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말 '쟝르genre'는 본래 다만 '종류'를 뜻하는 말이다. 이를테면 "J'aime ce genre de fille."라고 하면 "나는 이런 유의 여자를 좋아합니다."라는 뜻이다. 프랑스말 '쟝르'가 현재의 "문예 작품의 형태상의 분류"라는 뜻을 가진 국제어, 장르로 더 많이 인식되면서 말의 쓰임은 상당한 정도로 변한 셈이다. 그러나 프라이의 지적대로라면 "장르의 비평이론에 손을 댈 때 우리는 아리스토텔레스가 남기고 간 그 이론에서 한 발자국도 더 나아가지 못하고 머물러 있음을 발견한다."(64쪽) 우리가 이 지금 '장르의 이론'을 보아야 하는 이유는, 세미나 꺼리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장르의 이론이 프라이의 비평이론의 씨눈이기 때문이다. 또한 앞서의 문장에서 홀로 이름씨固有名詞를 지우고 그 문장을 일반화시켜도 여전히 유효하다는 것도 주목에 값한다. 유기룡은 국어국문학회가 엮은 『국어국문학과 구미이론』에 실린 「신화문학론의 수용과 그 과제」의 둘째 장章에서 "이 신화적 원형이 반복되어 나타나는 신화 가운데서도 가장 전형적 신화가 문학의 관례인 장르를 이루게 된다는 관점에서 문학 장르의 이론까지 확대하게 된다."고 적고 있다.

비평을 스스로 선 인문과학의 하나로 세우기 위한 프라이의 의도는 원시적인, 소박한 귀납법에서 이른바 '귀납적 비약'을 거쳐 보다 연역적인 면모를 갖추어야 한다는 데까지 나아간다.(67-69쪽) 그는 가장 연역적이면서 동시에 가장 쓸모있는 수학을 예로 들어 "수학에서 우리는 세 개의 사과에서부터 '3'으로, 또 직사각인 밭에서부터 '작사각형'으로 나아가지 않으면 안 되는 것"(653쪽)이라고 말한다. 하므로 그가 『비평의 해부』의 도식적인 성격을 무릅쓰고 "비평에도 분류가 필요하다"(92쪽)고 말하는 데에까지 이르면 그의 비평이론에서 '장르의 이론'이 얼마나 높은 위치를 갖는지 알 수 있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 이상섭은 『문학 연구의 방법』의 「신화 비평의 방법」의 둘째 마디節에서 "신화 비평은 최대의 중요성을 부여하는 종류의 개념, 즉 쟝르(genre=종류)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 그러나 역사주의에서 말하는 쟝르의 개념과는 무척 다르다. <쏘넷>, <2막극>, <단편소설> 등등 역사적 쟝르는 단지 외형적 관례에 지나지 않는다고 보는 것이다."라고 풀이한다.


프라이는 스스로의 '장르의 이론'을 '수사비평'이라고 이름했다. 그 점 말해주는 바 크다. 그의 장르론은 "기본적인 제시의 방식에 의거하고 있"(470쪽)다. 그러나 네 장르―에포스, 산문(즉, '픽션'), 극, 서정시―를 설명할 때 그는 리듬 분석으로 일관한다. 아마도 리듬이 '제시의 기본형식radical of presentation'과 반드시 관련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것은 우리 옛 문학과도 얼마쯤 관련되어 있다. 상허尙虛 이태준은 『문장강화』 제1강의 「이미 있어온 문장작법」에서 "활판술이 유치하던 시대에 있어서는, 오늘처럼 책을 구하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 자연히 한 사람이 읽되 소리를 내어 읽어 여러 사람을 들리는 경우가 많았을 것이다. 소리를 내어 읽자니 문장이 먼저 낭독조로 써지어야 할 필요가 생긴다. […] 쓰는 사람은 내용보다 먼저 문장에 난조투어(亂調套語)를 대구체로 많이 넣어 […] 아뭏든 낭독자의 목청에 흥이 나도록 하기에 주의하였을 것이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3・4, 4・4조 낭독조의 우리 옛 문학이 투박하나마 특수한 한 예例가 되어주는 바, 리듬과 '제시의 기본형식'의 관련성은 시인・지은이作者와 듣는이聽者/聽衆・읽는이讀者의 관계양상에 의지한다고 프라이는 보고 있다. 극의 경우는 "작자가 청중의 눈으로부터 숨어 있"고, 에포스에서는 "작자가 직접 청중과 대면하며, 작중의 가상적인 인물은 숨겨"지고, 씌어진 문학記錄文學/written literature(즉, '픽션')에서는 "작자도 작중 인물도 독자로부터 숨겨져 있"(이상 473쪽)고, 서정시는 "청중이 시인으로부터 숨겨진 경우"(474쪽)라는 식이다. 장르들 사이에서 보이는 중요한 변화는 시인・지은이의 듣는이・읽는이에 대한 태도이다. 그 태도에 따라 에포스는 '계기되풀이recurrence의 리듬', 산문(즉, '픽션')은 '지속continuity의 리듬', 극은 '데코럼걸맞음decorum의 리듬', 서정시는 '연상association의 리듬'으로 갈리는 것이다.

