자신이 하는 실망스러운 풀칠 작업에 대한 불만과 그런 일을 강요하는 사장과 동료들에 대한 복수심이 함께 작용한 결과일 것이다. 동료가 잠깐 말한 면도기에 대한 말도 꿈 속에서 놓치지 않는다. 사장을 수염 덥수룩하도록 만드는 것은 이를테면 ‘내 수염에 그렇게 지저분하다고? 너희들은 어떤가 보자.’하는 유아기적인 복수심일 것이다. 그리고 그는 하늘을 난다. 프로이트는 이 하늘을 나는 꿈이 유아기의 운동성과 관계가 있다고 단언한다(Freud 2003, 329): “아이를 안은 팔을 높이 들어올린 채 방안을 뛰어다녀 날게 하지 않은 삼촌이 어디 있을까.” 그리고 이 꿈은 동시에 흔히 “성적 감각”을 일깨우기도 한다는 것이다(Freud 2003, 330).

아니나다를까, 영화는 곧 아버지와 함께 장난을 하는 어린 시절의 스떼판을 비춰준다. 스떼판은, 마치 아침 잠이 많아 깼다가 다시 잠드는 일이 많은 우리들 중 일부처럼, 잠시 꿈에서 깬 듯하더니 다시 꿈 속으로 빠져드는 것이다. 아무런 고통이 없는 듯한, 홈비디오 화질의 영상이 나타난다. 그리고, 그 꿈이 끝나자마자 요란한 드릴 소리를 내며 그의 운명의 여인이 나타난다. 옆집으로 스떼파니가 이사 오는 소리다. 스떼판은 얼결에 스떼파니의 피아노를 옮기다가 그만 손을 찧는다.

스떼판의 손은 ‘거대한 손의 꿈’에서 보았듯 스떼판에게 있어서 무척 가슴아픈 존재다. 작품 활동을 하는 대신 열심히 풀칠이나 하고 있으니 말이다. 그런데 그 손이 매개가 되어 치료를 핑계삼아 그는 마음껏 스떼파니의 방에 들어선다. 실은 스떼파니가 그를 자신의 방으로 초대한 것이다: “세탁소는 나중에 들르고, 지금은 제가 당신 손을 봐 드릴게요.”

전망의 공간, 방#

영화에서 두 사람 사이의 모든 중요한 사건은 이 방에서 이루어진다. 여기서 그는 손을 치료받고, 여기서 자신의 발명품들을 스떼파니에게 보여주고 선물한다. 여기서 그는 바다를 찾아다니는 배를 만들고, 여기서 “골든 더 포니 보이Golden the pony boy”라는 말 인형을 발견한다.

프로이트에 따르면 ‘방Zimmer’은 ‘여자Frauenzimmer’의 상징적 묘사에 사용된다(Freud 2003, 418). 우리는 스떼판이 스떼파니의 방에 들어서는 순간, 그의 에로스는 거의 소원을 성취했다고 말할 수 있다. ‘방’에 들어서는 것은 ‘여자’에게로 들어서는 것이기 때문이다. 한편 바슐라르는 『공간의 시학』에서 집에 대해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Bachelard 1990, 115): “집이란 세계 안의 우리들의 구석인 것이다. 집이란--흔히들 말했지만--우리들의 최초의 세계이다. 그것은 정녕 하나의 우주이다. 우주라는 말의 모든 뜻으로 우주이다. 내밀하게 파악될 때, 더할 수 없이 비천한 거소라도 아름답지 않겠는가?” 집이 내밀하다면 보다 개인적인 공간인 방은 더더욱 그러하다. 그런 내밀한 공간 속에서 바다를 찾고자 하는, 숲을 안은 배를 함께 만들 때 그것은 그 두 사람이 하나의 전망을 갖게 됨을 의미하는 것이다.

소원 성취, 그리고 꿈과 현실의 삼투#

그러나 어쨌든 전망은 아주 미래적인 것이고, 현재로서는 불충족적인 것이다. 스떼판은 자신의 꿈 속에 스떼파니가 나오기를 간절히 바란다. 그가 경멸하는, 어머니의 새 애인으로부터 REM에 대해 들은 후 그는 소리친다. “이제 더 이상 나는 잠의 노예가 아니야. 꿈을 조절할 수 있어.” REM이란 rapid eye movement, 곧 꿈을 꿀 때 눈이 빠르게 움직이는 것을 의미하므로 그는 잠을 잘 때 눈에 어떤 장치를 해놓음으로써 꿈을 조절하고자 한다.

이것은 프로이트를 따라간다면 무척이나 기묘한 일이다. 꿈은 현재 이루지 못한 소원을 충족하는 기제인데, 스떼판은 꿈을 통제함으로써 현실의 소원을 이루고자 하는 것이다. 그런데 앞서 언급했다시피 스떼판은 꿈과 현실을 잘 구분하지 못한다. 그는 자신의 독특한 꿈과 현실의 삼투 현상을 이용하여, 꿈의 통제를 통해 자신의 현실을 통제하고자 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그는 자신의 현실 속에서 어떤 소원을 이루고자 하는 것이다. 스떼판의 소원은 온 세계가 자신의 작품‘재앙력’을 인정하는 것, 그리고 스떼파니와의 사랑이다.

영화는 스떼판의 시점에서 진행된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문제가 발생하는데, 영화의 수용자 역시 스떼판처럼 꿈과 현실을 구분하지 못하게 된다는 것이다. 어디까지가 스떼판의 꿈인지, 어디서부터가 생시인지 알 수가 없다. 영화는 주인공의 꿈과 현실을 흩뜨려놓음으로써 수용자의 꿈과 현실도 흩뜨려버릴 수 있는 어떤 권능을 행사하는 셈이다. 그만큼 수용자들은 스떼판이라는 캐릭터에 몰입하게 되는데, 그 몰입은 다름이 아니라 스떼판의 소원을 공유하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그것은 단순히 연출의 힘이라고 하기 힘들다. 우리 모두 스떼판과 같은 소원을 이미 우리 속에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가령 프로이트가 『햄릿』을 분석하면서, 셰익스피어는 자신의 아버지가 죽은 후에 『햄릿』을 썼다고 말하는 것과 마찬가지 상황인 것이다. 프로이트는 자신의 아버지가 죽은 1년 후에 『햄릿』을 해독하고 있기 때문이다(Bergez 1997, 86). 여기서 작가와 작중 인물과 수용자는 모두 하나의 소원을 공유하게 되는 것이다.

꿈: 나르시즘과 글쓰기#

영화는 그렇게 어디까지가 꿈인지 어디서부터가 생시인지 알 수 없는 상태에서 끝난다. 스떼판은 멕시코로 다시 떠나려다가 스떼파니에게 마지막 인사를 하려고 그 방으로 다시 들어간다. 말했다시피 스떼파니의 방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스떼파니에게로 다시 돌아간다는 뜻이다. 스떼파니의 방에서 2층 침대가 완성된 것을 본 스떼판은 그 2층 침대로 올라간다. 그곳이 자신의 자리라는 듯이. 거기서 그는 완성된 배와 자신이 선물한 발명품들을 본다. 그리고 꿈으로 다시 빠져든다. 스떼파니는 스떼판을 부른다.

현실에서 스떼판의 소원이 이루어졌는지 아닌지 우리는 알 수 없다. 그러나 꿈 속에서 사는 행복을 스떼판은 결코 놓치지 않을 것이다. 스떼판은 꿈 속에서 스떼파니와 함께 진짜 ‘골든 더 포니 보이’를 타고, 숲을 안은 배에 오른다. 배는 드디어 바다를 찾았다. 스떼파니가 말하듯 바다mer는 곧 어머니mère이기도 한 것이다. 이 동음이의어는 '그들'의 꿈이 전적으로 언어적이라는 것을 말해준다. 언어는 곧 글쓰기이다. 《수면의 과학》은 글쓰기가 나르시즘적이라는 것을 증명하면서, 글쓰기의 행복감에 대해서 설파하고 있는 것이다.

참고문헌#

이청준. 2000. 『자서전들 쓰십시다』. 이청준 문학전집 연작소설1. 서울:열림원.
Bachelard, Gaston. 1990. 『공간의 시학』. 곽광수 옮김. 이데아총서21. 서울:민음사.
Bergez, Daniel et al. 1996. 『문학비평방법론』. 민혜숙 옮김. 문예신서121. 서울:동문선.
Dostoevskii, Fyodor Mikhailovich. 2002a. 『죄와 벌』. 상. 신판. 홍대화 옮김. 도스또예프스끼 전집. 서울:열린책들.
---. 2002b. 『까라마조프 씨네 형제들』. 하. 신판. 이대우 옮김. 도스또예프스끼 전집. 서울:열린책들.
Freud, Sigmund. 2003. 『꿈의 해석』. 재간. 김인순 옮김. 프로이트 전집 4. 서울:열린책들.

Posted by 엔디

예담은 위즈덤하우스임프린트 출판사로, 예담판 『어린 왕자』는 디자인 문구류 회사인 아르데코7321이 '어린 왕자'의 상표권 계약을 체결한 후 국내 시장을 거의 독점하려는 의도로 위즈덤하우스와 함께 낸 책이다. (세계일보의 조정진 기자는 예담판이 곧 아르데코7321과 계약 하에 낸 것이라는 점을 모르고 스캔들마케팅이라는 딴소리를 하고 있다.)아르데코7321은 상표권을 취득한 후 각 출판사와 서점에 공문을 보내 서점에 깔린 『어린 왕자』 중 (자신들이 상표권 라이센스를 얻은) 특정 삽화 및 서체를 사용한 책을 모두 서점에서 철수시키라고 고지했고 각 출판사는 반발하고 있는 상태다. 여기에는 저작권 또는 상표권과 관련한 복잡한 문제가 있다.

예담판 『어린 왕자』는 불문학 박사이자 전문 번역가인 강주헌이 번역했다. 강주헌은 이미 2001년에 문예당에서 『어린 왕자』를 번역 출판한 적이 있지만, 이번에 옛 번역본을 상당 부분을 새롭게 손질하여 출간했다. 이 책은 겉표지에 "어린왕자 오리지널 삽화가 들어간 정식 한국어판"이라고 명시하고 있고, 표지 안쪽과 속표지면에 "이 책은 국내 최초로 생텍쥐페리의 원본 삽화 저작권을 갖고 있는 프랑스 Sogex사와의 계약을 통한 정식 한국어판입니다."라고 쓰고 있다. 하지만 이 부분은 논란의 여지가 많다.

전반적으로 예담-아르데코7321판은 기존 번역본과 큰 차이가 없어보이고, 부분적으로 기존 번역본의 오류를 개선한 부분이 있지만, 많은 면에서 기존 번역본에 못 미치는 점이 있다. 그 세목들을 삽화 및 텍스트의 정확성과 문체의 성실성, 그리고 번역의 적확성 면에서 살펴보자. 이를 위해서 원문인 프랑스 갈리마르Gallimard 출판사의 폴리오Folio 문고판과 전성자가 옮긴 문예출판사판, 김화영이 옮긴 문학동네판, 그리고 지금 문제가 되는 예담-아르데코7321판을 함께 살펴보자. 이해를 돕기 위해 영어판인 하코트-브레이스판도 종종 함께 인용할 것이다. (이 글에 인용된 모든 글은 생떽쥐뻬리의 『어린 왕자』 원텍스트와 그 번역본들이므로, 편의상 인용문의 저자 이름은 생략하고 발행년과 쪽수만 명기한다. 대신 인용문의 끝에 출판사의 이름을 밝힌다. 번역본을 지칭할 때에도 번역자의 이름보다는 출판사의 이름으로 부르기로 한다.)


개악된 삽화와 부정확한 텍스트#

『어린 왕자』의 삽화와 텍스트는 오래도록 어려움을 겪어왔다. 전쟁 중이었던 탓도 있고 해서, 저자인 생떽쥐뻬리가 제대로 살피지 못한 탓일 터다. 그래서 오래도록 잘못된 삽화와 잘못된 텍스트가 실려 있었다. 그것은 프랑스 갈리마르판 『어린 왕자Le Petit Prince』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갈리마르 출판사는 1999년 폴리오 문고판으로 이 책을 새로 내면서 삽화와 텍스트에 있었던 그간의 오류를 교정했다. 이러한 저간 사정이 폴리오 문고판 앞머리에 작자의 유족으로 보이는 프레데리끄 다게이Frédéric d'Agay가 쓴 "일러두기avertissement"에 나와 있다. 최근에 국내에서 출간된 『어린 왕자』는 대개 1999년 판본을 반영한 것으로 그런 오류가 대개 눈에 띄지 않지만, 아직까지 개정되지 않은 부분도 많다.

예담-아르데코7321판도 이른바 '정식 계약판'답게 오류가 거의 없다. 하지만, 삽화에서 하나, 텍스트에서 하나의 문제가 눈에 띈다. 삽화의 경우 천문학자가 천체망원경으로 우주를 바라보는 그림에서 별이 빠져 있다는 문제가 있다(1999, 22; 2007a, 17; 2007b, 22: 2008, 23):


한편, 텍스트의 경우 '나'가 소행성의 이름을 짓는 방법을 설명하면서 예로 든 소행성의 이름이 잘못 기재되어 있다는 문제가 보인다(1999, 22; 2007a, 17; 2007b, 23; 2008, 22):

Il l'appelle par exemple : « l'astéroïde 325 ». (갈리마르)

이를테면, '소혹성 3251호'라는 식으로 부르는 것이다. (문예출판사)

가령, '소혹성 제325호'라는 식으로 부르는 것이다. (문학동네)

천문학자는 […] '소행성 3251호'라는 식으로 번호를 붙인다. (예담-아르데코7321)

갈리마르의 정본에서 분명히 '325호'라고 씌어 있는 것이 예담-아르데코7321판에서는 3251호로 바뀌어 있다. 단순히 별 이름의 사례를 든 것이므로 '325호'라고 하거나 '3251호'라고 하거나 별로 다르지 않다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 같다. 하지만, 그렇지가 않다. 이 '소행성 325호'는 별 뜻 없이 나온 말이 아니기 때문이다. 어린 왕자가 세 봉우리의 화산과 한 봉오리의 꽃을 남겨두고 자기 별을 떠나 처음 도착한 곳이 왕이 살고 있는 '소행성 325호'이기 때문이다. 『어린 왕자』에서 '소행성 325호'는 단지 이름의 사례이거나 혹은 어딘가 있기는 하지만 별로 중요하지 않은 곳이 아니라, 어린 왕자가 직접 다녀간 소설의 한 중요한 무대인 것이다. 참고로, 영어판 『어린 왕자The Little Prince』에서도 아래와 같이 정확하게 쓰고 있다(1971, 11).

