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화fable란 동물에게 사람의 속성을 투영한 이야기로 일종의 알레고리allegorie이다(이상섭, 210-210). 그래서 논자에 따라서는 우화를 의인소설擬人小說이라고 부르기도 한다(한용환, 333-336). 그런데 우화 가운데 인간이 등장하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그럴 경우 대개 인간은 부정적으로 묘사된다. 가령 조지 오웰의 『동물농장』에서 인간은 사회주의 혁명 이전의 제정帝政 러시아를 의미한다. 또 안국선의 「금수회의록」은 좀더 직접적으로 옳지 못한 인간의 태도를 풍자하고 있다. 이처럼 동물이 등장인물인 이야기에서 인간이 쉽게 부정적으로 묘사된다는 것은, 적어도 문학적 상상력의 테두리 안에서 우리의 감정을 동물에 이입했을 때 인간이 추악한 존재라고 느끼기 쉽다는 것을 방증하는 것이다.

나는 다소 딱딱하게 우화에 대해서 설명했는데, 세뿔베다의 『갈매기에게 나는 법을 가르쳐준 고양이』를 단순히 우화라고 이름붙이기는 좀 망설여진다. 왜냐하면, 이 이야기는 알레고리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직접적인 사실을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여기서 갈매기와 고양이는 진짜 갈매기와 고양이이지, 갈매기와 고양이의 어떤 특징을 가진 인간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란 말이다. 그리고, 여기서 갈매기와 고양이는 고통받고 있다... 조금 길지만 책을 읽어보기로 하자(27-29):

켕가는 다시 하늘로 날아오르기 위해 날개를 쭉 폈다. 그러나 커다란 판도가 몸 전체를 덮어버렸다. 가까스로 물 위로 떠오른 켕가는 머리를 힘차게 흔들어 젖혔다. 눈앞이 칠흑 같은 어둠에 휩싸인 듯 갑자기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켕가는 그제서야 깨달았다. 자신이 앞을 볼 수 없는 것은 오염된 바닷물의 기름 탓이라는 사실을.

켕가는 날개에 묻은 기름을 물에 씻어보려고 했다. 머리를 물 속에 담갔다 뺐다 하기를 여러 차례 반복했다. 허공에서 머리를 세차게 흔들어댄 뒤 다시 눈을 떠보았다. 온통 석유 기름으로 뒤덮인 그의 망막 사이로 마침내 가느다란 햇살 몇 줄기가 비치기 시작했다. 끈끈한 얼룩의 검은 기름은 눈에만 붙어 있는 것이 아니었다. 날개와 몸통에도 뒤덮여 날개가 몸통에 찰싹 달라붙어 있었다. 켕가는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러나 절망하지 않았다. 우선 검은 기름 띠의 한가운데서 빠져나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헤엄을 빨리 치기 위해 다리를 힘껏 움직이기 시작했다.

[...]

켕가의 날개는 몸에 딱 달라붙어 있어서 더 이상 움직일 수 없었다. 이러한 상태의 갈매기들은 커다란 물고기들에게 더할 나위 없이 손쉬운 먹잇감이었다. 설사 그렇지 않다 하더라도 결국은 천천히 질식해 죽게 될 것이다. 석유 기름이 깃털 사이사이로 파고들어 모든 기공을 막아버리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켕가의 운명이었다. 그래서 켕가는 생각했다. 차라리 커다란 물고기의 입 속으로 빨리 없어져 버리는 것이 더 나으리라고.

검은 물결. 검은 역신.

켕가는 죽음의 종말을 기다리며 인간들을 원망했다. 그 외에 특별한 방법도 없었다.

물론, 최근 충남 태안 반도에서 일어난 원유 유출 사고 이야기는 아니다. 갈매기 켕가는 지금 태안이 아니라 북해의 앨바 강 어귀에서 석유 오염물질을 뒤집어쓰고 허우적거리고 있다. 켕가는 있는 힘을 다해 뭍으로 날아서는 어느 검은 고양이가 살고 있는 집에 추락해서 하얀 알 하나를 낳고는 죽을 것이다; 인간이 켕가를 죽인 것이다.

기름을 뒤집어쓴 채 죽어가는 뿔논병아리Canon | Canon EOS 5D | Aperture priority | Multi-Segment | 1/200sec | f2.8 | 0EV | 14mm | ISO-800 | Compulsory Flash | 2007:12:08 17:14:26

ⓒ최예용, 환경운동연합


검은 고양이 소르바스Zorbas는 동료 고양이들과 함께 하얀 알이 부화해서 어엿한 갈매기가 될 때까지 키운다. 작가 세뿔베다는 인간 대신 고양이에게 한 온전한 한 생명을 맡긴 셈이다. 고양이는 영리하고, 용감하며, 책임감이 있다. 따라서 죽음 이후에 태어난 하나의 삶을 아름답게 할 수 있는 권능이 고양이에게 주어진 셈이다. 소르바스가 어떤 인간들이 불운하다고 여기는 검은 고양이인 것은(20), 인간들의 위선을 지칭함으로써 그 추악함을 더 드러내보인다. 인간들의 편견과 달리 소르바스는 불운한 고양이가 아니라 행운의 고양이이다. 그래서 소르바스가 키운 어린 갈매기는 '행운아'라는 뜻의 아포르뚜나다Afortunada라고 이름붙여진다.

소르바스가 켕가에게 약속한 것은 세 가지였다: 알을 먹지 않는다, 새끼가 태어날 때까지 알을 보호한다, 그리고 새끼에게 나는 법을 가르쳐 준다. 이 가운데 가장 어려운 것은 나는 법을 가르쳐 주는 것이었다. 알을 먹지 않는 것은 조금의 자제만으로 되는 일이고 알을 보호하는 것은 인간에게 들키지 않도록 잘 행동하면 되는 일이지만, 나는 법은 고양이들도 잘 몰랐기 때문이다. 또한 인간들의 '백과사전'을 신봉하는 사벨로또도라는 박물관 고양이도 역시 알을 어떻게 보호하고 어떻게 품는지는 알려줄 수 있었지만, 비행술에 대해서는 백과사전에서 정말 유용한 정보를 얻을 수 없었다(127):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단 말야. 비행 이론은 최선을 다해서 완벽하게 조사했는데. 기체역학에 관한 모든 사전을 다 뒤져가면서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이론과 비교도 했지. 그렇게 열심히 준비했는데도 매번 실패하다니, 도저히 믿을 수가 없다고! 세상에! 어째 이런 일이!"

결국 갈매기에게 나는 법을 가르쳐준 것은 소르바스의 부탁을 받은 한 시인이었다. 비바람이 치는 날 시인은 갈매기를 산 미겔 성당의 탑으로 데려가 폭풍우를 온몸으로 느낌으로써 나는 방법을 체득하게 한다. 여기서 시인은 인간이면서 인간이 아닌, 일종의 샤먼의 역할을 수행하게 된다. 이야기 속에서는 고양이들이 자신들의 금기를 깨고 인간의 언어로 시인과 대화하는 것으로 되어 있지만, 이것은 실상 자연과 함께 숨쉬고 생활하는 시인의 샤먼적 특성을 동화적 또는 우화적 감수성으로 풀어낸 것뿐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시인의 언어다.

소르바스는 갈매기에게 나는 법을 가르쳐줄 사람으로 시인을 지목했다. 왜 그랬느냐는 질문에 소르바스는 이렇게 답한다(135-137):

"특별한 이유가 있는 건 아니고…… 나도 잘 모르겠어요. 그 사람이라면 믿을 수 있으리라는 확신이 섰을 뿐입니다. 전에 자신의 글을 직접 낭독하는 걸 들어본 적이 있었지요. 그런데 이상한 것은 그럴 때마다 항상 즐거웠고, 계속해서 들었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는 겁니다."

[…]

"새의 날개로 나는 것에 대해서는 아마 모를지도 모르지. 그러나 내가 그의 시를 들을 때면 항상 그의 시구를 타고 하늘을 붕붕 날아다니는 느낌이 들었어."

여기서 소르바스는 일종의 역동적 상상력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것이다. 바슐라르는 하늘을 날아오르는 시적 몽상에 대해 역동적 상상력l'imagination dynamique이라고 이름붙이면서, "역동적 상상력은 의지의 꿈이며, 꿈꾸는 의지인 것"이라고 말했다(Bachelard, 177). 여기서 우리는 갈매기란 왜 하늘을 날아야 하는지를 생각할 필요가 있다. 갈매기는 갈매기이기 때문에 난다거나, 엄마 갈매기인 켕가의 부탁이 있었기 때문에 나는 것이 아니다; 오직 어린 갈매기가 날기를 원하기 때문에, 곧 그것이 어린 갈매기의 의지이기 때문이다(123-124):

아포르뚜나다는 전사의 모험담을 항상 재미있게 들었다. 그런데 그 날 따라 유난히 눈빛을 반짝이며 귀를 쫑긋 세우고 관심 있게 들었다.

"갈매기들은 진짜로 폭풍우 속에서도 날아다녀요?"

그가 질문했다.

"물론, 바다장어가 방전하는 것만큼이나 당연한 말씀! 갈매기는 이 세상에서 가장 강한 새지. 갈매기보다 더 잘 나는 새는 없다고."

바를로벤또가 확언했다.

바다 전사의 이야기는 아포르뚜나다의 가슴에 깊이 스며들었다. 그의 발은 공연스레 흙을 이리저리 파헤치고 있었고, 부리는 매우 예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꼬마 아가씨! 아가씨도 날고 싶어요?"

소르바스가 지나가는 투로 묻자, 아포르뚜나다는 고양이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쳐다보았다. 그러더니 마침내 대답했다.

"그래, 좋아요! 내게 나는 법을 가르쳐 주세요!"

순간 고양이들은 너무 기뻐서 환호했다. 이 순간을 얼마나 기다렸던가. 그들은 고양이 특유의 인내심을 발휘해서 어린 갈매기가 날고 싶다는 의지를 직접 드러낼 때까지 끈덕지게 기다렸던 것이다. 왜냐하면 난다는 것은 지극히 개인적인 결정에 달린 문제라는 것을 고양이들은 조상들이 일러준 교훈을 통해 이미 깨닫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강요나 억지가 아니라 자발적으로 결정해야 할 문제였다.

어쨌든 백과사전 지식을 통해 나는 법을 가르치는 데 실패한 고양이들은 소르바스를 시인의 집으로 보낸다. 샤먼인 시인은 베르나르도 아트사가라는 시인의 시 한 편을 들려주는데, 여기서 소르바스는 시인을 온전히 신뢰하게 된다.

그의 작은 용기는
곡예사들의 그것과 같기에
늘 비를 가져오고
늘 해를 몰고 오는
저 어리석은 비 때문에
그토록 한숨을 쉬지는 않지요

갈매기는 이 시가 가르쳐주는 바에 따라, 곡예사의 용기를 가지고 비 속에서도 자유롭게 날 수 있었던 것이다. 시인은 이로써 샤먼의 역할을 끝내고 탑에서 내려간다. 샤먼이라 해도 결국은 인간이며, 인간은 자연 속에서 일반적으로 '방해'가 되기 쉽기 때문이다.

세뿔베다의 글을 읽고 나서 세뿔뚜라를 떠올린다면 엉뚱할까? 세뿔베다의 이야기가 그래도 동화적인 외피를 갖고 따뜻하게 전개되다보니 그와 세뿔뚜라를 연결하기가 쉽지 않지만, 지구에 대한 문제의식은 둘이 함께 공유하는 것 같다. 칠레의 이야기꾼과 브라질의 스래시 메탈 밴드의 접합점은 단지 비슷한 이름뿐만은 아닌 것이다.

(▼ 잔인한 장면이 많으므로 주의하여 클릭하세요.)

(▲ 잔인한 장면이 많으므로 주의하여 클릭하세요.)

태안 반도의 원유 유출 사고 이야기를 안 할 수 없다. 분명히 이것은 의도적인 것이라기보다는 하나의 사고이지만, 인간이 석유라는 화석 연료를 사용하는 한 언제나 문제가 될 수 있었던 사고임에는 틀림없다. 나는 화석 연료라고는 전혀 사용하지 말아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그것을 이용할 때에 늘 주의를 기울여야 하며, 사고가 났을 때에는 다른 무엇보다도 우리 인간들 전체가 그에 대한 책임을 지는 것이 마땅하다는 말이다. (말하기가 조심스러운데, 책임이 인간들 전체라는 말은 책임의 분담分擔이 아니다; 모두가 태안 반도에 퍼진 원유 전체의 무게만큼의 짐이 있다는 것이다.)



자, 아래의 사이트에서 힘이든 돈이든 보태도록 하자. 우리가 시인처럼 한 갈매기를 날도록 하기는 힘들지만, 앞으로의 갈매기들이 날 수 있도록 하는 최소한의 노력은 해야 하지 않을까? 마침 곧 크리스마스다. 하늘에는 영광, 땅에는 평화. 이 땅에 인간과 온갖 동식물과의 평화도 함께 이루어졌으면 좋겠다.

태안 원유 유출 사고 관련 사이트:
환경운동연합
충청남도청
태안군청
Daum 희망모금



갈매기에게 나는 법을 가르쳐준 고양이 
루이스 세뿔베다 지음/바다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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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섭. 1997. 『문학비평용어사전』. 신장판. 민음사.
한용환. 1992. 『소설학사전』. 고려원.
Bachelard, Gaston. 2000. 『공기와 꿈: 운동에 관한 상상력』. 정영란 옮김. 이학사.
Posted by 엔디
1

욕망이란 이 곳에 없는 것을 바라는 것이다. 따라서 이곳에 실재로서 현재하는 것을 바란다는 것은 모순이다. "그대가 곁에 있어도 나는 그대가 그립다"면 사실 '그대'는 곁에 없는 것이 아닌가 고민해 봐야 한다.

삶의 영원한 항등식처럼, 모든 사람이 바라는 것은 행복한 삶이다. 여기까지 인정한다면, 그 다음 행복의 각론에서 저마다의 차이를 인정해야 하는 순서가 남아 있다. 뒤라스의 『모데라토 칸타빌레』에서 안 데바레드 부인이 바랐던 것은 그가 속한 곳의 정원과 무도회와 파티에는 없는 것이었다. 데바레드 부인의 행복이란 무엇이었을까. 데바레드 부인은 무엇을 바랐고, 무엇을 욕망했을까.


2

르네 지라르는 모든 욕망은 주체와 대상 이외에 또다른 타자가 있다고 말했다. 이를테면 중세의 기사들은 자신들의 롤 모델role model인 기사 이외에 스스로 숭배하는 부인dame이 제각기 있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시시각각 자신의 승전보와 결투 결과를 부인에게 인편으로 알리기에 바빴던 기사들에게 있어서 부인이라는 타자는 무척 중요한 삼각형의 꼭짓점이 되는 것이다.

데바레드 부인에게 있어서 자신의 집은 감옥과 같은 것이다. 데바레드 부인은 그것을 약간 알고 있었다. '약간'이라는 말을 쓰는 것은 그가 아주 미약한 방법으로 그 감옥에서의 정기적인 탈주를 실행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이는 매일같이 엄마와 함께 그 도시를 돌아다니는 데 익숙해져 있었"다고 화자는 말하고 있다. 데바레드 부인이 자기가 살고 있는 곳이 감옥이라고 느낀 보다 정확한 계기는 아이가 모데라토 칸타빌레로 피아노를 치고 있을 때 있었던 사건이다.아마 어떤 치정 사건에 관계된 살인 사건임이 분명한데, 어쨌든 이것이 삼각형의 한 꼭짓점이 되어 데바레드 부인의 곳의 감옥에 대한 자의식을 성장시키게 된다.