그것은 장르에 따라 글투文體가 흔히 바뀌는 모습에서 잘 볼 수 있다. 뷔퐁Buffon이 "글은 사람이다Le style est l'homme même."라고 말했을 때, 그는 글투의 중요함을 말한 것이다. 그런 면에서 프라이는 "장식적인 변론과 설득적인 변론"을 수사修辭가 처음부터 가진 두 뜻이라고 말하면서 "장식적인 수사는 문학 자체―그 자체를 위해서 존재하는, 가설적인 언어구조라고 우리가 일컫는 것―로부터 분리될 수가 없다"고 주장한다. "장식적인 수사야말로 시의 렉시스, 즉 말의 결이라는 것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는 것처럼 생각된다."라고 높이 추기도 한다.

그렇다면, 과학적인 문학 연구로서의 비평이 결국은 '장르의 이론'으로 나아가는 것은 당연한 일인 것 같다. (장식적) 수사는 리듬과 가장 큰 관계를 갖는데, 그 수사가 문학으로부터 분리될 수 없다면 문학 연구에서 리듬의 연구는 무척 큰 범위를 가질 것이다. 그리고, 리듬은 장르와 연관되므로 문학 연구는 장르와 관계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운문과 산문의 관계에 있어서도 셰익스피어가 하층신분의 등장인물은 산문으로 말하게 하고 상층신분 등장인물은 운문으로 말하게 하고, 상층신분 등장인물이라도 술에 취해 있을 때나 정신에 이상이 생겼을 경우에는 산문으로 말하게 하고 있다고 유종호가 「스타일 분리에서 혼합으로」의 '걸맞음' 항목에서 지적하고 있는 것에서 볼 수 있듯이 시극詩劇이라는 장르와 엮이어서 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런데, 문학에서의 글투를 중요시하여 리듬을 강조한다고 했을 때, 음악적인 면은 그런대로 풀리겠지만 실제 문학이 갖고 있는 시각적(미술적)인 면은 어떻게 풀이될 수 있을까. 아리스토텔레스의 '비극의 여섯 요소'에서도 영어로는 spectacle로, 우리말로는 장경場景 또는 영상으로 옮겨지는 옵시스ὄφις가 있음에도 프라이는 이에 대해 그다지 주목하지 않는 것 같다. 다만 "고전시에서는 음의 패턴 즉 음의 장단은 반복적인 요소이며 따라서 시의 멜로스의 일부였는데, 현대에서 그것은 옵시스의 일부가 되고 있다"고 한 번 그것에 대해 말하고 있을 뿐이며, 그나마도 근거는 함께 쓰지 않고 있다. 그렇다면, 또 프라이가 말하고 있는 옵시스의 리듬은 무엇일까.

프라이의 이론이 도식적이라는 것은 그 비판자들은 물론이고 프라이 스스로도 인정한 바이다. 사실 연구를 위해서는 얼마쯤 추상화와 도식화를 피할 수 없음은 당연한 일이다. 그럼에도 도식화가 비판의 근거가 될 수 있는 것은, 그 도식에서 벗어난 사례가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김준오는 그의 유고집 『문학사와 장르』의 「원형적 방법과 다원적 체계 시학」의 둘째 장章에서 "토도로프는 프라이의 장르론을 '이론적 장르theoretical genre'라고 규정하고 그의 이론의 연역적 성격을 강도 높게 비판했다. […] 토도로프에 의하면 장르는 순전히 사변적으로 연역적으로 규정된 이론적 장르의 개념과 구체적 작품을 관찰한 결과로서 귀납적으로 규정되는 '역사적 장르historical genre'라는  두 개념이 있다"는 말로 일면 프라이의 한계를 지적했다.