He might call it, for example, "Asteroid 325."

개악된 문체#

예담-아르데코7321판은 비교적 유려한 문체를 사용하고 있다. 흔히 하는 말로 이 책은 '읽히'며, 특히 어린이들을 고려한 듯 비교적 쉬운 말을 사용해서 원문을 옮기려고 한 점이 돋보인다. 하지만 아주 중요한 문제가 있다: 어린 왕자가 사용하는 말이 반말tutoyer이거나 높임말vouvoyer이거나 무조건 높임말로 옮겼다는 점이다.

먼저 어린 왕자가 처음 등장하는 장면을 보자(Saint-Exupéry 1999, 15; 2007a, 10; 2007b, 13; 2008, 12):

« S'il vous plaît... dessine-moi un mouton !
-- Hein !
-- Dessine-moi un mouton... » (갈리마르)

"양 한 마리를 그려 줘!"
"뭐라구?"
"양 한 마리를 그려 줘." (문예출판사)

"저기…… 나 양 한 마리만 그려줘."
"응?"
"나, 양 한 마리만 그려줘." (문학동네)

"미안하지만, 양 한 마리만 그려줘!"
"뭐라고?"
"양 한 마리만 그려줘." (예담-아르데코7321)

갈리마르판에서 보듯이 어린 왕자는 '나'에게 반말을 하고 있다. 여기서 dessine-moi라고 하면 분명히 너tu에 대한 명령문으로 반말이며, 높임말로 vous에 대한 명령문이 되기 위해서는 dessinez-moi라고 해야 한다. 문예출판사판이나 문학동네판은 이를 모두 반말로 옮기고 있지만, 예담판만은 이상하게도 높임말을 쓰고 있다. '나'가 아저씨뻘이므로 높임말을 쓸 것 같지만 실제로 어린 왕자는 '나'를 tu라고 부른다(1999, 18; 2007a, 13; 2007b, 15; 2008, 15):

« Tu vois bien... ce n'est pas un mouton, c'est un bélier. Il a des cornes... » (갈리마르)

"…… 이건 양이 아니라 염소잖아. 뿔이 있으니까……." (문예출판사)

"아이 참…… 그건 양이 아니라 염소잖아. 뿔이 달렸으니까……." (문학동네)

"아저씨…… 이건 양이 아니고 염소에요. 뿔이 있잖아요." (예담-아르데코7321)

'Tu vois bien'은 직역하면 '네가 보다시피' 정도에 해당하는 말이다. 그렇다면 어린 왕자는 버릇이 없어서 누구에게나 너tu라고 부르고, 누구에게나 반말tutoyer을 쓰는 것일까? 혹은 어린 왕자는 너무나 어려서 반말과 높임말을 잘 구분하지 못하고 있는 것일까? 누구나 어린 시절에는 부모님께도 동네 아저씨에게도 반말을 쓰던 경험이 있으니까 말이다. 소행성 B612에서 혼자 살던 어린 왕자에게는 누구도 그런 높임말을 가르쳐주지 않았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건 사실이 아니다. 어린 왕자는 무척이나 분명하게 너tu라고 부를 사람과 당신vous이라고 부를 사람을 구분하고 있다. 가령 어린 왕자는 소행성 325호에서 만난 왕을 분명히 당신vous이라고 부르고 높임말vouvoyer을 쓰고 있다(1999, 43; 2007a, 42; 2007b, 54; 2008, 56):

« Sire, lui dit-il... je vous demande pardon de vous interroger...
-- Je t'ordonne de m'interroger, se hâta de dire le roi.
-- Sire... sur quoi régnez-vous ?
-- Sur tout, répondit le roi, avec une grande simplicité
-- Sur tout ? » (갈리마르)

"폐하, 한 가지 여쭈어 봐도 좋을까요……."
"네게 명하노니, 질문을 하라."
"폐하…… 폐하는 무엇을 다스리고 계신지요?"
"모든 것을 다스리노라."
퍽이나 간단히 왕이 대답했다.
"모든 것을요?" (문예출판사)

"폐하…… 한 가지 여쭈어봐도 될는지요……"
"짐이 명하노니 질문을 하라." 왕이 서둘러 말했다.
"폐하…… 폐하께서는 무엇을 다스리고 계십니까?"
"모든 것을 다스리노라." 왕은 극히 간단하게 대답했다.
"모든 것을요?" (문학동네)

"폐하, 한 가지 여쭤봐도 될까요?"
어린 왕자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왕이 대답했다.
"네게 명하노니, 질문을 허락하노라."
"폐하…… 폐하는 무엇을 다스리고 계시나요?"
왕은 아주 간단히 대답했다.
"모든 것!"
"모든 것을요?" (예담-아르데코7321)

첫 줄에서 어린 왕자는 왕을 당신vous이라고 부르고 있고, 셋째 줄에서 당신vous에 대한 명령문인 régnez-vous를 쓰고 있다. 어린 왕자는 왕에게 일관되게 높임말vouvoyer을 쓰고 있다. 어린 왕자는 왕 이외에도 허영쟁이와 지리학자에게는 높임말을 쓰고, 그 밖의 사람들에게는 반말을 쓴다. 특정 사람에게 높임말을 쓰는 것은 (떽스뜨 속에서는 나타나 있지 않지만) 그들의 나이를 고려한 것일 수도 있고, 그들의 지위를 따진 것일 수도 있으며, 어쩌면 상대방이 바라는 바를 환기시켜 주는 것일 수도 있다. 말하자면, 왕에게 높임말을 쓰는 것은 지극히 당연할 것이고, 허영쟁이에게는 높임말을 써 주면 좋아할 것이다. 지리학자도 권위의식이 있는 학자로서 높임말에 걸맞는다. 이유야 어쨌든 번역 과정에서 중요한 것은 왜 이들에게 높임말을 쓰는가보다는, 이들에게 높임말을 쓴다는 사실 그 자체일 것이다.

그런데 예담-아르데코7321판은 왕자가 하는 모든 대화를 높임말로 옮기고 있다. 어린이가 어른에게 높임말을 써야 한다는 당위 때문이었는지 혹은 다른 이유가 있었는지 나는 모르겠다. 강주헌이 옮긴 2001년판 『어린 왕자』에서는 반말/높임말의 층위가 정확하게 구분되어 있으니 이상한 노릇이다. 독자들로서는 어린 왕자가 하는 말의 층위를 잘 전달받을 권리를 잃은 것이다.

한편 예담-아르데코7321판의 또다른 문제점은 원문의 괄호를 모조리 풀어놓았다는 것이다. 종종 번역 과정에서 글의 흐름을 고려해서 괄호를 푸는 경우가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원문의 모든 괄호를 풀어놓았다는 것은 문제가 있으며, 독자들은 괄호를 통해 글에서 좀더 주된 부분과 부차적인 부분을 구분할 수 있으므로 이는 무척 위험한 결정이다. 예를 들어, 생떽쥐뻬리가 레옹 베르뜨에게 바치는 헌사에서도 그런 문제점이 나타난다(1999, 11; 2007a, 5; 2007b, 5; 2008, 5):

Tous les grandes personnes ont d'abord été des enfants. (Mais peu d'entre elles s'en souviennent.) (갈리마르)

어른들은 누구나 다 처음엔 어린아이였다. (그러나 그것을 기억하는 어른은 그다지 많지 않다.) (문예출판사)

어른들은 누구나 다 처음엔 어린아이였다. (그러나 그것을 기억하는 어른은 별로 없다.) (문학동네)

어른들도 처음에는 모두 어린아이였습니다. 하지만 그것을 기억하는 어른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예담-아르데코7321)

여기서 생떽쥐뻬리가 '어른도 다 어린이였다'는 것을 언급하는 이유는 그가 이 책을 레옹 베르뜨라는 어른에게 바치는 것에 대해서 어린이들에게 이해를 구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어른도 다 어린아이였다'라는 대전제를 언급함으로써 생떽쥐뻬리는 이 책을 레옹 베르뜨라는 사람의 어린 시절에 바칠 수 있는 면죄부를 받게 된 것이다. '그것을 기억하는 어른은 별로 없다'는 언급은 역시 부차적인 문제로, '어른도 다 어린아이였다'라는 대전제에 대한 반발을 최소화하기 위해 예상되는 반발을 미리 수용한 것이다. 그러므로 그 문장은 역시 괄호로 묶는 것이 바람직하다.

예담-아르데코7321은 이처럼 괄호를 빼버림으로써 주된 부분과 부차적인 부분을 구분할 수 없도록 하였는데, 그럼으로써 한편으로는 또한 원 문장의 매력과 맛조차도 잃어버린 경우가 많다.

예담-아르데코7321판에서 보이는 세 번째 문제점은 올바르지 않은 강조 부사를 사용했다는 것이다. 사실은 부정적인 의미를 갖고 있는 '너무'라는 말을 한국인들은 너무 많이 쓴다. '너무'는 불어로 trop, 영어로 too much의 뜻을 가진 부사로 일반적으로 부정적인 뜻으로 쓰이는 것이다. 최근에 연예인들을 포함한 한국인들이 '너무 감사합니다'처럼 어법에 맞지 않게 자주 쓰면서 퍼졌지만, 이는 분명 틀린 것으로 "정말 감사합니다"처럼 '정말', '매우', 또는 '무척' 등으로 바꾸어 쓰는 것이 맞다. 그런데 예담-아르데코7321판은 이 '너무'라는 부사를 그대로 노출하고 있다(2008, 17-18, 28, 44, 82):

나는 어린 왕자에게 내가 날아다닌다는 사실을 알려주면서 너무 자랑스러웠다.

"아! 너무 잘됐다!"

아! 정말이었다. 너무너무 예쁜 꽃이었다.

"할아버지의 별은 너무 아름다워요. 바다도 있나요?"

'너무'의 노출은 매스컴을 통해 잘못 알려진 문법을 그대로 고착화시킨다는 점에서 큰 문제가 있다. 이런 문제점은 다른 번역본에서는 볼 수 없는 것으로 번역자뿐 아니라 편집자의 손길이 제대로 미치지 못한 책이라는 느낌을 준다. 편집자의 실력에 문제가 있거나, 아니면 상표권 분쟁과 관련한 특정 시기에 책을 내려는 의도로 무리한 일정을 추진했기 때문이 아닌가 추측해 본다.

개악된, 번역의 정확성#

예담-아르데코7321판은 분명히 몇몇 지점에서 기존 번역의 오류를 고치고 있다. 후발 주자인 덕도 있고, 강주헌이라는 옮긴이의 능력 덕도 있을 것이다. 가령 문학동네판에 이르기까지 고쳐지지 않은, 어린 왕자가 본 해넘이의 횟수는 예담-아르데코7321판에서는 정확하게 '개선'된다(1999, 31; 1971, 21; 2007a, 28; 2007b, 35; 2008, 36):

« Un jour, j'ai vu le soleil se coucher quarante-quatre fois! » (갈리마르)

"One day," you said to me, "I saw the sunset forty-four times!" (하코트 브레이스)

"어느 날 나는 해가 지는 걸 마흔세 번이나 보았어!" (문예출판사)

"어느 날은 해 지는 걸 마흔세 번이나 본 적도 있어." (문학동네)

"언젠간 하루에 해가 지는 걸 마흔네 번이나 보았어요!" (예담-아르데코7321)

어린 왕자에게 있어서 해넘이는 무척 중요한 것이고, 떽스뜨에서 어린 왕자가 갖는 감수성의 원천이라고도 볼 수 있는 만큼 이 부분은 상당한 중요성을 갖는다. 어린 왕자는 '나'에게 해지는 걸 보러 가자고 떼를 썼고, 소원을 말해보라는 왕에게는 해더러 지금 당장 지라고 명령해 달라고까지 한다. 가로등 켜는 사람의 별에서 떠나면서, 24시간 동안 1440번이나 해가 지는 축복받은 별를 끝내 잊지 못할 것이라고 의식하지 못하는 가운데 생각하기도 한다. 어린 왕자가 해지는 것을 마흔세 번이 아니라 마흔네 번 보았다는 것은 떽스뜨의 다른 곳에서도 나온다.

어쨌든 예담-아르데코판이 삽화나 확정 떽스뜨의 문제 그리고 문체의 문제에도 불구하고 이 부분을 정확하게 옮긴 공로는 실은 번역자 강주헌에게 돌려야 옳다. 강주헌의 옛 번역본, 2001년에 출간된 문예당판 『어린 왕자』에도 그 부분은 원문에 충실하게 실려 있기 때문이다(53):

"어느 날 나는 해가 지는 걸 마흔네 번이나 보았어!"

또, 일부 번역본에서 착오 탓인지 '낮'을 '밤'으로 잘못 옮긴 부분도 예담-아르데코7321판에서는 바르게 옮겨져 있다(1999, 20; 1971, 9; 2007a, 16; 2007b, 19; 2008, 19):

« Ce qui est bien, avec la caisse que tu m'as donnée, c'est que, la nuit, ça lui servira de maison.
-- Bien sûr. Et si tu es gentil, je te donnerai aussi une corde pour l'attacher pendant le jour. Et un piquet. »  (갈리마르)

"The thing that is so good about the box you have given me is that at night he can use it as his house."
"That is so. And if you are good I will give you a string, too, so that you can tie him during the day, and a post to tie him to." (하코트브레이스)

"아저씨가 준 상자가 밤에는 집이 될 테니까 잘 됐어."
"그렇고말고. 그리고 네가 착하게만 하면, 밤에 양을 매 놓을 수 있는 굴레를 줄게. 말뚝도 주고." (문예출판사)

"아저씨가 준 상자가 좋은 건 그게 밤에는 양의 집이 될 수 있다는 거야."
"그렇고말고. 네가 착하게 굴기만 하면 낮에 양을 매어둘 고삐도 그려줄게. 그리고 말뚝도." (문학동네)

"아저씨가 준 상자가 밤에는 양의 집으로 쓰일 테니 참 잘됐어요."
"물론이란다. 그리고 네가 착하게 있으면 낮에 양을 묶어놓을 수 있는 고삐도 만들어줄게. 말뚝도 주고." (예담-아르데코7321)

그러나 보다 많은 부분에서 예담-아르데코7321판본의 오류가 눈에 띈다. 먼저 낱말을 잘못 옮긴 것이 종종 있다. 먼저 시적詩的이라는 낱말을 웬일인지 '상징적'이라고 옮긴 부분이 있다(1999, 52; 1971, 46; 2007a, 54; 2007b, 69; 2008, 72):

C'est amusant, […] C'est assez poétique. (갈리마르)

"It is entertaining," […] "It is rather poetic. […]" (하코트브레이스)

그것 재미있는데. 아주 시적(詩的)이고. (문예출판사)

'재미있는데' […] '상당히 시적인걸. […]' (문학동네)

그거 재미있군. 그런데로 상징적이고 말이야. (예담-아르데코7321)

상징이 시를 구성하는 중요한 요소가 되기도 하지만, 시적이라는 것과 상징적이라는 것은 같은 것이라고 보기가 힘들다. 이 말은 어린 왕자가 실업가의 별을 방문했을 때 했던 생각인데, 그 실업가는 별을 '상징적'으로 소유한다기보다는 '실질적'으로 자신이 소유한다고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실질적인 '믿음'이 어린 왕자의 눈에는 우스꽝스러웠고, 낭만적이었기 때문에 시적으로 보였던 것 같다. 어쨌든 이상한 것은 강주헌의 이전 번역(2001, 74)에서는 "제법 시적이고."라고 정확히 옮겨져 있었다는 점이다. 편집자나 최종 결재자의 눈에 '시적'이라는 말이 뜬금없는 것으로 보였던 것일까?