(여성의 자의식에 대해서 우리는 이미 샬롯 퍼킨스 길먼Charlotte Perkins Gilman의 「누런 벽지The Yellow Wallpaper를 알고 있다. 『모데라토 칸타빌레』에서의 데바레드 부인은 안락한 삶 속에서 '누런 벽지'를 발견하는 것이다.)


3

『모데라토 칸타빌레』가 아름다운 것은 한 부르주아 부인의 일탈이 온전히 말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부인은 한 사내에게 자신의 감옥에서의 일상을 말하고, 자신이 있는 감옥이 얼마나 아름답고 무서운지를 이야기한다(65-66):

"나무가 없는 도시에서 살아야만 해요 바람이 불면 나무들이 울부짖어요 여긴 언제나 줄곧 바람이 불죠 1년에 이틀을 빼놓곤 말이에요 제가 당신이라면 그래요 떠나가겠어요 여기 머물지 않겠어요 폭풍우가 지나간 뒤 바닷가에 죽어 있는 새들은 거의 다 바다새들이죠 폭풍우가 그치면 나무는 더 이상 울부짖지 않아요 목이 졸리는 것처럼 꽥꽥 비명을 지르는 새소리가 해변에서 들려와요 아이들은 무서워서 잠을 이루지 못하지만 전 아니에요 떠나가야겠어요."

마침표도 없이 이어진 문장에서 부인이 말하는 것은 자신의 감옥이다. 그것은 말로 시작해서 말로 끝맺고 있으며, 더 이상의 일탈을 허용하지 않는다. 그러면서 부인의 생각은 끊임없이 피와 죽음과 사랑의 일탈로 치닫는데, 그걸 알아챈 쇼뱅이라는 사내는 이렇게 묻는다(66):

"혹시" 하고 그가 말했다. "우리가 잘못 알고 있는 건지도 모릅니다. 그는 더 일찍 그 여자를 죽이고 싶었는지도 몰라요. 그녀를 처음 보았을 때 이미 말입니다. 말씀해보세요."



4

여자의 감옥은 7장에 가서 절정이 된다. 거기에서는 만찬이 벌어지고 있었고, 10년 동안 남의 입에 오르내린 적이 없는 여자는 술에 취해 만찬에 늦게 도착한다.

7장에서는, 다른 장에서와 달리, 여자에 대한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느낄 수 있다. 파티란 원래 그런 것이기도 하겠거니와, 여자의 변화나 그 날 밤의 이상한 행동들이 금세 소문이 되어 퍼지는 모습이 드러나는 것이다(106-107):

안 데바레드는 조금 전 오리 요리를 사양했다. 그렇지만 음식 접시는 아직 그 여자 앞에 멈추어 있고, 그 짧은 순간은 추문이 시작되기에 충분하다. 그 여자는 예전에 배운 대로 거절 의사를 분명히 알리기 위해 손을 치켜든다. 더 이상 권하지 않는다. 식탁 주변에 침묵이 자리잡는다.

[…]

주방에서는 그 여자가 오렌지 소스를 곁들인 오리 요리를 거절했고, 몸이 아프다는 소식이 전해진다. 다른 이유가 있을 리 없다는 것이다.


5

여자의 일탈은 소설 마지막에 와서 완성된다; 여자는 자신을, 죽은 여자와 동일시한다. 두려움 속에서 그 여자가 한 일은 한 남자와 입을 맞추고는 언어적으로 죽는 일이다(118-120):

"전 두려워요." 안 데바레드가 속삭였다.
쇼뱅은 테이블로 다가가 그 여자를 더듬어 찾았다. 찾다가 포기해버렸다.
"못하겠습니다."
그래서 그가 할 수 없었던 일을 그 여자가 했다. 여자는 입술이 서로 닿을 만큼 가까이 남자에게 다가갔다. 차디찬 그들의 입술은 조금 전 그들의 손과 같이 죽음의 의식을 따라 서로 포개진 채 떨면서 그렇게 머물렀다. 이루어졌다.

[…]

"당신이 죽었으면 좋겠습니다." 쇼뱅이 말했다.
"그대로 되었어요." 안 데바레드가 말했다.

장-자끄 아노 감독의 영화 탓에 메콩 강가의 '독신자의 방'과도 오버랩되는 이 장면은, 하지만 이미 좀더 위험하고 에로틱한 분위기를 띄고 있다. 따옴표 안과 밖을 삼투시키는 문장 "그대로 되었다"는 역시 그대로 창세기의 첫 장을 연출하고 있다: "그대로 되니라."

세계의 시작과 소설의 끝, 그 지점에서 어떤 욕망은 끝나고 다른 사랑은 시작되는 것이다, 보통 빠르기로 노래하듯이.


모데라토 칸타빌레
마르그리트 뒤라스 지음, 정희경 옮김/문학과지성사
Posted by 엔디
데까르뜨가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라고 외쳤을 때, 그의 목소리에는 자못 흥분한 떨림이 섞여 있었다. 그는 이성을 가지고 세계의 한 부분을 정확하게 설명했던 것이다. 헬라인처럼 로고스logos를 원했던(고전1:22) 데까르뜨는 세계를 온전히 이해할 수 있는 가능성을 거기서 보았던 것이다.

대학 시절, 박이문 선생님의 교양 철학 수업을 들을 때 참 의아했던 일이 있다. 이성의 신뢰자를 자청했던 그 수업의 이공계열 친구들이 이렇게 말했던 것이다: "세계의 모든 데이타를 알게 되면 이후 세계의 진행 방향을 알 수 있을 것이라고 믿습니다." 이를테면, 그들은 목적론téléologie보다는 기계론méchanisme의 입장에 선 셈이었는데... 나를 의아하게 했던 것은 그들이 쓰는 서술어였다. 결국 그들은 객관적인 자료data를 필요로 한다고 하면서도 가장 주관적인 말 '믿습니다'를 쓸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나는 이와 같은 그들의 '믿음'을 이상하게 여기며 친구와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의 원리에 관해 대화했다.) 라플라스나 하이젠베르크에 대한 수학사/과학사적 지식은 부족했지만, 그것은 그것대로 젊은 이공학도들의 열정이라 볼 수 있겠다.



여기 또다른 열정이 있다: 상상력의 열정이다. "합리주의가 이성에 의해 세계를 분석·파악하는 반면에 낭만주의는 상상력에 의한 세계 자체의 변모를 꾀한다."(23쪽) 상상력과 이미지는 세계를 이해하는 것을 뛰어넘어 세계를 변모시키려고 한다. 시인 브르통Breton의 말을 들어보자:

언젠가는 과학들이 처음 보기에는 자신들과 대립적으로 보이는 이 시적 정신에 접근할 날이 오게 될 것이다. 지금 그 과학들의 쇠사슬을 끊고, 여러 측면에서 부드럽게 휩쓸 준비가 되어 있는 것은 바로 발명이라는 천재이다. (38-39쪽)

그는 일종의 돈오론을 설파하는데, 그에 따르면 "우발적이라고 할 수 있는 두 항의 접근에서 독특한 빛, 즉 이미지의 빛이 뿜어 나오는 것"(46쪽)이라는 것이다.

이미지는 상상력이 세계를 이해하는 도구가 된다. 가령 바슐라르는 객관적 인식의 정신분석la psychanalyse de la connaissance objective을 방해하는 이미지들을 배제하고 보다 정확한 세계 이해를 위한 책을 쓰다가 거꾸로 그 이미지들에 매혹당한다. 그는 『불의 정신분석』의 서문에서

우리는 불에 대한 직관이 다른 어떤 것보다도 더 무거운 오류들에 억눌리고 있다는 것을 정확하게 보여줄 작정이다. 그 직관이야말로 경험과 측정만이 필요한 문제에 대해서, 직접적인 확신을 형성하도록 우리를 이끌고 있는 것이다. (Bachelard, 11)

라고 쓰고 있으면서도 책의 끝부분에서는 그 이미지의 몽상에 빠질 것을 권하기도 한다(59쪽).

한편 곽광수 교수는 『가스통 바슐라르』에서 바슐라르의 『공기와 꿈』은 이미지에 의존하지 않은 상상력으로 나아가는 통로라고 보고 있기도 한데(곽광수, 49-50), 앞서의 '돈오론'과 연결시킬 수 있다면 이런 상상력은 열반nirvana의 경지라고 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브르통과 바슐라르, 그리고 보들레르와 뒤랑을 읽어나가면서 상상력이라는 것이 삶을 이루는,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우리는 알아차리게 된다. 이 책의 매력은 바로 그 희망의 긍정이다. 우리는 상상력에 대한 연구를 통해 우리 삶을 전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어떤 희망을 갖게 되는 것이다.

프로이트는 잠에서 깨자마자 꿈을 기록했다고 하는데, 우리의 상상적 몽상rêverie도 매일 기록한다면 하나의 체계와 세계 이해의 요소로 작용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그렇다면 이것은 또 다른 상상력과 몽상의 열정이다.


Bachelard, Gaston. 1977. 불의 精神分析. 삼중당.
곽광수. 1995. 가스통 바슐라르. 민음사.


프랑스 문화와 상상력
박기현 지음/살림

Posted by 엔디
   시집을 통독한 것이 얼마만일까. 시 한 편을 읽을 여유도 없는 삶이 무척이나 삭막하다. 여유란 시간이 아니라, 마음이니까. 마음이 무겁다. 시를 읽는다는 것이 그렇게 누리는 호사는 아닐까. “의심하는 가운데 잠이 들었다.”


1. 밤/잠

  조영석의 시집 『선명한 유령』에서는 줄기차게 ‘밤/잠’이 등장한다. 시란 본래 꿈이고, 꿈은 대개 밤에 자면서 꾸는 것이니까 그다지 새로운 것이 아닐 수 있다. 통속적인 구분도 괜찮다면, 서정 시인은 밤에 시의 행을 늘려가고, 소설가는 낮에 ‘집필실’에서 원고지의 장수를 늘려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서정 시인은 ‘밤’이라는 낱말을 지배한다. 시인은 골방에 들어가거나, 잠깐 눈을 감는 동안에도 밤을 불러낼 수 있는 것이다. 거기서 시인은 ‘지금/여기’가 아니라 ‘언젠가/다른 곳에서’를 상상할 수 있다: 밤은 그런 것이다.

  하지만 조영석의 시에서 밤은 불러서 오는 것이 아니고, 잠은 수동적인 것이다. “날이 새면 또 먼 길을 가야” 하기 때문이다(39). 어디로 가는지 독자는 알 수 없다; 아마 시인도 모르기가 쉽다. 이인성이 “그때, 그가 돌아오려 했던 곳은 어디인가? 여기인가? 그렇다면, 여기서, 그가 여전히 돌아가려 했던 곳은 어디인가?”라고 인상적인 첫 연작 소설을 시작했던 것처럼, 그리고 프로스트R. Frost가 “Miles to go before I sleep, / And miles to go before I sleep.”이라고 되풀이하여 되뇌었던 것처럼. 서정 시인들이 ‘밤’을 불러내어 ‘다른 곳’을 상상한다면, 조영석에게 ‘밤’은 오는 것이고, ‘다른 곳’은 가야 할 곳이다; 그의 시는 쓴 것이 아니라 쓰인 것이다. 그러므로 때로 그에게 잠은 ‘졸음’의 형태로 나타난다(42-43). 한국어의 관용구에서 나타나듯이 졸음은 ‘오는’ 것이다. 시인은 어디로 가야 하는 것일까? 그곳은 도달할 수 있는 곳일까?


2. 죽음

  잠과 죽음의 차이는 어느 정도일까? 열왕기는 왕의 죽음을 묘사하면서 “자다sleep”라는 움직씨動詞를 즐겨 사용한다: “다윗이 그 열조와 함께 누워자서 다윗성에 장사되니So David slept with his fathers, and was buried in the city of David(개역한글판/KJV).” 잠과 죽음의 유사성에 주목한 셰익스피어는 로미오와 줄리엣에게 일어난 비극적인 사건을 그리고 있기도 하다. 하지만, 잠과 죽음의 가장 큰 공통점은 ‘오는 것’이라는 점, 곧 우리가 제어할 수 없는 것이라는 점이다.

  시 「거대한 잠」은 시간에 묻혀 죽은 두 공룡에 대한 이야기이다: “육식 공룡 두 마리 / 얼굴을 마주 보며 잠들어간다.”라는 행들과 “그들만의 긴 빙하기 속으로 / 쓸쓸한 공룡 두 마리 얼어간다.”라는 행들은 분명히 같은 위상을 점하고 있다. 백악기가 끝나고 오스트랄로피테쿠스가 등장하는 시기, 한 시대의 죽음을 시인은 그리고 있는 것이다. 공룡이 등장한 이유는 ‘지금/여기’에는 없는 것들이기 때문이다. 시집 전체를 통해 공룡의 변형을 우리는 많이 찾을 수 있다: 가령 시베리안허스키가 그렇다(30-31). 허스키는 거기서 아이를 죽인 죄로 처형된다. 허스키가 아장아장 다가온 아이를 물어 죽인 이유는 무엇일까? 햇볕이 너무 강렬해서? (그리하여 이방견은 삶의 부조리를 발견하고 끝내 처형당하고 말았던 것이다...)

  조영석의 시에서 죽음은 화장火葬이나 풍장風葬이 아니라 매장埋葬이다; 화장이 영혼을 자유롭게 날려 보내는 것이고, 풍장이--황동규에게서 보이듯이--삶/죽음의 경계를 지워 죽음의 고통을 극복하려는 것이라면, 매장은 일종의 가두는 행위이다. 사람은 죽는 순간 수인囚人이 되는 것이다: 땅의 수인. 그러므로 “매일 이 땅의 주인에게 사표를” 쓰지만 그 사표는 수리되지 않는다. 수리되지 않을 것을 알기에 스스로 찢어버린다(64-65).


3. 하강下降

  조영석의 시에서 죽음이란 매장이므로, 죽음이 하강의 이미지를 갖는 것은 당연하다. (불어에서 무덤tombe은 떨어지다tomber와 닮았다.) 앞에서 고찰한 잠에 대해 말하더라도, 한국어의 ‘곯아떨어지다’나 영어의 ‘fall asleep’에서 우리는 잠이 갖는 하강의 이미지를 밝히 알 수 있다. 그의 시는 바슐라르가 말하는 만큼 ‘역동적dynamique’이지 않다. 그의 시는 침잠하고 있다. “누이의 연애는 아름다워도 될까 / 의심하는 가운데 잠이 들었다.”

  때때로 상승을 뜻하는 낱말이 발견되지만, 오히려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되는 것을 알 수 있다. 올라가는 것과 날아가는 것들은 이런 것들이다: “담배 연기를 피워 올리고 있다”(29), “주인 사내가 그물로 놈을 건져 올린다”(35), “씹다 버린 풀들이 바람에 실려 날아가고”(41), “살얼음을 깨고 썩지 않은 시체를 건져 올리는 날이면”(59), “뿌리를 통해 꾸역꾸역 올라오는 검은 물들이 보인다”(74). 그리고 날아오르는 것들은 결국 땅에 떨어지게 되어 있는 것이다: “물이 솟았다 떨어진다.”(110) 궁극적으로 상승을 가능케 하는 것, 모든 운동 에너지의 원천인 태양빛부터 적敵으로 설정되어 있다(30, 80).

  하강의 이미지는 무거움에 대한 상상력이다. 시집 맨 처음을 열면 생生이 얼마나 무거운가 하는 뼈아픈 자각이 있다. 작은 새를 보고, 불쌍히 여겨 새의 무게만큼 자기 몸을 내어주고 새를 살리려던 이가, 결국 자신의 온몸을 다 올리고서야 새와의 천칭의 균형이 맞았다는 불교의 설화를 우리는 알고 있다. 조영석의 시에서 새가 잠자리로 대치되어 있지만, 결국 시인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생의 무게라는 것을 우리는 역시 알고 있다.