또한 리듬에 관해서도, 김준오 역시 지적한 바이지만, "운문과 산문의 차이가 그대로 장르의 구분이 될 수 없음은 분명하다"(471쪽)고 말하고 있으면서도 에포스를 결국 운문일 수밖에 없는 '되풀이의 리듬'으로 설명하고 '픽션'을 산문이기가 쉬운 '지속의 리듬/의미의 리듬semantic rhythm'으로 설명하는 것은 그의 이론의 혼란된 면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픽션'이라는 말로 가리키기도 하고 때때로 '기록문학'이라고 일컫기도 하는 "서적을 통해서 독자에게 이야기를 거는 장르"(472쪽)를 '산문'이라고도 바꾸어 쓰고 있음을 보아도 그렇다.


프라이가 도식적이라는 것은, 또다른 뜻으로서 그가 형식주의적이라는 뜻도 될 것 같다. 그가 '서술적 작품'과 '주제적 작품'을 나누고는 있지만 실제로 주제에 대해 깊이 파고드는 모습을 보기는 어렵다. 문학에서 큰 부분을 갖는 상상력과의 관련성은, 원형상징archetype을 다루는 신화와의 관련성에도 불구하고, 프라이의 『비평의 해부』와 그 '장르의 이론'의 논지가 거의 갖지 못하고 있는 부분인 것처럼 보인다. 이것은 표면적으로만 그런 것일까, 실제로도 그런 것일까. 만약 실제로 그런 것이라면 「도전적 서론」에서 우려한 대로 비평은 문학과 관계가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전혀 엉뚱한 말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 네번째 에세이, 「수사비평: 장르의 이론」만을 대상으로 한 글입니다.



덧말> 프라이가 "아리스토텔레스도 『시학』에서 렉시스의 문제에 이르게 될 때, 이 문제는 수사학에 속하는 것이 한층 더 적당하다고 말하고 있다."(467쪽)고 한 부분은 오류인 것 같다. 천병희가 옮긴 『시학』의 6장에서는 "제 3은 사상이다. 사상이란 상황에 따라 해야 할 말과 적당한 말을 할 수 있는 능력이다. 대사에 관한 한, 이 능력은 정치학과 수사학의 연구분야에 속한다."(1450b)고 하고 있으며 19장에서는 "사상에 관해서는 «수사학»에서 말한 바를 여기서도 그대로 받아들이기로 하자. 왜냐하면 사상에 관한 연구는 시학보다는 수사학의 연구분야에 속하기 때문이다."(1456a)라고 하고 있다. 그러므로 아리스토텔레스가 시학보다 수사학에 적합하다고 말한 것은 렉시스가 아니라 디아노이아이다.

프라이가 464쪽에서 밝힌, 아리스토텔레스가 섬긴 비극의 여섯 요소는 뮈토스, 에토스, 디아노이아, 멜로스, 렉시스lexis/言辭, 옵시스인데 천병희는 이것을 플롯, 성격, 사상, 노래, 조사措辭, 장경으로 옮기고 있다. 보다 확실하게 말하자면, 천병희는 그가 옮긴 『시학』 52쪽 본문 아래의 옮긴이 주註에서 "조사의 원어는 λέξις인데 대부분의 영역본에서는 「diction」으로 번역하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구텐베르크 기획(http://www.gutenberg.net/)' 에서 새뮤얼 버틀러Samuel Butler가 영어로 옮긴 Poetics를 찾아봐도 6장의 것은 "Third in order is Thought,--that is, the faculty of saying what is possible and pertinent in given circumstances. In the case of oratory, this is the function of the Political art and of the art of rhetoric"이라고 되어 있고 19장의 것은 "Concerning Thought, we may assume what is said in the Rhetoric, to which inquiry the subject more strictly belongs."라고 되어 있다.


비평의 해부
노스럽 프라이 지음, 임철규 옮김/한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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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 유종호가 보기에 한국 문학의 가장 큰 문제는 전통이 없다는 것이었다. 그 결여의 인식은 단절의 인식에서 온다: "초서로부터 딜런 토머스까지의 앤솔로지에는 「청산별곡」에서 「청록집」까지의 앤솔로지에서 발견할 수 있는, 적어도 근본적인 의미의 단절은 없다."(20쪽) 외적인 단절이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적어도 「청록집」의 시인들이 「청산별곡」을 전통으로 보지 않고 있는 것이 중요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그는 화전민이 하듯이 전통이라는 새로운 밭을 일구어 나간다.