다른 부분을 보자. 배움과 연습은 같은 것일까 다른 것일까? 어린 왕자의 원문에 분명히 '배운다'고 되어 있는 부분이 번역문에서는 '연습하다'로 뒤바뀐 부분이 많다(1999, 16; 1971, 4; 2007a, 10; 2007b, 13; 2008, 12):

je n'avais rien appris à dessiner (갈리마르)

I never learned to draw anything (하코트브레이스)

아무것도 그리는 연습을 하지 않았으니까 (문예출판사)

그림 그리는 것을 배워본 일이 없었으니 (문학동네)

그림 그리는 연습을 전혀 하지 않았으니까 (예담-아르데코7321)

불어의 apprendre나 영어의 learn에 '익히다'라는 뜻이 있기는 하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연습하다'라고 하려면 exercice/exercise나 practice를 쓰는 것이 보통이다. 게다가 여기에서 '연습하다'가 나오면 '나'가 일관되게 끌어온 그림과 관련된 정체성이 깨지게 된다. '나'는 그림 1호와 2호가 실패한 이후, 결국 비행기 조종하는 법을 "배웠appris"기 때문이다(1999, 14; 2008, 9). 여기서 '나'는 그림을 배우는 '대신' 비행기 조종하는 법을 배웠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 부분은 문학동네판을 따라 옮기는 것이 옳을 것이다.

한편으로는 문장 내지는 구가 몽땅 틀린 경우도 있다. 이 부분은 낱말의 선택이 문제가 아니라 문장 구조를 잘못 파악하거나 문법을 잘 몰라서 잘못 번역하는 경우로, 명백한 잘못이다. 가령 "그림 그리는 것을 배워본 일이 없"는 '나'가 어린 왕자의 초상화를 두고 '최고로 멋진 초상화'라고 지칭하는 이상한 번역을 보자(1999, 16; 1971, 4; 2007a, 10; 2007b, 13; 2008, 12):

Voilà le meilleur portrait que, plus tard, j'ai réussi à faire de lui. (갈리마르)

Here you may see the best portrait that, later, I was able to make of him. (하코트브레이스)

훗날 내가 그를 그린 그림 중에서 가장 잘 된 것이 여기 있다. (문예출판사)

여기 있는 그림은 훗날 내가 그의 모습을 그린 그림들 중에서 가장 잘된 것이다. (문학동네)

훗날 나는 그 아이를 모델로 하여 최고로 멋진 초상화를 그렸다. (예담-아르데코7321)

여기서 '가장 잘 된le meilleur portrait/the best portrait'은 que/that절 이하의 수식어의 영향을 받는다. 그러므로 해당 부분은 '최고로 멋진 초상화'가 아니라 내가 그린 것 중에서 제일 나은 것이란 뜻이 맞다. 특히 '나'는 스스로 그림을 잘 못 그린다고 떽스뜨 전체를 통하여 고백하고 있기 때문에 '최고로 멋진 초상화'라는 것이 올바른 번역이 아니라는 것은 누구나 알 수 있을 것이다. 게다가 떽스뜨 전체를 고려하지 않더라도 지금 해당 본문만을 솜솜 뜯어보면 '그를 그린 것 중에'라기보다는 '그를 그리는 데 성공한 것 중에' 내지는 '그를 그릴 수 있었던 것 중에' 정도로 해석하게 되는데, 이것은 '나'의 능력상 그를 그리는 것이 무척이나 힘든 일이거나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음을 시사한다. 한편 "Voilà"나 "Here you may see"는 모두 상대에게 눈앞의 어떤 그림을 가리키며 하는 말인데, 유독 예담-아르데코7321판에서만 이 부분에서 지칭의 동사들을 제대로 살려내지 못했다. 그런데 역시 여기서도 이상한 부분이 있는데, 강주헌의 옛 번역본에서는 "훗날 내가 그르르 그린 것 중 가장 잘 된 그림이 여기 있다."로 정확하게 옮겨져 있다는 점이다(2001, 38).

마찬가지로 문장 자체를 잘못 옮긴 경우로 어린 왕자의 별 B612에 대한 문장이 있다(1999, 24; 1971, 13-14; 2007a, 19; 2007b, 25; 2008, 25):

Mais si vous leur dites : « La planète d'où il venait est l'astéroïde B 612 », alors elles seront convaincues, et elles vous laisseront tranquille avec leurs questions. (갈리마르)

But if you said to them: "The planet he came from is Asteroid B-612," then they would be convinced, and leave you in peace from their questions. (하코트 브레이스)

그러나 "그가 떠나온 별은 소혹성 B612호입니다"라고 말하면 수긍을 하고 더 이상 질문을 해대며 귀찮게 굴지도 않을 것이다. (문예출판사)

그러나 "어린 왕자가 떠나온 별이 B612호 소혹성입니다"라고 하면 어른들은 수긍이 간다는 듯 더이상 질문을 해대며 귀찮게 굴지 않을 것이다. (문학동네)

그러나 "그는 소행성 B612호에서 왔습니다"라고 말하면 어른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다른 질문으로 조용히 넘어갈 것이다. (예담-아르데코7321)

B612는 어린 왕자가 살던 별의 이름이지만, '나'에 따르면 그 이름은 별로 중요한 것이 못된다. 적어도 어린이들에게는 그렇다. 하지만 어른들에게는 B612라는 그 숫자가 바로 본질적인 부분으로 인식되는 것이다. 여기서 laisser는 '내버려 두다'라는 뜻이고 tranquille은 '조용한'이라는 뜻이므로 이 부분 역시 '질문을 하면서 성가시게 하지 않을 것이다'라는 의미로 받아들여야 맞다. 특히 여기서 어른들은 숫자가 본질이라고 믿기 때문에 B612호라는 이름을 듣는 순간 더 이상의 질문을 할 필요가 없어지게 된다는 점도 유의해야 한다. 강주헌의 문예당판은 이 부분을 아래와 같이 바르게 옮겼다(2001, 46):

그러나 "그가 떠나온 별은 소혹성 B612호입니다."라고 말하면 이해를 하고 더 이상 질문을 하면 귀찮게 굴지도 않을 것이다.

또, 불어 특유의 접속법을 잘못 해석하여 완전히 반대의 문장이 된 경우도 있다(1999, 37; 1971, 29; 2007a, 36; 2007b, 46; 2008, 47):

Cette histoire de griffes, qui m'avait tellement agacé, eût dû m'attendrir... (갈리마르)

This tale of claws, which disturbed me so much, should only have filled my heart with tenderness and pity. (하코트브레이스)

그 발톱 이야기에 눈살을 찌푸렸지만 실은 가엾게 여겼어야 옳았던 거야……. (문예출판사)

그 발톱 이야기에 너무 약이 올랐었거든. 사실은 가엾게 여겼어야 했는데 말이야……. (문학동네)

그 가시 이야기가 짜증스럽기는 했지만 내게는 측은한 마음을 들게 했던 거예요……. (예담-아르데코7321)

프랑스어 원문의 eût dû의 주어는 3인칭인 '그 발톱 이야기cette histoire de griffes'다. 영어에서 must에 해당하는 devoir 동사의 3인칭 접속법 대과거형이 바로 eût dû이다. 접속법 대과거는 과거 사실에 대한 소원을 말하는 것이다. 이 문장을 직역하면 "그 발톱 이야기는 […] 나를 측은해지게 했어야 하는데." 정도가 되는 것이다. 즉, 어린 왕자는 그 때 장미꽃의 '발톱 이야기'를 듣고 그다지 측은해하지 않았고, 지금 그것을 후회한다는 말이다. 그러나 예담-아르데코7321판은 거꾸로 측은한 마음을 들게 했다고 말한다. 완전히 반대의 번역인 셈이다. 역시 강주헌의 문예당판은 이 부분을 아래와 같이 비교적 정확하게 옮기고 있다(2001, 59):

그 가시 이야기에 눈살을 찌푸렸으나 오히려 그것 때문에 그를 더 가엾게 생각해야 했어…….

결론을 대신하여#

완벽하고 꼼꼼하지는 않지만 국내 세 출판사의 번역본을 비교함으로써 예담-아르데코7321판이 일부 개선되었음에도 실상은 개악판이라는 점을 알 수 있었다. 법적 논란이 분분한 상표권을 '무기' 삼아 서점에서 경쟁 제품을 뺀 다음, 자사의 책으로 서점가에 진출하는 행태는 도덕적으로도 바람직하지 않고, 생떽쥐뻬리와 어린 왕자의 정신에도 맞지 않는다. 게다가 독점 시장의 지위를 누릴 때의 특수를 노려서 억지로 일정을 맞추어 책을 내는 행위는 생떽쥐뻬리의 이름값에 먹칠을 하는 행위다. 이를 통해 얻은 수익금으로 어린 왕자 박물관을 낸다 한들, 저작자의 글 하나 제대로 못 내는 출판사-문구점의 입장에서 그것이 홍보효과 이외에 또 무엇이겠나 하고 생각해 보면 씁쓸하기만 하다.


어린 왕자 - 2점
생 텍쥐페리 지음, 강주헌 옮김/예담

참고문헌#

Saint-Exupéry, Antoine de. 1943, 1971. The Little Prince. Orlando:Harcourt Brace & Company
---. 1999. Le Petit Prince. Paris:Gallimard.
---. 2001. 『어린 왕자』. 강주헌 옮김. 서울:문예당.
---. 2007a. 『어린 왕자』. 전성자 옮김. 에버그린북스01. 서울:문예출판사.
---. 2007b. 『어린 왕자』. 김화영 옮김. 파주:문학동네.
---. 2008. 『어린 왕자』. 강주헌 옮김. 서울:예담(위즈덤하우스).

이 글은 스프링노트에서 작성되었습니다.

Posted by 엔디

서점에서 한동안 『어린 왕자』를 못 보게 될 거라고 한다. 이유인즉, 생떽쥐뻬리가 그린 그림 몇 장과 '어린 왕자'라는 한국어 제호, 그리고 'Le Petit Prince'라는 프랑스어 제호가 상표권 등록이 되어 있는데, 상표권 소유자인 SOGEX(생떽쥐뻬리 유족 재단)가 이를 문제삼았기 때문이다. 조선일보에 따르면 그림과 제호별로 조금씩 다르지만 가장 먼저 이루어진 상표권 등록은 1996년부터였다고 한다. 그런데도 이제서야 상표권을 문제 삼은 것은 최근 '아르데코7321'이라는 국내 업체가 해당 상표권 관련 독점 계약을 맺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아르데코7321은 각종 공예품과 공책, 메모장 등을 만드는 회사다. 최근 주변에 '어린 왕자'가 들어간 노트나 연습장을 쓰는 사람들이 많이 눈에 띄었는데, 모두 이 회사의 것이었다. 해당 제품은 교보문고, YES24, 알라딘 등 유수 인터넷 서점에 모두 상위로 등재되어 있을 정도로 인기가 높다. 아르데코7321이 상표권 관련 계약을 체결한 것은 지난 10월인 모양으로, 이 회사는 2007년 10월 10일 당사 홈페이지 공지사항을 통해 '저작권 계약' 사실을 다음과 같이 알렸다(현재는 '저작권'이라는 낱말을 모두 '라이센스'라는 낱말로 바꾼 상태다. 2008. 5. 4. 20:53 추가):

2007년 10월.
잊고 지내온 중요한 진실들을 깨워주는
순수한 어린왕자가 드디어 7321과 만났습니다.

ART DECO 7321이 어린왕자의 프랑스 정식 저작권 소유자인
SOGEX의 공식 라이센싱 에이전트(GLI컨설팅)를 통해
1년여의 긴 협의 끝에 계약을 체결,
국내 최초로 어린왕자 원화를 사용하게 되었습니다.

10월 5일에는 작은 간담회를 개최하여
어린왕자와 7321의 시작을 알렸답니다.
국내 최초로 저작권 구입과 함께
새롭게 태어난 어린왕자를
아르데코 7321에서 만나보세요~

저작권인가 상표권인가#

앞서 언급한 조선일보 기사는 해당 사안이 저작권 문제가 아니라 상표권 문제임을 명확히 하고 있다. 그런데, 아르데코7321의 홈페이지에는 이상하게도 자신들이 "저작권 구입"을 했다고 언급하고 있다. 이와 관련해서는 당사의 홈페이지에 링크된 서울경제, 연합뉴스(네이버 링크), 매거진 정글의 기사에서도 역시 아르데코7321이 '저작권 구입'을 했다고 밝히고 있다. 기사들은 "지금까지 국내에서 쓰여진 ‘어린왕자’ 디자인은 저작권 계약 없이 불법으로 쓰여졌다."거나 "지금까지 우리나라에 소개된 <어린왕자>가 그 어느 것 하나 정식 절차를 거치지 않은 불법제품이라는 것을 생각한다면 그저 부끄러울 따름이다."라고 쓰기도 서슴지 않는다. 해당 언론사들이 모두 아르데코7321의 보도자료를 받아서 기사를 썼을 것을 고려하면 아르데코7321의 주장은 조금 이상하다. 어쩌면 저작권인지 상표권인지 잘 구분하지 못한 것은 아르데코7321이 아닐까?

하지만, 어린 왕자의 경우 저작권과 관련하여 몇 가지 문제가 있는 것은 사실이다.