  시인이 이 생의 무게를 민감하게 느끼는 것은 그가 다른 별에서 왔기 때문이다. 그는 본래 “지구보다 조금 가벼운 별”에서 살았다. 만유인력 인데, 여기서 G는 만유인력 상수이고 시인의 질량(m)은 같기 때문에, 만유인력 F는 행성 또는 별의 질량(M)에 비례한다. 지구보다 가벼운 별에서 살았다면 시인이 느끼는 만유인력의 크기는 아마 지금보다 작았을 것이다. 시인은 행성 지구에 살게 되면서 전에 없던 무거움을 느끼기 시작한 것이다.

  모든 인간은 결국 수인이다(43). 나는 처음에 조영석에게 시는 쓴 것이 아니라 쓰인 것이라고 말했다. 수인이 인간이 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쑥과 마늘을 100일 동안 먹어야 하는가(69). 소행성으로 돌아가야 하는가(65). 아니, 시를 써야 한다. 조영석에게 시는 인간으로서의 존재 이유raison d’être에 해당하는 것이다.


4. 무거움

  시인은 무거움을 항상 느낀다. 하지만 그 가운데 가장 우리의 주목을 끄는 것은 돈에 대한 인식이다. 돈은 인간의 존재를 무겁게 만들며, 인간을 자기 아래에 복속시키고 수인으로 만든다(18, 29, 36-37, 89). 무거운 것은 값이 싸다(67). 시인은 이제 무거움의 사회적 차원을 느낀다. 돈에 의해 승부가 결정되는 사회는 권투와도 같은 경쟁 사회이다(88-90). 사실 권투는 쇼다; 각본이 정해져 있다는 뜻에서 쇼라는 것이 아니라, 그 경기 결과가 직접적으로 만드는 사회 현상이 없다는 점에서 그렇다. 시인이 “이것은 쇼가 아니다”라고 두 번 강조한 것은 그 권투가 달이 아니라 손가락이라는 뜻이다. 경쟁 사회에서는 ‘나’는 없고, 오로지 ‘조직’만이 있을 뿐이다. 사람들은 거기에서 돈이 나오기 때문에 ‘조직’의 쓴맛을 보면서도 꾹 참고 경쟁한다. 조영석의 시에 때로 ‘가장家長’이 등장하는 이유도, 실제로 아직까지 한국 사회를 지배하는 가부장제 아래에서는, 가장의 죽음이야말로 가장 작은 사회--가족--의 죽음을 여실히 드러내는 것이기 때문이다(94-95).

  여기에 이르러 조영석은 ‘지금/여기’의 문제로 되돌아오는 셈이다. 시 한 편을 읽을 여유도 없는 삭막한 삶이 조영석의 시 옆에서 추문으로 변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또다른, 시인의 존재 이유이다, 시를 쓸 이유이다.


선명한 유령
조영석 지음/실천문학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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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제는 그저 Metamorphoses일 뿐이다. 변신이야기라는 제목은 아마도 일본어판인 『轉身物語』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가 싶다.

한국인 신화학자 중에는 가장 유명한 이윤기가 펭귄판으로부터 옮겨낸 민음사 세계문학전집판을 읽었다. 이윤기는 일러두기에서 몇 가지를 고백하고 있는데, 먼저 라틴어 원문은 2인칭이며 운문이라는 것이다; 한국어판은 3인칭 산문으로 되어 있다. 안타까운 일이긴 하지만 대신, 해석은 매끄러웠고 모난 곳은 없었다. (단국대 천병희 선생이 번역한 『변신이야기』가 작년에 나왔다. 라틴어에서 바로 옮겼고, 행갈이를 하여 운문의 형태를 하고 있다.)



1

1권과 달리 2권은 좀 지루하다. 그것은 우리에게 익숙하지 않은 아이네이아스나 로물루스-레무스 이야기, 그리고 왠지 낯간지러운 카에사르와 아우구스투스에 대한 직접적인 아부 때문만은 아니다. 1부에서 등장한 신들의 이야기가 점차 영웅의 이야기나 인간의 이야기로 옮겨오면서 '변신'의 사례가 줄고 있기 때문만도 아니다. 원문의 문제인지 펭귄판의 문제인지 이윤기의 문제인지 한 문단의 길이는 점점 길어졌고, 산문화한 것은 똑같지만 그 안에서 아직 감지할 수 있었던 운문의 맛은 줄었기 때문이다. 1권이 산문시에 가깝다면 2권은 그냥 산문에 가깝다고 느꼈다는 것이다.

1권의 첫 서사序詞는 거의 시라고 해도 무방하다.

마음의 원願에 쫓기어 여기 만물의 변신 이야기를 펼치려 하오니, 바라건대 신들이시여, 만물을 이렇듯이 변신하게 한 이들이 곧 신들이시니 내 뜻을 어여쁘게 보시어 우주가 개벽할 적부터 내가 사는 이날 이때까지의 이야기를 온전하게 풀어갈 수 있도록 힘을 빌려주소서. (1:15)

이 부분은 본래 기도이기 때문에 그렇게 보일 수도 있다지만, 다음 인용하는 구절들은 번역의 거름망을 통과하고 있는 시적 성취를 분명히 보여주고 있다:

아폴로가 이런 약속을 하자 월계수는 가지를 앞으로 구부리고 잎을 흔들었다. 고개를 끄덕이듯이…… (1:49)


나르키소스는 푸른 풀을 베고 누웠다. 곧 죽음이 찾아와 아름답던 그의 눈이 감기었다. 사자死者들의 나라로 간 뒤에도 그는 계속해서 스튁스 강에 비치는 제 모습을 바라보았다. 케피소스 강 요정들은 동생인 나르키소스의 죽음을 애도하느라 머리를 모두 깎아 그의 죽음에 바쳤다. 숲의 요정들도 울었다. 에코는 이들의 울음소리를 숲 하나 가득하게 되울렸다. (1:138)

반면 2권은 몇몇 부분을 제외하고는 글이 무척 산문적이다. 묘사적인 부분을 일부러 찾아봐도 그렇다.

이윽고 신사神蛇는 빛나는 신전 계단을 기어내려와 뒤를 돌아다보았다. 떠나기에 앞서 정든 제단을 뒤돌아본 것이었다. 정들었던 집인 신전과 작별 인사를 나눈 이 거대한 신사는 자기에게 바쳐진 무수한 꽃다발 위를 기어 도시 한복판을 지나 방파제 있는 곳으로 갔다. 방파제에 이르렀을 때는 고개를 돌려 군중을 바라보았다. 배웅하러 나온 군중과의 작별을 아쉬워하는 것 같았다. 이윽고 산사는 이탈리아 배에 올랐다. 배는 신사의 무게가 무거웠던지 용골이 잠길 정도로 내려앉았다. (2:326)

짧은 문단에 '이윽고'를 두 번이나 썼다든가, 이별의 모습이 지나치게 장황하여 연설을 듣는 것 같다든가 하는 것을 느낄 수 있다. 특히 마지막 문장은 잘 다듬으면 훌륭한 시적 분위기를 유지할 수 있었을 것 같은데도, 아쉬움을 남기고 있는 것이다.




2

한편 아부에 관해서라면, 나는 색다른 실망감을 맛보았다: 로마 최고 시인 반열에 오른 오비디우스의 아부 실력을 보고 싶었지만, 그런 것은 나타나 있지 않았다. 최고 시인의 아부는 무척 거칠고 직접적이어서 왠지 불쌍해보이기까지 했던 것이다. 역자 후기에서 이윤기는 이 아부를 용비어천가에 빗대고 있지만, 나는 결코 동의할 수 없다.

용가는 두줄 남짓한 글귀 속에서 중국 고사와 이성계 가문을 잘 맞대면서 훌륭한 시적 성취를 드러내고 있다; 정치적 의미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을지라도 시적으로는 최고의 찬사를 받아 아깝지 않다. 고교 시절 배웠던 용가의 발췌문들은 아직도 내 머릿속에 참신한 울림을 주고 있다.

『변신』의 아부는 그렇지 아니하니, 가령 다음 구절을 보자:

…… 그러나 카에사르는 당신의 나라에서 신이 되신 분이시다. 마르스 신의 직분인 전쟁은 물론이고 평화를 정착시키신 것은, 이 분께서 수많은 전쟁을 승리로 이끄셨고, 평화시에는 많은 업적을 쌓으셨으며 엄청난 명성을 얻으셨기 때문이라기보다는 훌륭한 아드님을 두셨기 때문이라고 보아야 옳다. 카에사르의 공적 가운데 이 분을 아드님으로 삼으신 것 이상으로 빛나는 공적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2:329)

여기서는 죽어 혜성이 된 카이사르를 칭찬하는 것이 아니라 그 양자인 아우구스투스를 대놓고 칭찬하고 있다. 카이사르의 수많은 업적보다 "프린캡스 폐하"의 존재 자체가 더 훌륭하다는 투다. 카이사르 대 아우구스투스의 관계가 사투르누스와 유피테르의 관계와 같다는 식의 표현도 등장한다. 그뿐이 아니다. 영원한 아부의 소재, 장수長壽 역시 빠뜨리지 않는다:

신들께 기도를 드리오니, 아우구스투스 폐하께서, 당신께서 다스리시던 이 땅을 떠나 하늘에 오르시고, 그 높은 곳에서 인자하시게도 저희의 기도를 들으시고 이루어지게 하시는 날이 더디오게 하소서, 다음 세기에나 오게 하소서. (2:336)

오비디우스의 꿈은, 그러나 당대에 있는 것이 아니었다. 『변신』의 결사結詞는 이렇게 끝난다:

내 육체밖에는 앗아가지 못할 운명의 날은 언제든 나를 찾아와, 언제 끝날지 모르는 내 이승의 삶을 앗아갈 것이다.
그러나 육체보다 귀한 내 영혼은 죽지 않고 별 위로 날아오를 것이며 내 이름은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로마가 정복하는 땅이면 그 땅이 어느 땅이건, 백성들은 내 시를 읽을 것이다.
시인의 예감이 그르지 않다면 단언하기니와, 명성을 통하여 불사不死를 얻은 나는 영원히 살 것이다. (2:336)

그러고보면 카이사르가 신이 되었다든가, 아우구스투스가 신이 되었다는 그의 표현이 틀린 것은 아니다. 그들은 지금 역사 속에서 영원히 살고 있다. 오비디우스 역시 그런 영생을 누린다. 그는 무사이 여신들에게 늘 빌고 있지만, 지금 그 스스로가 시신詩神이 되어 수많은 시인들에게 다시금 영감을 주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변신'은 과거 신화의 시대에만 가능한 것이 아니다.


변신 이야기 1
오비디우스 지음, 이윤기 옮김/민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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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이 책을 묵혀두면서 내가 기대했던 것은, 객관성이었다. 동물학자의 인간론이라면 마땅히 갖춰야 할 무언가를 기대했던 것이다. '털없는 원숭이'라는 제목은 내게 그런 기대를 품게 했다.

책을 다 읽고난 지금은 무척이나 실망스럽다. 처음 머리말을 읽을 때부터 심상치않았다.

초기의 인류학자들은 우리의 본성이 갖고 있는 기본적인 진리를 해명하기 위해 세계에서 가장 엉뚱한 곳만 찾아다녔다. 그들이 부지런히 달려간 곳들은, 이를테면 전형적인 것과는 거리가 멀 뿐만 아니라 성과가 나빠서 거의 소멸해 버린 문화적 오지들이었다. [……] 그러나 그것은 전형적인 털없는 원숭이의 전형적인 행동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말해 주지 않는다. 이것은 주요 문명권에 속해 있는 정상적이고 성공적인 개체들―즉, 절대 다수를 대표하는 표본들―이 모두 공유하고 있는 공통된 행동양식을 조사해야만 알 수 있다. (8쪽)

그리하여 그가 선택한 샘플은 유럽에 사는 '털없는 원숭이'이다.

동물학자로서는 어쩌면 당연한 결과일지 모른다. 코끼리를 연구할 때 사라져가는 코끼리 집단보다 번성하는 코끼리 집단을 연구하는 것이 일반적일테니까. 하지만 그가 잊고 있는 것은, 오지의 문명이 '환경'에 적응하지 못해서 파괴된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최소한 그가 유럽의 '털없는 원숭이'가 전형적이고 정상적인 개체라고 말하려면, 그들이 '오지'에서 저지른 만행도 함께 '털없는 원숭이'의 특성으로 언급했어야 한다.

이 책의 결점은 방금 지적한, 얼마간 '도덕적'이고 얼마간 '전제적前提的'인 것 외에 또 있다. 이 책은 과학적 증거들로 가득찬 것이 아니라, 오로지 가설과 가정 투성이이다. 자연 과학에 상상력이 필요하다는 것을 나는 부인하지 않는다. 하지만, 한 권의 책을 가설로만 채우는 것은 과학자로서 문제가 있지 않나 싶다.

물론 그가 가설을 내세웠을 때, 그에 해당하는 방증이 없는 것은 아니다. 가령 '털없는 원숭이'가 털을 벗어던진 이유를 가정하면서, 사냥감을 추격할 때 나타나는 체온상승을 막기 위한 결정이었다고 하는 설명은 개연성이 있다. 그러나 개연성 그 뿐이다.

저자는 처음부터 과학 서적을 저술하려는 의도가 없었던 것 같다. 물론 대중을 상대로 한 서적이지 논문이 아니기 때문일수도 있다. 꼭 시치미를 뚝 떼고 '털없는 원숭이'를 동물로만 바라봐야 한다는 법이 있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글 사이 간간이 등장하는 '우리'나 '우리 인간'이라는 용어가 갖는 책 제목과의 간극은 엄청나다. 문맥이 턱 막히는 느낌이다.


털없는 원숭이
데즈먼드 모리스 지음, 김석희 옮김/문예춘추(네모북)

Posted by 엔디
80년대에 대학을 다녔어야 했다고, 스스로에게 늘 확인시키곤 했다. 1990년대 말에서 2000년대 초에 걸쳐서, 혹은 20세기 말에서 21세기 초에 걸쳐서 후다닥 해치운 대학 생활에 대한 약간의 자괴 같은 것도 있었다. 대학 생활이 내게 준 것은 무척 많았지만, 살펴보면 대개 지나간 것이나 아직 오지 않은 것에 대한 아쉬움이 함께 끼어 있었다.

맑스도 레닌도 제대로 읽지 못했고, 노동자의 삶을 위해 시위도 한 번 한 일도 없다. 그렇다고 학문을 깊이 탐구한 것도 아니다. 나는 늘 주위만을 기웃거렸을 뿐이다. 맑스-레닌을 읽기에 나는 너무 늦게 대학엘 들어왔고, 학문 탐구를 위해서는 너무 일찍 대학에 들어온 셈이다. 콤플렉스 탓일까. 내 책장에는 책들이 쌓이어 갔고, 그 책들은 다시금 내게 부담 혹은 콤플렉스로 다가왔던 것이다.