유종호가 일구려는 화전火田은, 의욕적인 그의 데뷔작에서부터 드러난다. 주로 저쪽의 문학자들을 대상으로 그들의 "언어에 대한 자의식의 유곡幽谷"(157쪽)을 살펴본 뒤 그는 그 유곡이 "전통의 문제까지도"(158쪽) 포괄하는 근본적인 문제라고 선언한다. 그럼으로써 그는 사조나 발표지를 중심으로 문학을 판단하던 선대의 비평가 그룹에서 벗어나 문학성을 판단하는 비평으로 직진할 수 있었다. 그가 전통의 결여를 뼈아프게 인식했던 이유는 그것이 우리 문학인들에게 "괴로운 자유"(21쪽)를 부과했다는 점을 알았기 때문이다. 한편으로는 "처음부터 백지에서 출발함으로써 말라르메와는 다른 의미의 백지의 공포"를 느끼게 되었고, 또 한편으로는 "전통의 압력의 부재가 누구나 손쉽게 시를 쓸 수 있다는 무모성을 낳게 했"기 때문이다(22쪽).

5,60년대라고 전통 논의가 없었을 리 없다. 모르긴 몰라도, 서기보다도 단기를 애용했던 당시의 전통 논의는 오히려 더 뜨겁고 열정적이었을 것이다. 일례로 『한국문학사』(1949)를 쓴 조윤제는 그 서문에서 "실로 감개무량한 일이다. 나는 국문학사 강의의 첫 시간을 마치고 내 연구실로 들어가 뜨거운 눈물이 방울방울 내 옷깃에 떨어지고 있는 것을 뒤에 알았다"는 류의 애국애족의 센티멘틀리즘을 선보이면서, 그 센티멘틀을 "국문학사의 사명은 […] 그것이 현대국문학을 위함"이라는 전통-명제로 귀결시키고 있다. 그러나 유종호가 보기에 그런 전통론은 "명확한 개념규정 없이"(244쪽) 함부로 쓰여진 것이었다. 그는 본격적으로 "1960년대의 문학의 과제가 소박한 전통개념의 수정과 이에 따른 시야의 확장에 있어야 한다고 믿고 싶다"(245쪽)고 고백한다. 그 수정과 확장은, 짐작 가능하듯이, 언어의 차원에서 이루어진다. 한국어의 특색은 토착어와 (일산日産)한자어가 뚜렷이 구분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토착어가 그리는 전근대적 세계와 한자어가 그리는 근대적 모습 역시 뚜렷이 구분된다. 토착어가 가지는 심미적인 특색은 그가 계속해서 강조해오고 있는 부분이긴 하지만, 그는 이를 두고 "손쉬운 토착어의 조직과 세련은 결국 토착어의 전근대적 인간상의 형상에만 안주하게 될 위험성이 많으며, 그렇게 함으로써 현대 한국의 진면목을 일실하고 일면적인 한국만을 고집하는 보수에의 길로만 일편단심 걸어가게 될 위험성이 있는 것이다"라고 경고하고 있다. 오히려 그는 한국 문학의 가능성을 한자어에서 보았던 것 같다: "우리 문학의 새로운 가능성은 토착어의 자리를 대치하여 가고 있는 생경한 언어군을 어떻게 예술적으로 형상해 가느냐는 점에서 찾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송욱의 「하여지향何如之鄕」에 대한 그의 평가는 이와 같은 추론 과정에서 얻어진다. 「하여지향」이 주로 한자어를 통해서 씌어진 것을 두고 "우리말의 성격을 암시하는 중요한 사실"(71쪽)이라고 설명하는 그는 「하여지향」 속에서 엘리엇이 말한 '일상생활의 산문'을 보는 것이다. 그러나 그러면서도 그가 마지막까지 놓지 않는 시의 끈, 시의 존재이유raison d'être는 음악성이다: "그는 시의 음악성으로 산문에의 전락을 예방하고 있습니다."(64쪽) "김구용 씨에게서 보게 되는 산문에의 절대적인 굴종은 시의 영토를 확대해 보자는 의욕이 결국은 시 자체를 부정해 버리고 만 전형적인 예다."(309쪽) 그런 점에서 유종호는 시와 산문의 경계의 흩뜨림을 통해서, 역설적으로, 그 사이의 경계를 더욱 분명히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또한 언어의 자의식을 매개로 한 전통론의 하나가 되어있다.