『어린 왕자』 저작권의 문제#

먼저 조금 특이한 프랑스의 저작권 보호 기간을 살펴보자: 프랑스의 저작권법(영어)상 저작재산권의 만료 기한은 일반적으로 저작자 사후 70년이며, 1차 또는 2차 세계대전 중에 발표된 저작물의 경우 그 기한이 연장되는 것이었다. 이른바 전쟁 정회prorogation de guerre라고 부르는 것으로 1차 대전 중인 1914년 8월 2일에서 1921년 1월 1일 사이에 발표되었으며 1919년 2월 3일까지 저작권 만료domaine publique가 되지 않았다면 14년 272일이 연장되고, 1939년 9월 3일에서 1948년 1월 1일 사이에 발표되었으며 1941년 8월 13일까지 저작권 만료가 되지 않았으면 8년 120일이 연장되었다. 또 프랑스를 위해 죽은 저자를 위한 특별 정회라는 제도가 있어서 저작자가 '프랑스를 위해 죽었다mort pour la France'면 추가로en outre 30년이 연장된다. (다만 전쟁 정회 제도는 2007년 2월 27일 프랑스 최고법원인 취소법원la Court de Cassation의 결정으로 사라졌다.)

어쨌든 앙뚜안 드 생떽쥐뻬리의 경우에는 전쟁 정회와 특별 정회 두 가지 모두에 걸린다; 생떽쥐뻬리의 '어린 왕자'가 처음 출간된 것은 1943년 미국에서였고, 그가 비록 비시 정부를 위해 일하고 있기는 했지만, 어쨌든 공군 정찰 임무를 수행하다가 실종되었기 때문이다. 사라진 전쟁 정회 제도를 빼고 보더라도 프랑스법상 생떽쥐뻬리의 작품은 저자의 사후 100년(70년+30년)이 된다.

그러나 한국법상으로는 저작자 사후 50년까지밖에 보호하지 않기 때문에 저작권에 문제가 없다고 판단할 수 있다. 더구나 50년은 베른 협약의 원칙에도 부합한다. 그런데, 문제는 생떽쥐뻬리의 사망한 해를 어떻게 추정하느냐 하는 것이다. 알다시피 생떽쥐뻬리는 1944년 실종되었다. 비록 "내가 그의 정찰기를 요격했다"는 독일군 전투기 조종사의 증언이 나오기는 했지만, 그가 사망한 해를 확정하기에는 아무래도 부족하다; 그렇지만 1944년에 실종되었고, 2차 세계대전 이후에도 돌아오지 않았음을 감안해 볼 때 길게 잡더라도 생떽쥐뻬리 작품의 저작권은 한국 내에서는 소멸되었다고 보는 것이 온당할 것이다.

상표권 제도의 목적과 상표권의 존속기간#

결국 문제는 다시 상표권으로 돌아온다. 상표권이란 "일정한 사업자가 자기의 상품을 타사업자의 상품과 구별하기 위하여 문자·도형·기호·색채 등을 결합하여 만든 상징을 독점적으로 사용하는 권리"이다(이한상 2001, 30). 상표권의 목적은 상표법 제1조에 드러나 있다:

이 법은 상표를 보호함으로써 상표사용자의 업무상의 신용유지를 도모하여 산업발전에 이바지함과 아울러 수요자의 이익을 보호함을 목적으로 한다.

이를 두 가지로 나누어 보면 먼저 "상표사용자의 업무상의 신용유지", 그리고 그 다음으로 "수요자의 이익 보호"이다. 흔히 '짜가'나 '짝퉁'이라는 것을 생각해보면 금방 이해가 가는 부분이다. 가령 '나이키'라는 회사의 정품이 아니라 '짜가'나 '짝퉁'이 시장에 유통되면 먼저 '나이키' 회사가 손해를 보는 것이 되고, 그 다음으로는 그 '짜가'나 '짝퉁'을 정품으로 알고 산 소비자 역시 손해를 보게 된다. 상표권을 법으로 보호하는 것은 그 두 가지 손해를 모두 막기 위해서다.

한편, 상표권은 저작권과 달라서 존속기간은 10년이지만, 존속기간갱신등록출원에 의해 10년간씩 갱신할 수 있다(상표법 42조). 상표권은  상표권자가 사망한 날부터 3년 이내에 상속인이 상표권의 이전등록을 하지 않으면 소멸된다. 이를 종합해 볼 때 상표권은 원칙적으로 영원히 소유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결론이 나온다.

상표권이 영원해야 하는 것은 적어도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당연하다고 볼 수 있는데, 그래야 사업자의 권리와 수요자의 권리를 보호하려는 목적에 충실할 수 있기 때문이다. 가령 '귀뚜라미'라는 보일러 회사가 있는데 일정 시기 이후에는 상표권이 소멸되어 아무 보일러 회사나 다 '귀뚜라미'라는 상표를 사용할 수 있다면, '귀뚜라미'사도 손해를 볼 것이고 '귀뚜라미'사의 제품인 줄 알고 보일러를 산 수요자도 피해를 볼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상표권은 특별한 이유가 없는 한 상표권자가 원하는 대로 영원히 보장해주는 것이 맞다. 여기 한 사례를 보자.

웹스터 사전과 상표권#

웹스터Webster's 사전은 미국에서 손꼽히는 사전이다. 1806년 노아 웹스터Noah Webster가 출간한 『간략영어사전A Compendious Dictionary of the English Language』을 태두로 하는 웹스터 사전은 오래도록 권위를 인정받아 왔다. 그러나 1917년 법정에서 웹스터Webster라는 이름이 공공 영역public domain으로 규정되어 권리가 소멸되었다; 웹스터라는 이름은 아무 사전에나 다 붙일 수 있는 권리가 소멸된 상표genericized trademark가 된 것이다.

결국 오리지널 웹스터 사전을 만들던 G. & C. 머리엄 회사는 회사 이름을 머리엄-웹스터Merriam Webster로 바꾸게 된다. 머리엄-웹스터 사는 홈페이지에서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설명한다:

The net effect of the proliferation of Webster's dictionaries is a reference-book marketplace in which the consumer is either unaware of or confused about what differentiates these books.
웹스터 사전이 확산된 결과 참고도서 시장의 고객들은 (웹스터라는 제목을 단) 책들 사이에 어떤 차이가 있는지 알 수 없어 혼란스럽기만 하게 됐다.

이것이 머리엄-웹스터 사의 푸념만은 아닐 것이다. 대다수의 소비자는 분명히 웹스터라는 이름이 아니라 웹스터라는 기표signifiant 저 너머의 '150년 전통의 사전'을 원하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기표로서의 상표#

웹스터 사전의 사례에서 볼 수 있듯이 상표는 기의signifié가 아니라 기표다. 이 명제는 상표의 특징에 관해 꽤 중요한 것을 담고 있다. 상표가 기표라면 우리는 드 소쉬르de Saussure를 원용하여 기표인 상표와 기의인 상품의 관계가 자의적이라고 규정할 수 있게 된다. 자의적이라는 것은 어떤 상품을 다른 상표로 붙였다고 해서 (실질적으로) 그 상품의 가치가 전혀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룰루' 비데가 '랄라' 비데였더라도 비데 자체의 기능이 달라지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다.

따라서 이를테면 '거원'이라는 상표의 MP3 플레이어에서 우리가 기실 원하는 것은 '거원'이라는 상표 자체가 아니라, 그 상표를 달았기 때문에 신뢰할 수 있는 그 MP3 플레이어라는 상품이다. 그래서 우리는 '거원'이라는 상표가 '코원'이라는 상표로 바뀌었을 때에도 '거원'이라는 이름을 단 제품과 똑같은 신뢰를 '코원'이라는 이름을 단 제품에 보낼 수 있는 것이다. 기업이 일반적으로 브랜드 네임 바꾸기를 꺼리고 브랜드 네임에 가치를 부여하는 것은 브랜드 홍보의 용이성 때문이지, 그 브랜드 자체가 특별히 독창적이거나 뛰어나서가 아니다. 이한상(2001, 31)도 "상표보호의 본질은 창작행위에 있는 것이 아니므로 상표의 선택이나 구성에 있어서 신규성이나 독창성은 불필요하다."고 쓰고 있다.

독창성이 중요한 저작권의 경우 다른 사람의 생산물에 내 이름을 달아서 배포하는 '표절'이 중대한 범죄인 반면, 독창성이 중요하지 않은 상표권의 경우 거꾸로 나의 생산물에 다른 유명한 이름을 달아 배포하는 것이 중대한 범죄가 된다. 우리가 '버버리'라고 씌인 '짜가' 코트를 생산하여 판다고 했을 때, 우리는 '버버리'라는 독창적인 문양을 함부로 써서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다. 진짜 '버버리' 사에서 만든 제품보다 질이 떨어지는 제품에다 '버버리'라는 이름을 붙임으로써 '버버리' 사의 신용을 떨어뜨리고, '짜가' 상품을 산 소비자는 그 품질에 만족하지 못하므로 문제가 되는 것이다.

어린 왕자와 상표권#

『어린 왕자』로 돌아가자: 우리는 상표권 보호의 목적에 비추어 출판사들이 '어린 왕자'라는 제호 또는 삽화를 씀으로써 생떽쥐뻬리의 유족 재단이나 아르데코7321의 신용에 피해를 입혔는지를 살펴보고, 출판사들이 '어린 왕자'라는 제호 또는 삽화를 씀으로써 소비자들의 상품 선택에 손해를 입혔는지를 보아야 할 것이다.

1973년 김현의 번역으로 처음 『어린 왕자』를 출간한 문예출판사를 필두로, 수많은 출판사에서 나온 『어린 왕자』들은 유족 재단의 명예를 높였고, 지금 아르데코7321에서 내는 '어린 왕자' 노트류가 잘 팔리는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다고 우리는 거의 의심 없이 말할 수 있다. 한편, 소비자들이 어린 왕자의 삽화나 제호 때문에 앞서 언급한 웹스터 사전과 같은 곤란을 겪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아르데코7321이 기존의 출판사들이 일군 성과를 도용하고 있다고 보는 편이 온당할 것이다.

도서 『어린 왕자』에서 제호와 삽화는 기표가 아니라 기의이다. 형식이 아니라, 내용이며 그것들 스스로가 이미 '어린 왕자'를 이루는 것이다. 따라서 이들 책들이 해당 상표를 하나의 '상표'로 사용하고 있는 것도 아니고, 아르데코7321의 상품에 끼칠 손해는 더더구나 없다.

나는 상표권 제정의 기본 목적과 전혀 부합하지 않는 이 '어린 왕자' 관련 상표등록에 대한 취소가 온당하다고 믿는다. '어린 왕자' 캐릭터가 그려진 '짜가' 다이어리가 생겨날까 걱정된다면, 생떽쥐뻬리의 작품을 상표등록하기보다는 아르데코7321의 상표를 등록하는 것이 옳다. 실제로 아르데코7321은 앨리스와 도로시 등 이전 제품들의 경우 저작권 만료된 작품을 가지고 아르데코7321의 이름을 걸고 판매해서 좋은 효과를 얻기도 했기 때문에 이런 방식에 문제가 없다. 실은 위에서 언급했듯이 '어린 왕자' 역시 한국 내에서 저작권이 만료되었기 때문이다. (2008. 4. 17. 13:36 추가)

결론을 대신하여: 상생의 경제학#

나는 아르데코7321이나 유족 재단이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지 모른다. 삽화와 표제에 대한 로열티를 바라는 것인지, 새로운 번역서 출간을 위한 것인지 나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기존의 출판사들이 생떽쥐뻬리의 명예를 높였으며, 아르데코7321의 매출도 높여 주었을 것이라는 점이다. 결과적으로 문구류는 도서 『어린 왕자』를 읽은 사람들이 사는 것이므로 이런 상생의 시너지 효과가 무척 활성화되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상표등록 취소와 관계 없이 아르데코7321와 유족 재단의 결단이 필요한 시기이기도 하다.

여기에는 또다른 이유가 있는데, 만약 생떽쥐뻬리의 작품들이 저작권 시한 만료 후에도 상표권 등록을 통해 영원히 그 권리를 보장받게 된다면 다른 모든 저작물 역시 상표권 등록만 해 놓으면 영원히 그 재산권을 보호해 주어야 한다는 결론이 나온다. 이는 문화 발전에 비추어 보아도 전혀 바람직하지가 못하다는 점이다.


참고문헌#

이한상. 2001. 『지식재산권의 생활법률』. 서울:제일법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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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민족과 계급

민족이냐 계급이냐 하는 문제는 한국적 상황에서 오랫동안 중요한 이슈가 되어왔다. 식민지 시절에 맑시즘을 받아들이고, 분단 시대를 거쳐 이를 정교화하는 과정을 겪어온 까닭이다. 민족의 독립이, 그리고 민족의 통일이 오랫동안 지상과제였던 시절, 계급을 들먹이는 것은 반역이나 개인주의로 받아들여질 소지가 항상 있었다. 권력을 장악하려는 음모로 받아들여지기도 했다. 한국의 대표적인 민족주의자 백범은 자서전에서 이렇게 적는다(김구 1997, 313-314):

국민대회가 실패한 후 상해에서는 통일이란 미명美名하에 공산당 운동이 끊어지지 않고 민족운동자들을 종용하였다. 공산당 청년들은 여전히 양파로 나뉘어 동일한 목적과 동일한 명칭으로 '재在중국청년동맹'과 '주住중국청년동맹'을 조직하고, 상해의 우리 청년들을 앞다투어 포섭하여 독립운동을 공산운동화하자고 절규하였다.

그러던 중 레닌은 공산주의자들에게 "식민지운동은 복국운동復國運動이 사회운동보다 우선한다"고 발표하였다. 이 말이 한번 떨어지자 어제까지 민족운동 즉 복국운동을 비난·조소하던 공산당원들이 돌변하여 독립·민족운동을 공산당의 당시黨是로 주창하였다. 여기에 민족주의자들이 자연 찬동하고 나서서 '유일독립당촉성회唯一獨立黨促成會'를 성립시켰다. 그런데 내부에서는 의연히 공산당 양파의 권리쟁탈전이 음양으로 치열하게 대립되어 한 걸음도 진전되기 어려웠다. 민족운동자들도 차차 깨우쳐 공산당의 속임수에서 벗어나 결국 유일독립당촉성회는 해산되고 말았다.