낮에는 학교 도서관에서 이삼십 권의 책을 쌓아놓고 꽃에서 꽃으로 옮겨다니듯, 나비처럼 날아 벌처럼 쏜다는 독법으로 책을 읽었다.
책에서 가장 관심 가는 부분은 저자의 약력인 것이다. 약력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장 주네처럼 도둑이었던 사람, 생 텍쥐페리처럼 비행기 조종사였던 사람, 랭보처럼 스무 살 때까지만 시를 쓴 사람, […]
저자의 살아온 삶을 읽고 난 뒤에는 책의 목차를 본다. 그리고 발행 날짜와 몇 판째 인쇄된 것인지를 본다. 제법 영악하게 책을 대하는 것이다. 목차를 보고 우선 당장 호기심이 가는 부분만 본다. 지금 당장에는 읽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되면 한쪽으로 치운다. 책 한 권의 소화는 그렇게 수월하게 끝난다.
(34-35쪽)

그러나, 팔십년대라고 해서 내가 '그곳'에 몸을 맡길 수 있었을까. 나는 집단이 개인을 가장 필요로 할 때 집단을 저버렸다.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나는 개인주의자이고, 리버럴하며, 소부르주아였다.

그러나 끝내 라라는 뛰어난 조직 인자도, 투쟁적인 노동자도 될 수 없었다. 20년 동안 몸에 배인 그녀의 리버럴한 면과 소부르주아 근성이, 팜플렛 몇 권과 몇 달 동안의 단파 라디오 주체사상 강좌로 청산되지는 않았다. 그녀는 조직의 선전 대오에서 이탈되었고 당적을 박탈당했다. 그 후, 그녀는 문학이라는 나약한 인문주의적 덕성 속에서 자신의 모습을 숨기려고 부단히 애를 썼다. 그러나 그녀는 문학판에서도 회의와 갈등의 나날을 보내야 했다. […]
라라가 죽었다.
(54-55쪽)

소설은 라라가 등장하는 1부와 디디가 등장하는 2,3부로 나눌 수 있다. 하지만 라라와 디디를 쉽게 구분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마치 한 사람을 시기에 따라 둘로 나누어 놓은 것 같다. 라라는 디디가 되기 위하여 죽었다. 디디는 '살아남은' 주인공과 달리 그 죽음을 담보로 하여 90년대적 삶에 당당한 것이다. (이렇게 보지 않는다면, 놀랍도록 라라의 것과 닮은 디디의 80년대가 이해되지 않는다.)

빨간 라디오! 하고 나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
이럴 수가 있다니!
나는 지금 디디의 얼굴에서 라라의 얼굴을 보고 있는 것이다.
(224쪽)

'살아남은' 것은 주인공만은 아니다. 한 번도 폐간당하지 않은 『현대문학』이나, 일제 협력에도 독재 협력에도 앞장선 미당, 그리고 스스로의 신념을 저버린 386세대 정치인들만이 손가락질 받아야 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의 죄는 종교적으로 말하자면 일종의 원죄original sin요, 경제적으로 말하자면 일종의 연대책임 같은 것이다. 나는 베트남의 라이따이한들에게 미안한 것처럼 이 땅의 노동자들에게 미안한 것이다.

나는 80년대를 아무 것도 모른 채 다녔다. 아무 것도 모른 채 노동자를 억압했으며, 아무 것도 모른 채 분단 체제 유지에 기여했다. 아무 것도 모른 채 미국을 찬양하고 제3세계를 비난했다. 이렇게 이야기하면 숨이 막힌다. 사실 이 시절에 대한 책임은 내게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나는 바로 그 말이 무서운 것이다: "It's not my fault."


살아남은 자의 슬픔
박일문 지음/민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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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G 서평, 소설
삶은 기억의 축적이다. 기억들은 오늘을 받치는 토양으로 삶의 기저에 차곡차곡 쌓여있다. 그 기억들을 나름의 순서로 재구성하는 것이 소설을 비롯한 글의 목적이다. 문제는 흔히 그 기억들은 현실의 힘에 밀리고 눌려 쉽사리 지각변동을 겪게 된다는 데에 있다. 다시 말하면,  본래 사람이 가진 기억이라는 것이 사실 온전하지 않아서 우리가 기댈 만한 것이 못 된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기억하는 행위 그 자체는 참으로 의미있는 일이지만 그 기억의 내용은 우리가 전적으로 신뢰할 수 없는 것이다. 만약 우리가 어떤 사건을 대할 때 기억에만 의존한다면 우리는 사실을 은폐하고 왜곡하는 결과만을 볼 수 있을 것이다.

황석영의 소설 『손님』에는 이러한, 기억이 갖는 문제점들이 엿보인다. 황해도 신천의 학살 사건을 소재로 삼고 있는 이 소설은 그 사건에 대한 객관적인 서술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것은 작가의 후기에서 스스로 밝히고 있듯이 '객관성'의 문제에 대한 한 해결방안으로써 주관-객관의 비분리, 시점의 교차 등을 택하여 얻은 효과로 흔히 지적되어 왔던 것이다. 그러나 과거는 쉽사리 윤색된다는 것을 잊은 것일까, 『손님』은 두 가지 측면에서 과거를 제대로 재구성해내지 못하고 있다.


『손님』이 소재로 삼은 사건을 드러내는 방식은 무척 독특하다. '객관성'에 대한 고민의 한 결과로 작가가 내어놓은 결과는 빈번한 시점의 이동-교차이다. 하나의 시점을 택하여 이야기를 줄곧 내어놓는 다른 소설들과는 달리 『손님』은 하나의 이야기를 삼인칭을 포함한 여러 화자가 나누어 말하고 있다.

그것은 진실에 보다 다가갈 수 있는 한 방편으로 이해된다. 어느 한 사람의 관점에서 사건을 바라본다는 것은 그 개인의 현실의 힘에 눌린 왜곡된 기억의 창으로 바라보는 것이므로 진실과 가깝다고 하기 힘들다. 따라서 빈번한 시점 이동을 통해 진정한 다성성多聲性을 획득하게 되기만 하면 보다 진실성을 가질 수 있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우리가, 흔히 법정에서 하듯 원고와 피고, 그리고 여러 증인의 입장에서 한 사건을 바라볼 수 있다면 우리는 진실에 보다 다가갈 수 있을 것이라 여겨진다. 소설 속에서도 이런 시점 이동이 가장 두드러지는 곳이 여덟째 마당 '시왕-심판마당'인 것도 이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아쉽게도 『손님』이 보여주는 '다성성'은 진정한 의미에서의 다성성이 아니다. 여기서의 다성성은 형식, 다시 말해 겉보기만 다성적일 뿐 내용적인 면에서는 단지 하나의 줄기만을 지니고 있을 뿐이다. 말하자면, 시점은 여럿이지만 관점은 하나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손님』의 전체 구조 속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여겨지는 여덟째, 심판마당에서도 학살 사건을 각자의 시점에서 서술하는 인물들(주로 죽은 이들) 사이에 어떠한 관점 차이나 의견 대립을 목격할 수 없다.

'신천 학살 사건'은 서로가 각자의 신념을 좇아 행동함에 따라 생긴 사건이므로, 그 당사자들 사이에 의견대립이 없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다. 게다가 <소싯적부터 사타구니에 거웃이 날 때까지 한 마을에서 뒹굴어온 놈들>(124쪽)끼리의, 거의 근친살해에 육박하는 큰 사건을 겪은 뒤에는 부지중에 죄의식을 덮기 위한 자기합리화가 있을 수밖에 없다. 그런 자기합리화는, 이 소설 속에서는, 죽기 직전의 류요한 장로에게서 잠깐 관찰되는 듯 하더니,¹ 그의 사후에는 완전히 사라져버렸다. 그것은 북측 정부가 내세운 증인들의 증언(108-111쪽)이 모조리 윤색된 과거인 것과 비교하면² 여기서의 관점의 일치가 무척 투명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¹ <“내가 왜 용서를 빌어? 우린 십자군이댔다. 빨갱이들은 루시퍼의 새끼들이야. (…)”>, 22쪽.
*² <그들은 모두 미군이라고 고쳐서 말했지만>, 108쪽.

그렇다면 그 투명성은 어느 평자의 말대로 죽은 자의 말이기 때문에 획득된 투명성¹이라고 할 수 있을까? 그러나 <'죽은 자'의 유언에는 거짓이 없다는 통념>과 나란히 우리는 또한 '망자亡者의 넋이 한恨을 풀지 못했다'는 말을 종종 듣는다. 그러고보면 죽은 자의 말이 투명한 것만은 아니다. 오히려 죽은 자들의 불투명성 때문에 이 소설이 씌어지게 된 것이 아닌가. 어디에서도 그토록 투명한 관점의 일치는 불가능한 것일 수밖에 없다. 여기에서의 투명성은 작가가 전지적全知的인 관점에서 서술할 것을 각각의 등장인물의 시점으로 교묘히 환원시키는 과정에서 겉으로 보이는 투명성에 불과하다.

*¹ 오창은, 「억압된 기억의 꿈」, 경향신문 2002년 신춘문예 평론 부문 당선작.

작가는 후기에서 기독교와 맑시즘이 <식민지와 분단을 거쳐오는 동안에 우리가 자생적인 근대화를 이루지 못하고 타의에 의하여 지니게 된 모더니티>(261쪽)라고 규정한다. 그러나 선사문명에서 고대로, 고대에서 중세로 가는 길에 각각 불교와 유교의 '수입'이 있었던 것을 염두에 둔다면 근대로의 전환기에 기독교와 맑시즘이 '수입'되는 것은 부자연스러운 일이 아니다. 그 시기에 우리 사회는 이미 내부의 모순이 점차로 드러나는 과정에 있었다. 그것은 서학西學에 대한 일정한 반발로서 나타났지만 인내천人乃天 사상 등을 통해 '평등'을 내보여 서민층에 널리 퍼졌던 동학東學을 보면 알 수 있다. 실제로 동학이 서민층에 강한 인력引力을 가졌던 요인은 당시 기독교 역시 가지고 있었던 <반봉건 자주의식>¹에 대한 끌림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맑시즘 역시 하층민에게 '해방'의 비젼을 보이며 접근하였던 것이다. 기독교와 맑시즘은 당시 사회 내부의 모순 때문에 받아들여진 것이라고 보는 편이 옳다.

*¹ 강만길, 『고쳐쓴 한국근대사』, 창작과비평사, 1994, 296쪽.

만약 <식민지와 분단> 때문에 근대화를 이루지 못했다고 말하려면, 왜 우리가 식민지와 분단을 겪어야 했는지에 대한 설명 또한 필요하다. 그리고 유감스럽게도 우리는 그 이유도 근대화를 이루지 못했다는 데서 찾을 수밖에 없다.

그런데 작가는 자생적 근대화를 이루지 못했다는 규정 아래 우리 사회가 나아갈 이상향을 엉뚱한 곳에서 구하고 있다.

그는 새처럼 화면의 위로 날아가고 있다. 아래로 연이은 언덕과 실개천이 지나간다. 멀리서 소 우는 소리며 목에 걸린 워낭이 딸그랑대는 소리도 들리고 닭이 알을 낳고 꼬꼬댁거리는 소리도 들린다. 들판에는 사람들이 논에서 모심기를 하면서 부르는 노랫소리가 들린다. 풍물을 치는 빠른 북소리에 꽹매기 두드리는 경쾌한 쇳소리가 얹혀있다. 어머니가 아이를 부르는 소리도 들려온다.

얘들아, 밥먹어라. (257쪽)

『손님』의 마무리 넋반 대목에서 작가가 제시하는 '이상적 공동체'이다. 무척 평화롭고 아름다워 보인다. 그러나 자세히 살펴보지 않아도 이런 평화로움이나 아름다움이 근대 이전의, 자기 모순에 의해 붕괴된 전근대 사회를 묘사하는 것임은 쉽게 알 수 있다. 과연 소작농들이 이런 시각을 가질 수 있었을까, 머슴들이 이런 시각을 가질 수 있었을까를 생각하면 이것이 전근대 사회를 제대로 드러내지 못하는 묘사라는 것은 쉽게 밝혀진다. 전근대 사회를 이상적 공동체로 제시한다는 것 자체가 '윤색된 과거'를 그리고 있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현재에 대한 안티테제로서 과거의 삶을 쉬임없이 참고하는 것은 역사를 하는 궁극적인 목적과도 부합하는 일일 테지만, 무턱대고 과거를 미화하는 것은 일종의 신비화에 빠지고 마는 결과를 가져올 것이다. 우리의 궁극적인 목표는 인간의 해방이지 과거의 회복이 아니기 때문이다.¹

*¹ 도정일, 『시인은 숲으로 가지 못한다』, 민음사, 1994, 167쪽 참조.

그런데 과거가 쉽게 윤색된다는 사실을 잊은 데서 비롯한 이들 '겉보기만의 다성성'과 '과거 회귀 경향'은 이 소설의 형식에서 이미 예견된 것이었다. 작가가 밝히고 있듯이 <이 작품은 '황해도 진지노귀굿' 열두 마당을 기본 얼개로 하여 씌어졌다.>(262쪽) 작가의 입장을 따라 본다면 넋굿 형식을 채용한 것은 피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이 소설의 취지가 류요한으로 대표되는 학살 사건 당사자의 죄를 씻기고 그들이 저승으로 떠날 수 있게 하는 데에 있는 만큼 어떤 종교적인 의식은 필연적이다.

류요한의 죄가 문제시되는 것은 소설 초반부에 제시되는 박명선의 회고(45-49쪽)와 <“머 종교야 어두운 시절의 미신이니깐 다 좋다 말입니다. 반동이던 앞잡이던 기것두 거저 넘어갈 수 이서요. 사람은 왜 죽입네까?”>(94쪽)하는 류단열의 항변에서 볼 수 있듯이 그 죄가 살인과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살인이 죄가 되는 이유는 아마도 사람이 사람의 생명의 여탈권을 갖는 것이 옳지 않다는 믿음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면 그러한 살인죄를 씻는 데도 역시 사람의 힘을 능가하는 어떤 존재의 힘을 빌려 씻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사람이 사람의 생명에 대한 여탈권을 쥐지 않았다는 말은 그 사람의 죄를 용서하는 권도 역시 갖지 않았다는 말이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작가의 입장에서는 기독교는 자생적인 것이 아니므로 그 죄를 씻는데 적합하지 않다. 또, 유교와 불교 등의 종교도 과거로 거슬러올라가보면 외래적인 것이므로 자생적이지 않다는 점에서는 마찬가지이다.¹ 때문에 작가로서는 가장 토착적이고 자생적인 것으로 널리 알려진 샤머니즘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¹ 성민엽, 「이데올로기 너머의 화해와 그 원리」, 『창작과 비평』 2001년 겨울, 244쪽.

그런 샤머니즘의 선택은, 그러나 문제를 해결하지는 못하고 오로지 지우는 데에만 기능하고 있다. 본래 <넋굿은 망자로 하여금 생전에 있었던 모든 맺힌 한을 풀어버리고 자유롭게 저 세상으로 떠날 수 있도록 돕는 데>¹ 그 목적이 있다. 때문에 넋굿은 어떤 의미에서 체념을 위한 의식이다. <한을 풀어버>린다는 것은 무엇인가. 망자에게 자신의 죽음을 받아들이게 하고 삶에서 있었던 좋지 않은 사건들에 대한 감정을 버리고 체념하기를 권고하는 것이다. 실제로 작품 속에서도 순남이 아저씨는 <죽으문 자잘못이 다 사라지디만 짚어넌 보구 가야디>(194쪽)라며 문제를 해결하는데 애쓰기보다는 문제를 지우자는 취지의 말을 하고 있다.

*¹ 차옥숭, 『한국인의 종교경험․巫敎』, 서광사, 1997, 272쪽.