유종호가 시와 산문의 경계로 언급한 음악성의 정체는 「산문정신고」에서 드러나 있다: "운율이나 리듬을 위해서 때로 현실의 사실의 왜곡이나 기피나 방기적放棄的 생략을 불사하는 정신, 바로 여기에 우리가 시정신이라고 부르는 것의 요체가 있다. 정말의 산문 정신이라고 하는 것은, 이를테면 현실 관찰의 내용이나 그 전달의 충실을 위해서 운율이나 리듬을 희생시키는 정신을 말한다. 아니 처음부터 운율을 개의치 않는 정신을 말한다."(162쪽) 이것은 시 작품이라는 "어떤 고립된 세계의 독자적 질서를 위해서 현실 사실들의 개입을 강력하게 거부"하는 것이 시요, 사회의 "전면적 진실"을 노리는 것이 산문이라는 설명으로(170-171쪽), 나아가서는 사례로 든 황순원의 시적 소설이 우수하다는 점을 인정하면서도 그것이 산문정신과는 떨어진 것이라는 선언에까지 이어진다(174-175쪽).

그가 세우려는 전통의 윤곽은 여기서 좀더 분명해진다. 그가 바라는 전통이란, 시와 산문이 '음악성'이라는 기준을 사이에 두고 각자의 정도를 지키면서 균형을 잡아가는 모습이다. 그것은 당시의 "시단에는 시도 산문도 될 수 없는 문자의 집단이 너무나 많이 범람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김구용의 실험이 갖는 의미에 공감하면서도 그것을 문제삼고, 김승옥의 소설을 상찬하다가도 마지막에서 우려를 표명하고, 서정인의 소설을 상찬하다가도 마지막에서 걱정의 한두 마디를 삽입하는 것이다.

2

청년 유종호의 또다른 빛나는 부분은 그의 휴머니즘의 거부에서 드러난다. 「인간 부재―한국 문학에서의 휴머니즘」, 「오열하는 휴머니즘―한 상투 문구에의 의혹」 등의 두 글은 휴머니즘을 직접적으로 공격하고 있고, 「화해의 거부―하근찬」는 제목에서 엿볼 수 있듯이 휴머니즘으로 경도되지 않은 하근찬을 상찬하는 글로 되어 있다. 물론 여기서의 휴머니즘은 도식적이고 편견적인 휴머니즘이다. 그는 한국 문학에서의 휴머니즘은 ① 일편단심 선의의 인간 ② 그 배율背律로서의 악한 ③ '돌아온 탕자'의 셋 가운데 하나의 이야기가 된다고 설명한다.

편견적이고 도식적인 휴머니즘이 지닌 가장 큰 문제점은 조잡한 "예정조화"(420쪽)에 있다. 모든 갈등과 번민은 다가올 "예정조화"를 위한 장치일 뿐인 것이다. 이것은 사회 속에서 존재하는 문학이 사회의 문제를 진지하게 인식하지 못하고, 거짓으로 잠시 해결해버리려는데서 그 문제점이 발생하는 것이다. 이 동족방뇨凍足放尿식 해결은 사회의 문제가 기실 사회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의 마음 속에 달려 있다는 식으로 쉽게 전이된다. 이 사이비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의 세계관을 우리는 근대 초부터 일찍이 겪어왔던 것이다: "이광수가 똘스또이를 통해서 휴머니즘을 표방한 것은 주지의 사실인데 그의 똘스또이 이해는 어쨌든 '자기의 곤궁상태의 원인이 자기들 자신 속에 있지 않고 외부의 여러 조건 속에 있다는 생각처럼 인간에게 유해한 것은 없다'는 수긍할 수 없는 똘스또이 만년의 명제를 그대로 채용하고 있음은 사실이다."(362쪽)

이것은 특히 지식인들이 갖는 특질이다. 지식인들이 항시 모델로 삼은 것은 일본이나 일본을 통해 본 서구였기 때문에 그들은 서구와 한국(조선)의 "낙차"가 절망적인 낙차로 보인다(366쪽). 여기서 지도자적인 면모를 띠는 사람은 이광수류의 '민족'론자로, 그렇지 못한 사람은 이효석류의 '초속주의'로 떨어진다는 것이다(362쪽). 이 묘한 새것 콤플렉스는 지식인이 마땅히 경계해야 할 것이라는 것이 그의 요지이다.