백범일지
백범은 공산운동을 '절규'하다가 레닌의 한 마디에 민족운동으로 뛰어드는 공산주의자들을 조소하고 있다. 또한, 그들의 권력 지향적인 모습을 드러내어 비판하고 있다. 실제로는 당시 공산주의 운동이나 사회주의 운동에서 민족의 독립을 우선시하는 경우가 많았고(강만길 1994, 80-90), 아나키스트였던 신채호 역시 민족 운동에 일생을 바친 것을 살펴보면 공산주의자 및 사회주의자들을 무턱대고 비난하는 것은 온당치 못하다고 여겨진다. (실제로, 계급 혁명을 민족 해방에 우선시 한다는 사실은 헤게모니를 장악한 민족주의자들이 공산주의자들을 비난하는 중요한 요인이 되었던 것이다.) 어쨌든 이 글을 인용한 것은, 백범의 진단은 현 상황에서 민노당의 모습을 조망하는 데 꽤나 유용한 도구가 될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2. 민노당의 분당론

민주노동당의 분당론은 꽤 오래 전부터 있었던 것으로 보이지만, 본격적인 분당론은 17대 대선을 위한 경선 과정에서 NL들이 보였던 행태 때문에 드러난 것 같다. 경선 직후 박노자 교수는 자신의 블로그에 민노당, 분당 이전에 먼저 해야 할 일이라는 글을 올려 분당론의 운을 뗐고, 수많은 민노당 지지자들은 NL이 지지했던 권영길 후보를 응원하면서도 비난을 아끼지 않았다. 이른바 '비난적 지지'라는 신조어까지 만들어졌다. 권영길 후보는 영국의 무상 의료, 무상 교육이라는 소중한 정책보다는 (아마도) NL의 입김이 들어간 '코리아 연방 공화국'이라는 생경한 정책만 떠들다가 사라졌다. 박노자는 권영길 후보께 삼가 충고드립니다라는 포스팅을 통해 점잖게 충고했고, 백무현 화백은 만평에서 이렇게 그렸다:

백무현 서울 만평 2007년 11월 27일

백무현 서울 만평 2007년 11월 27일


민노당 입장에서 이번 17대 대선은 명박한명백한 패배이다. 중선관위 집계에 따르면 16대 대선 당시 3.9%였던 득표율은 3.0%로 떨어졌다. 5년 만에 1/4의 지지자를 잃은 것이다. 16대 때 이른바 '정몽준 폭탄' 사건으로 민노당 지지자 일부가 노무현을 찍은 사례가 많았다고 판단되므로 실제 잃은 지지자 수는 훨씬 더 많은 셈이다. 4월에 있을 총선에도 밝은 미래는 없다: 중선관위의 지역별 득표 집계(IE only)에 따르면 민주노동당의 권영길은 자신의 지역구인 창원에서 7.9%, 현대차 노조가 있는 울산에서 8.4%의 득표를 하는데 그쳤기 때문이다. (이명박 당선자는 창원에서 51.7%, 울산에서 54.0%의 득표를 했다.)

17대 대선 후보별 득표율 (중앙선거관리위원회)

17대 대선 후보별 득표율 (중앙선거관리위원회)


권영길의 생경한 정책과 일부 NL들의 시대착오적 행태, 그리고 당권욕 등이 대선 참패의 원인이라고 진단한 대중적 좌파 지식인들은 분당론을 확산시켰다. 박노자, 홍세화, 진중권은 블로그를 통해서, 인터뷰를 통해서, 그리고 기고문을 통해서 터뜨리듯이 NL에 대한 비판을 쏟아냈다. 조승수 전 의원과 주대환 전 당 정책위의장은 조선일보와 인터뷰를 하면서까지 NL들을 맹비난했다. 비판과 비난의 핵심은 그들이 당의 미래가 아닌 '김정일'의 미래를 더 생각한다는 점과 그들이 민노당 당권에 지나치게 연연한다는 점이다. 그것은  진중권이 3년 전에 쓴 민주노동당의 죽음이라는 글에서 이미 드러났다. 이번 대선과 관련해서는, 우석훈이 투표와 탈당에 대한 결심이라는 글을 통해 권영길이 실은 당대표에 대한 욕심에서 출마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나타내면서도 일단은 투표하겠다는 일종의 '비난적 지지' 선언을 했다.

여기서 보이는 일련의 과정이, 백범이 과거 민족주의자들과 공산주의자들 사이에서 있었던 일을 (조금은 편협하게) 묘사한 내용과 상당히 닮아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민노당 내에서 NL들은 비록 한미 FTA 반대나 신자유주의 반대 등 맥을 같이 하는 부분에서 열심히 투쟁하였음에도 기본적으로는 그들이 당권을 장악하려고 했던 전례가 있고, 이북의 김씨 정권의 명령만을 추종한다는 점에서 백범이 묘사한 과거의 얼치기 공산주의자들과 유사성을 찾기는 아주 쉬운 것이다.

민노당에서 NL을 '잘라내기'가 쉬운 것은 아니다. 실제로 어렵기도 하고, 적어도 몇 가지 사안에 있어서 그들의 도움이 절실한 부분도 있다. 또 지지층이 갈리는 것은 어쨌든 바람직한 일이 아니기도 하다. 하지만, 주사파처럼 철학 없는 '추종자'들과의 연대 역시 바람직한 일이 아니기는 마찬가지다. 오해 없기를 바란다. 사태를 너무 나이브하게 바라보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민노당의 모든 NL이 주사파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민족주의는 내가 쉽게 동의할 수 없는 주의주장이지만, 민족주의 자체를 비난할 권리는 없다. 계급적 의식이 있는 민족주의라면 얼마든지 받아들일 수 있다. 실제로 분단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에게 민족의 미래는 계급의 미래와 개개인의 미래에 엄청난 영향을 끼치기 때문이다. (분단 시대는 국방 예산 등 엄청난 비용 지출을 필요로 하고, 가장 기본적인 인권이라 할 (이산) 가족의 만남을 가로막고 있다.)


3. 분당론에서 염려되는 것

분당론에서 염려되는 것은 소중한 민주노동당의 토대가 와해되고, 지지층이 분산 및 이반되는 것이다. 지난 2002년의 프랑스 대통령 선거 때에는 사회당Parti Socialiste의 조스뺑이 국민전선Front National의 르 뻰에게 밀려나는 사건이 있었다. 결국 결선투표에서 시라끄가 80% 이상의 득표율로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전체적으로 좌파 정권을 지지하는 프랑스인들이 많았음에도 우파 시라크가 대통령이 된 것은 1차 투표 때 좌파 연합의 표가 분산된 까닭이 크다. 1차 투표에서 시라끄가 19.88%, 사회당의 조스뺑이 16.18%를 얻었지만, 여타 좌파 정당들인 노동자 투쟁당Lutte Ouvrière이 5.72%, 혁명적공산주의동맹Ligue Commuiste Révolutionnaire이 4.25%, 그리고 프랑스 공산당Parti Commuiste Français이 3.37%를 얻었다. 물론 사회당과 뜨로쯔끼주의자들, 그리고 공산당이 한 정당이 되리라고 예상하기는 힘들지만, 이들이 후보 단일화를 잘 수행했다면 수학적으로 충분히 좌파 정권 창출이 가능했을 약 30%의 지지율을 얻을 수 있다. (5.5% 가량의 표를 얻은 녹색당까지 고려하면 실제 효과는 그 이상일 수 있다.) 2002년 당시 좌파 후보들은 무려 7명이나 될 만큼 '난립'하였던 것이다.

민주노동당의 분당이 이와 같은 사태를 만들 수 있다는 점은 현실 정치의 면에서 극히 우려스럽다. 하지만, 분당을 통해 주사파들의 털고 가면 바로 그 점 때문에 민노당 지지를 유보해왔을 새로운 지지층을 흡수할 수 있을 뿐아니라, 바라건대는 한국사회당이나 녹색당 등과의 연대도 꾀할 수 있다는 희망도 보인다. 하지만 현실 정치적인 면 이외에도, 이 땅에 계급 의식에 기초한 어엿한 원내 정당이 있고 그 원내 정당이 '좌우의 날개로 나는' 한국을 이루어내는 중요한 요소라는 점에서 자부심의 원천이 될 수 있다는 점이 소중하다고 보겠다.

박노자 교수는 확실히 이 점을 알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민노당 분당 - 필요하지만, 만병통치약은 아니다 제하의 포스팅에서 '분당 이후'를 이미 통찰하고 있었다:

"김빠"들이 걸러진 뒤에 "정파"들은 혁파돼야 합니다. 우리가 "사민주의자와 조합주의자와 트로츠키주의자들의 느슨한 연합체"가 아닌, 진정한 계급 정당을 만들자면 정파 소속보다 당소속이 우선돼야 되지요. 당에서 정파적 이익을 배타적으로 추구하는 행위들은 부끄러운 행위가 돼야 할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컨대 "다함께" 회원이면서도 당적을 보유하는 사람의 경우에는, 일단 당에서 투표할 때에 "다함께"의 의견보다 당의 이익과 전망, 그리고 넓게는 한국과 세계노동계급의 이익을 먼저 의식하고 소신 투표해야 하는 것이 아닙니까?

그리고 마음은 아파도 진보정당을 구할 길은 이 길밖에 없습니다에서 볼 수 있듯이 분당해야 하는 까닭을 무엇보다도 대중정당의 건설이라는 확실한 목표 하에서 바라보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그 주장에 쉽게 찬동하고 신뢰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덧) 웹서핑 중 현단계의 상황을 가장 명쾌하게 정리한 글이 있어 소개한다:
민주노동당 : 이건 분당이 아니라 파당이다.
트랙백도 걸었다. 일독을 권한다.
명쾌한 정리라고는 하지만, 정리가 명쾌할수록 마음은 무겁다.
2008. 1. 2. 1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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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강만길. 1994. 『고쳐 쓴 한국현대사』. 서울:창작과비평사.
김구[도진순 주해]. 1997. 『백범일지: 백범 김구 자서전』. 서울:돌베개.

고쳐 쓴 한국현대사 상세보기
강만길 지음 | 창작과비평사 펴냄
누구나 쉽게 읽을 수 있는 한국현대사 개설서 <고쳐 쓴 한국현대사>. 1984년에 출간된『한국현대사』를 전면적으로 증보하여 내놓은 책이다. 이번 2판에서는 1판이 출간된 이래 새롭게 밝혀진 사실들을 반영하여 내용을 추가하거나 수정하였다. 또한 사진이나 도판을 새롭게 실어 시각적인 효과를 높였으며, 각 장을 요약한 도입부에 그 시대를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파노라마식 사진을 배치하였다. 이 책은 한국사 개설서로
백범일지(보급판) 상세보기
김구 지음 | 돌베개 펴냄
백범 김구 자서전. 『백범일지』는 친필 원본은 물론 등사본과 필사본, 여러 가지 출간본 등 여러 저본을 일일이 면밀하게 검토, 대조했다. 또한 사전류는 물론 고전, 규장각 자료 등의 고문서, 수많은 회고록, 일본, 중국 등 해외의 임정 관계 자료까지 두루 활용하고 여러 분야의 전문가들로부터 자문을 받아 원본의 미흡한 점과 착오 등을 수정, 보완했다. 27년간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이끌어온 민족독립운동가이자, 자신의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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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망이란 이 곳에 없는 것을 바라는 것이다. 따라서 이곳에 실재로서 현재하는 것을 바란다는 것은 모순이다. "그대가 곁에 있어도 나는 그대가 그립다"면 사실 '그대'는 곁에 없는 것이 아닌가 고민해 봐야 한다.

삶의 영원한 항등식처럼, 모든 사람이 바라는 것은 행복한 삶이다. 여기까지 인정한다면, 그 다음 행복의 각론에서 저마다의 차이를 인정해야 하는 순서가 남아 있다. 뒤라스의 『모데라토 칸타빌레』에서 안 데바레드 부인이 바랐던 것은 그가 속한 곳의 정원과 무도회와 파티에는 없는 것이었다. 데바레드 부인의 행복이란 무엇이었을까. 데바레드 부인은 무엇을 바랐고, 무엇을 욕망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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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네 지라르는 모든 욕망은 주체와 대상 이외에 또다른 타자가 있다고 말했다. 이를테면 중세의 기사들은 자신들의 롤 모델role model인 기사 이외에 스스로 숭배하는 부인dame이 제각기 있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시시각각 자신의 승전보와 결투 결과를 부인에게 인편으로 알리기에 바빴던 기사들에게 있어서 부인이라는 타자는 무척 중요한 삼각형의 꼭짓점이 되는 것이다.

데바레드 부인에게 있어서 자신의 집은 감옥과 같은 것이다. 데바레드 부인은 그것을 약간 알고 있었다. '약간'이라는 말을 쓰는 것은 그가 아주 미약한 방법으로 그 감옥에서의 정기적인 탈주를 실행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이는 매일같이 엄마와 함께 그 도시를 돌아다니는 데 익숙해져 있었"다고 화자는 말하고 있다. 데바레드 부인이 자기가 살고 있는 곳이 감옥이라고 느낀 보다 정확한 계기는 아이가 모데라토 칸타빌레로 피아노를 치고 있을 때 있었던 사건이다.아마 어떤 치정 사건에 관계된 살인 사건임이 분명한데, 어쨌든 이것이 삼각형의 한 꼭짓점이 되어 데바레드 부인의 곳의 감옥에 대한 자의식을 성장시키게 된다.

(여성의 자의식에 대해서 우리는 이미 샬롯 퍼킨스 길먼Charlotte Perkins Gilman의 「누런 벽지The Yellow Wallpaper를 알고 있다. 『모데라토 칸타빌레』에서의 데바레드 부인은 안락한 삶 속에서 '누런 벽지'를 발견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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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데라토 칸타빌레』가 아름다운 것은 한 부르주아 부인의 일탈이 온전히 말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부인은 한 사내에게 자신의 감옥에서의 일상을 말하고, 자신이 있는 감옥이 얼마나 아름답고 무서운지를 이야기한다(65-66):

"나무가 없는 도시에서 살아야만 해요 바람이 불면 나무들이 울부짖어요 여긴 언제나 줄곧 바람이 불죠 1년에 이틀을 빼놓곤 말이에요 제가 당신이라면 그래요 떠나가겠어요 여기 머물지 않겠어요 폭풍우가 지나간 뒤 바닷가에 죽어 있는 새들은 거의 다 바다새들이죠 폭풍우가 그치면 나무는 더 이상 울부짖지 않아요 목이 졸리는 것처럼 꽥꽥 비명을 지르는 새소리가 해변에서 들려와요 아이들은 무서워서 잠을 이루지 못하지만 전 아니에요 떠나가야겠어요."

마침표도 없이 이어진 문장에서 부인이 말하는 것은 자신의 감옥이다. 그것은 말로 시작해서 말로 끝맺고 있으며, 더 이상의 일탈을 허용하지 않는다. 그러면서 부인의 생각은 끊임없이 피와 죽음과 사랑의 일탈로 치닫는데, 그걸 알아챈 쇼뱅이라는 사내는 이렇게 묻는다(66):

"혹시" 하고 그가 말했다. "우리가 잘못 알고 있는 건지도 모릅니다. 그는 더 일찍 그 여자를 죽이고 싶었는지도 몰라요. 그녀를 처음 보았을 때 이미 말입니다. 말씀해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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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의 감옥은 7장에 가서 절정이 된다. 거기에서는 만찬이 벌어지고 있었고, 10년 동안 남의 입에 오르내린 적이 없는 여자는 술에 취해 만찬에 늦게 도착한다.