해서 『손님』은 한 판의 넋굿을 통해 모든 한恨을 풀고(지우고) 모든 외래의 것을 물리친다. 그런 굿판 끝에, 그 결과로 나타난 것이 전근대적인 유토피아요, 그 등장인물들의, 실제로는 불가능할 투명한 말들이다. 샤머니즘의 세계관은 치열한 현실 인식 속에서 사건을 바라보지 못하고, 굿이라는 형식을 통해 죄책감을 씻으려는 의식주의儀式主義ritualism의 성향이 짙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기독교는 어떠한가? 앞에서 기독교가 서민과 민중들에게 깊이 파고들 수 있었던 이유는 평등과 기회를 보여주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런데 『손님』에서의 기독교는 전혀 민중적이지 않고 평등을 내세우지도 않는다. 그것은 이북에서의 부흥기에 기독교가 전혀 다른 기능을 했기 때문이다. 스펜서 J. 파머는 이북의 초창기 기독교 선교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기독교는 최초의 支持를 北韓지역에서 강하게 받았다. 거기에서 기독교는, 서울에 있는 양반에 대한 그 지역 사람들의 오랜 不平을 이용할 수 있었다. 儒敎原理는 평양에서 그다지 존숭되지 않았다. 이 지역에 있어서 기독교에 대하여 매우 강하게 긍정적으로 반응해간 이유는, 그들이 그 당시의 상황에 대하여 확고한 旣得的인 利權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는 사실에 부분적으로 의거한다. 또한 기독교는, 서울에 있어서 儒敎의 규칙이 너무나 융통성이 없고 형식적이어서 현대적인 문제에 적용할 수 없다고 느끼고서, 그것을 따라가기 어렵게 생각하는 상당수의 귀족젊은이들의 마음을 끌었다. 이 젊은 양반 개혁자들은 권력의 座에 앉기 위하여 그리고 외국, 특히 미국에 대한 지식을 얻기 위하여 이 外國 信仰과 연결되는 것이 이롭다고 생각하는 保守主義者들이었다.¹

*¹ 스펜서 J. 파머, 「東洋社會와 基督敎」, 『思想界』 1966년 12월, 89쪽; 강만길(295쪽)도 <개신교는 당초 서북지방의 자립적 중산층을 중심으로 수용되어 갔다>고 서술하고 있다.

지극히 기복적祈福的이라고 할 수 있는 이런 신앙의 양태는 사실 올바른 믿음의 본보기라 할 수는 없다. 종교학자 윤이흠 교수는 믿음을 기복형, 구도형, 개벽형의 세 가지 유형으로 나누고 그 첫째인 기복형을 가리켜 이르기를 이 유형은 생존의 동기를 갖는 믿음으로 이러한 유형은 일률적인 행동 양식과 현세적 조건의 만족에 머물기 때문에 극단적 보수주의라고 할 수 있다고 했다.¹

*¹ 김주연, 「사랑의 문화를 위하여」, 김주연 엮음, 『현대문학과 기독교』, 문학과지성사, 1984, 14쪽에서 재인용.

이런 시각에서 볼 때 『손님』에서 보이는 기독교는 보수주의자들의 기득권유지의 한 방편으로 볼 수 있다. 가령 류요한이 <우리 군에 인민위원회가 생겨난 뒤에 가보니 정말 한심하더라. 어중이 떠중이에 머슴 건달 떠돌이 따위들인데 누가 보아도 제 고장에서 대접 못 받던 놈들을 긁어모은 것이라.>(119쪽)고 했을 때, 류요한의 어머니가 박일랑(이찌로)에게 <“네 이 배은망덕헌 놈 겉으니. 감히 누굴 치느냐?”>(135쪽)라고 했을 때, 거기에는 기독교적 평등개념은 찾아볼 수가 없다. 보수주의 기독교인들은 자신들의 기득권이 하나님의 축복으로 여길 것이고 <어중이 떠중이>를 모은 공산주의자들은 축복받지 못한, 사탄의 자식으로 여길 것이다. 보수주의자들은 처음부터 그들을 영혼이 있는 존재로 생각하지 않았던 것 같다. 그들은 처음부터 기독교로 이끌림받지 못했다. 순남이 아저씨는 이렇게 말한다.

기러구 보니께 우리집 주인덜 가족이 다니넌 광명교회에 나 겉은 사람언 한번두 얼씬얼 못해서. 소작인이라두 제 식구가 있넌 이덜언 서루 권하구 이끌어서 교회에 더러 나가댔다. 우리 겉은 일꾼덜이나 머슴덜언 일년 사시사철 일만 하거나 하다못해 꼴얼 베구 나무럴 하구 소 멕이기두 하구 있대서. 그낭 먼발치서 예비당에서 들레오넌 종소리나 찬송가 소리럴 듣기만 했대서. (79쪽)

본래 종교가 기복적 성격을 갖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여러 성격 중에서 어느 한 편만 강조되는 것은 건강한 신앙이 아닐 것이다. 흔히 한국의 기독교가 샤머나이즈 되었다고 하는 것은 기독교의 기복적 성격만 지나치게 강조되어왔다는 뜻으로 읽힐 수 있다. 사실 기독교가 한국에서 널리 퍼진 이유를 그것의 샤머니즘과의 유사성에서 찾는 이도 있다.¹

*¹ 파머, 위의 글, 85-86쪽.

작품에서 류요한 등이 보여주는 기독교는 보수적인, 기복형의 기독교인데, 그것은 샤머니즘화된 것으로 알려진 한국의 불교와 마찬가지로 샤머나이즈 되어 이미 어떤 면에서는, 이른바 '자생성'을 획득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들의 '십자군 전쟁'도 잃었던 기득권을 되찾기 위한 것이었을 뿐, 사회 개혁을 위한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류요한이 박일랑을 체포한 직후 <너 이새끼 우리 땅 뺏구 천년만년 리당위원장 해먹을 줄 알았네?>(213쪽)라고 하는데서 명백하게 드러난다.

그러나 『손님』에서 보이는 초기 이북의 기독교뿐만 아니라 현재 우리가 가지고 있는 신앙도 샤머니즘적 기복신앙으로 변질된 측면이 많다. 샤머니즘은 개인의 현세적 고민(기억)들을 지우는 데에만 기능하고 있다. 기복신앙이 세상을 바꾸는 힘이 될 수 없는 이유는, 샤머니즘이 그렇듯이 그것이 가진 이기주의적인 발상 때문이다. 마가복음 12장 13절의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말씀은 그런 이기주의적인 기복신앙을 극복하라는 말씀이다. 그러한 극복이 이루어지지 않은 기복적 기독교신앙은, 앞서 생각해보았던 샤머니즘이 그렇듯이 한을 푸는(지우는) 데에만 기능하는 의식주의에 불과한 것이 될 것이다. 참된 믿음은 이상사회와 현존질서의 괴리를 각성하고 그 괴리를 메우기 위해 진실된 기억을 토대로 하여 현세적 이기주의를 극복하는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개인과 공동체의 행복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며, 차츰 그 행복을 다져가게 될 것이다.


손님
황석영 지음/창비(창작과비평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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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을 '바람'이라고 부르던 兄이 있었다. 그는 발소리도 없이 나타났다가, 인기척도 없이 사라지곤 했다. 그는 어쩌면 자유로웠을지도 모르지만, 나는 이제 '바람'으로서의 그가 많이 외로웠으리라고 짐작한다. 겨울의 문턱 즈음에 태어난 그가 스스로를 '바람'이라고 부를 때, 산뜻한 봄바람이 연상되는 경우는 없었다. 나는 매년 가을 경에 요절한 시인의 시비詩碑에 앉아 시를 읽곤 했다. 그때마다, 그때마다, 바람이 불었다.


황동규에게 '바람'이 갖는 의미는 각별하다. 그의 시는 항상 바람 부는 곳에서 있고, 그 바람은 또한 항상 비바람 아니면 눈보라다. 때문에 그의 바람은 "산 위에서 부는" 시원한 바람도, 더운 여름날 여자들의 치마 끝자락을 살짝 들어올리는 가벼운 바람도 아니다. 그의 바람은 늘 습윤濕潤하고, 그러므로 무겁다. '바람의 시인'으로서 황동규는, 또다른 '바람의 시인' 정현종과는 아주 대조적인 시를 보여준다. 정현종의 바람이 율동을 통해 발레리나의 발을 대지에서 띄워준다면, 황동규의 바람은 발레리나의 발을 다시 땅에 붙박게 만든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황동규는 땅으로의 발디딤을 통해서 오히려 자유로워지려고 더 노력한다. 우리는 황동규의 구속과 자유를 통해서 구원의 역사를 볼 것이다. 먼저 그의 「풍장風葬」 연작의 첫 일절을 보자.

내 세상 뜨면 풍장시켜 다오
섭섭하지 않게
옷은 입은 채로 전자시계는 가는 채로
손목에 달아 놓고
아주 춥지는 않게
가죽 가방에 넣어 전세 택시에 싣고
군산群山에 가서
검색이 심하면
곰소쯤에 가서
통통배에 옮겨 실어 다오

이것은 「풍장1」의 첫 부분이다. 여기서 "아주 춥지는 않게" 위에 윗점을 좀 찍어보면 어떨까. 그는 그의 죽음이 아주 추울 것이라고 예언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옷도 입고 있고 전자시계도 차고 있는 것에서 알 수 있듯이 그의 죽음은 그의 생生과 구분된 것이 아니다. 시계가 "가는 채로" 있다는 것은 본질적으로 삶의 시간과 죽음의 시간이 나뉘지 않는다는 인식이다. 그렇다면 과연 그의 삶이 그토록 차가운 생이었는가, 우리는 그의 초기시를 볼 수밖에 없다. 이를테면 그의 데뷔작인 「시월」을 보자. 「시월」에 바람은 싸늘히 불고, 안개 속에 찬비가 뿌려진다. 바람은 빈 가지를 흔드는 존재이고, 낡은 단청 밖으로 이는 존재이며, 비와 함께 낙엽을 떨어뜨리는 존재이다. 그 계절 속에서 '나'는 "한 잎의 낙엽으로 좀더 낮은 곳으로" 내려지기를 원한다; 「즐거운 편지」에서는 '내'가 눈이 퍼붓는 골짜기에서 기다리는 존재로 표상된다.

시인에게 있어 데뷔작이 갖는 의미는 크다. 데뷔작은 그 시인을 시인되게 한 시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데뷔작은 일정한 방향성方向性을 가지고 있다. 시인의 지향이 삶을 통해서 변모한다는 것을 감안하더라도, 시인은 자신의 데뷔작으로부터 항시 자유롭지 못하다. 황동규의 시를 둘러보면 그의 시가, 겨울 장면이 하나도 없었다는 어떤 이상한 영화와는 달리, 가을이나 겨울, 혹은 그 언저리에 자리잡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그의 시는 또한 비바람이나 눈보라 속에서 씌어지고 있으며, '나'는 바로 그 지점에서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너의 마음 가에 바람소리 바람소리 - 「겨울 노래」
귀 기울이지 않아도 바람소리 바람소리 - 「겨울 노래」
문을 닫아도 바람소리 바람소리 - 「겨울밤 노래」
내 잠시 생각하는 동안에 눈이 내려 눈이 내려 생각이 끝났을 땐 눈보라 무겁게 치는 밤이었다 - 「기도」
소리 없이 바람은 불고 - 「이것은 괴로움인가 기쁨인가」
밤새 눈 속에 부는 바람 - 「어떤 개인 날」
포장 속에 우는 어두운 바람소리 - 「悲歌 제7가」
길게 부는 寒地의 바람 / 바다 앞의 집들을 흔들고 - 「기항지 1」
마당에는 은행나무가 바람에 잡혀 / 조심스런 첫 잎을 떨구고 있었다 - 「세 개의 정적」
우리 願의 오랜 물결 / 사면에 바람은 분다 - 「비망기」
폭풍경보의 바다 / 바람의 속도 속에 보이지 않는 해 - 「북해」
눈떠라 눈떠라 참담한 시대가 온다. / 동편도 서편도 치닫는 바람 - 「전봉준」
바람 속에 남아 있는 우리의 얼굴 - 「입술들」
바람에서 다른 바람으로 끌려가며 - 「더 조그만 사랑노래」
빗소리 속에도 바람이 부는지 / 풀들이 흔들리는 것이 보인다
- 「김수영 무덤」

되는대로 뽑아본 『三南에 내리는 눈』(이하 『三南』) 속에서의 바람의 등장모습들이다. 부분부분 인용된 것들을 쓱 훑어만 보아도 황동규의 '바람' 인식을 금새 알아차릴 수 있다: "문을 닫아도" 들리는 바람은 "밤새 눈 속에 부는" 바람, "무겁게 치는" 눈보라이며, 그것은 다시 "참담한 시대"를 암시하는 "폭풍경보"의 바람이다. 그런데 시 속에서 보이는 '내'가 그 바람 속에서 취하는 행동은 좀 놀랍다. 황동규, 혹은 황동규 시의 '나'는 그 바람 속에서 웃는다.

황동규 시에서 웃음은 놀라운 상황에서의 인식과 대응이다. 그 웃음은 그 안에 모든 것을 초탈해서 무의미화하려는 신비주의의 웃음이 아니라, 습윤한 인생의 한가운데를 관통하여 '나'의 모든 감정을 한 순간에 드러내는 웃음이다. 그러므로 그 웃음은 순수하지 않다. 가령 「겨울밤 노래」의 첫머리에서

조금이라도 남은 기쁨은 버리지를 못하던
해 지는 언덕을 오를 때면 서로 잡고 웃던
해서 눈물겹던 사내여 오라.

고 했을 때, "서로 잡고 웃"는 행위는 그 안에 많은 표현을 담고 있는 것이다. 그 웃음이 다만 차가운 바람 속에서만 있을 수 있는 복합적인 것임을 밝혀주는 구절로는 「얼음의 비밀」의 1련, "헐벗은 옷 틈새의 웃음소리, 내민 살의 내민 살의 웃음소리."를 들 수 있다; 「갈매기」에서는 "나는 슬프지도 기쁘지도 않은 웃음을 울고 싶었다"고 노래함으로써 그 웃음의 정체를 보다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한편 황동규 시에서 역시 자주 등장하는 것으로 '새'가 있다는 점을 지적해두자. 제목만으로 본다면 「갈매기」, 「들기러기」, 「철새」, 「바다새들」과 『三南』과 같은 시기에 씌어진 시들을 수록하고 있는, 『나는 바퀴를 보면 굴리고 싶어진다』(이하 『바퀴』)의 「새들」이 있다. 다른 제목 아래 씌어진 새들의 숫자까지 합하면 훨씬 많다. 황동규가 기르는 이 수많은 새들은 기본적으로 '바람'과 같은 기능을 하고 있지만, 구체적인 시행에 있어서는 바람보다 더 처절한 모습을 보여준다. 하늘을 날고 싶어하는 것이 인간의 보편적 소원이라고 했을 때, 새는 그 소원이 있게 한 동물이다. 그러므로 새를 바라보면서 자유나 탈출, 혹은 도주逃走를 생각하는 것은 자연스럽다. 「도주기」에서 그는 죽음을 암시하는 도주를 노래하고 있다. 그러나 그 바로 다음에 수록된 기러기는 날아오르는 것이 아니라 "날아 내[리]"고 있으며, 들기러기들의 삶은 "다섯 달 겨울"로 설정된다. 떠남의 모티프는 「기항지1」에서도 보인다. "걸어서 항구에 도착했"지만, "정박중의 어두운 龍骨들"은 모두 "항구의 안을 들여다보고 있었다"는 것이 이 시의 뼈대를 이룬다. '그'의 떠남은 번번이 좌절되는 것이다. 결국 그는 "행해를 단념한다." (「남해안에서」) '그'는 무엇을 바라는 것일까. 어디로 떠나고자 하는 것일까.