3

그러나 생각해보자. "동양 최고의 고전의 하나인 『시경』이 민요를 포용하고 있다는 사실이나 사관仕官으로 실패한 서생이 전란의 시대에 남긴 단장斷腸의 시편들"(456쪽)을 들어 사르트르류의 시 인식을 거부하고 시와 참여의 문제를 다시 검토해야 한다고 선언하는 비교적 뒤의 입장과 비교해보자. 서구의 문학자들을 계속해서 바라보아 얻어낸 '언어의 자각'이나(「언어의 유곡」), "우리의 당장의 의무는 오히려 저쪽에서 시험이 끝난 것이라 할지라도 한번쯤 완벽의 극치까지 가보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247쪽)는 식으로 지각생을 자인하면서 전통을 마련하려는 조바심을 내는 모습은 새것 콤플렉스의 다른 모습이 아닌가. 그렇게 본다면 청년 유종호의 전통 확립의 의욕과 새것 콤플렉스의 경계는 모순되는 것이 아닌가.

혹은 우리는 그것을 4월 혁명 이후의, 유종호의 변모라고 생각해볼 수도 있을 것이다. (휴머니즘에 관한 두 편의 글은 1961-62년에 씌어진 것이고 지식인론과 하근찬론은 모두 둘째 책인 『문학과 현실』에 실린 것이다.) 그러나 그 이후로 현재까지의 그가 보여주는 완강한 시의 옹호는 그 같은 가설을 세우기 힘들게 하는 측면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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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비주의와의 싸움은 지금의 현실에서 소중하다. 이 시대에도 아직 신비주의가 횡행하고 있는 탓이다. 지금 우리가 가진 신비에는 어떤 것이 있을까.

이를테면 '죽음'이 있다. 어느 시인을 두고, 그의 죽음이 그의 시를 이루었다고 말하는 것이나 그가 스스로의 죽음을 시에서 예견했다고 말하는 것은 일종의 신비주의다. 그런 식의 신비주의는 문학을 정치하게 보려는 노력과는 정반대되는 것이다. 그러하므로 그것은 올바른 문학이론이나 문학비평이 될 수 없다. 그것은 현대비평이 혐오해마지 않는 실증주의와 인상주의의 단점만을 수용한 최악의 읽기다.

수잔 손택의 『은유로서의 질병』은 질병이 가지고 있는 신비주의를 하나하나 검토해본 책이다. 친인척들을 병으로 잃은, 그리고 스스로도 유방암을 비롯한 여러 병들을 겪은 저자는 '병은 고쳐야할 그 무엇일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라고 선언한다. 특히 결핵과 암과 관련된 문학작품에 대해서 저자는 깊숙이 고찰하고 있는데, 그 대상이 문학작품이라는 점은 주목에 값한다. 저자에게 있어서 문학은 신성한 어떤 것이 아니다. 오히려 병에 대한 오해만 증폭시켜온 기제일 뿐이다.

실제로, 문학은 오래 전부터 사실과는 구별되는 진실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생각되어 왔다. 때문에 이효석의 『메밀꽃 필 무렵』에서 왼손잡이가 유전되는 것으로 설정된 과학적 오류라든가, 블레이크가 「갓난이의 기쁨」에서 난 지 이틀밖에 안 된 아이가 미소짓는 것을 묘사한 것이라든가, 윌리엄 골딩이 『파리대왕』에서 근시 안경으로 불을 피우도록 한 것은 전체적인 진실과 대비해서 지극히 사소한 거짓이라 그다지 중요한 사항으로는 여기지 않는 것이 보통인 것이다(유종호 1994, 48-51). 하지만 위의 예들에서는 확실히 그것이 옳다고 말할 수 있다 할지라도, 손택의 여러 예들을 우리가 쉽게 멀리 물리칠 수 있을지는 생각해보아야할 일이다.

이를테면, 카프카가 자신의 결핵을 두고 '정신의 병이 넘친 것'으로 받아들인 것을 보자. 카프카의 이런 생각은 지극히 신비주의적이다. 결핵은 결핵일 뿐이지, 문학을 위한 선물도 기제도 아니다. 그에게 결핵이 없었다면 그의 문학은 훨씬 치졸했을 것이라는 인식도 마찬가지로 신비주의다. 카프카의 질병이 그의 문학에 어떤 긍정적인 영향을 준 것은 사실이라 할 수도 있겠지만, 그렇다 해도 그것은 질병 그 자체가 그렇게 한 것은 아니다. 카프카가 그것을 '정신의 병이 넘친 것'으로 은유화시켰기 때문이다. 그 결과 그는 가장 아름다운 작품을 탄생시킬 수 있었다.