7장에서는, 다른 장에서와 달리, 여자에 대한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느낄 수 있다. 파티란 원래 그런 것이기도 하겠거니와, 여자의 변화나 그 날 밤의 이상한 행동들이 금세 소문이 되어 퍼지는 모습이 드러나는 것이다(106-107):

안 데바레드는 조금 전 오리 요리를 사양했다. 그렇지만 음식 접시는 아직 그 여자 앞에 멈추어 있고, 그 짧은 순간은 추문이 시작되기에 충분하다. 그 여자는 예전에 배운 대로 거절 의사를 분명히 알리기 위해 손을 치켜든다. 더 이상 권하지 않는다. 식탁 주변에 침묵이 자리잡는다.

[…]

주방에서는 그 여자가 오렌지 소스를 곁들인 오리 요리를 거절했고, 몸이 아프다는 소식이 전해진다. 다른 이유가 있을 리 없다는 것이다.


5

여자의 일탈은 소설 마지막에 와서 완성된다; 여자는 자신을, 죽은 여자와 동일시한다. 두려움 속에서 그 여자가 한 일은 한 남자와 입을 맞추고는 언어적으로 죽는 일이다(118-120):

"전 두려워요." 안 데바레드가 속삭였다.
쇼뱅은 테이블로 다가가 그 여자를 더듬어 찾았다. 찾다가 포기해버렸다.
"못하겠습니다."
그래서 그가 할 수 없었던 일을 그 여자가 했다. 여자는 입술이 서로 닿을 만큼 가까이 남자에게 다가갔다. 차디찬 그들의 입술은 조금 전 그들의 손과 같이 죽음의 의식을 따라 서로 포개진 채 떨면서 그렇게 머물렀다. 이루어졌다.

[…]

"당신이 죽었으면 좋겠습니다." 쇼뱅이 말했다.
"그대로 되었어요." 안 데바레드가 말했다.

장-자끄 아노 감독의 영화 탓에 메콩 강가의 '독신자의 방'과도 오버랩되는 이 장면은, 하지만 이미 좀더 위험하고 에로틱한 분위기를 띄고 있다. 따옴표 안과 밖을 삼투시키는 문장 "그대로 되었다"는 역시 그대로 창세기의 첫 장을 연출하고 있다: "그대로 되니라."

세계의 시작과 소설의 끝, 그 지점에서 어떤 욕망은 끝나고 다른 사랑은 시작되는 것이다, 보통 빠르기로 노래하듯이.


모데라토 칸타빌레
마르그리트 뒤라스 지음, 정희경 옮김/문학과지성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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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왕자』의 여러 한국어판 번역본들과 불어판 또는 영어판을 비교해 보면 조금 이상한 부분을 찾을 수 있다. (아마도 쓸쓸했던 날의) 어린 왕자가 자기 행성 B612에서 본 해넘이의 수가 한국어판과 불어판 또는 영어판이 다른 것이다 한국어판은 대개 마흔세 번으로, 영어나 불어판은 마흔네 번으로 기록하고 있다:
« Un jour, j'ai vu le soleil se coucher quarante-quatre fois! »
- 갈리마르Gallimard 출판사 폴리오folio 문고판, 31쪽. (1999년 문고판 간행)

"One day," you said to me, "I saw the sunset forty-four times!"
- 하비스트북A Harvest Book하코트 브레이스Harcourt Brace판 캐서린 우즈Katherine Woods 옮김본, 21쪽.

"언젠가는 마흔 세 번이나 해지는 걸 봤지."
- 구舊 문예출판사판 김현 옮김본, 32쪽. (1973년 초판 간행)

「어느 날, 난 마흔 세번이나 석양을 보았어!」
- 혜림출판사판 황현산 옮김본, 29쪽. (1986년 초판 간행)

「어느 날인가는, 해 지는 걸 마흔 세 번이나 봤지요!」
- 고려원판 오증자 옮김본, 28쪽. (1987년 초판 간행)

"어느 날 나는 해가 지는 걸 마흔세 번이나 보았어!"
- 신新 문예출판사판 전성자 옮김본, 26쪽. (1999년 간행)

"어느 날은 해 지는 걸 마흔세 번이나 본 적도 있어."
- 문학동네판 김화영 옮김본, 35쪽. (2007년 간행)

어째서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일까?

1999년 출간된 갈리마르 출판사의 폴리오folio 문고판에는 이런 일러두기avertissement가 붙어 있다: "우리는, 앙뚜안 갈리마르와 함께, 폴리오 문고판의 하나로 출간하게 되어서, 그리고 어린 왕자의 완전판l'édition intégrale을 처음으로 출간하게 되어서 기쁘다." ...무슨 소리인가. 『어린 왕자』는 1943년 작가가 살아 있을 당시에 이미 초판이 간행되었는데!

1943년 쌩떽쥐뻬리는 미국에 있었고, 아마 전시戰時였기 때문이겠지만 프랑스 출판 편집자들과는 연락을 취할 길이 없었다. 해서 그는 '레이날과 히치콕Reynal & Hitchcock'이라는 출판사에서 『어린 왕자』의 초판을 발간하게 된다. 정작 프랑스에서는 약 3년 뒤 1945년에 갈리마르 출판사에서 첫 판이 발간된다. 문제는 이 때 갈리마르에서는 작가의 원본을 제대로 볼 수 없었던 상태에서 작업했다는 것이다.

폴리오 문고판의 일러두기는 그래서 그간 불어판에 있었던 오류의 목록을 보여주고 있다: 천문학자가 망원경을 통해 바라보는 별이 사라져 있고, 사업가와 천문학자의 노트나 그림에 차이가 있으며, 어린 왕자 목도리의 윤곽에서부터 꽃들의 꽃잎과 꽃받침, 가로등 아래의 태양 광선, 바오밥 나무의 뿌리에서부터 야자수의 가지가 다르다; 또한 어린 왕자가 본 해넘이의 횟수가 다르다.

한편, The Publication History of The Little Prince는 각국의 번역 판본들과 떽스뜨, 이미지의 차이를 상세하면서도 일목요연하게 정리하고 있다. 여기에서는 폴리오 문고판에서 지적하지 않은 두 가지 사항들을 더 지적하고 있다: 하나는 어린왕자가 입은 가운의 색깔이 초록색green이냐, 어두운 파랑dark blue이냐, 아니면 바다색navy blue이냐 하는 논란이 있어왔다는 점이고, 다른 하나는 소행성 B612에 대해 설명하기 위해 천문학자들이 별에 이름을 붙이는 방식을 설명하면서 '소행성325'를 예로 드는데 이 숫자가 일부에서는 '소행성3251'로 잘못되어 있다는 것이다.

어린왕자의 가운 색깔

불어판과 영어판, 그리고 두 한국어역본 사이의 가운 색깔이 모두 다르다


Il l'appelle par exemple : « l'astéroïde 325 ».
- 갈리마르 출판사 폴리오 문고판, 22쪽.

He might call it, for exemple, "Asteroid 325."
- 하코트 브레이스판 캐서린 우즈 옮김본, 11쪽.

예를 들자면 <소혹성(小惑星) 3251>하는 식으로 부르는 것이다.
- 구舊 문예출판사판 김현 옮김본, 23쪽.

이를테면, '소혹성 3251호'라는 식으로 부르는 것이다.
- 신新 문예출판사판 전성자 옮김본, 17쪽.

가령, '소혹성 제325호'라는 식으로 부르는 것이다.
- 문학동네판 김화영 옮김본, 23쪽.

어린 왕자가 해가 지는 것을 몇 번이나 보았는가와 '나'가 예로 든 소행성 이름이 무엇이었는가는 그래도 단순한 편집 판본 상의 차이일 뿐이다: 마흔 세 번과 마흔 네 번이라는 차이가 작품 내에서 유의미한 변화를 주는 것은 아닐 것이다. (이상한 일은 '신원'이라는 출판사에서 내 놓은 책은 엉뚱하게도 어린 왕자가 본 해넘이의 수를 "46번"으로 기록하고 있다는 것이다.) 예민한 작가가 언젠가 고쳐 쓴 뒤 어느 판본에 적용을 하지 않았거나 무던한 편집자가 실수를 했거나 했을 것이다. 물론, 어린 왕자에게 있어서 해넘이가 갖는 의미는 무척 각별하다. 슬픈 날에 마흔 몇 번이나 해넘이를 보았다는 것이나, 왕이 소원을 빌라고 하자 망설임 없이 해가 지는 것을 보고 싶다고 한 것, 그리고 24시간 동안 해가 1440번 진다는 이유로 점등인의 별을 떠나고자 하지 않은 점, 그리고 조종사인 '나'에게 해지는 것을 보러 가자고 무의식 중에 떼를 쓴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특히, 텍스트를 자세히 살펴보면 어린 왕자가 해넘이를 43번이 아니라 44번 보았다는 것을 확정해주는 부분을 찾아볼 수 있다. 어린 왕자는 별들이 즉각 복종한다는 왕의 권능을 부러워하며 이렇게 생각했다고 화자는 전한다:

어린 왕자는 그토록 대단한 권능에 감탄했다. 만약 자기에게도 이러한 권능이 있었다면 의자를 뒤로 물려놓을 것도 없이 해지는 광경을 하루 마흔네 번만이 아니라 일흔두 번, 아니 백 번 이백 번이라도 구경할 수 있었을 것 아닌가!
(문학동네판 김화영 옮김본, 55쪽.)

그럼에도 이것은 작자가 처음에 의도한 해넘이의 숫자를 밝혀주는 것일 뿐 44라는 숫자 자체가 어떤 고도의 시적 울림이나 상징성을 가진 유의미한 것이 아님은 마찬가지다.

하지만 작가가 직접 그린 그림에 있어서는 문제가 좀 다르다: 그림이 좀더 바랜 것에서 시작해서 그림 자체에 있어야 할 것이 빠진 것도 있다. 이는 작가의 원판 그림이 미국 출판사들에서 프랑스 출판사들로 전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천문학자①"

천문학자가 망원경을 통해 별을 보고 있는 것이 맞는 그림인데, 별이 아예 빠져서 편집되어 있다.

"천문학자

천문학자가 설명하는 칠판의 도형이 조금 다르다. 가령 원의 중점에서 1사분면으로 나가는 선의 각도가 누락되어 있다.

"바오밥나무"

바오밥나무의 뿌리가 좀더 단순화되어 있다.

"점등인"

가로등 아래의 태양광선 하나가 없다.

서점에서 살펴본 결과, 해넘이 떽스뜨와는 달리 대부분의 책에서 작가가 그린 그림의 문제는 없었다. 몇몇 번역 판본이 예전 그림을 그대로 쓰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중요한 것은 어린 왕자가 해넘이를 마흔세 번 보았나 마흔네 번 보았나가 아니라, 어린 왕자의 떽스뜨가 어떻게 정확히 확정될 것인가이다. 마흔세 번과 마흔네 번이 갖는 차이는 크지 않겠지만, 어린 왕자가 느꼈을 쓸쓸함을 표현하기 위해 마흔 몇 번을 100번이나 200번으로 바꿀 수는 없는 것이다.


어린 왕자 - 8점
생 텍쥐페리 지음, 김화영 옮김/문학동네

어린왕자 - 8점
생 텍쥐페리 지음, 전성자 옮김/문예출판사

Posted by 엔디
데까르뜨가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라고 외쳤을 때, 그의 목소리에는 자못 흥분한 떨림이 섞여 있었다. 그는 이성을 가지고 세계의 한 부분을 정확하게 설명했던 것이다. 헬라인처럼 로고스logos를 원했던(고전1:22) 데까르뜨는 세계를 온전히 이해할 수 있는 가능성을 거기서 보았던 것이다.

대학 시절, 박이문 선생님의 교양 철학 수업을 들을 때 참 의아했던 일이 있다. 이성의 신뢰자를 자청했던 그 수업의 이공계열 친구들이 이렇게 말했던 것이다: "세계의 모든 데이타를 알게 되면 이후 세계의 진행 방향을 알 수 있을 것이라고 믿습니다." 이를테면, 그들은 목적론téléologie보다는 기계론méchanisme의 입장에 선 셈이었는데... 나를 의아하게 했던 것은 그들이 쓰는 서술어였다. 결국 그들은 객관적인 자료data를 필요로 한다고 하면서도 가장 주관적인 말 '믿습니다'를 쓸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나는 이와 같은 그들의 '믿음'을 이상하게 여기며 친구와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의 원리에 관해 대화했다.) 라플라스나 하이젠베르크에 대한 수학사/과학사적 지식은 부족했지만, 그것은 그것대로 젊은 이공학도들의 열정이라 볼 수 있겠다.



여기 또다른 열정이 있다: 상상력의 열정이다. "합리주의가 이성에 의해 세계를 분석·파악하는 반면에 낭만주의는 상상력에 의한 세계 자체의 변모를 꾀한다."(23쪽) 상상력과 이미지는 세계를 이해하는 것을 뛰어넘어 세계를 변모시키려고 한다. 시인 브르통Breton의 말을 들어보자:

언젠가는 과학들이 처음 보기에는 자신들과 대립적으로 보이는 이 시적 정신에 접근할 날이 오게 될 것이다. 지금 그 과학들의 쇠사슬을 끊고, 여러 측면에서 부드럽게 휩쓸 준비가 되어 있는 것은 바로 발명이라는 천재이다. (38-39쪽)

그는 일종의 돈오론을 설파하는데, 그에 따르면 "우발적이라고 할 수 있는 두 항의 접근에서 독특한 빛, 즉 이미지의 빛이 뿜어 나오는 것"(46쪽)이라는 것이다.

이미지는 상상력이 세계를 이해하는 도구가 된다. 가령 바슐라르는 객관적 인식의 정신분석la psychanalyse de la connaissance objective을 방해하는 이미지들을 배제하고 보다 정확한 세계 이해를 위한 책을 쓰다가 거꾸로 그 이미지들에 매혹당한다. 그는 『불의 정신분석』의 서문에서

우리는 불에 대한 직관이 다른 어떤 것보다도 더 무거운 오류들에 억눌리고 있다는 것을 정확하게 보여줄 작정이다. 그 직관이야말로 경험과 측정만이 필요한 문제에 대해서, 직접적인 확신을 형성하도록 우리를 이끌고 있는 것이다. (Bachelard, 11)

라고 쓰고 있으면서도 책의 끝부분에서는 그 이미지의 몽상에 빠질 것을 권하기도 한다(59쪽).