「어떤 개인 날」은 "아무래도 나는 무엇엔가 얽매여 살 것 같으다"는 자조적인 예언을 담고 있다. 「새벽 빛」에서는 "진실로 같은 틀로 나고 끝남을 알게 된다면, / 다시 나고 싶지 않으리라 / 이끼풀까지도, / 다시 살고 싶지 않으리라"고 보다 명확하게 이를 밝혀주고 있다. "해탈처럼 쉬운 건 없지 / 매일밤 해탈에 脫皮까지 하고 / 아침이면 한 바퀴 돌아 / 제자리에 와 있더라"라는 「네 개의 황혼」에서의 통탄할 인식은 이 얽매임이 무엇보다도 근원적이고 치유불가능한 것임을 고통스럽게 보여준다. 그래서 '그'은 의문을 표시한다. "같이 쫓기며 누리는 허황되지 않은 자유가 있을까." (「북해」)

역설적이게도 '그'의 자유는 단단함 혹은 땅의 단단함 속에서 찾아진다. 인도 시인에게 부쳐진 『바퀴』의 「편지․1」은 이렇게 노래하고 있다:

이번 여름에는 미칠 듯 가을을 기다릴 것 같고
가을에는 또 꽝꽝한 얼음장이나 기다리며 살겠읍니다.

그것은 뜸[浮上]에서 자유가 아니라 두려움을 찾은 사람의 상상력이다. 항우의 고사를 연상시키는 「楚歌」라는 제목의 시는 "미치는 것도 미치지 않고 잔구름처럼 떠 있는 것도 두렵잖아요"라고 노래하고 있으니 말이다. 「김수영 무덤」은 김수영의 「풀」에 대한 독서讀書로 보이는데, "젖은 마음을 잠시 땅 위에 뉘어놓"는 행위나 "이 악물고 그대가 흔들리고 / 마지막으로 다시 풀들이 흔들[리]"는 묘사에서, 땅이 주는 휴식과 땅에 붙어 있으려는 의지를 볼 수 있다. 여기서 이중의 역설이 발생한다. 땅에 발 디딘 자만이 마음껏 떠날 수 있고, 마음껏 죽을 수 있다는 사소한 진리를 발견하는 순간이다. 그 순간을 「정감록 주제에 의한 다섯 개의 변주」는 이렇게 노래하고 있다.

아버지가 죽은 후 아버지가 명당마다 타오른다.
명당이 죽은 후 명당이 우리 자리에 타오른다.
우리가 죽은 후 우리가 흰 옷 입은 도적이 되어 타오른다.
흰 옷 입은 도적들, 빨래 같은, 도처에 흰 천들.

죽음이 저질러졌다. 바람소리들이 되돌아왔다. 던진 돌도 되돌아오고 깨어진 머리들도 되돌아왔다. 삭제된 문장들도 삭제된 채 되돌아왔다. 골목에 파수 세우고 문서 태우고 우리가 습격하는 우리의 집들, 소리 소리 우리.

이 즈음에서 황동규는 바람에 얽힌, 눈에 얽힌 비밀을 털어놓는다. '金炳翼에게'라는 부제를 달고 있는 『바퀴』의 시 「성긴 눈」에서 우리는 놀랍게도 "한두 마디씩 내리는 성긴 눈발"이라는 시구를 찾아볼 수 있고, 「더 조그만 사랑노래」에서는 "아직 멎지 않은 / 몇 편의 바람"이라는 표현을 찾아볼 수 있다. 그러고보면 『바퀴』에 실린 「새들」에서 "할 말을 않고 있는 새들"을, 「세 줌의 흙」에서 "몇 마디 아픈 말이 뱉어지지 않는다"는 쓰라린 고백을 찾아볼 수 있다. 말할 수 없음은 말하고 싶음과 긴밀히 연결된다. 그것이 「手話」를 부른다. 나중에 이성복에 의해서 「口話」로 발전할 이 시에서 시인은 삭발-눈발, "웃음 그 얼음 낀 벗음"과 같은 음성적 유사성에 의한 언어 유용과 "이건 […]", "저건 […]"의 반복을 통한 말배움을, 그리고 '조지다' '오입' 등과 같은 비속어를 통해서 새로운 말을 찾는 그의 치열함을 볼 수 있다. 그의 생을 괴롭히는 바람과 눈이 사실은 말[言]이었다는 사실은, 그의 구원도 말로부터 올 수밖에 없다는 인식으로 전환될 수 있다. 바람처럼 날아오는 말, 눈처럼 내려쌓이는 말을 우리는 삶 속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다.

황동규의 연애시는 편지로부터 시작한다. 그가 고등학교 3학년 때 썼다는 「즐거운 편지」도 바람처럼 날아오고 눈처럼 쌓이는 한 통의 편지이며, 「조그만 사랑노래」와 「더 조그만 사랑노래」, 「더욱더 조그만 사랑노래」들도 "어제를 동여맨 편지"에서부터 시작된다. 그 사랑노래는 사랑으로 하나가 될 수 있다는 신뢰에 바탕을 두는 것이 아니라 '나'의 능동적인 기다림을 바탕으로 한 것이라는 점에서 무엇보다 편지이다. 그러나 그런 기다림의 가능성을 '그'는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조그만 사랑노래」에서는 흩날리는 눈발을 "땅 어디에 내려앉지 못하고 / 눈 뜨고 떨며 한없이 떠다니는 몇 송이 눈"으로 묘사하고 있고, 「더 조그만 사랑노래」에서는 "한 바람에서 다른 바람으로 끌려[간]"다는 표현까지도 등장한다. 그 어디에도 기다림에 대한 믿음의 근거는 보이지 않는다.

기다림에 앞서서 황동규의 현실 인식을 먼저 보자. 황동규는 사랑을 기다리는 사람 혹은 사람을 기다리는 사랑의 처지와 한국 혹은 한민족의 처지를 같은 것으로 보려고 하고 있다. 그것은 「태평가」에서 자세히 나타난다. 약소민족의 난해한 사랑 같은 것을 황동규는 계속해서 '조국'이라는 이름으로 느끼고 있다. 에든버러에서 쓴 것으로 되어 있는 「낙법」은 "主語가 없는 그대와 나. // 칼날처럼 벗은 우리 조국"을 부르고 있고, 「虎口」에서는 "조국은 닫혀 있다"는 명제를 내세우기도 한다. 「정감록 주제에 의한 다섯 개의 변주」에서는 "축소된다, 모든 것이, 가족도 친구도 / 국가도, 그 엄청나게 큰 것들, 그들 손에 들려진 채찍도," 라고 선언하고 있고, 「돌을 주제로 한 다섯 번의 흔들림」에서는 "드디어 <너>도 <나>도 지워진다. 가만히 주위를 둘러보라. 어느샌가 <우리>만 남아, 아 항상 더불어 같이 살아야 할"이라는 공동체 의식을 보여준다. 다음 단계는 그러한 의식을 역사 속에서 찾는 단계다. (시인이 역사의식을 가져야 한다고 했던 사람은 T. S. 엘리엇이었다.) 「전봉준」 시편들과 「허균」 시편들, 「열하일기」 시편들을 제시함으로써 황동규는 '그'의 기다림의 가능성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봉준이"의 "일자무식"한 혁명이 '그'에게 있어서는 「手話」의 말의 혁명으로, 일자무식의 새로운 말배움으로 환치되고 있는 것이다.


황동규의 시 속에서 우리는 구원의 모습을 정확히 파악할 수 없다. 구원은 여전히 '시-안'이 아니라 '시-바깥'에 있다. 시는 구원이 아니다. 이성복의 지적대로 문학이 자신을 구원할 것이라고 믿는 것은 하나의 신비화이다. 그러나 문학은 기다림의 가능성을 알려줄 수 있다. 왜 우리는 소용없는 줄을 알면서도 "빛이 있으라"라고 목이 쉬도록 외쳐야 하는가.

잠언: 『三南』에서 보이는 시작의 발전과정을 다시 한 번 참조 해볼 것.


삼남(三南)에 내리는 눈
황동규/민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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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말 '쟝르genre'는 본래 다만 '종류'를 뜻하는 말이다. 이를테면 "J'aime ce genre de fille."라고 하면 "나는 이런 유의 여자를 좋아합니다."라는 뜻이다. 프랑스말 '쟝르'가 현재의 "문예 작품의 형태상의 분류"라는 뜻을 가진 국제어, 장르로 더 많이 인식되면서 말의 쓰임은 상당한 정도로 변한 셈이다. 그러나 프라이의 지적대로라면 "장르의 비평이론에 손을 댈 때 우리는 아리스토텔레스가 남기고 간 그 이론에서 한 발자국도 더 나아가지 못하고 머물러 있음을 발견한다."(64쪽) 우리가 이 지금 '장르의 이론'을 보아야 하는 이유는, 세미나 꺼리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장르의 이론이 프라이의 비평이론의 씨눈이기 때문이다. 또한 앞서의 문장에서 홀로 이름씨固有名詞를 지우고 그 문장을 일반화시켜도 여전히 유효하다는 것도 주목에 값한다. 유기룡은 국어국문학회가 엮은 『국어국문학과 구미이론』에 실린 「신화문학론의 수용과 그 과제」의 둘째 장章에서 "이 신화적 원형이 반복되어 나타나는 신화 가운데서도 가장 전형적 신화가 문학의 관례인 장르를 이루게 된다는 관점에서 문학 장르의 이론까지 확대하게 된다."고 적고 있다.

비평을 스스로 선 인문과학의 하나로 세우기 위한 프라이의 의도는 원시적인, 소박한 귀납법에서 이른바 '귀납적 비약'을 거쳐 보다 연역적인 면모를 갖추어야 한다는 데까지 나아간다.(67-69쪽) 그는 가장 연역적이면서 동시에 가장 쓸모있는 수학을 예로 들어 "수학에서 우리는 세 개의 사과에서부터 '3'으로, 또 직사각인 밭에서부터 '작사각형'으로 나아가지 않으면 안 되는 것"(653쪽)이라고 말한다. 하므로 그가 『비평의 해부』의 도식적인 성격을 무릅쓰고 "비평에도 분류가 필요하다"(92쪽)고 말하는 데에까지 이르면 그의 비평이론에서 '장르의 이론'이 얼마나 높은 위치를 갖는지 알 수 있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 이상섭은 『문학 연구의 방법』의 「신화 비평의 방법」의 둘째 마디節에서 "신화 비평은 최대의 중요성을 부여하는 종류의 개념, 즉 쟝르(genre=종류)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 그러나 역사주의에서 말하는 쟝르의 개념과는 무척 다르다. <쏘넷>, <2막극>, <단편소설> 등등 역사적 쟝르는 단지 외형적 관례에 지나지 않는다고 보는 것이다."라고 풀이한다.


프라이는 스스로의 '장르의 이론'을 '수사비평'이라고 이름했다. 그 점 말해주는 바 크다. 그의 장르론은 "기본적인 제시의 방식에 의거하고 있"(470쪽)다. 그러나 네 장르―에포스, 산문(즉, '픽션'), 극, 서정시―를 설명할 때 그는 리듬 분석으로 일관한다. 아마도 리듬이 '제시의 기본형식radical of presentation'과 반드시 관련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것은 우리 옛 문학과도 얼마쯤 관련되어 있다. 상허尙虛 이태준은 『문장강화』 제1강의 「이미 있어온 문장작법」에서 "활판술이 유치하던 시대에 있어서는, 오늘처럼 책을 구하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 자연히 한 사람이 읽되 소리를 내어 읽어 여러 사람을 들리는 경우가 많았을 것이다. 소리를 내어 읽자니 문장이 먼저 낭독조로 써지어야 할 필요가 생긴다. […] 쓰는 사람은 내용보다 먼저 문장에 난조투어(亂調套語)를 대구체로 많이 넣어 […] 아뭏든 낭독자의 목청에 흥이 나도록 하기에 주의하였을 것이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3・4, 4・4조 낭독조의 우리 옛 문학이 투박하나마 특수한 한 예例가 되어주는 바, 리듬과 '제시의 기본형식'의 관련성은 시인・지은이作者와 듣는이聽者/聽衆・읽는이讀者의 관계양상에 의지한다고 프라이는 보고 있다. 극의 경우는 "작자가 청중의 눈으로부터 숨어 있"고, 에포스에서는 "작자가 직접 청중과 대면하며, 작중의 가상적인 인물은 숨겨"지고, 씌어진 문학記錄文學/written literature(즉, '픽션')에서는 "작자도 작중 인물도 독자로부터 숨겨져 있"(이상 473쪽)고, 서정시는 "청중이 시인으로부터 숨겨진 경우"(474쪽)라는 식이다. 장르들 사이에서 보이는 중요한 변화는 시인・지은이의 듣는이・읽는이에 대한 태도이다. 그 태도에 따라 에포스는 '계기되풀이recurrence의 리듬', 산문(즉, '픽션')은 '지속continuity의 리듬', 극은 '데코럼걸맞음decorum의 리듬', 서정시는 '연상association의 리듬'으로 갈리는 것이다.

그것은 장르에 따라 글투文體가 흔히 바뀌는 모습에서 잘 볼 수 있다. 뷔퐁Buffon이 "글은 사람이다Le style est l'homme même."라고 말했을 때, 그는 글투의 중요함을 말한 것이다. 그런 면에서 프라이는 "장식적인 변론과 설득적인 변론"을 수사修辭가 처음부터 가진 두 뜻이라고 말하면서 "장식적인 수사는 문학 자체―그 자체를 위해서 존재하는, 가설적인 언어구조라고 우리가 일컫는 것―로부터 분리될 수가 없다"고 주장한다. "장식적인 수사야말로 시의 렉시스, 즉 말의 결이라는 것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는 것처럼 생각된다."라고 높이 추기도 한다.

그렇다면, 과학적인 문학 연구로서의 비평이 결국은 '장르의 이론'으로 나아가는 것은 당연한 일인 것 같다. (장식적) 수사는 리듬과 가장 큰 관계를 갖는데, 그 수사가 문학으로부터 분리될 수 없다면 문학 연구에서 리듬의 연구는 무척 큰 범위를 가질 것이다. 그리고, 리듬은 장르와 연관되므로 문학 연구는 장르와 관계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운문과 산문의 관계에 있어서도 셰익스피어가 하층신분의 등장인물은 산문으로 말하게 하고 상층신분 등장인물은 운문으로 말하게 하고, 상층신분 등장인물이라도 술에 취해 있을 때나 정신에 이상이 생겼을 경우에는 산문으로 말하게 하고 있다고 유종호가 「스타일 분리에서 혼합으로」의 '걸맞음' 항목에서 지적하고 있는 것에서 볼 수 있듯이 시극詩劇이라는 장르와 엮이어서 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런데, 문학에서의 글투를 중요시하여 리듬을 강조한다고 했을 때, 음악적인 면은 그런대로 풀리겠지만 실제 문학이 갖고 있는 시각적(미술적)인 면은 어떻게 풀이될 수 있을까. 아리스토텔레스의 '비극의 여섯 요소'에서도 영어로는 spectacle로, 우리말로는 장경場景 또는 영상으로 옮겨지는 옵시스ὄφις가 있음에도 프라이는 이에 대해 그다지 주목하지 않는 것 같다. 다만 "고전시에서는 음의 패턴 즉 음의 장단은 반복적인 요소이며 따라서 시의 멜로스의 일부였는데, 현대에서 그것은 옵시스의 일부가 되고 있다"고 한 번 그것에 대해 말하고 있을 뿐이며, 그나마도 근거는 함께 쓰지 않고 있다. 그렇다면, 또 프라이가 말하고 있는 옵시스의 리듬은 무엇일까.