탄생시킬 수 있었지만,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그는 결국 자신을 치료할 수 없었다. 여기서 우리는 문학의 본질적인 목적과 같은 것과 만나게 된다. 예술은 본래 치료를 위한 행위였던 것이다. 따라서 아무리 아름다운 작품이라 해도 그것이 인간의 치료의지를 박탈하고 그것을 신비적인 것이나 숙명으로 받아들이게 함으로써 결과적으로는 진실에 반反하는 모습을 보인다면 그것이 과연 진정한 아름다움일까, 하는 점을 깊이 숙고하게 한다.

물론, 이런 이분법적 사고로는 카프카의 문학에 대한 일면적인 평가밖에 할 수 없다. 그러나 카프카의 문학이 일관되게 가지고 있는 질병의 모티프와 그 은유가 사실은 어디에 기대고 있는지를 아는 일은 오히려 그의 떽스뜨texte를 다양하게 볼 수 있기 위한 원동력일 수 있다는 점에서 이 책의 가치를 평가해주어야 할 것이다.

* 유종호(1994),『문학이란 무엇인가』개정판, 민음사.


은유로서의 질병
수잔 손택 지음, 이재원 옮김/이후(시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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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레히트가 시에 대해 가진 생각은 아주 독특하다. 문학과 예술의 무용성無用性을 강조하는 일군의 예술가와는 달리 브레히트는 문학 역시 써먹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브레히트의 첫 시집인 『가정기도서』는 "이 가정기도서는 독자들이 사용할 수 있게 만들어졌다. 이 시집은 아무 의미없이 처먹혀서는 안된다"라는 사용지침서를 가지고 있다. 브레히트가 시의 사용가치를 중요시하는 것은 그의 서사극 이론의 핵심인 '낯설게하기효과Verfremdungseffekt'와 일맥상통하는 개념이다. 그러므로 사실 놀랄만한 일이 아니다.

이 책의 소중한 점 가운데 하나는, 모든 면에서 신비주의를 배격한 브레히트가 시인들에게 하는 충고이다. 책의 표제로도 쓰인 '시의 꽃잎을 뜯어내는 일'은 시를 하나하나 분석하는 일이다. 그는 꽃이 꽃 자체로도 아름답지만 꽃잎을 뜯어내도 하나하나가 다 아름다운 것처럼 시도 그렇다고 말한다. 이 책에 실린 그의 어떤 분석이 수준 미달인 것도 없는 것은 아니지만 시를 꼼꼼히 분석하려는 태도는 시인이 가져야할 중요한 태도라고 생각한다.

또 그는 시인이 논리를 가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옳다. 시에 논리가 없다면 온갖 비약이 시라는 이유만으로 허용되고 말 것이다. 그러면 어떤 시가 좋은 시고 어떤 시가 좋지 못한 시인지 구별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의 몇 가지 논거는, 당시의 사정은 어땠는지 몰라도 지금은 대체로 다 통용되는 것이다.


학교에서 내려오다 교내 어느 문학회에서 시화전을 여는 것을 보았다. 브레히트도 시와 그림을 따로 전시하는 기획을 한 일이 있다. 그러나 그는 시화와는 다르게 시 따로, 그림 따로 전시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것이 고유의 예술을 지키면서 두 예술을 함께 감상할 수 있다는 생각에서이다. 이것과 관련해 연인과 얘기를 나눴다. 가령, 블레이크의 경우에 대해서.

시의 꽃잎을 뜯어내다
시의 꽃잎을 뜯어내다
베르톨트 브레히트 지음, 이승진 옮김/한마당

Posted by 엔디
나는 브레히트의 '서사극 이론'이라는 전작 저술이 있는줄로 알았다. 전에 한두페이지 읽다가 치우고 읽다가 치운 책을 이틀에 걸쳐 읽었다. 글이 씌어질 당시의 정황이나 다른 희곡 작품들에 대한 지식이 필요한 글들도 조금 있어서 수월치는 않았다.

전체적으로는 지루했다. 전작 저술이 아닌 까닭에, 같은 내용이 여러 편의 논문이나 강연록에 자주 비슷한 형태로 노출되었다. 지속적으로 그가 강조하는 것은 '감정이입'에 대한 비판과 '낯설게 하기 효과Verfremdungseffekt'이다. 어떤 의미에서 그는 연기를 잘하는 배우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것 같다.