한편 곽광수 교수는 『가스통 바슐라르』에서 바슐라르의 『공기와 꿈』은 이미지에 의존하지 않은 상상력으로 나아가는 통로라고 보고 있기도 한데(곽광수, 49-50), 앞서의 '돈오론'과 연결시킬 수 있다면 이런 상상력은 열반nirvana의 경지라고 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브르통과 바슐라르, 그리고 보들레르와 뒤랑을 읽어나가면서 상상력이라는 것이 삶을 이루는,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우리는 알아차리게 된다. 이 책의 매력은 바로 그 희망의 긍정이다. 우리는 상상력에 대한 연구를 통해 우리 삶을 전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어떤 희망을 갖게 되는 것이다.

프로이트는 잠에서 깨자마자 꿈을 기록했다고 하는데, 우리의 상상적 몽상rêverie도 매일 기록한다면 하나의 체계와 세계 이해의 요소로 작용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그렇다면 이것은 또 다른 상상력과 몽상의 열정이다.


Bachelard, Gaston. 1977. 불의 精神分析. 삼중당.
곽광수. 1995. 가스통 바슐라르. 민음사.


프랑스 문화와 상상력
박기현 지음/살림

Posted by 엔디
르몽드
『르 몽드』
최연구, 살림.
2003년 12월 30일 초판.

<ㅉ=69>르 몽드 광고 수입은 38%

르 몽드의 1년 매출액은 1999년 기준으로 2억3천5백만 유로(약 2,700억 원) 규모이다. 그런데 르 몽드 총매출액 중 신문 판매를 통한 수입은 2000년 기준으로 전체 수입 중 62%이다. 반면 광고 수입은 38%이다. 이 수치는 장-마리 콜롱바니 회장이 르 몽드를 이끌면서 재정난을 극복하기 위해 광고 비중을 대폭 늘린 이후의 수치이다. 199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르 몽드의 수입 구조는 구독료 수입(지대)과 광고가 각각 70%, 30% 정도였다. 어쨌거나 광고 수입보다 신문 판매 수익이 절대적으로 많다는 것은 이 신문이 광고주인 대기업의 영향력으로부터 벗어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일반적으로 자본주의의 언론은 정치권력으로부터 독립적일 수는 있어도, 광고주인 기업으로부터는 자유로울 수가 없다. 르 몽드는 이런 자본주의 언론의 한계를 처음부터 자각했고, 경제권력(자본)으로부터 독립적인 목소리를 내기 위해 광고보다 판매 수익을 우선으로<ㅉ=70>해야 한다는 대원칙을 초지일관 고수하고 있는 것이다. 경제 권력으로부터의 재정적 독립은 르 몽드의 독립성을 뒷받침하는 토대이다. (한편 우리나라 신문은 어떤가. 우리나라는 그 구성 비율이 정반대이다. 우리나라 주요 일간지의 재정구조를 보면 광고 수입이 평균적으로 신문 재정의 약 70%를 웃돈다.)

이처럼 광고 수입을 제한하여 언론의 독립성을 견지하고 있는 르 몽드는 여기에서 만족하지 않고 1985년부터는 광고 업무를 아예 자회사로부터 분리시켜 편집과 광고의 유착 관계를 근원적으로 '단절'시켰다. 르 몽드는 이런 면에서 여러 가지로 독립 언론의 모델이 되고 있다.

그러나 르 몽드가 최고의 지성지가 될 수 있었던 것은 독특한 소유 구조나 재정적인 독립성 때문만은 아니다. 르 몽드는 분명한 색깔과 논조를 가지고 있는 소신 있는 언론이다. 기사의 깊이와 세련된 분석은 단연 타 신문의 추종을 불허한다.

르 몽드는 '모든 권력(정치권력과 금권)으로부터의 독립'을 지향한다. 하지만 독립성과 중립성은 다른 개념이다. 르 몽드는 양비론처럼 모호한 입장을 표방하거나, 중립성을 내세우는 회색 언론은 결코 아니다. 르 몽드의 입장은 오히려 분명하고 명확하다. 특히 인종주의나 극우 이데올로기에 대한 르 몽드의 입장은 비타협적이기까지 하다.

프랑스 언론들은 대부분 자신들의 정치적 색깔을 분명히 갖고 있고 사설의 논조도 일관성을 갖는다. 르 몽드의 목소리는 진보적이다. 르 몽드는 프랑스 지성들이 그러하듯 자신과<ㅉ=71>다른 의견에 대한 정치적인 공격을 가하지 않는다. 더군다나 언론이 정치인이나 정당, 정치 세력에 대해 색깔 공세를 퍼붓는다는 것은 적어도 프랑스에서는 가능하지도 않을 뿐더러 상상할 수도 없다. 프랑스 문화와 지성을 유지해 온 가장 큰 힘은 다양성에 있기 때문이다. 특히 정치적 다양성, 문화적 다양성은 프랑스 사회가 생명처럼 소중히 여기는 가치이다. […]

<ㅉ=75>중립 표방 않는 프랑스 언론

프랑스 언론은 결코 중립을 표방하지 않는다. 이것은 우리나라 언론들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차이점이다. 우리나라 언론은<ㅉ=76>저마다 정론직필의 정론지를 자처하고 있고 언론의 객관성, 중립성을 내세운다. 보수적인 신문이든 진보적인 언론학자이든 모두 같은 논지를 펴고 있다. 가령 언론학자 김동민 교수는 오마이뉴스에 실린 글을 통해 "나는 거듭 강조하거니와 언론의 생명은 '도덕성'과 '비당파성'이다"라고 말했다. 언론의 중립성을 통한 공정성을 주장하는 것은 진보적인 언론도 마찬가지이다. 프레시안에 실린 다음의 글은 '새 언론포럼'에서 프레시안의 한 간부가 발표한 발제문의 일부이다.

언론이 현실의 특정 정치 세력과 일체화되는 것은 위험하다. 현실의 어떤 개인이나 집단도 진리와 정의를 독점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당은 항상 옳다'는 공산당의 무오류 선언은 오류였음에 드러났다. 마찬가지로 현실의 한 세력이 절대선을 주장하는 것은 위험하며 이에 동조하는 것은 더욱 위험하다. 현실의 특정 세력은 정당성의 일부만을 가지고 있을 뿐이다. 문제는 '누가 더 정당성의 비율이 많은가'이다. 언론의 역할은 공정한 심판자로서 현실 세력의 시시비비를 냉정하게 가려내는 것이다.(「프레시안」, 2003년 11월 21일.)

언론이 공정한 심판자로서 현실 세력의 시시비비를 객관적으로 가려낸다는 것이 가능한가? 정치적 사안에 대한 공정한 심판이 과연 가능한가? 이런 객관성, 가치중립성의 주장<ㅉ=77>은 막스 베버적인 관념에 지나지 않는다. 보수건 진보건, 한국 언론들이 하나같이 공정성과 중립성을 표방하는 것은 한국 언론이 그동안 너무 편파적이거나 친권력적이었음을 반증하는 건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언론이 중립성, 비당파성, 객관성을 견지한다는 것 또한 관념적인 신화에 불과하다. 프랑스 언론은 도덕성, 진실성은 표방하지만 비당파성을 표방하지는 않는다. 하니리포터 김승열은 언론은 오히려 당파성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프랑스 언론에 비추어 본다면 지극히 당연한 이야기이다.

현재 한국 언론은 당파성이 없는 것이 문제라고 본다. 한국 언론 대부분이 무당파성, 정론, 객관성, 균형을 강조하지만, 이는 그야말로 독자들을 혼란에 빠뜨릴 뿐이다. 프랑스에는 오히려 이러한 당파성을 근거로 논쟁을 하고 있다고 한다. 극우에서 극좌에 이르는 언론들이 무지개처럼 늘어서 있고, 누군가가 사회에 대한 발언을 할 때는 그가 지지하는 정당, 그 정당을 지지하는 언론을 보아야만 올바로 발언의 의미를 파악할 수 있으며, 미국도 마찬가지도 명백히 공화당과 민주당을 지지하는 언론이 나누어져 있다. 성숙한 민주주의 국가라면 다양성을 토대로 하여야 하고, 이는 언론의 당파성을 인정하는 것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겠는가? 언론에게 필요한 것은 사실과 진실이지 비당파성이 아니다. 피하여야 할 것은 왜곡이지 당파성이 아니다.(김승열, 「하니리포터」, 2001년 7월 5일.)

<ㅉ=78>언론의 자유를 보장해 주는 것은 언론의 독립성이다. 한 나라가 독립을 잃으면 자유를 잃듯이, 언론도 독립성을 잃으면 자유를 잃게 된다. 언론의 역사는 어떤 측면에서 본다면 언론의 자유를 쟁취하기 위한 투쟁의 역사였다. 현대 사회에서 언론은 입법, 행정, 사법부에 버금가는 제4의 권력(제4부)이라고 불릴 정도로 막강한 힘을 가지고 있다.

르 몽드 디플로마티크의 주필인 이냐시오 라모네(Ignacio Ramonet)는 자신의 저서 『커뮤니케이션의 횡포』에서 미디어를 제4부가 아닌 제2부로 규정하고, "제1부로 뛰어오른 경제, 제3부로 밀려난 정치와 함께 새로운 '삼권 분립'을 이루어야 한다"고까지 주장한다. 하지만 그래도 이 막강한 펜의 힘은 때로는 정치권력 앞에, 때로는 자본의 위력 앞에 굴종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프랑스의 언론도 처음부터 자유 언론이었던 것은 아니다. 프랑스의 국력이 절정에 달했던 나폴레옹 시대의 언론만 보더라도 프랑스의 언론은 지금과 같지 않았다. 당시 프랑스의 신문은 권력으로부터 자유롭기는커녕 정치권력 앞에서 해바라기 같은 모습을 보여줬다.

권력 앞에서 신문 편집이 굴절된 고전적인 예가 나폴레옹 시대의 프랑스 최대 일간지 모니퇴르(Moniteur)이다. 지금은 사라진 언론이지만 모니퇴르는 프랑스 혁명 과정에서 시민혁명을 옹호하면서 최대의 일간지로 부상했다. 하지만 반혁명적인 나폴레옹이 집권하자 이번에는 나폴레옹을 적극적으로 지<ㅉ=79>지하면서 시민세력의 기대를 저버린다. 나폴레옹이 패전한 뒤 엘바 섬으로 유배되자, 이 신문은 다시 나폴레옹을 비판한다. 그러나 나폴레옹은 1815년 3월 1일 엘바 섬을 탈출해 다시 파리로 입성한다. 나폴레옹이 엘바 섬을 탈출해 파리로 들어오는 20일간에 드러난 모니퇴르의 논조 변화를 보면 언론이 권력에 대해 얼마나 무력했고 친권력적이었는지를 생생하게 확인할 수 있다. 모니퇴르 머리기사의 제목 변화 과정은 다음과 같다.

-살인마 소굴에서 탈출
-코르시카의 아귀 쥐앙 만에 상륙
-괴수 카프에 도착
-괴물 그르노블에 야영
-폭군 리용을 통과
-약탈자 수도 60마일 지점에 출현
-보나파르트 급속히 전진! 파리 입성은 절대 불가
-황제 퐁텐블로에 입성하시다
-어제 황제 폐하께옵서는 충성스런 신하들을 거느리고 궁전에 듭시었다(손석춘, 『신문읽기의 혁명』(개마고원, 1997) 재인용.)

전두환 장군이 집권하자 조선, 동아일보가 보여주었던 용비어천가식의 보도 기사가 프랑스의 나폴레옹 시대에도 있었던 것이다.

<ㅉ=80>언론은 권력과 긴장 관계 유지해야

물론 오늘날의 프랑스 언론에서 이런 권력에 대한 아부를 찾아볼 수는 없다. 그만큼 시민 사회가 탄탄해졌고, 언론이 투쟁을 통해 '자유'와 '권력으로부터의 독립성'을 쟁취했기 때문이다. 적어도 언론이 사회의 공기(公器)로서 제 기능을 다하자면 언론은 권력과 부단히 긴장 관계를 가져야 한다.

언론이 정치권력으로부터 독립적이라고 해서 언론의 독립성이 완전히 실현된 것은 아니다. 자본주의 하에서는 경제권력이라는 보이지 않는 손이 언론에 절대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언론은 여전히 '광고'라는 경제권력으로부터 크게 자유롭지 못하다. 하지만 르 몽드는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르 몽드는 자본주의의 언론도 충분히 경제권력으로부터 독립적일 수 있다고 믿고 있다. 때문에 르 몽드는 정치권력과 금권으로부터의 독립성이야말로 신문의 생명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Posted by 엔디
어린왕자가 지구로 다시 돌아왔다. 그의 별에 어쩌다 호랑이가 머물게 되었고, 호랑이 때문에 양과 장미가 위협을 받게 되었기 때문이다. 어린왕자는 호랑이 사냥꾼을 찾고 있다.

워낙 쌩떽쥐뻬리의 『어린왕자』는 동화로 씌어진 것이다. 동화가 소설보다 수준낮은 것이라는 생각은 큰 오산이리라. 쌩떽쥐뻬리는 심지어 『어린왕자』를 어른인 레옹 베르뜨에게 헌정하는 것을 어린이들에게 사과하고 있기까지 하다. 쌩떽쥐뻬리가, 혹은 그의 어린왕자가 경멸했던 것은 '버섯'같은 어른들의 사고방식이다.

『다시 만난 어린왕자』에서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어린왕자는 어른들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것은 그가 자신의 별(사실은 행성)을 떠나 지구로 오는 길에 만난 많은 사람들이 어떻게 그려지는지를 보면 금방 나타난다. 어린왕자는 차례로 환경주의자, 광고기획자, 통계학자, 관리인, 편갈라 싸우는 사람, 그리고 소녀, 지구에 와서는 문학평론가를 만난다. 물론, 소녀를 빼고는 모두 부정적으로 그려진다. 그건 쌩떽쥐뻬리의 플롯을 그대로 따온 것이지만, 다비뜨의 묘사는 보다 우리 시대에 밀접하게 관련된 것이다.

김정란은 해설에서 쌩떽쥐뻬리의 '모던'함과 다비뜨의 '포스트모던'함이 어디서 차이를 보이는지 세목들을 자세히 이야기하고 있다. 실제로 다비뜨의 글에서 '모던'에 대한 반발이 많이 읽히고 있다는 것이다. 대표적인 부분은 바로 이 부분이다.