프라이의 이론이 도식적이라는 것은 그 비판자들은 물론이고 프라이 스스로도 인정한 바이다. 사실 연구를 위해서는 얼마쯤 추상화와 도식화를 피할 수 없음은 당연한 일이다. 그럼에도 도식화가 비판의 근거가 될 수 있는 것은, 그 도식에서 벗어난 사례가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김준오는 그의 유고집 『문학사와 장르』의 「원형적 방법과 다원적 체계 시학」의 둘째 장章에서 "토도로프는 프라이의 장르론을 '이론적 장르theoretical genre'라고 규정하고 그의 이론의 연역적 성격을 강도 높게 비판했다. […] 토도로프에 의하면 장르는 순전히 사변적으로 연역적으로 규정된 이론적 장르의 개념과 구체적 작품을 관찰한 결과로서 귀납적으로 규정되는 '역사적 장르historical genre'라는  두 개념이 있다"는 말로 일면 프라이의 한계를 지적했다.

또한 리듬에 관해서도, 김준오 역시 지적한 바이지만, "운문과 산문의 차이가 그대로 장르의 구분이 될 수 없음은 분명하다"(471쪽)고 말하고 있으면서도 에포스를 결국 운문일 수밖에 없는 '되풀이의 리듬'으로 설명하고 '픽션'을 산문이기가 쉬운 '지속의 리듬/의미의 리듬semantic rhythm'으로 설명하는 것은 그의 이론의 혼란된 면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픽션'이라는 말로 가리키기도 하고 때때로 '기록문학'이라고 일컫기도 하는 "서적을 통해서 독자에게 이야기를 거는 장르"(472쪽)를 '산문'이라고도 바꾸어 쓰고 있음을 보아도 그렇다.


프라이가 도식적이라는 것은, 또다른 뜻으로서 그가 형식주의적이라는 뜻도 될 것 같다. 그가 '서술적 작품'과 '주제적 작품'을 나누고는 있지만 실제로 주제에 대해 깊이 파고드는 모습을 보기는 어렵다. 문학에서 큰 부분을 갖는 상상력과의 관련성은, 원형상징archetype을 다루는 신화와의 관련성에도 불구하고, 프라이의 『비평의 해부』와 그 '장르의 이론'의 논지가 거의 갖지 못하고 있는 부분인 것처럼 보인다. 이것은 표면적으로만 그런 것일까, 실제로도 그런 것일까. 만약 실제로 그런 것이라면 「도전적 서론」에서 우려한 대로 비평은 문학과 관계가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전혀 엉뚱한 말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 네번째 에세이, 「수사비평: 장르의 이론」만을 대상으로 한 글입니다.



덧말> 프라이가 "아리스토텔레스도 『시학』에서 렉시스의 문제에 이르게 될 때, 이 문제는 수사학에 속하는 것이 한층 더 적당하다고 말하고 있다."(467쪽)고 한 부분은 오류인 것 같다. 천병희가 옮긴 『시학』의 6장에서는 "제 3은 사상이다. 사상이란 상황에 따라 해야 할 말과 적당한 말을 할 수 있는 능력이다. 대사에 관한 한, 이 능력은 정치학과 수사학의 연구분야에 속한다."(1450b)고 하고 있으며 19장에서는 "사상에 관해서는 «수사학»에서 말한 바를 여기서도 그대로 받아들이기로 하자. 왜냐하면 사상에 관한 연구는 시학보다는 수사학의 연구분야에 속하기 때문이다."(1456a)라고 하고 있다. 그러므로 아리스토텔레스가 시학보다 수사학에 적합하다고 말한 것은 렉시스가 아니라 디아노이아이다.

프라이가 464쪽에서 밝힌, 아리스토텔레스가 섬긴 비극의 여섯 요소는 뮈토스, 에토스, 디아노이아, 멜로스, 렉시스lexis/言辭, 옵시스인데 천병희는 이것을 플롯, 성격, 사상, 노래, 조사措辭, 장경으로 옮기고 있다. 보다 확실하게 말하자면, 천병희는 그가 옮긴 『시학』 52쪽 본문 아래의 옮긴이 주註에서 "조사의 원어는 λέξις인데 대부분의 영역본에서는 「diction」으로 번역하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구텐베르크 기획(http://www.gutenberg.net/)' 에서 새뮤얼 버틀러Samuel Butler가 영어로 옮긴 Poetics를 찾아봐도 6장의 것은 "Third in order is Thought,--that is, the faculty of saying what is possible and pertinent in given circumstances. In the case of oratory, this is the function of the Political art and of the art of rhetoric"이라고 되어 있고 19장의 것은 "Concerning Thought, we may assume what is said in the Rhetoric, to which inquiry the subject more strictly belongs."라고 되어 있다.


비평의 해부
노스럽 프라이 지음, 임철규 옮김/한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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흼과 검음의 사이엔 무엇이 있을까. 물과 뭍의 사이엔 무엇이 있을까. 아니, 어제와 오늘의 사이엔, 말과 말없음의 사이엔, 있음과 없음의 사이엔, 처음과 끝의 사이엔, 아니아니, 삶과 죽음의 사이엔 무엇이 있을까.

대답할 수 없다, 그렇다면,

검음과 흼의 사이엔 무엇이 있을까. 뭍과 물의 사이엔 무엇이 있을까. 아니, 오늘과 어제의 사이엔, 말없음과 말의 사이엔, 없음과 있음의 사이엔, 끝과 처음의 사이엔, 아니아니, 죽음과 삶의, 사이엔 무엇이 있을까.

말장난. 옳다, 하지만 당신들은 삶의 상징인(,) 혀의 역동적인 움직임을 관찰해본 일이 있는가. 한 번도 시집을 거꾸로 읽은 경험이 없는 사람은 지금 자리에서 일어나 물구나무서기를 해도 좋다.

「99.999999999」(158)는 100이 아니다. 곧, 99.로 한없이 가다가 좀 쉬자는 말이다. 이곳은 말하자면 경계의 땅이다. 레떼의 한가운데라고 생각해도 좋다. 시인은 "무언가를 위해 / 여기에 홀로 남아 있는 사람"을 언급한다. 그 사람은 털을 하나씩 뽑고 있는데, 어쩌면 자신의 생장生長을 뽑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식목일엔 그의 털을 심다."(156) 그러니까 삶과 죽음의 한가운데에서. '나'는 거기서 그 사람과 자신의 거리를 지운다. 그러므로 경계이다.

거리를 지운다, 그것은 종종 사랑을 뜻한다.

그 마을 사람들은 누구나 집 안에서 살면서 집 밖에서 산답니다
모두들 너무나 사랑해서 그래요
그 마을 사람들 살을 보셨어요?
만지면 살짝 지워져요 만지는 사람을 받아들이느라고 그래요
그리곤 다시 생겨나요 다시 주기 위해서요

- 김정란, 「눈 내리는 마을」부분

그러므로 '당신'과 '나' 사이의 경계는 또한 '당신'과 '나'의 일부이기도 하다. 「졸음」(131)에서 시인은 사랑으로 경계를 이해한다. 경계선에 분명히 누군가 있었는데, 금세 사라진다. 아무래도 우리가 쉽게 이해할 수 없는 무슨 이상한 논리가 있는 것일까. 잠깐. 제목이 졸음이다. 데까르뜨 선생님, 우리가 존다면 졸고 '있는' 우리가 '있는' 것은 분명하다고 하겠지만, 우리는 살아 '있는' 것인가요 죽어 '있는' 것인가요. (데까르뜨: "놀-고 '있'네.") 어쨌든 졸음은 깸과 잠의 사이에 있고, 잠은 다시 삶과 죽음의 사이에 있다. 기이한 것은 여기에서도 '털'이 나타난다는 점이다. 숫거웃은 눈꺼풀처럼 얌전을 떨고 있다. '삶'인 성기를 둘러싼, 생장의 상징인 털이 얌전하게 '잠'을 자고 있는 것이다.

그러고보면 성교는 또한 삶과 죽음의 경계에 있는 것이 아니던가. "당신도 아다시피 교수형을 당하는 사람들은 숨이 끊어지는 순간 힘차게 발기해서 사정을 하지." 이것은 조르쥬 바따이유의 소설 『눈 이야기』에 나오는 대사다. 바따이유는 『에로티슴』에서도 '생식과 죽음의 친화성'이라는 장章을 따로 두어 이렇게 언급한다: "시체 앞에서의 공포감은 우리가 배설해 내는 배설물 앞에서의 느낌과 별로 다를 것이 없다. 우리는 외설스러운 성행위 앞에서도 이맛살을 찌푸리며 외면한다. 성기도 배설물을 배설한다. 우리는 그곳을 수치스러운 곳이라고 부르며, 항문도 거기에 포함시킨다. 성 어거스틴은 성기의 외설성과 생식의 기능에 대한 언급에서, '우리는 똥과 오줌 사이에서 태어난다'는 통렬한 말을 한 바 있다."

그러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는 한숨을 내쉬고 괴로워하며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즉시 사방에서 많은 산파들이 달려와서 밑을 만져보고, 나쁜 냄새가 나는 살덩어리를 발견하고는 그것이 아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가 앞에서 밝힌 바와 같이 내장요리를 너무 많이 먹은 탓으로 (여러분이 항문에 붙은 창자라고 부르는) 직장이 늘어나며 그녀에게서 빠져버린 항문이었다.

- 라블레, 『가르강뛰아/빵따그뤼엘』에서

우리는 똥과 오줌 사이에서 태어난다. (너무 걱정할 필요는 없다. 현대의 병원에서는 출산 전에 모두 관장을 시켜준다.)

그런데 시인은 그 죽음 속에서 말言語을 발견한 것 같다. 「졸음」에서 "너에게서 멀어질수록 빗소리에 민감해진다"고 말했던 시인은 보다 앞의 「상상력은 상상한다」(83)에서 "그대 있다 / 빗소리가 처음 시작된 곳에서"라고 노래했었다. 「상상력은 상상한다」에서 드러난 기이한 구강성교口腔性交의 묘사를 죽음을 노래하는 시로 보아도 될까. 이를테면 "성기가 내 혀를 빼앗는다(喝喝)"는 장면은 그런 관점에서 보자면 죽음의 침범 같은 것이 아닐까. 한두 연 앞으로 가보면 좀더 자세하다. "사타구니가 자라난다 / 어서 핥아라 어서 / 핥아 죽여라"(강조는 인용자).

혀langue는 그대로 말이다. "쓰라린 그 말 한마디 / 외치고 싶다"(98). 하지만 말할 수 없다. 그것이 중요하다, 말이란 일종의 금기이기 때문이다. 삶/죽음에 대해 말하는 것은 위험하다. "치명적인 독"(78)을 두려워한다면, 모두 입을 닫자. 이상하게도 시집 중간에 버티고 있는 「自序 : 말할 필요」(119-21)를 보자. "인간의 한계를 넘어서는 어떤 일을 알았다고 해도 그것은 기억할 수 없다. 우리는 그것을 말할 수 없다." 그러나 이 논의의 결론은 정해져 있다. 시인이 시집을 낸 이상, 시인은 이미 무언가를 말한 것이다. 제목부터 '말할 필요'다. "나는 저항한다. 나는 말한다. 참다운 모든 인연들에게 나는 나의 마왕을 빌려주리라."

시인은 아주 통속적으로 말하려 한다. 이를테면 "어린애가 앙앙 / 쥐가 끽끽 / 구두가 삐꺽삐꺽" 하는 소리 말이다. 이렇게도 말한다: "찌그러뜨린 말 / 일러바치는 광기 / 본뜬 익살"로도 말한다. 그것은 벌레같은 말이다. 이 시집에는 벌레와 관련된 시가 몇 있는데, 「벌레에 대한 변호」에는 '벌레'란 "벌레스크(burlesque)의 약어"라는 각주가 붙어 있다.

벌레스크는 원텍스트의 진지한 형식과 어조를 모방하면서 그 원텍스트와 부합하지 않는 하찮은 내용을 삽입하거나 이와는 반대로 원텍스트의 진지한 내용을 모방하면서 그에 걸맞지 않는 천박한 형식을 부여한다. 이로써, 기존의 문학이나 모든 문학장르 나아가 기존의 도덕적 관습까지도 익살스럽게 만들어버리는 대표적인 풍자양식이다.
-
정끝별, 『패러디 시학』

「위악」(118)이라는 시가 있다. 내용으로 보아 '위악僞惡'으로 읽어야 하겠다. "회문(回文)으로 만든 善"이라니, 이게 무슨 소린가. 회문이란 거꾸로 읽어도 같은 문장을 말한다. 시인은 여기서 선과 악의 사이를 '익살스럽게 만들어버린다.' 「행동하는 마음」(150)이나 「단속적인 절망들 간의 실험」(52)과 같은 시에서의 교묘한 바꿔치기를 볼 것이다. 해답은 「다른 계절」(48)에 있다. 그래서 나는 "지금이 어느 때인지 모르겠다 / 이곳에 누가 있는지 모르겠다 // […] 말이 왜 이렇게 말하는지 모르겠다"(11) (나는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할 시의 증명을 해낼 수 있으나, A4용지가 좁아 이 발제에서는 생략한다.)

생각해볼 문제: 왜 시집 제목이 『광기의 다이아몬드』일까에 대해서 생각해도 좋고 죽음에 대해서 생각해도 좋지만, 아무 것도 생각 안 해도 좋다.


광기의 다이아몬드
김록 지음/열림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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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장에서 오랫동안 잠자던 시집을 한 권 꺼내본 적이 있는가. 종이가 바스러질까 조심스럽게 꺼내서, 어딘지 색이 바랜 것 같은 모습에 눈을 껌뻑거린다. 그리고는 촛불 끄는 시늉을 하듯 조용히 입김을 불어본다. 더께앉은 먼지가 날아오르면서 눈을 따갑게 한다. 그렇게 한참을 눈을 비비고 나면, 별 무늬도 없는 장정인데도 제 색을 찾은 시집은, 미켈란젤로의 천정화처럼, 선명하게 윤기가 흐른다. 그러나 그 윤기를 다시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 안에 선연하게 물이 흐른 흔적이 있다.



1


제비가 떠난 다음날 시누대나무 빗자루를 들고
제비집을 헐었다. 흙가루와 함께 알 수 없는
제비가 품다 간 만큼의 먼지와 비듬,
보드랍게 가슴털이 떨어진다. 제비는 어쩌면
떠나기 전에 집을 확인할지 모른다.
마음이 약한 제비는 생각하겠지.
전깃줄에 떼지어 앉아 다수결을 정한 다음날
버리는 것이 빼앗기는 것보다 어려운 줄 아는
제비떼가, 하늘 높이 까맣게 날아간다.

- 「제비집」全文

시인은 곳곳에서 먼지 앉은 시집을 발견한다. 그 위에 얹힌 먼지의 두께는 시집이 견딘 시간의 무게를 의미한다. "만큼"이라는 말이 의비하는 바가 그것이다. 그리고 "품다"나 "가슴털"에서 알 수 있듯이 그 삶은 따뜻한 삶이다. "마음이 약한 제비"가 아마도 미련을 갖고 몇 번이고 둘러본 제비집의 모습이다. 집이란 기억을 담는 장소이고, 이를테면 몽상의 고향이다. 그리고, 기억은 먼지, 비듬, 터럭, 그리고 가루와 같은 입자로 등장한다.

서정주의 「新婦」에서 우리는 이미 이 '입자의 상상력'을 보았다. 우리는 "매운재"가 "초록 재"나 "다홍 재"와 다소 어울리지 않는 듯한 느낌을 때로 받지만, 매운재의 사전적 정의가 "진한 잿물을 내릴 수 있는 독한 재"라는 것을 상기하면 초록 저고리 다홍치마가 견디어야 했던 시간의 무게를 짐작할 수 있을 것이고, 거기서부터 매운재의 말맛을 다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한 마리의 새가 죽어갔다. 한 가지 표정으로
굳어 있다. 응달에 흩어져 있는 새가 남긴 털들
한때는 새털이었던 털들이 흩어지고
털을 잃은 몸이 웅크리고 있다. 털들은 더 넓은 곳으로
흩어지고, 새의 죽음은 더 넓은 곳으로 퍼진다.
오그라든, 틀이 안 맞는 발가락들, 빛을 잃은 발톱들이 남긴
검은 그림자, 높은 곳에서 반들거리던 털들이 흩어지고
새 가슴에 구멍이 뚫렸다. 문을 열고 줄지어, 뿔뿔이 흩어지는
수십 마리의 구더기…… 검은 점을 하나씩 달고…… 날아다니던
구더기, 엉금엉금 기어간다. 너무 오래 갇혀 지냈다.