감정이입에 대해서 그가 가진 불만은 이렇다. 배우가 연기를 잘하면 잘 할수록 관객들은 그 역할에 감정이입되어 자기가 '그'인 것으로 느끼기 때문에 여러 부작용이 나타난다는 것이다. "관객은 자기가 같이 느낀느 주인공이 보는 만큼만 볼 수 있을 것이다."(59) "관객이 주인공의 감정에 이입이 되도록 그는 가능한 한 개인적인 특성을 갖지 않는 유형적인 인물이어야 했네. […] 감정 이입을 위해 준비된 인물(주인공)은 관객의 감정 이입을 위해 사실적으로 묘사하는 데 있어 상당한 손상을 입게 되네."(168) "자네들이 자네 관객들을 이미 파블로프의 개처럼 병들게 해놓았단 말이네."(177)

브레히트는 감정 이입을 일종의 최면이나 마약으로 취급한다. 그의 주장에 공감이 가는 것은―당시 연극도 연극이지만―요즘의 영화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사람들은 조금이라도 생각을 하게 하는 영화는 점점 싫어하고 아무 생각없이 듣기만 할 수 있는 것을 더 좋아한다. 생활이 하도 각박하고 힘들어서 극장에서조차 '박터지게' 생각하는 것은 너무 잔혹하다는 사람도 만나보았다. 그들은 정말 파블로프의 개가 된 것이 아닌가. 한차례 울어주고(Katharsis!), 나와서는 다시 일상으로 돌아간다... 답답하다.

브레히트는 감정이입의 대안으로 낯설게 하기 효과(생소화生疎化효과)를 든다. "새로운 기법의 원칙은 감정이입 대신에 관객에게 생소감(Verfremdung)을 불러 일으키는 데 있다."(61) 그것은 관객에게 생각할 기회를 주려는 의도이다. 낯설게 하기 효과가 잘 발휘될 때, 관객은 왜 주인공은 '이렇게 행동하지 않고 저렇게 행동할까'를 고민하게 된다. 때문에 '새로운 기법'은 관객을 직접적으로 염두에 두게 된다. 기존의 연극은 '제 4의 벽vierte Wand'이라 하여 무대의 뚫린 면, 즉 무대와 관객 사이의 공간에 벽이 있어서 나머지 세 막힌 면처럼 교류가 없다고 전제해왔다는 것이다. 그런데, 브레히트는 이 '제 4의 벽'을 없애자고 주장하고 있다. 그가 낯설게 하기 효과를 위해 제안한 새로운 연기기법은 이렇다. "1. 3인칭 화법의 도입, 2. 과거 화법의 도입, 3. 지문과 주석도 함께 읽기"(72)

배우는 관객에게 직접 말해야지 과거처럼 능청스럽게 '독백'을 해서는 안 되고, 그 자신이 맡은 역할에 몰아沒我하게 되면 안 된다. 그는 자신이 맡은 역할에 대해 "반대 의견을 표하는 자세"를 취해야 하고, 그럼으로써 그는 "그가 하지 않는 행동이 그가 하고 있는 행동 속에 포함되"(71)도록 해야한다.

브레히트가 주장하는 것은 어쩌면 작가나 배우 스스로가 작품에 대해 코멘트하는 것과 관계있지 않을까 싶다. 가령, 그의 교육극「예외와 관습」의 마지막 코러스는 "여행 이야기는 / 그렇게 끝납니다. / 당신들은 듣고 보았지요. / 일상적인 일, 늘상 일어나는 일을 당신들은 보았지요. / 우리는 그러나 당신에게 요청합니다. / 생소하지 않은 일을 의아하게 생각하시오! / 평범한 일을 설명할 수 없는 것으로 생각하시오! / 일상적인 일이 당신들에게 놀라움을 자아내야 하오. / 관습으로 알려진 일이 악습임을 깨달으시고 / 그리하여 악습을 깨달은 곳에서는 / 구제책을 강구하시오!"이다. 일상적이고 관습적인 일을 모사한 이 극은 그것을 낯설게 만든 것이었다. 그리고 작가는 거기에 대해서 '이게 이런데 어떻게 생각하세요?'라고 묻는 것이다.

그렇지만 그게 과연 좋은 효과만을 낼까? 극이나 영화가 소설보다 대중적인 것은 사실이지만, 이런 효과들은 소설에서도 적용되지 않으리라는 법은 없다. 그렇다면, 소설에서도 이런 코멘트들을 적용해야할까? 그것은 예술성의 희생이 아닐까? 브레히트가 실제 연극에 적용한 것들을 다시 한 번 찬찬히 살펴볼 일이다. 그것이 예술성의 상실로 이어지지 않았다면 다른 부분에서도 가능성이 있는 것이고...


서사극 이론
마리안네 케스팅 외 지음, 김기선 옮김/한마당

Posted by 엔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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