생텍쥐페리 선생님, 선생님께서 전에 출간하신 책을 읽어보니까, 선생님께선 비행사의 피를 가지고 계셨더군요. 선생님이셨다면, 그냥 휙 날아가셨을 겁니다. 하지만, 저는 공기보다 더 무거운 걸 타고 하늘로 올라가는 게 별로 내키질 않아요. 하늘 높이 올라가서 내려다보면, 세상은 너무나 조그마해서, 마치 지도가 펼쳐지는 것같이 느껴지지요. 어떨 때는 지도를 보는 것보다도 못해요. 풍경은 양떼처럼 흩어져버리고, 형태를 알 수 없는 구름 낀 산정밖엔 보이질 않습니다. 제가 원하는 것은, 구체적인 것입니다. 물과 땅에 아주 가까이 다가가 그들과 하나가 되는 것, 제가 원하는 건 그런 것입니다. (12-13쪽)

그러나 이 책의 단점을 꼽으라면, 그것은 내가 보기에 아주 치명적인 단점인데, 어린이보다는 어른을 위한 글이라는 점이다. 광고기획자나 편갈라 싸우는 사람 정도는 어린이가 읽어서 이해할만하다고 볼 수 있지만, 환경주의자나 통계학자, 지구의 문학평론가에 대한 내용을 어린이들이 읽어서 이해할 수 있겠는가? 이것은 오히려, 뻔한 사실을 '어린이'의 입장에서 본다는 의미의 '낯설게 하기'에 불과한 것이 아닌가말이다. 『어린왕자』와 비교해보면 그런 차이는 한눈에 보인다. 해서 결과적으로는, '지식인'과 '무식쟁이'의 경계를 허물고 '고급'과 '저급'의 갈림을 모호하게 만드는 '포스트모던'한 글쓰기로서는 어느 정도 실패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다시 만난 어린왕자
장 피에르 다비트 지음, 김정란 옮김/이레

Posted by 엔디
《왕자와 공주》는 '꿈과 희망의 공장'인 디즈니가 절대 넘볼 수 없는 수준의 새로운 아니마시옹이었다. 디즈니 애니메이션은 전체적으로 하나의 우화적인 알레고리에 불과한 것이지만, 《왕자와 공주》는 상상력과 자의식이라는 부분을 겹쳐놓은 풍부한 두께를 가지고 있었다.

비록 그 안에 소속된 단편들은 유럽의 고전 동화들의 세계관에서 유달리 나아진 것이 없지만, 그런 상징들을 그들이 체현體現하는 과정은 전혀 새로운 방식이었던 것이다. '원하는 대로 이루어진다' 내지는 '믿음대로 되니라'라는 표현에 기초해볼 때 이 영화는 피그말리온의 '믿음'과도 관련될 것이지만 사실은 그보다 더 자신을 향해 있다. 다시 말해 그것은 피그말리온적인 나르시시즘이다.

자신이 극의 주인공이고 싶어하는 것은 사실 아이들이 흔히 가지는, 잘 알려진 동일시 행동이다. 디즈니의 시청자는 주인공이 되는 환상을 갖는다. 그러나 그것은 단지 환상일 뿐이다. 디즈니의 주인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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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 캐릭터가 너무 강렬해서 다른 사람은 그것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왕자와 거지》의 주인공들이 그림자극처럼 묘사되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들은 시종 얼굴조차 자세히 비치지 않는다. 스콧 매클루드는 『만화의 이해Understanding Comics』에서 사실화보다는 카툰과 같은 단순한 묘사가 자기동일시와 관련을 맺고 있다는 점을 지적한 바 있다.

끝으로 전통, 《왕자와 공주》에서 전통의 문제는 생각보다 크다. 여기서 유럽의 전통은 그대로 소재가 된다. 아니 유럽의 전통뿐 아니라 일본의 회화나 3000년대의 미래세계의 여왕까지도 어떤 전통의 연장선상에서 생각해볼 수 있는 것이다. '미국문화와예술'을 듣는 후배 둘에게 "미국에 문화가 있어?"라고 물었던 것이 생각난다. 그러나 내 생각은 아직까지도 큰 변화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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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도Godot'는 죽음이다. 도대체 사람이 이생에서 죽음말고 무엇을 기다릴 수 있단 말인가. 이성복이 삶이란 '집으로 가는 길'이라고 했던 것처럼 고도기다리기 역시 '집으로 가는 길'이다. '집'에 도달하면 그들은 살게(즉, 죽게) 된다.

블라디미르 내일 목이나 매자. (사이) 고도가 안 오면 말야.
에스트라공 만일 온다면?
블라디미르 그럼 살게 되는 거지.
-『고도를 기다리며』오증자 옮김, 민음사, 2000, 158쪽.


그러나 그들이 아무리 죽기를 바라고 목을 매달아도 그들은 죽을 수 없다.

에스트라공 그렇다면 당장에 목을 매자.
블라디미르 나뭇가지에? (둘은 나무 앞으로 다가가서 쳐다본다) 이 나무는 믿을 수가 없는걸. (24쪽)


그곳은 '죽지 못하는 곳'이다. 에스트라공이 "그런데 아무 일도 일어나지지 않는군."(61쪽), "그래 반가우니 이젠 무얼 한다?"(101쪽), "이젠 뭘 한다?"(127쪽)라며 매차례 푸념할 때, 그는 영원성에 대해서 푸념을 퍼붓는 것이다. 그는 아주 "제일 좋은 길은 날 죽여주는 거다."(104쪽)라고 말하기도 한다.

고도는 매일의 약속을 연기한다. 그는 저녁에 메신저(소년)을 보내 사람들에게 자신의 약속을 미룬다. 여기서 '미룬다'는 것은 오늘은 아니라는 뜻이겠지만, 좀더 구체적으로는 오늘이 아닌 날은 아니지 않다는 것이다. 고도는 자신의 약속을 미룸으로써 자신의 약속을 가장 효과적으로 상기시키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아마 잠을 말하는 것일까?) 이런 '미룸-상기'의 기술에 말려들어 그들은 고도에게 "꽁꽁 묶여 있는" 삶을 살게 되는 것이다. (27/30쪽)

포조와 럭키 역시 죽음과 무관하지 않다. 그들이 '귀머거리'가 되고 '벙어리'가 된 것이 다른 무엇도 아니고, 우연에 기초한 원인없는 결과라는 점은 죽음의 속성을 가장 잘 나타내 주는 것이다.

포조 어느 날 깨어보니 캄캄하더란 말이오. 마치 운명처럼. (사이) 그래서 지금도 나는 혹시 내가 잠을 자고 있는 게 아닌가 의심이 들 때가 있다오. (144-145쪽)

포조 묻지 마시오. 장님에겐 시간 관념이 없는 법이오. (사이) 그리고 시간과 관계되는 건 다 모른다오. (145쪽)

포조 (버럭 화를 내며) 그놈의 시간 얘기를 자꾸 꺼내서 사람을 괴롭히지 좀 말아요! 말끝마다 언제 언제 하고 물어대다니! 당신, 정신 나간 사람 아니야? 그냥 어느 날이라고만 하면 됐지. 여느 날과 같은 어느 날 저놈은 벙어리가 되고 난 장님이 된 거요. 그리고 어느 날엔가는 우리는 귀머거리가 될 테고. 어느 날 우리는 태어났고, 어느 날 우리는 죽을 거요. 어느 같은 날 같은 순간에 말이오. 그만하면 된 것 아니냔 말이오? (더욱 침울하게) 여자들은 무덤 위에 걸터앉아 아이를 낳는 거지. 해가 잠깐 비추다간 곧 다시 밤이 오는 거요. (149-150쪽)


이런 면에서 고도는 죽음이고 그들은 인류의 대표라고 할 수 있겠다. 아스트라공과 블라디미르는 '인류의 대표'이고 포조는 '인류 전체'다. 짐작컨대 럭키나 소년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블라디미르 […] 방금 들은 살려달라는 소리는 인류 전체에게 한 말일 거야. 하지만 지금 이 자리엔 우리 둘뿐이니 싫건 좋건 그 인간이 우리란 말이다. 그러니 너무 늦기 전에 그 기회를 이용해야 해. 불행히도 인간으로 태어난 바에야 이번 한 번만이라도 의젓하게 인간이란 종족의 대표가 돼보자는 거다. (133쪽)

에스트라공 다른 이름으로 불러보면 어떨까?
블라디미르 아주 뻗은 건 아닐까?
에스트라공 그럼 재미있을 거다.
블라디미르 뭐가 재미있어?
에스트라공 다른 이름으로 불러보는 게 재미있겠단 말이다. 아무 이름이나 차례차례로 말야. 그럼 시간이 잘 갈 거다. 그러노라면 진짜 이름이 나오겠지 뭐.
블라디미르 포조가 저자 이름이래도.
에스트라공 이제 두고보면 알 게 아냐? 자…… (생각한다) 아벨! 아벨!
포   조 이쪽이오!
에스트라공 그것 봐.
블라디미르 이런 짓거리에는 이제 넌더리가 난다.
에스트라공 또 한 놈의 이름은 카인일 거다. (부른다) 카인! 카인!
포   조 이쪽이오!
에스트라공 그러면 인류 전체다. (140쪽)


이렇게 장광설을 늘어놓았지만 사실은 모두 거짓이다. 고도가 빵이네 희망이네 통일이네 자유네 많은 소리가 있지만, 영어 God(신神)과 불어 Dieu(신神)의 합성이라는 주장도 있지만, 그걸 도대체 누가 알 수 있단 말인가? 베케트 자신이 "내가 그걸 알았으면 작품에다 썼을 것"이라는 말을 익살스러운 대답으로 받아들인다 하더라도 그가 그것을 알고 썼으리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오히려 기다리는 행위 그 자체다. 그것이 인생이다, 라고 나는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고도를 기다리며
사무엘 베케트 지음, 오증자 옮김/민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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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단 산울림의 《고도…》가 세계적으로 호평을 받았다는 소리도 들은 바 있고 해서 기대를 상당히 했는데, 그 기대가 전혀 깨어지지 않았다. 처음부터 끝까지 조금의 흠도 없이 진행된 연극은, 거의 세 시간이나 되는 긴 연극이었는데 전혀 지루하지 않았다.

예상과는 무척 다른 연극이긴 했다. 그건 나의 고정관념 때문에 텍스트를 잘못 읽어서 생긴 문제였다. '실험극', '부조리극' 따위의 말 때문에 나는 이 연극이 으례 지루하고, 시종 비장감을 줄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실제로 베케트의 '고도…'는 비장한 극이라기보다는 일종의 희극이라고 보는 편이 옳을 것이라고 이 연극을 보고 동의하게 되었다. 그리고 여전히 이것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형식이다. 비극적인 희극 혹은 희극적인 비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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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은 거의 완전히 원작을 실제로 구성해냈다. 내가 원작에서 특히 주목했던 부분은 대사들의 리듬이었다. 물론 원작에 특별히 meter라고 할 만한 것은 없다. 혹시 있다고 해도 번역과정에서 사라졌기가 쉬울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는 대사들이 '운율'이 없이도 한 권의 시집처럼 리듬감있게 진행되고 있었다. 번역의 뛰어남과 연출·연기의 뛰어남이 함께 있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에스트라공 그런데 우리가 그자한테 정확히 무슨 부탁을 했지?
블라디미르 너도 같이 있었잖아?
에스트라공 난 정신을 안 차렸거든.
블라디미르 저― 딱히 뚜렷한 건 없었지.
에스트라공 일종의 기도였지.
블라디미르 맞아.
에스트라공 막연한 탄원이었고.
블라디미르 그렇다고 할 수 있지.
에스트라공 그래 그잔 뭐라고 대답하데?
블라디미르 좀 두고 보자는 거야.
에스트라공 아무것도 약속은 못하겠다는 거군.
블라디미르 생각을 해봐야겠다는 거지.
에스트라공 맑은 정신으로.
블라디미르 가족들하고 의논도 하고.
에스트라공 친구들하고도.
블라디미르 지배인들하고도.
에스트라공 거래상들하고도.
블라디미르 자기 장부하고도.
에스트라공 은행 통장하고도.
블라디미르 그래야 결정을 내리겠다는 거지.
에스트라공 그건 당연하지.
블라디미르 하긴 안 그렇겠니?
에스트라공 그런 것 같군.
블라디미르 내 생각도 그렇다.

-『고도…』, 25-26쪽.

여기서의 대화의 리듬은 두 사람이 단어들을 주고받는 데서 확연히 드러난다. 이 장면에서 그들 두 사람이 말한다고 하는 것보다는 말이 '튀어나온다'고 하는 편이 좀더 정확한 설명이 될 것이다.

에스트라공 가자.
블라디미르 갈 순 없다…….
에스트라공 왜?
블라디미르 고도를 기다려야지.
에스트라공 참 그렇지. (81쪽)

이 대사는 연극 전편에 걸쳐 계속 나오고 있는데, 블라디미르가 오금을 굽혀앉으며 "고―도를 기다려야지―"라고 대답하면 에스트라공은 합장을 하며 "참! 그렇지!"한다. 번역자 오증자가 말한 것처럼 이 대화는 '교향곡의 모티브'처럼 계속되어 "기다림에 이유와 활기를 부여한다." 그러나 그런 "이유와 활기"는 그것이 단지 계속된다는 점에서 부여되는 것은 물론 아닐 것이다. 그런 면에서 임영웅의 연출은 베케트의 극에 대한 충실한 이해를 바탕으로 한 훌륭한 연출이다.

럭키의 그 유명한 장광설도 잘 읽어보면 그러니까 잘 들어보면 어떤 리듬이 거기에 숨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것은 어떤 구두점이 없음에도 대략 길이가 일정하게 설정된 어구의 길이에 기인하는 것이기도 하고, "인체체체", "아카카카데미", "설설설정"(이상 69쪽) 처럼 흐르는 리듬을 끊는 장치에 의거하기도 하는 것이다. 또 럭키의 장광설은 생각을 시작하게 되면 외부로부터의 치명적인 강압이 없이는 그가 말을 그만두려 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역시 그 리듬감과 리듬의 관성을 충분히 우리가 느낄 수 있는 것이다. 임영웅은 이를 치밀하게 계산하여 '생각' 이전에 일정한 휴지休止를 둠으로써 그 리듬감을 극대화시키고 있고, 더구나 굉장히 빠른 '생각'을 통해서도 리듬을 전혀 망치지 않고 훌륭하게 소화시키고 있는 것이다.

김인환은 "한 권의 시집이야말로 한 편의 연극에 매우 유사한 구조를 밑에 깔고 있다"고 말한 적이 있는데, 내가 보기에도 훌륭한 연극은 그 음악성 때문에 궁극적으로 시가 되고 만다.

블라디미르 그럼 갈까?
에스트라공 가자.

둘은 그러나 움직이지 않는다. (158쪽)
Posted by 엔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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