- 「구더기」全文

하나의 삶이 다만 많은 입자들로 바뀌어버리는 이 놀라운 환원은, 그 흩어짐을 통해서 더욱 세상에 편재하는omniprésent 것이 된다.

그런데 화자話者는 그 제비집을 헐었다고 했다. 제비가 몇 번이고 아쉬워했던, 자신의 몸을 품어주었던 제비집을 화자는 떠난 다음날 헐어버린다. 여기서 그가 빗자루를 들고 제비집을 허는 이유를 설명해야 할까. 그의 빗자루는 흙가루와 먼지와 비듬, 그리고 제비의 가슴털을 위한 것이다. 그는 마음이 약한 제비의 "상처", 그 기억들을 쓸어버린다. 그러나 불행히도 제비집은 사라지지 않는다. 화자가 제비집을 헐어버렸는지 모르지만, 제비의 기억은 화자가 쓸어버린 제비집 속에 남아있다. 다만 흩어질 뿐이다.


나는 매달려 생을 다 허비하고 말 거야
[…]
나를 가두는 것이 있다면
밑으로 끌어내리는 힘이었다. 알 수 없는 끝내 느낄 수도 없는
시간이었다. 나는 천천히 지워져갔다 단단해지면서.

- 「좀약」부분

좀약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흩어지지만 좀약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죽어가는 좀약은 자신의 몸뚱아리를 흩으면서 자신의 몸을 퍼뜨린다. 이 시는 「구더기」와 함께 죽음에 대한 인식을 드러낸 시로서 중요성을 가진다. 시간이 우리를 지운다는 것은 쉽게 인식 가능하지만, 지움으로써 단단해진다는 것은 얼핏 이해하기 힘든 명제다.

봉현이 형은 방위병이었다. 그는 한 마리 개구리였다.
죽은 다음에 강해졌다. 강해지기 위해
죽었다. 입을 닫고 눈을 부릅떴다. 살아 남은 者는
약하다, 그래서 울음 주머니가 필요하다


- 「개구리」부분

「개구리」에서도 그와 같은 역설이 나타나고 있다. "죽은 다음에 강해졌다"는 진술은 그 다음 행의 "입을 닫고 눈을 부릅떴다"는 근거를 딛고 있다. 그는 이제 더이상 울지 않는 것이다. 하지만 좀약은, 좀약은 죽음으로써 다만 사라져 없어지지 않는가. 그러나 오래된 장롱을 열었을 때 흠씬 풍겨오는 좀약 냄새를 생각해보자. 그 좀약은 기화氣化됨으로써 더욱 단단해진 것이 아닌지.

「그 노인」에서는 제비가 노인으로 바뀌어 다시 등장하고 있다. 노인이 살던 집 처마끝의 제비집에 시선을 멈춘 화자는, 거기서 다시 노인의 생전 모습을 그려본다.

봄이 왔다. 담쟁이넝쿨 뻗어나와 그 집
흙벽을 덮는다. 봄에 얼어 죽은 노인이 살던 집
처마끝 제비집, 바람에 검불들 흔들린다. 백발의 노인은
꺼칠한 수염을 달고, 마루 끝에 서서 먼 산을 바라보곤 했다.


- 「그 노인」부분

읽는이들는 그 집이 흙벽으로 되어 있다는 것을 유심히 볼 일이다. 흙벽은 그 이름부터가 옛집古家을 연상시킨다. 게다가 그 입자인 흙을 쌓아 만들었다는 점에서, 우리는 퇴적형의 기억을 생각하게 된다. 노인이 얼어죽자 담쟁이덩굴은 그 기억의 흙벽을 덮어버린다. 덩굴은, 보아뱀처럼, 기억의 흙벽을 자신의 몸 속으로 완전히 소화시킨다.

우리는 시의 마지막에서 그 노인이 평생을 홀아비로 살았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시의 앞부분에 제시된 폐가閉家의 모습으로 봤을 때, 그 노인에게는 후사後嗣가 없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아무도 따지 않는 열매들 붉어져갔다."가 갖는 명백한 생식生殖의 의미도 여기서 풀린다. 그 노인은 어쩌면 스스로를 구더기라고 생각했을까.

구덩이에서 알을 깔 수는 없었다
더러운 生을 물려줄 수는 없었다


- 「구더기의 꿈」부분

노인이 얼어죽었다는 데서, 우리는 안락함을 주지 못하는 집의 존재를 새롭게 깨닫는다. 바슐라르의 행복한 상상력과는 달리, 때로는 집도 아무런 구원이 되지 못한다. 자기 집을 얹고 사는 동물에게도 그것은 마찬가지다. 그들의 집은 그들에게 힘겨움은 주면서도 진정한 휴식은 되지 못한다.

집이 되지 않았다 도피처가 되지도 않았다

- 「달팽이의 꿈」부분




2

시인에게 진정한 휴식은 오로지 죽음으로만 가능하다. 노인의 죽음 혹은 그 죽음의 공간, 그도 아니면 그 죽음의 기억을 덮은 담쟁이덩굴에서 우리는 그것을 볼 수 있다. 또, 하늘나라를 가리킨다 하더라도 어색하지 않은 따뜻한 남쪽나라를 향해 날아간 제비집에서도 그것은 발견된다. 죽음이 휴식이 된다는 것은, 흔히 지적되듯이 물화物化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 물화는, 시인에게는, 결코 어둠에 속한 것이 아니다. 시인이 묘사하는 삶의 모습들이 오히려 어두움에 속한 것이다.

이제 그 눈물 속에서 보낸 밤들을 돌려보낸다
흐르는 강물아, 썩어 흐르는 강물아 그 깊은 밤들은 이제
끝이다
[…]
이제는 추억을 버려야 살 것 같다
[…]
강둑에 앉아 마른
풀을 만지며 흘러가지 않는 구름들을 본다, 전할 말 없느냐


- 「沙金」부분


화자는 눈물 속에서 밤을 보냈다고 고백한다. 흐르는 강물에게 밤의 작별을 고하는 것은, 그 강이 밤과 같은 것이라는 짐작을 가능케 한다. 강물은 추억을, 썩어 흐르는 강물은 썩은 추억을 가리킨다. 앞서 인용했던 「구더기」로 돌아가 다시 생각해보자. 새가 죽고 나서 날아다니던 수십마리의 구더기가 새 가슴의 문을 열고 흩어졌다고 시인은 적고 있다. 사체死體에 파리가 쉬를 슬면 구더기가 나타난다는 인식을 시인은 뒤집고 있는 것이다. 구더기는 살아 있을 때 그 몸 속에 있다가, 새가 죽자 거기서 나와 흩어진다. 시인에게서는 삶과 죽음이 역전되어 있다.

한편 화자는 지금 구름을 동경하고 있다. 그 구름은 이를테면 보들레르의 이방인이 "나는 저 구름을 사랑하오... J'aime les nuages..."라고 고백했던 것과 다를 바가 없다. 다만 이 시의 구름은 고정되어 있다. 흘러가지 않는다. 그 흐르지 않음이 강물과 극명한 대조를 이룬다는 것은 구태여 말할 필요도 없다. 여기서 "전할 말 없느냐"는 의문문의 객체가 강물인지 독자인지 밝히기는 힘들지만, 확실한 것은 화자는 이제 곧 구름으로 지칭되는 다른 곳으로 갈 것이라는 것이다. 그가 가려고 하는 곳은 과거가 없는 곳이다.

몇몇은 사생아를 낳고
과거 없는 곳으로 떠났다.

- 「1985년」부분


과거가 없다면 그곳은 미래도 없을 것이다. 그것은 가능하지 않다. 왜냐하면 이미 그들은 사생아를 낳았기 때문이다. 과거가 없는 곳이란 없으며, 다만 현재화된 과거, 물화된 현재만이 있을 뿐이다. 그런데, 새하얀 구름이 받쳐주는 색채의 감각에 힘입어 그곳은 밝은 곳이다. 밤의 추억들을 버리고 시인은 밝은 곳으로 떠나고자 한다.

나는 언젠가 이 무거운 몸을 버리고
환해질 것이다
그때는 아무것도 아닐
움직이지 않는 내 몸을 덮어줄 먼지들이
내 주위엔 얼마든지 있다

- 「솜공장에서―먼지」부분


죽으면 그 죽음을 덮어줄 수 있다. 그러면 그 먼지 안에서, 담쟁이덩굴 안에서, 그리고 흩어지면서 죽음은 환하게 빛나기 시작한다. 그 죽음은, 앞서 살펴보았듯이, 생식을 부정한다는 면에서 삶에의 부정, 세상에의 부정에 다름 아니다. 시인은 시간을 송두리째 부정하고 싶은 것이다. 죽음 속에서 시간은 더이상 흐르지 않는다.

죽음이란, 단지, 물러가지 않는 어느
튼튼한 벽과 영원히 만나
날개를 가두는 것이라고,

- 「바퀴벌레의 춤」부분

아아아아, 입만 크게 벌리고 있다
갈 곳을 잊고 있다 쓸쓸하고 변하지 않는
공기가 한 줌, 그 크게 벌린 입 안에서
자리를 잡고 있다

- 「죽음, 변하지 않는―노가리」부분

더듬어 무덤 하나를 찾고 있다, 타버린 돌들로 뒤덮인 작은 무덤. 죽음은 늙지 않는 것이리.

- 「판교리2―무덤」부분


그러므로 시인에게 있어 죽음은 없어짐은 아니다. 죽음은 그대로 있음이다. 아, 이제 드러났다. 시인은 변화를 두려워하고 있는 것이다. 시인은 자신을 송두리째 가두고 싶은 것이다. 가엾은 사랑을 빈집에 가두는 몸짓으로, 시인은 자신의 사랑의 기억을 가둔다.

앞으로도 그런 배꽃은 피지 않을
거다. 배꽃은 녹지 않는 눈이다. 내리지 않는 눈이다. 그리고
배꽃은, 배나무집 女子가 안겨주는 작은 혹이다. 눈 한 번
맞추지 못한 女子, 나 혼자 쳐다보고 感電된 그 女子의 먼
눈이다.

- 「배나무집 女子」부분





3

크로노스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신이다. 그는 자식을 낳는 족족 잡아먹었다. 크로노스는 시간이라는 뜻이므로 대개 '모든 것을 집어삼키는 것은 시간'이라는 식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크로노스의 막내 아들인 제우스가 어머니 레토와 함께 크로노스를 속여 죽인 다음, 배를 갈랐더니 거기에서 하데스와 포세이돈을 비롯한 그의 형제·자매들이 뛰쳐나왔다는 사실은 모두 간과하고 있다. 시간은 모든 것을 삼키는 것처럼 보이지만 시간은 그 삼킨 것을 그 안에 보존한다. 시간에 의해 소화된 과거는, 현재로서의 과거이다. 하데스와 포세이돈이 제우스보다 형임에도 제우스가 맏형 노릇을 하게 된 것은, 크로노스의 뱃속에 있었던 그들이 갓난아이의 모습 그대로 있었기 때문이라고 하는 이야기는 그점을 보다 명확하게 해 준다.

먼지의 집에서 먼지 속에 쌓여 있던 모든 것들은, 그러므로 항상 부활의 조짐을 갖고 있다. 그것들은 그곳에 죽어 있음에 틀림없지만, 그럼으로써 보존된 것이다. 이를테면, 「그 노인」은 노인이 평생 홀아비였다는 사실을 알려주며 끝나고는 있지만, 그 바로 앞 연에서 까치가 집을 지었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까치는 텃새라는 점에서나 노인이 죽은 다음 덩굴과 함께 들어왔다는 점에서나 노인의 적자嫡子이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이미 부활의 단초가 보이고 있다. 특히 시집 뒤편에 실린 나무 시편들에서 그런 부활의 모습은 쉽사리 관찰된다.

그가 온다, 밤이 되기 전에 와서
가시가 되는 것이다. 두툼한 가시가
기다림의 가시가, 그대로 있다. 그가
다녀간 흔적들이, 혹 같은 열매들이
맺혀 있다.
 
불 속에서만 타오르는 연기의 냄새를 숨기고,
늙고 병든 여자가 숨어산다.
숨어산 지 오래 되었다.


- 「향나무」全文


열매와 불이 사실은 하나임을 지각하고, 여자가 타오른다는 진술을 잘 생각해보면 이 시는 부활의 시편이 되는 것이다. 향나무, 그 여자는 그를 기다리며 혹 같은 열매를 맺으며 숨어산다. 향나무의 향내를 생각해보자. 그것이야말로 죽음으로 단단해진 좀약의 인식이 아닌가. 그러므로 향나무의 향내야말로 부활이 아닌가 말이다.

참아보거라 참아보거라, 검은 흙에서 싹이 돋아나고
깍지를 풀고 콩이 커진다.

- 「측백나무1」부분


코로 숨쉬면 아픈 기억이 생생하고 입을 벌리면 썩은 이의 아픔이 구역질을 내는 진퇴양난의 상황이다. 어머니는 담에 걸렸다. 그러나 이토록 어려운 시절과 함께 화자는 식물이 가진 생명력에 주목한다. 흙은 세월에 썩은 검은 입자이지만, 거기에서 콩은 더욱 잘 자라는 것이다. 꽃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지만, 열매는 저 혼자 떨어지고, 그 안의 씨는 또다른 생명을 잉태하는 것이다.

나는 죽지 않았다. 나는 자식을 낳았다. 검은 피부의 아버지가
불쌍해졌다.
[…]
나는 죽을 순 없어, 베어져도 남길 것이
있어, 다시 살아나야 할 이유가 있어.
잘린 부분에서 자, 새로 태어나는
싹을, 두 눈 꼭 감고 지켜보아라.

- 「측백나무4」부분


늘 푸른나무인 측백나무는 시간 속에 갖힌 것처럼 늘 같은 색이다. 시간이 덮어버린 탓일까. '나'는 죽지 않고 자식을 낳았다. "검은 피부의 아버지"가 '나' 자신을 지칭한다는 것을 지적하고 나면, 그 고통스러운 삶이 실은 부활의 삶이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우리는 두 눈 꼭 감고 지켜본다.

그 아이 돌아오지 않고 기다렸네
[…]
그 아이 무덤 위에
억센 조선잔디 보름처럼 입히고 싶었네
그 자리 억새 사이 빛 고운
잔디씨, 누런 봉투 가득 훑어
나만 홀로 학교에 갔었네


- 「잔디씨」부분


두 눈 꼭 감고 지켜보았다. 기다려보았다. 그 아이는 돌아오지 않았다. 하긴 그렇다. '나'는 노란 단무지처럼 늘 아팠고, 어머니는 담이 결렸다. 그 아이는 돌아오지 않았다. 그 아이 무덤 위에서 보이는 것은 무엇인가. 거기에는 억센 조선잔디가 있다. 누런 봉투 가득히 그 고운 잔디씨를 받아가는 '나'. '나'가 시인이 된다면 분명히 이 입자의 크로놀로지chronologie를 한 권의 시집으로 써내지 않을까.


먼지의 집
이윤학 지음/문학과지성사


Posted by 엔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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